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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로 인한 구원체험

[경향신문] 2018.12.30자 '사유와 성찰' 코너에 실린 컬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228205901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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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한 구원체험

 

지금은 사라진 방위병이라고 불렀던 보충역의 단기사병이 탈영을 하면 군부대의 서류에서 분실로 보고되었다고 한다. 병사가 아니라 군대의 비품으로 관리되었다는 얘기다. 향토사단이나 예비군중대 및 동사무소 등에서 복무하는 병사였고 현역병보다는 적지만 월급도 지급받는 실재하는 군인인 동시에 인격체가 아니라 비품으로 간주되는 모호함이 그들의 존재였다는 얘기다.

24살에 노동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김용균 씨는 충남태안화력발전소의 석탄설비운전 업무에 배치된 노동자였다. 한데 그는 이 발전소의 정직원이 아니라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이라는 중소기업의 직원이다. 더욱이 그는 계약직노동자, 그러니까 비정규직 노동자다. 이 분야 경력이 불과 3개월도 안 된 비숙련 노동자인 그는, 과거에 원청기업의 정규직인 숙련공 2인이 맡았던 일을 홀로 감당하다 사망한 것이다.

작업환경은 매우 열악했다고 한다. 어둑어둑한 조명과 자욱한 석탄가루에 통로가 잘 보이지 않은 데다 곳곳에 장애물이 있어 점검 작업을 신속하게 진행할 수 없음에도 많은 업무량을 감당해야 했기에 노동자들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야 했다고 한다. 하청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원청기업이든 하청기업이든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고당일 사건이 고용노동부에 보고된 그 시각 작업 중지명령에도 불구하고 발전소 측은 설비 재가동 작업에 들어갔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당연히 누려야할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이 발전소의 운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던 업무에 종사하는 노동자였지만 그의 실제적인 자격은 발전소의 비품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케빈 베일스(Kevin Bales)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크게 증가하고 있는 비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일회용인간(disposable people)이라고 부르면서, 이러한 시스템을 현대판 노예제의 한 양상이라고 해석했다. 즉 인간을 소모품으로 전락시키는 시스템의 극대화를 통해 현대의 노예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들이 주도한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비용절감을 절대이념으로 격상시켰다. 이 이념에 따라 기업들이 노동자의 고용보호에 관한 표준법규들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비정규 고용(non-regular employment)이 활용되었다. 또한 외주화(outsourcing operation)를 통한 간접고용(indirect employment)은 이를 더욱 심화시켰다. 원청기업은 하청기업에게 고용에 관한 책임을 떠넘김으로써 비용을 절감했고, 재무구조가 열악한 하청기업은 비정규 고용을 남발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했다. 이것은 숙련된 노동자를 사라지게 했고 더 많은 위험의 가능성을 야기시켰다. 이 위험 가능성에 가장 심각하게 노출된 이들이 하청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바로 24살의 김용균 씨가 죽음으로써 비로소 문제로 부각된 위험의 외주화가 그것이다. 이렇게 해서 죽거나 부상당하면 거의 아무런 보상도 없이 소모품으로 처리되는 이들, 그들이 바로 현대판 노예인 것이다.

김용균씨 사건으로 비용절감 이데올로기 아래 구조화된 존재 파괴적 기업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이에 힘입어 정부가 김용균법이라는, 원청기업이 하청기업 노동자의 위험예방과 사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골자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어제 국회를 통과했다. 자유한국당의 저항으로 애초 정부 입법안에서 적잖이 후퇴한 것이어서 그 실효성이 걱정되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소모품화를 억제하려는 사람 중심 사회론이 모처럼 성과를 냈다는 점에서 현 정부의 노력에 긍정적 평가를 내릴 만하다.

하지만 올해 내내 사람 중심 사회로의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제도 안팎에서 반대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정부가 이번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탓도 있어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정부의 변화된 태도는 김용균 씨의 죽음이 일으킨 파장의 결과로 보인다. 그 사건에 시민사회가 반응하고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정부를 움직인 것이라는 얘기다.

대속이라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적 적폐처럼 간주되는 교리, 그것의 개념적 뿌리에는 어떤 이()의 고통에 직면해서 그것에 공감하는 이들의 성찰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된다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 나는 김용균 씨 사건에서 그 원초적 믿음의 현상을 재발견할 수 있었다. 김용균 씨로 인해 우리는 고통당하는 이들을 공감하는 노력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간 무감각하게 살던 우리가 구원받는 자의 대열에 서게 되는 체험이며, 그 덕에 2018년을 마감하면서 우리가 받은 하나의 구원체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