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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갑호비상의 시간, 테러리즘을 막아라!

이 글은 [경향신문] 2017. 03. 11자 <사유와 성찰> 코너에 게재된 저의 칼럼 원고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703102103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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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호비상의 시간, 테러리즘을 막아라!

 

박영수 특검의 목을 날리려고 온 거 아닙니까?” 엄마부대 대표의 말이다. “이 새끼들은 몽둥이맛을 봐야 해요.” 자유청년연합 대표의 말이다. 언론들의 기사에서 수없이 많이 인용된 이 거친 표현들을 눈살 찌푸리며 보지 않을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80대의 한 개신교 장로도 눈 끝에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나의 인터뷰이였던 그는 1947년의 생생한 기억을 술회한 적이 있다. 중학생 시절 친했던 형들이 어느 날 선생님을 향해 그렇게 욕설을 하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고 했다. 한데 그것이 끝이 아니다. 며칠 후 그 선생님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몰매를 맞고 교사직을 사임한 뒤 아무도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인터뷰이 할아버지는 추측했다. 친했던 형들이 가해자였을 것이라고. 한데 그 형들은 평안북도에서 월남한 이들이었다.

그 시절 월남한 이주자들 중 개신교도가 꽤 많았다. 특히 평안도 출신의 개신교 이주자들은 열의 아홉이 장로교도였고, 이곳의 장로교는 당대 세계에서 가장 강성의 근본주의자로 유명했다. 그리고 이곳 출신 장로교도들 다수는 신흥자산가층이었다. 그 덕에 그이들의 자녀 중 학교에 다녔던 이들이 많았다. 한데 그들은 공산주의자들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했고 혹독한 정치보복을 당한 끝에 일부가 월남했다. 대개는 남자 청()년이었다.

월남한 이들은 잘 곳도 먹을 것도 막막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서북청년단은 이런 월남자들에게 임시로 기숙할 곳과 먹을 것을 대주었다. 한데 그것만 준 것이 아니다. 서북청년단의 도움을 받고 단원이 된 이들은 누군가로부터 사주받고 후원받으며 정치적 테러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북한에서의 뼈아픈 원한을 되갚을 요량에 수당도 받을 요량에 테러에 가담했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폭력의 화신이 되어갔다. 이 무렵 자행된 무수한 폭력과 학살에 가담한 가장 잔혹한 테러리스트가 바로 서북청년단원이었다.

서북청년단 단장은 문교부를 대리해서 북한에서의 학력증명서를 발급했다. 그렇게 해서 북에서 학생이었던 많은 월남자 청()년들이 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들이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 학교에 간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학교 내의 빨갱이들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평범한 청()년들이, 적개심을 갖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폭력적 가해의 경험이 일천했던 그들이 남한에서 점점 잔혹한 학살자가 되어갔다. 처음에 욕설을, 다음엔 집단적 린치를, 그리고 결국에는 무자비한 학살을.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나는 매개적 존재에 주목한다. 때로는 최소한의 생존비용을 제공해 주는, 때로는 분노할 대상을 지목하고 그 명분을 공적으로 제시해 주는, 그리고 그런 행위를 한 다음 종교인이 간증하듯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매개적 존재, ()의 중간적 역할에 고무된 이들이, 평범했던 그이들이 응징행위를 수행하는잔혹한 가해자로 변화해갔다.

310, 결국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인용(認容)될 것임이 예상되었던 얼마 전부터 이른바 태극기부대들 사이에서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전면에서 대단한 스팩의 인사들이 불복종의 발언들을 거칠게 지껄여댔고 또 험상궂은 인상과 복장으로 무장한 이들이 더 거칠게, 특정인을 지목하여 욕설과 협박의 말을 퍼부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국정원 같은 몇몇 정부기관들과 그 산하기관들, 관변단체들, 그리고 일부 대형교회들의 은밀한재정적 후원이 있었다.

1947, 테러의 시기였던 그때, 경찰은 백색 테러리스트들의 은밀한 후원자였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유린되었고, 극우주의적 독재자가 대통령인 정부가 탄생했다. 1946년의 절대 불리한 여건에서 1948년 집권까지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진 사이에 낀 시간인 1947, 테러와 암살이 넘쳐나게 발생하던 시기에 경찰은 백색 테러의 은밀한 후원자였다. 물론 모든 것이 경찰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테러의 시대를 야기한 무수한 매개적 존재들이 난무했어도, 제 역할에 충실한 경찰만 있었다면 그런 탄식의 역사는 어느 만큼은 제어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수많은 평범했던 청()년들에게 야만적 학살자라는 역사의 오명을 안기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탄핵결과 발표 하루 전날, 경찰이 담당해야 할 치안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도 특별한 가치를 부여받은 날, 경찰은 갑호비상상황에 돌입했다. 그것은 평범했던 이들에게 역사의 오명을 씌우지 않도록 하는 특별한예방적 치안의 임무를 뜻하는 것이어야 한다. 거기에는 테러리즘의 매개적 존재의 준동을 특별히억제하는 임무가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