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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민주화 이후, 미래는 지속될 수 있는가

[종교와 평화](2005.05.01)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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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 미래는 지속될 수 있는가

 

 

참담한 결과로 총선마저 끝났다. 20년에 지나지 않는 민주화로의 제도적 실험, 그 불같던 열망은 이렇게 무참히 반전의 체험을 남기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꿈속에서조차 가슴 떨리게 하던 민주주의의 갈망은, ‘문민’ ‘국민’ ‘참여라는 이름을 슬로건 삼아 역사 속에 육화(肉化)/제도화되었다. ‘문민이 군부독재의 제도적 유산에 대한 철거 욕망을 민주적 제도화 속에 담아내려는 시대적 기조를 대변하고 있다면, ‘국민은 민주화의 추동주체로서의 국민의 탄생을 선언하는 시대의 기호였다. 그리고 참여는 민주적 제도화에 대한 국민의 개입을 본격화하는 시대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군부권위주의 온건세력의 위로부터의 개혁에서 출발한 민주화의 도정이 시민의 참여를 통한 아래로부터의 개혁으로 전환, 심화되는 방식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제도화되었고, 그런 점에서 발전적 순항의 도정에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시민의 역사 참여의 과정은 일인 독재의 체제를 종식시켰지만, 시민 자신이 작은 독재자들이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여 한국에서 민주화의 시간은 사회적 고통을 경감시키는 해방적 시간이 되지 못했다. ‘더 작은 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폭력은 점점 심화되는 추세이고, 시민 상호간의 공격성 또한 극한을 향해 치닫고 있다. 정치권력과 대자본세력, 그리고 사회 각 영역의 엘리트 집단의 몰공공적 이기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악순환의 제도화 과정에 대해 어느 누구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기엔 서로가 서로에게 충분히 불충스러웠다. 그리고 2007, 국민은 스스로가 구축해왔던 민주주의에 대한 저주를 결정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대안을 시민사회는 MB에게서 찾고자 했다. 그리고 MB는 그것을 실용혹은 선진화라는 기호로서 표상하였다. 그것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호하다. 새롭게 탄생한 정부의 주체들은 이에 대해 제각기 해석하는 듯하고, 현재로는 MB 자신만이 그 해석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매일 날아오는 그의 충격적 발언들은, 기축 없이 갈팡질팡하는 논조를 통해 보건대, 그 자신도 아직 선진화나 실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요컨대 실용/선진화라는 기표는 비어있다. 그리고 현재 상태로는 MB가 그 빈 곳을 채울 주역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국민은 현재 실용으로 해석되는 MB식 포스트민주화의 가능성에 한 표를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대선과 총선의 참혹한 결과는 그러한 시민사회적 욕구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시민 스스로가 열망했던 지난 20년간의 민주주의에 대한 자기 청산 작업이다. 그 청산이 어떤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 이후, 그 이행의 과도기에 우리는 표류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대선과 총선을 보면서 시민사회가 너무 지나치게 시장화되었다는 것에 많은 이들은 당혹스러워 한다. 적절한 관리와 통제의 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은 시장은 넘쳐나는 탐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러한 탐욕이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성급한 청산의 배후라는 점에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있다. 시민사회의 역사적 자긍심의 상징처럼 코드화된, 그러한 집단기억의 표상인 숭례문에 한 시민이 불을 지른 것처럼, 시민사회는 자기 존재의 자긍심을 너무 쉽게 시장의 탐욕으로 교환하고자 하고, 그 어느 곳에도 자기 애도는 빠져 있다. 애도 없는 청산이 포스트민주화의 시점에서 표류하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래도 우리에게 미래는 있는가? 많은 비판가들이 곤혹스럽게 추정하는 재앙의 가능성은 미래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러한 미래의 단절에 대한 단절은, 이제라도 민주주의에 대한 애도 작업을 요청한다. 그 시간이 지나버린 것에 대한 슬픔과, 그 제도적 유산에 대한 기억, 이 기억의 계승을 향한 상상이 요청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