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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및 민중신학의 '사건론'적 전망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역사로 예수를 말하다> 강좌네 번째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오래 전에 쓴 이 글을 펼쳐보았다. 원고지 270매에 달하는 긴 글이다. 각주도 124개나 된다. 그 당시 나를 동료들은 ‘김각주’라고 불렀다. 그런 별칭이 여실히 드러난 글인 셈이다. 내용도 온갖 아는, 아니 안다고 생각(또는 착각)했던 정보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이런 글을 왜 썼을까? 그토록 어깨에 힘을 잔뜩 들이고 써야할 만큼 인정욕구가 넘쳤던 것일까? 아직 30대 초반 청년의 생각은 그랬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글에 대한 평가를 해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그때의 나의 전략은 실패했다.


강의 자료로 쓰기 위해 내용을 줄이고자 했고, 힘이 잔뜩 실린 글투도 바꾸고 싶었다. 그러나 한 시간쯤 지나서 그 노력을 그만 두기로 했다. 그런 식으로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의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적지 아니 있다.


강의 자료로 사용하기를 포기하니, 이 글이 비로소 읽힌다. 감회가 새롭다. 그 시절, 나름 열정을 다해 공부했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지금이라면 어깨에 힘도 빼고 조금 더 재치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시절의 연구자로서의 열정은 거의 잃어버렸다.


이 글은 내가 엮은 책 『예수 르네상스─역사의 예수연구의 새로운 지평 (한국신학연구소, 1996)에 ‘해제’라는 타이틀로 제일 마지막에 수록된 것이다. 벌써 거의 20년 가까이 되어가는 글인데 찾아보니 내 블로그에는 보이지 않았다. 뒤늦었지만 이제야 블로그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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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및 민중신학의 '사건론'적 전망



‘번역하기’란 언제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한다. 마침내 마감하는 순간에 이르면 마침표를 찍는 그 시각을 초 단위까지 헤아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모년 모월 모일 모시 모분 모초, 번역 마침.’ 그 순간의 환희를 언제까지나 지속시키고 싶다. 그런데 마침표를 찍고 시계를 보며 시간을 읽는 순간, 어느새 그때는 지나가 버리고 만다. 이미 과거인 것이다.


‘시계시간’(clock-time)이란 이처럼 과거로부터 현재를 단호하게 가른다. 동시에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이런 시간 개념은 과거나 미래와는 변별적인 ‘지금’을 추구한다. 이들 간에는 단순한 선후성(先後性) 이외에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 아니 관계를 말하기보다는 단절에 초점이 있다. 요컨대 시계시간이 지배하는 사회적 재현체계(representation system)는 과거나 미래와는 단절된 자아관이며, 이렇게 인식하는 주체는 자아의 영역 ‘외부’에서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각주:1]


이러한 시간 개념의 본격화는 산업사회로 특징지울 수 있는 근대와 더불어 시작됐고, 시간 단축을 통해 재생산 메커니즘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효율적 합리성을 매개하는 핵심적 구성인자다. 더욱이 이른바 ‘지구화 시대’라는 최근에 이르면, 교통이나 통신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시계시간의 기초단위는 더욱 미세해져 가며, 그 미세함이 엄청난 잉여를 산출하는 단위로서 기능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경험은 시계시간만으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스스로에게 설정한 원고 마감일을 앞두고 있노라면 하루가 마치 ‘눈깜짝 하듯 지나버린다’. 그런데 그토록 기다려 왔던 종착지에 가까이 이르면 몇줄 안남은 마침표를 찍기까지의 시간은 내가 가는 반대편으로 달려가고만 있는 듯하다. 이렇듯 우리가 실생활에서 체감하는 시간은, 그것을 계측하는 도구가 그림자의 길이가 아닌 ‘시계’라 하더라도, 단순히 정확하게 계량화된 시간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 체감되는 시간 개념은, ‘시계시간’과는 달리, 단절을 지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와 미래를 매개함으로써 현재를 구성한다. 무수한 욕구를 인내하며 숨 가쁘게 달려야 했던 ‘과거’와, 성취감에 어쩔 줄 몰라 할 모습으로 기대되는 ‘미래’ 사이에서, 이들과 대화함으로써 ‘현재성’이라는 것의 내용이 형성되는 것이다. 요컨대 현재성은 과거와 미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단선적인 과거와 미래만이 현재와 관계 맺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과거가 현재의 체험에 영향을 미치고, 다양한 미래가 현재의 체험에 개입한다.


한편 과거는 단지 시간을 통해서만 현재라는 실제와 관계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라는 시간은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공간과 연관되어 있다.[각주:2] 물론 미래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시공간적 차원에서의 과거를 ‘기억’(가다머<Gadamer>의 용어로는 ‘전통’)이라 하고, 그러한 미래를 ‘전망’이라 한다면, 존재라는 시공간적 현재성은 복선적인 ‘기억’과 복선적인 ‘전망’과의 의사소통을 통해 규정된다는 것이다.[각주:3]


‘실천이론으로서의 학문’은 현재성을 구성하는 기억과 전망의 의사소통 과정에 ‘이론의 차원에서 개입하는 실천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각주:4] 그런데 근대 이후 발전하게 된 학문 경향은, 시계시간이 시간적 개념을 과잉대표하게 되는 근대의 또 다른 경향과 종종 합종(合種)되어버리고 말았다. 즉 존재의 체험은 시계시간만으로 환원되지 않음에도 시계시간의 관점을 과도하게 개입시키면서 ‘경험’과 ‘전망’, 그리고 (이것들과 별개의 실체라고 생각/착각하는) 현재 사이의 외삽적인 상호작용을 논하는 ‘오류’가 근대의 학문 속에서 종종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역사의 예수’라는 신학적 논제가 바로 이러한 근대적 ‘학문’의 오류가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한 실례였다고 생각한다. 신학사적으로 볼 때, 역사의 예수에 관한 논의는 전통적으로 크게 네 시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① 18~19세기 예수 연구학계를 풍미했던 ‘고전적 질문’(The Old Quest)의 시대, ② 불트만(R. Bultmann)에서 절정에 이른, 20세기 전반기를 주도했던 ‘질문의 폐기 시대’(No Quest), ③ 1950년대에 시작되어[각주:5] 1960년대에 어느 정도 활기를 띠다 별 성과 없이 그치고 말았던, 포스트불트만 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질문’(The New Quest)의 시대, 그리고 ④ 1980년대 이후 미국 학계 중심으로 전개되는 ‘제3의 질문’(The Third Quest)의 시대(또는 ‘예수 르네상스’)가 그것이다. 이 중, 앞의 세 단계의 연구 경향을 특징짓는 용어라면, 그것은 ‘신학과 방법론의 긴장 및 분리’라 할 수 있다(Borg 1988; 이 책 제3장 참조). ‘고전적 질문’의 시대가 방법론이 신학을 압도하던 시대였다면[각주:6], 이후의 두 시대의 연구 경향은 신학이 방법론을 압도하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 세 시대의 연구 경향들의 ‘역사적’(historical)이라는 용어에 대한 이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들에게서 ‘역사적’이란 시계시간적 의미에서의 ‘과거’를 정확하게 들춰내는 것이다. 즉 역사적 연구의 대상을 (‘지금 여기’와는 단절된) ‘그때 거기’라는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사실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의 목적이 이러한 것이라면, 역사학이라는 학문은 결코 존속할 수 없거나 학문적으로 무용하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결코 연구의 대상을 그 시대의 사회역사적 맥락에 정확하게 재현해 내는 일이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 대상을 한 인물로 축소하고, 그것도 그의 어느 활동 시기로 제한한다 하더라도, 그가 입지했던 사회역사적 맥락 자체를 ‘사실 그대로’ 설정할 수 없을 뿐더러, 그것을 괄호 친다 하더라도, 한 인물의 존재를 총체적 시각에서 ‘사실 그대로’ 재현해 낸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각주:7]


마이어(John P. Meier)는 이러한 관점에 기반을 둔 예수에 대한 역사적 문제설정을 ‘실제 예수’(real Jesus)라고 명명하면서, 그것이 불가능한 논제임을 주장한다.[각주:8] 나아가 그는 예수를 학문적으로 묻는 것과 신학/신앙적으로 묻는 것을 별개의 영역으로 처리하는 학계의 경향[각주:9]이 학문적으로 유용하지 못했다는 논평을 가한다. 비록 그가 ‘역사의 예수’를, “현대의 학문적 도구에 의해 단편적이고 가설적으로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다[각주:10]고 규정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마치 방법론과 신학이 별개의 과정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즉 현재성을 배제한 역사적 접근이 역사적 방법론의 과제라고 생각하는 함정에 그 자신도 걸려들어 있지만 말이다.


신학과 방법론간의 긴장 및 분리의 문제란, ‘방법론’이 중립적인 관찰자에 의한 ‘객관적 이해’를 추구하는 반면 신학은 신앙적 주체에 의한 ‘주관적 인식’ 문제에 초점을 둔다는 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접근의 경우 방법론은, 현재에 살지만 현재와는 단절된, 단절될 수 있다고 가정된 중립적인 관찰자가 과거적인 대상을 재현해내려는 학문적 모색을 말한다. 여기서 과거는 현재와 전혀 의사소통하고 있지 않다는 가정을 전제한다. 또한 이것은 과거를 현재와 의사소통하게 하는 과정을 방법론에서 분리된 제2차적 영역으로 밀쳐낸다는 전제를 함축한다.[각주:11] 이것은 고전해석학적 문제설정 하에서는, 즉 객관적인 인식주체가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서 인식 대상에 대한 정확한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추구했던 해석학적 탐구 경향 속에서는 전혀 문제꺼리가 아니었다. 따라서 신학과 방법론 간에 긴장이 있다는 문제설정은 인식 대상이, 인식주체가 재현한 것과 긴장관계에 있다는 문제의식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설정에서 현대해석학이 출발하게 된다. 이것의 단초는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의 인간 현존재(Dasein)의 실존성[각주:12] 분석에 기초한 해석학적 순환론[각주:13]에서 비로소 제기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시계시간으로 환원될 수 없는 ‘시간’ 개념의 재발견을 통해서 이러한 통찰을 가능하게 했다.[각주:14]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로부터 세례를 받은 루돌프 불트만의 신학적 해석학은 신학과 방법론간의 긴장을 극복해보려는 현대해석학적 문제설정의 기원적 시도라 평가할 수 있다. 불트만의 예수 연구의 출발점은 ‘문헌비평에 기초한 역사적 접근이 도달한 한계상황’이다.[각주:15] 양식비평은 문서전승 이전의 구전 전승 형태인 ‘양식’(form)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었지만, 이 분야의 대가인 불트만이 발견한 양식의 ‘삶의 자리’는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선포의 상황’(케뤼그마)으로, 역사의 예수와는 ‘넘어설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둔 역사적 도달의 최후지점이었다.[각주:16] 이로써 그의 양식비평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방법론적 접근에 실패한다. 만일 이것을 극복하려면, 양식비평에 대한 이해를 재해석하거나 다른 비평방법을 도모해야 한다.

 

불트만은 ‘전이해’(Vorverständnis) 개념[각주:17]을 통해서 양식비평을 하이데거적 실존론의 시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그 방법론적 한계를 돌파하고자 한다. 현대의 독서자인 내’가 ‘백지상태’에서 성서를 독해하는 것이 아니라 ‘전이해’에 영향을 받는다는 가정은, 이러한 ‘내’가 과거의 의미를 객관적 자세로 독해할 수 있다는 천박한 역사주의가 들어설 자리를 배격한다. 여기서 불트만은 ‘전이해’의 개념을, 하이데거처럼 시계시간을 초월하는 존재 양식인 ‘실존’의 차원에서 이해한다. 즉 양식비평의 ‘삶의 자리’를 분석하는 이해의 지평을 ‘역사’에서 (역사를 초월하는) ‘실존’으로 대체한 것이다. 그는 이 실존이야말로 역사가 도달할 수 없었던 예수와 초기 그리스도교회 사이의 연속성을 확보하게 하는 계기라고 믿었다.[각주:18] 이러한 삶의 자리를 분석하는 방법론으로 그는 하이데거로부터 해석학적 순환론을 채용하는데, 여기서 순환하는 것을 그는 ‘신앙적 대상(신학)’과 ‘이해적 대상(방법론)’으로 설정한다.[각주:19] 불트만은 이 순환을 통해서 현대인에게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실존을 가리고 있는 ‘신화’의 언어를 벗겨냄으로써 ‘현대인인 나’는 성서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실존인 ‘케뤼그마’를 비로소 읽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럼으로써 텍스트 속에 담겨 있는 케뤼그마(예수와 초기 그리스도교와의 연결점인)와 연결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양식비평의 재해석으로 제시한 ‘탈신화화 프로그램’(Entmythologiesierungsprogramm)이다.[각주:20] 이러한 그의 해석학은 역사적 물음을 괄호한 채 곧바로 ‘결단’, 즉 실존의 요청에 대한 응답을 요구하는 것을 그 궁극적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방법론에 불과했던 양식비평을 해석학적 지평으로 확장했다. 즉 방법론과 신학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해석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현대해석학의 근본 논제인 인식주체와 인식대상간의 모순관계를 종합하는 해석학적 순환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못했다.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한데, 하나는 그의 하이데거 채용의 불철저함에서 비롯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하이데거 채용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에서 비롯된다. 첫째로, 그는 하이데거가 제시한 단초인 ‘존재의 장소로서의 현존재’ 개념을 손쉽게 인격체로 대체함으로써 실존범주에 대한 이해의 방법론을 슬쩍 건드리고는 곧 바로 신앙적 결단의 영역으로 직행한다. 결국 그는 존재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하고 말았다.[각주:21] 둘째로, 그는 하이데거의 실존론을 채용함으로써 방법론을 통한 역사적 물음을 진척시키지 않은 채 ‘결단’이라는 개체적 실체(개인으로서의 신앙인)의 응답에로 나아간다. 결국 그는 역사적 관계 속에서 신앙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과제에서 이탈했으며, 나아가 역사적 물음 자체를 신앙적 물음에서 봉쇄하는 ‘주관주의’로 귀결했다.[각주:22] 결국 불트만의 양식비평이라는 방법론의 해석학적 확장/재해석은 ‘역사의 예수라는 문제설정의 폐기’라는 대가를 치렀다. 요컨대 그의 해석학이 추구했던 방법론과 신학간의 긴장의 극복이라는 과제가 완수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역설적이게도 예수에 대한 역사적 방법론은 신학과 더 이상 화해할 수 없는 무저갱 속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각주:23]


포스트불트만 학파의 불트만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 이른바 ‘새로운 질문’은, 거창한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불트만 해석학의 한계를 조금도 넘어서지 못했다.[각주:24] 어떤 점에서 이들의 도전은 불트만 이전의 고전해석학적 지평으로의 복귀와도 같았다. 이들이 관심을 집중했던 곳은, 불트만에게 방법론상의 좌절을 안겨주었던 ‘양식비평학의 역사학적 한계’의 지점이었다. 이들은 불트만이 발견했다던, 예수와 초기 그리스도교 사이에 가로 놓인 ‘건널 수 없는 강’이 실은 ‘불가강(不可江)’이 아니라 얼마든지 도하(渡河) 가능한 강이었다는 주장을 폄으로써 불트만에 도전한다.


이를 위한 그들의 논거는, 애초에 저편에서 건너왔던 것이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면 반드시 이편에서도 넘어갈 수 있는 지점들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그들은 이 연결지점을 발견하기 위한 ‘표준’들을 찾는 데 심혈을 기울였고,[각주:25]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많은 ‘표준’들이 발견됐으며, 그 가운데 여럿은 불트만 자신에 의해서 이미 어느 정도 승인됐던 것들이었다. 이 표준들은 양식비평을 보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양식비평의 삶의 자리인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케뤼그마에서 역사의 예수를 추론해 내는 단서를 이 표준들이 제공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트만이 양식비평을 해석학적으로 확장했다면, 포스트불트만 학파는 양식비평을 방법론적으로 확장코자 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방법론에 대한 역사적 낙관 탓에 이들은 불트만이 필요로 했던 현대해석학적 재해석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불트만이 자신의 해석학적 순환론으로 제기한 탈신화화론에 대해서 이들은 그다지 천착하지 않았으며 다만 주변적인 문제제기만을 비건설적으로 제기했을 뿐이다.


‘새로운 질문’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고 또 별다른 주목할 만한 저술을 생산하는 계기도 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다음 세 가지, 즉 ⒜ 불트만과 포스트불트만 학파가 역사의 예수를 묻는 공통된 방법론적 기반인 역사비평학 특히 양식비평학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문제, ⒝ 역사비평학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 그리고 ⒞ 해석학적 지평으로 확장되지 못한 채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의 문제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은 역사비평학/양식비평의 방법론적 보완을 그 대안으로 요청하고, ⒝는 역사비평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방법론적 대안을 필요로 하며, ⒞은 역사비평학의 해석학적 확장/재해석을 요청한다.


⒜ 불트만과 포스트불트만 학파가 공유하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삶의 자리는 ‘신앙의 선포’라는 선교의 상황이었다. 이때 이들은 선교의 영역이 기본적으로 종교의 범주에 속한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다른 범주, 가령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범주와의 관계는 이차적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러한 범주 설정은 역사학적으로 무의미하다. 가령 예수의 성전정화 행위는 스펙터클 켐페인[각주:26]으로 전락한 유대교를 갱신하려는 종교적 활동인 동시에, 성전 관료기구를 공격하는 정치적 측면도 있고, 성전의 경제 활동을 교란시키는 효과도 지니며, 무산자 대중의 계급적 봉기를 촉발할 우려도 있는 사회적 측면도 지닌다. 실제 예수가 어느 것을 더 중시 여겼든 간에, 그가 단지 종교적 영향만을 상상하면서 이 일을 했다는 가정은 그가 사리판단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천치’에 불과했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다. 이런 제 요소들은 선후적 관계로써 이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이들의 역사비평학, 특히 양식비평학이 초기 그리스도교와 예수의 삶의 자리를 기본적으로 종교적 범주로 축소 해석한 것은 역사학적 위기를 야기시킨다. 이런 점에서 양식비평학의 종교사회학적 지평으로의 확장은 역사적 방법론상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대안적인 문제설정이라 할 수 있다.[각주:27]


⒝ 양식비평이나 전승사 비평 등, 역사비평학은 문서전승뿐 아니라 구전전승 단계에서도 특화된 전승자를 상정한다. 즉 전승의 발신자가 있고 전승의 수신자가 있다고 가정하며, 발신자의 메시지는 수신자에게 투명하게 전수된다고 전제한다. 이때 역사적 분석의 초점은 당연히 발신자에게로 집중되며, 수신자의 역할은 단순히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물론 발신자와 수신자가 존재했다는 작업가설을 세우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문서전승 단계에서도 어느 정도 그러하지만, 특히 구전단계에서 발신자와 수신자를 구분하는 것은 역사학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발신자와 수신자는 각기 단순히 의미의 전달자와 수용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서전승은 ‘문자’라는 매체를 통해서 정보가 저장 및 전달된다. 발신자인 문서 저자는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 즉 기의를 ‘문자’라는 기호, 즉 기표로써 표현(기호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기호화는 발신자의 기의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표는 발신자 개인이 창출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기표를 사용하는 언어공동체 내의 규칙(재현체계)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신자는 기표의 규칙이라는 외적 환경과 의사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의미를 기호화해야 하며, 여기서 의미의 변형이 이루어진다. 한편 일단 기호화된 문서는 수신자에 의해 독해되면서 또 다시 의미의 변화를 겪는다.[각주:28] 애초의 발신자의 기호화의 순간으로부터 시간과 공간이 변화됨으로써 수신자는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독해하게 된다.[각주:29] 여기서 발신자는 문서화된 텍스트를 매개로 시공간을 달리하는 수신자들과 의사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구전전승 단계에서는 전수되는 정보의 저장이 전적으로 ‘기억’에 의존한다. 기억은 문자에 비해서 기억하는 주체, 즉 수신자의 개입이 보다 즉각적이며 적극적이게 하는 효과를 갖는다.


따라서 발신자와 수신자는 더 이상 의미의 단순한 전달자와 수용자가 아니라 의미 형성의 공동주체인 것이다.[각주:30] 그런 점에서 특화된 전승자에게만 관심을 집중하는 역사비평학은 역사적 방법론으로 부적합하며, 그 대안으로 의미의 공동주체의 의사소통 과정에 주목하는 방법론이 요청된다. 이것은 전승의 공동담지자의 이해의 공동지평을 분석하는 이론틀을 필요로 하며, 이 공동지평이 형성되는 시공간적 영역(公論場, pobulicity)을 ‘전통’의 차원(Gadamer)과 ‘전망’의 차원(유토피아적 지평; Habermas)에서 조망하는 사회과학과의 간학문적 연구를 요청한다.[각주:31]


⒞ 바로 이와 같은 대안적 방법론은 역사방법론과 신학간의 긴장을 고려하지 못했던 고전해석학의 문제설정을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와 연결된다. 고전해석학적 문제설정은, 주지하듯이, 의미로부터 소외되지 않은, 즉 의미의 변형을 겪지 않고 원래의 의미를 이해하는 인식주체를 상정한다. 이것은 불변하는 진리관, 신관에로 연결된다. 그리스도교의 출발점이 ‘신의 자기 비하(자기 해체; incarnation), 인간의 자기 고양(자기 해체; “신처럼 너희도 거룩해라”)’에 있음에도 말이다. 이것은 해석학의 과제를, 불변하는 원래의 의미로부터 해석자가 얼마만큼의 거리에 있으며 어떻게 접근하느냐를 묻는 데 둔다. 이러한 진리관[각주:32]에 기초한 방법론은, 불변의 진리가 기각되고 의사소통 과정 자체를 진리로 보는, 즉 과정적 진리관에 기초한 현대해석학적 문제설정에 의거할 때는, 탈해석학적 방법론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불변의 진리인 성서 텍스트에서 ‘그대 거기’(과거적 시공간)의 의미를 추구하는 역사 방법론은 결코 ‘지금 여기’(현재적 시공간)에서 유의미한 메시지로서 독해될 수 없고, 방법론 밖에서 수행되는 또 다른 의미화 과정(이른바 ‘신학적 해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포스트불트만 학파는 불트만에 의해 비로소 시작된 현대해석학적 문제제기를 거꾸로 되돌려 놓는, 즉 불트만의 방법론의 해석학적 확장을 다시 탈해석학적 방법론으로 환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포스트불트만 학파의 역사의 예수 추구는 건설적인 대안 모색에 실패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상의 세 가지 비판은 비단 포스트불트만 학파의 문제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역사의 예수 연구 일반이 가졌던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서 간단히 시사했던 대안적 모색이 ‘제3의 질문’ 혹은 ‘예수 르네상스’라는 이름의 최근(1980년대 이후)의 연구경향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 책은 이 경향을 소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 새로운 연구 경향의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각주:33]: 첫째로, 이전까지의 연구 경향이 주로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 학계의 현상이었다면, ‘제3의 질문’은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이 최근의 경향은 대다수 종합대학(university)이나, 교파/교회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단과대학(college)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학자의 수가 크게 증가하고, 종교학 분야의 연구붐이 일어나고 있는 경향과 맞물려 있다. 셋째로, 이제까지의 연구 경향이 주로 대학 내에서 논의를 전개했다면, 최근 경향은 학회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이 세 특징이 시사하는 바는, 전통적인 학문적 경향에 비교적 적게 영향을 받는 연구 풍토가 크게 배가되었으며, 세속적 사회문화의 여파에 보다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환경이 증진되었다는 것이다.[각주:34] 넷째, 이것은 특별히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이는데, 1970년대 데탕트 시대를 거치면서 학문간 종교간 대화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간학문적 연구가 활성화되고, 타종교 특히 인접종교인 유대교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는 분위기와 맞물려 있다. 다섯째 특징으로 역사적 기초자료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갈등’의 요소를 신학연구에 개입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제3세계 신학의 여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여기서는 특히 뒤의 세 가지 특징들을 중심으로,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보충이 될 만한 논의를 하고자 한다.


⑴ 간학문적 연구 경향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논할 수 있다. 첫째는 사회과학과의 만남이 야기한 역사의 예수 연구의 방법론적 진전에 관해서인데, 이 경향의 초기 국면에서는 대체로 아직 사회과학 이론들의 외삽적 적용에 지나지 않았고, 특히 현대사회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이론을 고대사회에 적용하는 식의 무리한 활용이나, 정교성을 상실한 피상적인 적용 등, 아직 그 방법론적 타당성에 있어서 명백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각주:35] 그러나 점차로 고대 팔레스티나 사회라는, 현대와의 시간적 간극을 인식하기 시작했고,[각주:36] 이것은 비교사회학 내지는 인류학적 이론을 적절히 활용하는 데로 나아갔으며, 그 활용 능력에 있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역사학적 재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매우 전문적인 수준에까지 올라서게 됐다. 가령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의 예수상을 다루는 데 있어서 초기의 연구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가설을 단지 이용하는 수준이었으나,[각주:37] 점차로 비교문화인류학적인 이론의 재해석 및 이와 관련한 성서 텍스트의 새로운 독해에로 나아갔다.[각주:38] 비교문화인류학적 연구에서 특기할 것은, 고대 팔레스티나 사회의 ‘상징’에 대한 이해와 관련되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정결체계’에 대한 통찰이다. 고대 사회에서 ‘정결’과 ‘부정’이라는 개념의 사회화, 즉 그것의 사회적 가치체계화는 사회적 통합(social integration; 인격적 통합)을 가능케 한 핵심 요소였으며,[각주:39] 또한 통치세력은 이것을 권력체계로 재해석함으로써, 정부정의 체계는, 느슨하나마, 체계적 통합(system integration; 권력적 통합)을 가능케 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각주:40]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보그(M.J. Borg)의 예수 연구는 비교인류학적으로 해석된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의 정결체계 분석에 의존[각주:41]하여, 당시의 지배적 영성과 정치적 체계간의 연계가 이루어진다고 보면서, 대안적 영성을 추구했던 예수는 영적 인물인 동시에 정치적 활동가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각주:42] 이러한 결론은 방법론적 통찰이 곧바로 오늘의 우리에게 신학적 메시지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물론 그에게서는 이러한 연관에 관한 해석학적 논의가 생략되어 있지만 말이다.[각주:43]


또한 고대 팔레스티나의 상징에 대한 비교문화인류학적 연구가 보여주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질병과 기적의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통찰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 제5장의 홀렌바하(P. Hillenbach)의 논문에서 간략히 언급된 것처럼, ‘의료인류학’과의 만남은, 현대의 질병 이해에 구속된 우리의 생체의학(bio-medicine)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서, 고대사회, 특히 성서의 질병과 치유기적을 민속의학(ethno-medicine)적인, 그리하여 고대적인 사회적 포섭/배제의 메커니즘이라는 사회적 현상과 결부시켜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제공해 준다.[각주:44]


한편 문화적 차원도 포함하지만 보다 사회정치적 함의에 강세가 있는 경향으로 사회생태학적 접근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주로 고대의 도시나 촌락에 대한 비교 연구에 큰 빚을 지고 있는 데, 여기서는 고대 농경사회의 주된 특성이, 권력의 원천은 도시인 반면 대부분의 사회적 잉여는 촌락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에 있다고 본다(‘권력의 도가니로서의 도시’: Giddens). 그러므로 고대사회의 사회정치적 갈등이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분야가 도시와 촌락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 주목되는 것이다. 팔레스티나 사회의 갈등을 준아시아적 생산양식(Sub-Asiatic mode of production)이라는 도식에 꿰맞추려 했던 벨로(F. Belo)[각주:45]나, 예수시대 경제적 잉여의 불균등한 점유 관계에서 예수의 성전예언을 보려했던 타이쎈[각주:46]처럼, 초기의 연구들은 대체로 사회경제적 갈등을 예루살렘과 촌락사회간의 문제로 보려했다. 즉 도시와 촌락간의 갈등을 예루살렘과 촌락간의 갈등으로 환원시켜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예수시대 예루살렘이 정치경제적 차원에서 팔레스티나 도시사회 내지는 권력체계를 대표한다는 검증될 수 없는 논거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시대 정치적 요충지는 가리사리아나 티베리아 같은 도시였고, 경제적으로도 예루살렘은 갈릴래아 호수 근방의 도시에 비해 많은 제약조건을 안고 있었다. 팔레스티나 경제의 잉여의 원천이 농업생산성과 중계무역에 결정적으로 결부되어 있었으며, 이 점에서 갈릴래아 지방의 지정학적 입지조건은 유다지방보다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이 정치적 경제적 중요성을 일정하게 지니고 있었던 것은 팔레스티나뿐 아니라 전 유대교권 사회의 상징적 중심으로서 체계적 통합의 종교-이데올로기적 중심지였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논자들은 도시와 촌락간의 갈등을 예루살렘에 한정하지 않으며, 또한 부채 문제를 중심으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갈등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방면에서 가장 적극적인 저술활동을 한 학자로는 리차드 로어바우(Richard L. Rohrrough)와 리차드 호슬리(Richard A. Horsley)를 들 수 있다. 로어바우는 이 문제를 매우 일찍부터 파악하고 있었으며,[각주:47] 네오베버주의와 네오마르크스주의의 절충적 관점으로 고대사회의 생태학적 문제를 정교하게 조명해 내고 있다.[각주:48] 호슬리는 기층대중의 ‘전(前) 정치적 저항’(primitive rebel)에서 혁명적인 ‘정치적 저항’(rebolution)에로 이르는, 촌락사회 특유의 현상인, 유형론적인 민중사적 연구에 힘입어서 1세기 팔레스티나의 여러 민중운동과 예수운동의 성격을 조명한다.[각주:49] 한편 최근 그는 신화학을 이용해서 예수 탄생신화를, 촌락사회 대중의 의해 전승되는 영웅신화로 해석하여 그것의 민중 사회학적 지평을 밝혀내는 시도를 하고 있다.[각주:50] 이 양자의 공통점은 ‘갈등’의 파악에 있다. 즉 그 갈등의 사회경제적 원천을 도시와 촌락 사이에서 작동되는 잉여추출 메커니즘에 기인한 ‘부채’와 결부시키고 있고, 갈등의 표출 양상에 종교적 상징체계가 깊이 개입되어 있다고 보며, 갈등에 대한 저항의 차원으로 ‘밑으로부터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최근 이들과는 달리 생태심리학적 시각에서 참신한 논지를 편 채프먼(Dean W. Chapman)의 주장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준다.[각주:51] 그는 장 피아제(Jean Piaget)의 ‘전조작(pre-operatory) 이론’을 이용해서 「마르코복음」 저자가 팔레스티나 지리에 대해 ‘몰이해’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재해석한다. 그에 의하면 고대인의 공간개념이, 피아제의 아동기적 공간개념 단계인 전조작 단계의 이해와 유사하게 형성된다는 사실을 통해서 「마르코복음」 저자/전승자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기층대중일 가능성을 논한다. 결국 그는 「마르코복음」과 역사의 예수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셈인데, 그리하면 브레데(W. Wrede)와 슈미트(K.L. Schmidt) 이후 역사적 진정성이 없는 것으로 판정되어 버린 기존 문서가설의 부활 가능성이 시사되는 것이다.[각주:52]


그밖에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예로 오크만(D. Oakman)의 저작[각주:53]은 독특하게도 경제사/경제인류학을 정교하게 활용하여 역사의 예수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호슬리의 저작만큼이나 문제작으로 꼽을 만하다. 그는 칼 폴라니(Karl Polanyi)로부터 이론적으로 크게 빚지고 있는데,[각주:54] 특히 폴라니가 전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체계의 특징으로 제시한 ‘호혜성’(reciprocity)과 ‘재분배’(retribution)라는 조직모형을 빌어서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의 경제적 체계를 조명한다.[각주:55] 전자가 촌락 내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라면, 후자는 도시와 촌락간의 관계를 규정하며, 또한 전자가 평등관계를 지향한다면, 후자는 수탈관계를 지향한다. 고대의 권력사회는 이 모순적인 요소의 중층적 결합에 의해서 특성화된다는 것이다. 오크만은 이러한 시각에서 성서의 무수한 진술들, 비유들, 상징어들, 그리고 성전 같은 종교 체계 등의 경제적 함의를 조명함으로써, 예수운동의 지향과 성격을 해석해내고 있다. 이와 같이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그 역시 호슬리나 로어바우처럼 채무의 문제를 예수시대 팔레스티나 사회를 갈등적으로 성격화하는 핵심 요소로 보고 있으며, 예수운동은 이에 대해 호혜성 회복을 지향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견해의 일치를 보인다.


이상과 같이 제3의 질문 혹은 예수 르네상스라는 경향은 이전의 연구에 대해, 사회과학적 역사이론을 통해서 방법론적으로 보완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진전을 이룩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단지 방법론만이 아니라) 해석학적인 문제설정에 있어서도 중대한 차이가 시사되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제까지의 역사의 예수 연구의 특징이 ‘케뤼그마 중심적’이었다면, 제3의 질문은 예수의 ‘사회적 실행’에 물음의 초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예수를 묻는 시좌가 ‘존재론적/선험적’ 차원에서 사회적 상호성, 맥락성의 차원으로 전환되었음을 시사한다. 존재론적 물음은 ‘계시’의 주체와 수동적인 수용자를 상정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소통적 문제설정이 끼어들 여지가 봉쇄되어 있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읽는 연구 방법론에 있어서, 오직 예수의 독백적 행위만을, 그의 실존적 인격만을 고려하는 결과를 낳았다.[각주:56]


반면 제3의 질문이 전제하는 진리관은 ‘과정론적(화용론적) 진리관’이다. 이것은 역사적 물음의 초점이, 일방적인 발화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신자와 수신자간의 의사소통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서라는 텍스트 자체가 이런 의사소통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일방적 발화자의 존재론적 실체를 조명하려는 역사학적 물음은 애초부터 어떠한 접근법(방법론)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 성서 속에 반영된 의사소통 과정을 묻는 역사적 문제설정으로 예수를 묻는다면, ‘성서가 스스로 말하게 한다’는 종교개혁가들의 명제는 방법론적으로 가능성의 영역을 향해 열리게 된다. 따라서 적합한 방법론이란,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의 등장인물들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영역에 대한 이해와 연결된다. 이 점에서 최근 미국의 성서문학협회(SBL)에서 후원하는 ‘초기그리스도교 사회사 연구회’(Social History of Early Christianity Group)의 프로젝트의 하나로, 초기 그리스도교 전개를 ‘사회적 연결망 이론’(social network theory)을 통해서 해석하려는 시도를 한 것은, 비록 여기서는 역사의 예수나 그 배경사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더라도, 중요한 의미를 지난다고 할 수 있다.[각주:57]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예수운동에 대한 연구는, 예수의 (존재론적) 인격만을 통해서 조명되기보다는, 기성의 규범적/체계적 소통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또한 예수 주변집단들과 적대집단들 간의 소통 관계를 바탕으로 하면서, 개별 사람들과의 만남 사건에서 묘사된 소통 관계를 해석하는 것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각주:58] 이러한 상호성, 맥락성이라는 방법론적 문제설정은 텍스트와 독서자 사이의 해석의 상황도 관계성을 통해 파악하게 하는, 현대해석학적 문제설정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방법론과 신학 사이의 긴장을 해소/극복할 수 있는 여지를 안고 있다.


한편 둘째로, 간학문적 연구의 사회과학적 방법론과의 조우라는 차원 외에, 우리는 ‘유대교와의 만남’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끊임없이 유대교의 다양한 집단들과 여러 가지 형태로 갈등을 벌인다. 샌더스(E.P. Sanders)는 19세기말의 자유주의 신학자인 부셋(W. Boussett)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의 유대교 해석을 일별하면서, 이 해석이 얼마나 편견으로 점철되어 왔는지를 비판적으로 조망한다.[각주:59] 이것은 유럽인의 뿌리 깊은 유대인과의 갈등과 편견에 바탕을 둔 것으로, 적대적 대상으로 표상된 집단에 대한 주관주의적 과잉비하 논리의 발현인 것이다. 반면 유대교에 대해 대체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성서 자체에서조차, 유대교의 ‘실체’는 일관되게 표상되고 있지 않으며, (‘실체’라고 말하기가 껄끄러울 정도로) 그 정체가 모호하다. 더욱이 유대교 문헌들을 보면 그 정체는, 특히 제2성전기 유대교(‘고대유대교’)의 정체는 정의내리기가 퍽이나 혼돈스럽다.[각주:60] 사실 유대교는 다양한 양상으로 존재했으며, 민족적이거나, 혈연적, 혹은 종교적 정체성을 가진 개념이라기보다는 역사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그럼에도 트뢸취(E. Troeltsch)의 조야한 변증법 이래,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의 잘 정의된 유대주의와 헬라주의’라는 사상적 개념으로서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터무니없는) 가정 하에, 유대주의와 헬라주의의 지양으로서 그리스도교가 성립 발전하였다고 생각하곤 해 왔다. 여기에는 예수운동은 유대주의에 대해서는 강한 이탈지향을, 그리고 헬라주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친화적 지향을 갖는 종교운동이라는 전제가 은연중에 깔려 있다. 또한 이것은 예수운동의 발생지인 팔레스티나의 헬라주의화 경향을 강조하는 경향과 맞물려 있는 듯이 보인다. 헹엘(M. Hengel)은 자신의 교수직 청구논문인 『유대주의와 헬라주의』 Judaism and Hellenism[각주:61]에서 팔레스티나의 헬라주의화 경향을 다각도에서 매우 정교하게 밝혀내고 있는데, 다른 책에서 그는, 필시 앞의 책의 논거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가정인, 예수일행의 행태와 견유학파간의 비교를 시도한다.[각주:62]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을 제외하고는 예수일행의 활동무대였던 촌락사회에까지 헬레니즘화가 진척되었다는 어떤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타이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일행을 견유학파적으로 해석하고,[각주:63] 심지어 버튼 맥(Burten Mack)은 역사적 논거를 제시하지도 않은 채 언표의 유사성만을 가지고 더욱 강력하게 헬레니즘화된 세계의 일원인 예수를 강변한다.[각주:64]


그러나 1960~70년대 이래 급진전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학자들 간의 만남과 그로 말미암은 비교적 편견 없는 연구의 활성화는 위와 같은 주장의 논거를 더욱 빈약하게 하고 있으며, 예수를 유대주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의 유용성을 다각도에서 입증해 주고 있다.


이런 경향 속에서 예수운동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주목할 만한 다음과 같은 저술들이 쏟아져 나왔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학자들이 공동 편집하여 다섯 권으로 기획 출간한 논문집 Compendia Rerum Indaicarum ad Novum Testament[각주:65]; 모튼 스미스(M0rton Smith) 교수의 60세 기념논집으로, 유대교 학자 뉴스너(Jacob Neusner)가 책임 엮은이로 기획 출간한 네 권의 논문집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및 기타 그리스-로마의 제의들』 Christianity, Judaism, and Other Greco-Roman Cult (1975)[각주:66]; 유대교 학자인 뉴스너의 주요 저술들인 『토라의 길』 The way of Torah: An Introduction to Judaism (1970)[각주:67]; 『정치에서 경건에로』 From Politics to Piety (1973)[각주:68]; 『메시아사상의 배경: 이스라엘 역사와 공식유대교의 운명』 Messiah in Context: Israel's History and Destiny in Formative Judaism (1988)[각주:69]; 『미슈나의 경제학』 The Economics of the Mishnah (1992)[각주:70]; 및 그리스도교 학자인 코헨(Shaye J.D. Cohen)의 『고대 유대교 역사』 From the Maccabees to the Mishnah (1987)[각주:71] 등.


한편 예수의 유대성(Jewishness)을 다루고 있는 주목할 만한 연구서들로는 다음과 같은 책들이 있다: 유대교 학자인 게자 버메스(Geza Vermes)의 저술들인 『유대인 예수』 Jesus the Jew (1973)[각주:72]; 『예수와 유대교 세계』 Jesus and the World of Judaism (1983); 『유대인 예수의 종교』 The Religions of Jesus the Jew (1992)[각주:73];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인 샌더스(E.P. Sanders)의 『예수와 유대교』 Jesus and Judaism (1985)[각주:74]; 마이어(John P. Meier)의 『한 주변적 유대인: 역사의 예수에 관한 재고찰』 A Marginal Jew: Rethinking the Historical Jesus (1991)[각주:75]; 찰스워쓰(J.H. Charlesworth)의 『예수와 유대주의』 Jesus within Judaism (1988)[각주:76] 등.


여기서 우리는 특히 샌더스의 저작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그의 책이 ‘제3의 질문’의 범주에 속하는 그 어떤 저술보다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문제작이기도 하거나와 역사의 예수에 관한 중요한 방법론상의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연구 경향과는 달리 역사의 예수를 분석하는 기초적 시각을 ‘말씀’에서 ‘행위’로 전위하면서, 그 방법으로 가장 확실한 예수의 사건들에서부터 연구를 시작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데,[각주:77] 이것은 그의 연구의 독창성과 탁월성이 가장 두드러진 부분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건들을 여덟 가지로 제시하는데(이 책 제4장의 주8 참조), 이 중 예수의 ‘성전청결 사건’으로 알려진 이야기를 특별히 강조한다.[각주:78] 여기서 그는 예수를 유대교의 복권적 종말론을 계승한 이로 보면서, 성전사건은 이를 위한 예언자적 ‘상징행위’였다고 본다.


샌더스는 이러한 행위가 갖는 성전체계에 대한 파괴적 의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는데,[각주:79] 논란이 되는 것은 그가 예수의 이 행위가 성전체계에 대한 물리적 공격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상징’적 행위로만 보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다.[각주:80] 그런데 샌더스의 주장이 무엇이든 간에, ‘성전’이 유대교 체계의 이데올로기적인 규범적 정당성의 핵심적 기재인 한, 성전의 가장 주요 기능인 제의의 도덕성을 훼손시키는 상징행위는 단순한 상징 이상의 의미, 즉 지배체계의 정당성에 치명적인 손상을 가한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수 개인이 무엇을 ‘의도’했는지를―샌더스 자신이나 그를 논평하는 많은 학자들이 그토록 궁금해 하는 문제인 예수의 의도를―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 다시 마이어의 ‘실제 예수’에 대한 무망한 궁금증으로 문제를 환원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체계의 ‘정당성’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인 ‘규범적 구속성’의 문제가 예수와 동시대인들의 무의식 속에 내면화된 질서 논리였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전체계는, 비록 이 상징체계 자체가 유대인들의 일상의 삶을 직접적으로 규제하지는 못했을지라도,[각주:81] 유대교 체계를 통합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각주:82]


한편 호슬리는, 비록 그가 유대교 문헌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을 시도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유대교 연구를 포함한 문헌 중심의 예수에 대한 역사적 접근에 대해 비평하면서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즉 이 문헌들이 고대사회에서 극소수만을 점할 뿐일 문자사용 엘리트 계층의 생산물이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운동은 거의 전적으로 비문자계층의 운동이었으며, 유대교 체계의 통합의 대상 또한 거의 대부분 비문자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대안으로 인류학으로부터 빌어온 ‘거대전승’(great tradition)과 ‘미소전승’(little tradition)이라는 개념을 통해 문서 속에서 대중적 전통을 발견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실제로 그는,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이런 시각에서 유대 사상체계 속에 있는 예수를 역사적으로 조명하고 있다.[각주:83]


이상에서 살펴본 유대교와의 학문적 교류의 결과인 예수의 유대성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가능성은, 앞에서 사회과학과의 교류를 통한 방법론적 전망에 대한 논의에서도 시사됐듯이, 예수를 개체적 인격의 차원에서 보기보다는 그 맥락 속에서 파악하려는 문제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한 사람의 유대인인 예수의 삶과 실천은 당시의 유대사상적 세계라는 의사소통의 (공론)장을 통해서 조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대사상적 세계라는 공론장(publicity)은 주후 30년 어간의 팔레스티나라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국한된 소통적 시공간이 아니라, 전통이라는 과거적 시공간과 전망이라는 미래적 시공간을 갖는, 동일한 재현체계권(혹은 언어공동체) 내의 다양한 행위자/집단의 현재적 상호관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의 예수로부터 비롯된 그리스도교라는 전통의 시공간적 차연의 연장선상에 있는 우리가 이러한 역사의 예수를 ‘신학적으로 묻는 것’이 왜 무의미하겠으며, 또 불가능할 까닭이 있겠는가?


⑵ 예수에 대한 역사적 접근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배경으로, 우리는 ‘역사적 기초자료에 대한 연구의 활성화’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 역시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문헌적 자료에 대한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연구다.


첫째로, 역사의 예수를 연구하는 데 있어 유용한 문헌적 자료들에 대하여는, 1947년 사해 근방의 쿰란의 한 동굴에서 항아리 속에 든 7개의 성서 두루마리가 발굴된 이래 계속 발굴 중에 있는 사해문서[각주:84]; 1945년 상부 에집트의 나그 함마디(Nag Hammadi)에서 발굴된, 곱틱어로 된 13개의 파피루스 조각인 나그 함마디 문서[각주:85]; 요세푸스(Josephus)의 역사서들 등에 대한 최근의 활발한 전문적인 연구들을 말할 수 있다. 여기서는 특별히 우리에게도 이제 막 소개되고 있는 요세푸스의 역사서들에 관한 최근의 연구 동향에 대해 보충적인 언급을 하고자 한다.[각주:86]


요세푸스의 저술들은 역사의 예수와 가장 근접한 시공간적 배경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그 어떤 문서보다 중요하다. 특히 19세기 이래 논란되어 오다가, 1960년대 이르러 브랜든(S.G.F. Brandon)과 헹엘(M. Hengel)의 논쟁에서 가장 세련된 논거로 불꽃을 피운 ‘젤롯’ 논쟁은 요세푸스의 책들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진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운동과 당시의 민중운동의 비교연구로 활용되었는데, 헹엘의 박사학위 논문(1959년)인 『젤롯』 Die Zeloten[각주:87]은 1960년대까지의 모든 논쟁을 잠재울 만한 최고의 연구라 할 수 있다. 이 저술은 이때까지의 이 주제를 둘러싼 모든 논의의 공유점인 ‘폭력적인 반로마 유대 민중운동=젤롯’이라는 도식을, 요세푸스 저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통해 입증한 것이다. 그런데 헹엘의 젤롯 해석에 대한 최초의 비평은, 브랜든과의 논쟁이 벌어지기 전인, 1962년에 이미 유대인 학자 솔로몬 자이틀린(S. Zeitlin)에 의해서 제기되었다.[각주:88] 그에 의하면 헹엘은 요세푸스 저작에 나오는 ‘젤로테’(ζηλωτη)라는 용어를, 형용사적 혹은 동사적 용법으로 쓰인 경우까지도 모두 명사로, 더욱이 고유명사로 단정하여 ‘하나의 잘 정의된 정파’로 독해하였다는 것이다. 이후(1965년) 독일에서는 귄터 바움바하(G. Baumbach)가 보다 정련된 논거로 헹엘의 요세푸스 독해가 비평적이라기보다는 자의적이었다는 논평을 가한다.[각주:89]


그러나 헹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1971년 모튼 스미스(M. Smith)의 논문 「젤롯과 시카리: 그 기원과 관계」(Zealots and Sicarii: Their Origins and Relations)[각주:90] 이래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활발하게 전개된다.[각주:91] 이것은 요세푸스 저작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 시대의 시작과 맞물린다. 즉 요세푸스도, 여느 역사가처럼, 자기 특유의 사상과 상황이 있었고, 특정한 독자가 상정되어 있었으며, 저술 시기별 입장의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요세푸스 저작이 해석되었다는 것이다.[각주:92]


이리하여 헹엘의 젤롯 가설과는 달리, 젤롯과 시카리가 서로 변별적인 집단임이 명백해졌고, 후자가, 요세푸스가 명명한, ‘제4의 철학’과 인과관계에 있는 집단[각주:93]인 반면, 전자는 주후 66년 이후 반로마 유대 민중 봉기가 발발한 이후에 비로소 출현한 집단임이 밝혀졌다.[각주:94] 나아가 젤롯과 시카리 외에, 요세푸스가 로마에 저항했던 대중세력을 명명할 때 사용했던 제3의 용어인 ‘도적떼들’(λεσται)에 대한 사회학적 물음이 제기되기 시작했다.[각주:95] 이것은 젤롯의 정체에 대한 보다 명확한 사회역사학적인 분석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요세푸스에 따르면, 로마와 유대의 사제귀족 세력에 대한 봉기가 전면적으로 발발하기 십여 년 전 무렵(주후 40년대 말) 팔레스티나 전역에 ‘도적떼’가 갑자기 만연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후 66년 갑작스런 봉기가 발발하게 됐을 때, 요세푸스는 ‘젤롯이 도적떼들의 연합체’였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유대전쟁사』 4,3,3~9). 이것은 ‘도적떼’들이 지배체계에 대한 도전연합을 형성하면서 결집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전(前) 정치적 집단이 정치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요세푸스의 ’도적떼‘라는 용어는, 아직 어떤 이념으로 무장된 정치화된 집단이 아니었으나, 로마와 귀족들에 대해 저항적인 반면 일반 대중에게는 비교적 우호적이었고 또 그렇게 인식되던 이른바 고대사회 특유의 ‘의적’(social bandits)과 비교사회역사학적으로 유사성을 지닌다는 사실이 분석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주후 66년 유대봉기가 발발하는 것은 이들이 정치화된 도전연합으로 전화되는 것, 즉 젤롯의 등장과 결부되었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각주:96]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사회학자인 홉스봄(E.J. Hobsbawm)의 전자본주의 사회의 민중운동 유형론 연구를 팔레스티나 사회에 적용한 것이었다.[각주:97] 홉스봄은 전정치적 집단인 의적이 산발적으로 만연한 현상을 ‘원초적 반란’(primitive rebel) 상황으로, 그리고 정치화된 본격적인 봉기를 ‘혁명’(revolution)의 상황으로 본다. 호슬리는 팔레스티나에서 원초적 반란기를 40년대 말이라고 보며, 이것이 점점 가속화되면서 격화되다가 주후 66년 갑작스런 혁명의 상황으로 전화된 배경으로 ‘시카리’들의 역할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이들은 고대유대 사회에서 테러리즘 전술을 구사했던 급진주의적 지식인 운동체였는데, 이들의 테러리즘에 대한 지배집단의 공포심과 그에 따른 분별없는 과격한 폭력적 대응이, 대중적인 전정치적 저항을 정치화하는 ‘촉매’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각주:98] 한편 호슬리는 1세기 팔레스티나의 이러한 민중운동의 배경에는 ‘대중적인 메시아사상의 만연’ 현상이 있었다고 보는데, 시카리와 젤롯데는 서로 다른 ‘메시아’ 해석을 가지고 있었고,[각주:99] 또한 이와는 또 다른 유형의 메시아 운동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대중적 예언자 운동’이라고 명명하는데, 이는 다시 두 유형, 즉 ‘상징적인 신탁 예언자 유형’과 ‘행위예언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각주:100] 그리고 그는 예수운동을 (독특한) 대중적 예언자 운동의 유형에 포함하여 해석한다.[각주:101]


요세푸스의 역사서들을 통한 이러한 1세기 팔레스티나의 사회사, 특히 민중운동 유형들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분석은 기존의 ‘젤롯 대 예수,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식의 순진한 이원론적 도식을 기각시킨다. 시카리 같은 테러리즘 전술이나, 의적 같은 대중적 폭력의 전술이 활기를 띄던 시절은 주후 40년대 말부터이며, 젤롯의 등장은 주후 66년 이후의 상황과 관련되었다. 반면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는, 주전 4년이나 주후 66년의 혁명의 시대와는 달리, 그리고 주후 40년대 말 이후의 원초적 반란의 시대와도 달리, 이상할 정도로 매우 ‘조용’하던 시기였다.[각주:102]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운동에서 ‘폭력과 관련해서 해석될 수 있는 예수 담론’의 해석 문제는 (초역사적인 윤리적 담론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하튼 이와 같은 문서적 기초자료에 대한 연구는 예수운동을 그 시대의 역사사회학적 맥락과 소통관계에서 해석될 여지를 넓혀주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고고학적 연구 또한 예수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성서고고학적 연구는 18세기경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접근방식으로 시작된 이래, 1918년 팔레스티나가 영국령으로 편입되면서 이곳에 고대국(Department of Antiquities)이 설치되고, 1925년 예루살렘에 히브리 대학이 설립되면서 활발한 발굴과 분석 작업이 수행됨으로 본격적인 발전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경까지 성서고고학은 성서학의 보조학문으로, 독자적인 연구방법을 개발해내지 못한 채 일종의 성서의 변증학에 그치는, 아마추어적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각주:103]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이르게 되면서 고고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특히 이스라엘에서 텔아비브(Tel-Aviv) 대학, 브엘세바(Beer-Sheva)의 대학, 하이파(Heifa) 대학 등에서 고고학과가 설립되고,[각주:104] 미국을 중심으로 성서의 보조학문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분과학문으로의 운동이 벌어지며, 이와 보조를 같이 하여 타학문과의 대화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유수한 고고학 전문지들이 이 시기에 본격적인 제 위상을 갖추어 갔다.[각주:105] 그리하여 새로운 분과학문으로 ‘시라아-팔레스티나 고고학’이 성립하고, 연구 방법론적 차원에서는 ‘신고고학’(new archeology)이라고 불리는 경향이 자리잡게 된다.[각주:106] 특히 사회학적, 인류학적, 생태학적인 연구방법들이 고고학에 접맥되고, 컴퓨터를 활용한 수량사적 연구방법이 적극 활용되었다.[각주:107]


이러한 고고학적 연구는 예수운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특히 문서전승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소홀했던 부분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각주:108] 가령 오펜하이머(Aharon Oppenheimer)는 암하아레츠(‘Am Ha-Aretz)를 문헌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이들이 사회학적으로 갈릴래아나 유다 지방의 일반(농)민을 가리킨다는 결론을 도출해 냈는데,[각주:109] 고고학적 연구는 이러한 일반민들의 심성사(history of mentalties)[각주:110]적 상황을 밝혀내는 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가령 일반농민의 주거 형태, 농기구, 농경양식, 가축의 이용방식, 인구분포 등에 대해 고고학적 연구에 힘입어 어느 정도 개연성 있는 추정이 가능하게 됐다.[각주:111]


따라서 호슬리처럼, 거대전승인 문서전승으로부터 그 속에 감추어진 미소전승을 찾아내려는 관심을 기울일 때 고고학적 성과들이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호슬리는 미소전승을 분별해내는 기법의 하나로, 통계학 용어인 외삽법(extrapolation)을 제안하고 있는데,[각주:112] 이것은 연구 대상의 자료가 부족한 경우, 보다 풍부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비교대상의 결과를 이용해서, 혹은 유사 유형들에서 일반화한 것을 이용해서 결과를 유추해내는 방법을 가리킨다. 그가 비교의 대상으로 설정한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전자본주의 사회의 민중운동 유형(홉스봄)과 농민의 생활사(울프)를 다룬 연구다. 이 연구들은 공히 생활사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바로 이 점에서 이것들은 아날학파의 심성사적 관심과 유사성을 지닌다. 만약 푸코(M. Foucault)의 에피스떼메(épistémè) 개념이 아날학파의 ‘심성’와 유사성을 갖는다면, 심성사적 차원의 생활사는 시공간적인 장기지속성을 지니며,[각주:113] 그런 점에서 이에 기초한 연구는 비교론적 자료로서 시공간적 간극을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용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호슬리가 고고학적 연구에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비교론적 방법은, 그것이 시리아-팔레스티나 고고학에 의존한 것은 아니더라도, 아날학파와 간학문적 연구를 가능하게 한 신고고학적 성과와 유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호슬리의 비문자계층을 향한 역사사회학적 관심을 더욱 충실하게 수행하려면, 비교역사사회학뿐 아니라 시리아-팔레스티나 고고학을 통한 보완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고학적 연구는 문헌적 연구와 결합하여 비문자계층의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기초자료로서 중대한 진전을 이룩할 수 있으며, 예수운동의 사회적 소통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⑶ 마지막으로 우리는 제3세계 신학의 여파로 ‘갈등’의 재인식이 최근의 역사의 예수 연구에 새로운 통찰 가능성을 부여해 준 측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것은 근대[각주:114] 신학사를 일별해 봐도 얼마든지 추정 가능하다. 가령 합리주의적 신학은 ‘인간’을 강조하였는 바, 이것은 형식논리상으로는 ‘신과 인간’이라는 대립구도에서 후자에 강세를 주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은 신분적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평등’을 추구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연구에서 역사의 예수는 특화된 대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게 내재하는 휴머니스트로서 표상되었던 것이다. 또 20세기 실존주의적 신학이나 신정통주의적인 구속사적 신학은 인간의 합리성이 파괴적인 물질문명과 파시즘체제의 횡포로서 발현되고 있다는 시대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은 더 이상 무의미하며, 역사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절대타자적 신만이 우리에게 해방적 가치를 던져줄 수 있다는 바람이 20세기의 신학들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예수는 (그 용어에서 이미 ‘내재성’이라는 함의가 깔려 있으므로) 신앙적 물음으로 무의미하거나, 다른 인간과는 전적으로 변별적인 타자의 모습으로써만 유의미하다고 주장되었다.


이상과 같이 근대의 신학사와 역사의 예수 연구사는 단순한 시계시간적인 과거회고인 역사적 물음만이 아니라, 역사의 예수를 묻는 이의 동시대적인 시대인식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이 물음은 동시대의 역사에서 갈등의 차원을 문제시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역사 비판의 언어로서, 즉 동시대적인 갈등을 극복하려는 신학적인 역사 개입의 언어의 하나로서, 신학의 내용을 발전시켰고 역사의 예수를 구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제3세계 신학이 제기하는 ‘역사의 예수’라는 문제설정은 과연 어떤 통찰을 새롭게 부여하고 있는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자민족 중심주의와 연관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문제의식이 이 시기에 비로소 탄생한 것은 아니지만, 이때의 새로움은 이 문제제기의 주체가 이른바 ‘제3세계적(=주변부적)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있다. 가령 백인에 대해 흑인이나 유색인, 남성에 대해 여성, 서구 민족들에 대해 비서구 민족들의 신학/신앙적 항의가 1960년대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각주:115] 이러한 갈등적 문제의식에서 구원자 예수는 ‘흑인 예수’, ‘여성 예수’, ‘가난한 자 예수’, ‘민중 예수’ 등, 식민주의적 박탈 대상의 모습으로 표상될 때에야 ‘비판’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더욱이 지배적 신학 담론이 예수를 역사적으로 탈내재화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제3세계 신학은 맹렬하게 역사의 예수를 재조명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것은 서구사회의 비판적 그리스도인들의 호응을 불러 일으켰고, 이런 점에서 역사의 예수에 대한 ‘제3의 질문’은 많은 경우 (서구 남성 백인 중심주의적인) 식민주의에서 비롯된 ‘갈등’의 함의를 지니게 되었다. 지배담론으로서의 신학에서 인간은 신에 대응하는 존재, 즉 전반적인 타락의 상황 아래 있는 인간으로 추상화되어 있었다. 이것은 물론 자민족 중심주의적인 식민주의와 결합되어 권력과 연계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갈등을 함의하는 역사의 예수에 대한 새로운 물음은 권력과 탈권력 상황에 대한 맥락적 인식을 반영하는 이론적 접근을 필요로 하며, 여기서 1970년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었던 비판이론적 사회과학과의 교류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제공되었다.


그런데 1980년대에 이르면 세계체계의 지구화가 현저하게 진척되면서 담론의 혼합 현상이 가속화된다.[각주:116] 이것은 이전의 비교적 선명하게 구분되던 지배담론과 대항담론간의 차이가 산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권력과 탈권력의 식민주의적 상황이 단순히 인종, 성, 계급 등의 거대담론으로 환원되지만은 않는다는, 비판이론의 자기비판적 성찰이 확산된다. 이와 관련하여 주로 계급과 관련된 고전적인 사회운동의 저항담론으로서의 특권적인 지위가 분산되고, 새로이 부각된 사회운동인 시민운동과 박탈대중적 운동들의 저항담론들과의 담론접합의 문제가 실천의 당면 과제로서 다가오게 된다. 그리하여 비판이론은 거대담론과 미소담론을 그물처럼 엮어 꿰는 복잡하게 얽힌 권력망(power network)에 대한 분석 및 그것의 극복을 위한 담론의 소통성에 대한 연구를 자극했다.[각주:117]


최근의 예수 연구가 간학문적 연구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고, 그 수준에 있어서 점점 전문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최근의 사회과학의 문제설정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의식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결국 동시대적인 비판이론적 차원에서 역사의 예수를 명시적으로 추구하는 학자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소통성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간학문적인 연구를 시도하는 많은 연구자들이 권력과 접합된 그리스도교의 재현체계를 해체시키는 저항담론의 형성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이, 이 책 전체가 시사하고 있고 또 이 글이 보충 설명하고 있듯이, 제3의 질문 혹은 예수 르네상스는 역사의 예수에 대한 지난 시기의 질문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시기의 연구는 예수에 대해 시계시간적인 의미의 단순 과거적 지평에서 물음을 던지면서, 개체적 인격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래서 이야기 형식으로 쓰인 복음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관계적 대상들을 괄호친 채, 예수 개인에게만 조명을 비춤으로써, 결국 ‘사건’은 사라지고 ‘말’만 남게 되는 결과를 빚었다. 그리하여 ‘상황이 탈각된 말’을 다루는 신학자들은 역사에 대한 회의주의자가 되거나 순진한 실증주의적 역사 낙관론자가 되었고, 양자 모두에서 신학/신앙과 역사적 비평 방법 간의 긴장/분리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늘 여기’라는 시공간적 현재성의 영역에서 묻게 되는 신학/신앙적 의미는 ‘과거의 예수’를 외생적 변수로서 취급하고, 현재화를 위한 제2차적인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반면 최근의 연구 경향은 예수를 역사적인 방법론으로 조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공간적 소통성에서 찾고 있다. 여기서는 역사의 예수에 대한 물음이 단독자적인 인격체로서 추구되기보다는 시공간적인 관계성의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즉 물음의 초점이 ‘사건이 탈각된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식 주체들이 (현전과 부재의 시공간적 관계망 속에서 엮어가는 이야기인) ‘사건’에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적인 새로운 전개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과거와 미래가 현재성의 내생적 변수라는 현대해석학적 문제설정과 친화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보여 준다. 요컨대 최근의 예수 연구 경향은 신학과 방법론간의 긴장/분리를 극복할 가능성을 향한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이것은 예수에 대한 역사학을 실천이론적 학문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즉 역사학은 시공간적 과거를 다루는 이해의 학문으로, 이 과거를 현재성 속에 재현함으로써 의미를 추구하는 학문인데, 이것의 실천이론화란 이러한 의미화를 통해 현재성을 구성하는 기억과 전망의 의사소통 과정에 해방적/권력해체적으로 개입하는 이론화를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극복, 즉 예수 역사학의 실천이론화를 위해서는 보다 명시적인 해석학적 탐구가 시도될 필요가 있다. 즉 신학과 방법론을 연결하는 대안적인 매개적 개념화가 명시적으로 시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3의 질문의 범주에 포함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작업을 거의 시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보그(Borg)와 피오렌자(Fiolenza)만이 재해석된 ‘영성’ 개념을 통해 이것을 모색하고 있다.[각주:118] 이러한 재개념화는, ‘영’이 성서 자체에서도 이미 시공간적 한계를 초월하는 ‘소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수사어라는 점에서, 그리고 교회의 용어로서 확고하게 정착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영성’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취지에 맞는 신학과 방법론을 매개하는 개념으로서는 부적합한 측면도 갖고 있다. 첫째로, 영은 소통성의 차원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즉 영은 ‘신의 자기 비움’에서 출발하기보다는 ‘인간이 된 신의 존재로의 복귀’에서 출발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상호성의 문제설정에는 자기 한계를 갖는다. 둘째, 사회적 삶의 일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즉 ‘영성’은 특화된 경험을 강조하기 때문에, 삶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일상을 매개하는 또 다른 개념화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각주:119] 셋째, 영성이라는 개념은 신학적이기는 하지만, 사회학적 용어로 충분히 발전시키기에는 용이하지 않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러한 이유로 ‘영성’보다는 다른 대안적인 매개적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나는 민중신학의 ‘사건’ 개념이 이 점에서 매우 탁월한 신학적 성과이며, 풍부한 발전 가능성을 가진 개념어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민중신학의 사건 개념은 실존주의적 신학의 (신앙)사건의 재해석에서 그 개념화가 시작되었다. 실존주의적 신학에서 사건은 시공간을 달리하는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의 의미를 연결하는 개념이다. 즉 예수사건과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사건,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의 신앙사건 사이를 연결시키기 위한 개념인 것이다. 이때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역사를 초월하는 실존적 만남의 사건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역사적 회의주의가 전제되어 있다.


반면 민중신학은 이러한 사건 개념을 채용하면서 실존에 ‘현존’의 함의를 개입시킨다.[각주:120] 요컨대 민중신학의 사건 개념은 불트만의 사건 개념이 갖는 ‘관계성’이라는 함의를 역사적 차원으로 확장 재해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하나는 사건 주체의 ‘(고백/결단을 통한) 자기초월’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며(이것은 불트만의 의미를 계승하는 측면이다), 다른 하나는 사건의 장소가 현재라는 역사적 시공간[각주:121]이라는 점이다(이것은 불트만을 지양한 측면이다).[각주:122] 그러므로 여기에는 행위자와 사회적 구조간의 상호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민중신학은 사건의 장을 ‘현장’이라고 부른다. 즉 현장은 신앙적 고백과 결단을 통한 자기초월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적 장소이며, 여기에서 이 신앙 사건을 중심으로 구조와 행위자간의 지속적인 상호관련성이 형성된다. 그러므로 현장은 물리적인 단순 지리적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소통적 시공간이며, 그 범역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대면적 장소에서부터 지구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한시적인 것에서부터 장기지속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각주:123] 이때 이 현장은 백지상태의 시공간이 아니라, 전통을 통해서 구조화된 지배담론이 재현체계를 형성하는 현재성의 시공간이며, 이 지배담론이 추구하는 미래적 전망에 의해 역투영된 현재성의 시공간이다. 동시에 이 현장은 전통과 전망을 통해서 자기반성적인 성찰이 체계비판의 담론으로서 지배담론에 대항하는 현재성의 시공간이다. 즉 현장은 지배담론과 비판담론들이 공간 메타포로서 이데올로기적 대결을 벌이는 사건의 공론장이다. 그리고 사건적인 신앙의 결단이란 이 공론장에서 성찰적인 비판적 담론으로 구성된다.


민중신학은 사건의 이러한 비판적 성격을 ‘민중’이라는 한정어를 붙임임로써 구체화한다. 즉 ‘민중’사건은 신앙적 결단 사건의 지향을 명료히 한다. 그런데 민중사건의 원사건은 예수사건이다. 즉 예수사건은 민중사건의 전형인 것이다. 민중신학은 예수사건을 ‘권력해체적 사건’으로 본다.[각주:124] 그러므로 민중사건은 그물망처럼 구조화된 권력 네트워크의 시공간에서 그것을 해체하려는 실천을 지향한다.


이러한 민중신학의 지향은 영원회귀적이면서(과거적 시공간의 지평) 미래전망적 차원(미래적 시공간의 지평)을 갖는 이상적 담론 지평인 ‘하느님나라’를 현재성 속에 투사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나라’라는 신앙적 언표는 그때마다의(동시대적인) 시공간에 권력해체를 지향하는 기대의 최대치로서 구체화되는, 과정론적(화용론적) 진리체계다.


이상이 민중신학의 ‘사건론’의 개요다. 이런 점에서 민중신학의 사건 개념은 사회과학적 비판이론과 신학적 비판이론의 매개고리적 개념어로 매우 유용하며,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다. 또한 권력과의 연계 가능성을 끊임없이 자기반성적으로 성찰하는 논리구조를 가지고 있는 성찰적 이론의 틀을 갖추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역사의 예수에 대한 제3의 질문 경향의 향후 전망을 비판적 실천이론의 차원에서 모색해야 한다는 논지를 펴는 홀렌바하의 주장(이 책 제5장)은 민중신학의 사건 개념과 결합할 때 비로소 신학과 방법론간의 긴장을 극복하는 해석학적 지평을 확보할 수 있다. 


in 김진호 엮음, 『예수 르네상스─역사의 예수연구의 새로운 지평』 (한국신학연구소, 1996)



[각주]

  1. '재현체계'란, J. Lacan에게 있어서, 자신이 그러하다고 생각/착각하게 하는 강제성/구속성을 갖는 (마치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결코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무의식적 지반을 말한다. 즉 이러한 생각/착각을 갖는 주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진경, 「자크 라캉: 무의식의 이중구조와 주체화」, 『철학의 탈주』 (서울: 새길, 1995) 참조. 그러므로, '주체의 분열'을 통해서 주체가 재현체계로부터 해방될 여지를 상정하는 들뢰즈(G. Deleuze)와 가타리(F. Guattari)의 견해를 경청한다 하더라도, 시계시간적 개념의 과잉개입에 의해 형성된 재현체계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주체의 내부에서 과거와 미래를 주체 형성에 작용하는 시간요소로 인식할 여지를 강하게 제약하게 된다. 즉 시계시간적 재현체계는 과거와 미래를, 현재성을 구성하는 '내생적 변수'가 아니라 '외생적 변수'로 생각/착각하도록 행위자를 강제한다. [본문으로]
  2. 여기서 ‘공간’(space)은 ‘장소’(place)와 동일시될 수 없다. 장소가 단순 지리적인 물리적 공간이라면, 공간은 행위자(agents)의 사회적 활동이 시공간 속에서 조직화되는 사회적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가령 교회는 이웃하는 개인주택들과 구별되는 하나의 물리적 ‘장소’이지만, 동시에 교회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갖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적 관계를 형성하는 공간이며, 이 관계는 주로 일요일이라는 시간대에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장소는, 행위자간의 관계가 서로 대면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질 때에만 유의미해진다는 점에서, ‘대면성’(facibility)을 전제한다. 반면 공간은, 가령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독서를 통해서 감정이입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대면성이 결여된 상태에서도 행위자간의 상호작용이 형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소성을 넘어선다. 나는 여기서 사회적 변동을 조명하는 데 시간성과 공간성 및 행위자의 요소를 종합하여 파악하려는 기든스(A. Giddens)의 견해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책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비판』 (서울: 나남, 1991), 특히 서론과 제1장 참조. [본문으로]
  3. 이것은 J. Derrida의 현전(presence)과 부재(absence) 개념을 시공간 패러다임에 적용한 것이다. 즉 현재의 시공간적 체험의 영역이 ‘현전’에 상응하고 있다면, ‘기억’이나 ‘전망’의 영역은 ‘부재’와 상응한다. J. Deridda, 박성창 역음/옮김,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 쥴리아 크리스테바와의 대담」, 『입장들』 (서울: 솔, 1994) 참조. [본문으로]
  4. 흔히들 ‘실천’을 ‘이론’과 대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행위의 영역과 정신의 영역을 이분화하여 이해하는 이원론적 관념론의 소산일 뿐이다. 실제로 우리 삶에서 정신작용과 행위작용은 별개로 작용하지 않는다. 한편 ‘이론의 실천성’을 논하는 이들간에도 여러 가지 오해를 범한다. 그 하나는 실천을 ‘실행’(practice)와 혼돈하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실천이론은 단순히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론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실천적 유용성에 의문을 던지는 많은 이들이 이런 예에 속한다. 프래그머티즘적 실천관은 R. Rotty의 신실용주의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전개되는데(이에 대하여는 김용학‧전효관, 「사회과학 패러다임의 위기와 그 쟁점: ‘근대적 과학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엮음, 『위기의 세계와 한국』 <서울: 나남, 1994> 참조), 그에게서는 실천이 ‘지금 여기’에서의 실용적 유용성 문제로 환원됨으로써, H.G. Gadamer의 ‘전통’의 지평이나, J. Habermas의 ‘전망’(이상적 담화상황)의 지평이 ‘현전’과 의사소통하면서 형성되는 성찰성(reflecxivity; A. Giddens)의 실천적 차원을 사상시킨다. 또 다른 흔한 오해로는, 어떤 점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오해와 종종 연결되는 것인데, 이론의 실천성을 ‘논리의 단순성’과 동일시하는 견해다. 즉 대중적 이해 가능성이 이론의 실천성을 보증하는 논거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일종의 ‘대중주의’이며 ‘반지성주의’인데, 조야한 극단적 상대주의적 경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규정하듯이 ‘학문’이 현재성을 구성하는 기억과 전망의 의사소통 과정에 ‘이론의 차원에서 개입하는 실천의 영역’이라 한다면, 이론의 실천성 문제는 논리의 대중적 이해 가능성 여부가 아니라, 현재의 체계에 대한 비판이론적 개입의 타당성 여부인 것이다. [본문으로]
  5. 이것은 1953년 마르크부르크에서 행해졌던 E. Käsemann의 강연 「역사적 예수의 문제」(이 논문은 그의 논문 모움집인 강한표 옮김, 『역사적 예수 연구』 현대신서 123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2>에 번역 게재되었음)를 기점으로 잡은 것이다. 하지만 불트만의 탈신화화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은 이미 1940년대부터 열띠게 전개됐다. 그렇지만 이러한 비판은 아직 역사의 예수에 관한 새로운 지평을 설정하지 못한 채 불트만의 방법론의 타당성에 문제를 제기한 것일 뿐이다. Reginald H. Fuller, 황성규 옮김, 『현대 신약학의 주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77), 21쪽 이하 참조. [본문으로]
  6. W. Wrede는 18~19세기의 신약학을 ‘교리적 선입견(신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역사적 연구(방법론)의 투쟁’이라고 요약한다. R. Morgan, 『신약신학의 본질』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참조. [본문으로]
  7. 이런 점에서 Albert Schweitzer가 18~19세기의 ‘고전적 질문’을 검토하면서, 이 연구들이 자기 시대의 (예수전 저자들 각자의) 이상(理想)을 예수에게 덧입혔다고 비평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또한 20세기에 들어 이것이 예수 연구가들에게 타당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였던 것은, 20세기의 연구가들의 이해를 구속/강제하는 재현체계가 달라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본문으로]
  8. J.P. Meier, A Marginal Jew: Rethinking the Historical Jesus (New York: Doubleday, 1991), 21~40쪽 참조. 이 부분이 최갑종에 의해 번역 게재되었다. 「실제 예수와 역사의 예수」, 최갑종 엮음/옮김, 『최근의 예수 연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23~51쪽. [본문으로]
  9. 대부분의 예수 연구가들은 이런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Bultmann과 N. Perrin 등은 이 점에서 주목할 만한 논의를 전개했다. N. Perrin, Rediscovering the Teaching of Jesus (Harper & Row, 1976), 제5장 참조. 또한 Perrin에 대해 상세한 논평을 보여주고 있는 A.N. Wider, “Norman Perrin and the Relation of Historical Knowledge to Faith”, HTR 82 (1989) 참조. [본문으로]
  10. Meier, 앞의 책, 51쪽. [본문으로]
  11. 그래서 종종 성서학자들은 해석과정을 ‘역사비평적 해석’과 ‘신학적 해석’으로 이분화하곤 한다. [본문으로]
  12. Heidegger에게서 ‘현존재’(Dasein)란 존재(Sein)의 시간적인 구현태라 할 수 있으며, ‘실존’(Extanz)은 다른 모든 현존재들과 인간 현존재를 구분짓는 독특한 존재 방식을 가리킨다. 이기상,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 존재의 의미와 그 역운」, 이기상 엮음, 『하이데거 철학에의 안내』 (서울: 서광사, 1993) 참조. [본문으로]
  13. Heidegger의 해석학적 순환론은 ‘실존론적 순환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존재는 시간 속에서(즉 역사적으로) 자신의 본질을 부분적으로 드러내는(현존) 동시에 부분적으로 감춘다(부재). 그러므로 존재의 시간적 구상태인 현존재는 닫혀 있는, 즉 규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가능존재(Möglichsein), 즉 언제나 가능성에 개방되어 있는 존재다. Heidgger의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에 대한 실존론적 이해 과정이 바로 그의 해석학적 순환이요 실존론적 순환인 것이다. [본문으로]
  14. P.H. Koesters, 「하이데거의 삶과 철학」, 이기상 엮음, 『하이데거 철학에의 안내』 (서울: 서광사, 1993), 특히 31~34쪽 참조. [본문으로]
  15. 이러한 한계는 1901년 W. Wrede의 문제제기에 이어, 1906년 A. Schweitzer의 ‘파산선고’에서 결정적으로 노정된다. [본문으로]
  16. 1919년 처음 출간된 R. Bultmann의 대저작 『공관복음 전승사』는 Heidegger와의 만남 이전의 저술로서 18~19세기의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의 냄새가 짖은 저술이었지만, 여기서 그가 얻은 결론은 양식비평을 통해서도 역사의 예수를 향한 접근로가 봉쇄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본문으로]
  17. ‘전이해’ 개념은 Heidegger의 ‘이해’ 개념에 영향받은 것이다. Heidegger에 있어 ‘이해’(Vorstehen)란 ‘세계 내 존재’로서의 인간 현존재의 삶이 전개되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리키는데(그에게 있어서 인간 현존재를 배제한 세계나 이해는 존재할 수 없다), 여기에는 (초시간적인) 근원적 존재가 구조적 맥락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차원과, 시간속에 투사되어 (획일적인 인과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 구체화된 그때마다의 자율적인 ‘가능 존재’라는 차원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다. 이 양차원을 매개하는 인간 현존재의 독특한 존재방식이 바로 ‘실존’이다. 여기서 Bultmann의 ‘전이해’는 전자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8. 1923년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하이데거와의 교류가 시작된 이래, 1926년 저술된 JESUS는 바로 이런 역사관을 담고 있는 그의 최초의 본격적인 저술이자 최고의 걸작에 속한다. Walter Schmithals, 변선환 옮김,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 특히 387쪽 참조. [본문으로]
  19. P. Ricoeur, 「해석학과 불트만」, 『종교신학 연구』 5 (1992), 특히 263쪽 참조. [본문으로]
  20. Bultmann, 유동식 옮김, 『신약성서의 실존론적 해석』 현대신서 8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4). [본문으로]
  21. Ricoeur, 앞의 논문, 271~72쪽 참조. [본문으로]
  22. 김명수, 「민중신학의 해석학(1)」, 『기독교사상』 (1992.3); 이기상, 「하이데거의 존재와 사상」, 91쪽 참조. [본문으로]
  23. 포스트불트만 학파 가운데 Bultmann을 해석학적 지평에서 가장 충실히 계승하면서 그를 넘어선 학자라 할 수 있는 Erst Fuchs와 Gerhard Ebeling이 ‘역사’에서 ‘문학’으로 선회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들은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 E. Käsemann, H. Conzelmann 등과 함께 포스트불트만 학파를 이루어서 Bultmann과 논쟁을 벌일 당시에는 불트만의 연구를 방법론으로 파악하는 해석학적 몰이해 경향을 띄었지만, 그 이후에는 불트만이 의존하고 있던 전기 하이데거 대신 후기 하이데거 해석학에 영향을 받으면서 이른바 ‘신해석학’을 발전시킨다. 후기 하이데거는 1930년대 이후, 물음의 초점을 존재에서 현존재로 전환하면서 현존재간의 대화에 주목함으로써 ‘언어’ 연구에 몰입하게 되는 경향을 가리킨다. 후기 하이데거에 대하여는 강학순, 「후기 하이데거의 해석학 고찰」, 한국현상학회 엮음, 『생활세계의 현상학과 해석학 고찰』 (서울: 서광사, 1991) 참조. 한편 신해석학에 대하여는 Ebeling의 책 『신앙의 본질』 (허 혁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A.C. Thiselton, 「신해석학」, I.H. Marshall 엮음, 『신약해석학』 (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5) 참조. [본문으로]
  24. 이들의 해석학적 불철저성에 대한 Bultmann의 비판은 경청할 만하다. 그의 논문 「최초의 교회의 ‘케리그마’와 역사의 예수」, 『현대 역사적 예수 연구』 복음주의신학총서 14 (1976) 참조. [본문으로]
  25. 이 표준들에 대한 논의에 관하여는 이 책 제5장의 Hollenbach의 논문의 ‘4~5절’ 참조. 그런데 표준들을 통해 역사적 진정성을 확인하려 했던 시도는 Bultmann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요컨대 Post-Bultmanian의 ‘새로운 물음’은 방법론적으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단지 신학적인 데에 초점이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주장은 Bultmann보다 더욱 신학과 방법론간의 골을 깊게 했다. [본문으로]
  26. ‘스팩터클’이라는 것은 사회적 모순의 결과로 양극화 혹은 분절화되는 상항에서 사회의 통합(social integration)을 위한 장소의 상징화를 의미한다. 가령 김영삼 정부가 통합의 취약지역인 광주에서 비엔날레라는 국제적 예술축전을 벌인 것이나, 식민주의의 청산이라는 슬로건으로 악화된 여론을 호전하려는 의도로 추진한 경복궁 재건 및 중앙청 건물 철거 계획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본문으로]
  27. G. Theissen의 연구는 바로 이런 점에서 중요한 방법론상의 진전을 이룩하였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의 논문 「사회학적 문제에 대한 연구사적 고찰」, 김명수 옮김, 『원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참조. [본문으로]
  28. 이때 수신자는 발신자 자신일 수도 있고, 그 외부의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본문으로]
  29. 가령 어렸을 적에 읽은 『수호전』이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공간환경 속에서 다른 의미로서 느껴지는 경우, 혹은 이 고전을 어떤 이는 ‘영웅담’으로 읽고 그와 시공간적 환경을 달리하는 다른 이는 ‘고대사회의 민중운동 이야기’로 읽는 경우 등이 그러하다. 이렇게 시간적인 ‘지연’과 공간적인 ‘차이’로 의미의 변형을 설명하기 위해 Derrida는 이 두 개념의 합성어인 ‘차연’(diffèrance)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의 끝없는, 종잡을 수 없는 의미의 변형이 이루어진다고 보면서, ‘발신자의 부재, 수신자의 부재’라는 명제를 제기하며, 이는 극단의 소통불가능한 지평을 논하는 데로 이어진다. 반면 Gadamer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이해의 공동지평을 통해 ‘지평 융합’이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차원을 설정함으로써, 해석학적 순환은 결국 상호이해라는 ‘합의’에 이르는 가능성의 문을 남겨둔다. 허영, 「자크 데리다: 해체적 독해와 지배담론 허물기」, 『철학의 탈주』; Derrida, 「함의: 앙리 롱스(Henri Ronse)와의 대화」, 『입장들』 참조. [본문으로]
  30. 신학 제분야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장 두드러지게 인지한 영역은 아마도 설교학인 듯하다. 1969년에 출간된 David J. Randolf, 『설교의 갱신』 (정용섭 옮김;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76)과, 1974년에 출간된 Rudolf Bohren의 책 『설교학 원론』 (박근원 옮김;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79) 제8장 참조. [본문으로]
  31. 이런 의미에서 Paul Ricoeur의 해석학을 이용해서 ‘출애굽’ 신앙의 전승사를 연구한 해방신학자 J.S. Croatto의 저술 『엑소더스. 해방의 해석학』 (이정순 옮김;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5)은, 그 방법론을 그가 얼마나 충실하게 적용하고 있는지의 여부와는 별도로, 중요한 기여라 평할 만하다. [본문으로]
  32. 이런 진리관은, 타자에 대해 배타주의적인 정체성을 추구하는 서구의 이성중심주의와 유비적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로고센트리즘’(Logocentrism)이라 명명할 수 있다. [본문으로]
  33. 이 책에 제3장에 소개된 Borg의 논문과 제5장에 소개된 Hollenbach의 논문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34. 「예수세미나」(Jesus Seminar)의 설립은 특별히 신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강한 의무감과 연결되어 있다. [본문으로]
  35. 사회과학의 학문적 수용은 역사는 대략 1960년대 말, 1970년대초부터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초기의 연구들은 국내에 비교적 많이 소개된 편이다: 안병무 엮음, 『사회학적 성서해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4); H.C. Kee, 서중석 옮김, 『새 시대의 공동체』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 영어 원본은 1977년 출간); J.G. Gager, 김쾌상 옮김, 『초기기독교형성과정 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0; 영어 원본은 1975년 출간); A.M. Malherbe, 조태연 옮김, 『초기그리스도교의 사회적 이해』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4; 영어 원본은 1983년 출간); G. Theissen, 조성호 옮김, 『예수운동의 사회학』 (서울: 종로서적, 1981; 독일어 원본은 1978년 출간); 같은 저자, 김명수 옮김, 『원시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독일어 엮음집은 1983년 출간); D. Tidball, 김재성 옮김, 『신약성서 사회학 입문』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4; 영어 원본은 1983년 출간); W.A. Meeks, 황화자 옮김, 『바울의 목회와 도시사회』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93; 영어 원본은 1983년 출간) 등이 있다. 그밖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무수한 이러한 연구들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면, Daniel J. Herrington, “Sociological Concepts and the Early Church: A Decade of Research”, Theological Studies 41 (1980), 180~91쪽; 같은 저자, “Second Testament Exegesis and the Social Science: A Biblography", BTB 18/2(1988), 77~85쪽(이 논문은 젊은 민중신학자들의 모임 엮음, 『시대와 민중신학』 <1995>에 김진호에 의해 번역 게재되었다) 참조. 반면 1980년대 중반 이후의 보다 세련된 간학문적 연구의 성과들은 거의 소개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R.A. Horsley, 최형묵 옮김, 『예수시대의 민중운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같은 저자, 이준모 옮김, 『예수운동. 사회학적 접근』(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3; 영어 원본은 1989년 출간) 정도가 고작이다. 초기 연구 경향의 한계에 대하여는(Meeks나 Malina 등은 어느 정도 예외라 할 수 있지만), R. Rohrbough, “‘Social Location of Thought’ as a Heuristic Construction New Testament Study”, JSNT 30 (1987), 103~119쪽 참조. [본문으로]
  36. 이점에서 고대와 현대의 시간 개념을 대조한 Malina의 논문 “Christ and Time: Swiss or Mediterranean?”, CBQ 51 (1989)은 이런 문제의식이 얼마나 급속히 성숙해 갔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본문으로]
  37. John Howard Schütz, “Charisma and Social Reality in Primitive Christianity”, JR 48 (1974); Douglas F. Barnes, “Charisma and Religious Leadership: An Historical Analysis”, JSSR 17 (1978) 참조. [본문으로]
  38. Malina, “Jesus as Charismatic Leader?”, BTB 14 (1984); Borg, Jesus. A New Vision 참조. [본문으로]
  39. 즉 정부정의 체계의 구체화는, 의식 이전의 영역(Lacan에 따르면 ‘무의식’)에서 사회 구성원의 사고체계를 규제/강제하는 그 사회의 재현체계를 형성한다. [본문으로]
  40. L. Althusser은 Lacan의 무의식의 지반으로서의 재현체계 개념을 빌어서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을 개척한다. 백승욱, 「루이 알튀세르: 비철학적 철학을 위하여」, 『철학의 탈주』, 61쪽. [본문으로]
  41. 문화인류학과의 교류를 통해 예수시대의 정결체계(정부정의 체계)의 사회학적 함의를 추구한 주목할 만한 연구로는 Jerome Neyrey, “The Idea of Purity on Mark's Gospel”, Semeia 35 (1986), 91~128쪽; Bruce J. Malina, The New Testament World. Insights from Cultural Anthropology (Atlanta, CA: Scholars Press); 같은 저자, Christian Origins and Cultural Anthropology: Pratical Models for Biblical Intrepretation (Atlanta, Georgia: John Knox Press, 1986). 이들의 논의는 특히 이데올로기적 하위체계의 사회적 역동성에 대해 논의한 최근의 문화인류학자 Mary Dauglas의 연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녀의 책, Purity and Danger: An Analysis of Concepts of Pollution and Taboo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66); S. Isenberg, “Bodies, Natural and Contrived: The Work of Mary Douglas”, Religious Studies Review 3 (1977), 1~17쪽 참조. 한편 예수 연구에 초점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Halvor Moxnes, “Honor and Shame”, BTB 23/4 (1993)은 이것을 ‘성’(gender/sex) 문제 해석에 데 활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운동을 이해하는 데 많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또한 J.J. Pilch, “Death with Honor: The Mediterranean Style Death of Jesus in Mark”, BTB 25/2 (1995)는 예수의 죽음 이야기가 지중해 성인 남성 사회의 재현 체계 속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정향된 ‘어른스러움/의젓함’이라는 가치와 결부된 것임을 보임으로써, 성서 텍스트의 역사적 진정성을 사사한다. [본문으로]
  42. Borg, 앞의 책 참조. [본문으로]
  43. 게다가 그는, 가령, ‘종말론’적 언표의 과거회귀적 형태에 집착한 나머지, 이 책 제4장에 수록된 그의 글에서 Horsley나 Fiolenza가 정치적 급진주의를 종말론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 비평을 가한다. 그러나 그는 ‘묵시적 종말론’이 ‘경험’(과거적 시공간)과 ‘전망’(미래적 시공간)을 현재 속에서 극화시키고 있는 소통형식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종말론은, 고대에서든 오늘날에서든 마찬가지로, 종말론이 공론화된 영역 안에서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행동주의를 수반하는 것이다. 결국 Borg는 우리의 모든 언어 행위 자체가 ‘시공간적 과거와 미래의 현전과 부재의 어우러짐’이라는 성격을 지니는, 즉 해석학적 지평을 지니는 것임음을 몰각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44. 이에 대하여는 P. Hollenbach, “Jesus, Demoniacs, and Public Authorities: A Socio-Historical Study”, JAAR 49/4 (1981); J.J. Pilch, “Biblical Leprosy and Body Symbolism”, BTB 12 (1982); 같은 저자, “Healing in Mark. A Social Science Analysis”, BTB 15/3 (1985); 같은 저자, “Undersranding Biblical Healing: Selecting the Appropriate Model”, BTB 18/2 (1988); 같은 저자, “Undersranding Healing in the Social World of Early Christianity”, BTB 22/1 (1992) 참조. [본문으로]
  45. F. Belo, A Materalist Reading of Gospel of Mark (Eng. tr. by O'Connell; Maryknoll, New York: Orbis Book, 1981). [본문으로]
  46. Theissen, 「예수의 성전 예언: 도시와 시골간의 긴장의 장 가운데서의 예언」, 김명수 옮김, 『원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참조. [본문으로]
  47. Rohrbough, The Biblical Interpreter: An Agrarian Bibel in an Industrial Age (Philadelphia: Fortress, 1977) 참조. [본문으로]
  48. Rohrbaugh, “The City in The Second Testament”, BTB 21/2 (1991); 같은 저자, “A Peasant Reading of the Parable of the Talent/Pounds: A Text of Terrot?”, BTB 23/1 (1993) 참조. [본문으로]
  49. Horsley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민중사가인 E.J. Hobsbawm의 연구에 기초해서 예수시대 민중운동 유형을 분석한다. 이와 관련하여 주 35)에서 소개한 그의 저술들 외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주목할 만한 그의 저서인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Popular Jewish Resistance in Roman Palestine (Minneapolis: Fortress, 1993)와; J.S. Hanson과의 공저인 Bandits, Prophets, and Messiahs. Popular Movements in the Time of Jesus (Minnespolis‧Chicago‧New York: A Seabury Book Winston Press, 1985) 참조. 한편 Horsley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Hobsbawm의 저서로는, 황의방 옮김, 『의적의 사회사』 한길 아카데미 5 (서울: 한길사, 1978); 진철승 옮김, 『원초적 반란』 (서울: 온누리, 1984); 박현채 차명수 옮김, 『혁명의 시대』 오늘의 사상신서 74 (서울: 한길, 1984) 등이 있다. 또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사회과학자로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인 Eric R. Wolf를 들 수 있다. Horsley는 Wolf의 『농민』 (박현수 옮김; 서울: 청년사, 1983); 같은 저자, 『20세기 농민전쟁』 (곽은수 옮김; 서울: 형성사, 1984)으로부터 많은 착상을 얻고 있다. [본문으로]
  50. Horsley, The Liberation of Christmas. The Infancy Narratives in Social Context (New York: Crossroad, 1989) [본문으로]
  51. Chapman, “Locating the Gospel of Mark. A Model of Agrarian Biography”, BTB 25/2 (1995). [본문으로]
  52. 이 점에서 사회생태학적인 접근으로 복음서의 지방색을 분석한 주목할 만한 연구인 Theissen의 「복음서들의 지방색 연구」, 『신학사상』 66 (1989 가을)도 유사한 결론에 이른다. 그는 복음서에서 지방색(Lokalkolorit)을 시사하는 언급들에 주목함으로써, 복음서의 지리적 언급들이 편집자들의 가공물이 아니라 역사적일 수 있으며, 그 전승주체가 촌락사회의 일원일 가능성을 제안한다. [본문으로]
  53. Oakman, Jesus and the Economic Question of His Day (Lewiston, New York: Edwin Mellen, 1986). 그 외에 같은 저자, 이정희 옮김, 「예수는 농민이었는가? 사마리아인 이야기(루가 10,30~35) 독해를 위한 몇 가지 실마리」, 『신학사상』 81 (1993 여름); 같은 저자,“The Ancient Economy in the Bible”, BTB 21/1 (1991) 도 참조. [본문으로]
  54. Karl Polanyi, 박현수 옮김, 『거대한 변환. 우리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기원』 대우학술총서(번역) 47 (서울: 민음사, 1991); Karl Polanyi 엮음, 이종욱 옮김, 『초기제국에 있어서의 교역과 시장』 대우학술총서(번역) 70 (서울: 민음사, 1994) 참조. [본문으로]
  55. 이러한 점에서 Polanyi나 Oakman은 일종의 촌락사회의 경제적 역동성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도덕경제학적 접근법(moral economy approach)의 반열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Horsley는 체계의 경제적 성격에 대해 명확한 관점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가 Hobsbawm이나 Wolf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건대, 그 역시 도덕경제학적 입장에 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이들 외에 이런 관점을 취하는 대표적인 논자들로 James Scott, Joel Migdal, B. Moore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촌락사회의 경제체계를 후원-수혜 관계에 초점을 두어 이해하기보다는 경제적인 합리적 이해관계에 비중을 두어 설명하는 ‘정체경제학적 접근법’(political economy approach)이 있는데, 여기에는 Jeffery M. Paige, 강문구 외 옮김, 『농민혁명』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번역시리즈 2 (서울: 서울프레스, 1995)이 대표적이다. [본문으로]
  56. 안병무가 역사의 예수 연구가 예수와 그 주변의 대중간의 관계를 ‘주객도식의 틀’로 이해했다고 비평한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정확한 지적이다. 또한 J.P. Meier가 말한 ‘실제 예수’라는 개념도 바로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본문으로]
  57. 이 연구의 결과물이 Social Networks in the Early Christian Environment: Issues and Methods for Social History, Semeia 56 (1992)에 수록되었다. ‘사회적 연결망 이론’은 사회구조의 분석을, 사회적 분석단위(격좌점, node)들의 개별적 속성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개체 인간들의 관계에서부터(개체적 속성), 인간 집합체들간의 관계(관계적 속성), 나아가 집합체들의 상호관계들의 구성적 총합체간(구성적 속성)의 위계적 연결망을 통해서, 미시행위와 거시구조 사이의, 즉 인간 행위자의 특정 행동과 사회의 구조간의 관계를 분석하는 방법론을 가리킨다. 요컨대 사회적 연결망 이론은 상호성, 관계성, 맥락성을 전제한 사회역사적 이론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김용학, 『사회구조와 행위』 (서울:나남, 1992), 제 8장 참조. [본문으로]
  58. 이 책 제1장의 Wright의 논문에서 소개된 Harvey의 ‘역사적 제약’(constraint) 개념(또한 Wright, “‘Constraints’ and the Jesus of History”, SJT 39 <1986>)은 구조가 행위에 가하는 제약의 측면을 강조하는 반면, 행위자가 구조를 변형하는 차원은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본문으로]
  59. Sanders, 「예수와 유대교」, 『최근의 예수연구』, 100~168쪽 참조. [본문으로]
  60. Shaye J.D. Cohen, 황승일 옮김, 『고대 유대교 역사』 (서울: 은성, 1994), 제1장; Jacob Neusner, 서휘석 이찬수 옮김, 『토라의 길』 (서울: 민족사, 1992), 제5장 참조. [본문으로]
  61. (Philadelphia: Fortress, 1974). [본문으로]
  62. Hengel, The Charismatic Leader and His Followers (New York: Crossroad, 1981), 127쪽 이하. [본문으로]
  63. Theissen, 조성호 옮김, 『예수운동의 사회학』 (서울: 종로서적, 1981), 21~22쪽. [본문으로]
  64. 이 책 제4장(Borg) 참조. [본문으로]
  65. 이 다섯 권의 기획은 제1권은 The Jewish People in the First Century; 제2권은 Oral and Literary Tradition in Judaism and Early Christianity; 제3권은 Social and Religious History of Judaism and Early Christianity; 제4권은 Comparative Study of Jewish and Early Christian Thought; 제5권은 The History of Jewush-Christian Religions from the Third Century to Modern Times 등으로 1974년 이래 출간 중에 있다. [본문으로]
  66. 이 논집의 제1권은 New Testament; 제2권은 Early Christianity; 제3권은 Judaism brfore 70; 제4권은 Judaism after 70, Other Greco-Roman Cults, & Biblography 등이다. [본문으로]
  67. 주 60) 참조. [본문으로]
  68. (Engelwood Cliffs, NJ) [본문으로]
  69. (University Press of America). [본문으로]
  70.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본문으로]
  71.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본문으로]
  72. (Fildelphia: Fortress, 1973). [본문으로]
  73. (SCM Press); 이 책의 한글 번역본이 『유대인 예수의 종교』 (노진준 옮김; 서울: 은성, 1995)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본문으로]
  74. (Philadelphia: Fortress); 이 책은 『예수와 하느님나라』(이정희 옮김; 천안:한국신학연구소)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본문으로]
  75. (New York: Doubleday). [본문으로]
  76. (Garden City: Doubleday). [본문으로]
  77. 그의 책, 서론 참조. [본문으로]
  78. 이것을 둘러싸고 벌어진 무수한 논쟁을 일별하려면 David Seeley, “Jesus' Temple Act”, CBQ 55 (1993) 참조. [본문으로]
  79. Sanders, Jesus and Judaism, 65쪽; 최근 Neusner도 이 견해에 동조를 표하고 있다. 그의 논문 “Money-Changers in the Temple: The Mishnah's Explanation”, NTS 35 (1989), 287~90쪽. [본문으로]
  80. 이 책 4장의 Borg의 논문; Craig A. Evans, “Jesus' Action in the Temple: Cleansing or Portent of Destruction”, CBQ 51/1 (1989) 참조. [본문으로]
  81. Giddens, 『사적유물론의 현대적 비판』 (서울:나남, 1991), 91~95쪽 참조. 그는 여기서 체계적 통합의 차원과 관련해서는 ‘정당화’라는 개념을, 사람들의 일상의 삶을 규제하는 사회적 통합과 관련해서는 ‘지혜로움’이라는 개념을 구분하여 사용한다. 예수시대 유대사회에서 ‘지혜로움’의 매개자로, 우리는 생활률을 신학화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던, 다시 말하면 신학을 생활하하는 데 뛰어들었던 바리사이즘의 두드러진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들의 생활신학은 정부정의 체계를 성전 상징과 결부시켰다는 점에서, 이들의 신학은 아직 완성된, 잘 정의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대체로 대중사회를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고(사회적 통합), 나아가 이것이 체계적 통합에 기여하게 하는 중개자적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급진적인 바리사이나 예수 같은 이는 체계적 통합의 이데올로기적 중심인 성전상징을 현존의 성전과 분리되는 영원회귀적(과거적 지평)이면서도 새 세계를 지향(미래적 지평)하는 시키려는 ‘천상의 성전’으로 대체하는 묵시적 주장을 함으로써, 기성의 체계에 대한 혁명적 예언자로서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미슈나 전문가인 Neusner에 따르면 주후 70년 이전의 유대교는 무엇보다도 음식 규정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바리사이가 유대교의 제의적 정부정의 규율을 일상생활율로 재해석하려 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책 The Rabbinic Traditions about the Pharisees before 70, 3 vols. (Leiden: E.J. Brill, 1971), 303쪽 이하 참조. [본문으로]
  82. 이데올로기기와 무의식에 상관관계에 대하여는 주 40)에 나오는 Ahthusser에 관한 글 참조. 또한 상징의 조작을 통해서 욕망 자체를 변조함으로써 권력의 효과를 발현하는, 이른바 ‘제3 차원의 권력’에 대하여는 S. Lukes, 『3차원적 권력론』 (서울: 나남, 1994) 참조. [본문으로]
  83. Horsley, 이준모 옮김, 『예수운동. 사회학적 접근』, 특히 139~42쪽 참조. [본문으로]
  84. 사해문서에 대한 연구 동향에 대해 보려면, John J. Collins, “Dead Sea Scrolls”, 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s. 2, 85~102쪽을 보라. [본문으로]
  85. 나그 함마디 문서에 대한 연구 동향에 대해 보려면, Birger A. Pearson, “Nag Hammadi Codicds”, 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s. 4, 984~93쪽을 보라. 특히 여기서 발굴된 도마복음서는 역사의 예수, 특히 비유의 연구에 있어 중요하다. 도마복음서에 대한 연구 동향에 대해 보려면, Ron Cameron, “Thomas, Gospel of”, 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s. 6, 535~40쪽 참조. [본문으로]
  86. 그 외에도 유대교 문헌인 미쉬나에 대한 비평적 연구를 통해서 ‘사마리아인’에 대한 연구도 역사의 예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필요하다. 이에 대하여는 장춘식, 「랍비문학에 나타난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논쟁, 1~2」, 『기독교사상』 399~400 (1992. 3~4) 참조. 또한 복음서 연구를 통한 어록자료에 대한 연구도 중요한데, 이에 대하여는 전승사적 연구를 통해 어록자료의 일부가 역사의 예수에까지 소급될 수 있음을 보인 John S. Kloppenborg, The Formation of Q: Trajectories in Ancient Wisdom Collections (Philadelphia: Fortress, 1987)을 보라. 조태연이 『기독교사상』 1995년 1월부터 12월까지 12회 연재한 「예수 운동에 대한 거룩한 탐험」은 Kloppenborg를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어록자료에 대한 최근의 여러 연구들 및 Kloppenborg의 연구에 대한 Horsley의 문제제기(그는 여기서 갈등과 저항의 맥락을 보다 강화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논평을 가한다)와 그에 대한 몇몇 학자들의 논평이 수록된 Early Christianity, Q and Jesus, Semeia 55 (1992)를 참조하라. 한편 어록자료에 대한 독일에서의 연구사를 소개한 김명수의 「예수어록의 연구사적 고찰」, 『부산신학대학논문』 1 (1991)과, 그의 민중신학적 재해석을 다룬 「원시그리스도교 Q 공동체의 주변부 민중 예수」, 『신학사상』 71 (1990 겨울) 참조. [본문으로]
  87. (Leiden; Brill, 1961). [본문으로]
  88. Zeitlin, “Zealots and Scarii”, JBL 81 (1962). [본문으로]
  89. Baumbach, “Zeloten und Sicarier”, TLZ 90 (1965); 같은 저자, “Die Zeloten: ihre geschichtliche und religionpolotische Bedeutung”, BL 41 (1968). [본문으로]
  90. HTR 64 (1971), 1~19쪽. [본문으로]
  91. 그 이후의 젤롯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 및 이를 둘러싼 학자들의 입장들에 관한 개관을 보려면, David M. Rhoads, “Zealots” 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s. 6, 1043~54쪽을 보라(이 논문은 「젤롯운동의 기원과 역사」, 『신학사상』 81 <김진호 옮김; 1993 여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한편 요세푸스 저술에 나오는 다양한 민중운동을 중심으로 예수배경사를 다룬 책으로, 같은 저자, Israel in Revolution, 6~74 C.E. : A Political History Based on the Writings of Josephus (Philadelphia: Fortress, 1976)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92. Rhoads, 앞의 책, 제1장; H.W. Attridge, “Josephus and his Works”, Jewish Writings of the Second Temple Period (CRINT, vols. 2) (Philadelphia, 1984); L. Feldman, “Josephus”, 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s. 3, 981~98쪽; Per Bilde, Flavius Josephus between Jerusalem and Rome. His Life, his Works, and their Importance (Sheffield: JSOT Press, 1988) 참조. [본문으로]
  93. 즉 이들은 주전 4년 예루살렘에서 납세거부 시위를 주도하다 처형당했던 라삐 유다와 바리사이 시몬을 추종했던 세력에 의해 발전된 집단이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94. Horsley, “The Zealots: Theor Origin, Relationships and Importance in the Jewish Revolt”, NovT 28 (1986); 이 논문이 『예수 시대의 민중운동』(최형묵 옮김)에 번역 게재되었다. [본문으로]
  95. Horsley, “Josephus and the Bandits”, JSJ 10 (1979). [본문으로]
  96. Horsley, “Ancient Jewish Banditary and the Revolt against Rome, AD. 66~70”, CBQ 43 (1981); 이 글 역시 『예수 시대의 민중운동』 에 번역 게재되었다. [본문으로]
  97. Hobsbawm, 『원초적 반란』 참조. [본문으로]
  98. Horsley, “The Sicarii: Ancient Jewish 'Terrorists'”, JR 59 (1979); 이 논문 역시 『예수 시대의 민중운동』에 번역 게재되었다. [본문으로]
  99. Horsley, “Menahmem in Jerusalem. A Brief Messianic Episode among the Sicarii ― Not 'Zealot Messianism'”, NovT 27 (1985); 이 논문 역시 『예수 시대의 민중운동』에 번역 게재되었다. [본문으로]
  100. Horsley, “Popular Messianic Movement around the Time of Jesus”, CBQ (1984); 같은 저자, “‘Like One of the Prophets of Old’: Two Types of Popular Prophets at the Time of Jesus”, CBQ 46 (1985); 이 두 논문 역시 『예수 시대의 민중운동』에 번역 게재되었다. [본문으로]
  101. Horsley,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Popular Jewish Resistance in Roman Palestine (Minneapolis: Fortress, 1993). [본문으로]
  102. P.W. Barnett, “Under Tiberius all was quite”, NTS 21 (1974) 참조. [본문으로]
  103. W.G. Dever, “Retrospects and Prospects in Biblical and Syro-Palestinian Archeology”, BA 45 (1982) 참조. [본문으로]
  104. 텔아비브 대학은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고, 브엘세바 대학은 네겝(Negev) 사막과 북부시리아 지역에 대한, 그리고 하이파 대학은 수중고고학(nautical archeology)적 연구로 유명하다. Arthur Segal, “Archeological Research in Israel: 1960~1985)”, BTB 16 (1986) 참조. [본문으로]
  105. Biblical Archeology;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Israel Exploration Journal; Atigot: Journal of the Israel Department of Antiquities; Annual of the Department of Antiquities in Jordan; Palestine Exploration Quarterly; 그 외에 최근에 창간된 Biblical Archalogical Review; World Archeology 등 참조. [본문으로]
  106. 시리아-팔레스티나 고고학의 성립과 신고고학의 경향에 관하여는, W.G. Dever, 앞의 논문; J.A. Sauer, “Syro-Palestineian Archeology, History, and Biblical Studies”, BA 45 (1982); L.E. Toombs, “The Development of Palestineian Archeology as a Discipline” BA 45 (1982); E.M. Meyer, “The Bible and Archeology”, BA 47 (1984) 참조. [본문으로]
  107. 1970년대는 프랑스의 아날학파가 급작스럽게 세계역사학계, 특히 영어권의 사학계에 급부상한, 이른바 ‘브로델 현상’의 시기와 일치한다. 신고고학의 대표적 주자의 하나인 Dever도 아날의 영향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건대, 아날의 수량사적이고 사회과학적 연구가 신고고학의 중요한 하나의 경향을 이루었던 것 같다. Dever, “Archeology, Syro-Palestinian and Biblical”, The Anchor Bible Dictionary, vols. 1, 364쪽. [본문으로]
  108. 전통적으로 역사학이 주로 문자을 매개로한 문명에 관심을 가져왔다면, 고고학은 문자 없는 사회의 문명을 주 연구 대상으로 삼아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소수의 지배집단에 의해서 문자가 사용되는 시기의 경우에도 대다수 사회 성원은 비문자 상황에서 생활을 영위했다. 이런 경우 역사학과 고고학은 특히 상보적인 역할을 하게되는 데, 고고학은 역사학에 비문자 사회에 대한 관심을 자극한다. 최몽룡, 「역사학과 고고학─역사서술에 있어 고고학의 공헌」, 『고고학에의 접근』 (서울: 신서원, 1991) 참조. [본문으로]
  109. Aharon Oppenheimer, The ‘Am Ha-Aretz: A Study in the Social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in the Hellenistic-Roman Period (Leiden: E.J. Brill, 1977), 200~217쪽 참조. [본문으로]
  110. 심성사라는 것은 아날학파가 전용어로 발전시킨 개념으로, 인간을 정치나 사회, 경제 등의 시각에서 조명하기보다는 삶, 죽음, 사랑, 성, 결혼, 증오, 범죄, 신앙, 공포 등의 일상생활적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일종의 생활사적인 역사적 연구 경향을 말한다. 아날학파의 제1세대의 대표적 인물의 하나인 페브르(L. Febvre)에게서는 심리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면, 제2세대의 거두인 브로델(F. Brodel) 이후부터는 사회학적이고 인류학적인 관심에서 심성사가 다루어지고 있다. 김응종, 『아날학파』 대우학술총서 인문사회과학 55 (서울: 민음사, 1991), 166~92쪽 참조. 한편 심성서의 수량사적 연구 경향에 대하여는 민석홍, 「새로운 역사학과 인문과학 ― Annales 학파를 중심으로」, 『인문과학의 새로운 방향』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4) 참조. [본문으로]
  111. Willibald Bösen, Galiläa als Lebensraum und Wirkungsfeld Jesu (Basel/Wien: Herder Freiburg, 1985) 참조. [본문으로]
  112. Horsley & J.S. Hanson, Bandits, Prophets, and Messiahs. Popular Movements in the Time of Jesus (Minneapolis: Winston Press, 1985), 98쪽. [본문으로]
  113. 최갑수, 「미셰 보렐의 역사세계: 사회사로부터 심성사로의 이행」, 『역사가와 역사인식』 (서울: 민음사, 1989) 참조. [본문으로]
  114. modern이나 modernity를 나는 ‘근대’, ‘근대성’으로 번역한다. 이것은 시기적으로 16세기경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즉 우리가 통상 역사적 시기로 사용되는 동일한 단어(modern)의 번역어를 임의적으로 ‘근대’와 ‘현대’로 구분하는 혼돈을 지양코자 함이다. 한편 이 책에서 내가 사용하는 ‘현대’나 ‘오늘날’ 등의 용어는, 어떤 특성을 가진 역사적 시기를 의미하는 표현이 아니라, contemporary 같은 ‘동시대성’을 함의하는 용어의 번역어다. [본문으로]
  115. 이런 점에서 나는 제3세계 신학을 지배담론인 로고센트리즘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신학’이라 부를 것을 시사한 바 있다. 김진호, 「박성준의 “민중신학에 있어서 ‘한국적’이란?─민중신학의 한국신학으로의 정립을 위하여”(민중신학회 제2차 정기총회 발제원고)를 읽고」, 『숨』 11 (1994.1). [본문으로]
  116. David Harvey, 구동회 박영민 옮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서울: 한울, 1995) 참조. [본문으로]
  117. David Harvey, 박영민 옮김, 「공간에서 장소로, 다시 반대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 대한 성찰」, 『공간과 사회』 5 (1995) 참조. 여기서 그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밝혔던 지구화라는 역사적 조건에 대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에 대한 보충적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는 ‘공동체 운동’으로 표상되는 미시 담론적 실천과 체계의 전체적인 변화를 문제시하는 거대 담론적 실천의 변증법적 통합을 역설한다. 또 Anthony Giddens는 근대적 제도화가 근대적 권력의 특성적 차원(자본주의/산업주의/군사력주의/국민국가주의)과 크기(거시/미시)의 차원을 꿰고 있다고 보면서, 이에 대해 실천의 다차원화를 강조한다. 그의 책, 이윤희 이현희 옮김, 『포스트모더니티』 (서울: 민영사, 1991). 한편 J. Harbermas는 근대성의 모순적 특징을 ‘체계의 생활세계에 대한 식민화’로서 규정하면서, 미시담론의 차원인 생활세계와 거대담론의 차원인 체계의 균형적 관계화를 통한 의사소통적 담화구조의 창출 전망을 제안한다. 그의 책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서울: 문예출판사, 1994) 참조. [본문으로]
  118. Borg는 ‘전복적인 영성’으로, Fiolenza는 ‘성해방주의적 영성’의 차원으로 재해석을 모색한다. 이 책 제4장의 Borg의 논문 및 Fiolenza의 책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신학적 재건』 (서울: 태초, 1993), 보론 참조. [본문으로]
  119. 그리스도교의 지배적 담론이 ‘계율종교’적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은 영성 개념의 이러한 내적 한계 때문으로 보인다. 계율종교는 ‘영성’보다 일상의 삶을 구체적으로 가치화할 수 있는 장점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율종교는 사람들을 외적으로 규제/강제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권력적 담론과 선택적 친화성을 갖는다. 즉 권력과 연계되기 쉬운 신학담론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나 바울의 실천은 유대교적 계율종교에 강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120. 불트만의 ‘실존’이 시간/역사를 초월하는 존재와의 만남의 사건에 강조점을 둔 개념이라면, 안병무의 ‘현존’은 불트만의 실존 개념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으로 확장/재해석하려는 함의를 갖는다. 송기득, 「철학적 실존과 성서적 현존」, 『현존』 10~11 (1970.4~5) 참조. [본문으로]
  121. 이때 현재성은, 주지한 바와 같이, 과거와 미래적 지평이 의사소통하여 응축된 시공간성을 말한다. [본문으로]
  122. A.H. Richter, 「안병무의 ‘사건’ 개념」, 『예수 민중 민족. 안병무 박사 고희 기념 논문집』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참조. [본문으로]
  123. Giddens는 이러한 시공간적 장소를 ‘로케일(locale)’이라고 개념화한다. Giddens, The Constitution of Society: Outline of the Theory of Structuration (Cambridge: Polity Press, 1984), 특히 118쪽 참조. [본문으로]
  124. 김진호,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 중심으로」, 『예수 민중 민족. 안병무 박사 고희 기념 논문집』; 같은 저자, 「예수운동의 배경사를 보는 한 시각. 민중메시아론의 관점에서 본 민중형성론적 접근(방법론을 중심으로)」, 『민중신학』 창간호 (1995)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