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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극우주의적 의미 코드로서의 ‘태극기-성조기-이스라엘국기’

[한겨레신문] 2017년 3월 18일자 '토요판 뉴스분석, 왜?'에 실린 글입니다. 글의 제목과 구성과 내용에서 제가 보낸 원고와 조금 다르게 편집되었지만 저의 논지가 손상되지 않게 잘 정리되어 있어 기사를 읽어도 되겠지만, 여기엔 제가 보낸 글을 올립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870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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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주의적 의미 코드로서의 

태극기-성조기-이스라엘국기


 

 

태극기

2002년 월드컵 때에 거리를 휩쓸었던 빨간 티셔츠와 태극기는 국민 각자를 한국인으로 호명하는 국민의 아이콘이었다. 그 무렵 나는, 글로벌 시대에 전국을 하나의 색깔로 물들이고 국기를 흔들어대며 국가주의를 부추기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이곳에서 매일 잠들고 깨며, 매일 도로 위를 걷고, 일터로 출근하고 퇴근하며,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한국인과 생활패턴이 그닥 다르지 않은 외국인들에게, 하나의 국민 아이콘으로 결속된 사회는 얼마나 생경하고 소외감을 줄 것인가, 또 얼마나 폭력적으로 느껴질 것인가에 대해 물은 것이다. 적어도 그땐 이런 식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급진적 문제제기들이 흔히 있었다. 정부 내에서조차 다문화성운운하는 국민의 경계를 약화시키려는 논의가 왕성했다.

그리고 십년이 지났다. 두 번의 보수정권을 거치면서 정권이 주도하는 담론의 지형은 국민의 경계를 견고하게 하는, 하일ㅈ월 국민의 분열을 획책하는 일이 공공연해졌다. 박근혜는 광범위한 보수세력을 결속시켜 대통령이 되었지만, 반대파는 고사하고 자신을 지지했던 절반의 보수주의적 국민조차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이는 법의 제정자처럼 자신은 법을 지키지 않았고 타인에겐 늘 법의 준수를 강요했다. 그렇게 군림하는 자였던 그이의 정치는 대체로 강성의 극우주의 기조를 띠었다. 그런 정치에 동의하고 따르는 자는 국민이 될 것이고, 아닌 자는 종북혹은 배신자로 간주했다. 진보주의적 대중은 물론이고, 극우에 동조하지 않는 보수주의자들에도 당혹스런 시간이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새롭게 일상이 된 풍경 하나는 태극기가 날마다 거리 곳곳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여백을 허용하지 않는 국기의 향연은 역설적이게도 다수의 국민들에게서 국기의 기억을 흐릿하게 했다. 단지 콘크리트 지지자들’, 아니 실은 그중의 아주 적은 일부만이 매일 거의 모든 장소에 걸려 있는 국기를 가슴 뜨겁게 응시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도 필경 무관심하게 그 거리를, 거리의 태극기를 스쳐 지났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태극기가 국민의 상징임을 강도 높게 주장하면서 모든 시간, 모든 장소에 국기를 걸어둘수록 국민의 국기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졌다.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 관념적으로마나 그 주장이 긍정될 뿐이었다. 하여 박근혜 정부에 와서 태극기는 국민의 아이콘이라기보다는 그이의 지지자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변질되어갔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임기가 거의 끝날 무렵 국정농단, 부패, 비리, 반민주, 반인권, 무능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이 붉어져 나오면서 헌법재판소에 대통령 탄핵심판이 청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른바 대통령 탄핵국면이 시작된 것이다.

한데 탄핵국면 초기인 201612월 탄핵반대자들의 시위의 아이콘으로 태극기가 등장했다. 그리고 곧 그 집회는 태극기집회라는 명칭을 얻었다. 거기에는 온통 태극기로 물결쳤고 심지어 망토처럼 두르기도 하고 앞치마, 목도리 패션으로도 등장했다. 적어도 이 집회에서 태극기는 공간을 여백 없이 가득 채웠다.

한데 이것은 그 반대의 효과를 동반했다. 그 공간 외부에서 태극기는 소거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점점 태극기를 들고 다니는 걸 께름칙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국경일에 태극기 계양을 철칙처럼 여기며 살아왔던 한 70대 노인은 올해 3.1절엔 그 철칙을 접었다. 탄핵을 반대하는 자처럼 보이기 싫어서다.

나아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태극기가 국민을 표상한다는 이미지가 더욱 흐릿해졌다. 사실 이즈음은 국민 만들기의 상징적 기표로서의 국기라는 의미는 이미 색이 바래고 있던 터였다. 우리나라는 더 이상 식민지도 아니었고 약소국도 아닌, 소제국으로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타국 혹은 타국의 이민자들에게 태극기는, 우리가 일본의 욱일기를 보며 느끼는 것처럼, 폭력과 착취의 기표로 여겨질 수도 있다. 더구나 지구화로 인해 국민적 정체성도 희미해지고 있는 터였다. 여기에 탄핵반대자들의 볼짱 사나운 태극기 퍼포먼스는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태극기가 혐오의 감정과 겹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탄핵반대자들은 태극기집회에 참석한 자신들을 애국시민이라고 불렀다. 태극기의 의미 변질과 똑 같은 현상이 애국이라는 용어에도 나타났다. ‘태극기-애국이라는 의미의 코드는 국민통합의 기호가 아니라 국민분열의 기호이며, 박근혜 지지자들로 한정된 자들을 표상하는 아이콘이 된 것이다.

 

성조기

 

태극기집회를 바라본 많은 이들을 의아하게 한 것은 이 집회에 성조기도 등장했다는 점이다. 두 개의 국기가 동시에 등장할 때 사람들의 심상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풍경은 월드컵 축구경기일 것이다. 이때 두 국기는 서로 대결하는 양편을 각각 통합하는 기호다. 계층도, 연령도, (), 지역도 다르지만 경기 순간만은 모두 하나로 뭉쳐 우리나라를 응원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다른 방식의 기억도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제널드 포드 미국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우리들은 양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길거리에 나와 그가 탄 자동차를 향해 마구 두 국기를 흔들어댔다. 이때 태극기와 성조기는 동맹, 아니 어른들의 표현에 따르면 혈맹의 기호다. 나의 아버지 세대는 더 절절하다. 미군의 도움으로 인해 공산괴뢰를 막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미국은 구원자.

태극기집회에 참여한 이들이 성조기를 태극기와 함께 들고 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두 가지 집단기억 중 후자를 전면에 내세운 행동이다. 문제는 그것이 탄핵반대와 무슨 연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2000년대 초를 떠올린다. 그 무렵도,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로 양분된 시위 양상처럼, 두 개의 집회가 대립적으로 양립했다. 그때 두 시위의 화두는 반미 대 친미였다. 그때도 이번처럼 대형성조기가 등장했다. 심지어는 개신교 목사로서 대표기도자로 연단에 오른 이는 영어로 기도를 했다. 주최 측 추산에 의하면 10만의 청중이 모인 자리에, 그중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이는 많아야 5%도 안 될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영어로 기도했다. 신은 영어로 말할 때 더 잘 들을 것이라고 믿었던 때문인가, 아님 신은 미국인과 오버랩되는 이로 상상되었기 때문인가? 어떻게 보든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들고 집회에 나온 이에게서 성조기란 태극기와 병행한다. 아니 실상은 태극기보다 성조기가 우위에 있는 상상적 초월자다. 여기엔 일종의 식민지적 무의식이 작용한다. 여기엔 일종의 미국=구원자라는 믿음이 개입되어 있다. 여기엔 일종의 미국 중심주의가 우리의 축복이라는 신탁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다.

오늘의 탄핵반대자들도 비슷한 심정으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양손에 들고 있다. 그런데 집회의 상황이 변했다. 미국을 옹호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대통령을 옹호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을 압박하는 자들은 누군가. 그들은 종북배신자들(혹은 유사종북’)이다. 이때 성조기는 또 다시 우월한 혈맹의 기표로 작동한다. 온통 종북혹은 유사종북으로 둘러싸인 박근혜를, 그리고 그이가 표상하는 극우적 반공의 나라를 돕는 우월한 혈맹을, 마치 10년 전 10만의 청중 앞에서 영어로 대표기도 하는 목사처럼, 성조기를 흔들며 갈구한다. 위기에 처한 대통령과 애국시민을 도와주소서라고.

이와 같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있는 손은 이상한 손이 아니라, 언젠가 본 듯한 익숙한 손이다. 그 손은 극우주의적 식민지 백성의 기도하는 손이다.

 

이스라엘국기

 

그런데 또 하나의 국기가 보였다. 이스라엘국기다. 다윗의 별이 중앙에 있고 나일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상징하는 두 개의 선이 위아래로 그어진 국기다. 그 속에는 이스라엘민족의 만들어진 역사와 그 위조된 역사에 기초한 고토회복이라는 기대가 새겨 있다. 한데 얼핏 보면 박근혜 탄핵반대와는 무관해 보인다. 과연 그런가?

우선, 이스라엘국민이 아닌 데도 그 나라의 국기에서 의미를 되새기는 집단은 개신교의 극우적 근본주의자들이다. 가령 미국의 극우파 근본주의 목사인 조셉 와일드는 미국인이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 가운데 하나인 므낫세 족속의 후손이라고 함으로써 타락하여 원형성을 상실한 이스라엘의 나머지 부족들과 구별된 므낫세 족속과 미국인, 특히 백인 극우주의자들을 연결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과 미국이 연결되지만, 모든 이스라엘인과 모든 미국인이 아닌, ‘진실한이스라엘인과 진실한미국인만이 하나의 계보로 엮인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한편 그보다 앞서서 19세기 영국의 한 극우주의자들이 주장한 브리티시 이스라엘리즘의 상상적 세계관에 의하면 에브라임 족속의 일파가 영국으로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이 주장은 에브라임과 브리티시 이스라엘리즘을 신봉하는 영국 극우주의자들을 하나의 계보로 엮는다.

이런 순혈주의적 믿음은 한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최근 한국 개신교 극우파들이 선호하는 용어의 하나가 선민이다. 즉 한국인 중 성별되어 구원받은 이들은 선민으로서 이스라엘과 순혈성으로 연결된다는 믿음을 담은 용어다.

이렇게 개신교의 극우적 근본주의자들의 언어 속에서, 한국인 중 선민으로 성별된 이들은 원조선민이스라엘과 연결된다. 태극기와 이스라엘기가 하나의 코드로 엮일 수 있는 생각의 장치는 이러하다.

태극기-성조기-이스라엘국기, 태극기집회 속의 세 국기의 의미의 연결고리는 극우주의다. 특히 이것은 개신교 극우주의와 친화적인 의미의 코드다. 여기에는 박근혜로 상징되는 한국의 극우주의가 미국의 극우주의, 그리고 원조선민적 주체인 이스라엘과 상상적으로 동일시된다. 한데 이러한 동일시는 수직적 동일시, 식민지적 동일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식민주의적인 극우주의적 동일시는 오늘 한국에선 박근혜라는 기호로 표상되며, 반공산주의, 반동성애, 반이슬람의 정치적 아젠다로 묶인 글로벌 극우동맹을 지향한다. 하여 박근혜 탄핵반대의 구호는 세 가지로 열거한 을 멸절시키는 극우주의 동맹을 선언하는 외침이다. 또한 여기에는 극우주의 동맹을 구동하려는 주역의 하나가 개신교 극우주의임이 암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