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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추천사_ 테드 제닝스 지음, 박성훈 옮김_무법적 정의 - 바울의 메시아 정치

이것은 테드 제닝스 교수께서 쓰고 박성훈 선생이 번역한 [무법적 정의 - 바울의 메시아 정치](길, 2018)의 추천사로 책에 수록된 글입니다. 이 책에서 제닝스 교수나, 그가 철학적 대화를 하고 있는 자크 데리다나 조르조 아감벤을 잘 이해하고 있지는 못해 좋은 소개의 글이 되지는 못하지만, 성서 해석사에서 역사비평학 이후 제기되고 있는 새로운 비평학으로서 철학적 비평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참고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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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근대적 지식의 첫 번째 문을 연 것은 역사학이었다. 전근대적 지식이 독점해온 진리가 역사학적 탐구를 통해 여지없이 무너진 것이다. 예컨대 교회가 예수에 대한 지식을 독점함으로써 교회가 해석하는 예수가 진리의 표준이 되어왔는데, 역사학은 성서 텍스트를 학문적으로 해부하여 가장 오래된 문헌적 층위를 발견해냄으로써 교회가 해석한 예수와는 다른 모습의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를 해석해냈다. 물론 이를 통해 이 역사적 예수가 교회의 예수와는 다르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가 독점해온 진리의 정당성을 심각하게 훼손하였다. 그것은 진리가 더 이상 교회 안에, 그 장소를 지배하고 있는 성직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지식의 맹아로서의 역사학, 그리고 그것이 수행되는 대학에 있다는 새로운 믿음을 심어주었다. 이런 식으로 수행되는 역사학적 방법을 신학계는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역사비평은 18~19세기에 신학을 전체적으로 리부팅하는 가장 결정적인 동력이었다. 역사비평은 모든 신학을 성서 해석에 기반을 둔 학문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말경 본격화되기 시작한 고전적 역사주의의 위기와 함께 성서해석학의 제왕이었던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도 헤어 나오기 어려운 한계의 수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 위기의 요체는 역사학이 발견해냈다고 자부했던 원초적인 과거 사실’, 그것 속에 내포된 확고부동한 진리가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는 데 있다. 가령 가장 오래된 복음서라는 마가복음도 누군가에 의해 해석된 예수에 관한 문서이며, 그것에서 역사의 예수를 읽어낼 수 없다는 회의가 널리 확산되었다.

20세기는 이러한 역사비평의 위기를 돌파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속출하던 시대였다. 성서학계에서 양식비평(form criticism)이 각광을 받은 것은 역사비평의 확장을 통한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역사비평은 최초의 문서적 흔적을 찾는 데 역점을 두어왔는데, 양식비평은 문서로 만들어지기 이전, 구술단계의 텍스트(oral text)를 탐구함으로써 단 하나뿐이 과거 사실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한편 양식비평만큼은 아니지만 수사비평(rhetorical criticism)도 역사비평을 보완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이 방법이 주목한 것은 성서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발화자의 말하기 전략이었다. 동시대의 여러 문헌 속에서 도출된 말하기 전략들, 즉 수사기법들을 성서 텍스트에 대입함으로써 애초의 말의 의미를 더 잘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좀더 최근, 그러니까 20세기 말 즈음에는 사회과학적 비평(social scientific criticism)이 맹렬히 모색되었다. 과거 역사학이 위기에 직면해 있던 시절, 역사학의 담장을 부수고 뛰쳐나간 새로운 학문적 탐구들 중 일부가 사회과학이라고 불리는 지식체계로 정착하였다. 대체로 역사학은 시간의 역순으로 탐구를 진행하여 사실의 질서, 그것 속에 내포된 원초적 진리의 내용을 찾아내려 했다면, 사회과학은 공간의 배치를 주목함으로써 의미를 해석하려 했다. 그런데 이렇게 별개로 발전하던 학문이 20세기 후반 이후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분석의 개연성을 향상시키고자 했는데, 성서학의 경우 20세기 말경부터 빠르게 상호적인 연구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가령, 인구학적 요인, 계급/계층적 요인, 기후적 요인, 지형적 요인들 같은 공시적 요소들을 역사비평이 간과함으로써 성서 속의 특정 텍스트의 본질적 의미를 해독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런 사회과학적 요소들을 통해 역사비평을 재구축함으로써 모두가 동의할만한 단 하나의 진리에 도달하고자 했다.

이상과 같은 새로운 탐구들은, 대체로 단 하나뿐인 과거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역사비평적 명제를 보완하는, ‘확대된 역사비평의 구축에 기여하고자 했다. 하여 역사적 사실이란 단 하나로 수렴되는 진실을 담고 있다는 믿음을 지향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역사비평은 단 하나로 수렴되는 과거 사실의 존재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오히려 더 다양한가설적 사실들에 도달했고, 그것 간에는 절충될 수 없는, 매우 개연성 있는 것들이 무수히 많다는 딜레마에 빠져 버린 상태에 있다.

한편 20세기 중반 이후, 역사비평과는 접목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다양한 시도들이 활발하게 모색되었는데 그중 1980년대 이후 꽃을 피운 주목할 만한 두 가지 다른 비평들이 학계의 이목을 끌었다. 서사비평(narrative criticism)과 구조주의비평(structural criticism)이 그것이다. 이들은 공히 비평의 단위를 현존하는 성서 텍스트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비평과는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역사비평은 현존하는 텍스트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해석된 후대적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과정을 통해서 과거 사실을 해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원초적 텍스트를 발견하여 그것을 분석대상으로 삼아 과거 사실을 해독하려 한 반면, 이 두 방법은 그러한 역사비평적 관점과는 달리 현존하는 텍스트 자체를 분석의 대상으로 한 것이다.

서사비평은 현존하는 성서 텍스트에 대해, 역사적 물음을 묻는 대신, 등장인물, 배경(setting), 사건, 플롯 등 텍스트 내의 여러 문학적 디테일에 주목하여 그 의미 가능성을 해석하고자 했다. 반면 구조주의 비평은 텍스트가 놓여 있는 언어구조에 주목하여 그것의 의미 가능성을 읽고자 했다. 여기서 전자는 발화자가 말하려는 의도를 알아내려고 했다면, 후자는 발화자의 의도에 대해서는 그닥 관심이 없고 거기에 사용된 언어의 심층, 즉 언어적 무의식의 세계를 통해 텍스트를 해석하려 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이것이다. 이 두 비평방법은, 역사비평과는 달리, 성서 텍스트에서 단 하나의 진리를 발견해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의 가능성을 향한 해석의 문을 열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다양한 가능성의 실마리는 성서 텍스트 내에 있다고 보았다. 즉 이 두 비평방법은 공히 텍스트주의적 해석에 집착하고 있다. 요컨대 텍스트의 바깥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한데 1980년대에 주목받기 시작한 또 다른 비평방법인 독자수용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은 이와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독서자(그리고 그이의 세계)와 텍스트 간의 상호성에 있다. 텍스트 바깥에 있는 중요한 주체인 독서자의 존재가 해석에 중요한 또 하나의 실마리라는 예기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일종의 탈텍스트주의(post-textualism)적 성서해석, 혹은 텍스트주의 해체적 성서해석의 등장을 의미했다.

한데 독서자란 누구인가?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일원이다. 그 안에서 그이는 이 세계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동조하고 있는 반면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불화(不和)하고 있다. 또 어떤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세계를 해석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자신의 세계를 해석하는 그이의 행위 속에는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독자수용비평이란, 엄밀히 말하면, 독서자, 그러니까 성서 텍스트를 해석하는 자기 자신이 동조 혹은 불화하는 세계에 대한 논의, 그것을 통해 수행하고 있는 그 자신의 실천과 연결하여 해석이 수행되어야 하는 비평방법이다. 그런데 독자수용비평에서 독서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 자기 세계에 대한 분석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독서자 자신과 텍스트 간의 상호성만을 말하려고 했다. 이렇게 독자수용비평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역사로부터 탈주하였던 비평들과는 달리 새롭게 셋팅된 역사의 복귀를 선언하는 비평방법임을 의미한다. 새롭게 셋팅된 역사의 복귀란, 단 하나의 과거 사실의 재현에 대한 확신으로 표상되었던 고전적 역사주의와는 다르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서의 역사를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수많은 의미들로 끊임없이 재해석될 수 있는 복수로서의 역사학이다.

이 점에서 독자수용비평의 문제제기를 가장 철저하게 수행하고 있는 해석들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이러한 비평방법으로 주목받는 것들로는 문화비평으로서의 성서비평정치신학으로서의 철학적 비평을 들 수 있다. 문화비평으로서의 성서비평은 대략 199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모색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화적 실천이다. 독서자는 자신의 비평이 자리하는 시선을 여성에 두건, 유민에 두건, 민중에 두건, 노동자에 두건, 그 시선적 주체를 중심으로 하여 그를 둘러싼 사회의 일상적인 포용과 배제의 메커니즘,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고 있는 일상적 실천으로서의 정체성의 정치와 그런 이들 간의 연대성의 정치 등을 분석하고 그것을 성서 텍스트의 해석에 개입시킨다.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메리 톨버트(Mary Ann Tolbert), 페르난도 세고비아(Fernando F. Segovia), 수기르타라자(R. S. Sugirtharajah), 곽퓨이란(Kwok Pui-lan, 郭佩蘭) 등이 있다.

한편 정치신학으로서의 철학적 비평을 대표하는 이는, 바로 이 책 무법적 정의바울의 메시아정치(2018/ The Outlaw Justice: The Messianic Politics of Paul. 2013)의 저자인 테드 제닝스(Theodore W. Jennings, Ted Jennings)가 손꼽힌다. 이 책은 선행하는 연작인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정의에 대하여(2014/ Reading Derrida, Thinking Paul: On Justice.(2005))와 함께 철학적 정치비평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성서에 대한 철학적 비평의 선구자들은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아니었다. 현대의 유대 정치철학자인 야콥 타우베스의 바울의 정치신학(2012/ La Théologie politique de Paul, Schmitt, Benjamin, Nietzsche et Freud, 1993)이 문을 열었고, 현대의 좌파철학자들인 조르조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관한 강의(2008/ Il tempo che resta. Un commento alla Lettera ai Romani, 2000),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2008/ Saint Paul: The Foundation of Universalism; transl. by Ray Brassier;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3) 등이 저술되면서, 바울은 일약 현대의 주요 사상가들이 앞 다투어 정치철학을 논하는 주요 텍스트로 부상했다. 요컨대 이 비평 방법은 오늘의 세계에 개입하는 정치철학적 텍스트로 바울(의 문서들)을 읽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이 읽는 바울은 고전적인 역사비평적 접근을 통해 조명된 역사적 바울(historical Paul)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알레고리로서의 바울이다. 혹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서 리셋팅된 현대적 역사학의 바울이다.

왜 바울인가? 이들이 바울을 주목하는 근저에는 현대종교의 패권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가 바울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전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그리스도교가 서구사회 전체의 담론적이고 제도적인 토대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바울은 서구사회 전체를 상징하는 알레고리라고도 할 수 있다. 요컨대 바울을 첫 번째 그리스도인혹은 첫 번째 서구인이라는 전제에서 그들이 펴는 바울의 정치철학적 이론들이 출발한다는 것이다. 물론 바울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주류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알랭 바디우의 바울은 이러한 맥락에 있다. 한데 최근 성서학계에서 새로운 대세를 형성하는 논점은 바울이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경계선일 수 없다는 것이다. 야콥 타우베스나 아감벤은 그런 새로운 전제 위해서 바울론을 편다. 아무튼 바울을 정치철학적으로 이야기하는 현대의 사상가들은 그것을 통하여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정치철학이 이 세계에 어떻게 개입하여야 하는지를 각각의 방식으로 서술한다.

테드 제닝스의 두 권의 연작은 이러한 정치철학자들의 바울론을 참조하면서 쓴 그의 바울론이다. 그의 두 권의 연작 저서의 제목들에서 명시되듯 그는 정의를 얘기하고자 하는데, 그가 말하는 정의는 고대 로마나 현대의 미국과 같은 제국의 통치자가 표명하는 법의 지배로서의 정의가 아니라, ‘법 밖의 혹은 무법적정의다. 그 정의는, ‘군주적 지배로 표상되는 지배체제의 메시아주의가 아니라,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혹은 약한 메시아주의와 함께 하는 정의다. 아마도 그의 이런 정의론은 국민국가적 법질서 밖의 존재로 국경을 넘어온 유민과 난민, 그리고 이분법적 성에 관한 규범적, 법적 질서 밖의 존재로 성의 국경을 넘어온 성소수자 등에 의해서 새롭게 주체화되고 있는 정의다. 그런 점에서 그 정의를 그는 무법적 정의라고 부른다.

정치철학적 성서 텍스트로서 무법적 정의로마서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 서사 양식은 다양한 장르적 성격을 띤다. 여기에는 문학적 비평도 활용되고 역사적 비평도 활용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역사로부터의 탈주이며 새롭게 셋팅된 역사로의 복귀. 즉 단 하나의 과거 사실을 발견하려는 역사주의적 욕구로부터의 탈주이며, 오늘의 사회를 깊게 읽고 그것에 깊게 개입하는 차원에서의 역사의 복귀. 물론 철학적 비평은 아직 비평적 실험의 출발 단계에 있다. 이 책은 그렇게 새로운 비평의 등장을 알리는 기념비적 저작이다. 그것은 교회에서 대학으로 해석의 거점을 옮겨놓았던, 그리고 성직자에서 역사가로 해석의 주체를 이동시켰던 역사비평을 넘어서는 새로운 비평이다. 이제 해석의 장소는, 대학이든 아니든, 세계의 변혁을 꿈꾸는 실천의 장이 되며, 해석의 주체는 그러한 실천을 도모하는 이들이다. 하여 오늘의 지배적 메커니즘 속에서 법의 바깥으로 내몰린 이들의 시선에서 세계의 변혁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그이가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이 책과 함께 그 꿈에 대하여 상상하는 기회를 얻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