이 글은 종교문화비평26(2014)에 수록된 특집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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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과거현재미래

공공성에 대해 묻다

규범적 공론장의 형성과 변화를 중심으로

 

 

공공성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세계를 향한 정복의 도정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던 1980년대 초 이후 공공성에 관한 진보적 의제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신학 분야 등에서 화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전후 서구사회가 구현해낸 복지사회적 제도들을 무력화하고 공적인 것을 사적으로 전유하려는 거대자본들의 행보에 문제를 제기하고, 자본 순응적으로 변모하고 있는 국가와 시민에 대한 성찰의 담론이 요청되었던 것이다.[각주:1]

한국에서 공공성에 관한 진보적 담론도 대략 20년의 시차를 두고 비슷한 동기로 확산되었다.[각주:2] 차이가 있다면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서구사회보다 더 광폭했고, 그것은 사회안전망의 부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겠다. 또한 한국의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정치의 상징으로 길이 남은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이나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공적인 것의 해체와 사적인 것의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여 한국에서 공공성의 문제는 복지사회를 지키기 위한 담론이 아니라 복지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담론과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용어의 담론적 계보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공공성 개념에 관한 나의 가설적 설명에서 유의미하다. 우선 이 글을 쓰는 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난점은 공공성(Publicness)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선행연구들에서 너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적용 범위도 너무 광범위해서[각주:3] 그 다양성이 수렴되는 함의를 찾아내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공공성을, ‘의 대립이라는 추상적 틀에서 시작해서, 이 단어들의 어원이나 그 사전적 의미, 그 용어를 사용한 고전문헌을 찾아내는 데서 이야기를 펴는 대신, 담론의 세계에서 왕성하게 회자되고 해석되는 계기가 되는 역사적 맥락에서 시작하는 담론적 계보를 통해 이 용어가 함축하는 의미망을 추론하는 것이다.

한데 신자유주의에 의한 공공적인 것의 잠식이라는 문제틀, 1980년대 유럽적 위기 테제를 공공성의 의제로 다룬 많은 연구들은 1962년 저술된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을 생각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아직 신자유주의의 존재를 상상하지 못했을 시기에 저술된 것임에도, 문화화된 자본주의의 대두와 함께 공공영역의 몰락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정치적 공론장의 재봉건화’),[각주:4] 1980년대적 위기에 대한 이론적 해석의 적절한 선례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하버마스의 핵심어는, 그리고 1980년대적 공공성 논의의 거점은 바로 공론장이라는 공공성의 담론적 맥락이다.[각주:5] 아니 좀 더 단적으로 말하면, 공론장은 공공성 담론 자체와 등가적으로 상호 연계되어 있다. 즉 공공성은 추상적인 항구적 개념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비판적으로 토론과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에서 구성되며 그 장의 구조변동과 서로 긴밀히 얽히면서 변동되는 의사소통적 실체다.

그러나 1980년대 유럽은 하버마스가 위의 책을 저술한 1962년의 지적 토양과는 달랐다. 1960년대 후반을 경유하면서 영·미권에서 진행된 수많은 문화연구들이 하버마스 류의 규범적 공론장 개념[각주:6]으로 포괄되지 않는 무수한 공론장들, 이름 하여 하위공론장(sub-public sphere)[각주:7]에 대한 연구들을 쏟아냈다. 하여 공론장의 논의에서 문화연구적 성찰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현대적 논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가 바로 유럽의 1980년대와 그 이후였다. 또 이 시기는 공론장이 이성적 차원만이 아니라 감정적 차원에서도 작동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대두한 시기다.[각주:8] 그러므로 1980년대 유럽의 담론 지형에는 이러한 공론장의 다중적 문제의식들이 복합적으로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나는 이러한 문제의식들이 함축된 공공성 개념에 대한 가설적 정의를 아래와 같이 시도하고자 한다.

공공성은 사회적으로 동의 혹은 공감하는 집단의식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동의란 이성적 인준을 의미하고, ‘공감이란 감성적 공조를 뜻한다. 이때 동의 혹은 공감이 이루어지는 (field)을 우리는 공론장이라고 부른다. 그 범위는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에서 가족 네트워크까지, 또 오프라인 네트워크에서 온라인 네트워크까지 범위와 형식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한데 이 공론장들은 거의 언제나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경합하면서 난장(亂場)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버마스의 규범적 공론장과는 달리 하위공론장개념이 이미 그런 난장의 실체를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공론장과 관련해서 사회는 이중적이다. 한편에서는 무질서하게 모자이크된 차이들의 담화공동체의 모습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차이들의 난장을 잠정적으로 봉합하고 통합하는 질서로 묶인 규범적 담화공동체의 모습을 띤다. 전자의 양상에 주목하면 수많은 하위공론장 연구들이 포착했던 사회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고, 후자를 강조하면 하버마스적인 규범적 공론장 해석이 개연성을 지닌다.

그런데 공론장의 규범적 통합의 맥락에서 공공선(common goods)이라는 사회적 통합의 준거로 작용하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역사적 구축 과정에서 그 사회의 표준적 도덕의 수호자 집단으로 부상한 교양시민의 집단의식으로서의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다.[각주:9] 이러한 교양시민의 집단의식은 마치 표준어처럼 사회 전체의 가치를 대표하고, 그렇게 전 사회를 대표하게 된 가치는 규범적 공공성의 이성적 인준 체계를 형성한다. 이때 감성적 공조는 종종 이성적인 것의 하위요소로 부가되곤 한다.

그러나 때로는 하위공론장에서 규범적 공공성에 대해 저항적인 이성이 작동하기도 하고, 규범적 이성에서 일탈한 감성적인 공조 현상이 불타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규범적 공공성과는 다른 공공성이 대중 사이에서 소통되기도 한다.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이런 규범적 공공성과 저항의 공공성 혹은 일탈의 공공성은 한국교회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요긴한 실마리가 된다.

아무튼 이 글은 이러한 공공성에 관한 가설적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규범적공공성 문제를 다룬다. 이때 한국교회는 한국의 개신교 교회로 제한하여 사용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실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표상으로서의 교회. 즉 모든 개신교 교회의 실체를 반영하는 용어가 아니라, 대중의 심상에서 집합적으로 인지되는 표상(representation)으로서의 한국교회가 이 글의 분석 대상이다. 그런데, 나의 해석에 따르면, 이 표상으로서의 교회는 시대별로 다르게 나타났다. 하여 한국교회의 표상의 차이를 통한 시기 구분이 가능하다. 나는 이 글에서 표상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세 시기로 나누어서 한국교회의 규범적 공공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1945~1960; (2)1960~1990; (3)‘1990[각주:10] 이후.

하지만 이 글의 초점은 마지막 세 번째 시기의 교회의 규범적 공공성 문제에 있다. 나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세 번째 시기가 현재로 규정된 한국교회의 규범적 공공성을 보여준다. 반면 그 이전의 두 시기는 과거로 규정된 공공성에 관한 시기다. 왜냐하면, 뒤에서 이야기할 것이지만, (1)~(2)는 근대 한국사회의 규범적 공론장의 맹아가 대두하던 시기라면,[각주:11] (3)은 하위공론장들의 도전이 거세지면서 규범적 공론장의 구조변동이 본격화되어, 이전 시기의 지배적 공론장의 질서가 크게 훼손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을 반영하는 시기다.

나는 이 글에서 한국교회가 근대 한국사회의 규범적 공론장을 형성하고 제도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행위자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과거로 묶인 두 시기인 (1)~(2)는 이러한 규범적 공론장의 형성 과정에서 한국교회가 어떻게 관여되어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현재로 묶인 (3)의 시기는 규범적 공론장이 형성되고 그것에 대한 거센 도전과 일탈이 진행되는 가운데, 한국교회의 위기가 이 규범성의 위기와 어떻게 연계되어 나타나는지를 다룰 것이다. 나는 그 형식이 한국사회의 규범성과 연동된 한국교회의 규범적 공공성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음을 이야기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위기는 공론장의 구조적 형성 및 해체의 과정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새로운 표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여 이 글의 결론부에서는 이 새로운 표상에 관한 나의 스케치를 시도할 것인데, 그것은 한국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미래지평의 이야기다.

 

과거

 

식민지 시대 교회의 공공성 문제는 중요한 연구 과제다. , 실제로 연구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북한교회의 공공성도 흥미롭다. 하지만 이 글은 한국교회의 공공성의 시공간적 범주를 1945년 이후 남한 지역으로 한정할 것이다. 여기서 한국이라는 언표가 함축하는 자주적 근대국가, 곧 대한민국의 탄생 시기인 1948년을 나는 유의미한 시간적 요소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남한사회와 한국교회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정부의 등장 이전과 이후는 그다지 중요한 변화를 수반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군정기의 맥아더 사령부와 1948년 이후 이승만 정부는 근본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관점에서 개신교를 정치화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하여 이 글에서는 1945년을 기점으로 하는 한국교회의 공공성을 이야기할 것인데, 이 시기에 한국사회는 지배적 공론장의 변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발전하여 규범적 공론장으로 제도화되는 첫 걸음을 내딛었다.

 

(1) 파괴적 증오의 신앙과 지배적 공론장의 변동[각주:12]

미군정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46년 당시 남한사회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합한 좌익 성향이 전체의 77%에 달했다.[각주:13] 물론 아직 해방 이후 남한사회의 규범적 공론장이 형성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이는 동시대의 공론장에서 해방, 친일청산, 통일, 계급 같은 단어들을 중심으로 하는 의미망이 빠르게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할 것이다.[각주:14]

반면 남한사회에는 소수의 극우반공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 세력이 개신교였다. 특히 월남 개신교 신자들은 동시대 남한에서 가장 대표적인 반공주의자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서북출신 장로교도들인데, 북한에서 공산주의 세력과의 체제경쟁에서 패배하고 집중적인 정치, 사회적 보복을 당하게 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갖게 된 자들이었다.[각주:15]

당시 남한에 진주한, 맥아더 휘하의 미군 장교들은 일본, 대만, 필리핀, 그리고 남한을 개신교 반공주의 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다.[각주:16] 그것은 개신교화가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아내는 최선의 방어기지라고 보았기 때문이다.[각주:17] 그런 점에서 좌편향이 너무 강한 남한 사회를 개조할 파트너의 하나로 서북 출신 개신교 월남자들이 지목되었음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욱이 서북지역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지역이었고, 이 지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이들은 과격한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무장한 맥코믹 대학 출신 선교사들이었기에, 누구보다도 친미 성향이 강렬하였다.[각주:18]

미군정 당국과 남한의 우익 정치지도자들의 공공연한 비호 아래 이들 월남자 개신교 신자들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향한 무분별한 백색테러를 자행했다.[각주:19] 그들은 남한 개신교 신자의 50~70%에 달할 만큼 수가 많았고 대도시에 결집해 있어 집단적으로 행동하기에 적합했다. 또 상대적으로 적극 신자층이 많았고, 청년과 남성의 비율이 매우 높았기에 더 쉽게 공격적 행동의 가해자가 될 수 있었다.[각주:20]

이러한 개신교 신자들 중심의 무자비한 폭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1950년을 경유하면서 남한사회는 절대적 반공주의 사회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배적 공론장은 멸공’, ‘친미’, ‘반북한같은 의미의 계열들로 뒤덮이게 되었다. 물론 아직 규범적 공론장이 형성되기에는 소통을 위한 사회적 제도들이 너무 미비했다. 이 지배적 공론장을 작동시키는 요소는 대화와 소통의 기조가 아니라 증오와 공포의 감정이었다.

교회는 이러한 지배적 공론장의 주요 의미망의 변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회도 변화했다. 그 변화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교회의 서북화. 즉 서북계 장로교적 신앙제도의 프레임 속으로 모든 교회들이 흡수되어 간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서북화란 근본주의적 신앙의 보편화를 의미한다.[각주:21] 이는 권위주의적이며, (이념적, 문화적, 종교적, 성적으로) 배타주의적이고, 증오의 정치에 의해 그것이 행동주의적으로 작동되는 구조를 갖는다. 그러므로 이 시기 교회라는 표상은 반공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이미 1930년대부터 조금씩 그렇게 드러나고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계급의 질서를 넘어서고 성의 질서를 넘어서며 국가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문화의 상징으로 하위공론장을 뜨겁게 달구며 지배적 질서에 도전하는 종교라는 뉘앙스가 있었다. 반면 1950년 어간의 서북화되는 교회를 보면서 사람들은 그러한 전통적 질서에 대해 도전하는 종교를 떠올릴 수 없었다. 오히려 지배체제의 일원처럼 보였고, 공격적 반공주의의 화신처럼 여겨졌다.

 

(2) 생산적 증오의 신앙과 규범적 공론장의 탄생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그리스도교 밖에서 증오의 정치를 새롭게 구현하는 신앙운동들이 도처에서 나타났다. 구마자(驅魔者)형 부흥사들이 주도하는 이른바 기도원운동이다. 이 한국적 기도원에서는, 명상과 침묵을 기조로 하는 서양의 기도원과는 달리, 맹렬한 집단적 열광이 넘치는 가운데 몸과 정신의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이 치유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많은 이들이 엑스터시적 환각 작용 속에서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기도원집회가 특정 장소에 고정되지 않고 전국의 마을과 도시를 돌며, 공터에서 혹은 교회당에서 벌어졌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들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반공주의적 증오를 파괴가 아닌 생산적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새로운 신앙의 개척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 아니 악마에 대한 증오심을 모아 생명의 기운으로 반전시킨 것이고, 그 절정에 치유가 있었다. 전후(戰後) 몸과 정신의 질병에 들린 이가 넘쳐나는데 보건의료체계는 바닥까지 무너져 내린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의 대중을 향해 그들은 치유의 신앙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1950년대 하위공론장들의 한 현상이었던 이 기도원운동과 유사한 현상이 1960년대 이후에는 국가와 교회에서 지배적 공론장을 무대로 하여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즉 지난 10여년의 증오의 정치를 파괴의 동력이 아닌 생산의 동력으로 전환시켜 국가와 국민의 발전 혹은 교회와 성도의 성장을 실현시키려는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지배적 공론장의 형성 원리로 물리적 폭력이 상대적으로 억제되고 규율의 장치들이 속속 제도화되었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의 간증행위가 구연되는 농촌의 집회들,[각주:22] 전 국민 의무교육의 도정에 접어든 국민학교,[각주:23] 그리고 전국적 매스미디어로 부상한 라디오와 TV[각주:24] 등이 대표적인 규율의 장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외형상 지배적 공론장은 행위자간의 의사소통을 통해 규범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행위자들의 주체성과 자발성이 덜 성숙하고 획일적인 규율과 감시의 장치들에 의해 권위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 특성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규범적 공론장의 탄생으로 해석할 수는 없고 오히려 과시적 공론장의 일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25]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규율의 장치들은 규범적 공론장이 제도화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이 시기의 지배적 공론장에서 반공주의는 기저에 깔려 있는 핵심적 요소다. 만약 시민층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전제로 한다면 반공주의는 규범성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는 국가건설의 동력으로 전환되었다. 국민 개개인은 조국근대화의 역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공론장이 추구하는 규범성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선진입국과 풍요롭고 행복한 삶이라는 유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약속과 불가분 얽혀 있다.

이러한 전환은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에 의해 추진되었다. 여기서 체제의 전환과 새 정권의 조합이 필연적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알다시피 국제정세의 변화가 저변에 깔려 있고 그런 맥락에서 장면 정권이 기획한 밑그림을 거의 그대로 승계하여 발전체제로의 전환을 이룩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러므로 군사정권만이 유일한 발전체제의 장본인일 수 있다는 주장은 무모해 보인다. 하지만 조합이 달라지면 양상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전개된 역사는 발전체제와 군사정권의 조합을 통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정권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구현해낸 과시적 공론장은 군사정권의 색깔이 농후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과시적인 지배적 공론장의 배타주의적 권위주의 담론의 양식이다. 과시적 공론장은 하위공론장의 난장(亂場)스런 담론 현상을 포용하지 않으며 나아가 규범의 외부에 대해 가혹하다. 많은 이들이 인정하듯, 그 배타적 권위주의의 정도는 거의 병영(兵營)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므로 이것은 1인의 카리스마적인 절대권력을 중심으로 구축된 군사정권과 매우 닮았다. 그런 점에서 앞 시기의 배타적 권위주의를 승계하지만 훨씬 더 독재 친화적이다.

한편 이 시기에 교회도 부흥사들의 기도원운동을 교회화하는 전환이 본격화되었다. 즉 교회의 신앙 양식에서 생산적 증오의 양식이 적극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데 여기서도 그 주역이 바뀌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것은 월남자 출신의 이데올로기적 투사가 아니라 부흥사 출신의 목사들이었다. 그들은, 1950년대의 부흥사들이 질병의 치유에 집중했던 것을 확장해서 건강과 풍요라는 두 요소를 신앙과 직결시켰다. 이제 신앙은 건강의 축복과 물질의 축복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삼박자 축복의 담론이 된 것이다.

이런 교회운동을 이끌었던 부흥사 목사들은 구마사이자 축복의 사도였다. 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자질은 초월적인 은사(카리스마)를 수행할 능력이고, 그것은 이들이 법과 질서를 넘어서는 은사자, 곧 카리스마적 지도자임을 의미했다. 이 점에서 이들 지도자들은 서북화된 교회의 전형성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서북화된 교회는 이데올로기적 투사형 지도자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요컨대 부흥사형 목사들은 1인의 독점적 권력을 교회에서 구현했고, 그렇게 독점한 신앙자원을 성장에 집중 투여한 결과 그들의 교회는 대대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국가도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국가발전을 위해 국민을 총동원하였고,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하여 교회와 국가는 이 시기 유사한 담론적 틀을 통해 성공을 추구했고 실현된 성공을 해석했다. 하여 양자는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 중심의 배타적 권위주의와 결합된 성공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시기에 제도화된 공론장은 이러한 성공 모델의 양식을 권위주의적 규율성과 잘 조화시켰다. 하여 이 규율적인 과시적 공론장의 질서에 포획된 다수의 국민은 성공을 무조건 지지했다. 왜냐면 성공은 국가의 유토피아적 미래를 향한 도정이고 하느님나라 축복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을 구현해낸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를 중심으로 하는 총화단결은 성공을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여기서 이 지배적인 과시적 공론장이 감정적 동일시의 대상으로 미국을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국가의 유토피아적 미래와 가장 가까운 현실의 국가이며 하느님나라 축복의 그림자가 가장 원형적으로 실행된 나라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미국을 선망하며 현실의 삶을 규율한다.

그렇다면 가장 빠른 성공의 실례이자 반공주의적이며 친미주의적 공간인 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든 아니든, 한번쯤 일원이 되고 싶어 하는 종교가 되었다. 더욱이 과거 1950년대 어간에 이데올로기적 전쟁에 적극 참여하던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교회 활동들이 이제는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반공 구호 비슷한 기도와 군가 비슷한 찬송, 그것을 통해 분노를 쏟아 붓게 하는 과거의 집회 풍경 대신에, 축복의 기쁨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노래와 댄스가 결합된 친교행위가 과시되었다. 또 교회가 성장해갈수록 연주, 디스플레이, 건축 등의 영역이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이미지로 부각되었다. 게다가 학교교육 외부에서 글쓰기, 노래하기, 연기하기, 지도력 수행하기 등을 계발하는, 당시로선 거의 유일한 청소년의 문화적 소통의 장으로 활용되는 교회학교의 모습이 많은 청소년들의 심상에 새겨졌다. 하여 이 시기 표상으로서의 교회는 그 이념성이 빠르게 소거되고 하나의 모던 공간으로 기억되었다.[각주:26]

그런 점에서 교회는 많은 이들의 심상에서 공공성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한편에서는 성장의 이데올로기, 그것의 실현을 약속하는 종교로서 해석되었기에 공공적인 종교로 이해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참신한 기쁨과 활력이 있는 종교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는 점에서 대중의 감정 속에서 그 공공성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이 이 시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군사정권이 하위공론장의 생성을 그토록 막으려 하였지만, 규범에 도전하고 일탈하는 공론장의 등장과 도발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도전, 전통의 복원을 추구하는 민족운동적 실천, 전후 세대 청년들의 다원적 문화를 향한 일탈적 행위들이 도처에서 출몰했다. 이 하위공론장들의 담론들은 거의 대부분 교회와 갈등적이었다. 하여, 아직은 커다란 흐름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 시대의 지배적 공공성을 대변하는 교회에 대한 도전은 소수자의 목소리로 남아 있었다.

 

현재

 

그런데 1990년을 전후로 하는 시기의 교회는, 그 성공의 도정은 현저히 꺾였다. 무엇보다도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와 선망, 이성적 인준과 감정적 공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1990년 어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교회가 달라진 것일까 아니면 사회가 달라진 것일까?

여기서 이제까지 그다지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교회의 표상, 그 정체에 대해 좀 더 깊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960~1990년까지 교회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대성장을 구가했다. 1960년에 개신교 신자 수는 인구의 2%, 62만 명에 불과했는데, 1995년에는 인구의 19.7%876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대형교회들이 탄생했다. 주일 대예배에 참석하는 성인 교인수 2천 명이 넘는 교회를 대형교회로 보는 미국의 규정에 따르면, 세계에서 대형교회가 제일 많은 미국에서 전체 교회 가운데 대형교회의 비율은 0.005~0.007% 수준이지만 한국은 그보다 240~340배나 높은 수치인 1.7%나 된다. 이것을 교회수로 환산하면 한국에서 대형교회의 수는 2004년 현재 880개쯤 된다. 반면 미자립교회의 비율은 전체 교회의 50% 안팎이나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각주:27]

한데 과반수의 교회가 미자립교회이고 절대다수가 소형교회이며 대형교회는 불과 1.7%에 지나지 않음에도, 거의 모든 교회들은 대형교회적 신앙 제도와 관행, 그리고 공간 양식에 따라 구성되어 있으며, 또 거의 모두가 대형교회가 되고자 하고 대형교회나 가질 법한 비전을 추구한다. 하여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는 대형교회이거나 짝퉁대형교회인 셈이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무수한 분열을 겪었다. 하지만 그 많은 교파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교파들 간에는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유사성이 나타난다. 이것은 두 범주의 통합의 결과였다. 하나는, 앞장에서 이야기한 바, 1950년대 어간의 교회의 서북화인데, 이는 거의 모든 교파를 장로교적 양식으로 통합시켰고, 근본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 신앙으로 수렴되게 했다는 것을 지칭한다.[각주:28] 그리고 다른 하나는, 1960~1990, 대성장의 시기에 형성된 대형교회적 유사성이다. 이 유사성의 핵심은 성장지상주의적인 대형교회적 제도에 있다.

그러나 대형교회와 짝퉁 대형교회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의 존재에 관한 것이다.[각주:29] 대형교회는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성장을 실현하는 주축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모든 자원을 독점하는 자이다. 대형교회의 경우, 1세대에 관한 한, 이러한 리더십은 거의 예외 없다. 단지 그가 계몽군주형 지도자인지 독재자형 지도자인지만 다를 뿐이다. 반면 대형교회가 되지 못한, 그러나 늘 대형교회를 꿈꾸는 중소형의 짝퉁 대형교회들은 소수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은 카리스마적 리더가 부재하다. 자원은 배분되어 있고, 많은 경우 목사들은 특권적인 평신도 지도자들과 역할 분담을 통해 제한적 지도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니 자원을 독점하는 1인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전제한 대형교회적 신앙제도는 대부분의 짝퉁 대형교회에는 맞지 않는 옷과 같다. 하지만 지난 시기 사람들의 기억 속에 들어 있는 표상으로서의 교회는 이 차이가 고려되지 않은 교회, 곧 대형교회적 교회다.

그런데 ‘1990년 어간’, 교회로서는 결코 맞이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 도래했다. 도래한 이 시간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다음 두 요소가 중요한 변화의 고리가 된다. 하나는 민주화이고 다른 하나는 소비사회화다. 민주화는 국민 개개인에게 주권의 담지자라는 자의식을 불어넣어 주는 사회적 정치적 제도화를 말한다. 또 소비사회화는 인간 개개인의 취향의 주권에 관한 사회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제도화를 수반한다. 이 양자가 결합되어 1990년 어간의 시간성을 구성했다.

이것은 지배적 공론장에서 국가의 검열과 감시가 줄고, 시민이 개입하여 규범적 담론을 만들어가는 소통의 장, 즉 규범적 공론장이 본격 대두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여 여기서는 국가를 포함한 여러 사회적 자원을 과점한 개인과 집단이 이합집산하면서 헤게모니 투쟁을 벌이게 되었고, 그 속에서 규범적 가치로서 인준된 공공선이 대두하게 된다. 또 하위공론장들이 무수히 탄생했고, 그 중 많은 공론장은 감시와 검열의 시선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저항과 일탈의 담론을 왕성하게 펼쳤으며, 다른 일부 공론장은 탄압을 가로지르면서 자유를 향한 담론 투쟁의 깃발을 높이 세웠다.

이러한 다양한 공론장 속에서 자기 주권의 주체가 된 다수의 사람들은 개개인의 주권을 잠식했던 영웅의 시대를 과거의 것으로 규정짓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틀의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각주:30] 하여 카리스마적 리더를 중심으로 하는 권위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인 성장 모델의 시대는 현재의 시간에서 강제 퇴거되어 과거의 시간으로 추방당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러한 영웅주의가 작동되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낡은, 퇴락한 곳으로 간주되었다.

가령 정치 영역에서 1인의 독재자는 역사의 저편으로 강제퇴거되었고, 권위주의 시대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3이라는 다른 영웅들에 관한 담론과 제도도 이제 비판의 과녁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부장적 아버지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권위적 스승사랑의 매를 신뢰하는 이는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대형교회에 대해 사람들은 따가운 시선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데 문제는 사람들에 심상에 새겨진 교회의 표상이 대형교회와 짝퉁 대형교회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람들에겐 똑 같은 교회였다. 말했듯이 짝퉁 대형교회 가운데 대다수는 카리스마적 리더가 부재했다. 그 교회들의 다수는 목사의 지도력이 특권적 평신도의 지도력에 압도되고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모든 교회는 목사의 비정상적인 독점적 권위가 횡행하는 곳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모던 공간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아니 교회는 쇠락한 낡은 공간이었다. 이는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수가 크게 줄고 교회를 떠나거나 충성도가 이완된 사람들이 현저히 늘어나는 현상을 수반한다. 또 교회나 교회가 운영하는 기관들에 대한 시민사회의 의심과 비판이 크게 늘어나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교회나 목사 혹은 엘리트 교인의 추문에 대해 사회적 지탄이 증폭되었고, 교회의 사회적 행위들에 대해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하는 일도 크게 늘었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가 공공성을 지니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발굴하고 분석하며 비판해 마지않았다. 또 사람들은 다른 종단의 비슷한 문제적 행위보다 교회의 문제적 행위를 더 심각한 공공성의 파탄 현상으로 보았다. 하여 교회는 사람들의 이성과 감성에서 공공성을 상실한 종교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에 더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대형교회가 아니라 짝퉁 대형교회였다. 여전히 카리스마적 리더를 추종하는 이들은 대형교회 언저리에서 종교적 열정을 다해 충성심을 표현했고, 그 외에도 대형교회는 막대한 자원을 동원해서 위기를 완충하는 장치들을 구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개의 짝퉁 대형교회들은, 그런 대형교회의 전략을 모방하곤 했음에도, 더 심각한 위기의 수렁에 휘말려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장 처음에 던진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 큰 틀에서 교회는 1990년 이전과 이후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1990년 어간이라는 시간성은 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사람들의 집단 인식에서 중대한 변화의 계기를 담고 있다. 그것은 권위주의배타주의라는 지난 1945~1990년까지 계속된 한국교회의 거대한 유사성의 핵심적 요소가 이제 더 이상 규범적 공론장에서 수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2천년 어간에 본격적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광풍에 국가와 사회의 특권적 엘리트들은 이제까지 공공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들 하나하나를 사적인 것으로 바꿔치기 하려 했다. 사람들은 점차 그러한 사사화가 자신들의 존재의 안전에 얼마나 심각한 위해가 되는지를 절감하게 되었다. 하여 사사화에 대한 대중의 저항은 규범적 공론장과 하위공론장에서 치열하게 나타났다. 이는 한국에서도 공공성 담론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1인 혹은 소수의 엘리트가 시민 혹은 대중의 이익을 대표해서 어떤 제도를 구축하는 것, 시급하다는 이유로 충분한 공론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수행되는 이런 일은 비판적 공론장에서 가장 문제적으로 다뤄진다. 한데 대형교회의 1인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권위주의는 바로 그런 문제를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런 점이 오늘 교회에 대해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공공성 문제의 요체다. 하여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있음으로서 벌어지는 교회의 모든 행보에 대해 반공공성의 혐의가 부과되는 것이다.

 

미래

 

이제 우리는 1990년 어간을 경우하면서 교회가 공공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것은 ‘1인의 특권적인 카리스마적 리더를 정점으로 하는 배타적 권위주의의 청산을 요청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주로 대형교회의 문제다. 대부분의 짝퉁 대형교회에서는 배타적 권위주의를 추동하는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부재하다. 그럼에도 대형교회를 선망하고 모방함으로써 짝퉁 대형교회는 대형교회보다 더 큰 위기에 빠졌다.

한데 대형교회에서 이러한 청산 작업은 너무나 어렵고 요원하다. 수천 아니 수만 명이 모이는 거대한 규모의 집합체임에도 소통의 장치가 거의 발전하지 않고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의 초법적 권력에 의지하여 작동되어 왔기에, 그것을 가로지르는 수평적 소통의 장치를 마련하는 일은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들 것이다. 하여 대형교회들은 계속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에게 모든 것을 계속 위임하거나 그것에 준하는 권위주의적 제도에 위임하는 것과 같은 좀 더 손쉬운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대형교회는 탈권위주의로의 행보보다는 재권위주의적 방안을 모색할 가능성이 더 크다.[각주:31]

이런 교회는 여전히 규범적 공론장을 강제하는 권력을 작동시키기를 원할 것이고, 지배적 공론장과 하위공론장에서 제기되는 무수한 도전과 일탈에 대해 억압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최근 일부 대형교회의 정관 개정 시도는 카리스마적 리더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공론장을 억압하는 법제도적 권력으로 위기를 대처하려는 행보로 해석된다.[각주:32]

하여 나는, 대형교회가 아닌, ‘작은교회에 주목한다. ‘작은교회란 규모가 작을 뿐 아니라 탈성장주의를 지향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짝퉁 대형교회와 대조적이다. 비록 작은교회 현상에 포함시킬 수 있는 교회들은 아직 절대소수에 불과하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고 계속 늘고 있는 작은교회들의 실험들은 공공성의 관점에서 매우 유의미하다.

가령, 작은교회가 교회의 제도와 담론에서 성장주의를 포기하고자 하면, 그 비움을 채울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실제로 많은 작은교회는 그 자리에 복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을 넣었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경계를 해체하는 다양한 예전(禮典)과 비공식 모임을 만들었으며, 안과 밖, 신자와 비신자, 타신자 간의 경계를 허물었고,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의 공감과 소통의 자리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시도와 실험들은 민주화 이후 시대 한국사회 공론장에서 그 공공성을 인준받기에 마땅한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대형교회라는 표상이 사회적 인식에서 부적절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이러한 작은교회는 아직 극소수다. 개신교 내부에서 작은교회 현상은 주변적 현상에 지나지 않고, 이에 대한 신학적 이름 짓기조차 거의 미미하다. 하지만 작은교회는 민주화 이후 시대의 규범적 공론장의 구조변동 과정에 끼어들 만한 자격을 갖춘, 새로운 교회의 표상이다. 더욱이 일부 작은교회들에서 우리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의 하위공론장이 형성되고 또한 여러 하위공론장들과의 네트워크에 깊숙이 얽혀 있다는 점은, 우리사회에서 하위공론장의 열악한 여건을 감안하면, 규범적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회적 단위로 작은교회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과거 민중교회가 양적으로 절대소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비판적 공론장과 국제적인 기독교의 규범적 공론장에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표상으로 소중하게 기억되었던 것처럼, 작은교회가 새로운 대표표상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면, 개신교가 한국사회의 공공성의 형성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종교의 하나로 재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1. 신진욱, 2009 여름, 〈공공성과 한국사회〉, 《시민과세계》 11, 19~22쪽; 고원, 2009 여름, 〈정치로서의 공공성과 한국 민주주의의 쇄신〉, 《기억과 전망》 20, 320쪽 참조. 한편 신학계에서도 1984년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서 설립된 공공문제연구소(Center for Toeology and Public Issues)는 대처정부에 의해 자행되는 복지의 형해화에 대한 신학적 비판과 대응의 과제를 수행했고, 이것이 영국 공공신학의 기원이 되었다. William Myatt, “Public Theology and 'The Fragment'―Duncan Forrester, David Tracy, and Walter Benjamin”, Public Theology 8, 2014, p. 87; William F. Storrar, “Scottish Civil Society and Devolution―The New Case for Ronald Preston's Defence of Middle Axioms”, Studies in Christian Ethics 17, August 2004, pp. 37~46. [본문으로]
  2. 홍성태는 《한겨레신문》 기사에서 ‘공공성’의 사용 빈도와 학위논문에서 이 단어가 핵심어로 사용된 빈도를 근거로 한국에서 ‘공공성’은 ‘21세기의 개념’이라고 말한다. 홍성태, 2008 상반기, 〈시민적 공공성과 한국 사회의 발전〉,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13, 74쪽. [본문으로]
  3. 백완기, 2007 여름 〈한국행정과 공공성〉, 《한국사회와 행정연구》 18, 1쪽 참조. [본문으로]
  4. 김재현, 1994 겨울, 〈위르겐 하버마스〉, 《이론》 10, 68쪽. [본문으로]
  5. 1989년 하버마스의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의 영역본인 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 Cambridge: The MIT Press이 출간되던 해에 벌어진 국제학술대회는 ‘공론장’에 대한 동시대적인 문제제기와 재해석들이 시도되고 있다. 이 논문들을 묶어낸 책인 Craig J. Calhoun, ed., Habermas and the Public Sphere, Cambridge: The MIT Press, 1992 참조. [본문으로]
  6. 이 글에서 내가 사용하는 ‘규범적 공론장’이라는 용어는 하버마스가 이상적 지평에서 사용하는 ‘부르주아 공론장’(Bourgeois Public Sphere)을 번안한 것이다. 그것은 이상적 지평이 아닌 현실의 담론에서 부르주아 공론장의 역할은 ‘규범의 합의’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범의 합의는 시민(부르주아)적 의사소통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비시민을 담론화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담론적 폭력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하위공론장은 이 규범성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기도 하고 일탈하기도 하는 담론을 생산하고 유통한다. [본문으로]
  7. Nancy Fraser, “Rethinking the PublicSphere : A Contribution to the Crtitique of Actually Exiting Democracy”, Craig J. Calhoun, ed., Ibid, pp. 109~142 참조. [본문으로]
  8. 김예란, 2010 가을, 〈감성공론장―여성 커뮤니티, 느끼고 말하고 행하다〉, 《언론과 사회》 18, 150~154쪽 참조. [본문으로]
  9. 송호근, 2011.5, 〈공론장의 역사적 형성과정―왜 우리는 불통사회인가〉, 《한국언론학회 심포지움 및 세미나 자료집》, 34~35쪽 참조. [본문으로]
  10. 여기서 ‘1990년’은 정확히 표현하면 ‘1990년 어간’(around 1990)이다. ‘1990년 어간’이 한국교회의 전개를 시기 구분하는 결정적인 경계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Jin-ho Kim, Autumn 2012, “The Political Empowerment of Korean Protestantism since around 1990”, Korea Journal 52, pp. 64~90 참조. [본문으로]
  11. 그러므로 이 시기는 규범적 공공성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면 이 두 시기 중 첫 번째 주로 물리적 폭력에 의해 지배적인 공론장이 만들어졌고, 두 번째 시기는 주로 검열과 감시에 의존해서 지배적인 공론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국가 대 시민, 시민 대 시민, 시민 대 비시민 간의 경합과 담합을 통해 규범적인 것이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두 번째 시기의 지배적 공론장을 일종의 사이비 공론장으로서의 ‘과시적 공론장’(publicity of representation)이라고 명명한다. 이것은 마치 유럽의 중세 봉건사회처럼 자발적 주체인 시민이 형성되기 전의 탈주체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성격의 공론장을 가리킨다. 나는 이 글에서 이러한 과시성이 규율과 감시의 기재가 잘 작동됨으로써 지배적 공론장이 일종의 규범적 합의에 이른 것처럼 보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본문으로]
  12. 이하의 전개에서 중요하게 활용되는 핵심어인 ‘파괴적 증오’과 ‘생산적 증오’에 관해서는 김진호, 2012, 《시민K, 교회를 나가다》, 현암사, 49~70쪽에 의존하고 있다. [본문으로]
  13. 강정구, 2002 봄, 〈한국 보수주의 체제 확립의 역사적 기원―해방공간을 중심으로〉, 《진보평론》 11, 20쪽. [본문으로]
  14. 최미진, 2012 여름,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서설의 위상(1)〉, 《대중서사연구》 27, 7~36쪽 참조. [본문으로]
  15. 강인철, 2007,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도서출판 중심, 514~515쪽 [본문으로]
  16. 이상호, 2009 겨울, 〈전후 동아시아 보수주의의 산파 맥아더〉, 《황해문화》 65, 267쪽. [본문으로]
  17. 최재건, 2004, 〈맥아더 장군의 전후 일본에서의 종교정책과 그것이 한국에 끼친 영향〉, 《성결교회와 신학》 12, 56~57쪽. [본문으로]
  18. 김상태, 1998 겨울,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엘리트의 형성〉, 《역사비평》 45; 이재근, 2011 가을, 〈매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와 한국 복음주의 장로교회의 형성, 1888~1939〉, 《한국기독교와 역사》 35 참조. [본문으로]
  19. 송효정, 2012 겨울, 〈해방기 감성 정치와 폭력 재현―해방기 단편소설에 나타난 공간 미디어와 백색테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16, 332~339쪽 참조. [본문으로]
  20. 김진호, 2014 출간예정,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와 증오의 정치학〉, 《한국사회의 극우주의》(가제) 참조. [본문으로]
  21. 즉 ‘교회의 서북화’란 표현은, 대다수의 교회가 서북인사들에 의해 점거되었다든가 거의 모든 교단의 권력을 서북계가 장악했다든가 하는 의미가 아니라, 서북계 장로교의 제도가 대다수 교단들의 표본이 되었고, 근본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편향성이 강한 서북계 장로교와 유사한 이념적 신앙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22. 한도현, 2010 겨울,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서 마을 지도자들의 경험세계―남성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88, 296~300쪽 참조. [본문으로]
  23. 오성철, 2003 겨울, 〈박정희의 국가주의 교육론과 경제성장〉, 《역사문제연구》 11, 61~63쪽 참조. [본문으로]
  24. 이영미, 2012 가을, 〈텔레비전 코미디 드라마의 형성―1960년대 후반 유호의 연속극을 중심으로〉, 《한국극예술연구》 37 참조. [본문으로]
  25. 문병훈, 1996 가을, 〈하버마스의 규범적 커뮤니케이션 모델과 그 언론학적 수용〉, 《한국언론학보》 38, 257쪽 [본문으로]
  26. 이 내용은 앞의 주20)에서 언급한, 곧 출간된 나의 글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와 증오의 정치학〉에서 논한 것이다. [본문으로]
  27. 김진호, 〈‘작은교회’가 그리스도교의 미래다―한국 개신교의 경험에서 찾은 가능성〉, 154~156쪽 in 오강남 성소은 (엮음), 2013, 《종교너머, 아하!―기성 종교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판미동. 한데 한국 대형교회의 숫자에 대하여 이 글에서는 “1천 개에 육박한다”고 추산했는데(정확한 추산치는 998개), 이것은 한국 개신교 교회 숫자의 가파른 증가 추세를 반영하지 못한 추산이어서 이후 다른 글에서 880개로 수정하였다. 김진호, 2014. 05+06, 〈교회의 공공성 회복의 길, 작은교회론―대형교회 정관 개정 논란에 즈음하여〉, 《공동선》, 116, 77쪽. [본문으로]
  28. 강인철, 2007,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62~72쪽 참조. [본문으로]
  29. 박종현, 2008.04, 〈한국 오순절 운동의 영성―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성과 성장에 대한 시대사적 회고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식》 82, 10~14쪽 참조. [본문으로]
  30. 설원태, 2012.02, 〈역대 한미대통령 묘사프레임 비교분석―뉴욕타임스와 조선일보의 한미정상회담 보도를 중심으로〉, 《언론정보연구》 49/1, 107~144쪽. 이 논문은 1948~2009년까지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뉴욕타임즈》와 《조선일보》의 양국 대통령에 대한 묘사를 연구한 것인데, 흥미롭게도 이 두 매체는 공히 ‘영웅적 프레임’에서 ‘동격적 프레임’으로 묘사가 변화했다고 한다. 특히 한국의 민주화는 그러한 변화의 결정적 계기다. 이는 담론적으로 민주화와 ‘영웅의 소멸’이 상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본문으로]
  31. 이와 비슷한 양상이 한국정치에서도 나타났다. 민주화가 더 이상 사회의 미래적 비전의 지위를 상실한 시대에, 시민사회적 공론장을 억제했던 MB 정권을 승계한 박근혜 정권은 명백한 정치의 재권위주의화를 추구하고 있는 정권으로 보인다. 사회의 구조적 변동의 맥락에서 보면 박정희식의 신권위주의는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를 중심으로 하는 독재체제이지만, 이러한 카리스마적 1인에게 모든 자원의 통제권이 집중된 권력은 오늘의 시대에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러기에 사회는 너무나 복잡해졌다. 그런 점에서 권위주의가 다시 재개되려면 카리스마적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사회가 아니라 탈집중적인 체제여야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념형으로서의 포스트신권위주의 체제라고 불렀는데, 이 시기에 재권위주의적 전략에 따라 집권한 박근혜 정부는 중심이 없는 권위주의를 실현하기에는 너무 옛스러운 권위주의적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보수주의적 실험은 성공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이 실험은 어쩌면 사회에 커다란 위해를 남기고 사라질지도 모른다. 규범적 공론장을 형해화하고 하위공론장의 메시지를 철저히 차단하면서, 사회의 무수한 공적인 것을 사사화하는 독단적 정치를 펴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종교적 영역이든 정치적 영역이든 카리스마적 1인에게 집중된 재권위주의는 매우 위험하다. 이 글이 주목하는 공공성 위기의 요체는 바로 이 점에 맞추어져 있다. 정치 영역의 재권위주의화의 대중적 계기를 메시아정치의 위험성에서 보고 있는 나의 글, 2014 여름, 〈증오의 메시아정치, 그 불온함―2012년 이후 한국사회의 종교성 비판〉, 《오늘의 문예비평》 93, 27~46쪽 참조. [본문으로]
  32. 김진호, 〈교회의 공공성 회복의 길, 작은교회론―대형교회 정관 개정 논란에 즈음하여〉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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