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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5.18에 관한 두 가지 과제

이 글은 [경향신문] 2018년 5월18일자 '사유와성찰'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18211701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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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에 관한 두 가지 과제

 



지난해,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은 또 한 번의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 무렵 너무 자주 맛보았던 터라 식상할 것 같았는데, 감동드라마에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날 나의 절친은 고2 때 갑자기 사라진 친구를 찾아 광주로 내려갔다. 1980년 그 무렵 급히 그곳으로 떠난 그 친구는 이후 다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여러 차례 나의 절친은 그 친구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 그럼에도 37년 동안 친구의 고향으로 찾아갈 생각은 못했다. 회상을 할지언정, 찾아갈 엄두가 안 났던 것이다. 필경 찾지 못하겠지만, 만의 하나라도 망자의 명단에서 확인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37년 만에 그곳으로 갔다. 그 직전 겨울을 환하게 불태웠던 촛불덕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했다. 나의 절친은, 수많은 일상의 감동스토리로 점철된 그날의 풍경을 흥분된 어조로 한참을 얘기했다. 매스미디어가 재현하고 있는 이야기들과 대중이 일상에서 표현하는 이야기들이 이렇게 서로 겹쳐지는 정서를 담아내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하지만 1년 전 그날은 그랬다.

38번째 추모일이 왔다. 작년 추모일에도 시민에게 헬기 사격을 가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땐 9년 동안 자행된 민주주의 훼손의 역사가 중단되었다는 들뜬 마음에 감동이 앞섰다. 하지만 올해부턴 좀 냉정하게 그날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국민을 공격하기 위해 전투기를 출격하려고까지 했다는 사실이 이제야 드러났다. 도대체 자국민을 전투기로 공격하려는 정부가 1980년 한국의 신군부 외에 누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또 일부 군인들이 광주에서 무자비한 성폭행을 자행한 사실도 밝혀졌다. 그리고 한 여성이 영어로 썼다는 편지가 공개되었다. 그 속에는 건물 2층에서 부상당한 시민을 군인들이 땅바닥으로 내던졌다는 그녀의 아버지의 목격담이 들어 있다. 이 편지와 함께 6,300쪽 분량의 5.18 관련 자료가 미국의 한 대학교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그 내용들은, 물론 확인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모두 공개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정부와 군이 그동안 숨겨왔던 자료들도 색출하여야 한다.

5.18 가해의 주범과 종범들 중에는 아직도 1980년 광주의 저항하는 시민들을 폭도이고 빨갱이라고 소리 높여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반인륜범죄의 혐의가 짙은 자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간의 5.18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을 통해 알고 있듯이,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 한 이들에 대한 법적 처벌은 쉽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5.18기념사에서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더욱 큰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겠다는 공약을 지키겠다고도 했다. 전자 없이 후자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여 진상 규명은 이 정부가 임기 내내 책임 있게 진행해야 한다.

그러나 법적 단죄만으로 5.18의 청산은 충분하지 않다. 진상 규명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피해자에 대한 대책이다. 이 점에서는 나를 감동시켰던 37주년 기념사의 논리가 걸린다. 5.18의 정신이 1987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다시 촛불혁명에서 부활했다는 것이다. 하여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이어 문재인 정부도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5.18의 고난을 이겨낸 시민 정신이 민주주의의 축복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이렇게 고난-축복을 하나의 필연적 논리로 하는 서사는 감동적이고 멋진 승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축복을 체현하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여기선 은폐될 우려가 있다.

5.18 피해자들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40% 이상의 피해자들이 PTSD 증상을 나타내고 있고, 30%에 달하는 이들이 중증의 증상을 보인다. 그런데 그들의 가족들은 더 높고 중한 PTSD 증상을 나타났다고 한다. 이 조사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어떤 연구들은 중증의 PTSD 증상자들의 이웃, 친구, 동료, 심지어 익명의 사람들도 고통을 겪는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런 매커니즘은 PTSD 증상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사람들에게 희생자로서 인식되기보다는 불편한 자로 여겨진다는 것을 뜻한다. 숭고한 희생자에 관한 서사에서 이들 불편한 피해자의 이야기는 누락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불편한 피해자5.18 서사에서 누락하는 과오를 공공연히 저지를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난-축복의 논리가 이 정부의 5.18 서사의 중핵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의도하지 않은 망각의 가능성이 있음을 걱정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5.18 서사에서 불편한 피해자들의 임파워먼트(empowerment, 권한강화)에 관한 논리가 보충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