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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근혜 숭배신앙에서 대중의 절망적 하소연 해독하기

이 글은 [경향신문] 2017년 4월 5일자 '사유와 성찰' 코너에 실린 칼럼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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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숭배신앙에서 

대중의 절망적 하소연 해독하기



박근혜에 대한 법원의 구속 결정 이후 태극기 집회도 점점 잦아들었다. 이제 한국사회는 빠르게 대선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그런데 나는, 대선국면의 향배에 깊은 관심이 있지만, 동시에 태극기 집회의 잔상을 지우지 못해 많은 시간을 복잡하게 뒤얽힌 생각에 골똘해 있다. 특히 박근혜 신앙이라고 할 만한 대중현상과 지난 5~6년 동안 직접 보았거나 기사를 통해 접했던 몇몇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고 있다.

지난 320일과 28일 벌어진, 당황스런 한 사건이 뒤죽박죽 꼬인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었다. 정신병력이 있는 40대 남자가 박근혜 사저 앞에서 자신을 격암유록의 메시아적 존재인 정도령이라고 주장하면서 알몸 퍼포먼스를 벌였다.

주체와 타자의 교란을 몸 안에서 혼란스럽게 체현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자신을 정도령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그가 구원자인 동시에 구원의 대상이고, 절망하여 구원을 갈망하는 자신이 곧 그렇게 부르짖는 세상이기도 하다는 무의식적 언어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주장 속에는 고통에 빠진 자신과 타자들의 절망적 하소연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한데 그 일이 박근혜 사저 앞에서 벌어졌다. 그것은 박근혜라는 기표가 정도령 신앙과 연관되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실제로 박근혜는 조선의 묵시문학인 격암유록의 메시아 표상인 정도령이 현현한 것으로 숭배되었다. 이런 메시아 담론이 왕성하게 회자되기 시작한 때는 2012~2013년이다. 나는 그 무렵 박근혜의 콘크리트 지지율의 종교성에 관한 글에서 박정희 메시아니즘의 현현으로서의 박근혜 메시아니즘을 이야기한 바 있다.

여기서 하나 더 유념할 것이 있다. 이런 대중 메시아니즘의 특징의 하나로 여러 종교들의 메시아 표상이 뒤섞여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격암유록속에도 당대의 여러 종교들의 메시아적 상징과 해석들이 뒤섞여 있다. 물론 성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2013년 출간된, 박근혜 메시아론을 예언하는 묵시문학인 모정주의사상원(母情主義思想院)에는 기독교와 한국 전통종교의 메시아적 표상들이 뒤섞여 있다. 대중이 자기 시대의 온갖 구원자들을 두루 호출하여 구원을 갈구한 결과다.

흔히 이런 혼합주의적 신앙을 주류종교와 주류사회는 미신이라고 규정했다. 문제는 이런 규정이 대중의 구원 갈망을 잘못된 종교성이라고 폄훼해 버린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는 주류종교가 만들어 놓은 교리적 틀 안에 있으면 좋은 종교’, 그것 밖에 있으면 잘못된 종교라는 이분법이 담겨 있다. 이런 이분법적 종교관은 미신이라고 배척한 종교성 속에 담긴 대중의 절망적 아우성을 침묵의 밀폐공간에 가두어 버린다.

박근혜 메시아니즘이 활활 타오르던 2012년 무렵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의 광풍을 감당할 수 없어 삶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던 대중의 고통이 절망적으로 체감되고 있었다. 그보다 조금 앞선 시간들, 곧 신자유주의가 거세게 밀어닥치고 있던 2천 년대 초에는, 절망보다는 낙관이 아직 주조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은 로또적 물신주의에 휩싸였고 너도나도 부자되세요라는 인사말에 빠져 있었다. 그런 신자유주이 시대의 조증적 현상의 절정에서 이명박 정권이 탄생했다.

하지만 2012년 어간에 이르면 사회는 울증 양상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절망하고 무력해졌다. 그리고 누군가의 위로에 집착했다. 그때 유행하던 말이 힐링이었고, ‘힐링 전도사들이 스타로 부상했다. 그런데 그 무렵 가장 적극적인 사회적 울증 행위가 바로 정치적 메시아니즘이었다. 그때 가장 성공적인 메시아적 숭배의 대상이 박근혜였다.

그러니까 박근혜라는 키워드를 메시아적 신앙으로 소비했던 대중은 자기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을 뿐 아니라 타자들까지 희망이 산산이 무너져버린 상황, 곧 자신과 세계의 구원의 절박하게 필요한 상황 인식 아래 박근혜를 그 구원자로 열망했던 자들이다. 요컨대 그 속에는 절망의 기조가 희망의 기조를 너무나 압도해 버린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고통 속에서 신음하면서 구원해 달라는 대중의 절절한 부르짖음이 들어 있다.

그것이 퇴행적인 정치적 프레임으로 흡수된 결과가 태극기 집회. 하여 그 퇴행성을 비판하는 일이 너무나 중요하지만, 동시에 박근혜 숭배 현상 속에서 대중의 절망적 한숨을 해독해내고, 그러한 절망을 구원으로 변화시키는, 사람 살리는 사회체제를 만들기 위한 노력 또한, 대선 이후 새 체제에 대한 상상력에서 꼭 필요한 생각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