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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퀴어문화축제와 퀴어적 상상력

이 글은 한백교회에서 2016년 6월 5일에 했던 하늘뜻나누기 원고인 <퀴어, 이성애주의를 넘어서>를 수정 보완한 것으로, [공동선] 129호(2016. 07+08)에 실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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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문화축제와 퀴어적 상상력

 

 

 

 

 

 

 

그는 ......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2,6~8

 

 

 

 

게토 속의 축제

 

서울광장은 더 이상 광장이 아니라 게토였다. 611일 거기서 열린 제17회 퀴어문화축제는 외부와 거의 완벽히 차단된 폐쇄공간에서 진행되었다. 원형의 공간 안에는 수많은 단체들의 부스가 세워졌고, 꽤 많은 이들이 축제를 즐겼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좁은 통로 둘, 안으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 하나만으로 그곳을 오가기란 너무나 불편했다. 혹여 화장실이라도 다녀오려면 거리도 멀거니와 반대집회를 벌이는 개신교계 단체들과 그들로 인해 막혀버린 거리 이동로를 꾸역꾸역 지나가는 인파로 여간 어렵게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누구의 상상력인지 몰라도 이런 식이라면 서울광장은 더 이상 광장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곳은 광장이기를 포기한, 소통불가 시대의 철의장막에 다름 아니다.

아무튼 오후의 다른 일정 때문에 길게 그 안팎의 풍경을 살필 틈이 없어 불쾌한 심사로 곧 자리를 떠야 했다. 그렇지만, 반대집회자들의 난입을 막아야 했든, 안의 풍경이 너무 민망해 가려야 했든, 광장을 그렇게 관리하는 것에 대해선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날 내내 뒤틀린 심사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춤추는 퀴어 담론

 

16일부터 19일까지는 퀴어영화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 글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야 독자에게 다가가겠지만 나는 이 글을 그 며칠 전에 써야했기에 아직 영화제에 참석하지는 못했고, 프로그램북만 훑어보았을 뿐이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끌었던 건 퀴어영화제라는 명칭이었다. 실은 내 기억 속의 이름은 ‘LGBT영화제였다. 나의 무식한 질문에, 영화제 홍보요원인지 부스 방문객인지는 몰라도, 옆 사람이 작년부터 퀴어영화제로 개칭되었다고 귀띔했다.

알다시피, LGBT란 레즈비언(여성동성애자), 게이(남성동성애자), 바이섹슈얼(양성애자), 트랜스젠더(성전환자) 등 성소수자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으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용어다. 그런데 LGBT영화제를 퀴어영화제로 바꾼 주최 측의 의도를 알지는 못하지만, 나는 이 개칭이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영화제들의 출품작들과 비교한 것도 아니고 이번에 출품된 영화들을 본 것도 아니지만, 영화들의 간단한 소개만으로도 이 영화제가 지향하는 것을 더 잘 나타내는 이름은 퀴어영화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즉 영화제는 성적 소수자들만의 삶, 고뇌, 정체성 등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이성애로 재현된 사회의 가학성과 고통에 관한 비평과 해석, 그리고 성찰을 다루는 영화들의 축제로 보였기 때문이다.

퀴어(Queer)라는 말이 그렇다. 원래 이것은 이성애자들이 자신의 시선에서 이상한성적 행동을 조롱하는 표현이었다. 한데 이것을 성적 소수자들이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그것을 이상한것으로 보는 시선이야말로 이성애주의적 편집증의 산물임을 비판하고 그러한 편집증이 세계를 얼마나 위태롭게 하고 폭력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문제제기 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하여 퀴어라는 말 속에는 남성과 여성, 이성애와 동성애를 이분법적으로 가르고 여기에 정상과 비정상의 낙인을 찍는 일상의 관습, 그리고 그러한 관습이 일으키는 편견과 배제, 부조리함과 폭력을 비평하고 그것 너머의 세계를 향한 성찰이 담겨 있다.

 

강남역 노래방 사건과 퀴어비평

 

가령 최근 강남역 앞 노래방 화장실에서 자행된 살인사건도 퀴어의 관점에서 볼 때 많은 것을 더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사건은 한 남자가 화장실에서 한 젊은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인데, 이를 둘러싸고 여성혐오범죄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여성혐오범죄임을 주장하는 이들은 최근 여성에 대한 강력범죄가 크게 늘어난 데다 이른바 묻지마범죄 같은 이유 없는 공격성이 여성을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 그러한 범죄가 속출하고 있는 현상을 이 범죄를 통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사회가 여성혐오주의를 부추기는 문화와 관습이 강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함축되어 있다. 반면 이에 대해 반론을 펴는 이들은 그 사건들은 문제 있는 남자들의 범죄이지 문화와 관습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 즉 예외를 일반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경찰은 범죄 프로파일러들을 동원하여 이 남자를 분석함으로써 이것은 여성혐오범죄가 아니라 조현증(정신분열증) 걸린 남자가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한 여성을 살해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범죄 프로파일러가 범죄를 어디까지 분석할 자격을 가진 것인지 모르지만, 경찰의 이러한 개입은 사회적 논쟁으로 비화된 사건에 대한 국가의 잘못된개입의 전형을 보여준다.

첫째로 경찰은 이 사건을 잘못된 방식으로 범주화했고, 둘째로 그렇게 함으로써 사건을 정신이상자의 병리적 행동이라는 개인 차원의 문제로 단순화시켰다. 그리하여 이 사건의 사후대책도 조현증 환자를 범죄 예방적 차원에서 격리시킨다는 반인권적 방식으로 제시하게끔 했다. 그리고 셋째 문제는, 결국 사회적 논쟁으로 전개된 사건이 시민사회의 성찰로 이어질 수 없게 방해했다는 점이다.

경찰의 잘못된 범주화란 조현증에 의한 범죄와 혐오범죄가 마치 양자택일의 문제인양 해석하였다는 데 있다. 즉 조현증 환자의 범죄는 정신이상자의 이상행동의 결과이고 혐오범죄는 혐오라는 범죄자 자신의 이성적 판단의 결과라는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다.

조현증 걸린 이 청년의 진술을 보자. 그는 여자들이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에 여성을 살해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를 무시한 여성은 누구이고 그는 그녀()에 의해 어떤 무시를 당했다는 것인가? 경찰의 대답은 그것은 그의 피해망상이라는 것이다. 즉 경찰은 그가 당한 무시를 특정하지 않고 집합적으로 얘기하고 있으며, 그것도 그의 주관적인 해석, 아니 망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경찰의 해석에 따르면 그의 집합적인 피해의식의 가해자는 여성이라고 특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 여성에 의한 것이라고 환원시켜 기억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성에 대한 적대감이 그에게 전제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그의 여성에 대한 적대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경찰이 이 범죄가 혐오범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면 그의 적대감이 개인적인 체험의 소산임을 밝혀냈어야 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조현증 치료의 전력이 있다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반면 여성혐오범죄임을 주장한 이들은 그가 문화 속에 만연한 여성혐오주의로부터 영향받은 결과 자신의 피해의식의 가해자를 여성으로 환원시켰다고 보았다. 경찰은 빈약하고 단순화된 주장으로 자신의 설명의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는 반면, 혐오범죄론자들은 매우 설득력 있는 논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혐오범죄가 아님을 주장하는 이들은 문화 속의 혐오주의는 존재하지 않다거나 문화 속의 혐오주의와 이 청년의 기억 현상이 무관함을 논증할 필요가 있었다. 한데 경찰의 발표는 이러한 논증의 필요를 제거한 셈이 되었고, 결국 사건을 둘러싼 해석과 성찰의 기회를 막아버린 셈이 되었다.

한편 퀴어론은 이 사건의 가해자인 청년이 자신의 모든 피해망상을 여성의 무시로 인한 것이라고 환원시켜 이해하고 있는 현상을 해석하는 데 유용하다. 즉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가르고 자신이 겪은 모든 피해를 성적인 것으로 환원시켜 이해하는 문화와 관습이 우리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음을 퀴어론은 잘 지적하고 있다. 요컨대 사회에는 성적 환치의 문화와 관습이 깊게 스며 있고, 이 청년도 그러한 환치의 관습에 매여 있었다. 그런 점에서 퀴어론은 이 청년의 조현증 속에는 사회적 이해의 코드로서 무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은 여성혐오주의가 전제되어 있음을 명쾌히 해석하게 한다.

얘기가 길었다. 다시 앞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내가 보기엔, 퀴어영화제의 명칭에서 드러나듯, 퀴어문화축제와 퀴어영화제 같은 퀴어운동은 이제 LGBT라는 성소수자들이 다수파의 성, 즉 남성주의와 이성애주의에 의해 차별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이 축제는, 성소수자만의 잔치이기를 넘어서, 그들이 사회를 걱정하고 해석하며 성찰하는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 하여 이 축제의 참가자들은,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양성애자든, 성전환자든, 그 속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담론들, 퍼포먼스들, 사건들을 통해 서로를 걱정하고 그러한 걱정 속에 담긴 사회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성찰하는 생각에 다가간다. 그러한 성찰적 사유에 다가감의 사건, 그것이 바로 퀴어축제의 목적인 것이다.

 

퇴행하는 교회, 반동성애운동

 

한편 개신교 일각에서는 강력한 반동성애 운동이 전례 없이 불꽃을 일으키고 있다. 이때 동성애 반대라는 말 속에는 양성애자나 성전환자 같은 다른 소수자들에 대한 반대가 함축되어 있다. 즉 개신교도들은 LGBT 모두에 대한 반대를 동성애 반대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반대를 구성하는 논리를 미국에서 급하게 수입해서 채 소화도 못 시킨 채로 말하다보니, 미국 개신교가 주목하는 반동성애론만을 얘기하고 있다는 얘기다.

아무튼 한국교회는 동성애를 질병으로 보고 있고, 하여 그것은 치료나 개조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동성애자를 악마화하고 그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왜 개신교 교회는 반동성애 운동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일까? 우선 반동성애 운동에 매진하는 이들은 극우적 근본주의자들이다. 근본주의는 사회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들로, 근원적 가치로 철저히 돌이키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신앙 유형을 말한다. 그런데 한국의 근본주의자들은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영향권 아래 있다. 요컨대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의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근본원리의 추종자들이다.

한데 최근 미국의 근본주의는 반동성애, 반낙태, 반이슬람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이중 반낙태는 한국에서 전혀 통할 수 없는 주장이고, 반이슬람도 그리 약발을 받지 못하는 슬로건이다. 반면 성적인 보수주의가 견고한 한국사회, 특히 한국개신교에서 반동성애 주장은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다. 특히 친미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개신교 보수주의적 목사, 장로들 사이에서는 열렬한 반응을 일으켰다.

한편 신자유주의의 폭력 속에,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깊은 상처를 받은 남자들 사이에서 마초성이 급격히 강화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이것은 극우주의를 선호하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가령 일베 현상이 그렇다. 이러한 대중적 극우주의는 박근혜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여기서 극우주의와 근본주의는 잘 어우러진다. 해서 근본주의자들 중 많은 이들이 극우주의를 선택하고, 그런 이들 대다수는 남자다. 한데 개신교의 남자 극우적 근본주의자들은, 힘과 자원을 가진 자들이다. 해서 그들은 동성애 반대운동에 힘과 재력을 아낌없이 사용할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쓰는 재원들이 돈 없고 일자리 없고 희망 없는 많은 이들을 알바공격자로 고용한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최근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모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정글 속에서 마초적 극우주의가 번져가고 있다. 이것은 알바공격자로 고용된 수많은 무력한 낙오자들의 공격적 행동이 신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인 남자가 자기를 모욕한 여성을 처벌한답시고 한 젊은 여성을 살해한 것처럼,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의 무분별한 행동에 힘입어 사회적인 살해의 가해자들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40,50년대 서북청년단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개신교의 반동성애 운동은 점점 위축될 것이고 개신교를 더욱 지탄받는 종교로 만들어 갈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쩌면 개신교는 혐오범죄 교사범으로 역사 속에 또 한 번 각인될 수 있다.

 

그리스도 찬가와 퀴어론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퀴어논점의 신랄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개신교가 성소수자 축제를 반대하고 동성애자를 혐오하며 공격하는 주체였는데, 실은 성소수자들이 제기한 퀴어 논점의 전형적인 이성애주의적 병증을 개신교가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이성애주의 문화가 일으키는 병증을 강남역 노래방의 가해자 남성이 드러낸 것처럼, 교회가 바로 그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이제 퀴어 논점은 교회 개혁의 원리가 된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안고 있는 병증에서 교회가 치유될 출구를 찾기 위해 교회는 퀴어 운동의 일원이 되어야 하고 퀴어적 개혁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빌립보서2,6~8은 신이 인간과 극한적으로 나뉜다는 일반적 인식을 무너뜨린 신에 관한 얘기다. 퀴어가 이성애주의적 이분법을 해체한 것처럼 신도 신 중심주의적 이분법을 해체하였다는 것이다. 거꾸로 신 중심주의적 가치와 질서를 넘어서기 위해 예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처럼, 남성 중심적 이성애주의의 질서를 넘어서기 위해 퀴어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