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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강좌

한백신학교실 시즌4 - <제4강: 결론. 퀴어적 성서 해석의 새로운 실험을 향하여>

이 글은 '한백신학교실 시즌4 - 혐오와 억측의 성서 다시 읽기: 동성애에 대한 개신교의 페이크뉴스 맞서기'의 <제4강: 결론. 퀴어적 성서 해석의 새로운 실험을 향하여>(2017 07 09) 강의 원고입니다.

동영상은 이 강좌의 페이스북 계정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facebook.com/HBThSch/videos/vb.433470190343411/443807249309705/?type=2&the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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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09)

결론_퀴어적 성서 해석의 새로운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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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동성애를 퀴어한(queer) 것으로 문제시하기 시작한 것은 로마의 마지막 통합제국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1(Flavius Theodosius, 347~395)에 의해서였고 이후 신학적으로 동성애는 죄악으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성애 처벌이 시작된 것은 서기 538년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482년경~565)에 의해서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동성애 처벌에 관한 법률이 일관성 있게 적용된 것은 아니었고, 법의 지배가 체계화되기 시작한 근대에 와서야 보다 보편적인 처벌이 실행되었다.

반면 성서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없었던 시대의 산물이며, 우리가 보았듯이 동성애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던 텍스트들은 착시가 낳은 오독의 산물이다. 현대의 아카데믹한 성서학 연구들은 이러한 오독을 넘어서 다른 해석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체로 일치한다.

그런데 최근, 아마도 1980년 어간 북미의 복음주의자들 일각(특히 극우적 근본주의)에서 반동성애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성서가 동성애를 반대하고 있다는 주장이 다시, 아니 어느 때보다도 강도 높게 제기되었다. 이런 주장은 주로 미국과 한국,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 등 극우주의가 그리스도교의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들에서 널리 확산되었다.

그런 주장이 극우적 그리스도교도들이 퍼뜨린 페이크뉴스임은 지난 세 번의 강의에서 밝힌 바다. 우리는, 동성애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주장되었던 성서 텍스트들이 실은 동성애 문제와는 무관한, 전혀 다른 논점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강의에서 다루지 못한 성서 텍스트들이 몇 개 더 있지만, 그것도 마찬가지임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이 강좌의 마지막 강의는 퀴어적 성서 해석에 관한 것이다.

 

텍스트와 컨텍스트

 

근대적인 성서해석학은 역사학과 함께 시작되었다. ‘역사학은 전근대의 해석학의 지위를 무너뜨리는 근대적 지식의 맹아였던 것이다. 근대적 역사학으로서의 성서학은 성서라는 텍스트를 그 컨텍스트와의 연관성 속에서 해석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 성서학은 성서의 컨텍스트화(contextualization)에 다름 아니다. 이때 성서 해석학의 과제는 컨텍스트 속에서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를 밝히는 데 있다. 이러한 역사학적 태도를 실증주의적 역사학이라고 부른다.

한편 17세기 후반에 시작된 실증주의적 역사학으로서의 성서해석학은 19세기 말에 이르면 결정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왜냐면 성서 텍스트들 속에는 다층의 컨텍스트와 연결된 여러 층위(layers)가 복잡하게 뒤얽혀 있어 하나의 본질적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컨텍스트화를 상정하면 하나의 본질적 의미는 사라지고 다양한 역사적 해석들이 제시될 수 있다. 가령 출애굽에 관한 성서 텍스트에는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들의 기억, 부족동맹 이스라엘 사회의 기억, 군주국 이스라엘과 유다의 국가적 기억, 바빌로니아로 유배된 이들의 기억, 유다지역으로 귀환한 이들의 기억 등, 시공간을 달리하는 컨텍스트 속에서 형성된 기억들이 서로 뒤얽혀 있다. 이렇게 원초적 기억이 시공간을 달리하면서 재해석되는 것을 역사화(historization)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때 역사화는 무한히 열려 있지 않고 특정한 제약을 받는다. 성서 해석자의 권위가 보증하는 것만이 역사화의 자격을 얻는 것이다. 이때 그 권위는 아카데미즘이라는 제도가 보증하는 권위다.

이러한 아카데믹한 성서 해석학에 대한 도전 중의 하나로 근본주의적 해석학이 제기되었다. 전자가 역사학으로서 컨텍스트 본질주의(context essentialism)라는 특징을 갖는다면, 후자는 교리 본질주의(dogmatic text essentialism)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교리 본질주의를 보증하는 권위는 성직자다. 특히 근본주의적 성직자가 모든 해석의 권위를 독점한다. 그이는 성서 속에서 자신들의 교리에 부합하는 성서 텍스트를 특권화하여 성서의 의미를 단언적으로 주장한다.

앞에서 나는 성서가 반동성애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최근의 해석들이 극우적 근본주의 그리스도교 그룹에서 확산된 주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강의는 그 해석들이 페이크뉴스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 텍스트들의 컨텍스트들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 컨텍스트 속에서 텍스트의 의미를, 그 가능성을 추적했다.

 

본질주의적 역사에서 기억의 역사

 

그러나 여기서 멈춘다면 그것은 퀴어적 성서해석에 나아갈 수 없다. 아니 오히려 퀴어적 해석의 방해물이 될 수 있다. 왜냐면 위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교리 본질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역사학으로서의 컨텍스트 본질주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러한 해석학은 역사 전문가 집단의 검증 아래서 권위를 갖거나 말소된다. 나의 강의 원고에 대한 몇몇 문제제기들은 내 주장이 공인 받을 수 없는 컨텍스트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그 권위 가능성을 말소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첫 번째 강의에 대해서는 내가 불확실한 부족동맹 가설을 사용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두 번째 강의에 대해서는 낡은 문화인류학 가설인 히에로스 가모스론에 기대고 있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강의에 대해서는 로마제국의 이데올로기로서의 황제숭배를 경시한다는 반론이 있었다. 이에 대해 나는 그 비판들에 대해 아카데믹한 반론을 통해 내가 사용한 컨텍스트 해석의 권위를 지켜냄을 통해 주장의 정당성이 확보될 것이겠다. 내 강의가 아카데믹한 가설 제시가 목적이라면 말이다.

그런 논쟁이 필요한 것임은 이론의 여지없다. 하지만 이 강의의 수용자들을 염두에 둔다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강의의 내용을 컨텍스트 본질주의에서 구출해내는 데 있다. 왜냐면 이 강의는 퀴어적 성서해석의 가능성을 위한 첫 번째 단계라고 나는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했듯이, 컨텍스트 본질주의는 특정 컨텍스트()을 특권화하여 다른 컨텍스트들의 의미화, 역사화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문제가 있다. 그렇게 되면 성서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과정에는 오직 전문가만 참여할 수 있다. 다른 이들은 수동적인 수용자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퀴어적 기억이 해석에 개입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런 전문가주의를 극복하고 역사를 사람들의 삶의 현장 속으로 끌어오기 위해 현대 역사학은 기억의 문제를 끌고 들어왔다. 이 논점을 이론화한 선구자는 프랑스의 사회심리학자인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 그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닌 역사 대신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으로서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의 기억이론은 집단과 개인의 상호작용을 주목하지 않았고, 이를 보완하는 새로운 기억가설이 제기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얀 아스만-알라이다 아스만 부부(Jan & Aleida Assmann)의 문화적 기억(cultural mooery) 이론이다. 이러한 문화적 기억의 논점은 역사를 과거의 학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미래를 지향하는 현재적 기억 투쟁의 차원으로 이끈다.

요컨대 기억으로서의 역사는 공식기억(official memory)으로서의 지배적인 역사와 이에 대항하는 도전으로서의 대항기억(counter-memory/anti-momery) 간의 투쟁의 역사다. 이때 공식기억은 아카데미즘이나 주류의 매스미디어를 포함해서 지배적인 기억의 장소들 속에서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기억이다.

앞에서 말한 교리본질주의는 근대성서학이라는 아카데미즘에 대해서는 대항기억의 지위를 갖지만, 그것은 대형교회들, 그리고 대형교회들의 자본력에 의지하고 있는 일부 매스미디어나 신학대학 등 지배적인 기억의 장소를 통해 이미 공식적 기억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나의 강의는 기억의 장소를 달리하며 발전해온 공식적 기억 대 공식적 기억 간의 싸움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말했듯이, 퀴어적 성서해석의 가능성을 위한 첫 단계로서 이 강의를 구성했다 그런 점에서 반동성애적 성서해석 혹은 (공격적) 이성애주의적 성서해석에 대한 대항기억으로서의 위상을 전제하고 시행한 강의인 것이다.

 

대중의 역사화, 그리고 퀴어적 성서해석 그 가능성

 

교권주의나 전문가주의를 넘어서는 역사학은 가능한가? 임지현은 대중의 역사화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컨텍스트 본질주의적 역사학이 아니라 대중의 일상적 기억/체험에서 출발하는 역사학이다. 가령 영국의 역사작업장(History Workshop) 운동이 그 예다. 대중이 역사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참여하여 역사 담론화를 주도하는 것이다. 이때 역사전문가는 대중의 역사의 보조자,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는 자이다. 그리고 이 역사학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화 과정에서 성찰적/공공적 역사가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전문가주의나 교권주의는 성직자나 역사전문가가 성찰의 주체였다면 대중의 역사는 대중이 성찰의 주체다. 이때 성찰의 과정은, 전자의 경우는 아카데믹 환경 속에서 수행되는 고독한 밀실에서의 자아성찰을 향한 사투로 나타난다면, 후자에선 대중의 논쟁적 대화를 통한 소통과정, 즉 집단지성화의 과정으로 나타난다.

성서학의 경우도 니카라과의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Ernesto Cardenal)가 솔렌티나메 마을 농부들과 나눈 복음대화집인 말씀이 우리와 함께, 미국의 신학자인 로버트 브라운(Robert M. Brown)LA 중산층 그리스도 신자들이 함께 만든 뜻밖의 소식, 그리고 군포의 민중교회 목회자인 이대수와 육체노동자들인 교인들이 함께 만든 우리가 만난 예수노동자와 함께 읽는 마가복음등도 일종의 대중의 역사회의 산물이다.

퀴어적 성서해석도 이런 대중의 역사화를 통해 대항기억으로서의 역사로 구성될 수 있다. 여기에는 신학자가 참여할 수도 있고 신학자의 해석들이 레퍼런스로 활용될 수 있다. 혹은 신학자가 퀴어적 대중과 함께 하면서 얻은 공감의 기억으로 성서해석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1성서학자인 유연희가 최근에 쓴 죽음처럼 강한 사랑퀴어 연인들을 위해 아가를 되찾기(in 한국여성신학70, 2009.12)은 그 대표적 예다.

이러한 대중적 역사화로서의 퀴어적 성서해석은 참여자들만이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공식적 기억에 도전하고 대안적 해석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퀴어적 성서해석 자체가 이미 기억투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유연희는 위의 글에서 퀴어적 성서해석의 공공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이성애주의적 질서에 순응적인 폭력적 사랑, 퀴어적(이질적) 사랑에 배타적인 문화에 대항하는 성서 읽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