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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본권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사람’

경향신문 2018년 3월24일자 컬럼 '사유와 성찰' 란에 실린 글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323211401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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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권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사람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약소국이던 고대 유다국은 기원전 8세기 중반부터 7세기 초까지 60여 년 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번영기를 맞았다. 한데 이 시기 소농은 몰락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분배를 강조하는, 소농친화적인 개혁세력이 결속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원을 독과점해온 귀족 친화적 세력을 누르고 권력을 쟁취하는 일이 벌어졌다. 2016~2017년 한국의 촛불대중처럼 소농세력의 집합행동을 기반으로 해서 요시야 왕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정부가 들어섰다.

우리는 요시야 왕실이 추진한 성문법전에 대해 알고 있다. 성서의 신명기가 바로 그것이다. 필경 이것은 이후 거의 천년 동안 조금씩 첨삭된 결과물이겠지만, 그럼에도 이 문서에는 요시야 개혁정부의 법안이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다.

신명기 법전의 중심 기조는 소농 중심의 사회개혁에 있었다. 요컨대 소농의 몰락을 억제하고, 이미 몰락한 이들을 복원시키며, 나아가 그들이 몰락 과정에서 빼앗겼던 토지까지 되돌리려는 급진적 기획까지 다루어져 있다.

그뿐이 아니다. 신명기 법전의 안식일 법은 쉼을 의무화하고 있다. 신이 노동 후에 그렇게 쉬었으니 7일에 한번은 반드시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은 누구를 향해 의무라고 말하고 있을까. 신명기5,14~15는 이렇게 명시한다. ‘너희도 쉬고, 자녀도 쉬며, 노예도 쉴 것이고 심지어 가축도 쉬게 하라. 나아가 떠돌이 식객도 쉬게 하라.’ 여기서 이 법을 지켜야 할 의무를 진 자는 자산가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자산가들은 자신에게 매어 있는 권리 없는 자들을 적어도 7일에 한번은 쉬게 해야 한다. 이때 이들 권리 없는 자들에겐 안식일은 의무가 아니라 최소한 누려야 하는 기본권인 셈이다. (그보다 앞선 법전으로 추정되는 출애굽기의 안식일 조항도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추정컨대 이 텍스트의 현존하지 않은 원본은 필경 이웃의 선진국인 이스라엘국의 문서일 것이지만 현존하는 출애굽기십계명의 작성자는 요시야 왕실 서기관들이었을 것이다. 나의 추정으로는 신명기법전이 만들어지기 전, 타국의 법전을 개작하여 사용한 것이 출애굽기법전이었다. 그런 점에서 안식일 법 내용이 거의 대동소이하다는 것이 요시야 왕실 법전의 독특성을 의심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주목할 것은, 안식일 법에 의하면 기본권의 주체는 귀족과 부농, 그리고 소농뿐 아니라, 노예, 가축, 떠돌이 식객까지 포함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떠돌이 식객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그 집에 들어온 유민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데, 대개 이들은 노예보다도 못한 처지의 사람들이다. 노예는 인신이 주인에게 구속된 절대적 예속상태에 있지만, 그나마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조상대대로 주인에게 속해 있어 죽을 만큼 굶주리지는 않을 수 있다. 반면 떠돌이 식객은 그런 상태의 예속성조차 불안정한 존재다. 한편 이 기본권에는 가축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동물권에 관한 오늘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면 매우 진보적인 가치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문재인 정부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을 내걸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국민을 개, 돼지 취급해왔던 이전 정권들과는 달리, 국민이 우선인 정부를 만들겠다는 것, 정말 그런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국민의 염원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그렇게 해석했다.

한데 이번 청와대가 발의한 헌법 개정안의 기본권조항을 보면, ‘사람이 먼저라는 말은 그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헌법 개정안에 대해 3일에 걸쳐 해설한 첫째 날(3.20) 조국 민정수석은 (떠돌이 식객 같은 신세의) 외국계 이주민들이 포함되는 기본권의 주체를 명시하기 위해 국민에서 사람으로 표기를 바꾸었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의 우려처럼 이렇게 진취적인 법안을 담고 있음에도 거대 야당의 반대로 이 헌법 개정안은 무산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이것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개헌이 현 정부 시기에 가능하든 안든 향후 기본권을 둘러싼 논의에서 그 주체가 국민을 넘어 사람이라는 논점이 끊임없이 다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본권과 인권 논의의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나는 그런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장을 기대하며 성서의 안식일법의 논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28백 년 전의 한 개혁정부는 기본권의 주체에 가축까지 포함시켰다는 것을. 또한, 비록 문 대통령이 대선과정에서 혐오의 대상처럼 동성애자를 말했지만, 그이들도 당연히 기본권을 누려야 하는 주체라는 점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