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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모든 성(sex)은 평등하다 -〈고린도전서〉 6,9에 대한 ‘동성애 반대론’에 반대한다

이 글은 [공동선] 2017년 09+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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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sex)은 평등하다

고린도전서6,9에 대한 동성애 반대론에 반대한다

 

 

불의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고린도전서6,9b~10)

 

고대그리스와 소년애

 

사랑하는 사람은 ..... 높은 덕을 이룰 능력을 갖추었고, 사랑받는 사람은 성숙하고 지혜로워지기 위해 ...... 도움이 필요할 때에라스테스(εραστης)와 에로메노스(ερωμενος)의 사랑은 파이도필리아(παιδοφιλια, 숭고한 소년애)가 된다고, 플라톤의 연애론에 관한 대화집 향연은 말한다. 여기서 에라스테스는 소년과 사랑에 빠진 40세 이하의 성인남자를 가리키고, 에로메노스는 에라스테스의 사랑을 받는 12~18세의 소년을 말한다. 그리고 파이도필리아는 소년이라는 뜻의 파이스(παις)와 숭고한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의 합성어로, ‘숭고한 소년애쯤으로 번역될 수 있는 용어다.(영어에서 아동성애적 성도착증을 지칭하는 pedophilia는 파이도필리아를 어원으로 한다. 그 용어의 뉘앙스가 극단적인 긍정에서 극단적인 부정으로 바뀌었지만.)

향연에서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 이렇게 세 범주의 사랑을 말하면서 이중 가장 이상적인 미()의 범주는 남자와 남자의 사랑이라고 한다. 이때 남자와 남자의 사랑은, 모든 남자끼리의 사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파이도필리아, 즉 성인남자와 소년 간의 사랑을 뜻한다. 이것을 플라톤은 아프로디테 우라니아(αφροδιτη ουρανια)라고 표현했다. 알다시피 아프로디테가 의 여신이고 우라니아가 하늘을 뜻하니, 아프로디테 우라니아는 천상의 미를 뜻한다. 이것은 여신 아프로디테의 두 가지 속성 중, 지상적 미를 의미하는 아프로디테 판데모스(αφροδιτη πανδημος)와 구별되는 최고의 미를 의미한다. 즉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사랑은 파이도필리아라는 얘기겠다.

한데 파이도필리아를 다른 사랑보다 이렇게 이상화하는 것은 남성을 미화하고 여성을 격하하는 남성주의의 산물로 보인다. 이 단어 속에 동성애와 미성년자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함축되어 있어 오늘의 관점에선 너무나 부정적으로 평가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대그리스에선 극단적인 긍정적 관점이 이 속에 담겨 있다. 이렇게 너무나 다른 해석은 각기 심한 편견을 담은 것이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문제를 지닌다. 아무튼 고대그리스 사회에서 파이도필리아에 관한 주장은 현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다. 무엇보다도 파이도필리아 이데올로기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를 이원적으로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있다.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고 거래되는 것이어서는 안 됨에도 이런 이분법적 사랑은 사랑을 둘러싼 거래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실제로 권력과 돈을 가진 성인남자가 소년을 사랑하고 육체의 아름다움을 가진 소년이 그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사랑이 거래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 맥락에서 고대아테네의 철학자 스트라토(Strato of Lampsacus)16세의 나이를 신들의 나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소년의 육체성의 최고의 나이가 바로 16살이라는 얘기겠다. 춘향이 이몽룡과 혼례를 치룬 나이나 줄리엣이 로미오와 사랑을 나눈 때가 16세였다. 이는 소년이나 소녀의 육체의 절정을 상상하는 동서양의 성인남자들의 관음증적 기억이 유사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무튼 소년/소녀의 육체성을 탐닉하는 권력과 돈을 가진 성인남자의 비대칭적 사랑은 가리키는 가장 적합한 용어는 원조교재. 플라톤이 그토록 미화하는 사랑의 이데올로기 이면에 있는 현실의 거래되는 사랑의 실재는 성인남자와 소년 간의 원조교재인 것이다.

바로 이런 현실인식을 유념한다면, 우리는 고린도전서6,9을 읽을 첫 번째 준비를 마친 셈이다.

 

1세기의 고린도

 

고린도전서6,9을 읽기 위한 두 번째 준비는 동시대 이 도시의 장소성에 관한 것이다.

 서기 1세기 고린도라는 도시는 그리스의 다른 도시들보다 대단히 빠른 성장을 구가했다. 제국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쥐게 되면서 그리스 서쪽 해로가 중요한 국제교류의 통로로 부상하게 되면서, 동쪽의 에게 해와 서쪽의 이오니아 해를 연결하는 고린도는 동시대 지중해 경제 최고의 허브 항이 된 것이다.  

수많은 배들이 이 항구로 찾아들어 왔고 무수한 선원들, 상공인들, 정치인들이 이곳을 거쳐 지나갔다. 그리고 수많은 이민자들과 유민, 그리고 난민들이 몰려들었다. 여기서 유민현상에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할 필요가 있다. 바로 노예에 관한 것이다.

바울이 사용한 단어 가운데 40회 가량(바울의 친서들에서 특히 많이 사용됨), 꽤 사용빈도가 높은 단어가 노예(둘로스, δουλος). 그리고 종종 자유인(엘류테로스, ελευθερος)과 병렬하여 쓰이기도 한다. 물론 상당히 많은 경우 비유나 은유적 용례로 쓰였지만 그럼에도 그 단어 속에는 익숙한 현실이 반영되어 있음은 의심의 여지없다. 특히 바울의 몇몇 구절들을 보면 그 현실을 직접적으로 담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12,13)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3,28)

 

위의 인용구들을 보면 바울의 공동체는 노예와 자유인이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함께 하고 있음이 시사되어 있다. 필경 몇몇 사람들의 집(빌라)에 모여 집회를 할 때 그들이 함께 자리했던 것으로 보이고, 심지어는 공동식사까지도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만으로도 파격적인데, 이들 노예들이 어떤 이들인가를 살피면 좀더 흥미진진하다. 바울의 사역의 중요한 요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바울이 지중해 지역의 도시들에서 사역하고 있던 시기는 대략 서기 50년대인데, 그로부터 70여년 전인 기원전 26년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제세력들을 물리치고 절대1인이 되어 자신을 지존자(아우구스투스)로 칭하면서 팍스로마나(Pax Romana)를 선포한다. 이는 정복전쟁의 중단을 의미했는데, 흥미롭게도 이것이 불러온 무시무시한 파장은 정치가 아니라 경제에서 발생했다. 무엇보다도 공화정 말기, 로마가 지중해 패권국가로 부상하는 가운데 벌어진 엄청난 정복전쟁은 무한공급되는 노예시장을 대대적으로 만들어냈고, 이로 인해 로마경제는, 적어도 지중해 인근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들의 경제는 노예노동에 기초한 경제가 되었다. 생산력이 매우 낮고 관리비용이 상대적으로 높은 노예 시스템이 지배적인 경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경우는 매우 예외적인 현상인데, 그것이 적어도 두 세기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으로 인한 노예공급이 무한정 확보되었기에 가능했다. 한데 팍스로마나는 뜻하지 않게 그 공급원을 고갈시켰다. 하여 그 이후 노예노동은 빠르게 예속농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었고 바로 그런 전환기가 바울이 활동한 시대였다.

가격이 급상승한 노예매매로 인해 노예노동은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로 한정되어 가고 있었고, 다수의 노예들은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노예주들에 의해 무단 방출되었다. 이들 방출노예들은 지중해 일대를 떠도는 유민이 되었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일거리가 있는 대도시로 몰려들었다.

이런 상황은 방출노예들이 대도시의 하급노동시장을 심각하게 교란시키게 되는 요인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하급노동시장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방출노예들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이 고조되는 현상을 야기했다. 또한 이들에겐 도시를 우범자화시키는 자이고 더럽고 냄새나게 만드는 자라는 혐의가 덧씌워졌다. 한마디로 그들은 도시의 암세포 같은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 한 가운데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한 선교활동을 벌였다.

위의 인용구에서 보았듯이 바울은 이들 떠도는 방출노예들을 적극 포용했다. 아니 나아가 자유인과 아무런 차별이 없음을 선포했다. 이런 주장은 이스라엘 교포사회에서나 도시 주민들 사이에서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그토록 적대자들에 의해 수난을 겪어야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선교가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고린도전서6,9. 그 현장에서

 

바울의 고린도전서를 보면 이 도시의 이러한 양상이 그곳의 그리스도파 공동체 안에서도 재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동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여러 가지 갈등이 복잡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몇몇 리더들이 바울의 주도권에 반기를 드는 일이 있었다. 그들은 당대에 바울보다 더 중요한 그리스도파 인물로 알려지고 있던 아볼로나 베드로, 심지어는 그리스도와 자신들이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또 가난한 자들도 부자들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그것은 특히 예배의 일부였던 만찬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듯하다. 노동하지 않는 부자들이 땀냄새를 펄펄 풍기며 뒤늦게 당도한 노동자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먼저 만찬을 먹어치우는 바람에, 나눔과 평등의 정신이 훼손되었다는 문제제기였을 것이다. 한편 여자들, 특히 방언을 통해 리더의 반열에 오른 여자들 중 적어도 그 일부가 공적 발언에 나서고 남편과의 성적 관계도 거부하는 등의 일이 벌어졌다. 이런 갈등은 전통의 질서와 새로운 가치가 모순을 일으키면서 공동체를 통합하는 존경의 질서가 와해된 상황을 전제로 한다. 하여 누구도 그것을 중재할 수 없었다. 고린도 시 전체가 그런 것처럼 고린도의 그리스도 공동체도 그랬다.

이제 고린도전서6장을 주목해 보자. 여기서도 공동체를 산산이 갈라놓고 있는 불신과 반목이 반영되어 있다. 글 서두에 인용한 9~10절을 보면 바울이 열거한 불신의 항목들이 나온다. 한데,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그중 한 어구가 눈에 박힌다. “동성애를 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다. 극우파 기독교도들은 이 어구를 포함한 성서의 몇몇 곳을 들이대며, 성서가 동성애를 반대하고 있다고 소리 높여 부르짖는다. 한데 안타깝게도 그들은 다른 본문들을 읽을 때도 그렇지만 여기서도 잘못 읽었다. 성서가 반대하는 것은 동성애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문맥과 상관없이 이 어구에만 꽂혀 있기 때문이고, 또 그 역사적 맥락도 살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문제의 단어인 아르세노코이타이(αρσενοκοιται)의 번역의 적절성에 대해 살펴보자. 이 단어를 한글새번역성서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으로 번역했고, 한글개역성서와 공동번역성서는 남색하는 자로 옮겼다. 대부분의 영어성서들도 마찬가지다. 한글번역처럼 대부분 두 범주 중 하나로 해석했다. 동성애를 하는 자(practice homosexuality) 혹은 남자와 섹스를 하는 자(men who have sex with men) 중 하나로 쓰고 있다.

한데 단어의 어원으로만 보면 그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아르세노코이타이는 남자이라는 뜻의 아르센(αρσεν)침대란 뜻의 코이테(κοιτε)에서 유래한 것이다. 마가복음10,6에서 하느님이 ...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할 때, ‘여자를 뜻하는 텔루(θηλυ)와 함께 아르센이 나온다. 그렇다면 직역하면 아르세노코이타이는 침대의 남자로 옮기면 될 법하다. 즉 어원으로만 보면 그것이 동성애혹은 남자와 잠자리를 한 남자를 뜻하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렇다면 그 의미를 좀더 명료히 하기 위해 문맥을 살펴보자. ‘불의한 자항목 중에 성(sex)에 관한 용어들이 몇 가지 나온다. 한글새번역성서에서 음행하는 사람들로 번역된 포르노이(πορνοι), ‘간음을 하는 사람들로 옮겨진 모이코이(μοιχοι),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된 말라코이(μαλακοι) 등이다. 여기서 포르노이와 모이코이, 즉 음행하는 자와 간음한 자가 어떻게 다른지는 모호하지만 둘 다 배우자가 아닌 이와의 성관계를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아마도 포르노이의 개념 속에는 성서 속에 잘못된 성관계로 가끔 나오는 경우들인 아비가 딸과 관계를 맺거나, 혹은 아들이 누이를, 아비와 아들이 한 여자(아마도 노예)를 성적으로 농락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이코이는 배우자가 아닌 여자 혹은 타인의 배우자를 성적으로 취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데 이 두 용어들이 남성형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이 두 용어 속에는 이들의 상대가 여성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 뒤에서 보겠지만 상대가 남성일 경우에는 그런 관계가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표현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두 용어들 속에는 타인에 대한 성적 농락의 가해자인 남성을 불의한 자로 지목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엿보인다.

한편 말라코이가 등장하는 다른 성서 텍스트들인 마태복음11,8누가복음7,25을 보면 이 단어는 부드러운혹은 화사한이라는 뜻을 지닌다. 한글개역성서는 이것을 탐색(耽色) 곧 색을 탐하는 ()자들로, 공동번역성서는 여색을 탐하는 ()자들로 옮겼는데, 그보다는 한글새번역성서처럼 여자 노릇을 하는 남자들이 그 단어적 의미에 더 가까워 보인다. 아마도 남자 접대부(동성관계에서) 여자 역할을 하는 남자가 포함되는 것 같고, 일부 영어성서가 퍼버트(pervert), 곧 성도착자로 번역하는 데서 시사되듯, 트랜스젠더 여성(MTF: male to female)을 뜻할 수도 있다. 한데 이 세 가지 의미의 가능성 중 어느 경우도 성적인 상대보다 그가 더 강자를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앞의 두 용어가 강자의 성적 가해에 초점이 있는 반면, 말라코이는 바울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성적 행위의 주체이기에 그들을 불의한 자 항목에 넣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세 가지 성에 관한 용어들, 그 행위의 주체들 중 앞의 둘은 이성애적 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세 번째는 이성애로도 해석할 수 있고 동성애로도 해석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또 다른 성(sex)인 트랜스젠더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침대의 남자라는 뜻의 아르세노코이타이를 동성애 남자들이라고 의역해도 무방할 것 같다. 동성애 반대론자들이 간절히 이 단어를 동성애자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위의 논거가 그것을 반대하지 않으니 우리도 그 주장에 동의하기로 하자. 한데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이 동성애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본문을 좀더 살펴보자.

이제 불의한 자 항목에서 성에 관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를 보자. ‘우상숭배하는 남자들이라는 뜻의 아이돌로라트라이(εδωλολατραι), ‘도둑질 하는 남자들이라는 뜻의 클렙타이(κλεπται), ‘탐욕으로 가득 찬 남자들을 의미하는 플레오네크타이(πλεονεκται), ‘술에 취한 남자들을 뜻하는 메투소이(μεθυσοι), ‘남을 중상하는 남자들을 가리키는 로이도로이(λοιδοροι), 그리고 남의 것을 약탈하는 남자들을 의미하는 하르파게스(ἅρπαγες)가 그것이다.

바울이 선교한 고린도의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는 앞의 성적 행위와 관련된 사람들 외에 이런 이들이 들어 있다. 도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도대체 어떤 행위를 한 사람들인가? 이 공동체가 교도소 내에서 만들어진 공동체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일상의 공동체다. 고린도의 주민들이 갖고 있는 문제들을 공유하는, 고린도 문제들의 축소판으로서의 일상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 안에 이런 이들이 있다.

그 의미 하나하나의 디테일을 알아내기는 어렵지만, 나는 여기서 남을 괴롭히거나 착취하는 강자의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고 본다. 남의 것에 탐심을 갖고 도둑질하거나 빼앗거나, 혹은 중상모략으로 강탈하거나, 심지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행위들이 지적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바울의 다른 텍스트들에서 볼 수 있듯이 강자와 약자가 빼앗고 뺏기는 관계가 아니고, 누리고 섬기는 관계가 아니라 평등한 나눔의 관계라고 주장한 것과 연결된다. 그는 여자든 노예든 이방인이든 차별 없는 하느님의 은혜의 수혜자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도 강자와 약자,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 없는 자 사이의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강자의 횡포를 염두에 두고 불의한 자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는 얘기다. 단 우상숭배하는 남자들이라는 표현은 그런 해석에서 예외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 말라코이, ‘부드러운 남자를 남자 접대부로 해석할 경우도 예외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표현들에서 불의한 자들은 고린도의 바울 공동체 내의 권력의 비대칭성,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자들의 횡포가 문제제기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모든 성은 평등하다

 

자 이제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아르세노코이타이에 관해서 더 이야기해보자. 앞에서 보았듯이 이것이 동성애 남자들을 가리킨다고 가정하고, 그들이 불의한 자 항목에 들어 있다면 성서는 동성애를 반대하고 있다고 해도 좋은가?

우선 아르세노코이타이를 남자와 남자 간의 성관계에 얽힌 권력의 비대칭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 남자 접대부와 성관계 하는 남자, 남자노예나 가난한 남자를 농락하는 남자 등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이 글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대그리스 사회에서 마치 이상적인 사랑처럼 묘사했던 이데올로기로서의 소년애, 즉 소년을 사랑하는 남자도 포함될 수 있다. 어느 경우든 고린도전서의 문맥 속에서 아르세노코이타이가 불의한 자들에 속하는 것은, 성서가 동성애 자체를 반대하는 것을 의미한다기보다는, 당시 일상화된 성관계 중의 하나인 동성애 속에도 비대칭적 권력에 의한 폭력과 착취의 관계가 얽혀 있다는 점을, 그러한 문제가 고린도공동체 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아르세노코이타이를 소년애에 국한해서 좀더 이야기해 보려 한다. 앞서 말했듯이 소년애 현상은, 그 이데올로기는 이상화된 관계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여 나는 바울의 역사적 맥락에 대해 이런 상상을 해본다. 소년애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사회에서 성인남자들은 손쉽게 소년들을 탐욕의 대상으로 여기기 마련이다. 자신이 소년을 성숙하고 지혜로운 어른이 되게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최근 일부 음란한 교사나 대학교수 등이 10대 혹은 20대 초의 여성을 성추행하면서 했던 상투적인 말들 중에 내가 너를 성숙하게 해줄게같은 표현들이 있다. 어린 여성들이 능수능란한 나이든(교활한) 남자들의 노련함에 휘말려 얼떨결에 성추행당하는 경우들에서 종종 등장하는 말이다. 그 순간 이 여성들은 이 나이든 남자들이 자신의 육체를 탐욕스럽게 농락하고 있다는 점을 눈치 채지 못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아이는 어른에게서 술을 배워야 술버릇이 좋아진다는 흔해 빠진 일반화의 오류가 이데올로기처럼 전제되어 있다. 그런 식으로, 철없는 소년 혹은 청년들보다 성숙한(?) 어른인 자신들이 소녀 혹은 젊은 여성들을 성숙하게 해줄 수 있다고 자부하는 일부 나이든 남자들의 착각이 무수한 성추행을 야기시킨다. 심지어 일부 목사들이 젊은 여성신도를 성추행할 때도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이것은 오늘날 나이든 남자들 사이에서 팽배한 이데올로기다.

바로 이런 식의 착오가 고대그리스 사회, 특히 고린도시에서도 작동하고 있었다. 소년들은 불쾌하고 당혹스러웠을 수 있는 성인남자와의 성관계를, 그것이 자신을 성숙하고 지혜롭게 해준다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발적인 양 수용했다. 혹은 소년들은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어른들에 의해 농락당했다. 고린도의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서도 나이든 남자들의 소년에 대한 탐욕이 그렇게 정당화되고 있었다.

반면 바울은 고린도전서6,9~10에 이어지는 단락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소년애를 정당화하는 사회이니만큼 성인인 우리 각자도) 그렇게 할 자유가 있지만, 타인과 성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이와 한 몸이 된다는 것임을 잊지 마시오.”라고.(이것은 나의 의역이다.) 이 말은 성관계에서 권력관계를 제거하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고린도전서12,12에서 몸(σωμα)의 지체(μελη)가 서로 평등한 것처럼, 한 몸은 각각 평등하다는 것이다. 권력이 개입되어서는 안 되다는 것이다. 동성애니 이성애니, 어느 것이 옳으니의 문제가 아니라, 평등한 성,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태도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