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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탄핵과 등화관제의 추억

[서울신문] 2004.3.18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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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과 등화관제의 추억

 

살인의 추억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른바 화성 연쇄살인사건에 수사관으로 참여했던 한 전직 형사의 추억에 관한 영화다. 즉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한 형사가 개인적 체험을 통해 기억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추억은 항상 정감이 넘친다. 거기에는 과거에는 있었을 법한 고통이 망각되어 있다. 즉 추억하는 자는 피해자와는 다른 시선에서 과거를 회상한다. 그것이 꼭 가해자의 시선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가해자의 시선에서 본 후일담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항상 있기 때문에 추억은 항상 불온성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서 자기도 모르게 이 형사의 시선에 동화된다는 점이다. 비록 형사 자신도 희생자였겠지만, 동시에 그들은 끊임없이 피해자와 분리된 존재이다. , 영화를 보는 관객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희생자와는 무관한 시선으로 추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통해 1980년대에 대한 자신의, 나아가 우리의 일반적인 기억 방식, 그 추억의 불온성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 불온성이란, 영화 도처에서 드러나듯, 군사쿠데타와 연관이 있다. 그는 그것을 등화관제로 묘사한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인위적인 어둠을 만드는 행위. 결국 사실을 조작하고 은폐하는 것은 권력의 욕망만이 아니라, 그 주역들이 사라진 뒤에도 쿠데타의 기억을 심성의 일부로 간직한 우리 모두의 무의식적 욕망이라는 얘기다.

지난 312일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결의되었다.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었고, 여당 의원들은 의원직 사퇴를 결행했다. 사태의 추이가 어떻게 되든, 필경 극단적인 숱한 사례들이 계속 이어질 것 같다. 그러나 정작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이 사태를 계기로 탄핵은 한국 사회 대중의 일상 속에 너무 빠르게 너무 깊게 일상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근 며칠 사이에 대통령 탄핵 사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상황을 추억하면서 많은 아내들은 남편들의 탄핵을, 아이들은 부모들의 탄핵을, 학생들은 선생들의 탄핵을 얘기하고 있었다. 실재하는 문제를 탄핵이라는 언표로서 얘기하는 것이 사람들의 입에 익숙한 표현이 된 것이다.

탄핵은 일체의 대화를 중단시킨다. 탄핵 이전에는 자잘못을 자유롭게 논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 이후에는 모든 논의가 탄핵이라는 말 속에 회수된다. 그것은 탄핵하려는 편과 그 반대편의 시선에서만 자잘못에 관한 일체의 주장들이 해석된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문제는 선한 우리악한 저들이라는 단순 이분법의 상황 속에 흡수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분법적 경계의 제3, 즉 소수자들은 그들의 언어를 빼앗긴다. 그러므로, ‘등화관제, 그 군사쿠데타의 상징적 퍼포먼스가 인위적인 어둠을 만드는 행위인 것처럼, 312일의 탄핵사태도 인위적으로 어둠을 만드는 또 하나의 장치가 될 수 있다.

자의든 아니든 그 폭력적 회의를 진행한 의장은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언하면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전진해야 한다는 미묘한 말을 내질렀다. 그가 깨달았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의 전진해야 한다는 말 속에는 숱한 희생자를 낳으며 이룩한 그 비루한 한국의 성공주의에 대한 추억이 들어 있다.

사태는 벌어졌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고 있음에도 돌이킬 수 없는 상황, 모든 것을 이분법의 전쟁 속으로 몰고 갈 그 사태는 이미 벌어진 것이다. 쿠데타의 상흔을 버벅거리며 고통스럽게 극복하려 몸부림해온 우리에게, 또 하나의 상흔이 새겨졌다.

그러니 이제 다시 힘겨운 투병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사건의 추이에서 대통령이 어떻게 되든, 부패한 보수주의자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이미 그 질환에 전염되기 시작한 우리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그 길고 고단한 고통스런 투병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