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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말과활] 시나이는 '없다'

[말과 활] 5호(2014. 7~8)가 발간되었습니다. 여기에 게재된 <시나이는 없다>를 올립니다. 이 글은  '한국인터넷선교네트워크(대한예수교장로회명성교회의 대리단체라고 함)'라는 단체가 명예훼손 게시물이라고 신고하여 다음이 블라인드 처리한 한백교회에서 설교글 <시나이는 없다>를 대폭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어쩌면 다시 블라인드될 지도 모르겠네요. 악성 신고자를 고려하지 않고 모든 신고를 일단 받아들여 조치한 뒤에 신고 피해자에게 소명할 것을 요구하는 다음의 방책은 결국 악성 신고자를 양산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또 이런 일이 있다면 블로그를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것도 신중히 고려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글을 올립니다.  


[말과 활] 5호에는, 언제나 그렇지만, 훌륭한 글이 많네요. 제 글이 가장 부실한 글입니다. 많이들 읽으시길 바랍니다. 



<자세히 보기>



시나이는 없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올해 전반기 개신교계를 뜨겁게 달군 하나의 이슈는 교회정관 개정 논란이었다. 몇몇 대형교회들이 정관을 개정했거나 개정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개신교 시민단체들이 강력한 비판과 항의를 표한 것이다. 특히 사랑의교회의 정관 개정안이 그 논란을 더욱 격화시켰다.


이 교회는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대형교회 가운데 개신교 신자들 사이에서 가장 좋은 평판을 받고 있는 교회의 하나였다. 심지어는 새로운 대형교회 패러다임의 하나로서 평가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지나친 규모 중심주의적 교회 건축이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심지어 담임목사의의 석박사 학위논문 표절 시비가 사실로 드러나게 되면서 그 이미지가 크게 실추된 상태에 있다. 게다가 담임목사의 비리 혹은 배임의 혐의, 반대파 교인에 대한 집단폭행 사건, 전직 정치깡패 출신 신자의 난동 등이 잇따르자, 외부의 차가운 시선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 내부의 갈등의 골은 일파만파로 깊어지고 있다. 이런 상항에서 교회가 정관 개정을 밀어붙이고 있는데, 아래에서 보겠지만, 그것이 반대파 교인에 대한 교회 당국의 강압적 통제의 시도로 보인다는 점에서 개신교 내의 민주적 개혁운동가들에게 대단히 문제적인 것으로 해석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개정의 내용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시대의 반동 그 자체를 보여준다. 그 골자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목사와 당회의 권한을 더 강화하고, 이들 특권적 엘리트 교인을 제외한 교인들에 대해서는 권리보다는 의무를 강화하는 방식으로의 개정이다. 당회란 담임목사와 시무장로로 구성된 회의체로 사실상의 교회의 최고 권위기구인데, 교회의 비민주적 일방주의는 바로 당회를 중심으로 작동된다. 한데 흥미롭게도 이 장로교 특유의 기구가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교파들에서 채택되고 있다. 유럽 장로교 역사에서 장로와 당회 제도는 제한적이나마 성직자 중심주의에 대한 견제의 맥락에서 도입된 교회 민주적인 장치의 측면을 갖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담임목사와 특권적 엘리트 교인의 전횡과 독재의 상징처럼 군림하고 있다.


그런데 더더구나 개정된 정관은 당회의 의결정족수를 2/3에서 과반수로 낮춤으로써, 당회에 의한 교회의 법적 통제력을 크게 높이고 있다. 그리고 교인들의 공식적인 집회결사의 자유는 더 엄격히 제한하여, 당회의 승인이 없는 일체의 기관 회의 및 소모임을 불법화했다. 그럼으로써 불법적모임에 참여한 교인을 당회는 징계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교인의 자격에 관한 조항에서 십일조 등 기부금을 통한 재정봉사의 의무를 교인의 필수요건으로 적시함으로써 비교적 안정되고 넉넉한 소득이 없는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사실상의 교인 자격을 제한하는 셈이 되었다(이것은 입법 예고 단계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교회는 이 교인 자격 조항을 삭제하기로 했다).


정관 개정안의 두 번째 골자는 교회 재정의 비공개성을 더 높이는 것이다. 요컨대 교회의 재정장부 열람 요건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물론 정관 개정안이 제출되기 전에도 대형교회 가운데 재정장부를 공개한 교회는 거의 없다. 대형교회란 일요일 대예배의 성인 참석자가 2천 명 이상의 교회를 말하는데, 한국에서 이런 교회의 숫자는 대략 880여개쯤으로 추산된다. 한데 이 880여개 교회들 가운데 재정을 공개한 교회는 한두 교회 정도에 지나지 않다. 하지만 거의 모든 교회는 정관상으로는 재정장부를 열람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실제로 장로, 집사, 권사 등으로 구성된 교회의 실무 기구인 제직회를 통해 재정장부 열람을 요청하는 경우가 간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경우에 열람은 거부되었다. 한데 정관 개정안에 따르면 전 교인의 2/3 이상의 찬성을 받아야만 재정장부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교회법 자체가 재정장부의 열람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셈이 되었다. 게다가 교회는 재정장부를 포함한 공문서의 보존기간을 3년으로 축소함으로써 문제가 된 담임목사와 특권적 엘리트 교인의 비리와 배임 혐의를 입증할 가능성은 제도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지난 3~4월경 사랑의교회의 정관 개정에 대한 개신교계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하는 각종 토론회와 비판 집회들이 잇따랐다. 또 이 교회의 비판적 교인들은 신문광고 등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전 사회를 향해 대대적으로 유포시켰다. 5월에는 MBC‘PD수첩에서 이 논란이 다뤄졌고, 인터넷을 중심으로 거의 성토에 가까운 비판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이에 교회는 한편에서는 PD수첩 등에 대한 법적 대응과 교회 내부의 비판적 교인에 대한 비난, 협박, 테러를 가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악화된 여론을 감안해서 보다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가령 교회는 정관 개정을 6월 말까지 완료하겠다고 했으나, 아직까지 확정안의 통과가 미뤄지고 있다.


이런 사태 추이를 보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사랑의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짓을 하나.” 한데 이 어처구니없는 정관 개정을 시도한 교회의 당회원들 가운데는 놀랍게도 국회의원, 교수, 언론인, 법조인 등, 법의 기술자들, 이른바 법을 가진 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즉 이 파동은 목사와 장로들이 법을 몰라서 야기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잘 알아서 일어난 것이라는 얘기다. 이들 법의 전문가들에게 지금은 바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이 가능한 때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이기에


 

실제로 지금한국에선 민주주의라는 절름거리며 가까스로 도모했던 역사적 실험의 반대편을 향해 달려가려는 역진의 행보가 뚜렷하다. 한데 진보 인사들이 역사의 반동을 향한 행보라고 비판해 마지않았던 박근혜 정부는 집권 초부터 줄곧 법치를 누구보다도 강하게 주장해왔다.


한데 그이는 권위주의 시대가 지난 뒤 취임한 몇 명의 대통령 가운데 가장 권위주의적 특성이 두드러진 존재다. 사실 이 정부를 구성하는 권력연합은 외형상 그이의 부친이 구축했던 그것처럼 1인의 권위주의적 지도자와 그에게 충성경쟁을 하는 다양한 테크노크라트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또 그 연합의 핵심역할을 정치화된 군부가 맡았고 충성스런 법률 전문가 집단도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물론 그 내막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은, 권력연합을 내부에서 바라볼 수 없는 우리의 시선에도 종종 포착된다. 지금의 권력연합은 과거에 비해 결코 일사분란하지 않고, 1인의 절대적 권력자에 의해 전체가 지휘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지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그리 깊은 통찰력을 갖지 않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언론이 권력연합을 향해 날선 비판을 가할 때에도 대개 대통령 자신은 비판의 화살에서 비켜 있다. 그것은 그이가 적어도 이 권력연합의 외연 속에 포함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일종의 특화된 존재, 즉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상징화되어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란 특별한 신의 은총을 받은 자이고, 대중에게 그 은총을 전달해 주는 존재라는 의미, 곧 메시아적 존재라는 뜻을 지닌 신학적 개념이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메시아(적 존재)는 법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혹은 도덕적) 함의가 강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그이의 지배는 다분히 종교적(혹은 도덕적) 지배의 성격이 강하고, 법적 성격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는 집권 초부터 종북이라는 이념적 세균(즉 종교적 죄성)에 감염된 국민을 정화시키려는 사명을 지닌 정권으로 법치보다는 종교적(혹은 도덕적) 정치에 몰입했다. 종교사회학이 정치종교라고 부른 지배양식과 유사한 정치 행태가 이 정부 처음부터 강력하게 작동된 것이다.


그러니 카리스마적 지도자인 그이는 법적 존재라기보다는 법 위의 존재다. 그이가 법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법이 그이를 위해 존재한다.’ 그런 그이가 법치를 유난히 강조했다는 것은 일견 아이러니한 일이다. 물론 독일의 나치 체제처럼 역사적으로 정치종교로 평가되었던 체제는 거의 언제나 법적 지배를 강조했다. 그러니 논리적으로는 어색해도 역사적으로 그다지 어색한 일이 아니다. 그런 체제는 언제나 입법과 사법을 다른 체제들보다 훨씬 강력하게 통제하는 데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법의 해석에서도 다른 해석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점하였고, 또 해석된 법의 유통에서도 대단히 유리한 상황에서 존립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카리스마적 지도자 자신은 법 외부의 존재로서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기도 하고 새로운 법을 창안해내는 역할을 하지만, 백성은 기존의 법이든 새롭게 창안된 법이든 그 법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으로 해석된 반동의 시대의 이다.


바로 지금이 그런 때여서 당회 안에 법의 전문가들이 즐비한 사랑의교회 등 일부 대형교회들이 정관에 대한 터무니없는 개정 국면을 연출하였고, 집권당인 새누리당은 자기들이 주도하여 만든 국회선진화법을 폐기하려는 작업을 이미 착수하였으며, 또한 자신들이 주도하여 만든 교육감 직선제 법안도 폐기하려는 의도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또 무수한 법률들이 자의적으로 해석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이다.


민주화 이후 역대 정부들도 그런 문제제기에서 빗겨갈 처지는 아니지만, 이 정부는 권위주의 정권 시대의 그것처럼, 너무 심하다. 어느덧 법의 공공적 성격은 뒷방 신세로 밀려났다. 반면 법이 가장 열렬히 변호하고 정당화하는 것은 권력과 돈이다. 말했듯이 지금이라는 정국이 바로 그렇다. 이른바 법의 전문가들은, 바로 그 지금을 읽어내는 전문가이며 그 지금의 해석에 기반을 둔 법의 해석을 이끌고 있는 자다.


하여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막말을 했고, 이를 보도한 PD수첩은 교회의 손해배상청구의 대상이 되었다. 또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 측은 한일합방과 한국전쟁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강연한 내용을 보도한 KBS에 손해배상청구를 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 외에도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 정치인들, 심지어 청와대 등도 손해배상 청구의 주체가 되곤 한다. 또 많은 기업들이 노동쟁의를 벌인 노동자들에게 저 악명 높은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고대 유다국의 법치의 다른 기조

 


멸망을 앞둔 유다국의 악취 나는 풍경 하나를 고발하고 있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에도 바로 그런 법의 전문가, 아니 그때에 관한 해석의 전문가인 법률가들이 언급되고 있다. 예언자는 말한다.

 

너희가 어떻게 우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요,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안다하고 말할 수가 있느냐? 사실은 서기관들의 거짓된 붓이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어 놓았다.

―「예레미야서8,8

 

여기서 그들은 율법을 아는 자들일 뿐 아니라 지혜를 가진 자들이다. 요컨대 그들은 법의 해석자들인 동시에 동시대에 관한 해석자들, 그때의 해석자들이다. 한데 이 텍스트는 그런 이들이 자행한 법 해석의 장난질이 국가를 멸망의 길로 치닫게 했다고 비판하는 예언자의 말을 담고 있다.


유다국은 오랜 동안 법치국가를 이루지 못한 저발전의 국가였다. 이웃나라인 이스라엘국은 인구도 많고 영토도 넓을 뿐 아니라 법률체계나 종교체계에서도 월등히 앞서갔던 선진국이었고, 유다국은 긴 시간 동안 그 나라의 봉신국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저발전 군주국의 왕은 국가의 시조로 추앙되는 다윗 왕을 모범으로 삼으며 국가를 다스렸다. 이 나라 백성에게서 다윗은 어느 나라의 왕보다도 뛰어난 군주였고, 신과 인간에 대한 신실함에서도 더 없이 위대한 존재였다. 그들의 상상 속에서 말이다. 물론 그 왕의 흠결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단점을 넘어서는 인간적 위대함이 돋보이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여 신은 그런 그를 무조건 신뢰하고 무한한 축복을 선사한다. 이런 비교될 수 없는 축복의 수혜자이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권위의 주체, 그리고 그이의 백성을 신의 축복의 수혜자가 되도록 하는 매개자를 일컫는 용어가 카리스마적 지도자. 다윗은 바로 그런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상징이었고, 이후의 모든 왕은 그를 모범 삼아 왕이 되고 통치를 한다. 하여 이론상 유다국의 모든 왕들도 카리스마적 지도자다.


한데 그런 유다국이 전에 비해 영토를 상당히 확장하는 데 성공했고 정치와 법, 종교 등에서 제법 국가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 때가 왔다. 그런데 그 속도는 너무 빨랐고 그 만큼 제도의 정비는 부실했다. 그리고 몰락의 시간도 빠르게 도래했다. 즉 잠깐의 황금기, 바로 그 시기에 법의 전문가에 대한 예언자의 비판이 바로 위에서 인용된 성서 텍스트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텍스트의 시기는 유다국의 요시아 왕이 죽은 직후로 보인다. 요시야 왕은 한참 발전일로에 있던 국가에 법제를 도입하고 정치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이스라엘국에 버금가는 발전을 이룩한 개혁군주다.


그의 개혁을 좀더 살펴보자. 증조부 때부터 시작된 국가발전의 과정에서 귀족과 공신세력이 확고해졌다. 그리고 왕들은 그들 귀족들의 당파와 결합하여 귀족 중심의 정치를 구사하는 존재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소농들과 소목장주들의 몰락이 잇따랐다. 즉 이 시기에 유다국도 많은 다른 나라들처럼 왕족-귀족의 부와 권력이 강화되는 동시에 소농의 몰락이라는 양극화의 길로 거세게 달음질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이에 대한 민중론적 비판과 민중적 저항들도 드셌다. ‘암하아레츠라는 히브리어는 농민 일반을 일컫는 보통명사인데, 성서의 열왕기에 등장하는 이 단어는 필경 민중적 정파를 지칭하는, 다분히 고유명사화된 용례를 보인다. 그들은 유다국의 정변에 등장했고 번번이 개혁을 지지하는 정치세력화된 집단처럼 행동한다. 특히 요시아 왕은 이들의 지지 없이는 결코 왕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런 그가 강력한 민중적 개혁정치를 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그는 귀족의 권력을 제한했고, 소농의 몰락을 억제하려는 정치를 폈다. 그것을 위해 그는 법치를 강조하여 광범위한 법전을 편찬했는데, 그것이 신명기. 더구나 백성의 절대다수가 글을 읽지 못함으로써 법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법을 압축하여 대중화하는 다이제스트 법전을 만들어 유포했는데 그것이 신명기속에 들어 있는 십계명이다. 이는 보다 오래된 출애굽기의 십계명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면서 법정신 부분을 보완한 개정본 십계명이다.


한편 왕은 유다국 전례의 다윗계약도 수정하는 신학적 작업을 추진했다. 말했듯이 다윗계약은 메시아적이다. 왕은 법 밖의 존재인 것이다. 신은 그가 어떻게 하든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한데 요시아 왕실은 무조건축복에서 조건부축복의 방식으로 왕권계약의 신학을 수정한 것이다. 즉 왕도 법을 지켜야 한다. 왕도 백성처럼 법 안의 존재이다. 그 법은 귀족들에 의해 몰락하고 있던 백성의 권리를 지키는 법이다. 권력관계의 비대칭에 거스르는 법인 것이다. 그것을 하느님의 공의라고 주장했고, 왕권계약은 그러한 법적 공의를 준수하는 왕에게만 축복을 계속 선사한다는 계약이다.


그런데 요시야 왕이 이집트의 파라오에 의해 비운의 최후를 맞이했다. 이후 유다국은 급전직하 몰락의 길로 떨어져 갔다. 근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시야 이후의 군주들은 누구든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아닌 법치의 중심으로 통치를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유다국은 법치를 위한 다양한 제도를 갖추었던 것이다. 하여 과거처럼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주장하는 모호한 통치가 더 이상은 불가능했다. 문제는 포스트 요시야시대의 법치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독설을 퍼붓는 것처럼, ‘법을 아는 자들의 농간에 의해 법이 권력을 옹호하고 심지어 힘의 남용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들은, 예레미야에 의하면, 자칭 지혜를 가진 자’, 곧 그 시대의 권력관계를 간파하여 거기에 맞추어 행보하며 법을 해석하는 전문가였다.

 


시나이는 없다

 


우리 시대가 꼭 그렇다. 법의 전문가들이 법을 농간하며 권력과 돈을 위해 법을 해석한다. 어느 때보다도 현격한 법의 농간이 난무한 사회가 지금인 것이다. 정부는 그런 법률가들을 모아 권력연합을 만들었다. 해서 그들은 공직자 청문회가 가장 두려운 자들이다.


한데 그런 체제의 중심에 카리스마적 리더가 있다. 상징적이든 실질적이든 그이는 권력의 중심이고, 무수한 테크노크라트들을 휘하에 두고 그들 간의 충성경쟁을 만끽하는 자다. 그런 모습이 이 체제의 지금의 풍경이고, 그이 휘하의 법 전문가들은 그런 지금의 해석에 기반을 두고 법을 조작해낸다.


그런 법의 전문가들을 우리는 많이 안다. 무엇보다도 매스미디어를 통해 그이들은 무수한 법 해석의 농간을 쏟아냈다. 한데 매스미디어가 유포시키는 그런 해석자들의 언변은 놀라울 정도로 거칠다. 이른바 막말이 난무하다. 아마도 그이들의 지금해석에서 경의를 다할 대상과 막말을 퍼부을 대상이 가려졌겠다. 최근 막말의 주인공으로 우리의 주목을 끌었던 문창극씨나 오정현 목사도 그런 법의 전문가들에게 둘러싸인 이들이고 그 자신 또한 법의 해석자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문창극 씨나 오정현 목사 등은 그런 법 해석자들과 결정적으로 중요한 논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메시아적 존재를 둘러싼 담론의 논리이기도 하다. 그것에 의하면 대중은 무지하고 게으르며 미개하므로 그들을 지도할 엘리트가 필요하고, 이들 엘리트는 더 큰 가치를 위해 미개한 대중의 희생을 감수할 수도 있다는 것, 바로 이런 가치관을 그들은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죽은 박정희에게 메시아 신학의 옷을 입혀 오늘 우리의 시대로 재림하게 한 신학자들인 조갑제, 이인화 등의 지금론대중편의 핵심 논지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시 요시야 왕의 개혁 담론을 참고하자. 요시야 왕정의 법치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논점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법은 시나이에서 출발한다. 그 산에서 모세가 법을 받아 백성에게 나눠줌으로써 백성은 법의 백성이 된 것이다.


한데 여기서 핵심은 그 장소가 바로 시나이라는 점이다. 당연히 법의 장소는 예루살렘이어야 할 터인데, 유다국 전례에 따르면 국가의 신이 안치된 곳은 예루살렘 성 안의 성전이고, 성전 가운데서도 본관 건물 안이며, 그중에서도 건물의 가장 은밀한 곳(지성소)이 바로 야훼가 있는 장소다. 한데 요시야 왕의 법치 담론에서 야훼가 부여한 법은 예루살렘 성전 안의 지성소가 아니라 시나이라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장소는 국경 밖의 장소다. 즉 누구도 점거할 수 없는 장소에서 신의 법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점은 그곳은 단순한 국경 밖이 아니라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산라는 사실이다. 어느 나라에 있는지, 어느 도시 근처인지 도무지 정보를 주지 않고 단지 광야에 있는 미지의 산이라는 점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모세의 법전을 성전 안 지성소에 안치하였음에도 사람들에게 시나이지향성은 유다국이 멸망한 이후까지도 계속되었으니 예루살렘 성전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파급력을 지녔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요시야 왕의 법치 담론에서 법의 근원적 장소인 시나이는 부재함으로써 존재하는 산이다. 곧 시나이는 어떠한 권력도 미치지 않는 곳, 누구도 점거할 수 없는 곳에 있는 미지의 산이다. 누구도 그 산을 알지 못하고, 누구도 그 산에 도달하지 못한다. 법의 제정자인 모세조차 국가의 창건자가 되지 못하고 사라져야 했다. 곧 법은 누구도 독점할 수 없고, 독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법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작동하듯이, 누구도 대중의 가치를 함부로 도구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법의 해석에 참여하고 있는 모두는 성서의 한 법치론, 법의 장소에 관한 이 해석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특히 법치를 유난히 강조하는 현 정부의 인사들, 그리고 법치를 주장하며 정관 개정을 도모하는 성직자들은 시나이는 없다라는 메시지를 반드시 숙고하기를 권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