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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좀비들의 크리스마스

이 글은 [경향신문]의 칼럼 '사유와 성찰' 2017년 12월23일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1222210501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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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들의 크리스마스

 


매일매일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는다. 침몰한 낚싯배에서 죽고 공사장 크레인이 넘어져 죽고 지하철 공사 중에 사고로 죽고 건물 화재로 수십 명이 질식해 죽었다. 현장실습 중인 청소년은 과로 상태에서 프레스에 눌려 죽었고, 지하철 차량 관리직에 종사하는 무기계약직의 30대 노동자는 무언가에 절망하다 목을 매 자살했고, 한 천재 뮤지션은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했으며, 모 대학병원 신생아실의 인큐베이터 안에서는 모체로부터 세상으로 먼저 떠밀려나간 아기들 몇이 의문사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우리가 주목했던 죽음의 이야기는 국가폭력 혹은 국가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것들이었다. 한데 요즘 들리는 수많은 죽음의 소식들에 대해 매스컴이 흔히 쓰는 이유는 안전 불감증이다. 요컨대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함이 일으킨 죽음들이 요즈음 특별한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물론 이 포괄적 표현의 을 들여다보면 많은 구체적인 요인들이 뒤얽혀 있다.

아마도 눈앞의 효율성에만 집착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적 탐욕의 문제가 이 부조리함의 가장 시의적인 원인이겠다. 노동의 외주화는 무수한 불안정노동에 시달리는 많은 이들의 육체와 정신을 밑바닥까지 거덜내 버렸다. 또한 창의적 돌파구를 찾기보다는 무조건적 비용절감에 몰두한 나머지 안전을 위한 비용까지 모조리 삭감한 결과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초고속의 산업화를 드라이브하는 데 치중했던 한국사회는 사회 구성원의 안전보다는 성과를 중요시해왔다. 하여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보상은커녕 그이들에 대한 기억의 흔적조차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그 희생자들을 손실처리 함으로써 그이들의 희생의 대가를 마치 수익을 배분하듯 남은 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즉 모두를 희생에 대한 공범자로 만드는 시스템이 오랫동안 한국사회의 작동원리로 내재되어 온 것이다.

안전을 간과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희생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보상을 남은 자 모두가 나눠먹게 하는 하이에나의 사회는 어떻게 정당화되었을까? 모두가 공범자임에도 공범자 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의 하나는 (국가)안보라는 과장된 위기의식이다. 북한과 남한이 공히 체제의 안보를 위해 활용한 과장된 위기의식을 학계는 적대적 공생이라는 용어로 정리한 바 있다. 이에 의하면 적이 휴전선 저편에서 우리를 위협할 뿐 아니라 우리 내부에까지 스며들어와 체제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기 때문에 적을 압도하는 위력을 갖출 때까지 성장 이외의 다른 것을 돌아보는 것은 유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국가가 담당해야 하는 공적인 안보 시스템은 국가안보의 차원에 집중되었고, 구성원 개개인의 사회적 안전은 간과되어 왔던 것이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방기한 국가의 책임에 항거했던 촛불정치에는 바로 그러한 안보 근본주의를 지양하는, 국가를 향한 국민의 염원을 담고 있다. 촛불정치는 안보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많은 국민들을 사지로 몰아갔던 체제에 대한 시민의 응징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단 성공했다. 촛불정치의 수혜를 입고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내걸은 핵심적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사람이 먼저다이것이 국가인가라고 항변했던 국민의 물음에 대한 새 정부의 대답이다.

하지만 안보 근본주의 정권이 물러갔어도 오래된 성과 중심주의적 체제인 하이에나적 사회는 쉽게 청산되지 않는다. 여전히 무수한 죽음의 이야기들이 도처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더욱이, 모두가 공범자임에도 국민 각자를 그 죽음들에 대한 죄의식에서 스스로를 면책시켜온 안보라는 변명거리가 별로 효력을 일으키지 못하게 되었음에도, 국민은 하이에나적 사회의 청산을 뼈저리게 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인다. 지난 정권에서 사고의 직접적 가해자인 세월호 선장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킨 것처럼 지금 시민사회는 각 사고들의 직접적 책임자 색출에 치우쳐 있는 듯하다.

동네 교회 앞에 서 있는 나무에는 올해도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전구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전선줄이 칭칭 감겨 있다. 우리는 그 나무가 발하는 탐욕의 불빛에 취해 자본주의에 묶여 꼼짝달싹 못하는 죽은 몸이 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있다. 탐욕만 남은 죽은 몸, 좀비가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매일매일 죽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에서 책임자를 색출하여 그들을 난도질하여 처벌한다. 마치 보신탕을 먹는 사람처럼, 저들을 혐오음식으로 간주하여 난폭하게 조리하여 개걸스럽게 먹어치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존재의 위안을 얻으려는 자가 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