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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촛불정치’는 오늘도 계속되어야 한다

이 글은 [이제여기그너머](2018 봄) 특집 '광화문 촛불집회 그후,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한다'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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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정치는 오늘도 계속되어야 한다

 

 

 

그 땅의 백성은 아몬 왕을 반역한 신하들을 다 죽이고, 아몬의 뒤를 이어서,

그의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삼았다.

―〈열왕기하21,24

 

 

 

 

암하아레츠, ‘알마를 외치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누구든 익히 알고 있을 만큼 잘 알려진 구절이다. 이 신탁을 전한 이사야 예언자가 8백년이나 전에 마리아가 동정녀로서 예수를 낳을 것을 예고한 것으로 읽혀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태복음1.23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이사야 예언자의 신탁을 옮겨놓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처녀라는 뜻의 그리스어 단어인 파르테노스(parthenos).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뜻하는 이 단어를 마태복음은 그리스어로 번역된 성서인 셉투아긴타(septuaginta. 70인역성서)[각주:1]에서 그대로 인용하였는데, 이것은 히브리어로 된 이사야서알마(almah)를 옮긴 것이다. 한데 문제는 어린 혹은 젊은 여자를 뜻하는 이 히브리 단어가 기혼과는 무관하게 쓰였다는 데 있다. 미혼인 여성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알마가 아니라 브툴라(betulah). 그러니까 셉투아긴타가 오역한 것을 마태복음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시사하는 예언으로 안성맞춤이라고 보아 그대로 수용하였다는 얘기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이 번역에 관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이사야서알마에 있다. 이사야 예언자의 알마는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 그것은 이 구절을 해석하는 키워드다.

우선 당시 유다국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자. 유다국은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약소국의 하나였다. 아니 아직 국가다운 면모를 갖추지 못한 원시적 정치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아하스 왕(기원전 743~728) 시대에 와서야 유다국이 독립적 군주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무렵 심각한 국난이 일어났다. 시리아-펠레스티나의 최대강국이자 라이벌국인 아람국과 이스라엘국이 메소포타미아의 제국 아시리아에 대항하는 군사동맹을 맺고, 이 지역 소국들에게 동맹에 참여할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다국은 참여를 망설였다. 아마도 그것은 유다 조정 내의 동맹 반대파에게 왕이 기울어진 탓이겠다. 그러자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왕 베가는 유다국을 침공했다.

유다국은 전 국토가 초토화되다시피 했고 예루살렘 성마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이 상황에서 아하스의 조정은 정쟁에 휩싸여 버렸는데, 동맹 지지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하스를 폐위하고 그의 한 아들을 옹립하고자 했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국론 분열 상황은 당시 유다국이 심각한 내우외환에 처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런 극한적 상황에서 왕은 자신의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극단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상황을 수습하고자 했다. 그 무렵 유다국의 가장 중요한 가문 출신의 예언자이자 반동맹파의 기수인 이사야가 왕에게 간언하였다. 7,14이 바로 그것이다. 신이 함께 하니 흔들리지 말라는 신의 징표가 내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징표가 바로 젊은 여자가 낳은 아기.

갓 난 아기가 국난에 휩싸인 나라의 구원징표로 해석될 수 있으려면, 그 아기는 왕자쯤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기를 낳은 알마는 왕의 부인들 중 (가장/) 젊은 여성을 가리킬 것이다. 그는 아마도 이사야 가문 출신의 왕비일 수도 있고 적어도 반동맹파에 속하는 집안의 왕비일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결과적으로 들어맞았다. 성을 포위하고 있던 적군이 갑자기 철수한 것이다. 아마도 아시리아 군이 쳐들어온 탓에 급히 군대를 돌려 북동부 시리아 국경지역으로 진군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이 사건은 유다국 조정에서 반동맹파를 하느님이 지지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겠다. 이사야의 이 신탁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기억되었다.

한데 이 신탁을 수집해서 이사야 예언자의 신탁집을 만든 이들은, 이사야 시대로부터 한 세기 정도 지난 뒤인 요시야 왕(기원전 641~610)의 서기관들이다.[각주:2]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이들 요시야 왕의 서기관들이 7,14알마를 누구로 생각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알마를 자신들의 주군인 요시야의 모친으로 이해했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다. 물론 아하스 시대에 요시야는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서기관들에게 이사야의 신탁은 단지 아하스 시대의 국난 극복의 메시지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시대에까지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을 테니 말이다.




사실 그런 해석이 타당할 만큼 요시야 왕을 낳은 어머니 여디다는 나이가 어린/젊은 왕비였기 때문이다. 조부(祖父)인 므낫세 왕은 12살 때 왕이 된 이후 55년간 재위에 있었는데, 그를 승계한 아몬이 왕이 되었을 때 나이는 22살이었다. 그러니까 므낫세가 45세쯤 낳은 아들이 아몬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다국 왕들이 첫 자식을 얻을 때가 십대 중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몬은 므낫세의 여러 왕자들 중 매우 늦게 태어난 아들이었음이 분명하고, 그의 부인 여디다는 므낫세 궁중의 많은 왕자비들 중 매우 어린/젊은 여자였다. 그리고 아몬이 16살이 되었을 때 여디다는 요시야를 낳았다.

 

다시 시간을 아하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는 국가를 멸망의 위기에서 건져낸 군주였을 뿐 아니라 약소국 유다국의 번영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군주국으로서의 본격적인 성장은 사회의 양극화를 수반했다. 궁중엔 관료층이 등장했고 그들은 영락없이 지방에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중앙관료 중심의 대지주 귀족층이 등장했고, 무수한 소농들은 몰락하거나 몰락의 위기에 처했다. 이에 농민은 저항을 했고 귀족층 가운데도 농민의 편에 선 이들이 생겨났다. 미가 예언자는 바로 이 시기에 활동한 농민운동의 대변자 혹은 지도자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히스기야-요시야 왕을 지지한 궁중관료들과 그들의 정책은 친농민적 관료집단의 존재를 시사한다. 하여 이후 유다국의 역사는 대지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관료집단과 친농민적 관료집단 간의 치열한 정쟁으로 점철된다.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는 농민 친화적인 세력의 지지를 받는 군주였다. 그는 귀족의 세력을 억제하고 소농 친화적인 정책을 폈다. 즉 분배정책이 그의 개혁정치의 중요한 핵이었다.

하지만 히스기야의 꿈은 아시리아국의 침공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그는 말년에 왕궁의 한 폐쇄공간에 유폐된 채 쓸쓸한 최후를 맞아야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를 승계한 이는 그의 아들 므낫세였다. 그는 귀족당파의 지지를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다.

그렇게 기나긴 반개혁적 시대의 종말은 그가 죽던 때 갑자기 닥쳤다. 그의 아들 아몬이 왕위를 승계하였는데, 불과 2년이 못돼서 궁중 변란으로 살해당하였다. 성서엔 나오지 않지만 그가 왕이 된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형들이 즐비한 데 어린 왕자가 왕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왕이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는 변란으로 살해당했다. 아마도 이 시기에는 궁중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무수한 변란이 벌어진 듯하다. 므낫세 치하에서 고통당하던 농민들, 그들의 일부가 이것이 국가인가를 외치면서,[각주:3] 착취하는 신이 아닌 땅을 나누어주는 신에 관한 기억들을 서로 되새기며[각주:4] 데몬스트레이션을 일으켰던 듯하다. 열왕기는 이들을 가리켜 암하아레츠(amhaarez)라고 쓰고 있다. 직역하면 땅의 사람들인데, 열왕기에서 이들은 예외 없이 데몬스트레이션에 참여하는 정치화된 농민세력을 가리킨다.

그런데 아몬이 죽었을 때 이들 암하아레츠들이 왕을 살해한 저 변란의 주역들을 처형하고 새 왕을 추대하였다. 요시야가 바로 그다. 그의 모친 여디다는 보스갓 출신의 여자다. 보스갓은 블레셋 국경지대의 세펠라 지방의 성읍으로, 유다국의 비옥한 농경지가 가장 많은 곳에 위치하였다. 유다 농민운동의 지도자였던 미가 예언자의 고향인 모레셋 가드(Gath-Moresheth)[각주:5]도 세펠라 지방의 성읍이었다. 그러니 이곳 출신 왕비의 아들이 농민운동세력인 암하아레츠의 지지를 받는 건 매우 개연성이 있다.

어쩌면 암하아레츠들은, 백년 전 이사야 예언자의 신탁을 되뇌면서 임마누엘을 낳은 알마!”라고 부르짖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구호 속에는 히스기야의 개혁을 계승, 완성하여, 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나눠주는 신의 뜻을 구현할 존재에 대한 그들의 열망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시야는 임마누엘’, 곧 신이 (저들, 대지주들이 아닌) 우리 농민과 함께 하고 있음을 표상하는 존재다. 암하아레츠들은 바로 이런 구호를 외치면서 왕자 요시야를 왕으로 옹립했다.

그리고 십여 년 후 요시야 왕의 서기관들은 왕을 옹립했던 암하아레츠들의 이런 염원을 기록했다. 나의 가설은, 그것이 바로 이사야서7,14이라는 얘기다.

 


2016, 2017년 촛불, ‘사회교체를 외치다

 


JTBC의 테블릿PC 보도가 나온 이후 20161029일부터 이듬해 429일까지 6개월간 매주 토요일에 벌어진 집회로 공식계산한 23회의, 추최측 추산 1,700만 명이 참여한 촛불집회는 박근혜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국내외 매체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쏟아내는 가운데, 세계적인 비영리 공익재단인 독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Friedrich-Ebert-Stiftung)2017년 인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의 영향력 있는 싱크탱크인 아틀랜틱 카운슬(Atlantic Council)이 수여하는 세계시민상을 수상한 것도, 문 대통령의 수상소감의 말처럼, 한국의 촛불정치에 대해 세계의 지식사회가 얼마나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실제로 오늘날 전 세계의 민주주의가 퇴조하고 있다는 비관적 평가들이 폭넓게 확산되고 있던 차였다. 국제적인 인권감시센터인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의 보고서에 의하면 1970년대 중반 이후 남부 유럽에서 시작해서, 1980년대까지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동유럽으로 확산되어 전 세계의 60%에 달하는 국가들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되었고, 민주주의 공고화(consolidation)보다 한 단계 더 진전된 상태를 뜻하는 자유화(liberalization) 단계에 들어섰다고 평가할 만한 국가들도 거의 50%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민주주의는 절차적 차원이든 공고화, 자유화의 차원이든 퇴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2천 년대에는 그런 추세가 더욱 현저해졌다는, 공신력 있는 기관들과 연구자들의 보고서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낙관주의가 팽배하던 시기에 정치변동을 해석하는 축으로 주목받은 것은 정당, 그리고 노동조합을 포함한 사회운동 조직들이었다. 이런 공적 기관들이 운동을 조직화할 수 있는 능력을 다루는 자원동원이론(resource mobilization theory)은 낙관의 시대를 주도한 사회이론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특히 2천 년대 이후 정당이나 노동조합이 이끄는 사회변동의 가능성은 뚜렷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2010년 튀니지를 시작으로 이집트, 알제리,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일어난 시민의 데몬스트레이션이 장기간 지속되던 권위주의 정권들의 몰락을 이끌어냈다. 2011년 스페인에서는 무려 1,500만 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와 경제개혁, 사회개혁, 정치개혁을 부르짖는 사건이 벌어졌다. 최근의 이와 같은 일련의 정치적 변동을 야기시킨 사건들에서 주목할 것은 공히, 정당이나 사회운동 조직들의 역할이 미미한 반면, 페이스북트위터 같은 새로운 디지털미디어를 매개로 하는 느슨한 사회적 의제연합(agenda alliance)이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는 데 있다. 북아프리카 국가들에선 독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의제연합이, 스페인에선 복지축소 반대, 부정부패 반대, 나아가 이러한 변화의 공범자 역할을 하고 있는 낡은 정치의 개혁 등을 부르짖는 의제연합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자원동원이론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것을 뜻하며,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주목하는 새로운 시도들이 힘을 얻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2016~2017년 한국에서 벌어진 시민의 데몬스트레이션은 이전의 사례들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 우선 앞의 사례들에서 나타난 것처럼 정당이나 사회운동조직의 역할보다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같은 디지털 네트워크가 더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은 이미 2008년 광범위하게 벌어진 촛불정치에 대한 분석들에서 주목받은 논점이었다. 신문이나 TV 같은 기성의 매스미디어가 정당이나 사회운동조직들의 메시지를 시민사회에 재현(representation)하는 공론장(재현공론장)은 그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감소한 반면, 시민 각각이 자신의 생각, 기분, 관점, 의사를 직접 표현(expression)하고 소통하는 공론장(표현공론장)이 어느 사회보다도 두드러지게 발전한 한국사회에서, 공적인 정치적 기관들의 조직동원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의제연합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그 의제연합이 오프라인 광장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시민의 데몬스트레이션이 정권교체 혹은 정치교체에 성공했던 두 번의 선례, 성공의 기억을 기반으로 하였을 것이다. 두 번의 선례라 함은 19604.1919876월항쟁을 뜻한다. 또한 2008년 이후 수차례의 촛불퍼포먼스 형식의 대대적인 시민 데몬스트레이션을 통해 비폭력적인 시민적 항의, 만민공동회 형식의 직접민주주의적 의사표현, 축제 양식을 결합한 시위 문화 등, 대안적 시민 항의 모델들이 축적되어 왔다.

하여 2016~2017년 한국의 데모스트레이션은, 국내외적으로 아낌없는 찬사가 줄을 이을 만큼, 이른바 깨끗하고 참신한정권교체의 성공적 사례로 평가받을 만했다. 그렇게 2017년 전임 대통령 파면에서 신임 대통령 선거에 이르는, 권위주의적인 정권교체는 나이스하게 구현되었다.

물론 이는 단지 구정치 세력을 신흥세력으로 교체하는 과정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시민적 의제연합이 내걸은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슬로건은 좀더 포괄적이고 근원적인 개혁의 함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함의를 읽어낼 수 있는 단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내걸은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라는 문구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문 대통령은 2012년 제18대 대통령 후보일 때에 이 슬로건을 처음 제기했다. 그때부터 박근혜 정권기 내내 조작된 언론과 정치권의 집중적인 표적 공격을 받으면서도 그가 시민의 높은 지지를 유지한 것은 이 슬로건에 대한 시민적 기대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과 수많은 파워엘리트 집단의 갑질들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던 2016년 이후 정치인 문재인을 향한 시민의 압도적인 지지는 사람이 먼저인 사회가 그만큼 절실하게 기대된 결과다.

물론 이 슬로건이 처음 제출된 2012년이라는 시간성[각주:6]이 시사하고 있듯이 이것은 비단 박근혜와 그를 둘러싼 갑질 집단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시민의 준엄한 항의 혹은 심판의 기조도 함축되어 있다. 요컨대 이명박-박근혜를 연결하는, 시민을 소모품 정도로 취급하는 정치에 대한 문제제기다. 하지만 그것은 더 나아가 박정희로 표상되는 한국적 국가주의, 국가를 위해 시민을 도구화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시민적 의제연합은 정권교체만이 아니라 정치교체’, 나아가 사회교체를 추구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그런 시민적 문제제기에 부합하는 정치적 의지로 인해 시민사회의 열렬한 환호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요시야, 암하아레츠의 호명에 답하다

 


암하아레츠는 8살짜리 왕자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들이 외쳤던 알마, 어린/젊은 왕비가 낳은 아들이고 궁중 변란에 의해 비운에 숨진 왕 아몬의 아들이다.

아몬을 살해한 이들은 아마도 그가 므낫세의 적합한 후계자가 아니라고 주장했을 법하다. 실제로 아몬은 므낫세 왕이 재위 33, 그러니까 45살 때 낳은 아들이다. 즉 아몬이 므낫세의 적장자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몬의 왕위 승계 과정에서 복잡한 갈등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또 아몬 제2년에 궁중 변란이 일어난 것은 이 승계 과정에 대한 불만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그 변란을 제압한 이들은 암하아레츠, 곧 데몬스트레이션을 일으킨 농민들이다. 그리고 다른 이가 아닌 아몬의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추대했다. 바야흐로 이제 암하아레츠가 그를 통해 꾸었던 꿈이 실행에 옮겨질 일만 남았다.

요시야 왕은 암하아레츠의 꿈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꾸었던 꿈을 그리는, 곧 실행에 옮기는 정치를 편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단지 정권을 교체한 것만이 아니라 정치를, 사회를 교체하고자 했던 것이다. 농민이 먼저인 국가를 세우고, 그것을 가로막는 적폐를 청산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 우선 왕은 개혁을 추동하기엔 너무 어렸다. 하여 개혁이 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2년이나 지난 뒤다. 왕이 스무 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의 성소들의 정화사업을 편다. 그리고 점차 국경지방에까지 확대하였다. ‘성소 정화예루살렘의 야훼이외의 다른 신들에 대한 예배를 철폐하는 것인데, 그것이 함축하는 바는 예루살렘이 주장하는 공식적인 예배 양식 이외의 것을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성소를 둘러싼 사제와 권력집단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통로를 차단하고 예루살렘의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아니 더 나아가서는 대중과의 직접적인 소통 채널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런 점에서 이 개혁은 궁극적으로는 세력교체만이 아니라 정치 시스템 자체를 바꾸어보려는 정치개혁적 함의를 내포한다.

그로부터 6년 뒤인 재위 18, 왕이 26세 되던 때, 아마도 첫 번째 개혁이 어느 정도 궤도에 도달했다고 자평되었을 법한 시기에, 두 번째 개혁이 본격화된다. 이 과정은 이렇다. 왕이 예루살렘 성전 예배를 체계화하기 위해 성전을 정비하고 필요한 보수공사를 벌일 것을 명한다. 그런데 성전 정비 작업 중에 오래된 문서가 발견된다. 이 문서는 절차를 밟아 왕에게 전달되었다. 신하가 문서를 낭송하는 중에 왕은 애통해 하며 자기의 옷을 찢었다.”(열왕기하22,11) 다음 순서는 궁중예언자의 공증절차다. 이 과정을 하나하나 다 거치는 완벽한 절차를 마친 뒤에 이 문서에 기반을 둔 대대적인 개혁이 공표되었다.

왕이 옷을 찢는행위는 그것이 국가 차원의 존폐에 관한 엄중한 문제라는 것을 선포하는 행위다. 그렇게 엄중한 개혁의 물고를 튼 미지의 문서가 바로, 오늘날 학자들이 부르는 ()신명기(Ur-deuteronomion). 이것이 진짜 오래된 문서인지 요시야 왕실의 자작극의 산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원신명기가 요시야 왕실에 의해 보완된 것이 오늘 우리 성서의 신명기원판이다.

그런데 이 문서는 법전 형식의 텍스트로서, 성서 속에 보존된 다른 어떤 법전과 비교할 때, 소농 중심적인 분배사회적 성격이 대단히 강하다. 땅은 애초 신이 분배한 대로 지켜져야 하며, 그것이 사정상 훼손되더라도 일정한 시기 내에 정상화해야 한다.(희년. 히브리어는 yobel) 농민은 신이 부여한 권리의 주체이니, 그가 사정에 의해 권리를 상실하여 인신이 구속된 예속민(노예)이 되더라도, 일정한 시기 내에 정상화해야 한다.(안식년. 히브리어는 shmita) 또 국가는 십일조 형식의 과세를 하지 않을 것이며, 대신 그것은 지방의 빈민 구호 기금으로 사용하거나 순례객이 빈민에게 베푸는 호혜의 비용으로 사용하라, 등등. 대략 이런 내용들이다.

드디어 왕은 암하아레츠의 호명에 이렇게 답을 한 것이다. 그것은 므낫세적 정치를 추구한 대지주 귀족 중심의 정권을 히스기야-요시야적 정치를 추구한 친농민적인 정권으로 교체한 것만이 아니라, 지방성소의 개혁을 통해 정치시스템의 교체를 도모했다. 나아가 농민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을 구체화하는 법제를 통해 사회교체에까지 손길을 미쳤다.

이렇게 요시야 왕은 암하아레츠의 꿈을 저버리지 않고, 그들의 꾸었던 꿈을 그리는, 곧 실행에 옮기는 정치를 편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단지 정권을 교체한 것만이 아니라 정치를, 사회를 교체하고자 했던 것이다. 농민이 먼저인 국가를 세우고, 그것을 가로막는 적폐를 청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개혁이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우선 왕이 본격적인 사회적 개혁을 시도한 때가 재위 20년이었는데 그로부터 불과 11년 후에 그는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Necho II)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에 암하아레츠는 불의에 숨진 왕을 애도할 틈도 없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옹립하기 위해 다시 나섰다. 여호아하스는 23세의 청년으로, 그의 모친이 암하아레츠의 땅 세펠라 지방의 립나(Libnah) 출신이니, 그도 역시 농민 친화적인 인물인 듯이 보인다. 하지만 또 다시 요시야를 죽인 느고의 강권에 의해 3개월 만에 폐위되고, 그보다 2년 연상의 형인 여호야김이 이집트 제국의 위성정권의 수장으로 즉위한다. 이렇게 개혁은 강제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요시야 개혁의 한계는 아니다. 요시야 개혁은 처음부터 강력한 도전세력과 맞서야 했다. 해서 개혁세력은 요시야를 옹립한 이후 무려 12년을 기다려야 했고, 개혁이 시작된 이후에도 매우 조심스럽게 절차상의 문제를 하나하나 신중히 고려하면서 진행해야 했다. 이는 암하아레츠의 대대적인 데몬스트레이션이 왕위 승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지라도 실제의 개혁은 기대보다 지지부진했음을 뜻한다. 왜냐면 므낫세의 긴 통치기간을 거치면서 정치사회적 권력자원의 많은 부분을 대지주 세력이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기에, 왕과 그를 호위하던 개혁세력이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타협을 필요로 했을 것이고, 그만큼 개혁은 원래의 취지에서 벗어나곤 했겠다.

또한 개혁의 주체세력 자신의 한계도 무시할 수 없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루살렘 중심의 성소 정화운동이다. 개혁세력은 지방의 성소가 대지주와 지방사제들이 연합하여 대중을 호도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것은 성소의 역할에 대한 편협한 인식의 소산이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신들에 대한 제의들 속에는 오랜 세월을 통해 사람들 각각의 갈망이 깊게 스며 있었다. 그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은 어쩌면 지방성소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예루살렘 사제들의 이해관계와 깊게 연루되었을지 모른다. 하여 요시야가 죽고 개혁동맹이 붕괴한 뒤, 예루살렘 성전은 온갖 악행이 자행되는 강도들의 장소가 되었다.(예레미야서7,11) 아무튼 개혁주체들의 이러한 인식의 한계는 다양한 대중의 고통과 바람을 이해할 수 없게 했을 것이고, 결국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정치적 장소로 지방의 성소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결과는 예루살렘 성전 사제들의 권력만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으로 귀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유다국이 멸망하고 수세기 뒤에 이곳에서 자치공동체가 만들어질 때 사제들이 사회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는 역사적 알리바이로 작용한다. 애초의 요시야 개혁의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유실되고, 사제들이 그 기억의 상당부분을 전유한 탓이다.

아무튼 요시야 정권은 정치교체도 사회교체도 시도는 열정적으로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것은 외적인 엄혹한 환경 탓이기도 하지만, 반개혁 세력과의 싸움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탓이기도 했고 나아가 개혁주체 세력 자신의 인식상의 한계도 한몫했던 탓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는 오늘 우리는 요시야의 개혁을, 그 의의를 충분히 감안하되, 그 한계를 넘어서는 재해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요시야 개혁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자 하는 오늘 우리는 더 요시야스럽기 위해 요시야를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촛불정치의 호명은 지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국가인가를 묻는 시민을 향해 사람이 먼저다라고 답한 문재인 후보는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그동안 적폐를 청산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고 강렬했다. 그러나 국민의 눈에는 아직 아득히 멀게만 보인다. 양극화 해소, 남북간 평화공존과 탈냉전, 복지국가, 인권 향상, 언론자유, 그리고 국가안보가 아닌 시민안전 사회로의 이행 등의 가능성도, 지금까지 정부가 매우 적극적인 것은 분명한데, 과연 얼마나 그 비전을 현실화할 수 있을지 예측되지 않는다. 불과 5년 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내기엔 누적된 반개혁의 벽이 너무 두텁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70% 안팎인데 국회의석 비율이 여소야대인 데서 시사되듯이 제도권력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을 반개혁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현실 아래서 정치교체나 사회교체의 틈은 매우 비좁다. 더욱이 미국의 트럼프나 일본의 아베, 북한의 김정운 같은 동아시아의 신냉전주의적 질서를 선호하는 인접국 사이에 낀 한국에서 반개혁세력은 끊임없이 안보 마케팅을 통해 권력재생산의 동력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국내외적으로 사람이 먼저인 정치, 사람이 먼저인 사회로의 개혁은 결코 쉽지 않다.

2017425, TV대선토론에서 홍준표 후보는 느닷없이 동성애를 반대하는가를 물었고 문재인 후보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아마도 이 대답은 선거 직전에 궁지에 몰리지 않으려는 전략적 발언이겠지만, 이것 뒤에는 좀 더 우려스러운 현실이 게재되어 있다. 문재인 정부가 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반개혁세력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혹은 여전히 강력한 저들과의 협상의 과정에서 어떤 것은 보다 손쉽게 후퇴 혹은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정권인들 다르겠는가. 하지만 유사시에 후퇴 혹은 포기의 대상이 되는 존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만큼 뼈저린 절망감은 없다. 그런 점에서 어느 것도 후퇴 혹은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일에 시민사회가 망설인다면 정부의 개혁은, 그 정치교체나 사회교체의 가능성은 그만큼 후퇴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국회 헌법개정 및 정치개혁 특별위원회’ 3차 전체회의 때에 벌어진 논란은 우리의 주목을 끈다. 아직 문재인 정부의 정치교체와 사회교체를 향한 의지가 강력한 상황에서 그것을 제도화하는 법제도개혁의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헌정특위 자문위원회(이하 헌정자문위’)가 제출한, 헌법의 기본권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두고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주체사상 추종 운운하면서 색깔론을 편 것에 대한 공방이다.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시민적 슬로건은, 소수의 파워엘리트 집단이 자신들의 사적이익을 위해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현상에 대하여, ‘국가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환원된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정답은 국민이었다. 그런데 국민이 아닌 특권층이 국가를 전유했으니 국가를 국민에게 돌려달라는 주장은 결국 민주주의를 회복하라는 요구인 셈이다.

한데 문재인 후보는 정답과는 달리 답했다. ‘사람이 먼저다.’ 대개는 국민이 먼저다라는 말과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문재인 후보와 그의 참모진 다수도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되고 1년이 지난 뒤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을 구체화하는 정부가 위촉한 헌정자문위국민사람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해서 헌법의 기본권 주체를 국민이 아닌 사람이어야 한다는 논점을 제기한 것이다.

주체사상이 사람이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썼든 아니든 그것이 종북의 지표는 아니다. 사실 오늘 우리사회에서 사람이라는 표현은 더 흔하게 쓰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함의를 지닐까. 우선 지구화 시대 국경 너머로의 이동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사회에도 수많은 외국인 이주자들이 살고 있다. 그러니 헌법은 이 땅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본권을 부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한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마치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에서 세관원, 죄인, 매춘여성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치스런 자로 간주하여 동족의 일원에서 배제한 것처럼 오늘 우리사회에서도 무수한 이들을 국민에서 배제하는 메커니즘이 작동되고 있다. 그중에는 주민등록말소자나 금치산자 그리고 신용불량자처럼 법적으로 국민적 존재로서의 위상을 부정당한 이들도 포함된다. 그들은 존재하지만 법적으로 존재를 부정당한 이들이다. 동성애자에 대하여 한국의 다수 개신교 지도자들과 극우인사들은 그들을 비국민화하려 한다. 그런데 헌정자문위는 이들에게도 헌법상의 기본권을 부여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필경 헌정자문위의 시각은 문재인 정부의 슬로건을 가장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을 대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문재인 정부는 개혁을 위해 적극적 해석을 유보하고 중도적 혹은 절충적 해석으로 개혁의 방향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더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현 정부의 파워엘리트 집단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국민대신에 사람을 헌법적 기본권의 주체로 보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는 데 있다. 반개혁세력은 말할 것도 없지만, 개혁주체 세력 내에서도 그런 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국민이 먼저인 국가를 위해서 얼마든지 소수자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즉 정치교체와 사회교체를 추구하는 데 있어 전략적 유보가 아닌 본질적 유보의 시각이 문재인 정부 내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서 현 정부의 개혁 후퇴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서는 시민적 감시가 절실하다. 촛불정치가 단지 정권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민주주의를 포함하는, 그러니까 대의제 일방의 정치가 아니라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를 결합한 정치교체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라면, 시민은 촛불정치가 꿈꾸었던 사람의 정치가 적극적으로 추구될 수 있도록 계속 문제제기하는 주체여야 한다.

지난 2016~2017년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조사한 한 연구에 따르면, 촛불집회 참석자들은 사회적 평균보다 상대적으로 젊고 학력이 높으며 수득수준도 높은 편인 사람들이었다. 반면 태극기집회 참석자들은 연령도 학력도 소득수준도 평균 이하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후자가 더 권위주의적 사회를 지지한 반면, 전자는 더 평등하고 더 공정한 사회, 공공성이 더 확대된 사회를 추구했다.

그렇다면 안정계층에 속한 촛불정치 참여자들 다수는 자신들이 피해를 보는 제도적 개혁상황에 직면할 때도 평등하고 공정하며 공공성이 확대된 사회를 여전히 지지할 것인가. 사회적 위치에 따른 이해보다는 공공적 가치를 선택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인가. 이는, 어떤 점에선, 촛불집회 참여자들의 사회교체 주장의 진정성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앞에서 자원동원이론에 따르면 촛불집회 참여자들이 계속 사회교체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당이나 사회운동 조직의 자원동원 활동에 더 영향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 이론은 오늘 우리 시대의 현상을 해석하는 데 그리 유용하지 못했다. 해서 앞에서 새로운 디지털미디어에서 벌어지는 상호소통적인 표현공론장에서의 적극적 역할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곳에서 촛불정치의 의미를 둘러싼 공론장이 여전히 활기를 띤다면 시민사회는 정부가, 수많은 반개혁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정치교체와 사회교체를 향한 개혁에 더 적극적으로 매진하도록 자극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주역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촛불정치는 오늘도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1. 기원전 2세기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셉투아긴타’는 라틴어 이름이고, 이것의 그리스어 원제목은 ‘헤 메타프라시스 톤 헤브로메콘타’(ʿH metaphrasis tōn Hbdomēkonta)로, ‘70인역’이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2. 이때 만들어진 ‘이사야 신탁집’이 이후 수세기에 걸쳐 증보되면서 우리 성서의 〈이사야서〉로 완성된다. [본문으로]
  3. 이는 〈사무엘기상〉 8장에서 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왕이 어떻게 백성을 괴롭히는 존재인지를 말하는 사무엘의 말에서 시사되고 있다. [본문으로]
  4. 이것은 〈여호수아기〉 13~19장에서 묘사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와 땅을 분배받는 이야기에서 시사되고 있다. [본문으로]
  5. ‘가드의 모레셋’이라는 뜻인데, 이는 블레셋의 성읍인 가드에 귀속된 땅이었음을 뜻한다. 그런데 유다국이 강성해지면서 모레셋 성읍을 포함한 세펠라의 여러 성읍들이 유다의 땅으로 편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6. 이 해는 이명박 정권이 끝나는 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