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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비평

보수 기독교와 우파 정치의 결합 (양권석)

이 글은 양권석 교수(성공회 신부. 성공회대학교 교수)가 쓴 [당신들의 신국 - 한국사회의 보수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서론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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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기독교와 우파 정치의 결합

 

 

 

 

_양권석(성공회대학교)

 

 

 

 

 

결합의 다양한 모습들

 

먼저 이 글은 책에 포함된 다른 글들과는 성격을 달리한다는 점을 밝혀 둔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보수 기독교 혹은 개신교우파로 명명되는 집단의 다양한 실천들 중 하나에 초점을 맞춘 분석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우파정치와 공모하고 있는지 밝히는 연구들이다. 하지만 이 글은 그와 같은 구체적인 연구들에 대한 일종의 메타비평적 평가다. 이 책에 실린 연구 논문들의 성과를 요약하고 평가하면서 향후 보다 발전적인 연구를 위한 과제들을 제시하려는 것이 글의 목적이다.

한국 개신교가 보수적 한국사회 형성에 기여하고 공모해 온 내용들을 다룬다는 큰 틀에 모두 포함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연구 주제 혹은 대상이라는 측면에서 세 가지 범주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첫째 범주는 이 책의 기획 의도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1980년대 이후 보수적 기독교와 우파정치가 결합하는 형태에 초점을 맞춘 연구들이다. 개신교의 동성애 반대운동에 초점을 맞추면서 개신교 우파 혹은 개신교 뉴라이트의 정치적 등장을 분석하고 있는 김나미와 조민아, 그리고 개신교의 교육프로그램이 내세우는 아버지 표상을 분석함으로써 개신교가 우파 정치의 의제들과 결합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숙진의 글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한국형 대형 교회 안에서 실천되고 있는 교육, 선교, 사목 프로그램들을 분석하여 뉴라이트 정치경제 담론과 웰빙담론의 결합을 분석하고 있는 김진호의 글, 보수적 개신교 안에 일종의 개혁운동으로 전개되어 왔고, 비록 소수이긴 해도 보수 개신교 내에서 지적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복음주의지식 담론을 분석대상으로 삼고 있는 김현준의 글, 그리고 한국 개신교의 해외선교 동원담론인 한국형 선교담론을 분석대상으로 하고 있는 박설희의 글 역시 한국 개신교의 목회적, 교육적, 선교적, 신학적 실천들 안에서 보수 우파의 정치적 의제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범주는 박정희 시대의 복지정책 혹은 복지체제와 그 안에서 이루어진 기독교의 복지 실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유승태와 정용택의 글이 포함된다. 유승태는 박정희시대에 정부의 부랑아 정책의 실패와 그 결과로 외원단체들이 부랑아들을 위한 사회복지 책임을 감당하게 되는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부랑아를 고아로 재명명하고, 이들을 위해 복지를 제공하던 기독교 외원단체들에 의해서, 부랑아를 위한 사회복지가 한국 보수주의의 형성에 기여해온 측면을 밝히고 있다. 정용택의 글은 사회복지적 측면에서 박정희 시대의 발전주의 복지체제론과 한국교회의 성장주의가 어떻게 공모해 왔는가를 보여줌으로서 한국사회의 보수주의 형성에 교회가 기여해온 측면, 그리고 한국교회가 보수적이고 우파적인 정체성을 형성해 온 측면을 설명해 보려고 한다.

셋째 범주는 김흥수와 이진구의 글을 포함 할 수 있다. 우선 김흥수의 글은 한국기독교에 의해서 이단으로 취급받은 대표적인 종교운동인 통일교, 전도관, 용문산 기도원 운동을 분석하여 한국 개신교가 이들을 어떻게 타자화하고 이단시하였는지 보여준다. 한국 개신교와 우파정치가 구체적으로 결합하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순수하게 종교적인 문제로 보이는 이단 논쟁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한국 개신교의 근본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글이다. 이진구는 종교차별, 템플스테이, 땅밟기와 같은 사건들을 둘러싼 보수 개신교와 불교계 그리고 정부 사이의 갈등과 논쟁이 종교차별, 종교자유, 정교분리라는 헌법적 개념을 둘러싼 해석투쟁의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글 역시 개신교가 우파정치와 결합에 구체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의 기획의도와 관련해서 중요한 함의를 갖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성시화 운동이나 땅밟기 사건 등을 둘러싼 불교계의 반응은 오히려 보수 개신교와 보수정치의 결합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보수개신교가 우파정치와 결합하여 정치화하는 한 양상이 법적 개념들을 둘러싼 해석투쟁 혹은 담론투쟁의 형식으로 전개된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다.

이렇게 전체를 요약해 놓고 보면, 1980년대 이후 보수 개신교의 정치적 세력화에 보다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책의 기획 의도는 한국 개신교와 우파 정치의 결합 혹은 공모 관계를 밝히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미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연구 대상이나 연구 방법 면에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미 명시적으로 정치화된 실천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김진호와 이숙진이 교회 교육프로그램을 대상으로 삼고, 정용택과 유승태가 교회의 사회복지적 실천들을 대상으로 삼듯이, 교회의 대사회 활동이나 교계 활동은 물론이요, 교회의 다양한 목회적, 교육적, 선교적 실천 활동들이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연구의 방법 면에서도 훨씬 더 다양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적으로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과거의 신학적 해석들이 보여주고 있던 한계를 많이 벗어나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 개신교의 보수성이나 배타성에 대한 연구는 근본주의 신학 전통과 식민주의적 선교역사라는 두 측면에서만 해석해 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보수성과 배타성에 대한 이미 정형화된 보편적 특성을 설명할 수는 있었다 해도, 한국의 특정한 시기 특정한 상황에서 다양한 행위 주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교회의 보수성과 배타성이 발현되는 구체적인 현상을 설명해 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에 포함된 연구들이 동원하고 있는 사회학적, 인류학적, 문화비평적 연구 방법들은 한국사회의 변화 과정 안에서 다양한 행위주체들과 교회의 상호작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진전을 이루어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방법론적으로 훨씬 더 다양화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미 이 책에 실린 글들이 보여주듯이,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형태로 기독교적 실천이 우파 정치와 결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모습으로 정치화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교리적, 심리적,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측면들을 함께 고려해야 보다 충실한 설명이 가능할 것이고, 그래서 다양한 방법론이 서로 교차하면서 시도되고 적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결합의 사회적, 교회적 조건들

 

우선 1980년대 말 이후 한국의 보수 개신교가 우파 정치와 결합하면서, ‘개신교우파혹은 기독교 뉴라이트의 형태로 등장할 수 있게 한 사회적 혹은 교회적 조건들은 무엇일까?

사회적 조건이라는 측면에서는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민주화 그리고 90년대의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 경제 지구화 과정으로의 편입이라는 변화의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김진호에 의하면 이 시기의 문제는 민주화가 다양한 행위 주체들 사이에 민주적 의사조정과 합의가 가능한 정치적 질서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내지 못하고, 그 부분적 성취마저도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천박한 상업적 자유와 결탁해 버린데 있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국민은 시민이 되었지만, 시민은 시장화 되어버렸다고 본다. 말하자면, 87민주화 이후에 진보진영은 민주적인 정치질서를 안정시키고 민주사회의 시민들을 위한 건강한 주체화 양식을 제공하는데 실패했고, 그 실패가 만들어낸 불안정한 상황이 보수우파들이 통합과 발전이라는 의제를 들고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고, 동시에 권위주의 시대를 향한 향수가 표출될 수 있게 했다는 뜻이 된다. 이 상황은 보수 우파 정치를 위해서는 과거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회복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형식 혹은 주체화양식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개신교의 동성애 반대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김나미와 조민아는 90년대 동성애 인권운동과 이반운동의 등장을 중요한 사회조건의 변화로 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젠더위계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상황에 대해서 이숙진은 가부장적 젠더 질서를 살아 온 아들들이 민주화와 경제위기 과정을 통해서 아버지를 살해한 이후에 직면한 거세불안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다시 아버지를 소환하는 상황이라는 심리적 해석을 내 놓고 있다. 민주화와 경제위기는 권위주의 시대의 젠더위계질서를 흔들었고, 그래서 새로운 젠더질서를 향한 가능성을 열기도 했지만, 동시에 형식을 변화시켜서라도 가부장적 젠더위계질서를 유지하려는 힘을 결집시키는 계기도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과거의 독재적 권위주의적 질서를 극복하고 민주적 질서를 더욱 진전시켜야 하는 진보세력을 위해서도, 또 과거의 헤게모니를 회복하고 유지시키려는 보수 우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도 새로운 주체화 전략이 필요했던 것이고, 이 새로운 주체화 전략은 당연히 새로운 타자화의 대상과 전략들을 필요로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진보와 보수 양측의 다양한 주체화 (혹은 타자화) 전략이 어느 쪽도 확실한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서로 각축하던 상황이 바로 기독교를 포함한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보수 우파의 정치적 재등장 혹은 재 정치화과정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80년대 말 90년대 이후 교회는 어떤 변화와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인가? 소위 말하는 개신교 우파의 강화된 정치적 실천은 물론이요 김현준이 관심하는 복음주의 지적 담론이나, 박설희가 관심하는 한국형선교담론의 등장을 가능하게 해준 교회내의 조건은 무엇인가? 김현준은 90년대 한국 개신교 상황을 성장의 정점에 달한 자신감과 동시에 성장의 정체로 인한 위기감이 교차하는 시기로 보고 있다. 조민아 역시 90년대는 한국교회가 성장 정체와 사회적 신뢰와 영향력의 약화라는 위기를 겪는 시기 이지만, 동시에 이 위기 앞에서 자기혁신을 수행하기 보다는 배타적 근본주의 신학을 강화하고 보수적 정치와 결함함으로써 돌파하려는 세력이 결집했던 시기라고 본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김진호, 이숙진, 김현주, 박설희는 한국개신교 내의 속사정을 보다 복잡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90년대를 단순히 개신교 반동의 시기로 보기 보다는, 과거의 권위주의 시대를 주도해 온 근본주의 신학, 교회성장모델, 선교와 사목의 표현방식 등이 문제가 있음을 개신교 자신도 깨달아가는 과정이었고, 다시 과거의 헤게모니를 회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형식의 주체화 전략과 타자화 전략, 새로운 형식의 교회론과 신학을 만들기 위해서 보수 개신교가 능동적으로 노력했던 시기라고 보고 있다. 김현준의 복음주의 지적 담론이나, 박설희가 말하는 한국형선교라는 해외 선교 동원 담론 역시 그러한 개신교의 자구 노력의 산물이다. 뿐만 아니라, 김진호가 말하는 웰빙 우파의 생산기지로서 후발 대형교회나 이숙진이 말하는 한국 개신교의 교회적 국가적 위기 타개를 위한 새로운 아버지 표상 만들기 역시 그러한 노력의 일부다. 더 나아가 동성애 반대운동이 종북게이와 같은 개념을 만들어 혐오와 공포의 타자화 정치로 나가게 되는 것도, 과거 헤게모니를 회복하기 위한 개신교 자구 노력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단순히 무지나 시대착오로 보기 보다는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위한 용의주도한 노력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때문에 90년대 이후 한국 교회는 단순히 복고적으로 반동적 정치만을 강화한 시기가 아니라, 훨씬 더 세련되게 시민적 소비자적 감수성에 맞게 주체화 전략과 타자화 전략을 구사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처럼 과거의 헤게모니를 회복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는 노력 가운데 개신교 우파 혹은 기독교 뉴라이트라 불려지는 보수정치와 개신교의 결합체들이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 시대 특정한 정치형식 혹은 종교적 실천 형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회적 조건을 이와 같이 매우 동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에 속한 글들이 공유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장점이요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집단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각축 속에서 정치적 종교적 실천들과 그 실천과 관련된 담론들을 분석한다는 것은 종교학적 연구는 물론이요 신학적 연구를 위해서도 매우 의미 있는 방법론적 진전이라고 본다.

 

결합의 담론 전략: 주체화와 타자화 형식의 진화

 

그렇다면, 개신교 우파의 신학, 선교, 사목, 혹은 교육 담론들 안에서, 종교적이고 신학적이 의제들과 우파 정치적 의제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가? 민주화와 소비사회로의 변화 과정에서 보수 우파, 그 중에서도 특히 개신교 우파가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재생산하기 위해서 어떻게 국가와 교회와 시민 혹은 신자를 재정체화하거나 재주체화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를 위해 타자 만들기는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이 책에 포함된 연구들의 공통관심사다.

필자들은 권위주의 시대 보수 개신교와 군사정권의 관계는 발전과 개발과 성장을 위한 일종의 권위주의 동맹 관계라는 전제하에서 출발한다. 보수 개신교는 발전을 위한 총동원체제의 유지를 위해서 필요했던 문화적 장치였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 동맹관계의 기본적인 특징은 김나미의 설명을 따르면 과잉남성적 개발주의. 권위주의 시대 개신교 교회의 빠른 성장 역시 과잉남성적 개발주의가 생산하고 유지하는 젠더위계질서 위에서 이루어진 성장이다. 민주화와 소비사회의 진전, 그리고 동성애 인권운동과 이반운동 등장은 이 권위주의적 동맹체들에게 위기로 다가왔고, 특히 보수 개신교는 보다 강력한 혐오와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진화된 타자화 전략을 통해서 그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 진화한 타자화 전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어가 조민아에 의하면 종북게이라는 용어로 탄생이다.

종북게이라는 신조어 안에는 반공주의와 호모포비아가 결합되어 되어있고, 종북과 동성애로부터 순수한 사랑과 가정과 군대와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우파의 애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혐오와 배제의 새로운 구성을 통해서 배타적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타자화 전략과 주체화 전략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투적이고 근본주의적이 방식의 정체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전략적이고 그래서 보다 문화적이고 미학적인 접근들도 있다.

이숙진이 말하는 개신교의 아버지 교육프로그램이 만들어 내는 아버지 표상은, 민주화와 개인화된 시대의 감각에 맞는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 상이다. 하지만 이 표상은 가부장적 가족 판타지를 강화하고, 권위주의 시대 젠더질서를 표현만 바꾸어 유지하고 있다. 아버지 교육은 차별적인 성별분업과 젠더위계질서를 기능적인 차이로 위장하고 은폐할 뿐만 아니라, 가족, 국가, 교회의 모든 문제를 아버지 품성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가부장적 권위 질서를 유지시킬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적 구조적 차원의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한다. 김현준이 말하는 복음주의 지적 담론 역시 보수 개신교의 사회적 역할과 설득력을 강화하기 위해 변화된 시대에 맞는 보다 지적이고 문화적인 표현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본주의적 문화코드를 포장만 달리해서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근본주의적 타자화 논리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박설희의 한국형선교라는 해외선교동원담론 역시, 민주화와 함께 신뢰와 사회적 역할을 잃고 있는 교회와 신자들의 재주체화 전략의 일부이며, 교회 밖의 문화와 사상의 공격으로부터 교회의 권위적인 질서를 방어하기 위한 노력이며, 세계적 사명감을 강조함으로써 현재 교회의 문제를 은폐하면서 오히려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다. 국내에서 무슨 문제가 있든, 세계시장에서 먹히는 것이 답이라는 생각으로, 또 지금까지의 성장의 성과를 세계와 나누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기업의 세계화담론과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총동원 담론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것이 한국형 선교담론이다. 그래서 다분히 우파 민족주의적으로 해석된 한국적 성취의 경험이 글로벌 스탠다드화 결합하고, 서구 선교사 전통과 신학, 친미와 반공주의, 그리고 한국교회의 경쟁적이고 개별 교회중심적인 성장주의가 절묘하게 결합하여 한국형 선교에서 한국형의 본질을 형성하고, 선교를 위한 해외동포를 포함하는 민족 총동원 담론이 된다.

소망교회, 온누리교회, 사랑의 교회로 대표되는 후발대형교회의 목회와 교육 프로그램들을 분석하고 있는 김진호는 이들 교회들을 우파의 새로운 주체화 양식을 위해서 뉴라이트 담론과 웰빙 담론의 결합이 진행되는 실험 공간 혹은 인큐베이터처럼 보고 있다. 한편에는 신자유의 시대에 맞게 해석된 보수주의, 그래서 계급 편향성이 강하고, 약자와 실패자의 배제를 두려워하지 않는 보수주의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상품화와 시장화와 속도화에 지친 사람들의 웰빙의 욕구가 있다. 그리고 이 둘이 결합하여 향후 우파 정치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웰빙우파라는 주체를 생산한다. 그리고 이 주체 생산의 전진 기지 역할을 바로 후발대형교회가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성과와 과제

 

다시 한 번 전체 연구의 의도와 목적을 정리하면, 먼저 보수 개신교와 보수 우파정치가 어떻게 결합해왔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국 보수우파 형성에 개신교가 어떤 기여를 해 왔는지 밝히려는 큰 목표 하에 있다고 생각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80년대 후반의 민주화와 90년대 후반의 경제위기 이후라는 특정한 상황에서, 보수개신교와 우파정치가 결합하는 양상을 교회들의 명시적 정치적 실천뿐만 아니라, 종교적 담론적 혹은 교육적 실천들을 분석하여 파악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먼저 방법론 측면에서 전체 연구가 보여주는 특별한 기여에 대해서 평가해 본다. 첫째는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지역적이고 가장 특수한 현장 그 자체의 살아있는 움직임에 시선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김나미와 조민아는 미국 개신교우파들과 한국의 개신교우파들 사이에 많은 교류와 공감이 있음을 밝혀준다. 하지만 김나미는 보수 개신교의 보편적 혹은 지구적 현상으로만 문제를 바라보아서는 특별한 시기와 특별한 조건 하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결합 혹은 정치화 양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김나미의 주장은 지금까지 개신교의 근본주의적 경향이나, 반공주의적 경향, 혹은 문화적 종교적 배타성이나 공격성들을 평가해왔던 연구들에 대한 방법론적 비판과 관련된다. 이미 말했듯이 개신교의 근본주의적 배타성에 대한 비판은 주로 두 가지 비평적 틀에 의존해 왔다. 하나는 보편적 개신교 근본주의에 대한 신학적 혹은 심리적 비판의 틀이고, 다른 하나는 피식민지 교회가 서구와 선교 종주국과 맺고 있는 심리적, 문화적, 정치적 식민주의적 관계다. 이러한 보편적 접근이 개신교 우파 혹은 기독교 우파의 보편적 특성 혹은 과거 식민지에서 보수 기독교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보지만, 구체적인 문제를 탈맥락화하여 맥락과 무관한 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런 점에서 구체적 현장에 집중하여 그 현장으로 부터 문제를 해석하려는 태도는 방법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둘째로 구체적인 상황에 초점을 맞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다양한 행위 주체들이 각기 자신들의 헤게모니 구축을 위해서 각축하면서, 개념이나 담론 혹은 다양한 정치적 실천을 둘러싸고 경쟁하고 갈등하는 상황을 보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점이 중요한 이유는, 더 이상 문제의 원인을 심리적인 요소나 신학적인 요소로 환원시킬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개신교 우파들의 때로는 극우적이기까지 한 정치적 실천을 무지나 불안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교리적 원리를 향한 신앙적 헌신과 열정의 탓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위기에 직면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 각축하는 현장에서 재정체화 혹은 재주체화가 일어나고 새로운 형식의 정치적 표현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각주:1]

셋째로 신학의 언어적 담론적 성격에 대해서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연구들은 헤게모니를 위한 담론 전쟁, 담론을 둘러싼 권력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으로부터 다양한 정치적 실천과 종교적 신앙적 개념들과 전통들이 해석되고, 또한 새로운 정치-종교적 실천으로 구축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개신교 우파의 신학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 현장은 바로 신학이 재해석되고 재전유될 뿐만 아니라 유통되어 어떤 효과를 산출해야 하는 그 현장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신학이 아무리 계시적 성격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 계시는 우리 삶의 다른 측면과 관계 맺어야 한다. 때문에 그 계시를 언어적으로 성찰하고 재현하는 과정과 함께 신학은 비로소 시작된다.[각주:2] 그래서 신학은 필연적으로 언어적이고 담론적일 수밖에 없고, 하느님에 관한 어떤 이야기도 언어적 재현의 문제 밖에 있지 않고, 필연적으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신학은 자신의 존재 이유는 물론이고 그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영향력마저도 언어적이고 담론적인 각축의 현장에 참여하여 담론의 변혁 혹은 문화의 변혁을 위한 효과로서 입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부족함에 대한 아쉬움 보다는 새로운 과제를 발견하는 기쁨을 나누고 싶다. 개신교 우파, 혹은 기독교 뉴라이트의 담론들과 실천들을 분석 대상으로 삼고 그들의 주체화 전략 혹은 타자화 전략의 해명을 일차적 관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대상과 관심의 경계가 명료한 만큼이나, 배제되고 가려진 영역도 훨씬 선명해 보인다.

정치화한 개신교 우파들의 정치적 행동들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또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재주체화된 웰빙우파나, 새시대의 부드러운 아버지상, 그리고 지성적인 복음주의자의 모습, 그리고 국가와 교회를 위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선교사의 모습들 안에 깊이 도사린 우파 헤게모니 정치와의 공모관계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호크하이머의 말대로, 비평은 단순히 설명적이기만 해서는 부족하다. 현재의 사회적 실재를 설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그 사회를 변화시킬 행위자들을 재정체화할 수 길을 찾는 노력이어야 한다.[각주:3] 그래서 담론 분석이나 비평은 단순히 유통가능하고 경쟁 가능한 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한 전초전 같은 것이 아니고, 변화와 변혁을 위한 구체적인 행위자들을 위해서 용기와 격려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배 질서의 틀을 설명하되 헤게모니의 유지와 재생산을 위한 전략을 분석한다는 것에만 만족해서는 안 되고, 그 질서가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고통과 억압의 조건으로 다가 온다는 사실을 보다 깊이 분석해 내야 할 것이다. 지배질서란 곧 사회적 약자들 앞에 펼쳐져 있는 생존투쟁의 환경 그 자체이며, 그들의 삶을 위해서 허용된 선택의 틀이면서 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각주:4] 그래서 우파 헤게모니 담론과 사회적 약자들이 결합하는 양상도 단순히 동원의 개념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감수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러므로 민중적 삶의 조건의 일부로서 개신교 우파의 담론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해명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민중의 삶의 실상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삶 안에서 새로운 인간 정체 혹은 주체를 향한 희망을 찾고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진호의 표현대로 웰빙우파의 등장과 그로테스크한 민중의 등장이 함께 가고 있는 것이라면, 이제 다음 차례는 웰빙 우파의 주체화 전략을 넘어 변화된 조건들 속에서 이 시대의 민중들은 자신의 삶의 선택을 위해서 어떤 고통과 아픔을 감내하고 있는지 읽어야 할 것이다.

  1. 우파 종교운동 혹은 정치적 기독교우파 운동이 나타나는 원인을 설명하는 방식이 계속 변화해 온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다음 논문을 참고하라. Michael Lienesch, “Right-Wing Religion: Christian Conservatism as a Political Movement”, Political Science Quarterly, Vol.97, No. 3(Autumn, 1982), pp.403-425. [본문으로]
  2. 신학의 언어적 성격에 관해서는 영국 신학자 Graham Ward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둔다. 특별히 다음 책을 참고하라. Graham Ward, Theology and Contemporary Critical Theory (London: Macmillan Press, 2000). [본문으로]
  3. Bohman, J. (1996). “Critical theory and democracy”. In D. Rasmussen (Ed.), The handbook of critical theory (Oxford: Blackwell, 1996), p.190. [본문으로]
  4. 감정사회학자 Eva Illouz의 선택의 생태계와 구조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다음을 참고하라, 에바 일루즈 지음, 김상희 역, 《사랑은 왜 아픈가:사랑의 사회》 (돌베게, 1979), 43-50을 보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