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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나누기(설교)

그들도 '하느님의 백성'이다

이 글은 2018년 4월1일 한백교회의 하늘뜻나누기 원고입니다.

이 날은 모든 교회들에선 부활절 예배를 나누지만, 한백교회는 4.19에 맞춰서 부활절 예배를 나누기에 이날 하늘뜻 나누기는 부활과는 무관한 얘기를 할 수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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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교회 1798번째 모임 (20180401)

그들도 하느님의 백성이다

 

 

 

당신들의 어린 아이들과 아내들과 당신들의 진 가운데서 함께 사는 외국 사람과 당신들에게 장작을 패 주는 사람과, 나아가서는 물을 길어 오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 모두 모였습니다.

―〈신명기29,11

 

 





2013년 혹은 2014년쯤 자우녕 작가가 박종린 선생을 주인공으로 다룬 다큐영화 옥희에게를 만들고 나서 내게 소감을 물었습니다. 나는 서슴없이 이 영화의 진수는 박종린 선생님의 동네산책 장면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엔 이 장면은 이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었지요.

첫 번째 씬은 선생이 아침밥을 해 드시는 장면이고, 두 번째 씬은 동네산책하는 40여초 되는 장면(04:32~05:18)입니다. 여기서 내 눈에 꽂힌 것은 지팡이를 짚고 걷는 선생 뒤편의 벽에 붙은 이사짐이라고 적힌 광고지였습니다. 그 골목을 빠져나오니 이번에 전봇대에 붙은 또 다른 전단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빌라라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창고/나대지라고 쓰여 있습니다.



 

낡은 집들과 공터, 그리고 이런 광고지들, 한눈에 이곳은 디아스포라의 공간임이 드러납니다. 인천시 부평구의 한 허름한 동네입니다. 하급 노동자들이 유난히 많은 곳, 서울과 인천 곳곳에서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에 플랑크톤처럼 무력하게 떠밀려온 이들, 혹은 외국인 이주노동자들, 혹은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부유하는 무연고 노인들의 공간입니다.

한국 근대사의 비극의 가장 깊은 소용돌이 속에 온몸이 휘말려버린 박종린 선생은 바로 이곳으로 떠밀려왔고 또 다시 어딘가로 떠밀려 갈 예정입니다. 북한에 남겨두고 온 딸, 실은 떠날 때 백일쯤 되었던 딸 옥희는 그가 꿈꾸는 낙원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과는 무관한 곳으로 이리저리 떠돌 뿐입니다. 희망과 현실의 극단적 괴리, 그 속에서 꿈꾸는 자, 이것이 이 영화의 주제라고 저는 보았던 것입니다.

한겨레신문토요판 특집의 하나로 고스트 스토리라는 연재물이 있습니다. 지난 317일부터 시작했으니 어제로 2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인천의 한 공공의료원에서 2001년부터 2017년까지 무연고사망자로 처리된 195명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생전에도 그림자 같은 존재였고 죽은 이후에도 기억에서 삭제된 이들입니다. 유령이 되어 어딘가로 떠돌고 있을 그들의 희미한 흔적을 찾아 수첩과 볼펜을 든 남자는 가까스로 얻은 정보를 메모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195명의 나는 여기 있다는 이야기를 전개해 갑니다.

 

   



고대로마제국이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경계로 하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 길 요소요소에는 방벽들로 둘러싸인 요새들이 세워졌지요. 그 경계를 로마군은 리메스(limes)라고 불렀습니다. 리메스는 모두의 통행을 금지하는 경계선이 아닙니다. 순례자와 상인 등은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는 반면 게르만족속은 지나갈 수 없는 경계였습니다.





 

부 현대정치학자들은 이 고대로마의 리메스를 현대사회를 특징짓는 경계의 한 양상을 설명하는 은유로서 사용하곤 합니다. 그것은 안정과 불안,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경계입니다. 안정과 문명을 상징하는 존재에게는 경계가 해체되어 있지만 불안과 야만을 표상하는 이들에겐 높이 세워진 견고한 장벽처럼 존재하는 경계입니다. 그런데 고대로마의 리메스가 정치군사적 이유로 끊임없이 팽창과 수축을 거듭했던 것처럼 현대의 리메스도 계속 변동하고 있습니다. 포용의 기재가 심화될수록 그 경계는 차단보다는 연결의 기능이 중요하게 되는 반면, 배제의 기재가 더 강화될수록 연결보다는 차단의 기능이 불꽃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인천의 한 공공의료원의 무연고 사망자들에 관한 특집기사는 배제가 작동되는 가장 치열한 장벽의 바깥을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기억을 삭제당한 이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하여 사회는 그들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공공의료원은 그런 사회적 기억의 소각장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기자가 그이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 존재의 희미한 흔적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와 분리되어 관계의 끈이 제거된 유령을 다시 초대하여 함께 예배 나누는 사회적 기억의 미사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리메스는 기억의 소각장과 기억의 미사, 두 사회적 기억/망각의 쟁투가 벌어지는 경합의 현장인 것입니다.

기원전 698년 고대유다국의 군주로 즉위한 므낫세는 무려 55년간 재위에 있던, 이스라엘국과 유다국을 통틀어 최장수한 왕이었지요. 그런데 반세기가 넘는 이 기나긴 시간은 중앙의 고위관료들과 연계된 대지주세력의 가렴주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만연했던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주들의 갑질의 정치의 상징이던 군주 므낫세가 죽고, 아마도 적장자가 아닌 늦둥이 아들 아몬이 왕위를 승계합니다. 그의 모친이 욧바 출신 므술레멧이라는 열왕기하21,19의 간략한 묘사는 아몬의 성향에 관한 어떠한 상상도 불허합니다. ‘욧바(Jotbah)는 갈릴래아 지역의 성읍이니 어쩌면 그의 모친은 몰락한 이스라엘국의 공주 혹은 귀족출신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몬은 2년 만에 궁중정변으로 살해당했습니다. 하지만 암하아레츠가 들고 일어나 아몬의 살해자들을 척살하고 그의 아들이자 셰펠라 출신 왕비의 아들인 요시야를 왕으로 옹립합니다. 요시야와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는 모친이 모두 셰펠라지역 출신입니다. 유다지역의 유일한 농경지대이고 이들을 군주로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정치화된 농민운동세력인 암하아레츠의 본거지입니다.

8세에 왕이 된 요시야가 친농민적 개혁정치를 본격화한 때는 재위 12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그리고 이 개혁정치의 가장 중요한 문서는 법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신명기는 이 법전을 약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대지주 프랜들리 정부가 아닌 농민 프랜들리 정부임을 선언하는 법전이었지요.

오늘 읽은 29,11, 문맥상으로는 시나이 산에서 십계를 받은 뒤 가나안 건너의 모압 족속의 땅에 도달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 법을 반포하는 형식으로 되어있지만, 실상은 광야유랑 시대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유다국 요시야 왕실에서 유다국 최초의 법을 제정, 반포하는 장면을 시사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누가 이 법의 백성으로 부름 받고 있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법은 고대로마에서 따온 정치적 은유로 말하면 리메스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경계 안에 포섭될 백성으로 규정된 자들은 법의 문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지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법학자이자 소설가였던 프란츠 카프카가 쓴 소설 심판에 나오는 저 유명한 법의 문예화에는 시골사람에겐 늘 닫혀 있는 법의 문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서민에게 법은 닫힌 리메스라는 얘기지요.




한데 친농민적 개혁군주 요시야가 만든 리메스를 통과하는 법의 문은 누구에게 열려 있을까요. 10절에는 각 부족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관리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므낫세의 리메스를 통과하도록 허용된 자들입니다. 한데 11절은 흥미롭게도 아이들과 아내들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진 가운데서 함께 사는 외국인과 아마도 노예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당신들에게 장작을 패 주는 사람 물을 길어 오는 사람들도 법의 백성으로 부름받았음이 명시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외국인워게러카(wə·ḡê·rə·ḵā)라는 히브리어의 번역어인데, 로마인들에게 리메스 밖의,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없는 불안, 야만을 상징하는 대상인 게르만족처럼, 유다국의 위험하고 불결한 존재를 말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성서에서 수없이 많이 등장하는 비슷한 뉘앙스의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단어들 대부분은 영 바깥의 존재를 시사하고 있거나 안팎이 모호한 외부인을 가리키는 반면, ‘워게러카는 히브리성서에 4회 등장하는데 모두 명백하게 리메스 안으로 유입되어 들어온 불온한 자들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네 번 중 3번이 신명기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신명기5,14; 29,11; 31,12; 출애굽기20,10).


요시야 시대는 아시라아군이 쳐들어와 이스라엘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멸망하고 무수한 유민들이 흩어져 유다 땅으로도 들어와 있던 시대입니다. 그들이 유다국의 많은 미경작지에 정착해서 노예보다 못한 노예처럼 살고 있던 시대가 바로 므낫세-요시야의 시대였던 것이지요.

이러한 노예보다 못한 노예인 이방인들을 요시야는 법의 백성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노예도, 아이도, 여자도 법의 백성입니다. 이 놀라운 고대법은 가장 폭넓게 관용의 정치로 구축된 리메스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법이 성서의 모든 법전들의 꽃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 법은 바로 성서의 법정신의 진수인 것입니다.

최근 문재인 정부는 지지부진한 개헌의 물꼬를 틀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면서 정부 입법 개헌안을 3일에 걸쳐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중 첫째 날 조국 민정수석은 헌법의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바꾸었음을 설명했습니다. 2012년 선거 때부터 사람이 먼저라고 수없이 외쳤던 문재인식 아젠가 헌법 기본권 조항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구체화된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국민이 아니어도 대한민국의 리메스 안으로 들어온 모든 이질적인 이들을 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민중신학자로서 이 안을 포함한 헌법이 개정되어야 함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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