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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포스트휴먼과 민중신학, 어떻게 만날까

이 글은 서울대-한신대 포스트휴먼 연구단이 주최하고 한신대학교 종교와 과학 센터가 주관한 제12회 포스트휴먼과 종교 포럼(2018.09.17. 주제: 포스트휴머니즘, 종교와 과학, 그리고 민중신. 학장소: 경동교회)에서 발표된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글은 [웹진 제3시대] 138호(2018. 09. 06)에 실렸다. 제12회 포스트휴먼 종교 포럼에는 나와 함께 이상철 목사도 발제하였는데, 이상철 박사의 글 제목은 <포스트휴먼과 고통의 해석학 - 포스트휴먼 시대에서 민중신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아니 무엇을 말해야 하나>이다.

그렇게 발표된 두 글을 포함해서 이 포럼 때 발표되었던 글들을 엮은 책이 발간되었다. [인간 너머의 인간 - 포스트휴먼 시대의 신, 인간, 자연](사월의 책, 2021).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2951013 

 

인간 너머의 인간

인공지능의 등장, 인류세의 그늘을 성찰하는 21세기 포스트휴먼 사유의 최전선을 읽는다. 이 책은 현실로 다가온 인공지능과 포스트휴먼 시대의 실상을 이해하고 다채로운 포스트휴먼 사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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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과 민중신학, 어떻게 만날까

 

 

 

포스트휴먼 논의와 관련하여 민중신학의 관심은 그러한 논의가 함축하고 있는 변화된 사회에서 누가, 어떻게 배제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배제의 질서에서 해방의 신학적 상상력을 어떻게 펼 것인가에 있다. 1970~80년대 유럽과 북미의 담론시장을 뒤흔들었던 포스트모던 담론에 한국이 휩쓸리게 된 것은 1990년대였다. 그 무렵 유럽과 북미에선 포스트모던의 담론 장악력이 시들해지고 신상품으로 포스트휴먼의 물결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이 지식의 신상품이 한국에선 2천 년대 들어와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듯하고, 그 무렵 윌리엄 깁슨(William Ford Gibson)의 이른바 사이버펑크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가 한국어로 번역(2005)되면서 대중의 관심도 급증했던 것이 기억된다. 한국의 포스트휴먼류의 소설들이 다수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각주:1]또 포스트휴먼적 문제제기를 담은 헐리웃 SF영화들인 토탈리콜(1990. 이하 한국개봉), 터미네이터2(1991), 블레이드러너(1993), 가타카(1997), 매트릭스(1999) 등이 1990년대에 한국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비디오시장에서 매니아 집단의 열광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공각기동대도 그 무렵 널리 회자되었다.

이런 논문들과 영화, 소설들 중 다수를 이미 그때부터 꽤 관심 있게 보아 왔음에도, 나의 둔감함에 스스로 놀란 것은, 전철 선생으로부터 발제를 요청받은 이후 부랴부랴 포스트휴먼에 관한 기사 몇 편과 논문 두어 편을 읽은 뒤에야, 1990년대의 파편적 기억들을 비로소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내가 무지한 건 맞지만 무관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급하게 발제 글을 써야 하는데 그나마 집중해서 공부할 시간은 별로 없고 1990년대 이후 20년 가까이 이 분야 지식의 업데이트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터라, 꼼수를 부리기로 했다. 1990년대의 기억의 편린들을 되새기며 준비하되, 특히 영화 한 편에 기대어서 생각을 펼치는 것이다. 2006년에 개봉되었던 박찬욱의 영화 사이보그라도 괜찮아가 그것이다. 실은 이 영화를 보았을 때 글 하나를 쓰고 싶었고, 그 주제가 요즘의 표현으로 하면 포스트휴먼과 민중신학쯤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90년대 말경 나를 열광시켰던 공각기동대도 비슷한 주제로 나를 책동시켰던 것이어서, 사이보그라도 괜찮아와 함께 이 영화도 이번에 다시 보았지만 둘을 함께 다루려면 좀 더 시간과 지면이 필요할 듯하여 공각기동대〉에 관해서는 기약 없는 훗날로 미루기로 했다.

귀동냥하며 들은 포스트휴먼에 관한 얘기 중 내게 부정적인 기억을 자극한 것은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책 포스트휴먼의 저자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의 견해다. 기술결정론적 낙관주의에 빠지지는 말되(트랜스휴머니즘),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일종의 제도적 성찰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포스트휴먼담론의 필요성을 강변하는 것이다. 귀동냥한 것으로 이렇게 무책임한 인상비평을 남발하는 것이 심히 무뢰한 것이기는 하지만, 진정 그렇기를 기대하지만, 만약 나의 지적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면, 오래 전 읽으면서 비슷한 문제의식에 빠졌던 다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의 에세이 사이보그 선언(“A Cyborg Manifesto: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각주:2]을 떠올린 것도 일정한 타당성을 가질 것이다. 해러웨이의 에세이가 발표된 지 십여 년이 지나 저술된 캐서린 헤일스(Katherine Hayles)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1999)[각주:3]도 이 점에서 같은 계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공히 기술문명시대의 타자성의 표상인 사이보그가 실은 우리들 자신임을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가 곧 타자이기도 하며,[각주:4] 그런 점에서 사이보그라는 존재해석은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간극을 해체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멋진 해석은 사이보그의 타자 체험을 낭만화하고 있다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이 나온 뒤 몇몇 미술작가들은 자신의 몸에 사이보그-퀴어를 체현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프랑스의 미술작가 올랑(Orlan. 작가명)1990년부터 십여 년간 자신의 얼굴에 9번의 성형수술을 온라인으로 생중계하는 성 올랑의 재탄생(Reincarnation of Saint Orlan)이라는 이름의 퍼포먼스는 과학기술을 통해 미인으로 만들어지는 사이보그화 과정의 피로 얼룩진 기괴한 수술 장면에서 아름다움과 흉물스러움, 행복함과 고통스러움의 이분법적 경계를 해체하는 작가주의적 메시지를 전 세계에 타전했다. 특히 7번째 수술에서는 이마 좌우에 염소 뿔과 같은 혹을 만듦으로써 백인여성이라는 자신의 휴머니티를 해체하고, 인간이자 염소인 포스트휴머니티를 구현해냈다.[각주:5]

이 충격적인 퍼포먼스의 기괴한 영상을 본 수많은 이들은 올랑에게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다. 그것은 그녀의 사이보그성이 퀴어적 기괴함으로 읽혀졌음을 보여준다. 한편 그녀의 사이보그-퀴어 체현의 메시지에 열광적으로 동조하는 현상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하여 그녀의 수술집도의들의 유니폼으로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들의 협찬이 줄을 이었고, 피 묻은 수술도구와 거즈 등이 값비싼 예술작품으로 팔리는 현상을 야기시켰다. 수많은 비평가들의 찬사와 함께.[각주:6]

그런데 올랑의 충격적인 성형 퍼포먼스는, 그러한 언캐니(uncanny) 이미지까지 상품화하는 소비사회의 문화논리에 포획된 듯이 보인다. 소비사회의 외모 집착증에 대한 올랑의 언캐니 미학에는 근대 휴먼적 편견이 해체되고 포스트휴먼적인 새로운 주체의 등장을 선언하는 아포리즘이 넘쳐나지만, 그러한 아포리즘을 소비하는 소비사회의 수많은 대중은, 성형하는 이들의 서사, 그이들이 겪고 있는 폭력적 체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 성형 퍼포먼스를 비난하든 동조하든, 대개의 사람들은 성형에 얽힌 이들의 이야기에는 무관심하고 작가의 퍼포먼스만을 주목한다. 요컨대 여기에는 자신이 사이보그적 타자가 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성형수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들의 고통은 낭만화되어 있는 것이다. 비판적 아포리즘을 소비하되 그것이 사회적 질서의 해체를 향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서동진은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몸의 미학을, 저항적이지도 전복적이지도 않은, 후기자본주의적 자기재생산의 논리에 다름 아니라는 비판을 가한다.[각주:7]

바로 이 점에서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해러웨이, 헤이스, 브라이도티, 그리고 올랑의 것과는 대조되는 텍스트다. 이 영화에서 자신이 사이보그라고 생각하는 영군(임수정이 연기함)은 정신병원에 있다. 이곳은 온갖 기괴한 타자들의 집합소다. 그녀는 사이보그이기 때문에 밥을 먹지 않으려 하고 대신 사이보그가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방식인 건전지를 입으로 빨거나 손가락에 접속시키곤 한다. 그녀는 사이코시스(정신질환자)인 동시에 거식증 환자인 것이다.

 한데 이 영화는 도처에서 그 이면에 숨겨진 네러티브를 연상시키는 암시들을 던져주고 있다. 그것을 종합하면 이렇다.[각주:8] 영군은 라디오공장의 노동자였다. 공장의 노동과정은 세분화된 조립공정 속에 노동자를 그 부속기계의 일부로 환원시킨다. 하여 영군은 공장에서 이미 사이보그였다. 하지만 영군의 이야기는 공장 노동자-사이보그 스토리로 환원되지 않는다.

 

 

영군은 집에서 할머니와 유난히 친밀하다. 그런데 할머니는 자신을 쥐와 동일시한다. 쥐라는 존재는 집안에서 가장 대표적인 퀴어적 타자다. 할머니는 그런 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당신도 쥐처럼 무를 갉아 먹는다. 한데 노인의 허약한 이로는 그것을 할 수 없다. 하여 할머니는 무를 갉아 먹을 때 틀니를 끼워야 한다.

할머니가 쥐와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에서 우리는 쥐처럼 철저히 타자화되었던 혹독한 시집살이를 연상할 수 있다. 그것을 시사하는 암시적 설정이 칠거지악이라는 표현이다. 영군은 사이보그인 자신의 금기사항으로 스스로 정한 7가지 항목(동정심, 슬픔에 잠기는 것, 설레임, 망설임, 쓸데없는 공상, 죄책감, 감사하는 마음)사이보그 칠거지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여성을 규율하는 장치인 유교적 칠거지악의 패러디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를 엄마와 이모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집안은 할머니-영군과 엄마-이모로 양분되어 있는데, 후자는 경제적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이고 전자는 그들에게 예속된 세력이다. 지배세력의 표상인 엄마와 이모는 하얀맨들(정신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을 불러서 할머니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할머니는 틀니를 끼지도 못한 채 끌려갔다. 하여 할머니는 밥을 먹을 수 없다. 영군은 자전거로 사력을 다해 좇아가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해서 영군은 할머니의 틀니를 가지고 있게 되었다. 영군이 틀니를 보관하고 있는 것과 그녀가 거식증에 걸린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할머니가 쥐와 자신을 동일시한 정신병자였다면 영군은 사이보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쥐와 사이보그는 할머니와 영군이 자신들을 타자화하는 기호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하지만 왜 쥐이고 사이보그인지는 그들 각자가 타자화되는 다른 체험의 산물이다. 아무튼 영군은 사이보그가 되었고 거식증상을 보인다. 그것은 그녀의 공장 체험과 가족 체험의 폭력성이 중첩된 결과다. 과학의 발전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적 질서와 혈연적 친밀성에 기반을 둔 가부장적 질서가 내포한 폭력성은 그 구성원들에게 때로 이렇게 치명이다.

민중신학은 포스트휴먼 시대에 타자화된 민중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떻게 배제되고 있는지를 주목한다. ‘사랑이니 환대니 하는 아포리즘이 흘러넘치는 후기근대사회에서 민중신학이 주목한 것은 바로 그 아포리즘으로 인해 낭만화되고 은폐된 고통이다. 과거 권위주의적 산업화 시대를 표상했던 격리와 감금의 체제는 노골적인 폭력들로 물든 고통이 넘실댔다. 한데 후기근대사회는 우리 주위 도처에 산재해 있음에도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의 현실을 아무도 모른다.’[각주:9] 이때 이 모름의 체계를 부드러운 야만이라고 하고, 그것은 사랑이니 환대같은 아름다운 말들과 함께 작동한다. 한편 이런 아름다운 말들 외에도 또 다른 것이 있다. 근대적 이분법의 해체 등과 같은 포스휴먼적 아포리즘도 부드러운 야만의 양식으로 작동될 수 있다.[각주:10]

그렇다면 포스트휴먼 시대의 배제에 대한 민중신학적 해방의 상상력은 무엇인가? 다시 영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를 살펴보자. 여기서 비(정지훈)가 연기한 일순이라는 정신질환자가 주목된다. 영화에서 그를 표상하는 용어는 훔치심이다. 그는 엄마가 떠났다는 상실감 때문에, 자신이 그 속에서 오그라들어 소멸될지 모른다는 착란에 빠진 이다. 하여 그는 그 비워버린자신을 채우기 위해 남의 속성을 훔쳐 전유한다. 타인의 것을 훔쳐 그것을 그이보다 넘쳐나게 자기화한 후 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것을 훔침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의 이런 행동이 반사회적인 것임을 표상하고 있지만, 달리 이야기하면 그의 몸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의 신체에 유기체성을 부여하는 코드가, 정신병자인 일순에게는 해체되어 그의 몸은 그러한 유기체성에서 해방된 것이다. 남의 특성을 훔쳐 그것으로 자기를 채우는 순간 그는 그 타자로 되는 것이다.’(becomimg the other)

그런데 일순의 타자되기, 들뢰즈를 열호했던 한국의 많은 수용자과는 달리, 멋진 개념으로만 실재하는 아포리즘이 아니다. 그것은 영군과의 관계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일순은 영군이 가지고 있는 할머니의 틀니를 훔쳐 할머니 되기를 한 후 영군에게 돌려준다. 그런데 그 훔침과 돌려줌에서 그는 할머니의 틀니가 영군의 거식증과 겹쳐 있음을 직감한다. 자신이 비워져 있기에 타인의 것을 전유하는 순간 놀라운 교감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교감은 그가 자본주의적 근대의 질서 코드가 잘 작동되지 않는 비어 있는 주체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여 영군과 할머니의 교감적 연대처럼 영군과 일순 사이에도 교감적 연대가 일어난다. 그러나 영군-할머니의 연대가 배제 체험의 연대라면, 영군-일순의 연대는 그러한 질서에서 이탈하는 해방의 연대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영군과 할머니(틀니) 사이에 일순이 끼워드는 순간 배제를 작동시켰던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적 배제의 메커니즘이 교란을 일으킴으로써, 해방의 연대가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차이가 공유되는 순간 서로를 승화시키는 연대가 발생하고 그 연대는 차이를 억압하지 않는 아이리스 영의 무지개 연합같은 것이 해방의 연대가 영군과 일순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다.[각주:11]

그것은 거식증의 해소로 나타난다. 일순은 영군에게 음식을 전기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장치를 장착하는 포스트휴먼적 제의를 통하여 영군이 밥을 먹게 한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라는 수수께끼는 영군에게 밥을 먹게 하는 과정에서 일군의 말에서 그 비의가 드러난다. ‘사이보그지만 밥 먹어도 괜찮아이다. 이것은 일종의 구원을 선포하는 예배 언어처럼 영화 속에 배치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영군과  일순의 교감과 해방의 과정은 포스트휴먼적 민중신학의 종교적 예전의 서사로 구성된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한가. 예배는 일상이 아니다. 예배는 삶을 퍼포먼스로 보여주는 예외적 체험의 서사다. 그러므로 예배는 일상의 실천으로 구체화되어야 삶이 된다. 그런데 배제로부터의 해방 체험은 가해자에 대한 복수를 수반한다. 문제는 그것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데 있다. 여기에 종말론이 끼어든다. 현실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좌절된 해방은 모든 시간을 중단시키고 모든 합리성이 제거된 공간이 작동하는 순간의 도래를 통해야만 실현될 수 있다. 종말론이 증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로 돌아가 보자영군이 일순과 교감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면서 그녀는 거식증에서 해방된다하여 이 공동체의 해방의 기억에는 틀니가 제거된 할머니먹지 못하는 할머니의 고통이 상징적으로 해소된다.

 

 

 

그런데 많은 비평가들은 이 영화가 망상 속에 눌러앉아 버린 해방의 공허함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한다.[각주:12] 실제로 기독교를 포함한 숱한 종교들의 의례는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아편 같은 종교성의 한계를 드러내왔다. 하지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과 일순은 예배 의례의 망상적 체험에서 그치지 않는다. 영군은 자신과 할머니에게 깊은 고통을 유발시켰던 공장과 가정의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제적인 폭력의 질서에 대해 복수를 기획한다.[각주:13] 일순과 핵폭발 프로젝트를 도모한 것이다. 병원의 이동식 링거대에 연결한 라디오안테나로 번개를 받아 10억 볼트의 전기를 만들어 핵폭발을 도모한 것이다. 사제복처럼 보이기도 하고 투구로 보이기도 하는, 해드라이터를 장착한 우비(雨備)를 입고 십자가처럼 보이기도 하고 로마군대의 깃발꽂이 같기도 한 안테나를 쥐고 번개를 기다리는 장면은 마치 최후의 메시아 도래를 예배하는 사제 같기도 하고 혹은 최후의 전투를 대비하는 병사 같은 비장한 모습이다. 하지만 감독 박찬욱은 인터뷰에서 그 장면을 소꿉장난처럼 묘사했다고 말했다.[각주:14] 천진난만한 허황된 불장난 같은 것이다.

사실 민중의 복수극은 대개 그렇다. 세계의 질서를 관장하는 중심에서 시스템을 운영하고 해석하며 서사화하는 이들은 민중의 기획을 늘 허황된, 현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실제로 민중의 복수 기획은 대부분 성공하기엔 턱도 없다. 영군과 일순도 핵폭발을 도모하지만 이 기획이 성공할 리 없다. 그런 점에서 은유로 가득한 이 영화는 잔인하리만큼 리얼하다.

프랑스 좌파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엘리트가 권력을 독점하는 아르케의 정치(politics of arche)를 대체하는 데모스의 정치(politics of demos)를 제시했다. 하여 그의 데모스의 정치론은 합리주의에 기초한 정치철학이다. 하지만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합리적 상상력으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오클로스의 정치(politics of ochlos)를 꿈꾼다. 그래서 그의 정치학은 종말론을 필요로 한다. 즉 안병무의 오클로스 정치론은 종말론적 정치신학인 것이다. 영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속의 정신병자들의 소꿉장난 같은 복수처럼, 오클로스는 여전히 세계를 변혁할 자원도 계산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심지어 그 세계의 질서 속에서 몸과 마음이 중병에 걸려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병은 그의 언어를 앗아가곤 했다. 민중은 병에 걸려 있고, 그 병은 사회적인 해석 체계 속에서 작동된다. 하여 민중은 자기의 언어로 그 질병을, 질병의 고통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가야트리 스피박의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는 명제가 안병무에게선 민중의 실어증으로 표상되었고 서남동은 민중의 한()이라고 말했다. 실어증이라고 하든 한이라고 하든, 오클로스 민중의 왜곡된 체험이 현재의 표상체계로 재현되는 것은 극도로 어렵다. 하여 안병무의 오클로스 정치의 꿈은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하다.

바로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과 일순의 복수 기획도 그렇다. 하지만 그들은 그 실패의 순간에 완전 나체로 하나가 되어 연대한다. 어떠한 매개도 없는 결합이다. ‘5.18’ 연구자인 최정운은 1980521일부터 27일까지의 빛나는 8을 모든 차이가 해소된 평등의 해방공동체라는 의미에서 절대공동체라고 불렀다.[각주:15] 영군과 일순의 나체 상태의 결합은 그러한 절대공동체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바울은 그런 차이가 해체되는 비전의 공동체를 에클레시아라고 불렀다. 그 순간 하늘엔 무지개가 펼쳐진다. 세계는 완전충전 상태가 된 것이다. 상징적 사건이 기적처럼 그들을 감싼다. 이렇게 그들은 공동체로서 종말을 선취한다. 즉 민중신학의 오클로스적인 종말론적 해방의 정치는 결코 현실 세계에선 그 절대적 해방을 구현하지는 못하지만 그 잠재태를 선취함으로써 현실에서 해방을 맛보며 실천하는 동력을 담아낸다. 민중신학이 포스트휴먼 세계에 개입하는 해방의 정치는 바로 이런 신학운동을 통해 드러난다.

  1. 노대원, 〈한국 문학의 포스트휴먼적 상상력―2000년대 이후 사이언스 픽션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비교한국학》 23/2(2015.8) 참조. [본문으로]
  2. 이 에세이는 Socialist Review no. 80(1985)에 처음 발표되었고, 1991년에 출간된 책 Simions, Cyborgs and Women에 수록되었다. 이 책은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동문선, 2002)다. [본문으로]
  3. 한국어 번역판은 2013년(열린책들)에 발간되었다. [본문으로]
  4.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는, 유기체와 기계의 잡종적 신체를 가진, 기술문명시대의 오염된 타자성의 표상이라고 본다. [본문으로]
  5. https://www.slideshare.net/guest3bd2a12/the-reincarnation-of-saint-orlan-presentation. [본문으로]
  6. 마정미, 〈포스트휴먼과 탈근대적 주체에 관한 연구〉, 《인문콘텐츠》 13(2008.11), 205~207 참조. [본문으로]
  7. 서동진, 〈가관 없는 신체 혹은 신체 없는 기관―신체의 재현과 그 위기〉, 《문학과 경계》 12(2004). [본문으로]
  8. 이하의 내용은 이 영화에 대한 《씨네21》(2007.1.4.)에 실린 황진미의 비평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밝힌다. [본문으로]
  9.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바로 그러한 부드러운 야만이 작동되고 있는 일본사회에서 야만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본문으로]
  10. 태혜숙,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여이연 2001) 참조. [본문으로]
  11. 장미경, 〈페미니스트 근대론자들―낸시 프레이저, 아이리스 영, 앤 필립스를 중심으로〉, 《경제와사회》 43(1999) 참조. [본문으로]
  12. 《씨네21》(2006.12.19.)에 실린 이 영화에 대한 평론가들의 글 참조. [본문으로]
  13. 영화평론가 변성찬은 이 영화를 홍보포스터의 메인카피 문구와는 달리 ‘사랑’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복수’에 관한 또 다른 버전이라고 말한다. 《씨네21》(2006.12.19.)에 실린 변성찬의 글 참조. [본문으로]
  14. 《씨네21》(2006.12.19.)에 실린 박찬욱의 인터뷰 참조. [본문으로]
  15.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풀빛, 1999)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