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8년 2월22일에 열린 제2회 외국어대학교 법학연구소 종교와 법 센터 학술대회 '기독교와 법'에서 발표된 글을 수정보완해서 [외법논집] 특별호(2018 5)에 기고된 것입니다.


새로 보탤 내용이 있네요. 조금 전 외대 법대 종교와 법 센터 소장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2018.04.23), (1) [외법논집] 편집위원회에서 논의한 결과 법학논문이 아니니 게재를 못하게 되었다는 것, (2)대신 센터가 펴낼 단행본에 싣는 걸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글이 학술지에 실리는 것에 탐탁지 않아서 애초에 게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전한 바 있기에, 조심스레 말씀하신 소장님께 아쉬움도 유감도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되었고요. 학술지는 그 분야의 연구업적이 필요한 분이 기고하고, 그 분야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이 그것을 읽고 참고하는 매체일 듯합니다. 그런 관련성이 전혀 없는 제 글이 여기에 실리면 필경 아무도 읽지 않는 천덕꾸러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름 소중하게 쓴 글인데, 태어나자마자 사망신고하는 것이 아쉬워서 게재를 꺼려했던 것이지요. 아무튼 다행입니다. 센터가 만드는 단행본에 실어도 되느냐는 소장님의 말씀에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그러니 위에서 이 글을 [외법논집]에 게재한다는 앞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게 되었음을 밝힙니다. 다른 출처는 추후 공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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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력세습과 후발대형교회

신귀족주의적 권력의 종교적 장치에 관하여

 

 

 


 

 

현황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교회세습의 문제적 전형을 보여준 원형적 사례로 충현교회의 담임목사 세습이 꼽힌다.[각주:1] 세습이 단행되던 1997년 김창인은 은퇴한 원로목사임에도 전권을 휘둘러 교인총회인 공동의회를 주도하여, 담임목사 선출 방식을 일반적 관행이던 무기명 투표로 하지 않고 찬반기립의 방식으로 진행함으로써 아들의 담임목사 청빙을 단행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해서 막강한 파워엘리트가 즐비했고 세습 당시 재적 신도수가 35천 명이 넘었으며 2012년 현재 총자산이 2조 원 정도나 될 것으로 추정되는 초대형교회에서 그 모든 것을 법적으로 총괄하는 담임목사가 된다는 것은 거대한 종교권력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후 이 교회에서 벌어진 사태들은 목사의 혈통적 교회세습의 부정적 양상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편법선거로 담임목사가 된 아들과 원로목사임에도 교회 운영에 손을 떼지 못하는 아버지 간의 반목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사태들이 잇따랐다. 취임한 지 3년도 못된 20001월에 담임목사에 대한 테러사건이 발발했고, 그 혐의로 장로 9명이 불구속 입건되어 경찰의 수사를 받았다. 아들목사는 아버지와 그를 따르던 장로들이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단정하면서 원로목사에 대한 교회의 지원을 끊었고 장로 8명과 안수집사 5명을 출교시켰다. 그러나 그것으로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다. 내부고발자 없이는 좀처럼 드러날 수 없는 교회재정의 횡령, 유용 사건들이 폭로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교회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그 결과 교인은 1/3로 줄었다.

물론 목사의 혈통적 세습을 단행한 것에 대하여 그 교회의 교인들이나 외부로부터 긍정적 평가가 더 많은 경우도 없지 않다. 또 정상적 권력교체가 이루어진 경우라고 해서 교회가 잘 운영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혈통적 세습은 교회 안팎으로부터 정당성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충현교회가 혈통적 교회세습의 문제점을 선행적으로 보여준 이후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많은 교회들에서 혈통적 교회세습이 잇따랐다. 특히 주목할 것은 2천 년대부터 많은 중대형교회[각주:2]들에서 혈통적 목사세습이 연이어 단행되었다는 점이다.[각주:3] 물론 혈통적 목사세습은 중대형교회나 초대형교회[각주:4] 현상만은 아니다. 많은 중소형교회들에서도 특히 2천 년대 이후 교회세습이 속출했다.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이하 세반연’)에 따르면 20171110일 현재 143개 교회가 혈통적 세습을 단행했다.[각주:5] 이는 제보된 것을 조사하여 확인된 것에 한정된 숫자인데, 계속 신고를 받고 있어 그 수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감리교세습반대운동연대(이하 감세반연’)20171022일에 발표된 보고서[각주:6]에 따르면 감리교회에서만 세습을 실행에 옮긴 교회가 무려 194개나 된다. 또 이 두 단체들의 자료에다 독자적으로 신고를 받아 만든 뉴스앤조이의 세습지도에는 201813일 현재 350개가 포함되었다.[각주:7]

이렇게 세 기관의 리스트에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고에 의해 접수된 것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 감리교 단체인 감세반연의 경우 세반연보다 세습의 기준을 좀더 폭넓게 적용한 것도 오차를 설명하는 데 있어 참조할 만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세반연“‘교회세습이란 지역교회와 교회 유관기관에서 혈연에 의해 발생하는 대물림을 지칭한다고 규정하면서, 부자세습과 사위세습, 그리고 변칙세습양태인 교차세습[각주:8], 지교회세습[각주:9], 징검다리세습[각주:10] 등을 다루고 있다.[각주:11] 그런데 감세반연한 교역자가 담임자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혈연 및 이해관계에 있는 또 다른 교역자를 담임자로 세우는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동서에게, 조카에게, 형제간에, 그리고 변칙세습으로 사위교차 세습형태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각주:12]세반연조사에 누락된 경우들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그런 교회들은 아직 업데이트되는 중이어서 좀더 많이 포착될 것이 분명하다.

숫자 통계가 아직 완성도가 낮은 탓에 엄밀한 추정은 불가능하지만, 교단별로는 감리교단 소속교회가 가장 많다는 점은 개연성이 높다. ‘세반연감세반연의 자료에다 독자적인 정보를 취합한 뉴스앤조이의 결과에 의하면 전체의 50% 이상이 감리교단에 속한다.[각주:13] 지역별로는 거의 70%에 육박하는 세습교회들이 서울인천경기도 등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각주:14] 규모별 추정은 좀더 어렵지만 교인수 100~500명 사이가 43%, 500~1,000명이 26.1%로 제일 많은 것으로 추산되었다. [각주:15]그러나 이 추정치만으로 100~500명 규모의 교회가 세습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는 단순한 가정은 문제가 있다. 이 자료가 유의미하려면 무엇보다도 전체 교회 가운데 이 규모의 교회들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비교해서 살펴야 한다. 뉴스앤조이의 조사결과로만 추정해보면 혈통적 세습이 가장 심각한 곳은, 100~500명 규모의 교회가 아니라, 대형교회로 보인다. 이 조사에서는 재적인원의 범주를 6개로 나누었는데(100명 미만 / 100~500/ 500~1000/ 1000~5000/ 5000~10000/ 10000명 이상), 이중 대형교회들인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에 속하는 교회들 중에도 대형교회들이 일부 포함되었을 것이다.[각주:16]





해서 대형교회 중 혈통적 세습 교회 숫자 추정치를 [+]+[×1/2]로 계산하면 21 혹은 22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세습교회 전체 숫자인 350으로 나누면, 세습교회 중 6% 정도가 대형교회인 셈이다. 2004년에 추산한 전체 교회 중 대형교회의 비율은 1.7%, 880개 정도다.[각주:17] 한데 2004년 전체 교회수는 51,775개소인데, 2011년에는 무려 77,966개소다. 2005년과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의 개신교 신자수가 약 15% 증가한 반면 문화체육관광부의 2004년과 2011년 조사의 개신교 교회수가 무려 50% 이상 증가했다는 것은 전체 교회 대비 대형교회의 비율이 1.7%보다 훨씬 낮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혈통적 세습 현상이 대형교회에서 압도적으로 많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2천 년대 이후 혈통적 교회세습 현상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2) 교회세습이 가장 극심한 곳은 수도권이다. (3) 대형교회가 중소형교회보다 더 세습 현상이 심각하다. (4) 교파별로는 감리교단에서 더 혈통 세습의 문제가 심각하다.

 


해석

 


말했듯이 2천년 어간 이전까지 교회세습은 별로 주목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1997년 충현교회를 시발점으로 하여 2천 년대 이후 특히 여러 대형교회들에서 세습이 단행되자 개신교계 안팎에서 이 문제는 핫한 이슈가 되었다. 그런데 왜 2천 년대인가? 이것이 첫 번째 논점이다.

우선 혈통적 교회세습을 단행한 교회는 전체 교회 중 0.5% 이하로 추산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밝힌 개신교 교회는 2011년에 77,966개소다. 여기에는 군소교단들을 제외한 118개 교단의 교회만 포함된다. 그러니 실제 교회수는 좀더 많을 것이다. 또 최근 개신교 교인 수는 증감을 반복하고 있지만, 교회수는 모든 통계에서 거의 예외 없이 증가 추세에 있다. 그러므로 20181월 현재 교회수는 2011년 문광부 집계보다 훨씬 클 것이 분명하다. 한편 혈통적 교회세습을 단행한 교회는 현재까지 최대 350개소다. 교회 세습을 다루는 세 기관이 계속 신고를 받고 있으니 이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성교회 세습 사태 직후 신고건수가 갑자기 크게 늘은 것을 감안하면[각주:18] 이후에는 증가폭이 줄어들 것이 예측된다. 그런 점에서 35077,966으로 나누어 계산한 0.45% 어간에서 큰 차이는 없을 것 같고, 그것보다 훨씬 높게 잡은 가정치인 0.5%는 아마도 거의 최고 추정치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것은 교회세습이 결코 개신교에서 일반적 현상이 아님을 뜻한다. 그럼에도 세습을 한 교회들이 존재한다. 도대체 어떤 교회들이 세습을 하는가? 김동호 목사는 목사가 힘이 센 교회는 목사가 절대군주처럼 교회에 군림하고 하나님을 빙자하여 제 마음대로 교회를 주무르고 있다. 심지어는 그것을 자식에게 세습까지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각주:19] 즉 목사가 교회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한 경우 그가 의도하면 혈통적 세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근데 그 비율은 0.5%, 2백 명의 1명꼴이 못 된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목사가 교회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경우도 있으며, 세습을 하지 않은 99.5% 이상의 교회들 가운데는 세습을 할 수 있을 만큼의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음을 시사한다.

김동호는 이 발제글에서 그런 교회를 묘사하기를 장로가 더 힘 센 교회라고 말한다. 이것은, 교회를 교회정치의 차원에서만 보면, 목사와 장로 사이의 주도권 경쟁의 장이며 그 싸움에 끼어든 다른 주체는 별로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하나 더 얘기하자면, 힘이 한 편으로 명확하게 기울어지기보다는 양자가 담합한 경우가 있겠다.

여기서 목사 대 장로의 상호견제를 강조하는 교회제도는 장로교 계열[각주:20]의 교회정치제도다. 이것은 당회를 둘러싼 주도권 경쟁으로 나타나는데, 당회는 담임목사와 장로로 구성되어 있는 장로교 계열 교회의 사실상의 최고 정치기구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의 상징적 중심인 목사와 사실상의 교회의 고용주인 장로가 당회 안에서 헤게모니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로교 목사인 김동호의 장로교식 교회정치에 관한 해석은 한국개신교 일반의 현상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장로교 계열 교회의 교인수가 한국개신교 교인의 69%나 되기 때문이다.[각주:21] 그뿐 아니라, 한국의 다른 교단들도 장로교식 장로제도를 부분적으로 혹은 거의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감독제 교회들인 감리교와 성결교, 회중교회 전통의 교회인 침례교, 그리고 카리스마적 리더의 독점적 지배를 강조하는 오순절계열(순복음계열)의 교회도 장로교식 장로제도를 수용하는 등, 많은 교단들이 장로제 제도를 부분적 혹은 전면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는 거의 모든 교단들이 특권적 신자의 영향력을 제도적으로 반영한 결과겠다.

목사의 권력이 더 강한 교회들을 보여주는 두 번째 요소는 담임목사의 교회 재직 기간이 매우 긴 경우다. 파송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감독제 계열의 교회들이든 청빙제도를 강조하는 장로제 계열의 교회들이든 1970년 어간 이전까지는 그 교회의 재직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 이후에는 20년 이상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재직하는 이들이 많았다.[각주:22] 이런 교회들은 대개 담임목사의 자원 독점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 성공한 덕이다. 또 거꾸로 목사가 가용자원을 독점하고 그것을 성장에 집중 투여한 결과가 교회성장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도 있다.[각주:23] 그 시대가 자원 독점을 통해 성공을 이룩했던 권위주의 시대였다는 점은 권력의 집중과 성장이 서로 맞물리게 되는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각주:24]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장기간 재직-자원의 독점-교회 성장의 연결고리가 뚜렷한 교회들에서 더 많이 혈통적 세습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세습의 두 가지 조건에서 우리는 2천 년대인가에 대한 하나의 개연성 있는 답을 얻을 수 있다. 1960~1990년 사이의 시간성, 그러니까 장기간 재직-자원의 독점-교회 성장의 연쇄고리가 일종의 시대정신이자 시대의 문법이던 시기에 그 핵심에 있던 담임목사들이 속속 은퇴하게 된 시기가 바로 2천 년대 전후, 특히 직후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절에서 다루는 두 번째 논점은 교회세습이 수도권에 집중된 이유에 관한 것이다. 위에서 한 교회에서 양적 성공을 이룩한 이들이 그 교회의 권력을 장기간 독점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여기에는 1960~1990, ‘대성장 시대에 관한 꼭 필요한 논의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장소성에 관한 것이다. 우선 1953년 이후 서울은 수용능력을 초과하는 인구의 집중화 현상, 즉 과잉도시화(over-urbanization)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이 현상은 2000년 어간까지 계속되었다.[각주:25] 이에 대한 국가의 대책은 두 번에 걸친 서울의 공간 확장으로 나타났는데(sub-urbanization), 하나는 이른바 영동지역(영등포 동쪽 지역)의 개발로 서울을 확장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울 외곽의 신도시들을 건설함으로써 광역의 수도권을 만드는 것이었다. ‘영동지역은 훗날 강남 3개구 지역과 강동지역으로 개발되었고, 신도시들 가운데는 강남강동과 인접한 분당신도시와 그 인접지역이 특히 빠르게 발전했다.[각주:26]

이 과정은 대부흥기의 교세 확장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선 과잉도시화 상황에서 개신교는 급성장을 이룩한다. 즉 조용기는 이농민의 대대적인 신자화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대의 대형교회가 되었고, 그의 선교방식을 모방한 많은 교회들도 커다란 성장을 이룩했다.[각주:27] 1970년대~1980년대 중반 경에 탄생한 대형교회들은 대개 이러한 이농민의 신자화와 관련이 있다.[각주:28]

그런데 서브어버나이제이션(sub-urbanization)은 일부 교회의 또 다른 성공의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 경부터 대형교회의 대열에 진입한 교회들은 강남, 강동, 분당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것은 두 번의 걸친 서울의 서브어버나이제이션 과정을 따라 이루어진다. 이중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중반 경 대형교회의 대열에 들어선 교회들에는 강남권에서 지대의 급속한 상승으로 자산이 크게 확대된 이들이 매우 많았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젊었고 대학 이상의 학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좀 더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새신자들, 곧 타종교인이었거나 비종교인이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각주:29] 한편 1990년대 후반 경 이후부터는 강남, 강동, 분당 지역에서 대형교회들이 속속 탄생하였는데, 이때 특기할 것은 새신자의 유입보다는 수평이동신자들의 유입이 이들 교회들의 양적 팽창의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중년층이 더 많았고 학력, 사회적 지위, 자산능력 등에서 대단히 위치에 있는 이들이 많았다.[각주:30]

이제 위에서 언급한, 교회세습이 수도권에 위치한 교회들에서 훨씬 더 많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것은 1960년 이후 규모의 성공을 거둔 교회들이 수도권의 인구 집중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단계에는 이농자들의 신자화, 둘째 단계에는 강남권으로 이주한 젊은 중산층의 신자화, 그리고 셋째는 강남강동분당의 수평이동 신자들을 정착시킴으로 대형교회들이 탄생했다. 그렇게 성공한 교회의 목사들이 2천 년대 즈음 속속 은퇴할 시기가 되었을 때, 그중 일부 교회들은 혈통적 세습을 단행한 것이다.



1970~1980년대 중반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중반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농민의 신자화

강남으로 이주한 젊은 엘리트

강남강동분당으로 이주한 중년 엘리트

새신자

수평이동신자

선발대형교회 유형

 

 

 

후발대형교회 유형




셋째 논점은 대형교회가 중소형교회보다 더 많이 혈통적 교회세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영기는 한국의 초대형교회 13개의 담임목사들의 리더십을 연구하였는데,[각주:31]카리스마 리더십과 초대형교회로의 양적 성장이 깊은 관계가 있음을 분석하였다. 그의 카리스마 리더십은 베버의 용어를 빌려온 것인데, 그것에 관한 종교적, 영적 설명들을 제외하고 사회학적 속성만으로 재설명하면 교회의 가용자원을 독점한 존재다. 그런 존재가 성장을 위해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한 결과 초대형교회로의 성장이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종현은 홍영기의 분석을 수용하면서 대형교회로 성장한 교회들의 1970년 이전과 이후의 담임목사들의 재임기간을 분석한 결과, 흥미롭게도 1970년대 이후 담임목사들의 임기의 장기화 현상이 뚜렷이 확인되었음을 보여준다.[각주:32] 그는 임기에 대해 하나 더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는데, ‘원로목사제도의 발명이다.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원로목사는 명예직이 아니라 실권자가 지배력을 연장시키는 장치로 작동되었다는 것이다.[각주:33] 이때 혈통적 교회세습은 원로목사로서 교회권력을 유지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대형교회는 목사의 혈통적 세습과 더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논점, 감리교회가 더 많이 교회세습을 한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김동호의 목사가 힘이 더 센 교회라는 말과 홍영기의 카리스마 리더십에 관한 분석, 그리고 박종현의 임기의 장기화’, 이러한 요소가 가장 적합한 교회는 말할 것도 없이 오순절계열의 교회들이다. 그러나 오순절계열의 교회들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20여개의 지교회를, 은혜와진리의교회가 40여개를, 인천순복음교회가 4개를 갖고 있는 등, 권력집중화가 너무 심해서 세습할 만한 교회의 숫자가 별로 없다.[각주:34]

오순절계열의 교단 다음으로, 담임목사에게 강력한 권력을 부여하고 있는 제도를 갖고 있는 교파는 감리교단이다. 앞서 말했듯이 감독제 교회의 대표격인 감리교단은 목사파송 시스템과 교회운영 시스템에서 개별교회의 자율권을 제도적으로 제한하고, 구역회-지방회-연회로 이어지는 피라미드형 교회간 네트워크를 통한 통제력을 제도화함으로써 평신도엘리트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감독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정치제도를 발전시켰다. 하여 교회정치의 핵은 개별교회의 당회가 아니라 연회(감독)와 지방회(감리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는 한국의 감리교회들에도 장로가 존재하며, 그들은 목사파송이나 교회운영에 사실상 깊이 개입한다. 하여 감리교회들은 제도상으로는 파송제도에 따르지만 실제 운영은 청빙제도와 결합된 채 목사가 교회로 파송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종결정권이 목사들의 제도에 있다는 것은 일단 분쟁이 일어나면 목사에게 훨씬 유리한 제도임을 뜻한다.

한데 감리교단의 대형교회들은 구역회지방회연회로 이어지는 교회정치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것은 이들 교회간 수직적 네트워크가 강한 만큼 개별교회가 내는 교부금이 더 많이 필요한데, 그 비용을 조달할 능력이 보다 많은 힘 센 목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대형교회의 비중은 훨씬 더 중요하다. 요컨대 대형교회는 교회 내적으로는 목사의 주도권이 더 잘 작동할 수 있고, 외적으로는 교회정치의 통제력에서 보다 자유롭다. 해서 감리교단의 교회들에게서 혈통적 세습이 더 많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대안 개념

 


개신교 외부의 시민단체들이나 매스미디어들은 흔히 혈통적 교회세습이 한국개신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처럼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이 현상은 전체 교회 가운데 0.5%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예외적 현상이다. 게다가 앞으로 그런 교회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 예상된다. 박종현이 분석했듯이[각주:35] 한 교회에서 장기간 재임한 목사들이 한꺼번에 은퇴한 시기가 2천 년 어간에서 그 얼마 후까지였다. 말했듯이 그들은 교회의 가용자원을 독점했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양적 성공을 이룩한 이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은퇴하고 있고, 그 후임자들은 선임자보다 학력도 높고 다양한 스펙을 갖추었지만 대개 카리스마 리더십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게다가 양적 성장이라는 성과를 이룩할 가능성은 현저히 줄었다. 또한 교인들의 학력은 점점 상승했고, 사회적 지위도 매우 높은 이들이 많다. 과거 목사가 지역 유지였던 시대와는 달리 지금은 그리 존경받는 위상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그러므로 목사가 더 힘 센 교회의 비율은 점점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혈통적 세습을 원한다 하더라도 그것에 성공할 이들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대형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위의 [3]에서 정리한 것처럼, 앞에서 시공간적 변화에 따라 다르게 특성화된 대형교회의 세 범주를 언급했는데, 이중 세 번째 범주는 수평이동한 떠돌이 신자들이 대거 정착함으로써 대형교회에 진입한 교회들을 가리킨다.[각주:36] 이때 수평이동신자는 중년층이 보다 많고 교회에서 주요직분을 경험했던 신자들이 많다. 또 학력이나 사회적 신분, 자산능력도 비교적 높은 층이 많다.[각주:37] 요컨대 이들은 주권의식이 보다 강한 신자들이다. 그들은 교회를 찾아 떠돌아다니면서 여러 목사들의 설교와 교회 프로그램들도 비교검토하고 교회신학적 서적들도 많이 탐독하며 교회 밖의 고급 강좌들을 수강했던 이들이 많다. 그들은 일종의 소비자의 자의식으로 교회를 선택한다.

그러므로 이런 자존성 강한 떠돌이신자들을 유치하고 정착하게 하는 데 성공한 교회들은 그들의 기호에 맞추는 선교전략상의 성공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교회들의 담임목사의 리더십은 어떠할까? 소비자 같은 자의식을 가진 신자들의 기호가 다양한 만큼 목사의 리더십 유형도 단순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과거처럼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이제 시대착오적임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들 떠돌이 신자들은 자수성가형 성장지상주의와는 달리 문화적인 고품격을 추구하는 귀족형의 소비자적 주체로서 교회를 선택, 소비하고자 한다. 나는 이러한 문화적인 귀족적 종교성을 웰빙신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각주:38] 주지할 것은 이런 신앙은 자산, 신분, 학력 등에서 안정계층에 보다 친화적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혈통적 교회세습에 대한 시민사회의 우려와 비판은, 내가 보기에는, 그 센세이셔널한 현상에 집착하다 숲의 문제를 읽지 못한 채 썩은 나무만을 찍어내려고 하는 관중규표(管中窺豹)의 오류가 될 수 있다. 그 대나무구멍()의 바깥에는 99.5%가 넘는 교회들에서 담임목사가 혈통적 세습이 아닌 방식으로 임용되고 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정당한가? 그것은 부당하지 않고 부조리하지 않은가? 그것은 사회적 특권화를 조장하고 공공성을 훼손할 우려가 없는가?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혈통적 교회세습이 아니더라도 권력세습이 횡행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제기인 것이다.

정치학자인 새무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 최소한 세 번의 정권교체가 있어야 민주주의의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가 일어난다고 말한 것처럼,[각주:39] 교회도 기존의 권력을 전도시키는 담임목사 임용이 적어도 세 번 이상 일어나야 권력세습을 지양하는, 사회적 공공성의 장소로서의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나는 권력세습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있다. ‘세반연에 의하면 지역교회와 교회 유관기관에서 혈연에 의해 발생하는 대물림교회세습이라고 표기했다. 그런 점에서 교회세습은 혈통적 세습에 방점이 찍힌 개념이다. 그런데 나는 권력의 대물림에 방점이 찍힌 용어로서 권력세습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창세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이브의 죄의 문제를 공적인 것의 사유화로 봄으로써 ()의 문제를 권력의 반독점이라는 의미로 해석한 바 있다.[각주:40] 즉 권력의 대물림을 해체하려는 신앙적 기조를 안병무는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공의 장소인가 권력의 장소인가? 혈통적 세습을 단행한 교회든 그렇지 않은 99.5%의 교회든 간에 교회가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가, 아니면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바꾸고 사적인 것을 전유하는 자들의 대열에 끼어드는 것을 강조하는 신앙운동 참여하고 있는가?

공의 사유화 운동의 장(field), 그런 권위주의적 소통의 공간이 오늘의 교회라면, 성서에 등장하는 유다국의 개혁군주 요시야 왕의 핵심 슬로건인 산당을 폐하라는 말은 바로 오늘의 교회를 향한 비판신학적 어젠다이기도 하다.[각주:41]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1995년 이후의 대형교회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수평이동을 거듭하던 비평적 신자들과 그들을 유치정착시키려는 교회가 함께 만들어낸 새로운 신앙유형인 웰빙신앙, 권위주의 시대 특유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아닌, 탈권위주의적 리더를 선호함에 따라 혈통적 세습이 점점 더 가능하지 않는 교회 유형을 소환해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후발대형교회라는 이념형적 용어로 규정한 바 있다.[각주:42] 즉 후발대형교회에서는 혈통적 교회세습을 불온시하는 프레임이 통용되는 소통의 장이다. 대신 대형교회 유형 가운데 특권적 신자들의 이해가 더 적극적으로 반영된 교회 양식이 바로 후발대형교회라는 것이다. 한데 이 유형의 교회들에선 공을 사유화하려는 권력의 작용은 없는가, 바로 이 점이 나의 관심거리다.

안타깝게도 후발대형교회에서도 목사 임용에 관한 정보는 신자대중에게 거의 소개되지 않았고 목사 임용 과정에도 참여할 통로가 매우 형식적이다. 반면 특권적 엘리트 신자는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교회의 인사에 관한 것이든 운영에 관한 것이든 충분한 정보를 전유(appropriation)하고 있고 그 과정을 주도하고 있다. 이렇게 특권적 엘리트 신자와 신자대중 간의 정보의 비대칭성과 참여의 비대칭성은, 그들의 사회적 역할에서도 대체로 비슷하게 나타난다. 즉 대형교회의 특권적 엘리트 신자들은 사회에서도 특권적 시민의 위치를 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회에서처럼 사회에서도 정보와 참여에서 특권적 지위와 역할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들의 웰빙적 취향과 행위에 대한 우월감이 특권의 정당화 기재로 작용할 수 있다. 그것은 웰빙적 취향이 특권적 지위의 결과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은폐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에서 교회세습이 아닌 권력세습의 관점에서 교회와 권력에 관하여 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문제제기하고자 했다. 그런데 권력세습이 일으키는 사회적 파급력은 행사되는 권력의 크기와 비례한다. 물론 일상의 권력, 미시적 권력, 내면의 권력도 주목할 필요가 있지만, 권력세습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미치는 사회적 파급력의 문제와 보다 긴밀히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사회의 특권적 엘리트이자 교회의 특권적 엘리트가 즐비한 대형교회는 이 논의의 가장 중요한 현장이다. 특히 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보다는 탈권위적 권위의 리더십으로 특성화될 수 있는 후발대형교회는 특권적 목사만이 아니라 특권적 신자를 이야기하는 데 더 적합하다. 이러한 분석틀 위에서 시민의 직접적 참여의 공간을 찾아내고자 하는 직접민주주의적 상상력과 대응하는 신자대중의 직접적 참여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권력세습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성서 해석을 논하고 교회 제도를 논하며 신자의 사회적 역할을 논하는 탈권위적 공론장을 형성하고자 하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Abstract

 

Succession of Power in Korean Churches’ and ‘Late-stage Mega-churches’:

On Religious Apparatus of the Neo-Aristocratic Group in Megachurches emerged after the mid-1990s

 

 

The recent news articles have suggested that ‘the hereditary succession in Korean churches’ manifests the empowerment of the church in Korean society. This perspective results from the understanding of the phenomenon in terms of the minister-centered power structure of the church. In the case of the megachurches, a senior pastor with charismatic leadership has been in charge for a long period and invested all the available resources of the church into growth; and this charismatic leader often hands the power down to a blood tie. Therefore, the percentage of the hereditary succession in megachurches is relatively higher than that of non-megachurches.

However, the percentage of the churches which succeed power hereditarily is less than 0.5 percent of the entire Korean churches; and its number is likely to diminish gradually in the foreseeable future. In other words, it is obvious that the hereditary succession in Korean churches is an example which indicates the centralized power of Korean churches; but it is not typical but exceptional. Particularly, this atypical manifestation is prominent among the newly emerged megachurches after the mid 1990s.

Therefore, a different approach with a new conceptualization is required to grasp the recent centralized power of Korean churches. It is necessary to recognize the two power groups; not only the power of a senior minister, but also the power of privileged lay elites. These two groups are conflicting and cooperating with each other. The phenomena of the monopoly and oligopoly of power, and the succession came from the relationship between them. By the institutional and discursive mechanism, these two groups prevent the other members from accessing critical information and exclude them from participating in decision making process. This article defines this phenomenon of succession of the monopolized power of the churches as ‘the succession of power in Korean churches.’ One last consideration is that this succession in the churches hinders the social democracy which emphasizes the fair distribution and public function of power.

 

 

 


 

Keyward

 

The Hereditary Succession in Church(교회세습), The Succession of Power in Church(교회의 권력세습), Late-stage Mega-churches(후발대형교회), sub-urbanization of Seoul(서울의 서브어버나이제이션), the privileged ordinary believers(주권신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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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배덕만, 〈교회세습에 대한 역사신학적 고찰〉(심포지엄 ‘교회세습, 신학으로 조명하다’, 2013)(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 문서자료실, http://www.seban.kr/home/index.php?mid=sb_library_document&document_srl=4336&listStyle=viewer&page=2) [본문으로]
  2. ‘대형교회’로 번역된 메가처치(mega-church)는 통상 일요일 대예배에 참석한 성인 교인수가 2천 명 이상의 교회를 지칭한다. 한데 이 글에서 대형교회라고 하지 않고 중・대형교회라고 표기한 것은 조사기관들의 세습교회 규모에 따른 분류항목에 ‘1,000~5,000명’, ‘5,000~10,000명’, 10,000명 이상‘ 등으로 된 탓에 딱히 대형교회라고 단정할 수 없는 교회들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본문으로]
  3. 2001년 감리교단의 초대형교회인 광림교회가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세습했고, 2008년에는 광림교회 김선도의 동생인 김홍도가 담임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금란교회가 아들에게 세습했다. 또 그들의 동생인 김국도가 담임하는 임마누엘교회도 2013년에 아들에게 목사직을 세습했다. 그밖에 강남제일교회(기침・2003), 경향교회(예장고려・2004), 원천교회(예장대신・200), 분당만나교회(감리교・2004), 경신교회(감리교・2005), 대성교회(예장합동・2006), 동현교회(예장합동・2006), 《국민일보》(기하성, 2006), 종암중앙교회(예장개혁・2007), 인천숭의교회(감리교・2008), 계산중앙교회(김리교・2008), 경서교회(예장합동・2010), 대한교회(예장합동・2011), 부천혜린교회(예장합동・2011), 제일성도교회(예장합동・2012), 광명동산교회(예장합동・2012), 왕성교회(예장합동・2012), 성남성결교회(기성・2012), 시은소교회(예장합동・2014), 인천순복음교회(기하성・2015), 안양새중앙교회(예장대신・2017), 명성교회(예장통합・2017) 등등, 수많은 중・대형교회와 초대형교회들에서 혈통적 목사세습이 일어나고 있다. [본문으로]
  4. ‘초대형교회’로 번역된 기가처치(giga-church)는 통상 일요일 대예배에 참석한 성인 교인수가 1만 명 이상의 교회를 지칭한다. 하지만 이하에서는 인용부분을 제외하고는 초대형교회를 따로 분류하지 않고 ‘대형교회’에 포함해서 언급하겠다. [본문으로]
  5. http://www.seban.kr/home/sb_what_map [본문으로]
  6. https://newkmc.modoo.at/?link=3tmk3lo8 [본문으로]
  7. 〈‘세습 지도’ 성복교회・부천성문교회 등 28가 추가〉, 《뉴스앤조이》 (2018.01.03.)[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4202] [본문으로]
  8. 2~3명의 목사가 서로서로 교차하여 아들을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것을 말한다. 해서 쌍방교차세습, 삼각교차세습 등으로 세분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9. 본 교회가 지교회(일종의 분점교회)로 세운 교회로 혈통적 세습을 단행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10. 아버지에서 아들을 건너 뛰어 손자에게로 가는 세습을 말하거나, 혹은 중간에 명목만 있는 목사를 하나 끼워 넣어 물려주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혹은 후자를 ‘쿠션세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문으로]
  11. http://www.seban.kr/home/sb_what_sesub [본문으로]
  12. 주3)의 자료 참조. [본문으로]
  13. 주6) 참조. 그러나 두 기관이 엄밀하게 기준에 맞게 통계 낸 것이 아닌 데다, 그것을 취합한 《뉴스앤조이》의 결과도, 두 기관의 것을 기준상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취합한 것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본문으로]
  14. 같은 자료 참조. [본문으로]
  15. 같은 자료 참조. [본문으로]
  16. 한국갤럽이 한국인의 종교실태에 대한 5차에 걸린 조사결과 보고서인 《한국인의 종교 1984~2014》에 따르면 주1회 이상 일요일 예배 참석률은 2014년의 경우 80%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한국인 종교·신앙의식 조사’에서는 2017년 일요일 대예배 출석률을 76.7%로 집계했다. 이 조사대로라면 5천 명이 재적인 교회는 대략 3,800~4000명이 주일 예배에 참석한다. 또 1천 명이 재적인 교회는 대략 770~800명이 주일 예배에 참석한다. [본문으로]
  17. 김진호, 〈‘웰빙 우파’와 대형교회―문화적 선진화 현상으로서의 후발대형교회 읽기(소망교회, 온누리교회, 사랑의교회를 중심으로)〉, 제3시대그리스도교 엮음, 《당신들의 신국》(돌베개, 2017), 각주2). [본문으로]
  18. 명성교회가 2017년 11월12일 담임목사의 부자세습을 강행하자 JTBC는 11월14일, 27일, 12월7일 세 차례에 걸쳐 비판적 보도를 하고 무수한 오・오프라인 언론들이 앞다투어 집중보도한다. 이후 이 문제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교회세습에 대한 비판적 담론 프레임이 조성되었다. 이에 《뉴스앤조이》는 12월 말에 교회세습 제보를 받기 시작했고, 1주일 만에 70여건의 제보가 들어왔다고 한다. 최승현, 〈‘세습 지도’ 성복교회·부천성문교회 등 28개 추가〉, 《뉴스앤조이》(2018.01.03.) 참조. [본문으로]
  19. 2017년 11월13일 ‘2017년 미래교회포럼’에서 발제한 글 〈한국 장로제도의 반성과 개혁〉(http://reformedjr.com/board05_04/7039) 참조. [본문으로]
  20.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의 한국종교현황 자료에 의하면 전체 개신교 교파는 232개이고, 이중 장로교 계열의 교파는 180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문화와종교연구소, 〈한국의 교세 현황(2011)〉(문화체육관광부 2012), 38~47쪽. [본문으로]
  21.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각 2005년도 교단 총회보고서들을 취합하여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개신교 교인 중 장로교 교인수는 전체의 69%, 성결교는 11%, 감리교는 10%, 기독교침례회는 5%, 순복음계열의 교회는 4%, 기타 1%라고 한다.(http://missionmagazine.com/main/php/search_view.php?idx=365) [본문으로]
  22. 박종현, 〈한국 오순절 운동의 영성―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성과 성장에 대한 시대사적 회고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 82(2008.4), 11~12쪽 참조. [본문으로]
  23. 김진호,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주권교인’의 탄생.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3)〉, 《주간경향》 1265호(2018 02 27) 참조. [본문으로]
  24. 위의 박종현의 글, 12쪽. [본문으로]
  25. http://study.zum.com/book/12468 참조. [본문으로]
  26. 이에 대하여는 한종수・계용준・강희웅, 《강남의 탄생―대한민국의 심장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미지북스, 2016), 1・4・7장 참조. [본문으로]
  27. 이에 대하여는 나의 책 《시민 K 교회를 나가다―한국개신교의 성공과 실패 그 욕망의 사회학》(현암사 2012), 제1부 5장 참조. [본문으로]
  28. 물론 빌리 그레이엄 부흥회를 포함한 아메리카식 부흥회가 이 시기에 또 다른 신자들의 대대적인 증가를 낳았는데, 이것은 많은 중산층 대중과 젊은층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데 기여했다. 같은 책 제1부 6장 참조. [본문으로]
  29. 이광순・이향순, 〈도시의 발달과 도시 선교〉, 《선교와 신학》 10(2002.12); 장형철, 〈도시발전과 초대형 교회건축―서울을 중심으로〉, 《종교와 문화》 26(2014) 참조. [본문으로]
  30. 이에 대하여는 미출간된 나의 책 《월빙우파와 대형교회》(메디치미디어, 근간)을 참조. [본문으로]
  31. 홍영기, 《한국의 초대형교회와 카리스마리더십》 (교회성장연구소, 2001) 참조. [본문으로]
  32. 주18) 참조. [본문으로]
  33. 같은 글, 13쪽. [본문으로]
  34. 실제로 조용기는 《국민일보》를 아들에게 세습했고, 인천순복음교회의 최성규는 아들에게 세습했다. 그리고 은혜와진리의교회의 조용묵은 나이가 70대 중반으로 은퇴시기가 지났음에도 아직 담임목사로 재직하고 있다. [본문으로]
  35. 주28) 참조. [본문으로]
  36. 한국개신교에서 수평이동 신자들의 비율은 대략 45~75% 정도가 된다. 낮은 수치는 한국목회자협의회의 2012년 조사인데, 45.2%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반면 높은 수치는 교회성장연구소의 2003년 조사인데, 76.5%라는 충격적인 결과치를 발표했다. 한국목회자협의회. 《한국기독교 분석 리포트》(도서출판 URD, 2013), 72쪽; 교회성장연구소, 《한국교회 교인들이 말하는 교회 선택의 조건》(교회성장연구소, 2004), 35쪽. 한편 최현종의 조사에 의하면 대형교회의 수평이동 신자의 정착율이 다른 규모의 교회들에 비해 가장 높았다. 최현종, 〈한국개신교의 새신자 구성과 수평이동에 관한 연구〉, 《한국기독교신학논총》 91/1(2014.1), 222쪽. [본문으로]
  37. 최현종의 논문 223~224쪽 참조. [본문으로]
  38. 나의 글 〈‘웰빙우파’와 대형교회―문화적 선진화 현상으로서 후발대형교회 읽기〉 참조. [본문으로]
  39. 새뮤얼 헌팅턴, 《제3의 물결―20세기 후반의 민주화》(인간사랑, 2011), 369쪽. [본문으로]
  40. 안병무, 〈하늘도 땅도 공이다〉, 《신학사상》 53(1986 여름) 참조. [본문으로]
  41. 나의 책 《산당을 폐하라―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들에 대한 정치비평적 성서 읽기》(동연, 2016), 머리글 참조. [본문으로]
  42. 주34)에 인용된 글 참조. [본문으로]

교회의 권력세습과 후발대형교회

논문 2018.02.23 14:18 posted by 망원올빼미

이 글은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종교와 법' 센터의 제2회 학술대회 '기독교와 법'에서 발제한 글입니다. 내 글의 논평글로 발표된 한목덕 목사의 글도 첨부했습니다.


이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발표 주제교회분쟁사례에 대한 법적 검토 판례의 태도를 중심으로

󰋼 발 제 – 우재욱 변호사(우재욱 법률사무소)

  󰋼 토 론 – 김진우 교수(한국외대)

【제2발표 주제세법상 종교인소득세의 도입배경과 향후과제

󰋼 발 제 – 박 훈 교수(서울 시립대), 허 원(고려사이버대학교)

  󰋼 토 론 – 구재이 박사(세무법인 굿택스)

【제3발표 주제권력세습과 후발대형교회

󰋼 발 제 – 김진호 목사(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 토 론 –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심포지엄의 사진들이 게재된 종교와 법 센터 블로그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s://blog.naver.com/religionandlaw

일시_ 2018. 02. 22(목), 오후 1:00~6:00

장소_ 한국외대 법학관 7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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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력세습과 후발대형교회

 

 

 


 

현황

 


1973년 도림교회의 담임목사 부자세습은 통상 혈통적 교회세습의 첫 번째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교회는 권력형 세습이 이루어진 경우가 아니기에 교회세습의 병리성을 다루는 오늘 우리의 문제제기 밖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교회세습의 문제적 전형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로 충현교회의 담임목사 세습이 꼽힌다.[각주:1] 세습이 단행되던 1997년 김창인은 은퇴한 원로목사임에도 전권을 휘둘러 교인총회인 공동의회를 주도하여, 담임목사 선출 방식을 일반적 관행이던 무기명 투표로 하지 않고 찬반기립의 방식으로 진행함으로써 아들의 담임목사 청빙을 단행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해서 막강한 파워엘리트가 즐비했고 세습 당시 재적 신수가 35천 명이 넘었으며 2012년 현재 총자산이 2조 원 정도나 될 것으로 추정되는 초대형교회에서 그 모든 것을 법적으로 총괄하는 담임목사가 된다는 것은 거대한 종교권력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후 이 교회에서 벌어진 사태들은 목사의 혈통적 교회세습의 전형적인 부정적 양상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편법선거로 담임목사가 된 아들과 원로목사임에도 교회 운영에 손을 떼지 못하는 아버지 간의 반목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사태들이 잇따랐다. 취임한 지 3년도 못된 20001월에 담임목사에 대한 테러사건이 발발했고. 장로 9명이 불구속 입건되어 경찰의 수사를 받았다. 아들목사는 아버지와 그를 따르던 장로들이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단정하면서 원로목사에 대한 교회의 지원을 끊었고 장로 8명과 안수집사 5명을 출교시켰다. 그러나 그것으로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다. 내부고발자 없이는 좀처럼 드러날 수 없는 교회재정의 횡령, 유용 사건들이 폭로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교회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그 결과 교인은 1/3로 줄었다.

물론 목사의 혈통적 세습이 그 교회의 교인들이나 외부로부터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또 정상적 권력교체가 이루어진 경우라고 해서 교회가 잘 운영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아무튼 혈통적 세습은 교회 안팎으로부터 정당성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충현교회가 혈통적 교회세습의 문제점을 선행적으로 보여준 이후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많은 교회들에서 혈통적 교회세습이 잇따랐다. 특히 주목할 것은 2천 년대부터 많은 대형교회[각주:2]들에서 혈통적 목사세습이 연이어 단행되었다는 점이다.

2001년 감리교단의 초대형교회[각주:3]인 광림교회가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세습했고, 2008년에는 광림교회 김선도의 동생인 김홍도가 담임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금란교회가 아들에게 세습했다. 또 그들의 동생인 김국도가 담임하는 임마누엘교회도 2013년에 아들에게 목사직을 세습했다. 그밖에 강남제일교회(기침2003), 경향교회(예장고려2004), 원천교회(예장대신200), 분당만나교회(감리교2004), 경신교회(감리교2005), 대성교회(예장합동2006), 동현교회(예장합동2006), 국민일보(기하성, 2006), 종암중앙교회(예장개혁2007), 인천숭의교회(감리교2008), 계산중앙교회(김리교2008), 경서교회(예장합동2010), 대한교회(예장합동2011), 부천혜린교회(예장합동2011), 제일성도교회(예장합동2012), 광명동산교회(예장합동2012), 왕성교회(예장합동2012), 성남성결교회(기성2012), 시은소교회(예장합동2014), 인천순복음교회(기하성2015), 안양새중앙교회(예장대신2017), 명성교회(예장통합2017) 등등, 많은 대형교회와 초대형교회들에서 혈통적 목사세습이 일어나고 있다. 물론 혈통적 목사세습은 대형교회 현상만은 아니다. 많은 중소형교회들에서도 특히 2천 년대 이후 교회세습이 속출했다.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이하 세반연’)에 따르면 20171110일 현재 143개 교회가 혈통적 세습을 단행했다.[각주:4] 이는 제보된 것을 조사하여 확인된 것에 한정된 숫자인데, 계속 신고를 받고 있어 그 수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감리교세습반대운동연대(이하 감세반연’)20171022일에 발표된 보고서[각주:5]에 따르면 감리교회에서만 세습을 실행에 옮긴 교회가 무려 194개나 된다. 또 이 두 단체들의 자료에다 독자적으로 신고를 받아 만든 뉴스앤조이의 세습지도에는 201813일 현재 350개가 포함되었다.[각주:6]

이렇게 세 기관의 리스트에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고에 의해 접수된 것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 감리교 단체인 감세반연의 경우 세반연보다 세습의 기준을 좀더 폭넓게 적용한 것도 참조할 만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세반연“‘교회세습이란 지역교회와 교회 유관기관에서 혈연에 의해 발생하는 대물림을 지칭한다고 규정하면서, 부자세습과 사위세습, 그리고 변칙세습양태인 교차세습, 지교회세습, 징검다리세습 등을 다루고 있다.[각주:7] 그런데 감세반연한 교역자가 담임자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혈연 및 이해관계에 있는 또 다른 교역자를 담임자로 세우는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동서에게, 조카에게, 형제간에, 그리고 변칙세습으로 사위교차 세습형태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각주:8]세반연조사에 누락된 경우들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그런 교회들은 아직 업데이트되는 중이어서 좀더 많이 포착될 것이 분명하다.

숫자 통계가 아직 완성도가 낮은 탓에 엄밀한 추정은 불가능하지만, 교단별로는 감리교단 소속교회가 가장 많다는 점은 개연성이 높다. ‘세반연감세반연의 자료에다 독자적인 정보를 취합한 뉴스앤조이의 결과에 의하면 전체의 50% 이상이 감리교단에 속한다.[각주:9] 지역별로는 거의 70%에 육박하는 세습교회들이 서울인천경기도 등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각주:10] 규모별 추정은 좀더 어렵지만 교인수 100~500명 사이가 43%, 500~1,000명이 26.1%로 제일 많은 것으로 추산되었다.[각주:11] 그러나 이 추정치만으로 100~500명 규모의 교회가 세습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는 단순한 가정은 문제가 있다. 이 자료가 유의미하려면 무엇보다도 전체 교회 가운데 이 규모의 교회들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비교해서 살펴야 한다. 뉴스앤조이의 조사결과로만 추정해보면 혈통적 세습이 가장 심각한 곳은 대형교회로 보인다. 이 조사에서는 재적인원의 범주를 6개로 나누었는데(100명 미만 / 100~500/ 500~1000/ 1000~5000/ 5000~10000/ 10000명 이상), 이중 대형교회의 기준과 거의 비슷하다고 가정한다면,[각주:12] 한국의 대형교회 비율은 1.7%[각주:13]인데, 이 조사에서 혈통적 세습을 단행한 대형교회는 6.9%를 상회한다.[각주:14] 반면 중소형교회의 경우는 ‘98.3 93.1’의 비율이다. 즉 전체 교회에 대한 대형교회의 비율보다 세습한 전체 교회들에 대한 세습 대형교회의 비율이 4배 이상 높다는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2천 년대 이후 혈통적 교회세습 현상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2) 교회세습이 가장 극심한 곳은 수도권이다. (3) 대형교회가 중소형교회보다 더 세습 현상이 심각하다. (4) 교파별로는 감리교단에서 더 혈통 세습의 문제가 심각하다.

 


해석

 


말했듯이 2천년 어간 이전까지 교회세습은 별로 주목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1997년 충현교회를 시발점으로 하여 2천 년대 이후 특히 여러 대형교회들에서 세습이 단행되자 개신교계 안팎에서 이 문제는 핫한 이슈가 되었다. 그런데 왜 2천 년대인가? 이것이 첫 번째 논점이다.

우선 혈통적 교회세습을 단행한 교회는 전체 교회 중 0.5% 이하로 추산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밝힌 개신교 교회수는 2011년에 77,966개다. 여기에는 군소교단들을 제외한 118개 교단의 교회만 포함된다. 그러니 실제 교회수는 좀더 많을 것이다. 또 최근 개신교 교인 수는 증감을 반복하고 있지만, 교회수는 모든 통계에서 거의 예외 없이 증가 추세에 있다. 그러므로 20181월 현재 교회수는 2011년 문광부 집계보다 훨씬 클 것이 분명하다. 한편 혈통적 교회세습을 단행한 교회수는 현재까지 최대 350개다. 교회 세습을 다루는 세 기관이 계속 신고를 받고 있으니 이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성교회 세습 사태 직후 신고건수가 갑자기 크게 늘은 것을 감안하면[각주:15] 이후에는 증가폭이 줄어들 것이 예측된다. 그런 점에서 35077,966으로 나누어 계산한 0.45% 어간에서 큰 차이는 없을 것 같고, 그것보다 훨씬 높게 잡은 가정치인 0.5%는 아마도 거의 최고 추정치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것은 교회세습이 결코 개신교에서 일반적 현상이 아님을 뜻한다. 그럼에도 세습을 한 교회들이 존재한다. 도대체 어떤 교회들이 세습을 하는가? 김동호 목사는 목사가 힘이 센 교회는 목사가 절대군주처럼 교회에 군림하고 하나님을 빙자하여 제 마음대로 교회를 주무르고 있다. 심지어는 그것을 자식에게 세습까지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각주:16] 즉 목사가 교회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한 경우 그가 의도하면 혈통적 세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근데 그 비율은 0.5%, 2백 명의 1명꼴이 못 된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목사가 교회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경우도 있으며, 세습을 하지 않은 95% 이상의 교회들 가운데는 세습을 할 수 있을 만큼의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음을 시사한다.

김동호는 이 발제글에서 그런 교회를 묘사하기를 장로가 더 힘 센 교회라고 한다. 이것은, 교회를 교회정치의 차원에서만 보면, 목사와 장로 사이의 주도권 경쟁의 장이며 그 싸움에 끼어든 다른 주체는 별로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하나 더 얘기하자면, 힘이 한 편으로 명확하게 기울어지기보다는 양자가 담합한 경우다.

여기서 목사 대 장로의 상호견제를 강조하는 교회제도는 장로교 계열의 교회정치제도다. 이것은 당회를 둘러싼 주도권 경쟁으로 나타나는데, 당회는 담임목사와 장로로 구성되어 있는 교회의 사실상의 최고 정치기구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의 상징적 중심인 목사와 사실상의 교회의 고용주인 장로가 당회 안에서 헤게모니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로교 목사인 김동호의 장로교식 교회정치에 관한 해석은 한국개신교 일반의 현상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무엇보다도 장로교 계열 교회의 교인수가 한국개신교 교인의 69%나 되기 때문이다.[각주:17] 그뿐 아니라, 한국의 다른 교단들도 장로교식 장로제도를 부분적으로 혹은 거의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감독제 교회들인 감리교와 성결교, 회중교회 전통의 교회인 침례교, 그리고 카리스마적 리더의 독점적 지배를 강조하는 오순절계열(순복음계열)의 교회도 장로교식 장로제도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의 권력이 더 강한 교회들을 보여주는 두 번째 요소는 담임목사의 교회 재직 기간이 매우 긴 경우다. 파송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감독제 계열의 교회들이든 청빙제도를 강조하는 장로제 계열의 교회들이든 1970년 이전까지는 그 교회의 재직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 이후에는 20년 이상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재직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런 교회들은 대개 담임목사의 자원 독점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 성공한 덕이다.[각주:18] 또 거꾸로 목사가 가용자원을 독점하고 그것을 성장에 집중 투여한 결과가 교회성장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도 있다.[각주:19] 그 시대가 자원 독점을 통해 성공을 이룩했던 권위주의 시대였다는 점은 권력의 집중과 성장이 서로 맞물리게 되는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각주:20] 이렇게 장기간 재직-자원의 독점-교회 성장의 연결고리가 뚜렷한 교회들에서 더 많이 혈통적 세습이 일어났다.

바로 이 두 교회세습의 조건에서 우리는 왜 2천 년대인가에 대한 하나의 개연성 있는 답을 얻을 수 있다. 1960~1990년 사이의 시간성, 그러니까 장기간 재직-자원의 독점-교회 성장의 연쇄고리가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시기에 그 핵심에 있었던 담임목사들이 속속 은퇴하게 된 시기가 바로 2천 년대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절에서 다루는 두 번째 논점은 교회세습이 수도권에 집중된 이유에 관한 것이다. 위에서 한 교회에서 양적 성공을 이룩한 이들이 그 교회의 권력을 장기간 독점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여기에는 1960~1990, ‘대성장 시대에 관한 꼭 필요한 논의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장소성에 관한 것이다. 우선 1953년 이후 서울은 수용능력을 초과하는 인구의 집중화 현상, 즉 과잉도시화(over-urbanization) 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이 현상은 2000년 어간까지 계속되었다.[각주:21] 이에 대한 국가의 대책은 두 번에 걸친 서울의 공간 확장으로 나타났는데(sub-urbanization), 하나는 그 이전까지는 서울의 바깥 지역이던 이른바 영동지역(영등포 동쪽 지역)의 개발로 서울을 확장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울 외곽의 신도시들을 건설함으로써 광역의 수도권을 만드는 것이었다. ‘영동지역은 훗날 강남 3개구 지역과 강동지역으로 개발되었고, 신도시들 가운데는 강남강동과 인접한 분당신도시와 그 인접지역이 특히 빠르게 발전했다.[각주:22]



이 과정은 대부흥기의 교세 확장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선 과잉도시화 상황에서 개신교는 급성장을 이룩한다. 즉 조용기는 이농민의 대대적인 신자화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대의 대형교회가 되었고, 그의 선교방식을 모방한 많은 교회들도 커다란 성장을 이룩했다.[각주:23] 1970~1980년대에 탄생한 대형교회들은 대개 이러한 이농민의 신자화와 관련이 있다.[각주:24]

그런데 서브어버나이제이션은 일부 교회의 또 다른 성공의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시기상으로는 1980년대 중반경부터 대형교회의 대열에 진입한 교회들은 강남, 강동, 분당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것은 두 번의 걸친 서울의 서브어버나이제이션 과정을 따라 이루어진다. 이중 1980~1990년대 대형교회의 대열에 들어선 교회들에는 강남권에서 지대의 급속한 상승으로 자산이 크게 확대된 이들이 매우 많았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젊었고 대학 이상의 학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좀더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새신자들, 곧 타종교인이었거나 비종교인이었던 이들이 많았다.[각주:25] 한편 1990년대 후반경 이후부터는 강남, 강동, 분당 지역에서 대형교회들이 속속 탄생하였는데, 이때는 새신자의 유입보다는 수평이동신자들의 유입이 이들 교회들의 양적 팽창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들은 중년층이 더 많았고 학력, 사회적 지위, 자산능력 등에서 대단히 위치에 있는 이들이 많았다.[각주:26]

이제 위에서 언급한, 교회세습이 수도권에 위치한 교회들에서 훨씬 더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것은 1960년 이후 규모의 성공을 거둔 교회들이 수도권의 인구 집중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단계에는 이농자들의 신자화, 둘째 단계에는 강남권으로 이주한 젊은 중산층의 신자화, 그리고 셋째는 강남강동분당의 수평이동 신자들을 정착시킴으로 대형교회들이 탄생했다. 그렇게 성공한 교회의 목사들이 2천 년대 즈음 속속 은퇴할 시기가 되었을 때, 그중 일부 교회들은 혈통적 세습을 단행한 것이다.

셋째 논점은 대형교회가 중소형교회보다 더 많이 혈통적 교회세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영기는 한국의 초대형교회 13개의 담임목사들의 리더십을 연구하였는데,[각주:27]카리스마 리더십과 초대형교회로의 양적 성장이 깊은 관계가 있음을 분석하였다. 그의 카리스마 리더십은 베버의 용어를 빌려온 것인데, 그것에 관한 종교적, 영적 설명들을 제외하고 사회학적 속성만으로 재설명하면 교회의 가용자원을 독점한 존재다. 그런 존재가 자원을 성장을 위해 효율적으로 사용한 결과 초대형교회로의 성장이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종현은 홍영기의 분석을 수용하면서 대형교회로 성장한 교회들의 1970년 이전과 이후의 담임목사들의 재임기간을 분석한 결과, 흥미롭게도 1970년대 이후 담임목사들의 임기의 장기화 현상이 뚜렷이 확인되었음을 보여준다.[각주:28] 그는 임기에 대해 하나 더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는데, ‘원로목사제도의 발명이다.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원로목사는 명예직이 아니라 실권자가 지배력을 연장시키는 장치로 작동되었다는 것이다.[각주:29] 이때 혈통적 교회세습은 원로목사로서 교회권력을 유지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대형교회는 목사의 혈통적 세습과 더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논점, 감리교회가 더 많이 교회세습을 한다는 점에 대한 것이다. 김동호의 목사가 힘이 더 센 교회라는 말과 홍영기의 카리스마 리더십에 관한 분석, 그리고 박종현의 임기의 장기화’, 이러한 요소가 가장 적합한 교회는 말할 것도 없이 오순절계열의 교회들이다. 그러나 오순절계열의 교회들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20여개의 지교회를, 은혜와진리의교회가 40여개를, 인천순복음교회가 4개를 갖고 있는 등, 권력집중화가 너무 심해서 세습할 만한 교회의 숫자가 별로 없다.[각주:30]

오순절계열의 교단 다음으로, 담임목사에게 강력한 권력을 부여하고 있는 제도를 갖고 있는 교파는 감리교단이다. 앞서 말했듯이 감독제 교회의 대표격인 감리교단은 목사파송 시스템과 교회운영 시스템에서 개별교회의 자율권을 제도적으로 제한하고, 구역회-지방회-연회로 이어지는 피라미드형 교회간 네트워크를 통한 통제력을 제도화함으로써 평신도엘리트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감독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정치제도를 발전시켰다. 하여 교회정치의 핵은 개별교회의 당회가 아니라 연회(감독)와 지방회(감리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는 한국의 감리교회들에도 장로가 존재하며, 그들은 목사파송이나 교회운영에 사실상 깊이 개입한다. 하지만 최종결정권이 목사들의 제도에 있다는 것은 일단 분쟁이 일어나면 목사에게 훨씬 유리한 제도인 것이다.

한데 감리교단의 대형교회들은 구역회-지방회-연회로 이어지는 교회정치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것은 이들 교회간 수직적 네트워크가 강한 만큼 개별교회가 내는 교부금이 더 많이 필요한데, 그 비용을 조달할 능력이 보다 많은 힘 센 목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대형교회의 비중은 훨씬 더 중요하다. 요컨대 대형교회는 교회 내적으로는 목사의 주도권이 더 잘 작동할 수 있고, 외적으로는 교회정치의 통제력에서 보다 자유롭다. 해서 감리교단의 교회들에게서 혈통적 세습이 더 많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문제점과 대안개념

 


개신교 외부의 시민단체들이나 매스미디어들은 흔히 혈통적 교회세습이 한국개신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처럼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이 현상은 전체 교회 가운데 0.5%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예외적 현상이다. 게다가 앞으로 그런 교회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 예상된다. 박종현이 분석했듯이[각주:31] 한 교회에서 장기간 재임한 목사들이 한꺼번에 은퇴한 시기가 2천 년 어간에서 그 얼마 후까지였다. 말했듯이 그들은 교회의 가용자원을 독점했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양적 성공을 이룩한 이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은퇴하고 있고, 그 후임자들은 선임자보다 학력도 높고 다양한 스펙을 갖추었지만 대개 카리스마 리더십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게다가 양적 성장이라는 성과를 이룩할 가능성은 현저히 줄었다. 또한 교인들의 학력은 점점 상승했고, 사회적 지위도 매우 높은 이들이 많다. 과거 목사가 지역 유지였던 시대와는 달리 지금은 그리 존경받는 위상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그러므로 목사가 더 힘 센 교회의 비율은 점점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혈통적 세습을 원한다 하더라도 그것에 성공할 이들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대형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위의 []에서 정리한 것처럼, 앞에서 시공간적 변화에 따라 다르게 특성화된 대형교회의 세 범주를 언급했는데, 이중 세 번째 범주는 수평이동한 떠돌이 신자들이 대거 정착함으로써 대형교회에 진입한 교회들을 가리킨다.[각주:32] 이때 수평이동신자는 중년층이 보다 많고 교회에서 주요직분을 경험했던 신자들이 많다. 또 학력이나 사회적 신분, 자산능력도 비교적 높은 층이 많다.[각주:33] 요컨대 이들은 주권의식이 보다 강한 신자들이다. 그들은 교회를 찾아 떠돌아다니면서 여러 목사들의 설교와 교회 프로그램들도 비교검토하고 교회신학적 서적들도 많이 탐독하며 교회 밖의 고급 강좌들을 수강했던 이들이 많다. 그들은 일종의 소비자의 자의식으로 교회를 선택한다.



그러므로 이런 자존성 강한 떠돌이신자들을 유치하고 정착하게 하는 데 성공한 교회들은 그들의 기호에 맞추는 선교전략상의 성공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교회들의 담임목사의 리더십은 어떠할까? 소비자 같은 자의식을 가진 신자들의 기호가 다양한 만큼 목사의 리더십 유형도 단순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과거처럼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이제 시대착오적임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들 떠돌이 신자들은 자수성가형 성장지상주의와는 달리 문화적인 고품격을 추구하는 귀족형의 소비자적 주체로서 교회를 선택, 소비하고자 한다. 나는 이러한 문화적인 귀족적 종교성을 웰빙신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각주:34] 주지할 것은 이런 신앙은 자산, 신분, 학력 등에서 안정계층에 보다 친화적이다.

요컨대 혈통적 교회세습에 대한 시민사회의 우려와 비판은, 내가 보기에는, 그 센세이셔널한 현상에 집착하다 숲의 문제를 읽지 못한 채 썩은 나무만을 찍어내려고 하는 관중규표(管中窺豹)의 오류가 될 수 있다. 그 대나무구멍()의 바깥에는 95% 이상이나 되는 교회들에서 담임목사가 혈통적 세습이 아닌 방식으로 임용되고 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정당한가? 그것은 부당하지 않고 부조리하지 않은가? 그것은 사회적 특권화를 조장하고 공공성을 훼손할 우려가 없는가?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혈통적 교회세습이 아니더라도 권력세습이 횡행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제기인 것이다.

정치학자인 새무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 최소한 세 번의 정권교체가 있어야 민주주의의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가 일어난다고 말한 것처럼,[각주:35] 교회도 기존의 권력을 전도시키는 담임목사 임용이 적어도 세 번 이상 일어나야 권력세습을 지양하는, 사회적 공공성의 장소로서의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여기서 나는 권력세습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있다. ‘세반연에 의하면 지역교회와 교회 유관기관에서 혈연에 의해 발생하는 대물림교회세습이라고 표기했다. 그런 점에서 교회세습은 혈통적 세습에 방점이 찍힌 개념이다. 그런데 나는 권력의 대물림에 방점이 찍힌 용어로서 권력세습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창세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이브의 죄의 문제를 공적인 것의 사유화로 봄으로써 ()의 문제를 권력의 반독점이라는 의미로 해석한 바 있다.[각주:36] 즉 권력의 대물림을 해체하려는 신앙적 기조를 안병무는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공의 장소인가 권력의 장소인가? 혈통적 세습을 단행한 교회든 그렇지 않은 95% 이상의 교회든 간에 교회가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가, 아니면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바꾸고 사적인 것을 전유하는 자들의 대열에 끼어드는 것을 강조하는 신앙운동 참여하고 있는가?

공의 사유화 운동의 장(field), 그런 권위주의적 소통의 공간이 오늘의 교회라면, 성서에 등장하는 유다국의 개혁군주 요시야 왕의 핵심 슬로건인 산당을 폐하라는 말은 바로 오늘의 교회를 향한 비판신학적 어젠다이기도 하다.[각주:37]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1995년 이후의 대형교회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수평이동을 거듭하던 비평적 신자들과 그들을 유치정착시키려는 교회가 함께 만들어낸 새로운 신앙유형인 웰빙신앙은 카리스마적 리더보다는 탈권위주의적인 리더를 선호함에 따라 혈통적 세습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 교회 유형을 소환해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후발대형교회라는 이념형적 용어로 규정한 바 있다.[각주:38] 즉 후발대형교회에서는 혈통적 교회세습을 억제하는 프레임이 통용되는 소통의 장이다. 즉 대형교회 유형 가운데 특권적 신자들의 존재가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된 교회 양식이 바로 후발대형교회라는 것이다. 한데 이 유형의 교회들에선 공을 사유화하려는 권력의 작용은 없는가, 바로 이 점이 나의 관심거리다.

안타깝게도 후발대형교회에서도 목사 임용에 관한 정보는 신자대중에게 거의 소개되지 않았고 목사 임용 과정에도 참여할 통로가 매우 제약되어 있다. 반면 특권적 엘리트 신자는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교회의 인사에 관한 것이든 운영에 관한 것이든 충분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고 그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갖고 있다. 이렇게 특권적 엘리트 신자와 신자대중 간의 정보의 비대칭성과 참여의 비대칭성은, 그들의 사회적 역할에서도 대체로 비슷하게 나타나곤 한다. 즉 대형교회의 특권적 엘리트 신자들은 사회에서도 특권적 시민의 위치를 점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들은 교회에서처럼 사회에서도 정보와 참여에서 특권적 지위와 역할을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들의 웰빙적 취향과 행위에 대한 우월감이 특권의 정당화 기재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웰빙적 취향이 특권적 지위의 결과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은폐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에서 교회세습이 아닌 권력세습의 관점에서 교회와 권력에 관하여 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문제제기하고자 했다. 그런데 권력세습이 일으키는 사회적 파급력은 행사되는 권력의 크기와 비례한다. 물론 일상의 권력, 미시적 권력, 내면의 권력도 주목할 필요가 있지만, 권력세습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미치는 사회적 파급력의 문제와 보다 긴밀히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사회의 특권적 엘리트이자 교회의 특권적 엘리트가 즐비한 대형교회는 이 논의의 가장 중요한 현장이다. 특히 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보다는 탈권위적 권위의 리더십으로 특징지울 수 있는 후발대형교회는 특권적 목사만이 아니라 특권적 신자를 이야기하는 데 더 적합하다. 이러한 분석틀 위에서 시민의 직접적 참여의 공간을 찾아내고자 하는 직접민주주의적 상상력과 대응하는 신자대중의 직접적 참여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교회적 공론의 장을 만들어 내는 것은 권력세습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성서 해석을 논하고 교회 제도를 논하며 신자의 사회적 역할을 논하는 탈권위적 공론장을 형성하고자 하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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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문덕 목사의 논평글입니다.

 


<교회의 권력세습과 후발대형교회> 논평

 


한문덕 (생명사랑교회 목사)

 

 

교회의 권력세습과 후발대형교회”(김진호)는 한국개신교 교회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회세습(또는 혈통적 목사세습)의 특징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시민 사회의 우려를 비판적 시각에서 고찰하여, 궁극적으로 교회의 권력세습이 더 본질적인 문제임을 밝혀 후발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보이고 있는 새로운 권력의 형태를 한국의 개신교회가 어떻게 지양하고 하느님 나라의 공공성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살피는 글이다.

 

김진호 연구실장은 1997년 충현교회의 담임목사 세습 이후 2천 년대부터 많은 대형교회들에서 혈통적인 목사세습이 연이어 단행된 사실에 주목하여 몇 가지 특징을 추려내고 있다. 첫째 2천 년대 이후에 혈통적 교회세습 현상이 만연하기 시작했고, 둘째 수도권에서 극심하였으며, 셋째 중소형교회보다 대형 교회가 더 심각하고, 넷째 교파별로는 감리교단에서 더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각각의 특징에 대해 김진호 연구실장은 아래와 같이 해석한다. 한국 개신교 교회의 특징은 교파를 막론하고 장로교식 교회정치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장로교식 교회정치는 목사와 장로 사이의 주도권 경쟁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이런 상황에서 20년 이상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재직하며 교회성장에 성공한 교회에서는 장로보다 목사에게 권력이 더 집중되는데 이들이 은퇴하는 시기가 바로 2천 년대에 집중되었기에 첫째 특징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둘째 수도권에서 목사세습이 더 극심한 이유는 교회의 대형화가 서울의 인구 집중화 현상, 즉 과잉도시화에 따른 국가의 공간 확장 대책으로 인해 새로 탄생하게 된 수도권들의 인구 집중화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대체로 이촌향도를 통하여 수도권에 몰린 사람들의 신자화, 강남권으로 이주한 젊은 중산층의 신자화, 수평이동 신자들의 정착의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이렇게 교회 성장을 이룬 목사들의 은퇴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성장한 대형교회는 혈통적 목사세습을 단행하게 된 것이다. 셋째 중소형교회보다 대형교회가 더 많이 혈통적 목사세습을 하고 있는 이유는 초대형 교회의 교회운영이 카리스마 리더십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담임목사 재임기간의 장기화와 카리스마 리더십을 통한 교회성장과 교회운영, ‘원로목사제도의 발명 등을 통해 대형교회는 중소형 교회보다 훨씬 더 목사의 혈통적 세습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감리교단에서 목사세습이 더 많이 이루어지는 것은 감리교단이 목사파송과 교회운영 시스템에서 개별교회의 자율권을 제도적으로 제한하고, 구역회-지방회-연회로 이어지는 피라미드형 교회간 네트워크를 통한 통제력을 제도화하여 평신도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감독을 중심으로 한 교회정치 제도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피라미드 구조의 네트워크로 운영되는 구조 속에서는 자본이 매우 중요해지는데 결국 이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대형교회가 권력을 지니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감리교단의 대형교회 목사세습은 더 쉽게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분석과 더불어 김진호 연구실장은 시민사회가 혈통적 목사세습에만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 즉 실제로 0.5% 밖에 되지 않는 혈통적 목사세습과는 상관없는 95%의 교회가 진행하는 목회자의 임용에서 발생하는 권력 작용에 대해서는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의 목사청빙 과정에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혈통보다도 권력의 세습임을 지적한다.

 

따라서 혈통적 목회세습 또한 결국은 권력세습의 한 형태일 뿐이며, 교회가 기존의 권력을 전도(顚倒)시키는 담임목사 임용이 적어도 세 번 이상 일어나야 권력세습을 지양하는, 사회적 공공성의 장소로서의 교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발제자가 새롭게 정의내린 후발대형교회의 권력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관심을 보인다. “후발대형교회는 상대적으로 탈권위주의적인 리더를 선호함에 따라 혈통적 세습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교회 유형을 소환해 냈으나, 목사 임용이나 교회의 운영 과정에서 특권적 엘리트 신자들과 목회자가 권력 공유를 통해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소수의 특권적 신자들은 교회뿐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특권적 시민의 위치를 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따라서 혈통적 목사세습의 관점이 아니라 권력세습의 관점에서는 사회적 파급력의 문제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혈통적 목사세습을 포함하여 권력세습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시작점은 시민의 직접적 참여의 공간을 찾아내고자 하는 직접 민주주의적 상상력과 대응하는 신자 대중의 직접적 참여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교회적 공론의 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발제자는 주장한다.

 

김진호 연구실장은 우리 주변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교회의 목사세습의 문제를 다루면서 혈통적 목사세습의 특징들을 잘 분석하였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혈통적 목사세습에 대해 우려를 가진 시민사회의 비판적 시각이 실제로 한국 개신교 교회의 권력 세습 전체를 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직시하며, 더 이상 혈통적 목사세습 유형이 아닌 탈권위적 리더십을 보이는 후발대형교회들의 권력 세습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함을 주장한다. 이 발표문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서 더욱 빛난다. 논평자도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발제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혈통적 목사세습만을 바라보는 것이 관중규표(管中窺豹)의 오류가 될 수 있음을 직시하면서 담임목사 임용을 포함하여 모든 교회의 운영과 활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권력의 구조와 집중화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실제로 목사세습의 방식이 아닌 95%의 교회의 목사임용 과정에는 다양한 종류의 권력이 작동한다. 발제자가 밝힌 대로 한국의 개신교회가 대체로 장로교적 교회정치를 따르고 있기에 목회자 임용도 당회(목사+장로)의 권한이 매우 크고, 각 교단의 헌법 또한 대체로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목회자를 공개적으로 모집하고 선발하고 청빙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매우 일천하고, 투명하고 올바른 민주적 절차 없이 노회의 개입이나 전임 목회자의 간섭, 교회의 소수 권력의 입맛에 맞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혈통적 목사세습은 바람직하지 못한 목회자 청빙 사례의 일부분일 뿐인 것이다.

 

김진호는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의존했던 선발대형교회와는 달리 목회자와 특권적 소수의 평신도의 연합으로 권력의 양상이 재편되는 후발대형교회에 주목하고, 후발대형교회 안에서 정보와 참여기회를 갖지 못하는 대다수 신자대중의 참여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시한다. 제한된 지면으로 인해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 대안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성서 해석을 논하고, 교회 제도를 논하며, 신자의 사회적 역할을 논하는 탈권위적 공론장을 형성하고자 하는 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은 목회자 1인에게 집중되든,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게 집중되든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고 공적인 것으로 돌려야 한다는 신앙 운동의 근원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논평자는 발제자의 분석과 지향에 공감하면서 몇 가지를 첨언하여, 발제자의 더 깊은 논의가 계속되기를 기대해 본다. 결국 중요한 것은 교회내의 탈권위적 공론의 장을 만들고, 교인들의 직접 참여의 공간을 늘리는 민주적 교회운영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 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런 지점에 대해서 발제자의 의견을 더 듣고 싶다.

 

성서 해석에 대한 개방성, 교회 제도의 갱신, 신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공론이 가능하려면 기존의 목회자들이나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지니고 있는 권위 의식을 내려놓아야 하고, 민주 시민의 의식이 민주사회의 질을 보장하듯이, 다수의 일반 교인들의 성숙한 신앙의식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다수신자가 참여하는 탈권위적 공론의 장이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의 현장, 발제자가 말하는 후발대형교회의 현장은 세련된(?) 목회적 감각을 지닌 목회자와 특권을 지닌 소수의 엘리트 신자들의 결합을 통한 운영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들이 제공하는 교회의 다양한 활동에 그저 만족하고 그것을 누리려는 대다수의 평범한 신자들의 공모의 장소이며, 목회자, 소수 엘리트 신자, 신자대중의 이런 암묵적인 합의 속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목회가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모든 종교는 태생적으로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을 지향하면서 힘에 대한 숭배를 그 근원에 지니고 있으며, 유한성을 지닌 인간의 불안과 허무를 일시적으로나 잠재워주는 안정성을 미끼로 신자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이 지닌 욕망을 채워주고, 안정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유지해 왔다. 발제자도 지목하는 바, 대형교회의 중산층 신자들의 웰빙적 취향은 특권적 지위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중하위계층의 선망하는 대상이 되었고, 중하위계층이 후발대형교회를 통해서 지위 상승의 가능성을 엿보는 것과 특권층이 자신의 권력을 누리는 것이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면서 새로운 권력은 계속 생성되고 유지된다. 이러한 힘 숭배와 안정 지향적 성향, 욕망의 구조를 어떻게 깨뜨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되는 것이다.

 

교계의 진보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이 함께 힘을 모아 새롭게 싹을 틔우는 작은 교회 운동이 이런 권력세습의 장을 비판하고 새로운 교회의 모델을 제공하는 가능성의 장소로 제시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대다수의 작은 교회는 생존 자체의 위협, 목회자와 리더 그룹의 비전문성, 민주적 소통의 미성숙, 신앙의 유아적 특성을 보이는 등 규모만 작을 뿐 한국 개신교가 지니고 있는 문제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금기시 되었던 목사의 이중직 논의가 충분히 무르익기도 전에 이미 현실화 되고 있으며,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가나안 교인의 증가와 인구 감소에 따른 교회 공동체의 노화현상 및 교인의 감소가 진행되고 있다. 신학대학/대학원들의 신입생 미달 상황이 보여 주는바 목회자 수급의 불균형 및 목회자가 지녀야 할 전문성과 인격의 함양 또한 담보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작은 교회 운동은 여전히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가 성숙할수록 비민주적 방식의 교회 운영 및 권력의 세습은 차츰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특권적 시민들의 친교와 상호이익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후발대형교회들은 자신들이 지닌 경제적 사회적 자본의 자체적 동력과 경건함으로 포장된 욕망이 작동하는 한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논평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자연과학의 발달과 시민사회의 변화에 따라 종교 그 자체의 존재 의미가 점차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이때에 개신교 교회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예수 운동이 보여 주었던 진정한 복음을 회복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즉 교회가 자기보존을 위해 신경 쓰지 말고, 지금보다 훨씬 더 시민사회와 소통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바꾸고, 성서 또한 거룩한 문서가 아닌 인류의 지혜를 담은 고전으로 일상에서 의미를 제공하는 책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사회 복지시스템의 사각지대에 있는 부분들을 함께 감당하면서,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 마을공동체 살리기 운동 등을 통해 이 사회의 소외층과 함께 하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목회 생태계가 선순환 될 수 있는 안정망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즉 뜻 있는 활동이 지속될 수 있는 장을 여는 교단 차원의 노력이 요구된다. 작은 교회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연합활동이 될 것이다. 대형교회/초대형교회의 권력 중심의 목회시스템이 아닌 네트워크 방식의 교류협력[각주:39]을 통한 작은 교회들의 생존과 운동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교회가 필요 없듯이 교회는 자기 포기의 길을 걸어야 한다.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 알프레드 루아지가 말했듯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뒤에 온 것은 교회였다.” 교회는 지상 권력의 사적 소유를 무력화 시키고 누구나에게 열린 하느님 나라 운동을 통해서만 그 존재이유를 발견한다. 그런데 교회가 공적인 것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대물림하려고 한다면 그런 교회는 사라지는 것이 오히려 좋을 것이다.

  1. 배덕만, 〈교회세습에 대한 역사신학적 고찰〉(심포지엄 ‘교회세습, 신학으로 조명하다’, 2013)(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 문서자료실, http://www.seban.kr/home/index.php?mid=sb_library_document&document_srl=4336&listStyle=viewer&page=2) [본문으로]
  2. ‘대형교회’로 번역된 메가처치(mega-church)는 통상 일요일 대예배에 참석한 성인 교인수가 2천 명 이상의 교회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3. ‘초대형교회’로 번역된 기가처치(giga-church)는 통상 일요일 대예배에 참석한 성인 교인수가 1만 명 이상의 교회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4. http://www.seban.kr/home/sb_what_map [본문으로]
  5. https://newkmc.modoo.at/?link=3tmk3lo8 [본문으로]
  6. 〈‘세습 지도’ 성복교회・부천성문교회 등 28가 추가〉, 《뉴스앤조이》 (2018.01.03.)[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4202] [본문으로]
  7. http://www.seban.kr/home/sb_what_sesub [본문으로]
  8. 주3)의 자료 참조. [본문으로]
  9. 주6) 참조. 그러나 두 기관이 엄밀하게 기준에 맞게 통계 낸 것이 아닌 데다, 그것을 취합한 《뉴스앤조이》의 결과도, 두 기관의 것을 기준상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취합한 것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본문으로]
  10. 같은 자료 참조. [본문으로]
  11. 같은 자료 참조. [본문으로]
  12. 한국갤럽이 한국인의 종교실태에 대한 5차에 걸린 조사결과 보고서인 《한국인의 종교 1984~2014》에 따르면 주1회 이상 일요일 예배 참석률은 2014년의 경우 80%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한국인 종교·신앙의식 조사’에서는 2017년 일요일 대예배 출석률을 76.7%로 집계했다. 이 조사대로라면 5천 명이 재적인 교회는 대략 3,800~4000명이 주일 예배에 참석한다. 하지만 실제 숫자는 이보다 더 낮을 가능성이 있다. 가령 가톨릭의 경우 한국갤럽의 조사결과는 같은 해 가톨릭 주교회의 ‘2014년 한국 천주교회 통계’ 분석 결과인 20.7%보다 3배나 높은 59%였다.(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565924&path=201504) 그렇다면 개신교회에서 5천 명 이상인 교회의 실제 예배 참석한 2,000~3,000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그리 무리해 보이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13. 교회경쟁력연구센터 엮음, 《한국교회 경쟁력 보고서》 (교회성장연구소, 2006), 37쪽. [본문으로]
  14. 《뉴스앤조이》가 현재까지 추산한 세습교회 수가 350개이고 이중 재적 5000명 이상의 교회는 24개 이상이다. [본문으로]
  15. 명성교회가 2017년 11월12일 담임목사의 부자세습을 강행하자 JTBC는 11월14일, 27일, 12월7일 세 차례에 걸쳐 비판적 보도를 하고 무수한 오・오프라인 언론들이 앞다투어 집중보도한다. 이후 이 문제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교회세습에 대한 비판적 담론 프레임이 조성되었다. 이에 《뉴스앤조이》는 12월 말에 교회세습 제보를 받기 시작했고, 1주일 만에 70여건의 제보가 들어왔다고 한다. 최승현, 〈‘세습 지도’ 성복교회·부천성문교회 등 28개 추가〉, 《뉴스앤조이》(2018.01.03.) 참조. [본문으로]
  16. 2017년 11월13일 ‘2017년 미래교회포럼’에서 발제한 글 〈한국 장로제도의 반성과 개혁〉(http://reformedjr.com/board05_04/7039) 참조. [본문으로]
  17.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각 2005년도 교단 총회보고서들을 취합하여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개신교 교인 중 장로교 교인수는 전체의 69%, 성결교는 11%, 감리교는 10%, 기독교침례회는 5%, 순복음계열의 교회는 4%, 기타 1%라고 한다.(http://missionmagazine.com/main/php/search_view.php?idx=365) [본문으로]
  18. 박종현, 〈한국 오순절 운동의 영성―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성과 성장에 대한 시대사적 회고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 82(2008.4), 11~12쪽 참조. [본문으로]
  19. 김진호,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주권교인’의 탄생.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3)〉, 《주간경향》 1265호(2018 02 27) 참조. [본문으로]
  20. 위의 박종현의 글, 12쪽. [본문으로]
  21. http://study.zum.com/book/12468 참조. [본문으로]
  22. 이에 대하여는 한종수・계용준・강희웅, 《강남의 탄생―대한민국의 심장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미지북스, 2016), 1・4・7장 참조. [본문으로]
  23. 이에 대하여는 나의 책 《시민 K 교회를 나가다―한국개신교의 성공과 실패 그 욕망의 사회학》(현암사 2012), 제1부 5장 참조. [본문으로]
  24. 물론 빌리 그레이엄 부흥회를 포함한 아메리카식 부흥회가 이 시기에 또 다른 신자들의 대대적인 증가를 낳았는데, 이것은 많은 중산층 대중과 젊은층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데 기여했다. 같은 책 제1부 6장 참조. [본문으로]
  25. 이광순・이향순, 〈도시의 발달과 도시 선교〉, 《선교와 신학》 10(2002.12); 장형철, 《도시발전과 초대형 교회건축―서울을 중심으로〉, 《종교와 문화》 26(2014) 참조. [본문으로]
  26. 이에 대하여는 미출간된 나의 책 《월빙우파와 대형교회》(메디치미디어, 근간)》을 참조. [본문으로]
  27. 홍영기, 《한국의 초대형교회와 카리스마리더십》 (교회성장연구소, 2001) 참조. [본문으로]
  28. 주18) 참조. [본문으로]
  29. 같은 글, 13쪽. [본문으로]
  30. 실제로 조용기는 《국민일보》를 아들에게 세습했고, 인천순복음교회의 최성규는 아들에게 세습했다. 그리고 은혜와진리의교회의 조용묵은 나이가 70대 중반으로 은퇴시기가 지났음에도 아직 담임목사로 재직하고 있다. [본문으로]
  31. 주28) 참조. [본문으로]
  32. 한국개신교에서 수평이동 신자들의 비율은 대략 45~75% 정도가 된다. 낮은 수치는 한국목회자협의회의 2012년 조사인데, 45.2%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반면 높은 수치는 교회성장연구소의 2003년 조사인데, 76.5%라는 충격적인 결과치를 발표했다. 한국목회자협의회. 《한국기독교 분석 리포트》(도서출판 URD, 2013), 72쪽; 교회성장연구소, 《한국교회 교인들이 말하는 교회 선택의 조건》(교회성장연구소, 2004), 35쪽. 한편 최현종의 조사에 의하면 대형교회의 수평이동 신자의 정착율이 다른 규모의 교회들에 비해 가장 높았다. 최현종, 〈한국개신교의 새신자 구성과 수평이동에 관한 연구〉, 《한국기독교신학논총》 91/1(2014.1), 222쪽. [본문으로]
  33. 최현종의 논문 223~224쪽 참조. [본문으로]
  34. 나의 글 〈‘웰빙우파’와 대형교회―문화적 선진화 현상으로서 후발대형교회 읽기〉, 《당신들의 신국―한국사회의 보수주의와 그리스도교》(돌베개 2017) 참조. [본문으로]
  35. 새뮤얼 헌팅턴, 《제3의 물결―20세기 후반의 민주화》(인간사랑, 2011), 369쪽. [본문으로]
  36. 안병무, 〈하늘도 땅도 공이다〉, 《신학사상》 53(1986 여름) 참조. [본문으로]
  37. 나의 책 《산당을 폐하라―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들에 대한 정치비평적 성서 읽기》(동연, 2016), 머리글 참조. [본문으로]
  38. 주34)에 인용된 글 참조. [본문으로]
  39. 마커스 보그가 제안 하는 바 문자-사실주의/교리적 성서 읽기가 아닌 역사-은유적 방법의 성서 읽기를 통한 개방적 성서 읽기, 교회 운영의 민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마련 및 공유, 교육 프로그램의 공유와 연합활동 등 [본문으로]

이 글은 종교문화비평26(2014)에 수록된 특집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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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과거현재미래

공공성에 대해 묻다

규범적 공론장의 형성과 변화를 중심으로

 

 

공공성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세계를 향한 정복의 도정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던 1980년대 초 이후 공공성에 관한 진보적 의제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신학 분야 등에서 화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전후 서구사회가 구현해낸 복지사회적 제도들을 무력화하고 공적인 것을 사적으로 전유하려는 거대자본들의 행보에 문제를 제기하고, 자본 순응적으로 변모하고 있는 국가와 시민에 대한 성찰의 담론이 요청되었던 것이다.[각주:1]

한국에서 공공성에 관한 진보적 담론도 대략 20년의 시차를 두고 비슷한 동기로 확산되었다.[각주:2] 차이가 있다면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서구사회보다 더 광폭했고, 그것은 사회안전망의 부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겠다. 또한 한국의 정부는 신자유주의적 정치의 상징으로 길이 남은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이나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공적인 것의 해체와 사적인 것의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여 한국에서 공공성의 문제는 복지사회를 지키기 위한 담론이 아니라 복지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담론과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용어의 담론적 계보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공공성 개념에 관한 나의 가설적 설명에서 유의미하다. 우선 이 글을 쓰는 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난점은 공공성(Publicness)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선행연구들에서 너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적용 범위도 너무 광범위해서[각주:3] 그 다양성이 수렴되는 함의를 찾아내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공공성을, ‘의 대립이라는 추상적 틀에서 시작해서, 이 단어들의 어원이나 그 사전적 의미, 그 용어를 사용한 고전문헌을 찾아내는 데서 이야기를 펴는 대신, 담론의 세계에서 왕성하게 회자되고 해석되는 계기가 되는 역사적 맥락에서 시작하는 담론적 계보를 통해 이 용어가 함축하는 의미망을 추론하는 것이다.

한데 신자유주의에 의한 공공적인 것의 잠식이라는 문제틀, 1980년대 유럽적 위기 테제를 공공성의 의제로 다룬 많은 연구들은 1962년 저술된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을 생각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아직 신자유주의의 존재를 상상하지 못했을 시기에 저술된 것임에도, 문화화된 자본주의의 대두와 함께 공공영역의 몰락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정치적 공론장의 재봉건화’),[각주:4] 1980년대적 위기에 대한 이론적 해석의 적절한 선례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하버마스의 핵심어는, 그리고 1980년대적 공공성 논의의 거점은 바로 공론장이라는 공공성의 담론적 맥락이다.[각주:5] 아니 좀 더 단적으로 말하면, 공론장은 공공성 담론 자체와 등가적으로 상호 연계되어 있다. 즉 공공성은 추상적인 항구적 개념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비판적으로 토론과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에서 구성되며 그 장의 구조변동과 서로 긴밀히 얽히면서 변동되는 의사소통적 실체다.

그러나 1980년대 유럽은 하버마스가 위의 책을 저술한 1962년의 지적 토양과는 달랐다. 1960년대 후반을 경유하면서 영·미권에서 진행된 수많은 문화연구들이 하버마스 류의 규범적 공론장 개념[각주:6]으로 포괄되지 않는 무수한 공론장들, 이름 하여 하위공론장(sub-public sphere)[각주:7]에 대한 연구들을 쏟아냈다. 하여 공론장의 논의에서 문화연구적 성찰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현대적 논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가 바로 유럽의 1980년대와 그 이후였다. 또 이 시기는 공론장이 이성적 차원만이 아니라 감정적 차원에서도 작동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대두한 시기다.[각주:8] 그러므로 1980년대 유럽의 담론 지형에는 이러한 공론장의 다중적 문제의식들이 복합적으로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나는 이러한 문제의식들이 함축된 공공성 개념에 대한 가설적 정의를 아래와 같이 시도하고자 한다.

공공성은 사회적으로 동의 혹은 공감하는 집단의식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동의란 이성적 인준을 의미하고, ‘공감이란 감성적 공조를 뜻한다. 이때 동의 혹은 공감이 이루어지는 (field)을 우리는 공론장이라고 부른다. 그 범위는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에서 가족 네트워크까지, 또 오프라인 네트워크에서 온라인 네트워크까지 범위와 형식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한데 이 공론장들은 거의 언제나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갈등하고 경합하면서 난장(亂場)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버마스의 규범적 공론장과는 달리 하위공론장개념이 이미 그런 난장의 실체를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공론장과 관련해서 사회는 이중적이다. 한편에서는 무질서하게 모자이크된 차이들의 담화공동체의 모습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차이들의 난장을 잠정적으로 봉합하고 통합하는 질서로 묶인 규범적 담화공동체의 모습을 띤다. 전자의 양상에 주목하면 수많은 하위공론장 연구들이 포착했던 사회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처럼 보이고, 후자를 강조하면 하버마스적인 규범적 공론장 해석이 개연성을 지닌다.

그런데 공론장의 규범적 통합의 맥락에서 공공선(common goods)이라는 사회적 통합의 준거로 작용하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역사적 구축 과정에서 그 사회의 표준적 도덕의 수호자 집단으로 부상한 교양시민의 집단의식으로서의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다.[각주:9] 이러한 교양시민의 집단의식은 마치 표준어처럼 사회 전체의 가치를 대표하고, 그렇게 전 사회를 대표하게 된 가치는 규범적 공공성의 이성적 인준 체계를 형성한다. 이때 감성적 공조는 종종 이성적인 것의 하위요소로 부가되곤 한다.

그러나 때로는 하위공론장에서 규범적 공공성에 대해 저항적인 이성이 작동하기도 하고, 규범적 이성에서 일탈한 감성적인 공조 현상이 불타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규범적 공공성과는 다른 공공성이 대중 사이에서 소통되기도 한다.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이런 규범적 공공성과 저항의 공공성 혹은 일탈의 공공성은 한국교회의 역사를 해석하는 데 요긴한 실마리가 된다.

아무튼 이 글은 이러한 공공성에 관한 가설적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규범적공공성 문제를 다룬다. 이때 한국교회는 한국의 개신교 교회로 제한하여 사용할 것이다. 또한 이것은 실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표상으로서의 교회. 즉 모든 개신교 교회의 실체를 반영하는 용어가 아니라, 대중의 심상에서 집합적으로 인지되는 표상(representation)으로서의 한국교회가 이 글의 분석 대상이다. 그런데, 나의 해석에 따르면, 이 표상으로서의 교회는 시대별로 다르게 나타났다. 하여 한국교회의 표상의 차이를 통한 시기 구분이 가능하다. 나는 이 글에서 표상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세 시기로 나누어서 한국교회의 규범적 공공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1945~1960; (2)1960~1990; (3)‘1990[각주:10] 이후.

하지만 이 글의 초점은 마지막 세 번째 시기의 교회의 규범적 공공성 문제에 있다. 나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세 번째 시기가 현재로 규정된 한국교회의 규범적 공공성을 보여준다. 반면 그 이전의 두 시기는 과거로 규정된 공공성에 관한 시기다. 왜냐하면, 뒤에서 이야기할 것이지만, (1)~(2)는 근대 한국사회의 규범적 공론장의 맹아가 대두하던 시기라면,[각주:11] (3)은 하위공론장들의 도전이 거세지면서 규범적 공론장의 구조변동이 본격화되어, 이전 시기의 지배적 공론장의 질서가 크게 훼손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을 반영하는 시기다.

나는 이 글에서 한국교회가 근대 한국사회의 규범적 공론장을 형성하고 제도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행위자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과거로 묶인 두 시기인 (1)~(2)는 이러한 규범적 공론장의 형성 과정에서 한국교회가 어떻게 관여되어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리고 현재로 묶인 (3)의 시기는 규범적 공론장이 형성되고 그것에 대한 거센 도전과 일탈이 진행되는 가운데, 한국교회의 위기가 이 규범성의 위기와 어떻게 연계되어 나타나는지를 다룰 것이다. 나는 그 형식이 한국사회의 규범성과 연동된 한국교회의 규범적 공공성의 위기로 나타나고 있음을 이야기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위기는 공론장의 구조적 형성 및 해체의 과정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새로운 표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하여 이 글의 결론부에서는 이 새로운 표상에 관한 나의 스케치를 시도할 것인데, 그것은 한국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미래지평의 이야기다.

 

과거

 

식민지 시대 교회의 공공성 문제는 중요한 연구 과제다. , 실제로 연구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북한교회의 공공성도 흥미롭다. 하지만 이 글은 한국교회의 공공성의 시공간적 범주를 1945년 이후 남한 지역으로 한정할 것이다. 여기서 한국이라는 언표가 함축하는 자주적 근대국가, 곧 대한민국의 탄생 시기인 1948년을 나는 유의미한 시간적 요소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남한사회와 한국교회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정부의 등장 이전과 이후는 그다지 중요한 변화를 수반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군정기의 맥아더 사령부와 1948년 이후 이승만 정부는 근본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관점에서 개신교를 정치화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하여 이 글에서는 1945년을 기점으로 하는 한국교회의 공공성을 이야기할 것인데, 이 시기에 한국사회는 지배적 공론장의 변동이 일어나고 그것이 발전하여 규범적 공론장으로 제도화되는 첫 걸음을 내딛었다.

 

(1) 파괴적 증오의 신앙과 지배적 공론장의 변동[각주:12]

미군정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46년 당시 남한사회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합한 좌익 성향이 전체의 77%에 달했다.[각주:13] 물론 아직 해방 이후 남한사회의 규범적 공론장이 형성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이는 동시대의 공론장에서 해방, 친일청산, 통일, 계급 같은 단어들을 중심으로 하는 의미망이 빠르게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할 것이다.[각주:14]

반면 남한사회에는 소수의 극우반공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 세력이 개신교였다. 특히 월남 개신교 신자들은 동시대 남한에서 가장 대표적인 반공주의자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서북출신 장로교도들인데, 북한에서 공산주의 세력과의 체제경쟁에서 패배하고 집중적인 정치, 사회적 보복을 당하게 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갖게 된 자들이었다.[각주:15]

당시 남한에 진주한, 맥아더 휘하의 미군 장교들은 일본, 대만, 필리핀, 그리고 남한을 개신교 반공주의 국가로 만들고 싶어 했다.[각주:16] 그것은 개신교화가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아내는 최선의 방어기지라고 보았기 때문이다.[각주:17] 그런 점에서 좌편향이 너무 강한 남한 사회를 개조할 파트너의 하나로 서북 출신 개신교 월남자들이 지목되었음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욱이 서북지역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지역이었고, 이 지역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이들은 과격한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무장한 맥코믹 대학 출신 선교사들이었기에, 누구보다도 친미 성향이 강렬하였다.[각주:18]

미군정 당국과 남한의 우익 정치지도자들의 공공연한 비호 아래 이들 월남자 개신교 신자들은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향한 무분별한 백색테러를 자행했다.[각주:19] 그들은 남한 개신교 신자의 50~70%에 달할 만큼 수가 많았고 대도시에 결집해 있어 집단적으로 행동하기에 적합했다. 또 상대적으로 적극 신자층이 많았고, 청년과 남성의 비율이 매우 높았기에 더 쉽게 공격적 행동의 가해자가 될 수 있었다.[각주:20]

이러한 개신교 신자들 중심의 무자비한 폭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1950년을 경유하면서 남한사회는 절대적 반공주의 사회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배적 공론장은 멸공’, ‘친미’, ‘반북한같은 의미의 계열들로 뒤덮이게 되었다. 물론 아직 규범적 공론장이 형성되기에는 소통을 위한 사회적 제도들이 너무 미비했다. 이 지배적 공론장을 작동시키는 요소는 대화와 소통의 기조가 아니라 증오와 공포의 감정이었다.

교회는 이러한 지배적 공론장의 주요 의미망의 변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회도 변화했다. 그 변화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교회의 서북화. 즉 서북계 장로교적 신앙제도의 프레임 속으로 모든 교회들이 흡수되어 간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서북화란 근본주의적 신앙의 보편화를 의미한다.[각주:21] 이는 권위주의적이며, (이념적, 문화적, 종교적, 성적으로) 배타주의적이고, 증오의 정치에 의해 그것이 행동주의적으로 작동되는 구조를 갖는다. 그러므로 이 시기 교회라는 표상은 반공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이미 1930년대부터 조금씩 그렇게 드러나고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계급의 질서를 넘어서고 성의 질서를 넘어서며 국가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문화의 상징으로 하위공론장을 뜨겁게 달구며 지배적 질서에 도전하는 종교라는 뉘앙스가 있었다. 반면 1950년 어간의 서북화되는 교회를 보면서 사람들은 그러한 전통적 질서에 대해 도전하는 종교를 떠올릴 수 없었다. 오히려 지배체제의 일원처럼 보였고, 공격적 반공주의의 화신처럼 여겨졌다.

 

(2) 생산적 증오의 신앙과 규범적 공론장의 탄생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그리스도교 밖에서 증오의 정치를 새롭게 구현하는 신앙운동들이 도처에서 나타났다. 구마자(驅魔者)형 부흥사들이 주도하는 이른바 기도원운동이다. 이 한국적 기도원에서는, 명상과 침묵을 기조로 하는 서양의 기도원과는 달리, 맹렬한 집단적 열광이 넘치는 가운데 몸과 정신의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이 치유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많은 이들이 엑스터시적 환각 작용 속에서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기도원집회가 특정 장소에 고정되지 않고 전국의 마을과 도시를 돌며, 공터에서 혹은 교회당에서 벌어졌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들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반공주의적 증오를 파괴가 아닌 생산적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새로운 신앙의 개척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 아니 악마에 대한 증오심을 모아 생명의 기운으로 반전시킨 것이고, 그 절정에 치유가 있었다. 전후(戰後) 몸과 정신의 질병에 들린 이가 넘쳐나는데 보건의료체계는 바닥까지 무너져 내린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의 대중을 향해 그들은 치유의 신앙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1950년대 하위공론장들의 한 현상이었던 이 기도원운동과 유사한 현상이 1960년대 이후에는 국가와 교회에서 지배적 공론장을 무대로 하여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즉 지난 10여년의 증오의 정치를 파괴의 동력이 아닌 생산의 동력으로 전환시켜 국가와 국민의 발전 혹은 교회와 성도의 성장을 실현시키려는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지배적 공론장의 형성 원리로 물리적 폭력이 상대적으로 억제되고 규율의 장치들이 속속 제도화되었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의 간증행위가 구연되는 농촌의 집회들,[각주:22] 전 국민 의무교육의 도정에 접어든 국민학교,[각주:23] 그리고 전국적 매스미디어로 부상한 라디오와 TV[각주:24] 등이 대표적인 규율의 장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외형상 지배적 공론장은 행위자간의 의사소통을 통해 규범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행위자들의 주체성과 자발성이 덜 성숙하고 획일적인 규율과 감시의 장치들에 의해 권위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 특성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규범적 공론장의 탄생으로 해석할 수는 없고 오히려 과시적 공론장의 일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25]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규율의 장치들은 규범적 공론장이 제도화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한편 이 시기의 지배적 공론장에서 반공주의는 기저에 깔려 있는 핵심적 요소다. 만약 시민층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전제로 한다면 반공주의는 규범성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는 국가건설의 동력으로 전환되었다. 국민 개개인은 조국근대화의 역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공론장이 추구하는 규범성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선진입국과 풍요롭고 행복한 삶이라는 유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약속과 불가분 얽혀 있다.

이러한 전환은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에 의해 추진되었다. 여기서 체제의 전환과 새 정권의 조합이 필연적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알다시피 국제정세의 변화가 저변에 깔려 있고 그런 맥락에서 장면 정권이 기획한 밑그림을 거의 그대로 승계하여 발전체제로의 전환을 이룩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러므로 군사정권만이 유일한 발전체제의 장본인일 수 있다는 주장은 무모해 보인다. 하지만 조합이 달라지면 양상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전개된 역사는 발전체제와 군사정권의 조합을 통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정권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구현해낸 과시적 공론장은 군사정권의 색깔이 농후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과시적인 지배적 공론장의 배타주의적 권위주의 담론의 양식이다. 과시적 공론장은 하위공론장의 난장(亂場)스런 담론 현상을 포용하지 않으며 나아가 규범의 외부에 대해 가혹하다. 많은 이들이 인정하듯, 그 배타적 권위주의의 정도는 거의 병영(兵營)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므로 이것은 1인의 카리스마적인 절대권력을 중심으로 구축된 군사정권과 매우 닮았다. 그런 점에서 앞 시기의 배타적 권위주의를 승계하지만 훨씬 더 독재 친화적이다.

한편 이 시기에 교회도 부흥사들의 기도원운동을 교회화하는 전환이 본격화되었다. 즉 교회의 신앙 양식에서 생산적 증오의 양식이 적극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데 여기서도 그 주역이 바뀌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것은 월남자 출신의 이데올로기적 투사가 아니라 부흥사 출신의 목사들이었다. 그들은, 1950년대의 부흥사들이 질병의 치유에 집중했던 것을 확장해서 건강과 풍요라는 두 요소를 신앙과 직결시켰다. 이제 신앙은 건강의 축복과 물질의 축복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삼박자 축복의 담론이 된 것이다.

이런 교회운동을 이끌었던 부흥사 목사들은 구마사이자 축복의 사도였다. 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자질은 초월적인 은사(카리스마)를 수행할 능력이고, 그것은 이들이 법과 질서를 넘어서는 은사자, 곧 카리스마적 지도자임을 의미했다. 이 점에서 이들 지도자들은 서북화된 교회의 전형성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서북화된 교회는 이데올로기적 투사형 지도자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요컨대 부흥사형 목사들은 1인의 독점적 권력을 교회에서 구현했고, 그렇게 독점한 신앙자원을 성장에 집중 투여한 결과 그들의 교회는 대대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국가도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국가발전을 위해 국민을 총동원하였고,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하여 교회와 국가는 이 시기 유사한 담론적 틀을 통해 성공을 추구했고 실현된 성공을 해석했다. 하여 양자는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 중심의 배타적 권위주의와 결합된 성공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시기에 제도화된 공론장은 이러한 성공 모델의 양식을 권위주의적 규율성과 잘 조화시켰다. 하여 이 규율적인 과시적 공론장의 질서에 포획된 다수의 국민은 성공을 무조건 지지했다. 왜냐면 성공은 국가의 유토피아적 미래를 향한 도정이고 하느님나라 축복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을 구현해낸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를 중심으로 하는 총화단결은 성공을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여기서 이 지배적인 과시적 공론장이 감정적 동일시의 대상으로 미국을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국가의 유토피아적 미래와 가장 가까운 현실의 국가이며 하느님나라 축복의 그림자가 가장 원형적으로 실행된 나라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미국을 선망하며 현실의 삶을 규율한다.

그렇다면 가장 빠른 성공의 실례이자 반공주의적이며 친미주의적 공간인 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든 아니든, 한번쯤 일원이 되고 싶어 하는 종교가 되었다. 더욱이 과거 1950년대 어간에 이데올로기적 전쟁에 적극 참여하던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교회 활동들이 이제는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반공 구호 비슷한 기도와 군가 비슷한 찬송, 그것을 통해 분노를 쏟아 붓게 하는 과거의 집회 풍경 대신에, 축복의 기쁨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노래와 댄스가 결합된 친교행위가 과시되었다. 또 교회가 성장해갈수록 연주, 디스플레이, 건축 등의 영역이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이미지로 부각되었다. 게다가 학교교육 외부에서 글쓰기, 노래하기, 연기하기, 지도력 수행하기 등을 계발하는, 당시로선 거의 유일한 청소년의 문화적 소통의 장으로 활용되는 교회학교의 모습이 많은 청소년들의 심상에 새겨졌다. 하여 이 시기 표상으로서의 교회는 그 이념성이 빠르게 소거되고 하나의 모던 공간으로 기억되었다.[각주:26]

그런 점에서 교회는 많은 이들의 심상에서 공공성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한편에서는 성장의 이데올로기, 그것의 실현을 약속하는 종교로서 해석되었기에 공공적인 종교로 이해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참신한 기쁨과 활력이 있는 종교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는 점에서 대중의 감정 속에서 그 공공성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이 이 시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군사정권이 하위공론장의 생성을 그토록 막으려 하였지만, 규범에 도전하고 일탈하는 공론장의 등장과 도발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도전, 전통의 복원을 추구하는 민족운동적 실천, 전후 세대 청년들의 다원적 문화를 향한 일탈적 행위들이 도처에서 출몰했다. 이 하위공론장들의 담론들은 거의 대부분 교회와 갈등적이었다. 하여, 아직은 커다란 흐름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 시대의 지배적 공공성을 대변하는 교회에 대한 도전은 소수자의 목소리로 남아 있었다.

 

현재

 

그런데 1990년을 전후로 하는 시기의 교회는, 그 성공의 도정은 현저히 꺾였다. 무엇보다도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와 선망, 이성적 인준과 감정적 공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1990년 어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교회가 달라진 것일까 아니면 사회가 달라진 것일까?

여기서 이제까지 그다지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던 교회의 표상, 그 정체에 대해 좀 더 깊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960~1990년까지 교회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대성장을 구가했다. 1960년에 개신교 신자 수는 인구의 2%, 62만 명에 불과했는데, 1995년에는 인구의 19.7%876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대형교회들이 탄생했다. 주일 대예배에 참석하는 성인 교인수 2천 명이 넘는 교회를 대형교회로 보는 미국의 규정에 따르면, 세계에서 대형교회가 제일 많은 미국에서 전체 교회 가운데 대형교회의 비율은 0.005~0.007% 수준이지만 한국은 그보다 240~340배나 높은 수치인 1.7%나 된다. 이것을 교회수로 환산하면 한국에서 대형교회의 수는 2004년 현재 880개쯤 된다. 반면 미자립교회의 비율은 전체 교회의 50% 안팎이나 되는 것으로 추정된다.[각주:27]

한데 과반수의 교회가 미자립교회이고 절대다수가 소형교회이며 대형교회는 불과 1.7%에 지나지 않음에도, 거의 모든 교회들은 대형교회적 신앙 제도와 관행, 그리고 공간 양식에 따라 구성되어 있으며, 또 거의 모두가 대형교회가 되고자 하고 대형교회나 가질 법한 비전을 추구한다. 하여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는 대형교회이거나 짝퉁대형교회인 셈이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무수한 분열을 겪었다. 하지만 그 많은 교파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교파들 간에는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유사성이 나타난다. 이것은 두 범주의 통합의 결과였다. 하나는, 앞장에서 이야기한 바, 1950년대 어간의 교회의 서북화인데, 이는 거의 모든 교파를 장로교적 양식으로 통합시켰고, 근본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 신앙으로 수렴되게 했다는 것을 지칭한다.[각주:28] 그리고 다른 하나는, 1960~1990, 대성장의 시기에 형성된 대형교회적 유사성이다. 이 유사성의 핵심은 성장지상주의적인 대형교회적 제도에 있다.

그러나 대형교회와 짝퉁 대형교회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의 존재에 관한 것이다.[각주:29] 대형교회는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성장을 실현하는 주축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모든 자원을 독점하는 자이다. 대형교회의 경우, 1세대에 관한 한, 이러한 리더십은 거의 예외 없다. 단지 그가 계몽군주형 지도자인지 독재자형 지도자인지만 다를 뿐이다. 반면 대형교회가 되지 못한, 그러나 늘 대형교회를 꿈꾸는 중소형의 짝퉁 대형교회들은 소수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은 카리스마적 리더가 부재하다. 자원은 배분되어 있고, 많은 경우 목사들은 특권적인 평신도 지도자들과 역할 분담을 통해 제한적 지도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니 자원을 독점하는 1인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전제한 대형교회적 신앙제도는 대부분의 짝퉁 대형교회에는 맞지 않는 옷과 같다. 하지만 지난 시기 사람들의 기억 속에 들어 있는 표상으로서의 교회는 이 차이가 고려되지 않은 교회, 곧 대형교회적 교회다.

그런데 ‘1990년 어간’, 교회로서는 결코 맞이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 도래했다. 도래한 이 시간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다음 두 요소가 중요한 변화의 고리가 된다. 하나는 민주화이고 다른 하나는 소비사회화다. 민주화는 국민 개개인에게 주권의 담지자라는 자의식을 불어넣어 주는 사회적 정치적 제도화를 말한다. 또 소비사회화는 인간 개개인의 취향의 주권에 관한 사회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제도화를 수반한다. 이 양자가 결합되어 1990년 어간의 시간성을 구성했다.

이것은 지배적 공론장에서 국가의 검열과 감시가 줄고, 시민이 개입하여 규범적 담론을 만들어가는 소통의 장, 즉 규범적 공론장이 본격 대두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여 여기서는 국가를 포함한 여러 사회적 자원을 과점한 개인과 집단이 이합집산하면서 헤게모니 투쟁을 벌이게 되었고, 그 속에서 규범적 가치로서 인준된 공공선이 대두하게 된다. 또 하위공론장들이 무수히 탄생했고, 그 중 많은 공론장은 감시와 검열의 시선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저항과 일탈의 담론을 왕성하게 펼쳤으며, 다른 일부 공론장은 탄압을 가로지르면서 자유를 향한 담론 투쟁의 깃발을 높이 세웠다.

이러한 다양한 공론장 속에서 자기 주권의 주체가 된 다수의 사람들은 개개인의 주권을 잠식했던 영웅의 시대를 과거의 것으로 규정짓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틀의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각주:30] 하여 카리스마적 리더를 중심으로 하는 권위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인 성장 모델의 시대는 현재의 시간에서 강제 퇴거되어 과거의 시간으로 추방당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러한 영웅주의가 작동되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낡은, 퇴락한 곳으로 간주되었다.

가령 정치 영역에서 1인의 독재자는 역사의 저편으로 강제퇴거되었고, 권위주의 시대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3이라는 다른 영웅들에 관한 담론과 제도도 이제 비판의 과녁을 벗어나지 못했다. 가부장적 아버지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권위적 스승사랑의 매를 신뢰하는 이는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대형교회에 대해 사람들은 따가운 시선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데 문제는 사람들에 심상에 새겨진 교회의 표상이 대형교회와 짝퉁 대형교회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람들에겐 똑 같은 교회였다. 말했듯이 짝퉁 대형교회 가운데 대다수는 카리스마적 리더가 부재했다. 그 교회들의 다수는 목사의 지도력이 특권적 평신도의 지도력에 압도되고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모든 교회는 목사의 비정상적인 독점적 권위가 횡행하는 곳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모던 공간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아니 교회는 쇠락한 낡은 공간이었다. 이는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수가 크게 줄고 교회를 떠나거나 충성도가 이완된 사람들이 현저히 늘어나는 현상을 수반한다. 또 교회나 교회가 운영하는 기관들에 대한 시민사회의 의심과 비판이 크게 늘어나는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교회나 목사 혹은 엘리트 교인의 추문에 대해 사회적 지탄이 증폭되었고, 교회의 사회적 행위들에 대해 사사건건 문제를 제기하는 일도 크게 늘었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가 공공성을 지니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발굴하고 분석하며 비판해 마지않았다. 또 사람들은 다른 종단의 비슷한 문제적 행위보다 교회의 문제적 행위를 더 심각한 공공성의 파탄 현상으로 보았다. 하여 교회는 사람들의 이성과 감성에서 공공성을 상실한 종교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에 더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대형교회가 아니라 짝퉁 대형교회였다. 여전히 카리스마적 리더를 추종하는 이들은 대형교회 언저리에서 종교적 열정을 다해 충성심을 표현했고, 그 외에도 대형교회는 막대한 자원을 동원해서 위기를 완충하는 장치들을 구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개의 짝퉁 대형교회들은, 그런 대형교회의 전략을 모방하곤 했음에도, 더 심각한 위기의 수렁에 휘말려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장 처음에 던진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 큰 틀에서 교회는 1990년 이전과 이후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1990년 어간이라는 시간성은 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사람들의 집단 인식에서 중대한 변화의 계기를 담고 있다. 그것은 권위주의배타주의라는 지난 1945~1990년까지 계속된 한국교회의 거대한 유사성의 핵심적 요소가 이제 더 이상 규범적 공론장에서 수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2천년 어간에 본격적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광풍에 국가와 사회의 특권적 엘리트들은 이제까지 공공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들 하나하나를 사적인 것으로 바꿔치기 하려 했다. 사람들은 점차 그러한 사사화가 자신들의 존재의 안전에 얼마나 심각한 위해가 되는지를 절감하게 되었다. 하여 사사화에 대한 대중의 저항은 규범적 공론장과 하위공론장에서 치열하게 나타났다. 이는 한국에서도 공공성 담론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1인 혹은 소수의 엘리트가 시민 혹은 대중의 이익을 대표해서 어떤 제도를 구축하는 것, 시급하다는 이유로 충분한 공론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수행되는 이런 일은 비판적 공론장에서 가장 문제적으로 다뤄진다. 한데 대형교회의 1인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권위주의는 바로 그런 문제를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런 점이 오늘 교회에 대해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공공성 문제의 요체다. 하여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있음으로서 벌어지는 교회의 모든 행보에 대해 반공공성의 혐의가 부과되는 것이다.

 

미래

 

이제 우리는 1990년 어간을 경우하면서 교회가 공공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것은 ‘1인의 특권적인 카리스마적 리더를 정점으로 하는 배타적 권위주의의 청산을 요청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주로 대형교회의 문제다. 대부분의 짝퉁 대형교회에서는 배타적 권위주의를 추동하는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부재하다. 그럼에도 대형교회를 선망하고 모방함으로써 짝퉁 대형교회는 대형교회보다 더 큰 위기에 빠졌다.

한데 대형교회에서 이러한 청산 작업은 너무나 어렵고 요원하다. 수천 아니 수만 명이 모이는 거대한 규모의 집합체임에도 소통의 장치가 거의 발전하지 않고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의 초법적 권력에 의지하여 작동되어 왔기에, 그것을 가로지르는 수평적 소통의 장치를 마련하는 일은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들 것이다. 하여 대형교회들은 계속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에게 모든 것을 계속 위임하거나 그것에 준하는 권위주의적 제도에 위임하는 것과 같은 좀 더 손쉬운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대형교회는 탈권위주의로의 행보보다는 재권위주의적 방안을 모색할 가능성이 더 크다.[각주:31]

이런 교회는 여전히 규범적 공론장을 강제하는 권력을 작동시키기를 원할 것이고, 지배적 공론장과 하위공론장에서 제기되는 무수한 도전과 일탈에 대해 억압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최근 일부 대형교회의 정관 개정 시도는 카리스마적 리더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공론장을 억압하는 법제도적 권력으로 위기를 대처하려는 행보로 해석된다.[각주:32]

하여 나는, 대형교회가 아닌, ‘작은교회에 주목한다. ‘작은교회란 규모가 작을 뿐 아니라 탈성장주의를 지향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짝퉁 대형교회와 대조적이다. 비록 작은교회 현상에 포함시킬 수 있는 교회들은 아직 절대소수에 불과하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고 계속 늘고 있는 작은교회들의 실험들은 공공성의 관점에서 매우 유의미하다.

가령, 작은교회가 교회의 제도와 담론에서 성장주의를 포기하고자 하면, 그 비움을 채울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 실제로 많은 작은교회는 그 자리에 복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을 넣었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경계를 해체하는 다양한 예전(禮典)과 비공식 모임을 만들었으며, 안과 밖, 신자와 비신자, 타신자 간의 경계를 허물었고,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의 공감과 소통의 자리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시도와 실험들은 민주화 이후 시대 한국사회 공론장에서 그 공공성을 인준받기에 마땅한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대형교회라는 표상이 사회적 인식에서 부적절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이러한 작은교회는 아직 극소수다. 개신교 내부에서 작은교회 현상은 주변적 현상에 지나지 않고, 이에 대한 신학적 이름 짓기조차 거의 미미하다. 하지만 작은교회는 민주화 이후 시대의 규범적 공론장의 구조변동 과정에 끼어들 만한 자격을 갖춘, 새로운 교회의 표상이다. 더욱이 일부 작은교회들에서 우리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의 하위공론장이 형성되고 또한 여러 하위공론장들과의 네트워크에 깊숙이 얽혀 있다는 점은, 우리사회에서 하위공론장의 열악한 여건을 감안하면, 규범적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회적 단위로 작은교회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과거 민중교회가 양적으로 절대소수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비판적 공론장과 국제적인 기독교의 규범적 공론장에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표상으로 소중하게 기억되었던 것처럼, 작은교회가 새로운 대표표상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면, 개신교가 한국사회의 공공성의 형성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종교의 하나로 재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1. 신진욱, 2009 여름, 〈공공성과 한국사회〉, 《시민과세계》 11, 19~22쪽; 고원, 2009 여름, 〈정치로서의 공공성과 한국 민주주의의 쇄신〉, 《기억과 전망》 20, 320쪽 참조. 한편 신학계에서도 1984년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서 설립된 공공문제연구소(Center for Toeology and Public Issues)는 대처정부에 의해 자행되는 복지의 형해화에 대한 신학적 비판과 대응의 과제를 수행했고, 이것이 영국 공공신학의 기원이 되었다. William Myatt, “Public Theology and 'The Fragment'―Duncan Forrester, David Tracy, and Walter Benjamin”, Public Theology 8, 2014, p. 87; William F. Storrar, “Scottish Civil Society and Devolution―The New Case for Ronald Preston's Defence of Middle Axioms”, Studies in Christian Ethics 17, August 2004, pp. 37~46. [본문으로]
  2. 홍성태는 《한겨레신문》 기사에서 ‘공공성’의 사용 빈도와 학위논문에서 이 단어가 핵심어로 사용된 빈도를 근거로 한국에서 ‘공공성’은 ‘21세기의 개념’이라고 말한다. 홍성태, 2008 상반기, 〈시민적 공공성과 한국 사회의 발전〉,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13, 74쪽. [본문으로]
  3. 백완기, 2007 여름 〈한국행정과 공공성〉, 《한국사회와 행정연구》 18, 1쪽 참조. [본문으로]
  4. 김재현, 1994 겨울, 〈위르겐 하버마스〉, 《이론》 10, 68쪽. [본문으로]
  5. 1989년 하버마스의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의 영역본인 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 Cambridge: The MIT Press이 출간되던 해에 벌어진 국제학술대회는 ‘공론장’에 대한 동시대적인 문제제기와 재해석들이 시도되고 있다. 이 논문들을 묶어낸 책인 Craig J. Calhoun, ed., Habermas and the Public Sphere, Cambridge: The MIT Press, 1992 참조. [본문으로]
  6. 이 글에서 내가 사용하는 ‘규범적 공론장’이라는 용어는 하버마스가 이상적 지평에서 사용하는 ‘부르주아 공론장’(Bourgeois Public Sphere)을 번안한 것이다. 그것은 이상적 지평이 아닌 현실의 담론에서 부르주아 공론장의 역할은 ‘규범의 합의’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범의 합의는 시민(부르주아)적 의사소통의 결과이지만 동시에 비시민을 담론화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담론적 폭력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하위공론장은 이 규범성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기도 하고 일탈하기도 하는 담론을 생산하고 유통한다. [본문으로]
  7. Nancy Fraser, “Rethinking the PublicSphere : A Contribution to the Crtitique of Actually Exiting Democracy”, Craig J. Calhoun, ed., Ibid, pp. 109~142 참조. [본문으로]
  8. 김예란, 2010 가을, 〈감성공론장―여성 커뮤니티, 느끼고 말하고 행하다〉, 《언론과 사회》 18, 150~154쪽 참조. [본문으로]
  9. 송호근, 2011.5, 〈공론장의 역사적 형성과정―왜 우리는 불통사회인가〉, 《한국언론학회 심포지움 및 세미나 자료집》, 34~35쪽 참조. [본문으로]
  10. 여기서 ‘1990년’은 정확히 표현하면 ‘1990년 어간’(around 1990)이다. ‘1990년 어간’이 한국교회의 전개를 시기 구분하는 결정적인 경계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Jin-ho Kim, Autumn 2012, “The Political Empowerment of Korean Protestantism since around 1990”, Korea Journal 52, pp. 64~90 참조. [본문으로]
  11. 그러므로 이 시기는 규범적 공공성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면 이 두 시기 중 첫 번째 주로 물리적 폭력에 의해 지배적인 공론장이 만들어졌고, 두 번째 시기는 주로 검열과 감시에 의존해서 지배적인 공론장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국가 대 시민, 시민 대 시민, 시민 대 비시민 간의 경합과 담합을 통해 규범적인 것이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두 번째 시기의 지배적 공론장을 일종의 사이비 공론장으로서의 ‘과시적 공론장’(publicity of representation)이라고 명명한다. 이것은 마치 유럽의 중세 봉건사회처럼 자발적 주체인 시민이 형성되기 전의 탈주체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성격의 공론장을 가리킨다. 나는 이 글에서 이러한 과시성이 규율과 감시의 기재가 잘 작동됨으로써 지배적 공론장이 일종의 규범적 합의에 이른 것처럼 보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본문으로]
  12. 이하의 전개에서 중요하게 활용되는 핵심어인 ‘파괴적 증오’과 ‘생산적 증오’에 관해서는 김진호, 2012, 《시민K, 교회를 나가다》, 현암사, 49~70쪽에 의존하고 있다. [본문으로]
  13. 강정구, 2002 봄, 〈한국 보수주의 체제 확립의 역사적 기원―해방공간을 중심으로〉, 《진보평론》 11, 20쪽. [본문으로]
  14. 최미진, 2012 여름, 〈매체 지형의 변화와 신문서설의 위상(1)〉, 《대중서사연구》 27, 7~36쪽 참조. [본문으로]
  15. 강인철, 2007,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도서출판 중심, 514~515쪽 [본문으로]
  16. 이상호, 2009 겨울, 〈전후 동아시아 보수주의의 산파 맥아더〉, 《황해문화》 65, 267쪽. [본문으로]
  17. 최재건, 2004, 〈맥아더 장군의 전후 일본에서의 종교정책과 그것이 한국에 끼친 영향〉, 《성결교회와 신학》 12, 56~57쪽. [본문으로]
  18. 김상태, 1998 겨울,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엘리트의 형성〉, 《역사비평》 45; 이재근, 2011 가을, 〈매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와 한국 복음주의 장로교회의 형성, 1888~1939〉, 《한국기독교와 역사》 35 참조. [본문으로]
  19. 송효정, 2012 겨울, 〈해방기 감성 정치와 폭력 재현―해방기 단편소설에 나타난 공간 미디어와 백색테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16, 332~339쪽 참조. [본문으로]
  20. 김진호, 2014 출간예정,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와 증오의 정치학〉, 《한국사회의 극우주의》(가제) 참조. [본문으로]
  21. 즉 ‘교회의 서북화’란 표현은, 대다수의 교회가 서북인사들에 의해 점거되었다든가 거의 모든 교단의 권력을 서북계가 장악했다든가 하는 의미가 아니라, 서북계 장로교의 제도가 대다수 교단들의 표본이 되었고, 근본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편향성이 강한 서북계 장로교와 유사한 이념적 신앙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22. 한도현, 2010 겨울, 〈1970년대 새마을운동에서 마을 지도자들의 경험세계―남성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88, 296~300쪽 참조. [본문으로]
  23. 오성철, 2003 겨울, 〈박정희의 국가주의 교육론과 경제성장〉, 《역사문제연구》 11, 61~63쪽 참조. [본문으로]
  24. 이영미, 2012 가을, 〈텔레비전 코미디 드라마의 형성―1960년대 후반 유호의 연속극을 중심으로〉, 《한국극예술연구》 37 참조. [본문으로]
  25. 문병훈, 1996 가을, 〈하버마스의 규범적 커뮤니케이션 모델과 그 언론학적 수용〉, 《한국언론학보》 38, 257쪽 [본문으로]
  26. 이 내용은 앞의 주20)에서 언급한, 곧 출간된 나의 글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와 증오의 정치학〉에서 논한 것이다. [본문으로]
  27. 김진호, 〈‘작은교회’가 그리스도교의 미래다―한국 개신교의 경험에서 찾은 가능성〉, 154~156쪽 in 오강남 성소은 (엮음), 2013, 《종교너머, 아하!―기성 종교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판미동. 한데 한국 대형교회의 숫자에 대하여 이 글에서는 “1천 개에 육박한다”고 추산했는데(정확한 추산치는 998개), 이것은 한국 개신교 교회 숫자의 가파른 증가 추세를 반영하지 못한 추산이어서 이후 다른 글에서 880개로 수정하였다. 김진호, 2014. 05+06, 〈교회의 공공성 회복의 길, 작은교회론―대형교회 정관 개정 논란에 즈음하여〉, 《공동선》, 116, 77쪽. [본문으로]
  28. 강인철, 2007,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62~72쪽 참조. [본문으로]
  29. 박종현, 2008.04, 〈한국 오순절 운동의 영성―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성과 성장에 대한 시대사적 회고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식》 82, 10~14쪽 참조. [본문으로]
  30. 설원태, 2012.02, 〈역대 한미대통령 묘사프레임 비교분석―뉴욕타임스와 조선일보의 한미정상회담 보도를 중심으로〉, 《언론정보연구》 49/1, 107~144쪽. 이 논문은 1948~2009년까지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뉴욕타임즈》와 《조선일보》의 양국 대통령에 대한 묘사를 연구한 것인데, 흥미롭게도 이 두 매체는 공히 ‘영웅적 프레임’에서 ‘동격적 프레임’으로 묘사가 변화했다고 한다. 특히 한국의 민주화는 그러한 변화의 결정적 계기다. 이는 담론적으로 민주화와 ‘영웅의 소멸’이 상응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본문으로]
  31. 이와 비슷한 양상이 한국정치에서도 나타났다. 민주화가 더 이상 사회의 미래적 비전의 지위를 상실한 시대에, 시민사회적 공론장을 억제했던 MB 정권을 승계한 박근혜 정권은 명백한 정치의 재권위주의화를 추구하고 있는 정권으로 보인다. 사회의 구조적 변동의 맥락에서 보면 박정희식의 신권위주의는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를 중심으로 하는 독재체제이지만, 이러한 카리스마적 1인에게 모든 자원의 통제권이 집중된 권력은 오늘의 시대에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러기에 사회는 너무나 복잡해졌다. 그런 점에서 권위주의가 다시 재개되려면 카리스마적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된 사회가 아니라 탈집중적인 체제여야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념형으로서의 포스트신권위주의 체제라고 불렀는데, 이 시기에 재권위주의적 전략에 따라 집권한 박근혜 정부는 중심이 없는 권위주의를 실현하기에는 너무 옛스러운 권위주의적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보수주의적 실험은 성공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이 실험은 어쩌면 사회에 커다란 위해를 남기고 사라질지도 모른다. 규범적 공론장을 형해화하고 하위공론장의 메시지를 철저히 차단하면서, 사회의 무수한 공적인 것을 사사화하는 독단적 정치를 펴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종교적 영역이든 정치적 영역이든 카리스마적 1인에게 집중된 재권위주의는 매우 위험하다. 이 글이 주목하는 공공성 위기의 요체는 바로 이 점에 맞추어져 있다. 정치 영역의 재권위주의화의 대중적 계기를 메시아정치의 위험성에서 보고 있는 나의 글, 2014 여름, 〈증오의 메시아정치, 그 불온함―2012년 이후 한국사회의 종교성 비판〉, 《오늘의 문예비평》 93, 27~46쪽 참조. [본문으로]
  32. 김진호, 〈교회의 공공성 회복의 길, 작은교회론―대형교회 정관 개정 논란에 즈음하여〉 참조. [본문으로]

이 글은 2017년 01월 25일, 신대승네트워크가 주관하고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와 우리신학연구소, 신대승네트워크가 주최한 <3대종교 2015인구센서스 종교인구조사결과 특별토론회>의 개신교측 발표자인 나의 글입니다. 

시간의 제약 탓에 위의 토론회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못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같은 원고를 2017년 2월 6일에 열린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제 199차 월례포럼에서 다시 발표하고 토론하는 모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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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구 문제의 황당함곤혹스러움

개신교를 중심으로

 

 

 

‘2015 인구센서스의 종교인구조사 결과를 접하면서 신학자로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황당함곤혹스러움이다. 황당함은 예상을 빗나간 개신교 신자의 수에 관한 것이고, 곤혹스러움은 종교 인구 추이를 보면서 종교 개념에 관한 난처함으로 인한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첫 생각들을 넘어서고자 하는 고민을 담고 있다.

 

황당한개신교 신자 수

 

천지일보 2016.12.23.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395321


‘2015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개신교는 교세에 있어서 한국의 제1종교다. 총인구 대비 19.7%가 개신교 신자라는 것이다. 그 수는 967만여 명쯤 된다고 한다. 이것은 지난 2000년대 초에 개신교계의 언론들과 목사들이 입에 달고 다녔던 ‘1200만 성도에 비해선 한참 못 미치는 수이지만, 이번 조사에서 2위인 불교를 이백만 명 이상 앞선 것이다. ‘1200만 성도라는 말이 터무니없는 수치임을 각인시켜준 것은 ‘2005 인구센서스였는데, 거기서 개신교 신자라고 답한 이들은 18.2%, 840여만 명에 불과했다. 이는 22.8%인 불교보다 이백만 명 이상 적은 수였다. 아무튼 그때의 개신교의 굴욕은 단 10년 만에 비슷한 차이로 역전되었다는 고무적 결과가 바로 이번 인구센서스에서 게시되었다. 불교 인구의 파국적인 감소(?)(7.3%, 300만 명) 탓이기도 하지만, 개신교 신자도 120만 명 가량 늘었다고 하니 그 상승 정도가 적잖다. 게다가 개신교 교세가 정점을 찍었을 것으로 보이는 ‘1995 인구센서스19.4%보다도 근소하나마 비율이 더 높아졌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개신교로서는 대단히 행복한 상황이다. 대외적으로 최악의 신뢰의 위기에 봉착해 있음에도 교세가 증가했다니 적잖은 위안이 되기도 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역성장의 위기가 일거에 해소되었다면 작금에 개신교가 겪고 있는 무수한 위기들이 한꺼번에 해소될 수 있다는 혹은 해소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면 역성장의 상황은, 단순한 숫자의 감소 문제가 아니라, 여러 문제적 현상들이 뒤얽히면서 서로를 강화시키는 구조적인 위기의 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2011년도 신학대학 취업률

총신대학

36.1%

장신대학

7.4%

감신대학

8.4%

서울신학대학

41.4%


가령 이렇다
. 개신교의 각 교단마다 초고속 성장에 맞추어 교회사역자 충원체계를 구축하였는데, 1990년대 이후 저성장과 역성장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신학대학 학생들은 혹독한 취업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것은 신학대학의 학문 경향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대다수 학생들이 인문학으로서의 신학적 소양을 갖추기보다는 성장을 위한 기능학으로서의 신학을 추구하게 했다.

이러한 현상은 신학대학 졸업 이후 교회사역자로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교회사역자들의 재교육의 수요는 성장학적 신학에 일방적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개신교는 한국의 종교들 가운데 신자들의 학력이 가장 높은 가톨릭과 거의 맞먹을 만큼 고학력의 종교다. 이것은 교양독서계층이 많은 종교라는 뜻을 포함한다. 그런데 예비 교회사역자들과 현직 교회사역자들은 오직 성공에 관한 도구적 기술에 집착한 탓에 교양독서층이라고 할 법한 신자들과 대화하고 그이들을 설득할 만큼의 지적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인지 능력의 결핍은 급변하고 있는 1990년대 이후의 세계를 해석하는 데 교회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주된 이유가 된다. 여기에 주5일 근무제가 정착되면서 사람들의 삶에서 여행 등 여가의 비중이 높아지게 되자, 교인들의 출석율과 기부금이 급락하게 되었다. 이것은 교회의 재정 위기로 이어진다.

교회의 빈자리가 늘어가고 만성화된 재정 위기에 봉착하면서 목사들을 점점 더 예민해졌다. 여기에 사회의 민주화가 빠르게 진척되면서 낡은 권위주의의 잔재들을 청산하려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었고, 개신교회는 바로 그런 청산의 주요 대상의 하나로 지목되었다. 사회의 시선은 날로 따가워지는데, 교인의 감소와 재정 위기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개신교 지도자들은 위기를 반전시키려고 무리수를 두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들은 개신교의 정치세력화, 공격적 포교의 강화, 특히 세계를 향한 공격적 선교 현상, 증오 마케팅 같은 것들이 대표적 사례다. 한데 이것들은 개신교회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었을 뿐 아니라 더 문제적 종교라는 이미지만 강화시켰다.

개신교가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는 어디서 시작하든 비슷한 방식으로 서로 꼬리를 물면서 상황을 악화시켜 갔다. 그런데 이런 악순환 고리의 한 부분, 특히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교인의 증가가 확실한 사실이라면 구조화된 위기로부터 탈출의 실마리가 잡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2015 인구센서스의 결과는 개신교 목사들이 즐겨 쓰는 말로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한데 의아하게도 ‘2015 인구센서스를 접한 개신교계의 반응은 냉랭하다. 여러 개신교계 언론매체들이 그 결과를 간략히 소개한 정도였다. 개신교계 주류단체에 속하는 어느 기관도 이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위해 공을 들이려 하지 않았다. 별로 믿겨지는 결과가 아니었던 탓이겠다. 또한 가장 호교론적 태도를 취해온 개신교계 세력들은 최근의 대통령 탄핵 정국 아래서 파국적 위기를 체감하고 있는 터여서 인구센서스 타위에 고무될 처지도 아니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한 매체에서 조사방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것이 이유일 수 있다는 분위기가 교계에서 퍼지기도 했다. 즉 개신교계에서 이른바 이단종파들이라고 지목해왔던 여호와의증인, 안식교, 몰몬교, 통일교, 영생교, 천부교, 그리고 구원파신천지집단 등이 모두 개신교로 분류된 것과 이번 인구센서스 결과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이다.

한데 이런 문제제기와 거기에서 유추된 추정은 타당성이 약하고 종교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타당성이 약하다는 것은 위에서 열거된 소종파들을 개신교로 분류한 것이 ‘2015 인구센서스에서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소종파들이 이번 조사에 영향을 미칠 만큼의 인구변동이 없는 한 유의미한 변인이 될 수 없다. 이들 소종파들의 신자수 변동에 관한 믿을만한 정보가 거의 없어 좀 더 확실한 추정은 어렵지만 정황상 거의 모든 소종파들의 교인수 증가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감소의 요인이 더 강했을 것 같다. 다만 신천지파의 경우는, 이 종파의 교세보고 자료에 의하면, 매년 20%를 넘나드는 초고속의 증가 추세에 있다. 하지만 총 교인수가 15만 명 내외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신천지 파의 성공이 120여만 명이 증가했다는 이번 인구센서스 결과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하다.

한편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이단 시비의 문제가 한국개신교에서 특별히 심각하게 드러나는 퇴행적 배타주의 양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퇴행적 요소를 인구 변동의 요인 분석에 활용함으로써 배타주의를 재확인하는 방식은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

그러니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2015 인구센서스결과에 대한 개신교계의 냉랭한 반응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최근 개신교 각 교단들의 교세 통계 추세에 관한 것이다. ‘2005 인구센서스결과가 나올 무렵에는 각 교단의 교세 통계는 대체로 신자수 증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거의 5백만 명에 달했다.

교단의 교세 통계는 각 교회들의 자료를 교단 총회가 취합한 결과다. 즉 이것은 교회에 신자로 등재된 이들의 총수를 말한다. 반면 인구센서스는 피조사자들이 자신이 어느 종교에 속한지를 표기한 결과다. 그렇다면 최대 5백만 명이라는 차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분석 중 가장 개연성이 있는 것은 중복교적자로 인한 것이다. 아무리 작게 잡아도 전체 교인들 가운데 40% 이상이 중복교적자라는 얘기다. 도대체 중복교적자가 이렇게 많을 수 있을까?

개신교에서 교회를 사역하는 목사들의 능력 평가의 첫째 요소는, 말할 것도 없이, 교인수를 얼마나 증가시켰는가에 있다. 그런 맥락에서 교회사역자는 새 신자가 교회를 방문하면 사력을 다해 교적에 등재시키려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것은 세례의 양산과 맞물린다. 이렇게 교인수 증가는 교회사역자의 이후 행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는 더 여건이 좋은 교회의 사역자로 옮겨갈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들은 끊임없이 교회를 옮겨 다닌다. 교회 이동의 가장 큰 요소는 이사와 결혼이다. 한데 1990년대 이후 점차 이사율도 결혼율도 감소 추세에 있다. 또 지하철이 빠르게 지배적인 교통수단으로 부상하고 자가용 자동차가 일반화되면서 거리라는 변수는 교회를 옮기는 요인으로 점점 덜 중요해지게 되었다. 반면 교회를 떠나는 이들에 대한 조사들에 따르면 이 무렵 이후 신자들의 교회 이동에서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 것은 목사나 교회에 대한 실망의 문제다. 이와 연관해서, 이 무렵 이후 교회 간 수평이동 신자들은 교회의 열성 신자, 특히 주요 직책을 경험하여 교회와 목사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이들이었다. 그 이전에는 이사나 결혼 외에 중요한 수평이동 요소는 목사나 은사자들을 따라 이동하는, 즉 자존성이 약한 신자들과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에는 교회에서 더 자존성 강한 신자들이 더 많이 수평이동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은 민주화와 소비사회로의 빠른 변화가 진행되던 시기였고, 하여 한국사회에서 시민들 개개인의 자존성과 권리의식이 빠르게 신장하던 때였다. 개신교는 한국사회 평균보다 학력이나 자산상태, 상징권력 등이 더 높은 이들이 많은 종교라는 사실은, 개신교 신자들의 자존성과 권리의식도 매우 높은 편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교인들 가운데 자존성 강한 시민의식을 가진 이들이 더 많이 종교적 자존성을 가졌을 것이고 그들의 다수가 수평이동을 택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한 가정이 아니다.

그 무렵 한국사회는 빠르게 정보사회로 변화하고 있었다. 무수한 정보가 온오프라인을 떠돌았고, 수평이동 신자들은 뛰어난 검색능력을 발휘하면서 교회들과 목사들을 평가하는 주체가 되었다. 그런 이들이 한동안 일원이었던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찾아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가 특정 교회들로 몰려들어 재정착하게 됨으로써 이 시기에 새롭게 급증했던 대형교회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탄생한 대형교회들은 새신자의 유입보다는 수평이동 신자들의 유입에 성공한 결과다. 이 교회들은, 과거와 같이 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이라는 획일적 요소보다는, 목사들의 지적 능력, 교회의 수준 높은 프로그램, 교회의 특별한 시설과 건조물 양식 등 다양한 요소들이 담임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함께 어우러진 양상을 띤다. 나는 이 두 유형의 교회들을 각각 선발대형교회와 후발대형교회라는 명칭으로 분류한 바 있다.

아무튼 1990년대 이후 교회들은 재적신자들의 수평이동이 극심했고, 새신자의 유입은 급락했다. 이 시기 수평이동 신자들의 비율은, 조사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대체로 전체 신자들의 45~75%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2005 인구센서스조사가 한창일 때는 참여정부가 등장하고 시민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대단히 고조되고 있었다. 이것은 낡은 권위주의에 대한 청산 의지가 매우 높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교회는 낡은 권위주의의 온상처럼 비추어졌다. 또한 그 무렵은 낡은 권위주의의 주요 원인으로 미국이 지목됨으로써 반미 기조가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시기였다. 그리고 개신교는 대표적 종미(從美) 부역자로 낙인찍히고 있었다. 즉 개신교에 대한 호감도는 급락했고 혐오감정이 치솟던 무렵이었다.

바로 이것이 ‘2005 인구센서스가 자신이 개신교 신자임을 말하기를 꺼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고, 교단통계는 이러한 분위기를 담지 못했던 이유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앞에서 말한 개신교의 재정 위기에 대한 얘기를 좀 더 살펴보자. 1990년대에 대형화에 성공한 몇몇 교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새신자의 유입이 거의 멈추고 교회에 충성스러웠던 신자들의 사실상의 감소로 인해 교회들이 맞닥뜨린 가장 직접적인 위기는 재정의 압박이었다. 수많은 교회들이 적자예산에 시달렸다. 그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는 이 무렵부터 추진되었던 기독정당들의 슬로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교회 대출이자율을 1%대로 낮추겠다는, 터무니없는 슬로건으로 많은 교회사역자들과 신자들을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교회의 재정 악화는 부채의 급격한 상승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교회의 금융신용도도 추락했다. 이에 시중은행은 교회에 대한 대출을 억제했다. 한데 그 무렵 금융실명제가 도입되면서 무분별하게 추진된 기타 금융권의 확대와 이들 간의 무한경쟁 상황에서 수협 등의 몇몇 기타 금융권의 교회대출상품은 높은 이자율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렸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재정건전성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런데 개신교 각 교단들의 교세통계는 그러한 부실을 반영하고 있지 않았기에 교단들은 위기에 대응하는 적절한 정책을 개발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학생들의 취업률 저하를 예비 교회사역자들의 태도의 해이함으로 해석했고, 하여 각 교단들은 오히려 예비 교회사역자들의 교회개척이나 단독사역 경력을 목사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첨가하곤 했다. 이것은 교세가 위축됨에도 불구하고 교회당의 수가 오히려 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경력 많고 유능한 교회사역자들이 소형 교회들을 옮겨 다니며 사역하던 얘기는 옛 말이 되었고, 열악한 조건의 교회들은 경험이 일천한 신출내기 사역자들의 불안한 일터가 되었다.

뉴스앤조이2015.04.26.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8961). 


이것은 또한 교회 파산율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 2000년대 초, 매년 1300개 정도의 교회가 파산했다. 해서 이 무렵 파산한 교회당과 부속물들을 처분하는 블랙마켓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교회 매매 과정에서 일종의 권리금 형식의 비용이 추가되었는데, 교인들의 숫자가 이 금액의 크기를 좌우했던 것이다.

그런데 ‘2015 인구센서스에선 ‘2005 인구센서스와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인구센서스에서 개신교 신자라고 말한 이들은 크게 늘었는데, 각 교단들의 교세 통계는 줄어든 것이다. 이렇게 감소했다는 교단 통계들이 등장한 것은 대략 2010년대 이후다.

지난 1990년대 이후 교회들의 구조화된 악순환의 고리들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고 더 악화되었다. 이와 맞물려서 사회적 신뢰도는 심각할 정도로 추락했다. 불교사회연구소의 2015년도 종교의 사회적 신뢰도 조사에 따르면 가톨릭과 불교의 종교신뢰도는 각각 39.8%, 32.8%인데 반해 개신교는 10.2%이고, 신부와 승려의 신뢰도가 각각 51.3%, 38.7%인데 목사는 17.0%이다. 이러한 결과는 개신교나 비종교권의 조사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개신교 신자는 감소해야 마땅하고, 1위인 불교와의 격차는 더 벌어졌어야 하며, 3위인 가톨릭과의 격차도 좁아졌어야 했다. 여기에 2020년에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교세가 역전될 것이라는 파국론이 개신교 목사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물론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각 교회들이 체감하는 현실도 심각한 위기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2015 인구센서스의 개신교 교세인 19.7%와 비슷한 결과들이 다른 조사들에서도 나온다는 사실이다. 2014년 한국갤럽의 종교인구 조사에서는 개신교 신자가 21%로 추산되었고, 개신교 복음주의 기관인 한국목회자협의회(한목협)2012년 조사에서는 22.5%로 나왔다. 단 한국갤럽의 조사는 불교도가 근소하게 더 많게(22%) 나온 반면 한목협 조사에서는 좀 더 작은 차이지만 불교도가 적게(22.1%) 나왔다는 것이 다르다.

이 조사들의 공통점은 그 수치가 교회의 재적교인 통계가 아니라 신자들의 종교 귀속의식 통계라는 점이다. 요컨대 2010년대의 각종 조사에서 자신이 개신교 신자라고 말한 이들은 총인구의 20% 안팎에 이르는 매우 높은 수치를 보인다. 이것은 ‘2015 인구센서스조사결과를 잘못된 것, 혹은 황당한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아니 그것이 황당함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관점이라면 신자들의 귀속의식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개신교의 이미지는 점점 추락하고 있고, 교회 자체의 재적 교인은 감소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개신교 신자라고 말한 이들이 줄지 않았고 오히려 늘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내가 추정하는 대답은 이렇다. ‘2005 인구센서스에서 개신교 신자임이 낮게 표기된 것과 ‘2015 인구센서스에서 높게 표기된 사이에는 두 조사 응답자들의 종교에 대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인식 기준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2005년도의 대중은 민주주의나 반미 같은 이데올로기적이고 진보주의적이라는 이성의 기획이 중요했었다면, 2015년의 대중은 그런 계산 가능한 미래에 대한 기획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오히려 자신의 상처받은 감정을 위로받고 싶어 하고, 산산이 부서진 사적 공동체들을 대체하는 대안적 공동체에 귀속되고 싶다는 갈망이 더 큰 이들이라는 것이다. 하여 개신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평가나 도덕적 평판보다는, 더 다양한 위로의 프로그램을 갖고 있고 더 긴밀하게 친구들과 엮일 수 있는 장(fields)을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 프로그램에 잘 참여하지 않는 이들 중에는 교회의 배타주의적 주장, 공격적 태도 등에 불평하는 이들이 많다. 즉 그들은 교회의 이데올로기적 포지션에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반면 그들은 교회를 매개로 해서 벌어지는 친밀성의 공동체에 속하려 하고, 그런 공적, 사적 모임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곤 한다. 요컨대 교회라는 친밀성 커뮤니티의 일원이고 싶어 하지만, 교회의 이념 마케팅이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예배나 대사회적 행보에는 좀처럼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2005년과 2015년에 신자 대중의 인식의 기준이 바뀌게 된 데에는 두 시기의 시대성이 달라졌기 때문일 수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2005년과는 달리 2010년대의 대중은 강자들의 탐욕에 유린된 추악한 보수주의적 정권들 아래서 신자유주의를 살아내기 위한 각자도생의 고단함에 찌들어 있게 되었다. 그이들은 살아남기 위한 부단한 자기계발에 몰두해야 했고, 끝없이 좌절하고 마는 실패 혹은 예감된 실패 속에서 힐링과 코칭에 목말라 하게 되었다. 바로 그런 프로그램들과 공감의 연결망이 가장 적극적으로 실행되는 장이 바로 개신교회였던 것이다.

결국 개신교 신자수를 둘러싼 교회사역자와 교단당국, 그리고 개신교 신학자인 나 자신의 황담함의 감정은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신자대중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읽어내지 못한 결과이고, 친밀성의 신앙 네트워크로서의 교회의 가능성을 읽어내지 못하는 교리 중심주의적 교회주의의 위험함의 산물이다. 아픔을 공감하고 거기에서 성찰의 자리들을 발견해내는 신앙, 그러한 비전을 꿈꾸지 못하는 불임의 종교성, 그것이 개신교인이고 싶어 하는 이들을 교인으로 포함시키지 못하는 개신교의 구조적 위기의 요체인 것이다.

 

종교인구 추이 속에 담긴 종교학의 곤혹스러움

 

‘2015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2005 인구센서스에서 점점 늘고 있던 종교인구가 감소했다. 종교인구의 감소에 대하여 기존의 여러 연구들은 사회의 발전과 종교인구의 확대는 서로 반비례 관계라는 세속화론적 논지로 해석하곤 했다. 그러나 앞 절에서 개신교 당국자들의 황당함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이러한 해석들은 사람들의 실제 체험을 잘 반영 못한다는 것이 나의 논지다.

사실 전 세계는 점점 종교적 기조가 강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발전 사회에서 종교가 대중 사이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세속화론이 종교가 쇠퇴일로에 있다고 말하는 서구사회에서도 포스트모던 신종교 현상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종교들이 활성화되고 있다. 이른바 명상과 자기계발, 그리고 힐링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종교성이 발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사회들에서 개신교의 성령운동의 세 번째 웨이브가 활발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한편 종교제도나 종교적 담론 형식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수행적 차원에서 종교적 기획과 유사한 자기계발-힐링의 프로그램들(코칭 프로그램과 리더십 프로그램)도 성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런 프로그램들이 기업화됨에 따라 종교효과는 전통적 종교기관을 넘어서 산업적 기관이 주도하는 추세를 보인다.

심지어는 마케팅학계의 구루라고 불리는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산업사회의 마켓 1.0’소비사회의 마켓 2.0’을 지나 영성사회의 마켓 3.0’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예언한 것처럼, 기업들이 종교적 상품 시장에 끼어드는 것을 넘어서 비종교적인 것을 종교적인 것으로 번안하여 새롭게 시장을 창출하려는 실험들을 활발하게 모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 정치인에 대한 팬덤 현상도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을 종교학의 교조라고 할 수 있는 조너던 스미스(Jonathan Z. Smith)의 표현을 빌려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이라고 한다면, 최근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시위문화로 부상한 촛불집회에서도 종교적인 것이 엿보인다. 과거 시위를 특징짓는 상징물은 깃발이었다. 깃발은 그 안에 추구하는 이념과 전략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깃발은 그 시위에 참여한 단체 소속원들의 공간적 위치 표식에 지나지 않다. 반면 시위에 참여한 대중 전체를 결속시키는 기호는 촛불이다. 거기에는 이념도 전략도 없다. 대신 염원이 그들 모두를 하나로 만든다. 촛불은 그 염원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전통적으로 종교적 설치물인 촛불이 그것을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촛불을 든 대중은, 낡은 질서에 대한 파괴와 해체의 정념에 불타오르던 과거의 시위하는 대중과는 달리, 체제가 주장하는 질서를 한층 더 승화시키는 존재임을 과장되게 연기한다. 그리고 집회가 끝난 뒤, 마치 예배 참여자들이 예배를 마치고 일상에 돌아가듯이, 그 어지러운 장소를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하며 귀가한다.

이렇게 오늘의 세계는 곳곳에서 더 종교적이다. 전통적 종교체제들이 대표했던 종교의 영토를 넘어서 모든 존재의 장소가 종교 혹은 종교적인 것들로 채워지고 있다. 그리고 과거 자본론에 몰입했던 대중은, 그리고 성서의 유일무이성에 함몰되었던 대중은, 자본론과 성서와 논어, 맹자, 도덕경, 각종 불경들을 읽는다. 그리고 많은 종교들에 존경심을 표하고 무속에서 삶의 의미를 읽어낸다. 과거에 한 종교에 몰입했던 혹은 무신론자임을 힘주어 말했던 이들이 자신을 가두었던 경계를 넘어 바깥을 넘나든다. 그런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러한 경계 넘기를 통해 종교적 체험을 한다, 혹은 종교적 이펙트를 경험한다.

한데 문제는 기성의 종교들은 그러한 종교 너머의 종교성에 대해 닫혀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과거에 구축된 경직된 언술들을 반복해 주장한다. 하여 종교의 경계를 더 높이 쌓고자 하는 운동을 벌인다. 한편 그렇게 구축된 질서 속에서 무수한 주류 매체들은 낡은 종교적 체계의 분류 방식에 따라 종교를 규정한다. 가령 인구센서스의 설문 같은 것이 그렇다. 개신교회를 다니고, 가톨릭 피정도 다녀오고, 템플스테이에도 참여하며, 유교 경전들과 불교 경전들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으며 굿판이 벌어지면 애써 찾아가 함께 한다. 또 새해가 되면 사주를 보고, 매일 오늘의 운세를 확인한다. 그런데 인구센서스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을 선택하게 한다. 하여 설문에 참여한 이는 어느 것이 자신의 종교인지를 단지 하나만 선택해서 표기할 수밖에 없다. 즉 기성의 종교제도와 담론, 그리고 이와 맞물린 사회의 제도는 변화하고 있는 새로운 종교성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도 다르지 않다. 아니 기성의 종교가 더욱 경직되어 있고, 그러한 경직된 종교성을 주도하는 개신교의 폐쇄성 탓에 더욱 닫힌 종교들의 사회가 되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의 폭력적 횡포가 사람들의 삶 전체를 옥죄고 있고, 거기서 벗어날 계산 가능한 미래가 무망한 현실에 갇혀 버린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몸과 마음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고, 그러한 질병에서 벗어나려는 종교적 갈망에 매달리고 있다. 한데 문제는 기존의 주류 종교들은 그러한 사람들의 고통과 질병에 무감각한 탓에 아무런 답도 주지 못하고 있다점에 있다. 심지어 개신교는 또 다른 질병을 추가하고 있다. 그것은 증오라는 질병이다.

특히 이데올로기와 코딩된 출구를 기획했던 2000년대 대중과는 달리 2010년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미래의 출구를 상상하지 못한 채 절망의 늪을 헤매면서 앞서 열거한 혹은 거기서도 미처 말하지 못한 종교성을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기성 종교들이 그것을 종교성이라고 호명하지 않은 탓에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성이 비종교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인구의 감소를 말하는 ‘2015 인구센서스는 곤혹스럽다.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그 곤혹스러움을 해명하기 위해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소속 없는 신자’,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멀티신자등이 그런 예들이다. 조금씩 다른 강조점을 갖고 있는 이 모든 문제제기들이 공히 함의하는 것은, 종교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삶과 연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결점을 신앙 속에 담아내지 못한 종교의 위기가 바로 종교성이 만연한 시대에 종교인구의 감소라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참고자료

 

[1] 3대 종단별 인구 변동(1985199520052015)



[2] 연령대별 종교 여부 (20052015)



 [3] 사회활동 참여율

 


[4] 지역별 종교인구 변동(2005:2015)


 



 

 

 

 

이 글은 트랜스크라이스트연구모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길목협동조합이 공동주관하고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SOGI법정책연구원, 퀴어문하축제가 후원한 심포지엄 <한국의 반성소수자 정치와 퀴어지정학>(2016 06 08. 향린교회)에서 발표된 원고입니다.


이 글을 수정 보완한 원고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キリスト教文化] (2017春)에 게재되었는데, 번역되기 이전 상태의 원고는 아래와 같습니다.

4.13 총선과 한국사회, 성소수자 논점의 현황과 전망_キリスト教文化 (2017春).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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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문제에서 퀴어 문제로

4.13 총선과 한국사회, 성소수자 논점의 현황과 전망

 

 

 




극우주의 정권

 

2012년 박근혜 정권이 집권함으로써 극우적 신권위주의 정권이 재탄생하였다. 1인의 절대적(카리스마적[각주:1]) 지도자와 그이에게 충성경쟁을 하는 광범위한 범주의 테크노크라트의 존재, 그리고 대중의 광적인 지지 현상 등이 결합되어, 민주적 절차와 형식을 무시한 절대적 1인의 강권적 통치의 사회가 된 것이다.

이 절대적 1인은 국민을 우리 대 적으로 양분하고, 다수의 국민을 우리의 일원으로 묶어내기 위해 공포의 감정을 적극 활용한다.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이 가공할 세력으로 우리 앞에 사납게 도사리고 있고, 심지어는 우리사이에 슬며시 잠입해 들어온 ‘(위장된) 내부의 적이 준동하고 있으므로 경각심을 한시도 이완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글에서 내가 공포마케팅이라고 불렀던 이러한 정치를 박근혜 정부는 처음부터 거의 시종일관 지속시켜 왔다.[각주:2]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을 엄밀한 의미에서 ()권위주의적[각주:3] 지도자라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과거 유신통치 시대와는 달리 사회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졌고, 테크노크라트 집단도 복잡하고 다층적인 계산의 주체들이라는 점에서 상명하복의 위계질서로 단순화시킬 수 없다. 가령 검찰조직을 구심점으로 하는 법조계의 계급적 충성심이 로펌회사들의 이익 카르텔을 구심점으로 하는 전략적 충성심으로 흡수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권력 집단들 간의 충성경쟁이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 점에서 이 정부가 1인의 명확한 중심을 기반으로 하는 ()권위주의적 체제라기보다는 차라리 탈중심적 권력집단 간에 이루어진 비상한전략적 합의가 낳은 유사()권위주의 체제라고 보는 게 적합하다.

나는 이 유사()권위주의 체제가 탈중심적 권력집단의 (전략적) 중심화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일단 포스트()권위주의 체제로서 성격 규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독특한 체제가 도래하게 될 가능성의 근저에는 콘크리트 지지율이라는 비상한 대중적 지지 현상이 있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 실세들은 이 정권이 박정희 시대와 같은 ()권위주의 체제의 재구축이라고 오인함으로써, 박근혜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된 체제적 실험은 성공할 수 없고 구조적으로 내파하고 말 운명에 놓여 있다고 예측한 바 있다.[각주:4] 실제로 20164.13 총선은 그러한 내파의 순간이 극적으로 다가왔음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하여 권위적 극우주의 체제를 향한 실험은 이제 거의 종착지에 다다른 것 같다.

 

콘크리트 지지율

 

말했던 것처럼 박근혜 정권의 가장 중요한 권력 기반은 비상한 콘크리트 지지율이다. 그것을 좀 더 심층적으로 살펴보자. 이 정권의 지지자들은 크게 네 층위로 나뉜다. (1)서울의 강남 지역들과 그 인근 신도시들의 중상위계층, (2)TK(대구-경북) + PK(부산 경남) 지역주의로 포섭되는 이들, (3)극우주의자들(개신교계 + 비개신교계), (4)(빈곤)노년층.

박정희 대통령 시대 이후 과잉 성장한 강남권과 인근 신도시들은 주로 토지로 인한 막대한 초과이윤으로 빠르게 중상위계층으로 부상한 이들의 집단 거주지로 발전하였다. 이후 이 지역은 성장지상주의 계보를 잇는 정권의 확고한 지지세력으로 자리잡았다. 이들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범주의 지지 세력이다. 한편 ‘TK + PK지지 현상은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을 견제하기 위해 활용한 선거 아젠다가 차등적 지역분할 정책으로 체계화되면서 나타난 지역주의의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이 두 층위는 박근혜 정부만의 특별한 지지세력이 아니다. 즉 이 두 범주는 박근혜 현상의 비상함을 읽어내는 변수로 볼 수 없다.

세 번째 층위인 극우주의 세력들은 거의 언제나 보수주의 정권들을 열렬히 지지해온 세력이라는 점에서 앞의 두 범주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1987년 체제[각주:5] 이후 극우주의 세력은 항상 보수적 권력연합의 일원이었지만 언제나 중심적 위상에 있지 못하였다.

한데 기업가적 실용성을 기치로 내걸며 탄생한 정부였던 ‘MB 정권이 천안함 사건(2010) 이후 이념프레임에 포박되어 집권기간 내내 강경 이념 성향의 정치에 몰두하게 되는 과정에서 군부와 국가정보원이 재정치화[각주:6]되었고, 종합편성 채널들이 생존경쟁을 위해 값싼 종북 마케팅에 열을 올리면서 극우주의적 세력들이 부상하였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서 1989년 결성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필두로 하여 극우반공주의적 시민사회가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게 되었다. 특히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선거 전략으로 종북 프레임이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극우주의적 엘리트들이 권력연합을 추동하는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박근혜 정부는 집권 내내 초강성의 종북 마케팅에 치중했고, 이것은 극우주의자들의 주도권이 계속 이어지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하여 극우주의자들은 박근혜 정부를 더욱 열렬히 지지하는 세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빈곤)노년층의 지지는 거의 일방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박정희에 대한 메시아적 기대가 기반이 되고 있는 것 같다. 노년층만큼은 아니더라도 저학력 저소득층에 대해서도 대체로 유사한 설명이 가능하다. 사회의 다른 어느 범주보다 더 깊은 절망의 수렁으로 떨어져 버린 이들에게 반전의 가능성은 거의 막혀버렸고, 그것은 상상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종교를 갈망하게 되는데, 이때 빈곤노년층이 그 세대 특유의 집단적 체험을 회상하게 되면서 박정희 메시아니즘이 불타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1997년 김정렴, 조갑제, 이인화 등 극우주의적 예언자들에 의해 발명된 박정희 메시아니즘의 서사화다. 이후 이것은 박정희 메시아 담론으로 부상했고 박정희 시대를 체험하지 못한 세대에까지 박정희 메시아니즘이 뿌리 깊게 각인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다 MB 정부를 거치면서 절망의 정도가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가장 극한의 절망 속에 허덕이는 빈곤노년층과 저학력 저소득층 사이에서 메시아적 갈망의 대상으로, 너무나 아비를 닮은, 박정희의 딸이 메시아적 주인공으로 부각된 것이다.[각주:7]

이렇게 세 번째와 네 번째 범주는 박근혜에 대한 비상한 대중적 지지 현상의 주된 분석 대상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세 번째 범주는 이 정권의 극우주의적 정치와 관련이 있고, 네 번째 범주는 대중의 메시아적 갈망과 관련이 있다. 카리스마적 절대 1인에 의한 극우적이고 반민주적인 일방주의 정치는 바로 이러한 대중적 지지와 상호 관련되어 있고, 이것이 콘크리트 지지 현상을 추동하는 요소이며, 바로 이것이 권력연합을 구성하는 집단들이 본질적으로 탈중심적임에도 절대1인에 대한 충성경쟁처럼 보이는 가짜()권위주의적 동맹이 작동되었던 이유다.

 

내파

 

20164.13 총선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냈다. 박근혜 정권이 마치 ()권위주의 체제처럼 다양한 권력집단의 구심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요소인 높은 콘크리트 지지율이 신기루처럼 무너진 것이다. 총선 결과는 그것의 회복을 시도할 틈도 없이 각 세력들이 우와좌왕하며 독자적 생존게임에 돌입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는 앞에서 언급한 지지 범주들 중 특별히 개신교와 관련이 깊은 두 범주의 내파 양상과 맥락들을 살펴보겠다.

 

극우주의적 내파기독자유당

 

20164.13 총선에 참여한 25개 정당 가운데 개신교계 정당은 두 개인데, 두 당 모두 반공, 반동성애, 반이슬람 기조를 강하게 드러내었다. 특히 상대적 다수파인 기독자유당은 극우주의적 정당으로 반동성애 이슈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주요 관계자들 모두가 반동성애 관련 발언을 강도 높게 주장했고, 10명의 비례대표 명단에서 당의 강령들을 대변할 실무 전문가는 오직 반동성애적 의료단체의 전문위원으로 있는 3번 후보 한 명뿐이다.

총선 결과에 따르면 기독자유당은 2.63%를 득표하였는데, 이는 역대 기독정당 중 가장 높은 수치다. 또 이번 선거에 참여한 25개 정당 중 다섯 번째로 많은 지지를 받았다. 여기에 0.54%를 득표한 기독민주당의 표를 산술적으로 합산하면 3.17%인데, 이 대로라면 비례대표 한 석을 얻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다지 우려할 일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기독자유당 관계자들은 애초에 이번 선거만큼은 이제까지 어느 기독정당들보다 큰 성공을 이룩할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개신교계의 유력한 지도자들이 대거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표명했다.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가 적극 참여하기로 했고, 그가 총회장으로 있는 교단은 전국 소속교회들의 신도 160만 명의 지지를 위한 캠페인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윤석전 목사 같은 교인들에 대한 장악력이 높은 대형교회 목사들, 장경동 목사 같은 전국적으로 영향력 있는 교회 지도자들도 적극적 참여 의사를 표했다. 여기에 더불어민주당의 현역국회의원이고 새천년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를 역임한 이윤석이 소속 정당을 탈당하여 기독자유당에 입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지역의원은 고사하고 비례대표 한 석도 얻지 못했고, 반동성애 이유가 가장 잘 통할 것 같았던 수도권의 득표율이 매우 저조했다. 가장 높은 득표를 한 곳은 경상북도인데, 필경 이것은 새누리당 이탈자 중 개신교 신자들 일부가 이 당을 선택한 결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것은 전국적인 현상일 것이다. 요컨대 이 당이 사활을 걸었던 이슈는 거의 먹혀들지 않았고, 새누리당 이탈표가 가장 중요한 득표 요인으로 보인다. 즉 기독자유당은 이전까지의 어떤 기독정당들보다 더 많은 지지를 얻어냈지만, 그것은 집권여당의 응집력이 극도로 이완된 특수한 정세에 따른 것으로, 확장 가능성이 없는 지지였다는 것이다.

 

동성애 혐오동맹

 

기독자유당은 극우정당이다. 박근혜 정부도 극우주의적 권력연합이다. 그렇다면 왜 기독자유당은 박근혜 정부 하의 극우주의 정당인 새누리당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어야 했을까? 말할 것도 없다. 이 정당은 2004년 조용기김준곤 등이 주도한 한국기독당을 계승하고 있고, 2008년 기독사랑실천당, 2012년 기독자유민주당을 이끌었던 전광훈 목사가 주도하는 당이다. 2004년 이래 기독정당을 추진하는 일단의 세력들은 보수주의적 권력연합에 동참하지 않고 독자정당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이전의 정당들이 공히 주장하는 핵심 논지는 강경 반북노선에 초점이 있었다. 이 점에서 기독자유당도 다르지 않다. 다만 기독자유당은 이전의 정당들이 전혀 혹은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반동성애 아젠다를 핵심 의제로 부각시켰다. 말했듯이 이 점은 기독민주당도 다르지 않다. 요컨대 2012년 이전과는 달리 2016년의 기독교 독자정당들이 기대한 것은 동성애 혐오동맹의 형성이었다.

여기서 기독자유당 중심집단이 기대한 동성애 혐오동맹의 구성 범주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i)기독자유당 + (ii)개신교 교회들 + (iii)개신교계 반동성애 활동조직 + (iv)비개신교적 반동성애 성향의 시민사회. 이것은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주도하는 극우주의 권련연합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추진하는 그들의 주요 명분이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극우주의가 문제여서가 아니라 반동성애 활동에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반동성애 운동은 개신교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정치운동을 통해 실현하여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실제로 개신교계 반동성애 세력들은 차별금지법, 학생인권보호조례, 동성애 관련 문화적 컨텐츠, 군대내 동성애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보수적 정부나 지방자치체보다 훨씬 보수주의적 관점을 일관되게 표명해왔다. 심지어는 동성애자를 강제 구금하고 치료하며, 실형에 처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반동성애 문제에 관해서는 어떤 정치세력과도 구별되는, 나아가 극우주의적 정권과도 차별화되는 분리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개신교적 반동성애 혐오동맹의 논리야말로 가장 선명한 개신교 독자정당의 명분이 될 수 있다. 개신교의 독자정당 추진세력들을 늘 괴롭혀온 논리는, 양당체제로 분할된 현재의 정치 구도 아래서는 보수주의적 권력연합에 참여하는 것이 대의라는 것이었다. 장로대통령이 통치하는 정부나 극우주의 성향의 정부에서 그러한 대의는 더욱 강력한 흡인력을 지녔다. 그런 점에서 반이슬람과 반동성애는 어떤 보수주의적 정권의 흡인력에도 포괄될 수 없는 기독정당 만의 독자적인 상품일 수 있는데, 위의 혐오동맹의 구성범주들 중 ‘(ii)개신교 교회들 + (iii)개신교계 활동조직 + (iv)비개신교적 시민사회의 차원에서 반이슬람 이슈는 어느 범주에서도 약한 대중적 기반을 지니는 데 반해 반동성애는 강력한 기반이 있다는 것, 그것이 기독정당들로 하여금 반동성애를 가장 중요한 아젠다로 부각시킨 결정적 이유라고 판단된다.

나는 위에서 기독자유당의 반동성애적 아젠다는 독자정당을 위한 전략적 요소라고 주장했다. 물론 정당 추진 주체들은 전략적인 선택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본질주의적 신념의 소산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진화발생학(Evolutionary Developmental Biology)적 개념인 자기기만(self-deception) 행위에 해당한다.[각주:8] 즉 그이들의 신앙이나 신념에서 동성애 문제는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고 단지 어느 시기부터 특정한 필요에 의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지만, 마치 그것을 처음부터 심각하게 직시했었고 그럴 만큼 그것은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자기기만 함으로써 그들이 추진하고 있는 독자정당의 신념이 정당하고 필연적이라는 주장의 대외적 설득력을 극대화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왜 하필

 

그렇다면 왜 하필 많은 것들 중에서 동성애 혐오가 자기기만의 도구로 선택된 것일까? 위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동성애 이슈야말로 이명박 정부-한나라당이나 박근혜 정부-새누리당과 자신들을 차별화하기에 유용하고, 대중을 자신들의 특화된 논점의 장으로 유인하기 적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왜냐면 그러한 선택지가 이미 주어져 있고, 그것에 대한 논리적 서사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즉 맨 땅에 머리받기 같은 밑도 끝도 없는 너무나 창의적인 발명이라면 자기기만은 거의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기만은 대개 그런 상상력이 가능한 환경과 문화의 기반 위에서 등장한다. 즉 기독자유당 추진 주체세력들의 상상력은 이미 활발한 반동성애 운동을 벌여온 기독교계 활동조직들과 교회의 대중들이 구축한 반동성애적 담론 환경의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이 미국 개신교 극우주의자들에게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은 이런 담론 환경에 강한 공신력을 부여했다. 이것은 기독정당 추진을 주도한 개신교 일부 지도자들이 미국의 개신교 극우주의자들에 대한 지나친 신뢰 혹은 예속의식과 관련이 있다.[각주:9]

 

극우주의적 내파의 한계

 

말했듯이 개신교 극우주의자들의 독자정당 세력이 거둔 성과는 주로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의 구심력의 와해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극우주의적 내파가 기독자유당으로 이어진다는 것, 그러한 극우주의적 내파의 경로가 기독자유당이라는 점을 우리는 유의미한 변수로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기독자유당은 박근혜 정부-새누리당의 극우주의적 내파를 동성애 혐오동맹의 시각에서 경로화했다. 그러니까 가령 기독자유당식 동성애 혐오주의에 동조하기를 꺼려하는 이는, 비록 극우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고 동성애에 우호적이지 않는 기독교도라고 하더라도, 기독자유당이 주도하는 동성애 혐오동맹에 참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때 대안적 기독정당이나 극우주의 정당이 없다면 그들은 다른 동맹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내가 앞에서 이야기한 기독자유당 지지율의 확장성의 한계에 관한 주장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 절에서 이야기할 내파의 다른 범주에 대한 논의와 연관이 있다.

 

중간범주의 내파

 

20164.13 총선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결과의 하나는 중간범주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제도는 양당제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구축되었는데, 국민들의 투표는 그것에 저항했다. 그리고 제도는 크게 흔들렸다. 이때 주목할 것은,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의 양당구조가 흔들린 결과가 그 왼편과 오른편 정치세력의 강화가 아닌 중간범주의 뚜렷한 대두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지난 2008MB 정부가 출범했을 때 정권을 구성한 주요 요소 중 하나는 이른바 선진화라는 중간범주의 담론적 실체였다. 그리고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할 당시 강력하게 작용했던 요소의 하나는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내걸은 중간범주적 문제틀이었다. 이것이 중간범주적 문제틀인 것은 박근혜 정부-새누리당 내에서 벌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중간적 요소는 이 두 정권 내내 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한데 2016년 새누리당의 내파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수도권 중심의 중간범주였다.

산업화와 민주화, 이 두 요소는 1987년 이후 한국사회의 정치적 제도를 양분하는 이데올로기적 축이었다. 이후 어느 정치세력도 두 축을 전제하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었다. 또한 어느 정치세력도 이 두 축 밖에서 대두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초강성의 반공주의를 내세우면서 1987년 이후의 이데올로기적 양축을 해체하고 그 이전으로 회귀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이 극우주의 정권은 합법적 체제라기보다는 법 위의카리스마적 체제(유신체제나 신군부체제 같은)에 가까웠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새누리당의 내파를 뚜렷이 보여준 2016년의 현상은 양당제 복권으로의 기조도 있었지만, 양당제의 해체를 향한 기조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때 중간범주를 반영하는 정치적 슬로건은 정치의 도덕화.

 

정치의 도덕화와 강남좌파

 

서울 강남권과 인근 신도시들에서 중상위계층이 대두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지대의 급격한 상승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후 한국에서 1961년을 정점으로 하는 1955년부터 1963년까지, 그리고 1972년을 정점으로 하는 1968년부터 1974년까지 두 번의 베이비붐이 있었고, 이 두 베이비붐 세대가 40대를 넘어서고 60대 초입에 들어선 현재, 인구 구성이나 자산[각주:10] 능력에서 이 세대는 가장 강력한 세대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제1차 베이비붐 세대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자산은 부동산과 관련이 있다. 이들 중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가장 우월한 자산 능력을 지닌 이들이 서울 강남권과 인근 신도시들에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세대는 공교육 체계가 체계적으로 작동하던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냈고, 어린 시절부터 비약적인 경제적 성장을 체험하였으며,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기조가 가장 강력하던 시절에 청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이들이 기성세대에 진입할 무렵 민주적인 정권교체의 체험을 하였다. 한편 이들은 청년기에 소비자본주의를 체험한 세대였고 지구화의 주역으로 소비자본주의적 문화와 제도를 현장에서 제도화하고 구축한 주역이다. 무엇보다도 초고속의 성장과 민주화의 체험은 이 세대 전체의 일생에 영향을 미치는 세대적인 집단 기억의 코드라고 할 수 있다.[각주:11]

그런데 이러한, 청소년과 청년기에 형성된 세대적인 집단 기억의 코드는 구체적인 삶의 스타일이나 문화적 양식, 정치적 태도에 대한 집단적 행위 양식으로 구체화되어 표현되는 데는 여러 변수들이 작용한다. 그 변수들 중 내가 주목하는 것은 강남이라는 사회문화적 삶들이 교차하고 실행되는 현장이다. 이 현장을 거치면서 세대적인 집단 기억의 코드가 사회적인 집단적 실천으로 나타나게 되는 하나의 경로가 노정된다. 가령, 강남에서의 막대한 토지 초과이윤에 주로 기반을 두고 등장한 중상위계층은 이후 한국사회에서 경제력뿐 아니라 각종의 사회적 자본과 상징자본을 독과점했다. 이때 강남그들끼리의 사회적 교류의 장이었다. 이 지역을 매개로 이들의 자녀는 양질의 교육, 결혼, 직업의 기회를 누리며 이른바 품격 있는 시민이 될 수 있었다. 또한 강남을 소비사회의 모던적 문화공간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때, ‘모던 공간 강남은 한편에서는 개걸스런 소비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장소로서 소비되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성찰적 소비문화의 장소이기도 했다.[각주:12] 이때 부상한 삶의 스타일적 용어가 웰빙이다.

이러한 웰빙적 문화는 그 영역을 점점 확대했고, 정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흔적들이 선진화니 경제민주화니 강남좌파니 하는 담론 현상으로 나타났고, 그것이 최근 제도정치화되는 과정에서 중간범주 정치의 이슈로 부상한 것이 정치의 도덕화.

 

대형교회와 웰빙신앙

 

그런데 이러한 사회문화적 현장을 좀더 디데일하게 볼 때 서울 강남권의 대형교회가 주목된다. 한국사회에서 대형교회는 1980,90년대 서울 강남권과 인근 신도시들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중소형교회가 대형교회로 성장하는 데 있어 교회당의 대대적인 ()건축이 유효했다. 교회당을 초대형으로 ()건축하려면 막대한 건축비가 소요되는데, 일반적으로 같은 규모의 건물보다 교회당은 훨씬 더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1980,90년대 강남권과 신도시의 토지로 인한 막대한 초과이윤이 이 지역들에서 더 많은 대형교회를 탄생시키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강남권의 대형교회는 특정 지역의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수십 년 동안, 아니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적어도 주 1회 이상의 공식적 모임을 갖고, 그밖에 공식 비공식의 회합과 교류가 무수히 일어나는 장소다. 한국사회에서 이와 비견할 만한 다른 장소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중소형교회보다 대형교회를 더 주목하는 것은 대형교회에서는 중소형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주 그리고 깊게 문화적 사회적 자원의 교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한데 이 사회문화적 자원의 교류가 일어나는 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회적 문화적 담론은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매개로 하며 일어난다. 그런 점에서 강남권 대형교회가 발생시키는 사회문화적 담론 현상을 웰빙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계몽적 보수주의

 

웰빙신앙은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적이다. 즉 강남권에서 ‘386’이라는 세대효과가 구체적인 사회문화적 실천으로 발현되는 과정에서 대형교회가 경로화하는 양식은 보수주의라는 얘기다. 그것은 그 장소가 한국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길게 얘기할 수 없지만, 한국교회의 절대다수는 서북주의를 통해 신앙의 주체화가 노정되었다.[각주:13] 서북주의는 기본적으로 근본주의적이고, 정치적으로 극우주의와 친화적이다. 이것은 목회자 양성과정에서 가장 잘 나타나며, 특히 대형교회의 목회자에게서 더 잘 드러난다.

좀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키 말하면 서북주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사회문화적 삶의 양식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 문제는 강남권 대형교회 신자들의 사회문화적 삶의 양식인 웰빙신앙과 목회자들의 서북주의적 신앙이 기본적으로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타협과 협상의 전문가들인 대형교회 목회자들과 사회적으로 성공한 중상위계층의 엘리트교인들은 서로 충돌하고 이념투쟁을 벌기보다는 공존을 택했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잘 형성된 중상위계층의 사회문화적 교류의 장이자 목회자에게 있어 가장 양질의 사역지인 대형교회를 어느 누구도 투쟁의 장소로 만신창이가 되게 하고 싶지 않았겠다. 해서 그들은 서로를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해서 교회 에서는 화해적으로 공존하며, ‘에서 각자 자신의 신앙적 양식을 정치화하는 일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웰빙신앙의 정치화를 도모하는 엘리트 신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20164.13총선은 양적 질적으로 뚜렷한 성과를 이룩했다. 나는 이러한, 웰빙신앙의 제도정치화의 아젠다를 정치의 도덕화라고 불렀고 이때 웰빙보수주의적 신앙의 주역은 계몽적 보수주의로 사회화되었다고 본 것이다.

 

계몽적 보수주의와 동성애

 

나는 최근 부상하고 있는 한국정치의 중간범주적 주체인 계몽적 보수주의자들의 가장 중요한 매트릭스를 강남권 대형교회라고 보았다. 동시에 대형교회는 목회자들의 서북주의적 신앙의 매트릭스이기도 하다. 또 이 양자 간의 신사협정으로 교회 내부는 새누리당처럼 내파하지 않고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데 최근 개신교회들의 위기는 점점 목사들, 그리고 비슷한 극우주의 성향의 장로들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다. 시민사회는 점점 부정적 시각으로 개신교회들을 바라보고, 교회 당국과 목회자에 대한 교인들의 충성심은 크게 이완되었다. 이러한 신자공동체의 결속력의 위기와 사회적 공신력의 위기에 직면해서 그 초조함의 반영이 크게 세 가지 실천으로 나타났다. 한국사회 내부에서 소통되는 위기를 외적 팽창주의로 전환시키려는 선교 열풍이고, 미국발 성장주의 신학인 번영신학적 열풍이며, 그리고 정치세력화가 그것이다. 이중 마지막 정치세력화 시도는 미국의 ()복음주의 우파 세력의 모델을 차용하면서 나타난다. 이때 미국식 정치의 도덕화전략이 수입되었는데, 앞에서 내가 자기기만의 양상이라고 보았던 반동성애 이슈가 바로 그 대표적이다. 즉 종교의 위기로 인한 초조함의 타개책으로 미국발 정치의 도덕화로서의 반동성애 이슈를 활용하였지만, 자기기만 작용을 통해 그 현상학적 양상은 반동성애 근본주의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기독교의 정치세력화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신자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고자 했다. MB 정권이 탄생하는 과정이나 박근혜 정부가 반공주의적 공포정치를 드라이브 하는 과정에서 많은 목사들이 신자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려는 활동은 신자들의 공공연한 이반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는데, 20164.13 총선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많은 목사들은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공공연히 지지하는 발언을 했고 다른 목사들은 독자정당에 지지할 것을 공공연히 요청했으며, 그 맥락에서 반동성애 이슈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는데, 이번에는 그것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새누리당도 독자정당도 아닌 다른 제3의 지대로, 특히 중간범주를 향하여 대대적인 이동을 하였다.

나는 여기서 목사들의 반동성애 이슈에 대한 부정적 문제인식이 강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몇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추정해 보면 동성애 반대를 외치는 목사들의 공공연한 무대포적 비난의 무논리가 탄로되었고, 그것이 웰빙적 도덕주의가 추구하는 관용과 충돌한다는 것을 인식하였던 것 같다. 대형교회의 엘리트 신자들은 미국과 서양의 모더니즘을 계몽적 보수주의의 원전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최근 동성애 문제에 대한 미국과 서구 사회들에서의 개방적 양상은 계몽적 보수주의자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성찰을 부추겼다. 한국의 기성세대 대부분은 섹슈얼리티에 대해 보수적 인식을 하고 있는데, 계몽적 보수주의자들의 서구적 모던 의식은 그들을 인지 부조화 상황으로 내몰았다. 이럴 때 대외적 행위는 과장되게 모던적 가치를 주장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마련인데, 더구나 동성애 반대 주장을 펴는 목사들의 비논리와 시대착오적 독선은 더욱 그들로 하여금 계몽적 자의식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여 교회 안에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목사들의 열정적인 반동성애 활동과는 달리 거의 의식적으로 보일만큼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사적 대화의 장에서는 거리낌 없이 관용적 태도를 공공연히 보이는 이들이 현저히 늘었다. 나는 이 현상을 가속화시킨 것은 서양에서의 새로운 개방적인 성적 트랜드와 목사들에 대한 반감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신상으로서의 동성애

 

웰빙보수주의가 문화적 영역에서 정치적 영역으로 확산되면서 계몽적 보수주의자들이 등장했고, 그 현상이 태어날 때부터 넉넉한 자산을 가지고 있고 좋은교육과 결혼과 취업의 기회를 누린 이들 사이에서 더 두드러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대형교회가 바로 이런 이들의 삶의 교류가 발생하는 사회적 장소라면, 교회가 주도하는 반동성애 운동은 점점 위축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아직 그런 목사들과 장로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원은 풍족하며 이들에 의해 고용되어 타자를 공격하는 행위에 동원되고 그 과정에서 적대적 편견의 사도처럼 생각하게 될 자들은 적지 않다. 또한 그들을 이용하여 정치적 성공을 도모하려는 이들도 계속 등장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격적 반동성애 운동은 성적 소수자들을 여전히 많이 힘들게 할 것이 충분히 예상된다. 하여 저들 공격적 극우주의자들에 대한 싸움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러한 기조가 점점 위축되고 있고 많은 경제적 사회문화적 자본을 가진 이들이 계몽적 보수주의자를 자임하는 경향에 대해 낙관할 수만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런 경향은 동성애만이 아니라 다양한 성적 소수자를 부각시킬 것이고, 한편에서는 관용이라는 인권적 가치를 더 많이 적용시키는 방향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변화는 동성애자를 포함한 성적 소수자들을 상품으로 소비하는 사회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은 성적 소수자들의 (상품)미학을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한데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상품이 된다는 것은 소비가치가 없는 이들의 퇴출을 동반한다. 여기서 소비가치를 잃어버린 성적 소수자는, 소수자이기에 의당 받아야 하는 인권적 보호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정치의 도덕화가 추동하는 사회는 그런 방식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비판력이 무력해진 사회다.

이때 소비가치가 없는 성적 소수자를 소비할 때 사회는 그이들의 부적절함을 처벌하면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가중처벌의 요소로 그이들의 소수자적 섹슈얼리티를 호명할 것이다. 이 경우 사회는 이성애주의적 호명 양식에 의해 그러한 처벌과 배제를 작동시킨다.(부드러운 야만) 그런 점에서 이성애주의적 작동의 메커니즘, 그것을 야기시키는 문화적 양식 등을 문제시하는 퀴어적 비판력이 요청된다. 즉 퀴어적 사유의 틀은 향후 상품으로서의 성소수자를 소비하는 사회에서 성소수자 운동의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1. ‘카리스마적’이라고 한 것은 막스 베버의 어법을 따라 ‘합법적’인 것의 대응어로 사용하였다.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전자가 법을 대하는 태도가 법의 제정자와 같다는 데 있다. 즉 그이는 법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을 ‘법의 제정자’로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2. 김진호,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와 '증오의 정치학'〉, 이택광 외, 《지금 여기의 극우주의》 (자음과 모음, 2014) [본문으로]
  3. ‘신’권위주의는 전제군주체제와 구분하기 위한 것인데, 이 글에서 그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본문으로]
  4. 김진호,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와 '증오의 정치학'〉; ―, 〈증오의 메시아 정치, 그 불온함―2012년 이후 한국사회의 종교심 비판〉, 《오늘의 문예비평》 93(2014 여름). [본문으로]
  5. ‘1987년 체제’라는 용어는 사회학자 박형준이 처음 명명하였고 《당대비평》 24(2003 겨울)호가 특집주제로 다루면서 널리 확산된 것으로, 민주주의 동맹이 주도한 시기 한국사회의 성격에 관한 가설적 개념어다. [본문으로]
  6.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정치화된 군부의 핵심세력인 하나회를 해체하고 군 개혁을 시도함으로써 군부는 결정적으로 탈정치화되었다. [본문으로]
  7. 나의 글 〈메시아주의, 한국 정치의 어떤 열망〉, 《당신들의 대통령―선출된 왕과 민주주의, 그 이후》 (문주, 2012). [본문으로]
  8. 최종덕, 〈‘기획 속임과 자발적 속음’ 진화발생학적 해부―황우석 교수 사태의 매스컴 결합, 사회적 자기기만의 완성형 공조〉(민주사회정책연구원 심포지엄 ‘황우석 사태로 보는 한국의 과학과 민주주의’ 자료집, 2006.2.2) [본문으로]
  9. 나는 여기서 일본 도코대학의 고모리 요이치(小森陽一) 교수의 ‘식민지적 무의식’을 염두에 두고 있다. 송태욱 옮김, 《포스트콜로니얼.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삼인 2002) 참조. [본문으로]
  10. 이것은 경제적 자산과 사회적 자산을 포괄한 것이다. [본문으로]
  11. 칼 만하임은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경험한 역사적인 집단적인 체험이 일생에 걸쳐 세대효과로서 작용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코호트(cohort)라는 세대효과를 가리키는 용어를 사용했다. [본문으로]
  12. 반면 과잉소비공간으로 부상한 일부 강북이나 지방의 특정 장소들은 강남보다 훨씬 더 강력한 소비주의적 욕망을 구현하곤 하였다. [본문으로]
  13. ‘서북주의’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인터넷신문 《에큐메니안》에 연재되고 있는 〈나의 글 한국사회와 개신교 극우주의. 서론〉을 보라.(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18) [본문으로]

이 정권이 집권하고 1년 반이 지나기까지 가장 놀라운 일은 대통령의 지지율이 장기간 대단히 높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더욱 놀라운 점은 그 기간 동안 정부와 관련된 비리추문거짓말무능실패 등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는 점이다게다가 이렇다 할 정책적정치적 성과도 전무했다(...) 그렇다면 합리적 이유가 없음에도 높게 유지되는 지지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다양한 해석이 있겠지만나는 대통령이 메시아정치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그 주된 이유라고 이해한다.(본문 중)


[오늘의 문예비평(2014 여름호)] 특집 기사 <메시아를 기다리지 마라!> 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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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메시아정치, 그 불온함

2012년 이후 한국사회의 종교성 비판

 

김진호(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오늘 한국의 종교성

 

이 글은 한국사회가 최근 점점 더 종교성이 강화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종교성이란 논자마다 포착하고자 하는 현상에 따라 각기 다르게 해석되고 있어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불가능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종교성의 요체를 구원/해방에 대한 갈망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감내하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 버거운데 거기에서 벗어날 수단이 거의 없다고 생각할 때 나타난다. 특히 이성의 기획이 고통과 결핍을 해석하는 데 실패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확신을 주지 못다고 여겨질 때 사람들은 구원/해방에 대한 감성의 기획인 종교성에 좀 더 몰두하게 된다. 물론 종교성과 비종교성이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거의 모든 경우 양자는 공존한다. 하여 사람들은 불가능해보일 때조차 고통으로부터의 출구를 찾으려는 이성의 기획에 치열하게 몰두한다. 하지만 동시에 절망이 깊을수록 종교적 열망이 점점 깊어진다.


이러한 구원/해방에 대한 강한 종교적 열망은 대개 메시아적 존재에 대한 기대와 결합되어 있다. 메시아는 기본적으로 낯섦을 특징으로 한다. 이 낯섦은 사람들의 기대를 초월하는 낯섦이다. 그것은 사람들 각자가 체감하고 있는 현실의 체제, 그 체제의 본질적 비루함에 구속되지 않는 존재임을 뜻한다. 그래야만 그이가 사람들의 구원자/해방자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각주:1]


한데 이런 이해는 종교제도와 종교성을 직결시키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요컨대 종교제도는 고통 혹은 결핍을 전제로 하는 제도이기는 하지만, 그 제도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고통이나 결핍을 실존적으로 체감하지 않고도 종교인(宗敎人)일 수 있다. 가령 최근 한국의 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구원을 갈망하기 때문에 교회에 속해 있기보다는, 부모가 그 교회의 교인이기에 혹은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어 온 친근성의 공간이기에 그 교회의 교인으로 남아 있다. 심지어는 꽤 괜찮은 결혼시장이기 때문에 혹은 풍부한 사적 인맥 풀(pool)이기 때문에 그 교회에 속해 있다.[각주:2] 물론 교회의 담론 속에는 구원에 대한 갈망의 언표들이 무수히 담겨 있지만 적지 않은 신자들은 그것들을 단지 기계적으로 되뇔 뿐이다. 이처럼 많은 경우 기성의 종교제도들은 사람들의 종교성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하여 우리사회에서 종교적 구원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는 많은 이들은 특정 종교제도에 속하기를 망설이고 있거나 적극적으로 거절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특정 종교제도의 외부에서 종교적으로 행동하곤 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종교성에 관한 것은 바로 이런 현상을 포함한다.


한데 나는 이 종교성이 한국사회에 속한 다수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집단적 체험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즉 오늘 우리사회에서 고통 혹은 결핍의 느낌은 개별화된 절망감을 넘어 집단적으로 체감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집단적 절망감을 해소시켜줄 미래의 기획들은 더 이상 희망을 이끌어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 한국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종교적 구원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과 결핍의 상황에서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데 실패한 것은 이성의 기획만이 아니다. 기성의 종교들도 사람들의 종교적 갈망에 답을 주지 못했다. 하여 사람들의 종교성은 귀의할 곳을 찾지 못한 채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많은 사람들이 이성의 기획외부에서 그리고 종교제도 밖에서구원의 계기를 발견하고자 열렬한 종교적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메시아적 존재도 기성의 종교 제도 밖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은 바로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출발한다. 즉 최근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더 강한 종교성을 나타내고 있고, 이 종교성은 종교제도 밖에서 더 사회적인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것은 흥미로운 현상인데, 한국사회에서 시민종교(civil religion)의 등장이 기성의 종교제도 밖에서 탄생하고 있는 징후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기성의 종교제도들은 정교분리라는 형식적 틀 속에서 정치권력과 밀월관계를 형성한다거나, 혹은 정치를 신성화하여 반시민적 폭력성에 몰입된 정치종교(political religion)적 성격을 지녔을 뿐이었다.[각주:3]


한데 시민사회에서 이러한 종교성의 강화 현상은 종종 메시아의 사회화(messianic socialization)를 가능하게 하는 토양이 되었는데, 이는 메시아가 사회를 형성하는 하나의 광폭한 정치적 변수로 대두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파시즘적인 정치종교가 대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종교는 늘 메시아정치(messianic politics)[각주:4]를 동반한다. 현대의 일부 철학자들이 은유적으로 이야기하는 메시아정치의 아름다운 그림과는 달리, 역사 속에 현현한 메시아정치는 이렇게 매우 불온하고 위험한 현상의 배후이다.[각주:5] 이 글은 최근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의 종교화 현상을, 메시아정치의 대두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살피려는 데 목적이 있다.

 

메시아의 탄생, 1997

 

1987년 민주화에 대한 거센 사회적 요구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지속된 극우주의적 권위주의 정치는 6공 정권과 문민정부로 이어졌다. 권위주의 체제는 통치자를 중심으로 하는 권력 응집력이 대단히 높은 정치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6공과 문민정부, 이 두 정권은 권위주의 체제를 계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 응집력이 크게 이완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것은, 한편에서 보면,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중간 단계일 수 있었지만, 전통적 권위주의 세력에게는 유약한 정권이라는 문제의식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바로 이 시기에 한국정치에 대한 두 가지 기획이 활발히 모색되었다. 권위주의 체제를 종식시키고 시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추구하는 민주주의화(democratization) 기획이 그 하나였고, 반대로 다시 강력한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의해 단일대오로 결속된 재권위주의화(re-authoritarianization) 기획이 다른 하나였다. 여기서 전자를 향한 기획은 다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서유럽과 북미의 민주주의 모델을 이상으로 하는 이념적 기획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모델을 이상으로 하는 이념적 기획이다. 요컨대 이 두 유형을 모범으로 하여 추구되었던 민주주의화 기획은 일종의 이성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재권위주의화 기획은 한국에서 급속한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신권위주의 체제를 재구축하려는 것이다. 즉 카리스마적 1인 독재자와 그이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다하는 테크노크라트, 그리고 그를 지지하는 국민으로 형성된 신권위주의 체제를 리바이벌하려는 것인데, 여기서 핵심은 이러한 권력연합을 추동하는 강력한 지도자의 문제였다. 그래야만 6공과 문민정부의 유약한 정권의 한계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재권위주의화 기획의 일환으로 일단의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박정희 메시아주의가 거세게 호출되었다. 외환 차입금을 무분별하게 허용함으로써 버블경제로 무능한 권력을 힘겹게 유지하고 있던 문민정부의 레임덕 현상이 극단에 달하고 있었고, 그 결말로서 ‘IMF 관료들이 마치 피정복지의 주둔군처럼 진주하던 1997, 바로 그해 그 재앙적 사건 직전, 그 징후들이 도처에서 불쑥불쑥 출몰하던 시기였다. 그해 4월에 김정렴의 , 박정희. 김정렴 정치회고록과 이인화의 인간의 길 3권 중 2권이 발간되었고,[각주:6] 10월에는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연재가 시작된 것이다.


이 세 극우 논객의 텍스트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박정희 집권 18년 중 절반을 비서실장으로 지냈던 김정렴의 회고록은 발간된 지 두 주 만에 무려 5만 부가 판매되었다. 당대 최고의 극우파 논객이던 조갑제의 연재는 조선일보지면에서 3년간 564회라는, 한국 언론사에서 전무후무한 경이적인 연속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숱한 논쟁의 진원지가 되었다. 그리고 젊은 논객 이인화의 소설 또한 발간되자마자 널리 알려졌고, 젊은 세대에게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하여 1997년의 정국으로 박정희는 귀환했다.


이 놀라운 대중적 반향은 어찌 보면 이례적 현상이다. 왜냐면 문민정부 시절은 권위주의 정부들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선진국 진입의 꿈이 실현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되었고,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에 돌입했다는 정부의 자화자찬과 함께 엄청난 소비시장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 비록 국가복지는 빈약했지만 평생직장이라는 이상과 함께 기업복지의 가능성이 장밋빛 꿈을 잔뜩 부풀리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기에 대형 사고들이 연이어 터졌다. 서해 페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아현동 가스폭발,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 대한항공 801편 추락 등. 여기에 세계화 시대의 장밋빛 이데올로기에 한껏 부풀려진 대중의 탐욕이 소비시장을 새빨갛게 달구어놓자, 권위주의 시대의 극단적 엄숙주의에 단련됐던 대중은 일종의 소돔 증후군(Sodom's Syndrome) 증상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