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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발람의 길 vs. 최태민의 길 - 종교는 어떻게 정치와 만나고 역사의 위기에 개입해야 할까

이 글은 [기쁨과 희망] 18호(2016 겨울)에 실린 글을 보완해서 [공동선] 2017년 1-2월호에 기고된 것입니다. 가톨릭계 잡지에 거의 같은 시기에 실린 것은 순전히 저의 실수입니다. [기쁨과 희망]에서 청탁받아 원고를 보낸 것을 잊고 [공동선]에 또 원고를 보낸 것입니다. 두 잡지의 편집진께 너무나 죄송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좀 더 뒤에 보낸 [공동선]에는 조금 다듬어보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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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의 길 vs. 최태민의 길

종교는 어떻게 정치와 만나고 역사의 위기에 개입해야 할까

 

 

 

이제 곧 당신이 떠나왔던 그 곳으로 빨리 가 버리시오.

나는 당신에게 후하게 보답하겠다고 말하였소.

그러나 보시오! 주님께서 당신이 후하게 보답받는 것을 막으셨소.

―〈민수기24,11

 

 

 

 

최근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비밀문서 중, 2007년 주한 미국 대사인 버시바우(Alexander Vershbow)가 본국으로 송고한 비밀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한국 대통령 선거: 여전히 혼란스런 정치(Stiill the Politics of the Vortex)라는 제목의 문서인데, 특히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과 박근혜 캠프 간의 치열했던 네거티브 선거전에 관한 보고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당시 박근혜 캠프는 이명박의 ‘BBK 주가조작 사건에 주목했고, 이명박 캠프는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에 주목했다. 그런데 버시바우의 보고서에서 박근혜에 관한 다음과 같은 표현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지금은 망인이 된 목사에게 청년시절 박근혜의 몸과 영혼이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고 그 덕에 최 목사의 자녀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Rumors are rife that the late pastor has complete control over Park’s body and soul during her formative years and that his children accumulated enormous wealth as a result.”)

 

여기서 지금은 망인이 된 목사에게 청년시절 박근혜의 몸과 영혼이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는 말이 눈에 번뜩 뜨인다. 여기서 목사는 최태민을 뜻하는데,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 방식을 시사하는 이 문장이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수수께끼 하나를 해명하는 실마리를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상한 관계는 박근혜와 최태민이 맺고 있는 이상한 관계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버시바우의 문장에서 간과되고 있는 표현이 있다. 최태민이 목사(pastor)로 호칭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 우리는 그를 목사라는 호칭과 함께 기억하고 있었다. 한데 개신교 극우주의를 대표하는 언론인 모임인 한국교회언론회가 최근(1026) 발표한 성명에서 그가 목사가 아니라고 주장한 이후 대다수 언론들은 목사대신 라는 호칭 접미어를 붙여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호칭 변화와 맞물려 최태민이 개신교 목사가 아니라 무속적 소종파의 교주로 기사화되는 일이 잦았다. 그리고 이 소종파 교주의 광신도로서 박근혜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저명한 언론들도 이 점에선 별반 다르지 않다. 여러 외신들은 그를 샤머니즘을 숭배하는 대통령으로 조롱했다.



대전일보1973513일자에 실린 영세교 광고

 


한편 1974815, 박정희 대통령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육영수 여사가 피살되자 최태민은 박근혜를 수신자로 하는 편지 여러 통을 청와대로 보냈다. 그 속에는 자신이 육영수 여사와 접신하고 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1975) 3월경에 박근혜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육 여사 생전에 만났다는 설도 있다.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지만, 어느 경우든 이 글의 논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래에서 얘기할 것인바, 그가 목사가 된 이후 박근혜의 공적 활동이 본격화되었고 그 활동에 무속인이 아닌 목사로서 최태민이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는 사실이다.)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사실과 다르다. 더욱이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를 마치 무속신앙 탓인 것처럼 호도한다. 물론 최태민은 분명 1970년대 초까지는 기독교 의 신비주의적 소종파 지도자였다. 그는 영세교라는 신종교를 창안했다. 그 교리에 대해서는 불교의 (, 깨우침)과 기독교의 성령 강림’,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절충한 해석체계 정도가 알려졌을 뿐이다. 그의 활동무대는 대전 보문산의 케이블카 근방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원자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고, 그를 찾아온 대중에게 덧씌운 악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치유라는 구마사였다.

그런데 그 직후(그해 4) 그는 놀랍게도 목사가 된다. 그가 일제강점기 시절 황해도의 경찰서 순사로 있던 때에 일본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경찰 간부로 있던 조현종과 가까이 지냈는데, 이 사람이 1975년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라는 한 군소교단의 총회장으로서 최태민에게 목사 안수를 준 인물이었다. 당시는 신학대학 수가 많지 않았고, 특히 군소교단의 경우는 신학교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목사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교회법이 규정한 인준 과정이 무시된 채 목사 직위를 부여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최태민이 한 신흥종교의 창시자였다가 개신교 목사가 되기로 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는 이 군소교단에서 편법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목사들은 대개의 교단에선 아웃사이더 성직자로 차별대우를 받는 것이 상례인데, 최태민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교단의 주요 인물이었고, 그로부터 불과 10년도 못돼서 교단 총회장의 직을 맡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목사가 되자마자 한국 개신교 목사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막강한 위상을 가졌다.

그것은 목사가 된 직후(그해 6) 그가 조직한 구국선교단 덕이다. 이 단체는 친정부적 행동대 역할을 자임했던 민간단체인데, 특히 자발적으로 군사훈련 받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구국십자군이 이 기구 활동의 주축이었다. ‘십자군이라는 이름이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에는 무수한 개신교 목사들이 적극 참여했다.

박근혜는 모친의 피살 직후 한동안 칩거하고 있었는데, 최태민과 만난 이후 방 밖으로 나왔고, 특히 구국선교단 지원활동을 전국적으로 벌였다. 즉 최태민과 함께 그는 공적인 활동을 개시하게 된 것이다. 이후 둘은 최태민이 사망하기까지 무려 19년간 긴밀하게 공조한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구국여성봉사단, 새마음봉사단, 그리고 5공화국 이후 영남대학,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등으로 이어지면서, 많은 재산을 축적했고 권력을 강화시켜 갔다.


1975621일 배재고교 교정에서 구국선교단의 산하단체인 구국십자군 창군식에 박근혜와 최태민이 참석하고 있다. 여기에는 16개 개신교단 1,800여 명의 창군대원이 참가했고 이중 많은 이들이 개신교 목사였다.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버시바우의 보고서는 최태민 목사에게 박근혜가 몸과 영혼이 완전히 사로잡혔다는 풍문이 널리 퍼졌다는 얘기를 담고 있다. 사실은 널리 퍼졌다기보다는 정치권과 찌라시 소비층 사이에서 돌고 있는 얘기를 일반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필경 버시바우가 확신하고 있는 사실을 풍문을 빙자해서 보고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아무튼 이 보고문은 두 사람의 팀워크를 최태민이 전적으로 주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절대자의 딸로서 어린 시절부터 지나친 보호 속에서 성장한 한 여성이, 어머니가 피살된 이후 불과 20대 초의 나이로 한 국가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담당해야 했던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난 현실이었다.

그녀는 절대자의 공포정치 속에 휘둘리던 국민에게 엄마의 포근한 품을 연기해야 했다. 겨우 대학을 갓 졸업한 방년(芳年)의 여성이 자신의 나이에 맞는 복장, 헤어스타일, 행동거지, 말투를 억제하고, 자기 모친이 수행했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 무모한 역할을 딸에게 부과했고, 국민은 그것으로 공포정치의 버거움을 견뎌냈다. 이것은 그 시대를 겪으며 성장한 오늘의 60대 이상의 사람들이 그녀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표명하게 했던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기에 퍼스트레이디 되기의 두려움을 견뎌내기 위해 그녀는 엄마의 곁이 절실했을 것이겠다. 그리고 그 절심함의 틈을 파고든 이가 바로 구마사이자 목사인 한 남자였다. 구마사이기에 영계와의 소통을 연기할 줄 아는 이였고, 목사였기에 두려워하는 이가 의지할 품을 어떻게 표현할지 아는 이였다. 해서 광신도와 종교지도자의 비대칭적 팀워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관계의 배경에 깔린 종교는 샤머니즘이 아니라 바로 개신교였다는 점이다.

1993년 최태민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것을 예언한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사망한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박근혜의 측근 인물들을 통해 이어진다. 이들은 모두 최태민과 직간접으로 엮인 사람들이다.

그녀는 1998년 대구 달성의 재보궐 선거에 나선다. 이때 그녀의 비서실장은 최태민의 사위이자 최순실의 남편인 정윤회다. 필경 1977년부터 박근혜 측근에 있던 최순실 덕에 정윤회가 비서실장으로 발탁된 것이었겠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문고리 3인방이라고 부르는 이재만, 안봉근, 정호성, 그리고 얼마 전 사망한 또 한 명의 측근인 이춘상을 채용한 자는 바로 정윤회였다. 하여 2000년 박근혜 참모진에서 밀려난 정윤회를 제외한 최순실과 네 명의 최측근 인사들은 그녀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냈고 그녀의 정권이 파탄 나기 직전까지 그녀 주위에 있어왔다.

절대자의 딸로 자라면서 누군가와 소통해본 경험도 부족하고, 자기 자신의 얼굴로 사람을 대해보지 못한 채 주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역할로 연기하며 살아야 했던 그녀는 최태민의 예언대로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최태민이 구축해 놓은 인맥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최태민은 죽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운명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다시 최태민이 목사가 되던 19754월로 돌아가 보자. 조현종은 민수기22~24장의 발람 얘기를 하면서 최태민에게 목사 안수를 주었다고 한다. 비이스라엘계 예언자인 민수기의 발람이 모세를 지지하는 신탁을 내린 것처럼 비기독교계 주술가인 최태민 당신은 박정희 대통령의 딸에게 하느님의 신탁을 전하는 자가 되라고 말이다. 발람이 이방인이지만 사실상 야훼의 예언자가 되었듯이 최태민도 이교의 주술가였지만 하느님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목사직을 부여한다는 얘기다. 그리하여 이제 최태민이 행하는 주술은 샤먼적 주술이 아니라 목사의 주술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를 신비주의적 신흥종교 교주의 광신도로 해석하거나, 그녀의 무능과 불통, 범죄 등을 샤머니즘과 연계시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로서 겪어야 했던 성장의 장애, 그 틈새로 끼어든 한 목사의 영향 아래서 파행적 권력화의 길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와 기독교 인사들이 무수히 그의 정치에 개입했고, 기독교도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무능, 불통, 불법의 배후에는 기독교와 기독교 인사, 그리고 권위주의 지지자들이 있음을 간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최태민을 매개로 하여 엮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현종이 최태민을 발람과 비교한 것에 대해 더 얘기해 보자. 민수기의 발람에 관한 텍스트는 두 개 이상의 자료가 합쳐진 것인데, 그중 보다 오래된 자료는 (유다국이 아닌) 이스라엘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민수기의 발람 이야기의 배경은 국가 이전 시대이지만 그 이야기가 문서로 재구성된 것은 고대 이스라엘국의 왕실 서기관에 의한 것이고 그것이 그 후에 유다국 서기관에 의해 다시 재구성되었다. 당시 이스라엘국은 발람이 속한 나라인 시리아 지역의 국가와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아마도 아시리아가 시리아-팔레스티나를 침공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동맹국이 되었다. 발람 이야기가 이스라엘국 서기관에 의해 재구성될 무렵은 아마도 양국의 동맹이 견고하게 작동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한편 유다국은 이 동맹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시리아의 동맹군의 침략을 받기까지 했다. 그래서 유다국은 시리아를 매우 부정적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다국 서기관에 의해 재재구성된 것의 이면에 깔린 보다 오래된 자료인 이스라엘국의 발람 이야기를 추적해 보면, 발람에 관한 두 가지 특징을 추론해낼 수 있다. 첫째, 그는 (이스라엘 출신이 아닌) 북시리아의 주술가로서 하느님의 신탁을 선포하였지만 하느님을 숭배하는 종교의 신자로 귀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종교 신봉자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 과정에서 하느님의 신탁과는 다른 신탁을 요구한 모압 왕 발락의 뜻을 거스름으로써 왕이 주겠다던 보상금을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떠났다는 것이다. 훗날 발람에 대해 좋지 않은 늬앙스를 갖고 있던 유다국 계열의 전승이 그를 뇌물수수자로 묘사하게 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자료에서 발람의 사례는 최태민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영세교에서 개신교로 전향했지만 발람은 자신의 신앙을 기반삼아 하느님의 신탁을 전한다. 곧 발람은 개종의 모범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종교와 비종교를 꿰뚫어 존재하는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예언자의 모범이다. 둘째, 그는 자신의 종교로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권력을 장악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신념을 지켰던 종교인의 모범인 것이다.

박근혜에게는 우리 역사의 부조리함이 얹어져 있다. 사람들 모두 각기 다르게 역사의 위기를 안고 살지만, 그녀의 몸과 뒤엉킨 역사의 위기는 부조리함과 얽혀 있는 것이다. 종교는 삶의 위기에 놓인 이에게 다가가야 한다. 최태민은 박근혜의 존재론적 위기에 다가간 종교인의 표상이다. 하지만 그의 길은 그것으로 부와 권력을 장악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권력 농단과 범죄를 자행하는 부조리함의 길이 되었다. 그런데 발람은, 발람이 선택한 길은 부와 권력을 포기하면서 위기의 사람들에게 다가간 종교인의 길이다. 최태민과는 다른 발람의 길은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