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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힐링 담론'이 지나간 뒤 골목길에서

"자기계발 담론에서 힐링 담론에 이르는 신자유주의적 치유목회와 긍정심리학 프로젝트는 한국에서 실패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행복과 안전을 약속하지 못했다. 한데 이제와 보니 그 담론들은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의 사회통제 기제이기도 했다. 그 담론이 활개 치는 동안 신자유주적 정치경제적 제도들이 사람들의 일상에까지 파고들어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공공성의 영역은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다."(본문 중)


[기독교세계] 3-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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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담론'이 지나간 뒤 골목길에서


회상과 전망







힐링 담론의 종말


'힐링 담론'의 시효는 짧았다. 기사 검색을 해 보면, 힐링 담론은 2010년 갑자기 대두한 이래 2012년에 절정에 이르고 이듬해까지 계속되다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사그라들고 있다. 그 직전에 담론 시장을 지배했던 '웰빙 담론'의 경우 2002년 혜성처럼 등장한 이후 2004년에 정점을 찍은 뒤 2008년 잠시 상승했다가 서서히 하락하고 있는 추세인 것과 비교하면 힐링 담론은 시효도 짧았고 경사가 너무 급하다.


이런 현상은 출판시장의 현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힐링 관련 서적은 지난해 하반기 이후 빠르게 관심의 영역에서 사라지고 있다. 또 다른 주 무대인 텔레비전과 소설 네트워크 서비스(SNS) 영역은 더욱 그렇다. 힐링 담론의 상징으로 평가되는 이들은 이제 텔레비전에서 거의 볼 수 없고, SNS에서는 이 용어의 사용이 현저히 줄었다.


한데 이런 추세만을 보면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왜냐면 사람들은 여전히 힐링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힐링을 갈구함에도 힐링 담론이 종말을 맞고 있는 현상, 이 부조화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신자유주의적 치유목회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민주사회로의 제도화 과정에 돌입했고, 동시에 소비사회로의 전환이 빠르게 전개되었다. 이것은 '개인의 등장'과 '일상의 발견'이라는 중요한 계기를 낳았다. 이제 사람들은 '국민'이라는 집합적 주체 의식보다 '나'라는 개인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일이 현저히 많아졌고, 개인의 삶의 영역이 국가의 공적 자리보다 중요하게 부상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일부 교회에서 '치유목회'라는 새로운 목회 전략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원래 한국사회에서 치유목회는 한국전쟁 직후 활발하게 등장한 부흥사들에게서 유래한다. 전쟁으로 보건의료체계가 바닥까지 털려버린 사회에서 주로 부흥사들인 치유 은사자들은 병자들을 치유하는 집단의식을 주관했다. 그것은 대개 기도원이나 (기도원 같은) 교회의 부흥집회에서 일어났다. 이때 치유는 죄책고백에서 시작한다. 사람들 각자는 가슴을 치고 땅을 치며, 울부짖으면서 기도하고 찬송한다. 집회는 점점 집단적인 흥분 상태에 빠져든다. 그리고 그 절정의 순간에 치유가 일어난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부흥사 식의 치유목회는 현재의 자기를 부정(죄책고백)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반면 1990년대 치유목회는 자기를 긍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기도원 같은 일상에서 벗어난 장소, 부흥회 같은 일상에서 벗어난 시간에 일어난 부흥사 식의 치유목회와는 달리, 이 새로운 치유목회는 교회에서 집에서 직장에서 일어난다. 곧 일장의 장소, 일상의 시간에서 일어난다. '일상'의 시공간에서 '개인'들 각자가 자기를 긍정하는 삶을 기획하고 살아내는 것, 그것을 깨닫게 하고 추구하게 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치유목회인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긍정하는 개인'은 소비사회의 중산층과 어울린다. 소비사회의 중산층은 소비하는 주체다. 이때 소비는 개인의 욕망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이뤄진다. 욕망을 '긍정'하는 주체다. 즉 현재의 욕망하는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행복해하는 개인이 바로 소비사회의 중산층이 생각하는 이상적 자의식이다. 요컨대 치유목회론은 소비사회의 중산층에게 더 많은 설득력을 갖는 목회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계발 담론의 시대


이 치유목회론은 미국에서 수입된 것이다. 1960년대 이후 미국사회가 소비사회로 한창 변모하고 있을 때 기능주의 심리학과 성장지상주의적 교회론이 결합하여 미국발 치유목회론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것은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적 긍정심리학의 등장에 영향을 미치고, 동시에 치유목회론 자신도 신자유주의적으로 '버전업'(version up)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복합되어 있다. 하나는 '성공을 위한 자기관리'의 요소이고, 다른 하나는 '실패의 위기를 견디는 자기관리'의 요소다. 전자가 '자기계발의 차원'이고, 후자가 '힐링의 차원'이다.


이 미국발 치유목회론이 한국에서도 빠르게 확산되어 1990년대 후반에 이르면 많은 교회들이 그 프로그램을 앞 다투어 시행했다. 한데 이 시기 치유목회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이 위의 두 요소 중 자기계발의 영역이다. 그리고 2000년대에 오면 한국의 시민사회에서도 신자유주의적 긍정심리학에 기반을 둔 자기계발 담론이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신자유주의적인 자기계발 담론은 같은 시기 한국에서 맹렬히 회자되던 웰빙 담론과 결합되었다. 웰빙 담론은, 한국의 신권위주의 정부가 주도했던 산업주의적 목표지상주의에 반하여, 과정과 동기를 중요시하는 삶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하여 목표를 위해 타율적 강제를 수반했던 한국적 근대화의 방법과는 달리, 자기 개개인의 자발적 동기에서 비롯된 자기계발의 담론은 그 자체로 웰빙적 요소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다만 웰빙 담론의 여러 양상 가운데, 우파적이고 '더 자본주의적'인 버전이 이 신자유주의적인 자기계발 담론과 서로 엮었다.


여기서 이 담론이 널리 회자되기 시작한 때가 2천 년대 초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민주주의적 개혁이 서로 뒤얽히면서 발전하던 때다. 이 두 개혁 프로그램은 얼핏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한국에서 이 둘은 권위주의적 성장지상주의를 개혁의 과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합류한다. 민주주의가 소비사회적 개인주의와 만나고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주의와 만나 제도화되고 담론화되었던 것이다. 웰빙 담론의 우파 버전이 바로 그렇고,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담론이 거기에서 불꽃을 일으켰다.


힐링 담론의 시대, 빠른 등장과 쇠퇴


그러나 2008년 발생한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담론 지형은 다시 요동치게 된다. 무한경쟁의 자본주의적 질서는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었지만, 그 속에서 살아남는 데 자기계발의 열기는 별반 도움이 되지 못했다. 2010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77.4%의 사람들이 자신은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회의적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절망의 골은 깊어졌다. 그럼에도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포기할 수는 없었고, 그 프로그램은 긍정주의적 이데올로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긍정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회의하고 있음에도 긍정주의적 자기계발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데 열정을 다해야 하는 딜레마 속에서 사람들의 몸과 정신은 소진(burning-out)되고 있었다. 치열한 긍정주의적 열정으로 자신을 불태운 결과 많은 사람들이 소진성 질환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한병철의 '피로사회'론과는 다소 다르지만, 몸과 정신이 소진된 사람들은 사회적 질병을 앓게 되었고 사회의 그러한 병리 증후는 점점 더 중증화되고 있었다. 이때 힐링 담론이 등장했고 순식간에 전 사회적으로 퍼져나갔다. 치유목회의 두 영역 중 '성공을 위한 자기관리'의 요소가 급속히 쇠락하고 '실패의 위기를 견디는 자기관리'의 요소가 맹렬히 소환된 것이다.


근데 문제는 피로사회적 소진성 질환과 사회의 병리성이 자기관리 정도로 해소될 수 없다는 데 있다. 모든 것을 개인화하는 이 신자유주의적 (목회) 심리학은 성공도 개인의 능력으로 환원시켰고 실패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켜 버렸다. 그러는 사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는 불평등화와 공공적인 것의 사유화를 향하는 제도를 구축하고 있었다. 삶의 위기는 이렇게 제도적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신자유주의적 힐링 담론은 사람들을 더 개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위기의 심화 속도는 너무 빨랐다.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 없이 실직한 이가 퇴직금으로 시작한 프렌차이즈 자영업이 몰락하기까지의 기간은 불과 1~2년에 불과하다. 자영업자의 폐업률은 85%에 달하고, 그중 절반이 1년 이내에 문을 닫는다. 그 사이 자산은 절반 아니 1/4로 축소되었는데,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거의 역전의 가능성 없는 추락만이 내다보인다. 이런 빠른 중산층 몰락의 과정은 신자유주의적인 제도의 틀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힐링 담론은 여전히 문제를 개인의 실패로 진단하고 그것을 견뎌내는 자기 관리술을 전파하는 것이다.


하여 웰빙 담론을 소비했던 이들이 힐링 담론으로 이동하기까지의 시간보다 힐링 담론의 몰락의 시간은 훨씬 급박하게 다가왔다. 즉 힐링 담론의 몰락은 힐링에 대한 사회적 요청의 해소 때문이 아니라, 힐링 담론의 무용성 때문이며, 그 속도는 중산층 개개인의 몰락의 속도와 거의 맞물린다.


힐링 담론이 소멸한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하나 더 언급할 것이 있다. 힐링 담론은 이렇게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는데, 힐링 산업의 성장세는 꺾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수많은 힐링 상품이 의료, 식품, 화장품, 의복, 가구, 주택 등의 영역에서 출시되었고, 힐링을 테마로 하는 관광이나 음악회, 전시회 등이 활발히 기획되고 있다. 일본의 관광산업 미래백서 2011년판에 따르면 우리의 힐링 산업과 유사한 개념인 '릴렉세이션(Relaxation) 산업'의 시장 규모가 빠르게 성장하여 2020년에는 16~20조 엔에 달할 것을 예측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 <힐링을 힐링하다>에서 '힐링의 과학화'를 제안함으로써 힐링 산업을 국가의 미래성장동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요컨대 '힐링'을 담론으로 소비하는 현상은 사라지고 있는 반면, 상품으로 소비하고 있는 현상은 늘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다.


물론 많은 힐링 담론은 상품과 함께 나타난다. 가령 혜민 스님의 책은 거의 2백만 부가 팔려나가, 출판계의 심각한 불황 속에서 엄청난 초과이윤을 발생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상품만이 아니라 담론으로도 소비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담론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아니든, 대중의 소통의 산물이다. 단지 소비하고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 간 소통이 발생한다.


하여 담론은 그것을 둘러싼 논쟁을 야기하며, 그것을 성찰하는 담론 현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힐링 담론이 가장 절정에 있을 무렵인 2012년 11월에 부산에서 열린 제2회 세계인문학포럼의 주제는 '치유의 인문학'이었다. 그 어간 전국 도처에서는 힐링 담론에 대한 인문학적이고 미학적인 비판적 성찰 작업이 시도되었다.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힐링 담론과는 다른 새로운 힐링 담론이 생산되고 유통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도가니> 담론이다. 공지영의 소설로 2009년 출간된 『도가니』는 2011년 영화화되면서 크게 회자되었고 그해 다시 베스트셀러로 부상하였다. 이 소설/영화는, 실패의 위기를 견디는 자기관리로서의 힐링 양식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여 '고통의 연대성'을 통한 이타적 힐링의 양식을 보여준다. 나아가 이것은 이러한 부조리함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회제도적 힐링에 관한 집합적 의지를 불러 일으켰고, 이는 사회복지 제도에 대한 공공성의 열망을 낳았다.


자기계발 담론에서 힐링 담론에 이르는 신자유주의적 치유목회와 긍정심리학 프로젝트는 한국에서 실패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행복과 안전을 약속하지 못했다. 한데 이제와 보니 그 담론들은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의 사회통제 기제이기도 했다. 그 담론이 활개 치는 동안 신자유주적 정치경제적 제도들이 사람들의 일상에까지 파고들어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공공성의 영역은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다. 이제 겨우 우리는 이 담론들에 대해 비판적 문제제기를 시작했고 대안적 힐링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 그것을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지만, 아마도 대안의 핵심은 이타성과 공공성일 것이다. 하여 힐링 담론의 지저분한 잔해가 있는 일상의 공간인 집앞 골목길에서 이웃의 복원과 공공영역의 복원을 포함하는 힐링을 꿈꿔 본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