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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1990년' 이후 한국 개신교의 정치세력화 비판

2012년에 쓴 글입니다. "'1990년' 이후 한국 개신교의 정치세력화 비판"이란 주제의 논문입니다. 

(* 블로그에 있는 글은 지면 편집과 달리 웹에 맞게 '각주', '문단 구분' 등 재편집한 것입니다.)



이 글은 Korea Journal Vol 52, No. 3 (Fall, 2012)에 실린 논문 "The Political Empowerment of Korean Protestantism since around 1990"의 한글 번역 원고입니다.[영문 글을 첨부합니다.

Jinho KIM_The Political Empowerment of Korean Protestantism since around 1990_Korea Journal Vol 52, No. 3 (Fall, 2012).PDF

이 저널 52/3의 특집 주제는 'Contemporary Korean Religions in Context'이고, 여기에 포함된 다른 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JANG Sukman (장석만) “[On this topic] Contemporary Korean Religions in Context”

Chin Hong CHUNG (정진홍) “Profiles of Contemporary Korean Religions: The Emergence of Neo-Ethnicity”

YOON Seung Yong (윤승용) “The Movement to Reform Korean Buddhism and the Limits Thereof”

PARK Moon-Su (박문수) “Urgent Issues Facing Modern Korean Catholicism and Their Subtext”



[Abstract]


1990년을 전후로 하는 몇 년은 한국교회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이다. 그것을 보는 키워드를 이 글은 ‘성장의 지체 및 감소’로 본다. 즉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교회가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성장의 둔화 및 감소 추세에 들어섰다.


이것을 논하려면 먼저 1990년의 시간성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시기에 한국사회는 성장지상주의적 총동원체제가 유린해왔던 인권과 시민권, 그리고 소비자의 취향의 권리 등이 시민적 주체화의 핵심적 요소로 작동하는 사회로 이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시민적 주체화와는 어긋나는 교회적 주체화가 1990년 이후의 한국개신교를 특징짓고 있다. 즉 1990년 이후에도 교회의 성장에 대한 욕구는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고, 성장주의적 제도의 관행 또한 지속되고 있다. 하여 성장주의와 그 제도의 파행성을 성찰하고자 하는 시민적 주체는 교회를 청산되어야 할 낡은 관행과 욕구의 체제로 이해한다.


그런데 교세가 정체 혹은 감소되고 있음에도 성장에 대한 욕구와 제도의 관행이 맹렬한 추세로 계속되고 있는 현상을 이 글은 ‘시대착오적 성장주의’라고 규정하였다. 이것은 교회와 시민사회 간의 긴장과 갈등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악순환을 교회가 사회적 공공성을 훼손하고 있는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이 글은 이 시기 한국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행보 가운데 하나인 정치세력화에 주목한다. 교회의 정치세력화가 민주화 이후 새롭게 구축되고 있는 공공성의 제도화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이러한 반공공성의 신앙을 넘어서는 신학을 이야기하기 위해 ‘사회적 영성’의 개념화를 시도하고 있다.



'1990년' 이후 한국 개신교의 정치세력화 비판

사회적 영성화(social spiritualization)를 위하여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1990년'[각주:1] 이후


한국사회에서 개신교에 대한 선호도는 양극단으로 갈린다. 다른 어떤 종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인 신자들이 한 편에 있고, 개신교에 대한 혐오를 공격적으로 표출하는 반기독교주의자들이 다른 한 편에 있다. 실은 그 사이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도 대개는 '조용한 안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반개신교 현상은 '1990년' 이후의 현상이다. 대체로 그 이전에 한국사회에서 개신교는 꽤 호감도가 높은 종교였다. 반면 '1990년'을 경유하면서 부정적 이미지가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2천 년대에 들어서면 그런 기조는 사회 전반적으로 확장되었으며 그 강도도 급격하게 강화되었다.[각주:2]


그런 점에서 '1990년'은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1960~1990년 사이에 가파르게 성장했던 교세가 1990년을 전후로 빠르게 둔화되기 시작했다. 1961~1970년에 412.4%, 1971~1977년에 56.7%, 1978~1985년에 29.7%, 1986~1991년에 23.9%로 매우 높은 성장추세를 보여주었는데, 1992~1995년 사이에는 9.0%로 성장세가 급락했다.[각주:3] 그리고 2005년에 조사된 10년 단위의 인구센서스 결과에서 개신교 신자의 수가 1.4% 감소(인구대비 19.7%→18.3%)한 결과가 나왔다.[각주:4] 1995년과 2005년 사이, 그러니까 10년간 감소한 수가 14만여 명(8,760,336명→8,616,438명)에 불과했지만, '감소'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한국 개신교계에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각주:5]


이러한 교세 감소는 한국 개신교가 성장주의를 지양한 결과가 아니다. 1997년 한국갤럽조사연구소(Gallup Korea)가 발표한 <제3차 한국인의 종교실태와 종교의식>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79.6%가 '종교단체가 참 진리보다 교세확장에 치중하고 있다'고 답했다.[각주:6] 종교일반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여기에는 개신교에 대한 집합적인 기억이 압도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의문의 여지없다. 이러한 결과는 한신대학교 학술원 신학연구소가 현대리서치연구소에 의뢰하여 실시한 설문조사(2003)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냈다. 개신교의 전도형태가 다른 종교에 비해 적극적이라고 답한 이들은, 종교별, 도농별, 성별로 70~80%나 되었는데 이러한 전도형태에 대해 개신교인을 제외하면 70~80%의 사람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대답했다.[각주:7] 이렇게 성장주의는 2천 년대인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지만 교세는 감소했다.


그런데 이러한 교세 감소 현상은, 단지 숫자가 줄었고 그것을 개신교도들이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의 과거와 현재를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이 글에서는 그런 관점에서 교세 감소를 '1990년' 한국인의 체험과 연결시켜 논하고, 이것이 이후 한국교회의 행보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그러한 행보가 다시 한국사회에서 개신교의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사회적 공공성(social publicness)'의 문제다. 즉 '1990년' 이후 한국사회에서 교회의 행보는 사회적 공공성을 악화시키는 종교로서 이해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1960~1990년까지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지향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지상주의일 것이다. 그러나 군부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적 체제로의 이행의 출발점인 '1990년'[각주:8] 이후 한국사회에는 사회적 공공성의 문제가 급부상하였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지구자본의 난폭한 소용돌이에 휘말려버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열망은 더욱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교세 감소를 둘러싼 교회와 사회 간의 이해와 느낌의 간극을 살펴볼 수 있다. 교회는 지난 시대처럼 아니 더욱 열정적으로 성공주의에 몰두하고 있는데, 시민사회는 이러한 교회의 행보가 사람들의 삶의 공공적 영역을 잠식하고 신앙적 영성의 사회적 의의를 훼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 교세 감소의 사회학은 신앙의 '사회적 영성화'(social spiritualization)를 저해하고 있으며, 이것이 오늘 한국사회에서 교회와 시민사회 간의 부정적 관계를 강화시키는 사회구성적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1990년' 이후 교회의 특징적인 활동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해외선교의 활성화, (2)번영신학적 주체화(후기자본주의적 신앙화 현상), (3)정치세력화(political empowerment)가 그것이다. 이 세 유형의 활동이 교세 감소에 대한 직접적이고 의도적인 대응 행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는 교세 감소와 그로 인한 위기의식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unintended consequences)로 이러한 행보들이 1990년대 이후 한국 개신교의 주요 활동들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는 최근의 한국 개신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주제들인데, 이중 이 글은 세 번째 주제를 중심으로 한국 개신교의 현황에 관한 이야기를 펴고자 한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기독교의 정치세력화와 신앙의 사회적 공공성의 관계에 관한 문제다. 공공성의 문제는 민중신학의 정치신학적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다. 일찍이 안병무는 공공적인 것의 사유화(私有化)를 '원초적 죄', 곧 인간 죄성의 원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즉 에덴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를 그는 '공공적인 것'이라고 보았고, 그것을 사유화한 것을 인간 죄성의 원형이라고 이야기하였다.[각주:9] 이는 후세대 민중신학 연구자들에 의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비평하는 신학적 준거로서 활용되었다.[각주:10] 이러한 해석의 연장선상에서 나는 이 글의 결론부에서 개신교의 정치세력화와 사회적 공공성의 문제를 신앙의 ‘사회적 영성화’의 문제와 연결시켜 해석할 것이다.


'1990년', 감소의 종교사회학


위에서 말한 것처럼 한국 개신교의 교세가 감소하고 호감도나 신뢰도가 추락하게 되는 데 ‘1990년’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 우리는 ‘1990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1990년’은 교회사적 의미를 넘어 한국 현대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그 시간적 의미를 ‘민주화’와 ‘소비사회화’라는 변수를 중심으로 논한 바 있다.[각주:11]


1987년은 한국사회가 군부 군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체제로 이행하는 분기점이다. 그리고 1988년은 내구소비재산업의 비중이 크게 늘어남으로써 소비사회로의 이행의 분기점이 된다. 나는 이 시기를 ‘시민의 등장’으로 특성화하였다. 여기서 시민은 권리의 주체이자 욕망의 주체로 자기를 해석하는 존재로서, 두 가지 청산의 기조 속에서 주체화된다.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청산이 그 하나이고, 개개인의 욕망의 정치를 억압하는 전(前) 소비사회 체제에 대한 청산이 다른 하나다.


한편 한국교회는 대략 1960~1990년 사이에 군부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 전례 없는 급성장을 이룩했다. 그러한 고속성장 과정에서 성장 중심적 교회체제가 제도화되었다. 이것은 성장을 위해 가용자원을 총동원하는 제도로서 교회가 구조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같은 시기에 한국사회의 유례없는 급성장을 추동한 성장 중심적인 병영적 총동원체제와 매우 닮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각주:12] 특히 교회와 국가, 이 두 성장주의적 체제는 영웅주의적 신화를 공유하고 있고, 카리스마적 지도자에게 전권을 부여하였다는 점에서 공통된다.[각주:13]


그런데 ‘1990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는 영웅주의의 탈신화화 과정을 통해 전개되었다.[각주:14] 반면 교회는 여전히 영웅주의 시스템이 견고히 작동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대형교회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 하나가 주목된다.[각주:15] 박종현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목회자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이 한 교회에서 장기간 행사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들은 30,40년간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교회의 모든 신앙자원을 독점하였고, 교회는 그러한 권력 집중적인 시스템에 의해 구조화되었다. 대형교회들의 성공 스토리는 대개 이 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1990년대에 그들은 속속 은퇴하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대형교회들에서 은퇴한 독재자들은 ‘은퇴목사’라는 직함으로 사실상 교회의 최고 지도력을 여전히 행사하고 있으며, 일부 교회들은 목사직을 자식에게 세습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재생산하고 있다. 이것은 독재자의 권력 승계 방식 가운데 가장 안정적이면서 가장 비민주적인 것임은 더 말할 나위 없다.


1980년대는 유난히 평신도와 목회자 간의 권력투쟁이 잦았다. 많은 교회들의 벽에 대자보가 붙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불태워 버려야 할 교회들 목록을 적은 유인물이 유포되기까지 했다. 국가의 독재자와 시민 사이의 갈등이 가장 첨예화되던 시기에 교회도 동일한 갈등이 펼쳐졌던 것이다. 평신도의 주권 의식이 강화되는 만큼, 목회자에 대한 존경심은 빠르게 붕괴되었고, 수직적이고 권위주의적 질서에 대한 도전은 그 시대의 트랜드였다.


그런데 이 싸움은 목회자와 그의 주변에 포진한 교회 엘리트 집단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교회 민주화에 대한 담론은 ‘1990년’ 이후에는 거의 시들해졌다. 대신 그 무렵부터 교회체제 주변부에 이른바 탈권위주의적인 ‘평신도교회’를 표방하는 ‘작은교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각주:16] 이 과정에서 주류 교회는 민주화 시대에 구시대의 찌꺼기와 같은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또한 교회의 모든 자원을 독점하는 상징적 이미지의 목사는 참을 수 없는 부정적 캐릭터로서 인식되었다. 하여 개신교 목사에 대한 신뢰도는 급락했고, 교회는 구태스런 이들의 모임처럼 보이게 되었다.


교회 안의 영웅 신화는 계속되고 있으나 교회 주변부와 그 외부에서 신화는 붕괴되었다. 이제까지 교회 안팎의 많은 이들에게 좀처럼 포착되지 않던 교회에 관한 추문들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목사의 도덕적 문제들, 지역사회에 대한 교회의 무뢰배적 태도, 맹목적 친미주의, 극우 보수적 극단주의, 타종교와 타사상에 대한 공격적 배타주의, 기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부정적 모습들, ... 등등이 들춰졌다. 빠른 속도로 시민사회는 교회에 대한 호감을 철회했고, 민주화를 더 많이 추구했던 이들이 교회로부터 먼저 철수를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시민사회적 혐오를 가장 먼저 위기로 감지한 교회 내부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덜 배타적이고 더 민주적인 신자들이었다. 보수적이고 자폐적인 기독교 다수파는 사회의 평판에 대해 덜 예민했기에 상처도 덜 받았던 반면, 사회의 공공적 가치를 신앙과 공유하고자 했던 이들은 더 큰 신앙적 상처를 받았다. 해서 개혁적이고 비판적이던 많은 기독교도들이 교회를 떠났거나 실망신자로 교회의 주변부로 남아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진보적 기독교 사회운동의 붕괴를 의미했다. 교회에서 진보신학을 추구하는 대중이 사라졌다. 그리고 교회는 급속도로 보수화되었다.[각주:17]


특히 한국교회의 미국에 대한 순응적 태도와 북한에 대한 공격적인 냉전주의적 태도[각주:18]는 교회와 시민사회 사이의 괴리감을 넓혀놓았다. 하여 대도시에서 그리고 청년층 사이에서 크게 성공했던 한국 개신교는 ‘1990년’ 이후 도시와 청년층에서 감소 추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각주:19]


한편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는 산업화가 어느 정도 가속화되면서 가계경제에 약간의 여유가 생기게 되는데, 그 여유를 향유하는 세대가 등장하던 시기였다. 즉 이들은 1950~1953년, 한국전쟁 이후에 태어난 세대로서, 1960년대 말 이후 청년기를 맞았는데, 당시 미국에서 유입된 ‘서구의 1960년대적 청년문화’를 열렬히 소비하는 주체로서 부상한 이들이었다. 물론 이데올로기가 엄격히 통제되던 시기였기에 이들 청년들이 만끽했던 서구적 청년문화는 이른바 ‘1968년 식의 서구 문화’에서 이데올로기를 제거한 문화였다. 한데 당시 교회는 가장 앞서서 이러한 서구식 청년문화를 도입한 주역의 하나였다. 도시를 중심으로 하여 청년들이 개신교 교회로 대대적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각주:20]


그런데 ‘1990년’ 이후 소비사회가 빠르게 진전됨에 따라 여가산업은 그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발달하게 된다. 1인당 국민소득이 1971년에 253달러였는데, 1990년에는 5,883달러, 1995년에는 10,037달러에 이른다. 여기에 1993년 금융개방 이후 외국으로부터 차입한 돈이 낮은 이자율로 시장에 대대적으로 유포되면서 소비가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각주:21] 이에 국내외 여행자의 수가 급증하고, 각종 스포츠센터, 유흥업소와 숙박업소의 수가 크게 늘었으며, TV 시청 시간 또한 크게 늘었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 출석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특히 대도시 주민과 청년층에 대한 교회의 유인력(attraction)은 현저히 감퇴했다.[각주:22] 교회는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공간처럼 여겨졌다.


또한 소비사회는 ‘자존성 강한 여성’이 등장하는 사회구조적 기반이 된다. 기든스가 말하고 있듯이[각주:23] 후기자본주의적 소비사회는 감성 요소를 고부가가치의 산업자원으로 부상시켰고 이에 따라 감성의 전문가인 여성에게 유리한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었으며, 이는 일부 엘리트 여성의 자존성을 향상시키는 사회구조적 요소가 되었다. 한데 이들 자존성 강한 여성들에게 교회는 전(前)민주적인 가부장적 문화가 여전히 지배적인, 쇠락한 공간으로 인식되게 했다. 교회에 대한 이런 집합적 기억은 진보적 여성이 교회로부터 이탈하게 하였고 그녀들이 교회로 새로 유입되는 경로를 차단하는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각주:24] 결국 성차별을 묵인하거나 그러한 문화에 동화된 중도 혹은 보수적 여성보다는 진보적 여성이 상대적으로 많은 개혁적 교회로부터 여성 신자들이 더 많이 이탈하게 되었다. 이것은 여성 교인이 감소하였을 뿐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교회가 성적인 보수주의에 대해 개선하려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유가 된다.


시대착오적 성장주의


그런데 우리는 ‘1990년’ 이후 교세의 정체 혹은 감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성장주의를 포기 혹은 지양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교세는 성장을 멈추거나 감소하고 있는데, 담론과 제도 운용의 시스템이 여전히 성장에만 맞추어져 있다. 나는 이러한 부조화를 교회의 ‘시대착오적 성장주의’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교세 성장의 의의와 필요에 대한 주장만 되풀이하기보다는, 이제는 성장 지상주의를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규모보다는 가치로서 평가될 수 있는 가능성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래에서는 시대착오적 성장주의의 폐해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은 교회를 위기의 악순환으로 몰아넣는 구조적 요소가 되고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악순환 현상을 신학대학, 교회, 시민사회, 이 세 차원에서 간략히 이야기할 것이다.


첫째로, 교단 신학교 교육이 황폐화되고 있다. 교세가 가장 크게 확대되던 1960~1980년 사이 교파간 분열이 가장 극심했는데, 이러한 교파간 분열과 증오심 속에서 각 교단들은 산하 교단신학교에 대한 투자를 크게 확대했고, 신학생 수도 대폭 늘어났다. 특히 많은 교단들은 교육부가 인가한 학위 외에 교단인가 학위과정까지 만들어서 교회 사역자의 공급을 크게 확장하였다.


1999년 한국 개신교 7대 교단의 총회보고서를 종합하면 1998년도에 비해 교인은 9,857명 감소한 데 비해 교회는 559개 증가하였다. 교단 통계에서 교인수는 종종 실제보다 부풀려지게 마련이다. ‘중복교적자’가 가장 큰 이유다. 중복교적자가 생기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교인들의 교회 간 수평이동 때문이다. 특히 ‘이직’과 ‘이사’로 교회를 옮기는 이들의 비율은 전체 수평이동자의 53.3%(각각 31.6%와 21.7%)나 된다. 이것은 최근 한국사회의 평균이직율(35% 정도), 평균이사율(20% 정도)과 거의 비슷하다. 그밖에 목회자에 대한 불만(33.7%), 지나친 봉사(11.3%), 예배에 대한 불만(8.5%), 사람들과의 갈등(8.5%) 등을 이유로 개신교 신자들은 교회를 옮긴다.[각주:25] 전체적으로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은 평균 2회 이상 교회를 옮겨 다닌다.[각주:26] 이렇게 수평이동을 한 개신교 신자들이 그때마다 교적부에 등록을 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수는 그렇게 할 것이다.


반면 교단 통계에서 교회의 수와 교회사역자의 수는 거의 오차가 없다. 그러므로 위의 총회보고서들을 합산한 통계치에서 감소한 교인의 수는 실제보다 훨씬 작을 것이고, 증가한 교회의 수는 거의 사실에 가깝다. 이것은 신학교가 배출해내는 목사후보자 과잉 현상이 통계치보다 훨씬 심하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이렇게 신학생을 더 많이 양성하려는 각 교단의 기획은 목사후보생뿐 아니라 젊은 신학자들도 훨씬 더 많이 배출해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교수로 채용되었다. 젊은 교수들의 증가는 더 양질의 신학교육을 위한 기반이 된다. 하여 교회의 고도성장 막바지인 1980년대에 한국 신학교들은 양과 질에서 모두 급성장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1990년’ 이후 교세의 증가 추세가 급반전되면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신학생들의 취업난이 심각해졌다.[각주:27] 이는 신학생들로 하여금 교회성장을 위해 직접 활용할 수 있는 공부에 더욱 매달리도록 하는 압박 요인으로 작용했다. 즉 신학자들의 인프라는 전례 없이 확장되었으나 정작 학생들의 관심은 아직 학문적 틀조차 갖춰지지 않은 ‘교회성장학’이나 ‘목회상담학’에 과하게 쏠리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사회와 국가, 역사, 세계 등에 대한 신학적 무관심, 특히 자기 성찰을 위한 인문학적 소양의 퇴조 현상을 동반했다.


교회 또한 신학적, 인문학적, 사회학적 소양보다는 실용적 활용도 중심으로 ‘잘 준비된’ 목사후보생을 채용하고 싶어 했고, 이는 신학교육에 대한 강력한 압박으로 작용했다. 특히 신학에 대한 교회의 검열과 통제를 강화하는 유형무형의 장치가 구축되었다. 1992년 감신대에서 있었던 변선환 학장과 홍정수 교수를 파면하고 목사직과 교적을 회수하는 충격적인 사건은 교회의 학문에 대한 통제가 본격화되는 신호탄이었다.[각주:28] 이후 신학자들의 침묵은 교회의 성찰 잠재성을 파탄의 지경으로 빠뜨리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둘째로 성장 정체 및 감소로 인한 교회의 위기를 보자. 여기서 주지할 것은 ‘1990년’ 이후에도 대형교회의 성장 추세는 결코 시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위기는 중⋅소형교회에서 심각하게 체감되었다. 2002년부터 2008년 사이 폐업한 교회의 수는 매년 1,300개 이상으로 추산된다.[각주:29] 물론 폐업한 교회들은 거의 중⋅소형교회다. 미자립교회의 비율도 높아, 최근에는 전체 교회의 40~50%대에 이른다.[각주:30] 이러한 현상은 신학교에서 배출된 많은 수의 목사후보생들이 마땅히 취업할 만한 교회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 중 상당수가 교회를 새로 개척하는 모험에 뛰어들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요컨대 교세 감소 현상은 목회 준비가 부족한 이들이 매우 열악한 기반에서 교회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더구나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위에서 보았듯이, 학생 시절에 교회와 사회에 관한 인문⋅사회학적, 신학적 고민이 부족했고 단지 성장을 위한 테크닉에 치중된 공부에 몰두한 이들이었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시민사회의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키는 이유가 되었다. 교회는 비공공적이고 성장주의에 치우친 집단이라는 인상이 일반화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사회학자 이원규는 최근 한국의 개신교회는 종교성이 더욱 강화된 반면 사회적 신뢰도는 현저히 저하되었다고 평한다.[각주:31]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이후 많은 중⋅소형교회들은 적자 예산에 시달렸다. 교회 건축은 가장 결정적인 적자 요인이다.[각주:32] 교회당을 크게 신축하면 그 크기만큼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통념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면서 재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각주:33] 2012년 총선을 앞두고 기독교자유민주당이 내건 슬로건의 하나인 ‘교회의 은행대출 금리를 2.0%로 내리겠다’는 것은 교회들이 부채에 심하게 시달리고 있다는 반증이다. 여기서 교회의 은행대출의 주 요인이 교회당 건축으로 인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각주:34]


재정 압박에 시달릴 때 교회는 통상 사회부조나 복지 지출을 줄이게 된다. 이것은 교회의 사회적 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반면 대형교회에 대한 선망과 모방의 강도는 높아지고 미국발 번영신학의 성장 프로그램들을 도입하는 데 더 열을 올리게 됨으로써,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교회의 성찰 능력은 점점 더 감퇴하고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몰인식은 현저히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셋째로, 시민사회와 기독교의 문제다. 과거 시민사회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지대했다. 특히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가맹교단들이 만든 교회연합기관들과 그 주변의 기독교사회운동 기구들, 그리고 그밖의 기독교 시민운동 기구들과 비판적 연구소들은 한국사회의 진보적 시민운동과 지식인운동을 선도했고, 비판적 사회엘리트 양성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으며, 기독교에 대한 시민사회의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와 기독교사회운동 기구들은 진보적인 교회사역자들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교단정치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진보적 신앙과 신학의 허브로서 작동했다.


그러나 시민사회에서 이들 단체들의 역할은 공히 1990년을 기점으로 급락했다. 여기서 교세 감소의 문제와 연관해서 주목하게 되는 단체는 NCCK와 그 주변의 기독교사회운동 기구들일 것이다. 과거 한국사회에서 교회들의 절대 다수가 보수적임에도 이들 진보적 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것은 주요 재원이 외국의 진보적인 기독교계 기구들의 지원에서 충당되었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데 1991년 한국정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에 가입하면서 외국의 재정지원이 끊기게 되었다.


한데 그 무렵 대다수 교단들에서 대형교회들의 영향력이 급상승했다. 대형교회들은 신학교를 먼저 통제하기 시작했고, 자기들 구미에 맞는 연구자들과 신학세미나, 워크샵 등을 열어 무수한 목회사역자들을 규합했다. 여기서는 주로 미국 산(産)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적 해석학과 프로그램 등이 다루어졌다.


하여 그 동안 소수임에도 한국신학계를 이끌었던 민중신학이나 토착화신학, 그리고 유럽의 신정통주의신학 같은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신학담론을 대체하는 대형교회적 신앙과 신학이 급부상한 것이다. 이제 교회들은 자신들을 계도하는 신학이 아니라 자신들이 주도하는 신학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신학자들을 통제하고 이웃을 계도하는 신학과 신앙운동을 폈다. 그것은, ‘번영신학’이라는 말에서 시사되듯, 성장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신학이다.


한편 재정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NCCK 등은 교단정치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대형교회들의 지원을 받게 된다. 이것은 새로운 재원조달의 통로를 발견한 것이지만, 동시에 NCCK의 진보성을 추동했던 인권위원회 역할의 위축을 의미했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가 더 이상 의미 있는 시민사회적 위상을 지닐 수 없음을 의미하였다.


나아가 NCCK 인력풀이 많은 역할을 했던 기독교방송이나 대한기독교서회도 진보적 언론이나 지식 창고로서의 위상이 격하되었다. 이렇게 시민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 평판을 이끌었고 동시에 진보적 교회들의 결속체로서의 의미를 지녔던 기독교계 시민사회단체들은 NCCK의 진보성의 좌초와 연동되면서 거의 유명무실한 존립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교회의 신앙과 신학이 사회적 공공성의 문제에 제도적으로 둔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응전략 : 정치세력화


앞에서 얘기했듯이 199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두드러진 행보로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1)해외선교의 활성화, (2)번영신학적 주체화 경향(후기자본주의적 신앙화 현상), (3)정치세력화. 이 세 가지는 교세 감소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행보가 아니다. 하지만 이들 셋은 교세 감소로 위축된 자의식에 자긍심을 북돋아주고 목표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의 자기해석이라는 관점에서 이들 세 가지 행보의 담론적 효과를 이야기할 수 있다. 이 글은 이 중에서 개신교의 정치세력화 문제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할 것이다.


1901년 장로회공의회가 발표한 5개항으로 구성된 문서인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조건>에서 한국개신교 최초의 정교분리의 원칙이 천명되었다. 이것은 교회의 비정치화 선언이자 동시에 국가의 비종교화 선언으로, 이후 한국 개신교 신자 대다수는 이 선언을 신앙과 신학의 원리처럼 받아들여 왔다.[각주:35] 또한 1948년 건국 이래 정교분리 원칙은 헌법 조항으로 자리잡아 왔고, 종교인이든 아니든,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이 조항은 거의 모든 국민들에게 종교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추상적인 원리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는 근대국가 형성기 내내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위자의 하나였다. 특히 1960년 이전에는 인구의 1~5%에 불과한 소수종파였음에도 거의 기독교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막강한 사회 형성적 역할을 수행했다.[각주:36]


그런데 박정희 군사정권이 탄생한 이후 교회는 전면적인 정치게임에서는 물러나 수동적으로 정부에 협력하고 그 대가로 권력자원의 일부를 할당받는(allocated)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해왔다.[각주:37] 그런 점에서 이 시기에 교회는 정교분리 교리에 형식상 부합하는 행보를 했다. 왜냐면 그러한 거래는 밀실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에 이르면 이러한 수동성은 적극성으로 전환된다.[각주:38] 6공화국 말기인 1991년, 대통령 직선제 선거 국면에서 주류 교회는 '장로대통령[각주:39]을 만들자'는 기치 아래 결속함으로써, 박정희 군사정권 이래 30여 년간 계속되었던 수동적인 은밀한 정치적 행보를 철회하기 시작했다.


이 슬로건 아래 교회는 기독교국가의 꿈을 꾸었고, ‘군부독재체제가 종식된 이후’ 막 시작된 한국사회의 새로운 미래구상에 교회가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그때 부상한 논점이 기독교식 통일론이었다. 1989년 결성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중심으로 대형교회 중심의 정치적 전선이 형성되었고, 그 결속의 담론적 축은 반공, 친미적인 통일논의에 있었다.[각주:40] 이제 교회는 수동적인 방식의 정치적 개입이 아닌 적극적인 정치 개입의 길에 들어섰다. 교세의 급성장 추세가 급속도로 꺾이던 시절, 선교의 위기에 직면해 있던 교회에게 이른바 ‘체제전복적인 북한선교’ 담론은 위기의식에 사로잡히는 대신 자긍심과 우월감을 만끽하게 했다.


두 번째로 기억할 사건은 김한식 한사랑선교회 대표의 1997년 대선출마다. 거의 국가 파산의 위기에서 IMF 관리체제로 귀결되게 했던 ‘장로대통령의 실패’는 기독교의 실패이기도 했다. 주류 교회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고, 교세는 마이너스 성장기에 들어서고 있는 상황에서, 김한식 목사가 사실상의 기독교정당인 ‘바른나라정치연합’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했다. 그 역시 반공과 친미를 강조했다. 그의 새로운 점은, 복음화에 관한 한 정복주의적이었던 장로대통령과는 달리, 기독교의 사랑의 정치를 주장했다는 데 있다. 결과는 참담했지만(0.18% 득표) 정당을 만들고 신앙담론을 정치담론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정치적 세력화의 도정에서 그의 돈키호테적 시도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점이 된다고 하겠다.


특히 여기서 주지할 것은, 1980년대 미국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을 당선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George H. W. Bush)의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이른바 ‘바이블벨트’를 한국에서도 형성하려 했던 첫 모색이 바로, 한국교회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보수주의자 김한식에 의해서였다는 점이다. 이후 그는 이러한 한국적 바이블벨트의 전망을 갖고 한국의 유력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정치게임에 끌어들이는 데 일정한 매개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정당을 통한 정치세력화는 이후 성공하지 못했고, 향후에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기독교 정당들이 2004년(기독민주복지당 1.1% 득표), 2008년(기독사랑실천당 2.54% 득표), 2012년(기독교자유민주당 1.2% 득표) 총선을 노리며, 창당과 합당을 반복하고 있지만 성과는 거의 미미하다.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데다, 교회에 대한 교인들의 충성도가 급격히 이완되고 있고, 목사에 대한 교인들의 신망도 또한 현저히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독교 정당들이 내건 정치적 슬로건들은 사회적 공공성을 가지고 승부하는 정당이라기보다는 이익집단의 성격이 너무 강고해서, 교인들조차 정치적 지지 세력으로 흡수하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반면 김한식의 비전은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2003년 시청 광장의 대규모 기도회로 시작된 일련의 보수반공주의적 시국집회들은 ‘보수대연합’ 형식의 정치세력화의 신호탄이었다. 이 집회들로 인해 바이블벨트가 아니라 ‘반공 친미적 극우주의’ 벨트가 형성되었고, 기독교는 이 극우벨트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했다.


이후 이 세력은 ‘극우’ 노선의 ‘뉴라이트’ 세력으로 형성된 수많은 미시동원(micro-mobilozation) 기구들을 통해 존속하면서, 대형집회가 열리지 않는 일상적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극우 담론을 생산, 유통시키는 주체들이 되고 있다. 이들 미시동원 기구들의 핵심 활동가들은 (비)공식적으로 서로 교류하고 제휴하는 중위동원자(meso-mobilization actors) 역할을 함으로써 특정한 국면에서 대규모의 거대동원(macro-mobilization)을 가능하게 하는 중간매개자가 된다.


한편 ‘온건 우파’ 노선의 ‘뉴라이트’ 세력화 모색도 미국적 바이블 벨트를 한국화하려는 시도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5년 출범한 NGO인 ‘기독교사회책임’은 보수대연합의 정치적 비전을 명료히 했고, 이에 부합하는 정권 형성을 목표로 하는, 매우 정치화된 NGO다.[각주:41] 이후 기독교사회책임의 정치 형성적 역할은 현저히 축소되었지만, 이 진영 역시 수많은 미시동원적 조직들을 통해 존속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강경 극우 노선의 뉴라이트와 온건한 뉴라이트 기구들과 활동가들은 기독교를 명시적으로 표방하는 이들 간의 결속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종교간, 그리고 종교와 비종교 간의 제휴와 연대 및 담론 간 접속에 보다 적극적이었다. 즉 이들은 이념적 노선의 유사성을 중심으로 타종교인⋅비종교인들과 보다 유연하게 결속하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 정치세력화는 다른 행위들에 비해 훨씬 강도 높게 목적의식적 행위와 비전을 갖도록 자극한다. 그것은 같은 이념의 기독교도들을 ‘잘 결속시켰고’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넘어서 사회적, 국가적 차원, 나아가 전 지구적 차원에 대한 목표의식을 갖도록 고무시켰다. 또한 그것은 자신의 내면적 해석체계를 형성하도록 자극하였다.


이때 기독교도들은 자신의 자존성을 해체시키는 요소들을 대면하고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해석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정치적 전쟁에서 종교적 자의식이 굳건히 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교세 감소는 ‘1990년’ 이후를 체험한 기독교도들의 공통된 위기의식의 기반을 이룬다. 더욱이 그것을 교회내적 언술로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사회학적으로 진단하게 된다. 즉 교세 감소로 인한 위기의식을 신앙적 언어로만 해석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정치적 차원, 사회적 차원을 함께 고려하면서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김대중 정부와 참여정부, 즉 군사정권 이후의 민주적 제도화 10년에 대한 해석을 본격화하게 되었고, 기독교가 추구하는 정치적 제도를 위해 무엇을 비판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하여 기독교의 위기는 외적 요인인 민주화와 연관되어 있고, 민주화로 인해 고취된 시민의식이 기독교정신을 사회화, 국가화하려는 교회의 방해자가 되고 있다는 해석에 도달한다. 이때 교회는 한국의 민주화를 좌경화와 동일시하며, 공공성을 강조하는 시민의식은 종북 의식의 발로로 해석한다. 하여 전통적인 언어인 반공이 다시 호명되어 활용된다. 그리고 대안적 프로그램으로 미국에서 시도되는 기독교 정치세력화의 전략들을 주목한다. 하여 기독교 도덕주의에 기초한 법률들을 정치화의 목표로 설정하고, 또한 반북 지향의 정책들을 추구하는 정치세력들을 규합하는 것에 관한 내적 해석체계를 발전시켰다.


기독교의 정치세력화는 이제 교세 감소 현상과 직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교세 감소는 사회가 좌경화된 결과이자 과정이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좌경화되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그동안 이룩했던 공적과 의의는 폄하되고, 일부 사건⋅사고적 요소들로 전체가 대변되는 현상도 이교도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의 결과다.[각주:42] 한편 건강한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하는 것은 뉴에이지 종교들이 파급시킨 문화적 타락으로 인한 것이다. 성적 타락, 약물의 남용, 가족의 해체 등은 그러한 뉴에이지적 문화의 폐단이다. 하여 교회는 그러한 문화적 남용을 제한하고 건강한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엄격한 도덕률이 지배하는 사회로 재건해야 한다. 기독교가 구현하도록 위임받은 미래사회는 이런 것이다. 그것을 위해 기독교는 정권 창출을 위한 모험에 뛰어들어야 하며, 한국에서 그것은 보수대연합이라는 우파적 벨트를 통해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43]


이렇게 기독교는 정치세력화의 행보 과정에서 교세 감소에 관한 위기의식을 해석하는 스토리라인을 발명해내게 된다. 거기에는 동지와 적이 명료하게 배치돼 있으며, 그것은 각각 미국과 북한, 이 양축의 전선을 따라 형성된 전선으로 나뉘어 있다. 하여 기독교는 적의 준동을 제압하기 위한 동지 간 연합을 형성하는 정치적 대연합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정치세력화는 이렇게 교세 감소현상과 맞물린 자괴감에서 벗어나 목표의식과 소명감으로 재충전하게 하는 주체 해석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맺음글 : 사회적 영성화를 위하여


이러한 기독교 정치세력화의 주체화 담론은 ‘적’으로 해석된 ‘타자’에 대한 증오와 적대를 기반으로 한다. 여기서 타자는 개조의 대상이지 공존과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만약 개조되지 않은 타자가 살아남아 있다면 저들은 ‘우리’의 것을 위협하게 되고 결국 ‘우리’의 존재 자리까지 박탈해 버릴 것이라는 피해의식이 기독교 지도자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 참여정부가 시도했던 사립학교법 개정 논의에 직면한 교회는 민주화라는 것이 공산화와 다름 아니라고 생각했다.[각주:44] 마치 1940년대 중반 북한 정권이 토지개혁을 주장하며 기독교의 재산을 빼앗아 간 것처럼 민주정부도 교회의 영토인 미션스쿨들을 침탈해 간다고 말이다.


하여 기독교 정치세력화의 과제는 사회를 타자들의 세상이 아닌 교회의 세상으로 만들어내는 데 있다. 여기에는 회색지대가 없다. ‘우리’의 것과 ‘적’의 것만이 있고, 역사는 ‘우리’와 ‘적’이 서로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벌이는 전쟁으로 점철된 시간의 장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전쟁을 위해 삶의 자원을 총동원해서 ‘적’을 무찔러야 한다. 즉 정치세력화는 종교전쟁의 담론이다.


이전까지, 교회 영역 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러한 전쟁은 일종의 상상작용이었다. 한데 그것을 정치화한다는 것은 상상 속에 있는 ‘적’이 구체적인 대상, 개조되지 않은 타자들과 동일시됨을 의미한다. 요컨대 한국에서 모색되고 있는 기독교 정치세력화는 종교전쟁의 담론이다.


그러나 진정한 복음화는, 말할 것도 없이, 전쟁반대의 운동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횡포를 부리는 세상에서, 공공적인 것에 침투하여 사적인 욕구들이 서로 충돌하는 전쟁터로 변모시키고 있는 세상에서, 하여 일상까지도 생존을 위해 전쟁터로 바꾸어 버리는 세상에서, 복음화는 그런 세상에서 공공적인 것을 지켜내는 것, 결코 사유화될 수 없는 지점을 남겨놓으려는 노력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복음화는 자본주의적 전쟁의 논리가 해체되는 ‘비무장지대’(DMZ), 그러한 ‘탈영토의 영토’(territory of de-territory)를 만들어내려는 역사적 운동이다.


한편 복음화, 그 ‘탈영토의 영토’는 ‘우리’라는 이름의 주체들이 점유한 영토들의 경계선을 흩뜨려 놓는 ‘영토’다. 해서 명료하게 ‘우리’와 ‘적’을 나누는 것을 ‘경계’(boundary)라고 한다면, 탈영토의 영토는 경계가 모호한 지점에서 서로 다른 타자들이 만나고 거래하며 놀이를 하는 탈경계적 지대(the zone of de-territory), 곧 변경지대(frontier zone)다.[각주:45]


한데 후기 자본주의는 이러한 비무장지대, 변경지대까지도 전쟁터로 동원해내는 기술적, 인식론적 시스템을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그런 점에서 세계를 관통하는 자본의 질서를 구현하는 자본의 지구화 현상은 후기 자본주의적 체계의 궁극일 것이다. 이런 지구화 체계에서 공공영역은 점차 사라지고 있고, 모든 것이 경쟁과 자기계발의 공간이 되고 있다. 하여 현재의 지구화는 '일상의 전쟁화'와 '전쟁의 일상화'를 향해 치닫고 있다.[각주:46]


번영신학은 그러한 자본주의적 체계를 가장 잘 반영하는 교회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번영신학으로 무장하면서 타자를 말살하는 정치세력화의 게임을 벌이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행보는 공공영역을 지켜내고 확장하려는 민주화의 노력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


'정치'는 행위자들의 사적인 욕구를 공적인 것처럼 포장함으로써 타자들의 동의를 얻어내려는 생각과 행동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와 타자는 서로 협상하게 되고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런데 교회의 정치세력화는 자신의 욕구를 포장하지 않은 채 타자에게 승복하라는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승복하지 않은 타자를 '적'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정치세력화는 모든 삶의 공간을 싸움터로 변질시키는 전쟁의 신앙인 셈이다. 이는 이웃을 '적'으로 만든다.


이러한 구조화된 위기에 대한 대안을 찾고자 한다면, 나는 '사회적 영성'을 재발견하고 회복하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싶다. 「요한복음」의 어법에 따르면 '사람이 된 신'(예수), 곧 육체에 갇힌 존재인 신이 세상을 떠나고 그 대신 '영'이 세상으로 왔다. 영은 형체가 없다. 곧 영은 형체의 해체다. 또 영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존재다. 곧 영은 지향성을 해체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은 세계의 규칙에 좌우되지 않고, 자유롭게 세계와 함께 동거한다.[각주:47]


그러한 영의 속성을 영성이라고 한다면, 사회적 영성은 교회든 국가든 자본이든 누구에게도 독점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의 사회적 속성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영성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지만 모두에게 깃들어 있는 영에 관한, 곧 공공적 신에 관한 사회학적 해석인 셈이다.


정치가 이웃을 적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적을 이웃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이웃 간의 만남의 지대, 곧 변경지대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행위와 전략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정치는 신앙의 사회적 영성화이다. 반대로 이웃을 적으로 만드는 것은 사회적 반(反)영성화의 신앙에 다름 아니다. 하여 정치세력화를 도모하는 오늘의 교회가 품어야 하는 생각은 ‘사회를 교회화’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적 신앙을 사회적 영성화’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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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형묵, 공, 하느님 나라의 역사화 또는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은유, 이정희 외,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 (삼인, 2006), 205~216쪽.

―, 민주주의의 위기 가운데서 묻는 공의 의미, 이정희 외,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 (삼인, 2006), 217~230쪽.

○ 한신대학교 학술원 신학연구소, 한국개신교와 한국 근현대의 사회⋅문화적 변동 (한울아카데미, 2003)

○ 홍영기, 한국 초대형 교회와 카리스마 리더십(교회성장연구소, 2007)

○ Kim Jin-ho, "Ochlos and Phenomenology of Wretchedness", Yung Suk Kim & Kim Jin-ho (eds.), Reading Minjung Theology in the Twenty-First Century: Selected Writings by Ahn Byung-Mu and Modern Critical Responses (tentative title; Wipf and Stock, will be publishing by 2013)

○ Prescott, J.R.V., The Geography of Frontiers and Boundaries (Chicago: Aldine, 1965)


■ 주간지, 일간지, 인터넷신문


○ 김진호, 교회 사용설명서②: 교회의 성장지상주의가 낳은 사생아 '교회 매매', <오마이뉴스>(2011.09.2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27345)

○ 안성모, 「빚 내서 몸 키우는 한국 대형 교회들, <시사저널> 1134(2011.7.8.)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5623)

○ 유창선, '뉴 라이트'는 <조선> <동아>에서만 뜬다?―새로 출범한 보수단체, 과연 새로울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2004.11.2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22037)

○ 유헌, 김홍도 “우리나라 월남 망할 때와 비슷”, <당당뉴스>(2006.10.18.)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8858)

○ 이원규, 한국 개신교의 최근 동향, <기독교타임즈>(2009.6.23)

(http://www.kmc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798)

○ 이현주, 2009 연중기획: 희망을 주는 한국교회, 낮은 곳을 돌아보자 (1)아직도 한국교회 절반은 미자립교회<아이굿뉴스>(2009.02.06.)

(http://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1737)

○ 정택은, 일단 짓고 보자! 교회건축 성공보장?, <기독교타임즈>(2010.2.10)

(http://www.kmc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308)

○ 한종호, 김홍도 목사의 아주(?) 무서운(?) 설교를 아니나요」, <뉴스앤조이>(2001.01.27.)

(http://www.newsnjoy.or.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1184)



[각주]

  1. 여기서 '1990년'은 1991년을 전후로 하는 몇 년을 가리킨다. 해서 1990년에 작은 따음표를 붙여 표기했다. [본문으로]
  2. 기독교계 시민운동단체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2008년 전화설문조사에 따르면 3대종교(불교, 가톨릭, 개신교) 가운데 종교 호감도와 종교기관 신뢰도가 모두 최하위로 나타났다. 반면 1970,80년대 한국개신교는 호감도나 신뢰도가 높은 종교였다. 1970,80년대의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 대하여는 김진호, 『시민 K, 교회를 나가다』 (현암사, 2012), 91~109쪽 참조 [본문으로]
  3. 이원규, 「한국교회의 성장과 그 둔화 요인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신학과 세계」 34(1997 봄), 150쪽 그는 「1950, 1960, 1970년 통계」(한국종교사회연구소, 「한국종교연감」, 1993), 「1977년 통계」(문화공보부, 「종교법인 및 단체 현황」, 1977), 「1985년 통계」(「인구 및 주택 센서스」, 1987), 「1991년 통계」(통계청, 「한국의 사회지표, 1991), 「1995년 통계」(통계청, 「1995 인구주택 총 조사보고서」, 1997)에서 위와 같은 통계치를 추산하고 있다. [본문으로]
  4. 정병준, 「해방 이후 한국개신교회 성장 및 감소」(http://jbjoon63.blog.me/30101953919) 참조. [본문으로]
  5. 김승호, 「한국교회 마이너스 성장에 대한 원인 분석과 대안: 거울에 비쳐본 2007년 개신교의 모습」, 『목회와 신학』 (2007.2), 148쪽. [본문으로]
  6. 조성관, 「한국인의 종교생활, 48%의 한국인은 神의 존재를 믿는다」, 『월간조선』(2000.1). [본문으로]
  7. 한신대학교 학술원 신학연구소, 『한국개신교와 한국 근현대의 사회⋅문화적 변동』 (한울아카데미, 2003), 107~110쪽. [본문으로]
  8. 일반적으로 한국사회에서 민주적 체제로의 이행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이후를 기점으로 한다. [본문으로]
  9. 안병무,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신학사상』 53(1986 가을), 442~449쪽. [본문으로]
  10. 최형묵, 「공, 하느님 나라의 역사화 또는 하느님 나라의 또 다른 은유」와 「민주주의의 위기 가운데서 묻는 공의 의미」, 이정희 외,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 (삼인, 2006), 205~216 & 217~230쪽; 김진호, 「단(斷)과 공(公)의 변증법―지구적 자본 시대의 위기와 민중신학적 실천 담론의 모색」, 『반신학의 미소』 (삼인 2001), 161~184쪽. [본문으로]
  11. Kim Jin-ho, "Ochlos and Phenomenology of Wretchedness", Yung Suk Kim & Kim Jin-ho (eds.), Reading Minjung Theology in the Twenty-First Century: Selected Writings by Ahn Byung-Mu and Modern Critical Responses (tentative title; Wipf and Stock, will be publishing by 2013). [본문으로]
  12. 한국사회의 성장 중심적 교회체제와 성장 중심적 국가체제 사이의 구조적 유사성에 대하여는 김진호, 『시민 K, 교회를 나가다』 , 61~70쪽. [본문으로]
  13. 여의도순복음교회 부설 교회성장연구소 소장인 홍영기는 한국교회 성장의 핵심적 추동자를 ‘카리스마적 지도자’라고 해석한다. 홍영기, 『한국 초대형 교회와 카리스마 리더십』(교회성장연구소, 2007) 참조. 한국 자본주의의 영웅주의적 특성과 그것의 메시아 정치적 성격에 대하여는 김진호, 「‘그 메시아주의 정치’는 불온하다―박정희와 노무현 담론의 정치신학」 (미간행 원고. 2012) 참조. [본문으로]
  14. 앞의 주에서 인용한 김진호의 글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한국의 민주화는 또 다른 영웅주의들을 낳았다. 이것은 한국 민주화가 권위주의를 충분히 청산하지 못한 결과인데, 1990년대 말 한국에서 크게 논란을 일으켰던 ‘내면의 파시즘’ 논의는 그러한 논점을 다루고 있다. 임지현 외, 『우리 안의 파시즘』 (삼인, 2000). [본문으로]
  15. 박종현, 「한국 오순절 운동의 영성―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성과 성장에 대한 시대사적 회고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식』 82(2008.4), 10~14쪽. [본문으로]
  16. 1980년대에는 계급주의적 진보성을 추구했던 민중교회 운동이 활발했다면, 1990년대에는 일상의 민주주의와 신앙을 결합시켜보려는 ‘작은교회들’이 보다 활기를 뛴다. ‘작은교회’에 대하여는 김진호, 『시민 K, 교회를 나가다』, 209~220쪽 참조. [본문으로]
  17. 물론 그것만은 아니다. 개혁적 기독교 진영(통상 '에큐메니컬 그룹'이라고 부른다)에 대해 보수적 기독교 진영을 의미하는 '복음주의' 진영(통상 '에반젤리컬 그룹'이라고 부른다) 내에서 이른바 '진보적 복음주의자'와 '진보적 복음주의 운동'이 등장한 시점이 바로 1980년대 말이다. 하지만 운동의 성격이나 그 신학과 이념에 있어서 진보적 복음주의 진영은 과거 진보적 기독교사회운동에 비해 훨씬 보수적이다. 1987년 이후 진보적 복음주의 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정정훈, 「'87년형 복음주의의 종언과 복음주의의 새로운 전화(轉化)를 위하여」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2012년 1월 포럼 발제원고) 참조. [본문으로]
  18. 한국기독교총연합회로 수렴되는 한국 개신교의 친미적이고 반공적인 기조의 역사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중심, 2006) 참조. [본문으로]
  19. 2005년도 인구센서스에 관한 연구서인 최현종, 『한국 종교인구변동에 관한 연구』 (서울신학대학교 출판부, 2011) 참조. [본문으로]
  20. 김진호, 『시민 K, 교회를 나가다』, 91~99쪽 참조. [본문으로]
  21. 이것은 몇 년 후 엄청난 '금융재앙'을 야기하여, 거의 국가가 파산할 뻔했다. [본문으로]
  22. 이원규, 「한국교회의 성장과 그 둔화 요인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신학과 세계』 34(1997 봄), 166~168쪽. [본문으로]
  23. 앤서니 기든스,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친밀성의 구조변동』 (새물결 2001) 참조. [본문으로]
  24. 여성 개신교 신자 추이에 관한 의미 있는 조사는 거의 없다. 그런데 송기태는 1992년 2월에 실시한, 수도권 거주 여성 개신교신자들에 관한 설문조사연구에서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제시해주고 있다. 첫째는 여성이 신규 신자로 교회에 유입되는 비율이 매우 낮아졌다는 점이고, 둘째는 여성신자의 지역사회와 국가에 대한 봉사나 참여의식이 매우 낮다는 점이다. 한편 종교사회학자 이원규는 안정된 직업을 둘러싼 경쟁에 적극적인 여성이 많아지는 것과 그녀들이 교회에 소홀해지는 것 사이에는 의미 있는 연관성이 있다는 가설을 통해 교인수 감소에 관한 하나의 추론을 제시한다. 송기태, 「여성신자 연구」, 『목회와 신학』 (1992.4); 이원규, 「종교사회학적 관점에서 본 여성의 교회생활과 여성의식, 사회의식」, 『신학과 세계』 45호 (2002 가을) 참조. [본문으로]
  25. 이원규, 「21세기 한국교회의 변화와 수평이동 현상」, 『신학과 세계』 52(2005 봄), 152쪽. [본문으로]
  26. 같은 글, 151쪽. [본문으로]
  27. 손인웅 목사의 진술에 따르면, 한국 최대교단의 하나인 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의 교단신학교인 장신대학교의 2008년도 졸업생 중 단지 13%만이 교회에 취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효임, 「매년 문 닫는 작은교회 3000개, 해법은?」, <크리스찬 노컷뉴스>(2008.04.01.) [본문으로]
  28. 변선환, 홍정수 교수 사건에 대하여는 김주덕, 「한국교회 분쟁의 요인 분석―1992년 감리교회의 종교재판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27(2007.9) 참조. [본문으로]
  29. 김진호, 「교회 사용설명서②: 교회의 성장지상주의가 낳은 사생아 '교회 매매'」, <오마이뉴스>(2011.09.22.) [본문으로]
  30. 이현주, 「2009 연중기획: 희망을 주는 한국교회, 낮은 곳을 돌아보자 (1)아직도 한국교회 절반은 미자립교회」<아이굿뉴스>(2009.02.06.)(http://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1737) 미자립교회의 기준은 각 교단이 정한 최저 경상수입 이하의 교회를 가리키는데,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이 예장 통합 교단의 기준으로 미자립교회의 예산은 정부가 정한 최저생계비 기준보다 20%나 낮은 수준이다. [본문으로]
  31. 이원규, 「한국 개신교의 최근 동향」, <기독교타임즈>(2009.6.23.). [본문으로]
  32. 1998년도 교회들의 예산 추산치에서 40%가 건축기금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강인철, 「민주화 시대의 새로운 종교통제 방식―조세분쟁을 중심으로」, 『종교연구』 34(2004 봄), 56~57쪽. [본문으로]
  33. 정택은, 「일단 짓고 보자! 교회건축 성공보장?」, <기독교타임즈>(2010.2.10) [본문으로]
  34. 안성모, 「내서 몸 키우는 한국 대형 교회들」, <시사저널> 1134 (2011.7.8) [본문으로]
  35. 이만열,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 『한국사론』 1(1973), 367~373쪽. [본문으로]
  36. 강인철, 「한국 개신교 교회의 정치사회적 성격에 관한 연구: 1945~1960」,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식』 15(1994.4), 23~31쪽. [본문으로]
  37. 강인철은 박정희 정부 시대 기독교를 소수의 저항과 다수의 협력이라는 틀로 분석한다. 강인철, 「박정희 정권과 개신교 교회」, 『종교문화연구』 9(2007), 86~93쪽. [본문으로]
  38. 이수인의 「개신교 보수분파의 정치적 행위―사회학적 고찰」, 『경제와 사회』 64(2004 겨울)는 1990년대 이후 적극적인 저항의 행보를 취하는 개신교 다수파에 관해 분석하고 있다. [본문으로]
  39. 한국교회는 거의 100개에 이르는 교파들로 분열되어 있지만, 놀랍게도 이들 교파 간에는 교리나 직제 등에서 차이가 별로 없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장로제다. 한국의 거의 모든 교파는 장로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개신교는 '한국적 장로교의 확대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문으로]
  40.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502~506쪽. [본문으로]
  41. 유창선, 「'뉴 라이트'는 <조선> <동아>에서만 뜬다?―새로 출범한 보수단체, 과연 새로울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2004.11.22) 참조. 한편 이 단체는 최근 그 정치 지향성이라는 거품이 조금씩 빠지면서 정치 주변부의 기관이라기보다는 보수주의적 기조로 정권을 감시하는 시민사회단체 성격의 NGO로 정착해 가고 있다. [본문으로]
  42. 감리교 세계 최대의 교회를 담임하는 김홍도 목사의 2001년 1월 14일 설교는 <일곱 금 촛대와 일곱 별>는 이러한 음모론적 이해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설교에 관한 한 인터넷신문의 보도 참조. [본문으로]
  43. 뉴에이지에 대한 개신교계의 이와 같은 대응은 1990년대 초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전명수, 「뉴에이지 운동의 한국 수용과 포스트모더니즘」, 『한국학연구』 25(2006.11), 418쪽. [본문으로]
  44. 김홍도 목사는 사립학교법 개정논의 속에 "공산주의 주체사상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당당뉴스>(2006.10.18.) [본문으로]
  45. 프리스캇은 근대국가의 경계(boundary)에 대응하는 고대사회의 개념으로 ‘변경지역’(frontier zone)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경계'가 국가 간의 명백한 공간분할이라면, 근대 이전 국가들 간의 '변경지역'은 행정의 통제가 불분명하고 기복이 심했던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른바 '행정의 공백지대'라고 할 수 있다. J.R.V. Prescott, The Geography of Frontiers and Boundaries (Chicago: Aldine, 1965), p.p. 40~49. 나는 여기서 이 개념은 민중신학적 소통의 공간으로 재활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46. 김진호, 「게임 같은 전쟁의 시대, 소비되는 타인의 고통―폭력의 일상화에 대한 민중신학적 고찰」, 『제2의 종교개혁과 민중신학. 임태수교수 퇴임논문집』 (한들, 2007) 참조. [본문으로]
  47. 이에 대하여는 김진호,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요한복음』 (동연, 2009)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