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사회사학회와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한 3.1운동 100, 한국사회전한의 시공간 지평(2018.11.02.~03. 고려대학교 백주년기념과 국제원격회의실)의 발표원고다. 자료집에 게재된 글을 간략히 수정한 것이다

3.1절과 태극기집회 - 잃어버린 민중의 기억_한국사회사학회 심포(2018 11 02-0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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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과 태극기 집회

잃어버린 민중의 기억

 

 

극우개신교, 20183.1절 광장예배를 준비하다

 

201712월경 긴박한 현 시국이라는 제목의 2천 자를 훨씬 넘는 장문의 카톡 메시지가 교회들로 무차별 살포되었다.[각주:1]더불어민주당의 소름 끼치는 공산화 헌법 개정 초안이 나왔습니다.”라는 첫 문장이 말해주듯, 골자는 집권당이 준비하고 있는 개헌안이 공산주의헌법이라는 데 있다. 과잉의 해석과 거짓 정보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메시지의 마무리 부분은 가히 충격적이다. 문재인 정부가 계엄령을 발효할 것이고 무수한 사람들, 특히 기독교도를 학살할 것이라고, 하여 이 메시지에 생략되어 있는 마지막 주장은, 그러니 지금 당장 들고 일어나, 저들의 야욕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겠다.

이 메시지의 출처는 불확실한데, 한국 개신교계의 가장 극우적 성향의 집단들이 이런 입장을 두루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극우적인 개신교를 대표하는 인물인 전광훈 목사와 가장 유사한 생각을 갖고 있고 많은 활동을 공유하고 있는 김승규 장로는 ‘3.1절 예배와 범국민대회의 참여를 촉구하는 기독교계 기관장 모임(2018.02.19.)에서 괴문자 덩어리인 긴박한 현 시국을 연상시키는 주장을 공적으로 편 바 있다. 국정원장과 법무장관을 지냈고 유수의 로펌의 상임고문변호사인 그가 편 주장의 골자는 이렇다. 현 정부와 여당이 추구하는 지방분권은 북한의 고려연방제와 같은 것으로 일종의 공산화 기획이며, 이는 곧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각주:2]

긴박한 현 시국일어서야 한다는 암시[각주:3]124, 전광훈과 김승규가 주도하는 대한민국 통일포럼 준비위원회대한민국 바로세우기 위한 천만 명 서명운동 발대식으로 본격화되었다.[각주:4] 필경 이 서명운동은 3.1절 예배와 범국민대회를 겨냥한 기독교도와 시민 동원 기획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한국개신교는 반공주의 신앙이 상처받을 때마다 대규모의 3.1절 광장예배를 기획하곤 했다. 특히 개신교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감이 본격화된 2천 년대에는 그 위기의 원인을 사회의 종북화탓이라고 해석하면서 대대적으로 3.1절 광장예배를 도모했다. 2003, 2014, 2017[각주:5] 3.1절 예배가 그렇고, 올해도 다르지 않다. 요컨대 개신교 보수주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3.1절은 반공키워드로 개신교를 결속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념일 정치의 도구였다.

매년 3.1절 연합예배를 위한 준비모임이 거의 1년 전부터 열린다. 20183.1절 예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준비모임에선 광장예배로 할지 실내예배로 할지를 두고 대소 간의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여기서 초점은 반공주의위기의 긴박성에 있다. 실내예배를 강조하는 이들은 3.1절의 근원적인 의의를 이념보다 우위의 개념으로 해석된 민족으로 보는 반면, 광장예배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 기념일 행사를 통해 반공주의적 재결속을 도모한다. 이때 반공은 민족을 하위에 포섭하는 것으로 해석된 개념이다. 어느 경우든 반공민족3.1절의 기억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우위에 있느냐만 다를 뿐. 그런 점에서 3.1절이라는 기억의 터는 호모토피아적이다. 요컨대 그날이라는 시공간은, 그곳에서 벌어지는 이제까지의 기억의 전쟁은, 보수주의적이었다.

한편 그것이 광장인 것은 반공주의가 깊은 상처를 받고 있다는 긴박한 위기감을 돌파하는 데 ‘3.1절 광장이 유효하다는 역사적 기억을 한국개신교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내를 강조하는 이들은 이러한 역사적 기억이 내포하는 반공주의적 열정(passion)의 정치에서 벗어나려는 소극적인 장소 전략(the place strategy)을 펴고 있는 셈이다.

아래에서는 3.1절에 관한 한국개신교의 공적 기억(public memory)이 형성되는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살필 것이다. 첫째로 한국적 근본주의신앙의 형성 과정에서 3.1운동이 어떻게 기억되었는지를 볼 것인데, ‘한국적 근본주의는 서북지역, 특히 평양에서 발원해서 전국화되어 한국개신교를 균질적 종교공동체로 만드는 내적 동력으로 작용했다. 그 과정에서 3.1운동의 기억은 신앙의 바깥으로 배제되었다. 둘째로, 해방 이후 3.1운동의 재기억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기억투쟁에 대하여 살필 것이다. 여기서 반공주의가 승리했고, 그 과정은 ‘1948년 체제의 성립과 병행한다. 이때 한국개신교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근본주의 신앙의 기반 위에서 반공주의는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절대적 요소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3.1절 기념식은 이러한 우파적 기억이 광장을 통해 불꽃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시간적 기억의 틀이었다.

마지막 장에서는 2016~2017년 촛불정국을 경유하면서 ‘1948년 체제가 종식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하면서, ‘3.1절 기념식근본주의+반공주의적인 개신교적 통합의 장소로서 그 유효성이 결정적으로 퇴조하게 되었음을 이야기할 것이다. 이는 ‘3.1새로운 기억의 터가 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촛불의 기억처럼 헤테로토피아적 외침이 하나로 만나 변혁의 열광이 되듯, 3.1운동의 헤테로토피아적 만세에 대해 성찰하고 재전유할 기회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3.1’, 망각의 역사와 근본주의 신앙

 

19193~41,214회의 3.1운동 중 주동 세력이 명확하게 밝혀진 311곳을 보면 기독교가 78지역, 천도교가 66지역, 기독교와 천도교 합동으로 42지역에서 3.1운동이 발생했다. 총독부의 자료를 보아도 3.1운동으로 수감된 사람들 가운데서 16.2%, 기소 인원 가운데 21.4%, 불기소 인원의 11.7%가 기독교인이었고, 소각된 예배당이 59, 일부 파괴된 예배당이 24, 기독교학교가 3개 등이었다. 이 통계들은 3.1운동에 기독교가 얼마나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당시 전체 인구의 2퍼센트도 되지 못했던 기독교가 전체 3.1운동의 20퍼센트 이상을 추진했던 것이다.

보수주의 성향의 한 개신교 주간지에 실린 칼럼[각주:6]의 일부다. 이 글에서 보듯, 개신교는 3.1운동 당시 어떤 사회 세력보다도 가장 적극적인 참여 주체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지도자 33인 중 16명이 개신교 지도자라는 점과 더불어서 한국개신교가 간직하고 있는 자긍심의 중요한 항목들을 이루고 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의 항일의 기억 중 개신교의 역할이 가장 돋보인 것은 바로 3.1운동이었다. 한국개신교가 항일의 가장 뚜렷한 기독교적 흔적으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신사참배 거부운동, 식민화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근본주의 신앙에 기반을 둔 우상숭배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더 강하다는 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항일의 흔적은 아닌 셈이다. 또 거부운동의 주체는 대부분 미국장로교 계열의 선교사들 다수와 그들의 절대적인 영향권 아래 있던 한국장로교회 지도자들이었지,[각주:7] 신자대중의 광범위한 운동으로 구현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위의 칼럼에서 보듯 3.1운동은 교회지도자뿐 아니라 신자대중을 망라하는 광범위한 참여에 기반을 둔 것이다.

하지만 3.1운동에 관한 자긍심의 흔적들은 개신교의 공식적 기억에선 격하되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지표는 순교자 추서(追敍)에서 볼 수 있다. 어떤 집단이 순교자를 호명하는 행위는, 단지 과거의 희생자를 호출하여 기념하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의 지배담론의 형성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순교자 추서를 둘러싼 공적 기록의 과정은 순교자 정치학의 결과인 셈이다.[각주:8]

한국개신교의 순교자 추서를 주도한 공적 기관인 한국기독교 순교자유족회가 펴낸 한국교회 순교자[각주:9]에 의하면 전체 순교자 리스트에 수록된 226명 중 3.1운동 순교자는 유관순과 손상열 단 2명뿐인데,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인한 순교자는 14(6.2%)이다. 더욱이, 이 책의 개정판 성격의 책인 한국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가 펴낸 한국기독교 순교자 기념관[각주:10]을 보면 191명 중 3.1운동 순교자로 지정된 이는 전무하고 신사참배 거부운동 순교자는 6명이 증가한 20(10.5%)이 포함되었다.

그것은 한국개신교 주류세력이 3.1운동에 대해 평가절하하고 신사참배를 과대평가하는 관점을 반영한다. 이렇게 일제 강점기 시절의 한국개신교에 관한 기억의 구성에서 중요한 변수가 된 것은 길선주라는 인물이다. 그는 한국개신교의 형성 초기를 대표하는 이로, 평양대부흥운동을 사실상 주도하고 그것을 전국화한 장본인이었다.

이 사건은 한반도 개신교의 지형을 평안도의 장로교가 주도하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나아가 대부흥운동의 전국적인 확장성이라는 차원에서 평안북도의 선천은 평안남도의 평양에 밀리게 되는데,[각주:11] 이것은 한반도의 개신교 신앙의 헤게모니적 요소가, 훗날 근본주의(fundermentalism)라고 불리는 분리주의적 신앙 양식에 정향되게 된 주된 이유가 된다. 선천 장로교의 신앙적 토대를 구축한 이는 휘트모어(N.C. Whittemore, 1870-1952, 한국명 위대모) 선교사와 평양배부흥운동이 배출한 첫 번째 조선인 목사의 한 사람인 양전백이고, 평양에는 새뮤얼 모펫(Samuel Austin Moffet. 한국명 마포삼열)과 평양대부흥운동의 사실상 독보적인 스타인 길선주가 있었다.

휘트모어는 인디애나 주 캔사스시티에 있는 파크대학(Park College) 출신으로, 그의 활약으로 인한 선천지역 장로교의 비약적인 팽창과 함께 이 대학 출신 선교사들이 선천으로 줄을 이어 유입되었다.[각주:12] 모펫은 일리노이 주 시카고 시에 있는 매코믹신학대학(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출신으로, 평양의 교세확장과 더불어 이 학교 출신자들이 연이어 들어왔다.[각주:13] 해서 선천에 파크 네트워크가 있었다면 평양에는 매코믹 네트워크가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이 두 대학은 미국 중북부 지역 출신들의 선교사 양성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파크대학은 선교지의 근대화에 관심이 많았다면[각주:14] 매코믹은 근본주의 신앙의 이식에 더 집착했다.[각주:15] 선천의 양전백은 교육계몽 운동에 적극적인 인사였고,[각주:16] 105인 사건과 3.1운동에 적극 관여한 참여종교인의 한 사람이었다면,[각주:17] 평양의 길선주는 양전백과 함께 3.1운동 33인 민족대표에 포함되었지만, 체포된 32인에 대한 재판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유일한 사람이며 훗날 탈정치적 부흥운동에 몰두한 은둔종교인이다.

조선 말기에는 주자학에서 이탈해서 도교 수행자의 대열에 들어서는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길선주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청일전쟁으로 극도의 고통을 겪은 평안도 지역의 도교 수행자 중, 전란에서 철저히 무력했던 조선의 종교도, 가해국인 중국과 일본의 종교도 아닌, 서양의 종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다수 등장했다. 길선주도 그들 중 하나였는데, 도교 수행자의 이력은 그가 개신교 지도자로 부상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매코믹 출신 선교사들로부터 훗날 근본주의라는 이름이 붙은, (조선의 전통문화와 종교를 멀리하는) 분리주의적 신앙양식을 배웠지만, 그의 도교적인 수행방식은 평양에서 폭발적인 대중의 반향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새벽에 수행하는 기도와 ()경읽기를 통해 분출하는 영성적 이팩트가 많은 이들을 교회로 모여들게 했고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경청하게 했던 것이다.[각주:18] 이렇게 해서 평양대부흥운동은 길선주를 매개로 해서 엄청난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는 사건이 되었다. 나아가 이 영성적 운동을 전국화하는 데도 길선주 특유의 영성적 지도자의 능력이 큰 효력을 발휘했다.[각주:19]

하지만 ‘3.1독립선언서사건에서 무죄방면된 것은 그의 이력에 적지 않은 흠집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1920년대 중반 그가 부흥회를 이끌 때 사회주의 성향의 청년들에 의한 반대와 테러가 있었고 사역하고 있던 교회 안에서도 비판이 제기되자 그는 목사직을 사임하고 목회 일선에서 물러났으며,[각주:20]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나기 몇해 전인 1935년 향년 66세로 사망했다.

옥성득은 길선주가 유교에서 도교로, 그리고 개신교로 개종하게 된 것을 조선 대중의 구원에 대한 갈망과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다.[각주:21] 그가 개신교로 개종한 1898, 안창호, 양전백 등과 독립협회 평양지부를 창립하는 데 적극 가담한 것도 그런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장남 길진형이 105인 사건(1911)에 연루되어 받은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191726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삼남인 길진섭은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미술가로 해방 이후 월북했다. 차남인 길진경은 1960년대 정치참여적 기독교 교회연대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를 역임(1961)했고, 진보적 종파로 박정희 정권에 대해 비판적 활동을 적극 벌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총회장(1960)을 지냈다.[각주:22] 이것은 그의 집안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시사한다.

하지만 3.1운동 당시 그는 참여(engagement)탈각(detachment) 사이에서 동요하는 전형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각주:23] 그리고 17개월간 감옥에서 요한묵시록1만 번 이상 읽었고 이 성서 텍스트에 기초한 말세도를 그렸으며 그것을 가지고 전국을 순회하며 탈정치적 말세론을 부르짖고 다녔다는 그의 후기 행적에 관한 설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장남이 죽은 직후인 3.1운동 때부터 그의 행보는 변하기 시작했고, 옥고를 치룬 뒤인 1920년대 이후 그의 신앙에서 역사참여의 관점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민족주의 관점으로 한국교회사론을 개척한 민경배는 길선주를 가리켜 한국기독교의 기초를 놓은 창건자라고 평했다.[각주:24] 하지만 이러한 후대의 평가는 그의 후기 행적에 대한 변증적 설명을 필요로 했다. 이것은 비단 길선주 개인의 현상만은 아니다. 한국개신교의 지배적인 경향도 참여의 종교에서 탈각의 종교로 경사 깊게 이동했다. 민경배의 신앙현상학은 바로 그런 변증적 설명의 필요에서 발명된 해석학적 개념이다. 그에 의하면 신사참배 반대운동에서 꽃을 피운 민족주의적 신앙의 외연은 종말론적 신앙의 내연이 역사 속에 현상화(現象化)된 결과다. 동시에 신앙의 내연은 그런 저항의 현상학이 존재의 깊음의 범주 속으로 내면화된 결과다.[각주:25] 여기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상징하는 주기철과 평양대부흥운동을 상징하는 길선주는 둘이지만 하나로 겹쳐진다.[각주:26] 길선주의 영성에 기초해서 순교자 주기철의 등장이 예비되었고, 그것은 길선주의 극단적 탈정치성이 참여의 은폐된 양상으로 해석되는 근거가 되었다.

이 둘을 연계시키는 기억의 코드화를 통해 일제 강점기에 관한 한국개신교의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길선주의 영성수행 양식들은 근본주의적 신앙, 그것과 연결된 기억들을 사람들 각자의 내면에서 공고하게 자리잡게 하는 감성적 매체역할을 했다. 또 주기철의 저항과 순교의 기억은 기억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어 주는 윤리적 매체로서 작동했다. 그리고 이 두 인물을 하나로 꿰고 있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인 근본주의 신앙은 기억공동체의 주체형성 논리가 되었다.

한데 이러한 집단기억이 공적 기억으로 자리잡는 과정은 그것과 배치될 수 있는 다른 기억들의 망각을 수반한다.[각주:27] 하여 함석헌, 류영모, 김교신, 안창호, 이승훈 등도 개신교적인 공적 기억의 으로 추방되었다. 또 한국적 개신교의 창건자 길선주에게 윤리적 상처가 되는 3.1운동의 기억을 주변화시켰고, 그 자리에 신사참배의 기억이 끼어들어 그 윤리적 결핍을 상쇄시켰다. 결국 3.1운동에 참여했던 대중의 꿈과 열망,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과 좌절의 서사가 개신교의 공적 기억에서 배제된 것이다.

 

‘3.1의 재기억화와 반공주의

 

1945815, 낯선 손님처럼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다. 사회는 극도의 분열 상태로 빠져들었고, 미 군정당국을 포함한 여러 정치 세력들의 협상의 기술은 턱없이 부족했다.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대중도 마찬가지였다. 새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할 기회가 왔지만, 사회는 함께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찾지 못했고 극단적인 갈등과 분열로 멍들어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첫 번째 3.1절이 다가왔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3.1절 기념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게다가 3.1운동의 가장 중요한 참여세력인 개신교의 경우, 길선주 자신이 그렇듯이, 가장 적극적으로 3.1운동에 참여했던 서북지역에서부터 탈정치적 부흥운동이 팽배했다.[각주:28] 망각의 기재가 작동한 것이다. 사회주의 진영도 3.1운동에 대해 소극적이긴 마찬가지다. 사회주의 이론가들은 3.1운동이 노동자, 농민을 포함한 전체 민족적인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지만 토착지주자본가적 쁘띠부르조아 출신 지도자들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고 인민은 아직 주체세력으로 발돋움하지 못한 미완성의운동이었다고 평가절하 했다. 반면 1926년 발발한 6.10만세운동과 1929년의 11.3광주학생운동은 3.1운동의 한계를 극복한 인민 주도의 진정한봉기였다고 보았다.[각주:29]

한데 해방된 다음 해 모든 정치세력들이 호들갑스럽게 망각된 3.1운동의 재기억화(rememoration)를 시도한다. 당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뉜 냉전적 세계질서의 최전선이 되어버린 한반도의 사회적 지형은 극한적으로 양분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3.1운동의 재기억화가 본격 가동된 1946년의 31일은 다양한 사회정치 세력들이 두 편으로 이합집산하여 두 개의 기념일 행사를 경쟁적으로 벌인 날이다. 우파는 서울운동장에서, 그리고 좌파는 남산에서 대규모의 인파가 모여 기념행사를 벌였다. 이때 19193.1운동을 주도했던 개신교와 천도교의 주류세력이 우파 진영의 행사에 대거 참여했다.[각주:30] 우파의 기념식에 모여든 인파가 좌파의 기념식보다 최소한 3배나 많았다는 데서 드러나듯, 3.1운동의 재기억화를 주도한 것은 우파였다.[각주:31]

그 이듬해인 1947년의 3.1절 기념식 때도 좌우의 대결이 재현되었는데, 이때는 우파의 분열로 인해 참가자 숫자가 큰 차이는 없었지만, 박헌영의 신전술에 따라 좌파는 대대적인 인민투쟁의 장으로 3.1절을 이용하는 데 집중한 탓에 대중을 향한 기억의 정치에서 또 다시 밀렸다.[각주:32]신전술, 광장에서의 대중동원 전술 대신에, 태업파업휴업 등과 같은 조직 중심의 저항투쟁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각주:33] 이러한 전환은 미군정당국의 편파적인 억압과 백색테러로 광장 정치에서 열세를 면치 못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런 전술적 전환으로 인해 더욱 대중에게 3.1운동의 좌파적 기억은 더욱 희미해졌다.

하여 1948226일 유엔총회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감시하게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가 결정된 직후인 3.1절 기념식에서, 남한 정치의 유일한 승자가 된 이승만은 반공을 소리 높여 외쳤다.[각주:34] 그리고 그해 815일 남한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절멸적 평화론에 기반을 둔 냉전적 반공체제인 ‘1948년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각주:35] 그러한 반공주의적 기억의 정치의 일환으로 이승만은 1949101일을 기하여 ‘3.1‘8.15광복절을 국경일로 제정했다.[각주:36] 이후 이승만 정권은 거의 매년 광장의 3.1절 기념행사를 통해 대중을 동원하여 반공을 키워드로 하는 국민 만들기를 도모했다.[각주:37]

이러한 정세 속에서 한국개신교도 망각되었던 3.1운동을 기억의 장으로 회수하기 시작한다. 북한 지역에서 공산주의와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패배하고 월남한 다수의 개신교도들, 특히 서북계 월남 장로교도들은 남한의 개신교 세력재편에 개입하여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그들은 한국개신교의 반공주의를 추동한 주체였다.[각주:38] 이렇게 월남 개신교도들이 중심역할을 한 남한 개신교 주류세력의 형성 과정에서 자유주의 신학 계열로 지목된 조선신학교측[각주:39],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구속되었다가 출소한 이들이 주도한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파재건파가 이탈하였다.[각주:40] 주목할 것은 이러한 이탈 현상에서 서북 출신 월남자 장로교 성직자들의 역할이다. 그들은 남한개신교 형성과정에서 대체로 반공주의+근본주의의 전선을 중심으로 잘 결속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들쑤셔 놓은 분열 과정에서 서울경기호남 장로교의 일부와 경남 장로교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1959년 서북계의 평안도 계열과 황해도 계열의 분열이 있었지만, 이때는 남한계 개신교도 대대적으로 분열되었다는 점에서 서북계 월남자 세력의 약화로 나타났다고 할 수는 없다. 그 결과 그들은 장로회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들 서북출신 월남자 장로교도들을 결속시키는 가장 중요한 이념적 장치는 무엇보다도 반공이었다. 해서 그들은 교권만이 아니라, 남한 사회의 좌우 대결에 깊이 개입했고 국가의 지배권력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물론 그들은 3.1절 우파집회의 열렬한 참여자였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한국개신교의 항일에 관한 집단기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지만, 동시에 장로교 분열(고려파와 재건파의 이탈)의 주된 이유였다는 점에서 개신교를 묶어내는 기억의 장치로서 한계를 갖는다. 또한 일본의 신사참배 정책이 일본에서조차 비종교적인 국가의례(신사비종교론)인가 천왕제 종교의례(신사종교론)인가의 논쟁이 있었다는 점에서 종교의례라고 단정하고 동방요배 거부운동을 벌인 것에 대한 적절성 논란이 있다.[각주:41] 이는 신사참배를 중요한 신앙의 문제로 이해하지 않았던 조선신학교 측과의 갈등과 분열에도 연관된 문제다. 한편 이와 연관해서 미국 교회 선교국들이 운영하고 있던 조선의 교육기관들의 폐쇄로 귀결된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바람직한 저항전략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제기되었다.[각주:42] 조선신학교측과 밀접한 인연을 갖고 있던 캐나다선교국도 이 문제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대해 불편함을 표한 바 있었다.[각주:43]

반면 3.1절은 해방된 남한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일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는 점에서 개신교가 이 날을 재전유한다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 무렵 유관순의 발견은 남한의 시민사회와 개신교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였다. 194610, 그 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유관순이 갑자기 3.1운동의 순교자이자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곧바로 정계, 학계, 문화계 등의 명사들이 대거 참가한 유관순 기념사업회가 조직되고, 19485월에는 전기(傳記)가 출판되었으며, 영화도 제작상영되었다. 전기나 영화에는 기독교적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고 한다. 나아가 1954년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게 된다.[각주:44]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교과서 속의 유관순은 구국의 영웅 이승만이나 공산군과 싸우는 국군 등과 오버랩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반공키워드가 유관순 기억하기에 개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각주:45]남한사회-반공-유관순-기독교(개신교)로 연결되는 기억의 코드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3.1운동은 반공을 코드로 하는 집단기억의 하나로 되살아났다. 물론 민족3.1절과 연계되어 있다. 여기서 민족이 하위코드로 편입된 반공주의중심의 3.1절 담론이 공적 기억이 된 것이다. 하지만 간혹 이 두 의미의 코드가 재조합되어 반기억(counter-memory)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대개는 반공이 하위코드로 편입된 민족주의적 해석들이다. 흥미롭게도 3.1운동의 공적 기억에 가장 적극적인 지지세력이 종교계, 특히 개신교계인 것처럼, 그것의 반기억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한 이들 또한 가톨릭이 포함된 그리스도교계였다.

대표적인 그리스도교계의 반기억화를 시도한 사례들로는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되었던 김찬국김동길 기독자 교수의 출소를 기념하는 19753.1절 예배에서 안병무의 강연원고 민족민중교회[각주:46]와 그 이듬해인 1976년 명동성당의 3.1절 기념미사에서 발표된 3.1 민주구국선언[각주:47]이 있다. 이 두 반기억의 텍스트들은 3.1절을 반공-민족의 코드화 대신에 민족-민주-민중의 코드화를 통해 그 의미를 다르게 읽어냈다.[각주:48]

하지만 이것은 ‘1948년 체제의 집단기억에 균열을 일으키는 역할에 그쳤지, 남한 사회와 개신교에서 공적 기억의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여기서도 주지할 것은, 이 두 문건을 만들어낸 주체가 개신교와 가톨릭의 신학자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그리스도교 지식인들이 중심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에게 3.1절은 여전히 기억투쟁의 대상에서 매우 주변적 위치에 있었다.

아무튼 1946년부터 시작된 3.1운동의 재기억화는 우파가 주도하였다. 그 결과 반공국가체제인 ‘1948년 체제가 성립하였다. 그리고 반공을 중심으로 하는 3.1운동의 재기억화 과정에서 교회 지배세력이 구축되었고, 나아가 국가의 지배세력 형성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게 공적 기억으로서의 반공주의적 3.1운동의 집단기억이 만들어졌다.

 

20183.1절 광장예배 실패, 그 이후

공적 기억의 쇠락과 잃어버린 민중의 기억의 소환

 

다시 글 서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전광훈, 김승규 등 개신교 극우파는 올해도 3.1절 기념식을 광장집회로 갖고자 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1956년과 1959년을 뺀 모든 3.1절 기념식을 광장에서 거행했다. 물론 대중동원을 통한 반공주의적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로 기획된 것이다. 하지만 이후 보수적 정권들은 반공을 변함없이 3.1운동 해석에 중요하게 활용했지만 거의 실내의 기념식으로 진행했다.[각주:49] 국민교육처럼 일상에서 작동하는 국민 만들기 기재들이 한결 정교해졌기에 비일상적인 기념식 정치가 덜 중요해진 것이겠다.

한편 1950년대에 국가가 3.1절 기념식을 독점하게 되면서, 이승만 정권의 지지세력인 주류 개신교계는 별도의 광장 기념식을 기획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이후 개신교의 3.1절 예배는 더욱 그러하다. 큰 규모의 광장집회 대신 개별교회나 교회연합체 단위로 거의 실내에서 진행되었다. 그것은 보수 정권의 국민과 동맹 관계의 신자 만들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1운동의 기억에서 근본주의반공주의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일제 강점기 시절에 한국개신교가 강성 근본주의 일변도의 종교집단으로 형성될 때, 이러한 개신교의 집단기억에서 3.1운동이 배제되었지만, 그렇게 형성된 지배세력이 해방 이후 강성 반공주의 세력으로 이데올로기화될 때 3.1운동을 반공코드로 재기억화한 결과다.

이렇게 형성된 3.1운동의 공적 기억에 대한 도전은 거의 없었다. 1975년과 1976년 개신교계와 가톨릭계 진보 신학자와 성직자들 그리고 그리스도교 지식인들이 반기억(counter-memory)을 제시했지만 담론적 확장성[각주:50]이 매우 제한적이었기에 집단기억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그밖의 여러 반기억들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또한 비종교권의 반체제적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은 3.1운동에 대한 기억투쟁에 종교권 지식인들에 비해 훨씬 더 무관심했다. 게다가 31일이라는 시간성은 가장 적극적인 비판담론의 주역들인 청년학생을 동원하기가 여의치 않아 운동으로 기획되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탓도 있다.

아무튼 3.1절은, 광장이든 실내든, 지금까지는 우파에 의해 점거당한 시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전광훈과 김승규는 올해 구국기도회와 범국민대회를 도모할 시간으로 31일을 택했을 것이다. 그들은 긴박한 현 시국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한국개신교가 대대적으로 동참하는 행사를 기대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달밖에 안 되었을 때 개신교 보수주의 세력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3.1절 구국기도회를 개최했다. 그때 무려 20만 명의 개신교신자들이 모였다. 이것은 그 1년 후인 20043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국회 가결로 이어졌다.

찬란한(?) 기억을 보수적 개신교 지도자들은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반대 태극기집회로 재현하고자 했다. 이번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사건의 헌법재판소 선고 10일 전이었다. 태극기집회의 주최측은 500백만 명의 시민이 전국에서 총궐기할 것을 기대했다.[각주:51] 태극기집회 직전에 구국기도회에 은혜와진리의교회가 거의 1천 명에 가까운 신자를 동원했다. 하지만 기도회 참석자 총수는 2003년의 십분의 일도 못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태극기집회 참석자가 십만 명은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적어도 대중동원에 있어서는 개신교의 비중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그런데 2018년은 훨씬 더 했다. 주최 추산 1만 명이 태극기집회에 참석했고, 경찰 추산은 5천 명에 불과했다. 구국기도회 주관자들은 300만 명을 호언했고 긴박한 현 시국같은 극단적 메시지를 거의 모든 교회로 발송했으며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다 나오시오라는 자극적 문구로 대대적인 홍보를 했는데, 인원동원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게다가 한국개신교 보수세력을 삼분하고 있는 세 단체 중 하나인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은 이날 진보단체인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대(평통연대)3.1절 심포지엄을 공동개최하며 꽤나 개혁적인 논지를 폈다.[각주:52] 또 구국기도회의 주관단체들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한교총’, 두 단체의 대표회장인 이영훈(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목사)은 구국기도회가 탄기국의 태극기집회와 연결되는 행사임을 부인하는 입장을 공식 발표했다.[각주:53]

최근의 사태로만 보면, ‘1948년 체제의 핵심 키워드인 반공을 상징하는 기념일인 ‘3.1이데올로기에서 개신교의 위상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젊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신앙의 반공레짐에서 대거 이탈하고 있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124대한민국 바로세우기 위한 천만 명 서명운동 발대식에서 김승규가 지금이 어느 때인데 몸을 사리고 있느냐고 목사들을 질타하는 말 속에서, 신자 동원이 안 되고 있는 주된 이유가 밝혀졌다. 신자들의 반발이 거셌던 것이다.[각주:54] 그런 사정은 ‘4.27 판문점 선언에 대해 한기총’, ‘한교총’, 그리고 한국기독교연합(한기연)이 모두 곧바로 지지선언을 했고 주요교단들도 속속 환영 메시지를 발표한 데서 드러난다.[각주:55] 요컨대 맹목적 반공주의로부터 선택적 반공주의 내지는 탈이념화(실용주의)로 분화된 이들이 개신교계 내에서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자본가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남권 대형교회들의 탈이념화 현상은 목사들의 이념적 행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최근의 한반도 비핵평화를 향한 정세 속에서 3.1절에 관한 개신교의 근본주의+반공주의적 공적 기억이 내파(Implosion)하고 있는 중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3.1운동은 어떤 기억의 터(lieux de mémoire, places of momory)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우리에게 과제로 남는다. 위에서 언급한 강남권 대형교회들의 거대지주들인 신자유주의적 자본가들과 그들의 시각을 대변하는 지식인들이 그 기억의 터에서 3.1운동에 대한 기억 전쟁에 참전할 것은 의심의 여지없다. 그리고 진보적 신학, 특히 민중신학은 안병무의 민족민중예수에서 이어지는 오클로스적 민중론의 관점에서 2016~2017년의 촛불항쟁, 1980년의 5.18민중항쟁, 그리고 19193.1운동의 기억을 소환하고 있다.

절멸적 평화론에 기초한 근본주의+반공주의의 신앙은 일종의 성도(신자) 만들기장치였다. 그리고 이것은 ‘1948년 체제(반공주의적) 국민 만들기와 겹쳐 있다. 이는 거꾸로 이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통한 담론에서 성도 혹은 국민이 된 자만이 언어를 부여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존재는 말하지 못한다.’ 마치 압살롬의 누이 다말이 배다른 오라비인 암논에게 강간당한 사건을 통해 다윗 왕실의 권력투쟁을 이야기하는 사무엘기하13~14장이 암논, 압살롬, 다윗 각각에게 항변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음에도 유일한 피해자인 다말에게는 아무런 항변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것처럼, 3.1운동의 서사에서 언어를 배당받지 못한 이들이 있다. 그날 만세를 외친 무수한 대중의 심중에는 고종을 향한 충심, 하느님을 향한 충심, 나라와 민족을 향한 충심만이 존재하지는 않았다.[각주:56] 또 동시대 대중신비가이자 부흥사인 이용도 등이 기층대중의 무속적 열광을 수용했다는 이유로 서북지역의 장로교와 감리교로부터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이단으로 배척되었다. 근본주의적 개신교 주류세력은 그의 언어를 박탈한 것이다.[각주:57] 그밖에도 3.1운동의 기억의 터에는 수많은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이 넘쳐난다. 거기에서 낯섦들이 마주치고 얽히면서 하나의 소리인 만세로 만난 사건이 3.1운동이 아닌가.

2016~2017년의 촛불이 그랬다. 그런 집단기억의 방식을 계승하고자 문재인 정부는 헌법개헌안 초안의 기본권 조항에서 기본권의 주체는 국민이 아니라 (국민의 언어를 부여받지 못한 이들을 포함하는) ‘사람이라고 재규정했다. 야당의 반대로 자진 철회됨으로써 공적 기억이 되는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이것은 촛불의 계승자로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의 하나의 기억의 코드로 작동하고 있다. 현 정권의 모든 것이 이러한 기억의 계보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3.1운동의 잃어버린 민중의 기억을 내포하는 집단기억으로 해석할 수 있다.

  1. http://blog.daum.net/3332han/7087583 [본문으로]
  2. 〈전광훈 목사 3·1절 범국민대회에 한국교회 참여 촉구〉, 《크리스찬연합신문》(2018.02.19.) [본문으로]
  3. 2018년 3.1절 구국기도회 및 범국민대회 포스터의 제목은 ‘교회여 일어나라’이다. [본문으로]
  4. 〈대한민국바로세우기 위한 1000만 서명운동 돌입〉, 《기독일보》(2018.01.24.) [본문으로]
  5. 2003년과 2017년은 노무현, 문재인 정권기의 적폐청산운동이 한창이던 때였기에 개신교 보수주의 세력의 위기감이 대단히 높았다. 한편 2014년은 그 전 해 8월 터진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을 기화로 2014년 12월 통진당 해산에 이르는 ‘종북몰이’가 최절정에 있던 시기였다. 2014년 3.1절 광장예배는 “남한 종북주의자들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슬로건이 말해주듯 개신교를 ‘증오의 정치’로 동원하려는 스펙터클한 이벤트로 기획된 것이었다. [본문으로]
  6. 안인섭, 〈3·1운동 100년, 한국교회의 역사적 의미〉, 《기독신문》(2018.02.12.) [본문으로]
  7. 장로교보다는 훨씬 소수지만 성결교회의 성직자들 일부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본문으로]
  8. 최상도, 〈순교담론의 패러다임〉, 《한국기독교와 역사》 40(2014.03), 116~118・124쪽. [본문으로]
  9. 기독교문사, 1992. [본문으로]
  10.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2001. [본문으로]
  11. 1920년대 신문기사들에 의하면 선천군과 읍내의 인구 중 개신교 신자가 40~50%에 이른다고 하였다. 한규무, 〈1930년대 평북 선천의 교육, 산업과 기독교〉, 《이화사학연구》 38(2009 6), 각주2). 한규무는 1929년 선천의 총인구수와 1932년 선천 기독교 신자의 총수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16%로 40~50%라는 기사들이 매우 과장된 수치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인구 대비 개신교 신자의 비율에서 평양을 앞선, 전국 제일의 “기독교의 왕국”이라고 불리었다. 한규무, 같은 글, 각주3). 한편 이 지역의 교회들 중 절반 가까이는 평양대부흥운동과 백만명구령운동 시기인 1907~1911년에 설립되었다. 같은 글, 99쪽. 즉 1907년과 그 직후의 대부흥 현상을 평양대부흥운동이라고 부르지만, 교세팽창의 관점에서만 보면 선전대부흥운동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이 시기 선천 개신교의 약진은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대부흥 현상의 전국적 영향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평양의 역할이 지대하다. [본문으로]
  12. 김영배, 〈휘트모어의 선천 선교사역과 평북지역 기독교 확장에 관한 연구〉, 《선교와 신학》 44(2018.2) 참조. [본문으로]
  13. 이재근, 〈매코믹신학교 출신 선교사와 한국 복음주의 장로교회의 형성, 1888-1939〉, 《한국기독교와 역사》 35(2011.9) 참조. [본문으로]
  14. 1918년 파크대학에 입학한 백낙준, 1923년에 입학한 김마리아 등은 이 학교의 학풍을 시사한다. 파크대학 출신 선교사 휘트모어는 선천을 포함하는 평안북도 지역을 책임맡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인데, 그를 포함한 이 지역 개신교계는 학교설립에 큰 힘을 기울였다. 하여 종교계 사립학교의 90% 이상이 개신교계 학교인데, 평북지역은 99%가 개신교계(121개중 120개)였다. [본문으로]
  15. ‘근본주의’라는 명칭은 1920년대 미국 개신교 내에서 벌어진 논쟁 때 등장했지만 그 명칭이 탄생하기 이전인 19세기 말부터 그 내용을 담지하고 있는 신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1920년대 이전의 근본주의적 운동과 신학을 ‘초기 근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홍철, 〈20세기 미국 근본주의 운동의 역사적 고찰―미국 장로교를 중심으로〉. 《역사신학 논총》 13(2007) 참조. 그러므로 20세기 초 조선에 유입된 매코믹 출신 선교사들의 종교적 성향을 ‘근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시대착오적 해석이 아니다. [본문으로]
  16. 양전백은 휘트모어 선교사와 함께 신성중학교와 보성여학교를 설립했다. [본문으로]
  17. 105인 사건으로 기소된 123명 중 선천지역 출신이 46명으로 가장 많았다는 사실은 그 중심에 양전백이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윤경로, 《105인 사건과 신민회 연구》(한성대학교출판부, 2012), 70쪽 참조. [본문으로]
  18. 옥성득은 평양대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영성수행 양식으로 정착한 새벽기도와 (성)경읽기가 도교적 영성이 개신교영성에 접맥된 것으로 해석한다. 옥성득, 〈평양 대부흥운동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 《한국기독교와 역사》 25(2006.9), 75~79쪽. 근본주의 신앙은 세속적인 것과 분리시킨 영적인 것을 고수하려는 신앙운동인데, 매코믹신학대학 출신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에서 세속적인 것은 피선교 사회의 문화와 종교성이었다. 그런 점에서 도교적 영성과 근본주의가 접맥된다는 것은 모순적이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다분히 밀의적 성격이 있는 도교적 영성수행법을 알았을 리 없었기에, 길선주의 영성은 근본주의라는 필터에 걸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본문으로]
  19. 옥성득, 〈평양 대부흥운동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 80~82쪽. [본문으로]
  20. 백종구, 〈영계 길선주 목사(1869-1935)의 민족주의〉, 《선교신학》 13(2006.11), 161쪽. [본문으로]
  21. 옥성득은 그렇게 해석한다. 위의 〈평양 대부흥운동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 참조. [본문으로]
  22. 1961년 인도뉴델리 3차 총회 이후 세계교회협의회(WCC)는 한국사회변혁운동에 본격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해 WCC와 관계를 맺는 한국측 기독교대표기관 역할을 했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총무가 바로 길진경이었다. 그리고 NCCK 가맹교단 가운데 진보적 담론과 활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교단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였는데, 그 무렵 ‘기장’의 총회장이 길진경이었다. [본문으로]
  23. 김형오, 〈참여(engagement)와 탈각(detachment)의 딜레마(dilemma)―Bourdieu의 '자율적' 지식인론을 중심으로〉(서강대학교 사회학과 석사학위 논문, 1999) 참조. [본문으로]
  24. 민경배, 《일제하의 한국기독교 민족・신앙운동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1), 279쪽. [본문으로]
  25. 민경배, 같은 책과 김유준, 〈에드워즈의 ‘성향’(habitus) 개념으로 본 민경배의 역사방법론〉,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02(2016.10) 참조. [본문으로]
  26. 김유준, 〈1920-30년대 길선주의 종말론적 부흥운동―종말론적 내연과 신사참배 저항의 외연을 중심으로〉, 《대학과 선교》 31(2016) [본문으로]
  27. 신지은, 〈장소의 상실과 기억―조르쥬 페렉의 장소 기록에 대하여〉, 《한국사회학》 45:2(2011), 247쪽. [본문으로]
  28.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정남수, 유석홍 등 1920~30년대 대표적인 부흥사들의 다수가 서북지역 출신이었다. [본문으로]
  29. 이연숙, 〈해방 직후 좌·우익의 역사 만들기와 기념 투쟁〉, 《역사연구》 32호(2017.6), 157~58; 서희경, 〈헌법적 쟁점과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1945-1950)〉, 《한국정치학회보》 48:2(2014.06), 255쪽. [본문으로]
  30. 우파의 3.1절 집회에는 청년, 학생, 부인, 종교단체에서 우위를 보였고, 좌파의 집회에는 언론, 예술, 농민과 노동자조직에서 앞섰다. 그러나 그 규모는 우파가 압도했다. 박명수, 〈1946년 3ㆍ1절―해방 후 첫 번째 역사논쟁〉, 《한국정치외교사논총》 38:1(2016.8), 101쪽. [본문으로]
  31. 미군정당국이 추산한 두 집회의 인파는 좌파 기념식에 1만5천 명, 우파 기념식에 10~20만이었다. 박명수, 같은 글, 117쪽. [본문으로]
  32. 박명수, 〈1947년 3·1절에 나타난 임정법통론과 인민혁명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 《한국정치외교사논총》(2017.8) 참조. [본문으로]
  33. 1947년 7월 이후에는 남한의 좌익세력이 주도한 대중동원투쟁은 사라졌다. 정호기, 〈국가의 형성과 광장의 정치―미군정기의 대중동원과 집합행동〉, 《사회와 역사》 77권(2008 03), 185쪽. [본문으로]
  34. 강정인・한유동, 〈이승만 대통령의 국가기념일 활용에 관한 연구―반공국민을 만드는 국민의식〉, 《현대정치연구》 7:1(2014.4), 205쪽. [본문으로]
  35. ‘1948년 체제’에 대하여는 박찬표, 〈민주주의 관점에서 본 48년 체제의 특성과 유산〉, 《시민과세계》 14(2008.12) 참조. 이 글은 참여사회연구소가 주최한 공동토론회 ‘대한민국사의 재인식―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2008.08.18.)에서 발표된 글이다. 하지만, 비록 ‘48년 체제’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반공체제로서의 ‘48년 체제’의 형성에 관해 보다 명료한 시각을 보여주는 글로 김동춘, 〈한국의 분단국가 형성과 시민권―한국전쟁, 초기 안보국가 하에서 '국민됨'과 시민권〉, 《경제와사회》 70(2006.06) 참조. [본문으로]
  36. 강정인・한유동, 같은 글, 205쪽. [본문으로]
  37. 최은진, 〈대한민국정부의 3·1절 기념의례와 3·1운동 표상화(1949~1987)〉, 《사학연구》 128(2017.12), 445쪽. [본문으로]
  38.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중심, 2006)의 제 10장 〈남한교회와 월남개신교인(1)―재족직화와 종교권력 접근〉 참조. 이 현상은 주로 장로교를 축으로 하여 전개된 것이다. 장로교는 남한개신교에 있어서 숫자에 있어서도 압도적으로 많았고(대략 70% 가까운 이들이 장로교도였다) 신앙의 기조나 논쟁의 성격도 주도했다. 그런 점에서 남한 개신교 주류세력의 형성 과정은, 특히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는, 남한 장로교의 형성과정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서북계 장로교는 월남개신교도 전체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월남 개신교를 논하는 것은 서북계 장로교를 중심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서북계 장로교 지도자들의 이념적 종교적 스펙트럼은 대단히 다양했지만, 남한 개신교 주류세력의 형성은 근본주의자들이 주도했다. [본문으로]
  39. 이들은 후에 ‘한국기독교장로회’라는 상대적 소수의 교단세력으로 결속된다. [본문으로]
  40. ‘고려파’와 ‘재건파’의 이탈과 분열에 대하여는 김정일, 〈해방 후 재건교회의 탄생 배경 연구―출옥성도 김린희, 최덕지 행적을 중심으로〉, 《한국개혁신학》 46(2015.05) 참조. [본문으로]
  41. 이진구, 〈일제하 신사참배 논쟁과 기독교―신사비종교론과 신사종교론을 중심으로〉, 《일본학》 31(2010.11) 참조. [본문으로]
  42. 안종철, 〈중일전쟁 발발 전후 신사참배 문제와 평양의 기독교계 중등학교의 동향〉, 《한국문화》 48(2009.12); 류대영, 〈신사참배 관련 소수파 의견―헤럴드 핸더슨의 사례〉, 《한국기독교와 역사》 39(2013.09) 참조. [본문으로]
  43. 이진구, 〈일제하 신사참배 논쟁과 기독교―신사비종교론과 신사종교론을 중심으로〉, 83쪽. [본문으로]
  44. 정상우, 〈3ㆍ1운동의 표상 ‘유관순’의 발굴〉, 《역사와 현실》 74(2009.12) 참조. [본문으로]
  45. 정상우, 같은 글, 257쪽. [본문으로]
  46. 이 글은 《기독교사상》(1975.4)에 실렸다. [본문으로]
  47. 이 선언의 원문을 보려면 https://namu.wiki/w/3.1%20%EB%AF%BC%EC%A3%BC%EA%B5%AC%EA%B5%AD%EC%84%A0%EC%96%B8%20%EC%82%AC%EA%B1%B4 참조. [본문으로]
  48. 최근 민중신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안병무에게서 민중과 민족의 균열이 있음이 논의되고 있다. 1975년 3.1절 때 발표된 주47)의 글에서 시작해서 1984년 〈예수사건의 전승모체〉(김진호・김영석 편저, 《21세기 민중신학―세계의 신학자들, 안병무를 말하다》(삼인 2013)에 이르는 일련의 논의의 발전 과정에서 안병무의 민중론이 ‘탈민족’의 관점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75년의 글에서는 그 균열이 아직 맹아적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김진호의 두 편의 글 〈안병무 해석학 시론―‘내면성의 발견’과 ‘민중의 타자성’ 개념을 중심으로〉와 〈민중신학과 비참의 현상학〉 참조. 한편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은 한국의 민중민주문제를 전 세계에 알리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공적 기억에 대해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강만길, 〈3.1 민주구국선언의 역사적 성격〉, 3.1민주구국선언관련자 지음, 《새롭게 타오르는 3.1민주구국선언》(사계절, 1998), 29쪽. [본문으로]
  49. 최은진의 연작논문인 〈대한민국정부의 3·1절 기념의례와 3·1운동 표상화(1949~1987)〉, 《사학연구》 128(2017.12)와 〈대한민국정부의 3·1절 기념의례와 3·1운동 표상화(1988~2017)〉, 《사학연구》 131(2018.9) 참조. [본문으로]
  50. 앞 절에서 얘기했듯이 길선주는 도교적 수행법을 접맥시켜 대중의 폭발적인 영성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길선주처럼 한국의 부흥사들은 기의가 비워진 강렬한 기표를 통해 대중의 공감을 극대화시켰다. 그 빈 기의의 자리에 근본주의가 파고들 수 있었다. 그로 인해 한국개신교의 담론의 장은, 교파의 분열이 극심함에도, 놀라울 정도로 균질적 특성을 지닌다. [본문으로]
  51. 〈3.1절 서울도심 태극기집회, 500만명 모인다!―탄기국, 기독교계, 애국단체협의회 ‘광화문 촛불’ 에워싼 채 태극기행렬〉, 《뉴데일리》(2017.03.01.) [본문으로]
  52. 평통연대 홈페이지(http://cnpu.kr/22/?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Mjt9&bmode=view&idx=814476&t=board) [본문으로]
  53. 〈한기총 이영훈 대표회장, 3.1절 기도회 관련 “억울해”“탄기국 집회 장소서 진행돼 오해 산 것”… 한교연 “한기총 잘못”〉, 《뉴스앤조이》(2017.03.08.) [본문으로]
  54. 〈전광훈 목사 3·1절 범국민대회에 한국교회 참여 촉구―김승규 장로 “교회가 반드시 하나 되어 영적 싸움에 나서야”〉, 《크리스찬연합신문》(2018.02.19.) [본문으로]
  55. 김진호, 〈‘수상한 평화’에 대한 반대―탈냉전 시대 보수주의 개신교의 변화 읽기, 극우에서 중도로〉, 《가톨릭평론》(2018 가을) 참조. [본문으로]
  56. 권보드래, 〈‘만세’의 유토피아―3.1운동에 있어서 복국과 신세계〉, 《한국학연구》 38(2015.09); 윤해동, 〈압축된 시간과 열광―3.1운동 연구를 위한 시론〉, 《동아시아문화연구》 71(2017.11) 참조. [본문으로]
  57. 안수강, 〈‘예수교회’(Jesus Church) 신학 분석〉,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03(2017.1); 같은 저자, 〈1930년 전후 한국교회 신비주의 고찰―신비주의 발흥과 장로교의 대응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신학논총》 107(2018.1) 참조. [본문으로]

포스트휴먼과 민중신학, 어떻게 만날까

논문 2018.10.03 00:19 posted by 망원올빼미

이 글은 서울대-한신대 포스트휴먼 연구단이 주최하고 한신대학교 종교와 과학 센터가 주관한 제12회 포스트휴먼과 종교 포럼(2018.09.17. 주제: 포스트휴머니즘, 종교와 과학, 그리고 민중신. 학장소: 경동교회)에서 발표된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글은 [웹진 제3시대] 138호(2018. 09. 06)에 실렸다.
제12회 포스트휴먼 종교 포럼에는 나와 함께 이상철 목사도 발제하였는데, 이상철 박사의 글 제목은 <포스트휴먼과 고통의 해석학 - 포스트휴먼 시대에서 민중신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아니 무엇을 말해야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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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과 민중신학, 어떻게 만날까

 

 

 

포스트휴먼 논의와 관련하여 민중신학의 관심은 그러한 논의가 함축하고 있는 변화된 사회에서 누가, 어떻게 배제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배제의 질서에서 해방의 신학적 상상력을 어떻게 펼 것인가에 있다. 1970~80년대 유럽과 북미의 담론시장을 뒤흔들었던 포스트모던 담론에 한국이 휩쓸리게 된 것은 1990년대였다. 그 무렵 유럽과 북미에선 포스트모던의 담론 장악력이 시들해지고 신상품으로 포스트휴먼의 물결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이 지식의 신상품이 한국에선 2천 년대 들어와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듯하고, 그 무렵 윌리엄 깁슨(William Ford Gibson)의 이른바 사이버펑크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가 한국어로 번역(2005)되면서 대중의 관심도 급증했던 것이 기억된다. 한국의 포스트휴먼류의 소설들이 다수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각주:1]또 포스트휴먼적 문제제기를 담은 헐리웃 SF영화들인 토탈리콜(1990. 이하 한국개봉), 터미네이터2(1991), 블레이드러너(1993), 가타카(1997), 매트릭스(1999) 등이 1990년대에 한국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비디오시장에서 매니아 집단의 열광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공각기동대도 그 무렵 널리 회자되었다.

이런 논문들과 영화, 소설들 중 다수를 이미 그때부터 꽤 관심 있게 보아 왔음에도, 나의 둔감함에 스스로 놀란 것은, 전철 선생으로부터 발제를 요청받은 이후 부랴부랴 포스트휴먼에 관한 기사 몇 편과 논문 두어 편을 읽은 뒤에야, 1990년대의 파편적 기억들을 비로소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내가 무지한 건 맞지만 무관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급하게 발제 글을 써야 하는데 그나마 집중해서 공부할 시간은 별로 없고 1990년대 이후 20년 가까이 이 분야 지식의 업데이트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터라, 꼼수를 부리기로 했다. 1990년대의 기억의 편린들을 되새기며 준비하되, 특히 영화 한 편에 기대어서 생각을 펼치는 것이다. 2006년에 개봉되었던 박찬욱의 영화 사이보그라도 괜찮아가 그것이다. 실은 이 영화를 보았을 때 글 하나를 쓰고 싶었고, 그 주제가 요즘의 표현으로 하면 포스트휴먼과 민중신학쯤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90년대 말경 나를 열광시켰던 공각기동대도 비슷한 주제로 나를 책동시켰던 것이어서, 사이보그라도 괜찮아와 함께 이 영화도 이번에 다시 보았지만 둘을 함께 다루려면 좀 더 시간과 지면이 필요할 듯하여 공각기동대〉에 관해서는 기약 없는 훗날로 미루기로 했다.

귀동냥하며 들은 포스트휴먼에 관한 얘기 중 내게 부정적인 기억을 자극한 것은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책 포스트휴먼의 저자 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의 견해다. 기술결정론적 낙관주의에 빠지지는 말되(트랜스휴머니즘),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일종의 제도적 성찰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포스트휴먼담론의 필요성을 강변하는 것이다. 귀동냥한 것으로 이렇게 무책임한 인상비평을 남발하는 것이 심히 무뢰한 것이기는 하지만, 진정 그렇기를 기대하지만, 만약 나의 지적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면, 오래 전 읽으면서 비슷한 문제의식에 빠졌던 다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의 에세이 사이보그 선언(“A Cyborg Manifesto: Science, Technology, and Socialist-Feminism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각주:2]을 떠올린 것도 일정한 타당성을 가질 것이다. 해러웨이의 에세이가 발표된 지 십여 년이 지나 저술된 캐서린 헤일스(Katherine Hayles)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1999)[각주:3]도 이 점에서 같은 계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공히 기술문명시대의 타자성의 표상인 사이보그가 실은 우리들 자신임을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가 곧 타자이기도 하며,[각주:4] 그런 점에서 사이보그라는 존재해석은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간극을 해체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런 멋진 해석은 사이보그의 타자 체험을 낭만화하고 있다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이 나온 뒤 몇몇 미술작가들은 자신의 몸에 사이보그-퀴어를 체현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프랑스의 미술작가 올랑(Orlan. 작가명)1990년부터 십여 년간 자신의 얼굴에 9번의 성형수술을 온라인으로 생중계하는 성 올랑의 재탄생(Reincarnation of Saint Orlan)이라는 이름의 퍼포먼스는 과학기술을 통해 미인으로 만들어지는 사이보그화 과정의 피로 얼룩진 기괴한 수술 장면에서 아름다움과 흉물스러움, 행복함과 고통스러움의 이분법적 경계를 해체하는 작가주의적 메시지를 전 세계에 타전했다. 특히 7번째 수술에서는 이마 좌우에 염소 뿔과 같은 혹을 만듦으로써 백인여성이라는 자신의 휴머니티를 해체하고, 인간이자 염소인 포스트휴머니티를 구현해냈다.[각주:5]

이 충격적인 퍼포먼스의 기괴한 영상을 본 수많은 이들은 올랑에게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다. 그것은 그녀의 사이보그성이 퀴어적 기괴함으로 읽혀졌음을 보여준다. 한편 그녀의 사이보그-퀴어 체현의 메시지에 열광적으로 동조하는 현상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하여 그녀의 수술집도의들의 유니폼으로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들의 협찬이 줄을 이었고, 피 묻은 수술도구와 거즈 등이 값비싼 예술작품으로 팔리는 현상을 야기시켰다. 수많은 비평가들의 찬사와 함께.[각주:6]

그런데 올랑의 충격적인 성형 퍼포먼스는, 그러한 언캐니(uncanny) 이미지까지 상품화하는 소비사회의 문화논리에 포획된 듯이 보인다. 소비사회의 외모 집착증에 대한 올랑의 언캐니 미학에는 근대 휴먼적 편견이 해체되고 포스트휴먼적인 새로운 주체의 등장을 선언하는 아포리즘이 넘쳐나지만, 그러한 아포리즘을 소비하는 소비사회의 수많은 대중은, 성형하는 이들의 서사, 그이들이 겪고 있는 폭력적 체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 성형 퍼포먼스를 비난하든 동조하든, 대개의 사람들은 성형에 얽힌 이들의 이야기에는 무관심하고 작가의 퍼포먼스만을 주목한다. 요컨대 여기에는 자신이 사이보그적 타자가 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성형수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들의 고통은 낭만화되어 있는 것이다. 비판적 아포리즘을 소비하되 그것이 사회적 질서의 해체를 향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서동진은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몸의 미학을, 저항적이지도 전복적이지도 않은, 후기자본주의적 자기재생산의 논리에 다름 아니라는 비판을 가한다.[각주:7]

바로 이 점에서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해러웨이, 헤이스, 브라이도티, 그리고 올랑의 것과는 대조되는 텍스트다. 이 영화에서 자신이 사이보그라고 생각하는 영군(임수정이 연기함)은 정신병원에 있다. 이곳은 온갖 기괴한 타자들의 집합소다. 그녀는 사이보그이기 때문에 밥을 먹지 않으려 하고 대신 사이보그가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방식인 건전지를 입으로 빨거나 손가락에 접속시키곤 한다. 그녀는 사이코시스(정신질환자)인 동시에 거식증 환자인 것이다.

 한데 이 영화는 도처에서 그 이면에 숨겨진 네러티브를 연상시키는 암시들을 던져주고 있다. 그것을 종합하면 이렇다.[각주:8] 영군은 라디오공장의 노동자였다. 공장의 노동과정은 세분화된 조립공정 속에 노동자를 그 부속기계의 일부로 환원시킨다. 하여 영군은 공장에서 이미 사이보그였다. 하지만 영군의 이야기는 공장 노동자-사이보그 스토리로 환원되지 않는다.



영군은 집에서 할머니와 유난히 친밀하다. 그런데 할머니는 자신을 쥐와 동일시한다. 쥐라는 존재는 집안에서 가장 대표적인 퀴어적 타자다. 할머니는 그런 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당신도 쥐처럼 무를 갉아 먹는다. 한데 노인의 허약한 이로는 그것을 할 수 없다. 하여 할머니는 무를 갉아 먹을 때 틀니를 끼워야 한다.

할머니가 쥐와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에서 우리는 쥐처럼 철저히 타자화되었던 혹독한 시집살이를 연상할 수 있다. 그것을 시사하는 암시적 설정이 칠거지악이라는 표현이다. 영군은 사이보그인 자신의 금기사항으로 스스로 정한 7가지 항목(동정심, 슬픔에 잠기는 것, 설레임, 망설임, 쓸데없는 공상, 죄책감, 감사하는 마음)사이보그 칠거지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여성을 규율하는 장치인 유교적 칠거지악의 패러디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를 엄마와 이모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집안은 할머니-영군과 엄마-이모로 양분되어 있는데, 후자는 경제적 권력을 쥐고 있는 세력이고 전자는 그들에게 예속된 세력이다. 지배세력의 표상인 엄마와 이모는 하얀맨들(정신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을 불러서 할머니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할머니는 틀니를 끼지도 못한 채 끌려갔다. 하여 할머니는 밥을 먹을 수 없다. 영군은 자전거로 사력을 다해 좇아가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해서 영군은 할머니의 틀니를 가지고 있게 되었다. 영군이 틀니를 보관하고 있는 것과 그녀가 거식증에 걸린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할머니가 쥐와 자신을 동일시한 정신병자였다면 영군은 사이보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쥐와 사이보그는 할머니와 영군이 자신들을 타자화하는 기호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하지만 왜 쥐이고 사이보그인지는 그들 각자가 타자화되는 다른 체험의 산물이다. 아무튼 영군은 사이보그가 되었고 거식증상을 보인다. 그것은 그녀의 공장 체험과 가족 체험의 폭력성이 중첩된 결과다. 과학의 발전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적 질서와 혈연적 친밀성에 기반을 둔 가부장적 질서가 내포한 폭력성은 그 구성원들에게 때로 이렇게 치명이다.

민중신학은 포스트휴먼 시대에 타자화된 민중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떻게 배제되고 있는지를 주목한다. ‘사랑이니 환대니 하는 아포리즘이 흘러넘치는 후기근대사회에서 민중신학이 주목한 것은 바로 그 아포리즘으로 인해 낭만화되고 은폐된 고통이다. 과거 권위주의적 산업화 시대를 표상했던 격리와 감금의 체제는 노골적인 폭력들로 물든 고통이 넘실댔다. 한데 후기근대사회는 우리 주위 도처에 산재해 있음에도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의 현실을 아무도 모른다.’[각주:9] 이때 이 모름의 체계를 부드러운 야만이라고 하고, 그것은 사랑이니 환대같은 아름다운 말들과 함께 작동한다. 한편 이런 아름다운 말들 외에도 또 다른 것이 있다. 근대적 이분법의 해체 등과 같은 포스휴먼적 아포리즘도 부드러운 야만의 양식으로 작동될 수 있다.[각주:10]

그렇다면 포스트휴먼 시대의 배제에 대한 민중신학적 해방의 상상력은 무엇인가? 다시 영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를 살펴보자. 여기서 비(정지훈)가 연기한 일순이라는 정신질환자가 주목된다. 영화에서 그를 표상하는 용어는 훔치심이다. 그는 엄마가 떠났다는 상실감 때문에, 자신이 그 속에서 오그라들어 소멸될지 모른다는 착란에 빠진 이다. 하여 그는 그 비워버린자신을 채우기 위해 남의 속성을 훔쳐 전유한다. 타인의 것을 훔쳐 그것을 그이보다 넘쳐나게 자기화한 후 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것을 훔침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의 이런 행동이 반사회적인 것임을 표상하고 있지만, 달리 이야기하면 그의 몸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의 신체에 유기체성을 부여하는 코드가, 정신병자인 일순에게는 해체되어 그의 몸은 그러한 유기체성에서 해방된 것이다. 남의 특성을 훔쳐 그것으로 자기를 채우는 순간 그는 그 타자로 되는 것이다.’(becomimg the other)

그런데 일순의 타자되기, 들뢰즈를 열호했던 한국의 많은 수용자과는 달리, 멋진 개념으로만 실재하는 아포리즘이 아니다. 그것은 영군과의 관계에서 여실히 나타난다. 일순은 영군이 가지고 있는 할머니의 틀니를 훔쳐 할머니 되기를 한 후 영군에게 돌려준다. 그런데 그 훔침과 돌려줌에서 그는 할머니의 틀니가 영군의 거식증과 겹쳐 있음을 직감한다. 자신이 비워져 있기에 타인의 것을 전유하는 순간 놀라운 교감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교감은 그가 자본주의적 근대의 질서 코드가 잘 작동되지 않는 비어 있는 주체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여 영군과 할머니의 교감적 연대처럼 영군과 일순 사이에도 교감적 연대가 일어난다. 그러나 영군-할머니의 연대가 배제 체험의 연대라면, 영군-일순의 연대는 그러한 질서에서 이탈하는 해방의 연대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영군과 할머니(틀니) 사이에 일순이 끼워드는 순간 배제를 작동시켰던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적 배제의 메커니즘이 교란을 일으킴으로써, 해방의 연대가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차이가 공유되는 순간 서로를 승화시키는 연대가 발생하고 그 연대는 차이를 억압하지 않는 아이리스 영의 무지개 연합같은 것이 해방의 연대가 영군과 일순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다.[각주:11]

그것은 거식증의 해소로 나타난다. 일순은 영군에게 음식을 전기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장치를 장착하는 포스트휴먼적 제의를 통하여 영군이 밥을 먹게 한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라는 수수께끼는 영군에게 밥을 먹게 하는 과정에서 일군의 말에서 그 비의가 드러난다. ‘사이보그지만 밥 먹어도 괜찮아이다. 이것은 일종의 구원을 선포하는 예배 언어처럼 영화 속에 배치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영군과  일순의 교감과 해방의 과정은 포스트휴먼적 민중신학의 종교적 예전의 서사로 구성된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한가. 예배는 일상이 아니다. 예배는 삶을 퍼포먼스로 보여주는 예외적 체험의 서사다. 그러므로 예배는 일상의 실천으로 구체화되어야 삶이 된다. 그런데 배제로부터의 해방 체험은 가해자에 대한 복수를 수반한다. 문제는 그것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데 있다. 여기에 종말론이 끼어든다. 현실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좌절된 해방은 모든 시간을 중단시키고 모든 합리성이 제거된 공간이 작동하는 순간의 도래를 통해야만 실현될 수 있다. 종말론이 증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로 돌아가 보자영군이 일순과 교감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면서 그녀는 거식증에서 해방된다하여 이 공동체의 해방의 기억에는 틀니가 제거된 할머니먹지 못하는 할머니의 고통이 상징적으로 해소된다.




그런데 많은 비평가들은 이 영화가 망상 속에 눌러앉아 버린 해방의 공허함에 그치고 있다고 비판한다.[각주:12] 실제로 기독교를 포함한 숱한 종교들의 의례는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아편 같은 종교성의 한계를 드러내왔다. 하지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과 일순은 예배 의례의 망상적 체험에서 그치지 않는다. 영군은 자신과 할머니에게 깊은 고통을 유발시켰던 공장과 가정의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제적인 폭력의 질서에 대해 복수를 기획한다.[각주:13] 일순과 핵폭발 프로젝트를 도모한 것이다. 병원의 이동식 링거대에 연결한 라디오안테나로 번개를 받아 10억 볼트의 전기를 만들어 핵폭발을 도모한 것이다. 사제복처럼 보이기도 하고 투구로 보이기도 하는, 해드라이터를 장착한 우비(雨備)를 입고 십자가처럼 보이기도 하고 로마군대의 깃발꽂이 같기도 한 안테나를 쥐고 번개를 기다리는 장면은 마치 최후의 메시아 도래를 예배하는 사제 같기도 하고 혹은 최후의 전투를 대비하는 병사 같은 비장한 모습이다. 하지만 감독 박찬욱은 인터뷰에서 그 장면을 소꿉장난처럼 묘사했다고 말했다.[각주:14] 천진난만한 허황된 불장난 같은 것이다.

사실 민중의 복수극은 대개 그렇다. 세계의 질서를 관장하는 중심에서 시스템을 운영하고 해석하며 서사화하는 이들은 민중의 기획을 늘 허황된, 현실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실제로 민중의 복수 기획은 대부분 성공하기엔 턱도 없다. 영군과 일순도 핵폭발을 도모하지만 이 기획이 성공할 리 없다. 그런 점에서 은유로 가득한 이 영화는 잔인하리만큼 리얼하다.

프랑스 좌파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엘리트가 권력을 독점하는 아르케의 정치(politics of arche)를 대체하는 데모스의 정치(politics of demos)를 제시했다. 하여 그의 데모스의 정치론은 합리주의에 기초한 정치철학이다. 하지만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합리적 상상력으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오클로스의 정치(politics of ochlos)를 꿈꾼다. 그래서 그의 정치학은 종말론을 필요로 한다. 즉 안병무의 오클로스 정치론은 종말론적 정치신학인 것이다. 영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속의 정신병자들의 소꿉장난 같은 복수처럼, 오클로스는 여전히 세계를 변혁할 자원도 계산능력도 갖추지 못했다. 심지어 그 세계의 질서 속에서 몸과 마음이 중병에 걸려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병은 그의 언어를 앗아가곤 했다. 민중은 병에 걸려 있고, 그 병은 사회적인 해석 체계 속에서 작동된다. 하여 민중은 자기의 언어로 그 질병을, 질병의 고통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가야트리 스피박의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는 명제가 안병무에게선 민중의 실어증으로 표상되었고 서남동은 민중의 한()이라고 말했다. 실어증이라고 하든 한이라고 하든, 오클로스 민중의 왜곡된 체험이 현재의 표상체계로 재현되는 것은 극도로 어렵다. 하여 안병무의 오클로스 정치의 꿈은 현실에선 거의 불가능하다.

바로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과 일순의 복수 기획도 그렇다. 하지만 그들은 그 실패의 순간에 완전 나체로 하나가 되어 연대한다. 어떠한 매개도 없는 결합이다. ‘5.18’ 연구자인 최정운은 1980521일부터 27일까지의 빛나는 8을 모든 차이가 해소된 평등의 해방공동체라는 의미에서 절대공동체라고 불렀다.[각주:15] 영군과 일순의 나체 상태의 결합은 그러한 절대공동체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바울은 그런 차이가 해체되는 비전의 공동체를 에클레시아라고 불렀다. 그 순간 하늘엔 무지개가 펼쳐진다. 세계는 완전충전 상태가 된 것이다. 상징적 사건이 기적처럼 그들을 감싼다. 이렇게 그들은 공동체로서 종말을 선취한다. 즉 민중신학의 오클로스적인 종말론적 해방의 정치는 결코 현실 세계에선 그 절대적 해방을 구현하지는 못하지만 그 잠재태를 선취함으로써 현실에서 해방을 맛보며 실천하는 동력을 담아낸다. 민중신학이 포스트휴먼 세계에 개입하는 해방의 정치는 바로 이런 신학운동을 통해 드러난다.

  1. 노대원, 〈한국 문학의 포스트휴먼적 상상력―2000년대 이후 사이언스 픽션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비교한국학》 23/2(2015.8) 참조. [본문으로]
  2. 이 에세이는 Socialist Review no. 80(1985)에 처음 발표되었고, 1991년에 출간된 책 Simions, Cyborgs and Women에 수록되었다. 이 책은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동문선, 2002)다. [본문으로]
  3. 한국어 번역판은 2013년(열린책들)에 발간되었다. [본문으로]
  4.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는, 유기체와 기계의 잡종적 신체를 가진, 기술문명시대의 오염된 타자성의 표상이라고 본다. [본문으로]
  5. https://www.slideshare.net/guest3bd2a12/the-reincarnation-of-saint-orlan-presentation. [본문으로]
  6. 마정미, 〈포스트휴먼과 탈근대적 주체에 관한 연구〉, 《인문콘텐츠》 13(2008.11), 205~207 참조. [본문으로]
  7. 서동진, 〈가관 없는 신체 혹은 신체 없는 기관―신체의 재현과 그 위기〉, 《문학과 경계》 12(2004). [본문으로]
  8. 이하의 내용은 이 영화에 대한 《씨네21》(2007.1.4.)에 실린 황진미의 비평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밝힌다. [본문으로]
  9. 고레이다 히로카즈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바로 그러한 부드러운 야만이 작동되고 있는 일본사회에서 야만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본문으로]
  10. 태혜숙,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여이연 2001) 참조. [본문으로]
  11. 장미경, 〈페미니스트 근대론자들―낸시 프레이저, 아이리스 영, 앤 필립스를 중심으로〉, 《경제와사회》 43(1999) 참조. [본문으로]
  12. 《씨네21》(2006.12.19.)에 실린 이 영화에 대한 평론가들의 글 참조. [본문으로]
  13. 영화평론가 변성찬은 이 영화를 홍보포스터의 메인카피 문구와는 달리 ‘사랑’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복수’에 관한 또 다른 버전이라고 말한다. 《씨네21》(2006.12.19.)에 실린 변성찬의 글 참조. [본문으로]
  14. 《씨네21》(2006.12.19.)에 실린 박찬욱의 인터뷰 참조. [본문으로]
  15.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풀빛, 1999) 참조. [본문으로]

2005년도에 쓴 글로 추정되나 어디에 실린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나상윤 목사께서 그 출처를 알려주었다. 내 글의 출처를 그가 알려줬다. 게다가 이 글이 실린 곳이 내가 쓴 책  [예수역사학]에 실린 것이란다. 11장 <1세기 팔레스틴 민중운동들의 통시적 연계성>이라는 제목의 글과 같은 글이라고. 이 책이 2000년도에 출간된 것이니 이 글이 저술된 시기는 2005년도가 아니라 2000년 이전이다.
저자가 어디서 낳았는지 언제 낳았는지도 잊은 글은 퍽이나 슬펐겠다. 다행히 나 목사님이 이 글의 한을 풀어줬다. 그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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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운동과 1세기 팔레스티나의 다른 민중운동들

사회운동론의 관점에서

 

 

 

 

1

 

최근 북미를 중심으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예수의 역사성연구에서는 예수와 예수운동을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즉 역사의 예수와 복음서들 사이의 40년 어간의 괄호 쳐진 기간에 예수사건을 전승한 담지자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예수운동들의 존재가 문제시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이 예수운동들이 실재 예수에 가장 근접 가능한 역사적 실체임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 역사학에 유의미한 학문적 위치를 갖는다. 이때 전승의 과정을 나타내는 데 운동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은 승계 행위의 집합성(collectivity)을 고려한 결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최근 북미의 역사의 예수 논의는 전승주체들의 개체성(individuality)에 몰두했던 고전적 가정들을 넘어서는 예수 역사학의 성과를 내포하고 있다. 바로 이런 새로운 인식론적 전제 위에서 사회학적 연구가 성서 비평학과 결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요컨대 최근의 연구 경향에 있어서, ‘예수운동은 사회운동으로서 포착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방법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전제 사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역사의 예수의 활동을 운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스런 일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동의하는 바, 분명 예수는 일단의 추종자 집단과 더불어 활동을 펼쳤으며, 그 활동은 지배체제에 대한 명백한 대항적 지향의 추구와 연결된다. 또 그러한 지향 아래 대중을 설득하여 지지자층으로 동원하려는 일련의 목적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그 활동의 내용과 지향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든 않든, 위와 같은 가정에 이견을 제시할 이는 없으리라.

이 점에서 마르틴 헹엘(Martin Hengel)이 예수의 실천을 평화적-비폭력적 사회운동으로 보면서, 젤롯당의 전복적-폭력적 사회운동과 대비시킨 것은 최근 북미의 많은 논자들보다, 비록 훨씬 오래된 논의임에도 불구하고, 일면 통찰력 있는 인식 수준을 내포하고 있다.[각주:1] 비교의 방법에 있어서 그는 이 두 비교의 대상이 시공간적으로 겹쳐 있다는(시공간적 근접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이 말은 두 사회운동이 시공간적으로 동일한 혹은 유사한 사회적 맥락에서 기원했으며, 전개발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상호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가령, 예수의 청중 뿐 아니라 제자들 중에도 젤롯 당원 출신이 포함되어 있었고, 예수는 폭력이라는 대항 수단의 유혹에 끊임없이 직면했으며, 그럼에도 예수는 젤롯적인 폭력론의 불가피성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제자나 대중에게 비폭력을 선포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헹엘의 비교 논법에서 핵심적인 것은, 이 두 사회운동들이 실천지향에서는 서로 분명하게 대비된다는 데 있다. 이렇게 동일한 혹은 유사한 발생 맥락에서 상이한 성격의 사회운동이 펼쳐지게 되었다는 주장은, 그 상이성 논의에 관심을 집중하게 한다. 즉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신념체계의 상이성이 차이의 결정적인 독립변수였다는 것이다.[각주:2] 결국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라는 선택의 유의미성이 다른 변인들보다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비교 연구는여전히 많은 예수 연구자들이 그를 선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다음 세 가지 이유에서 적실성을 상실하고 있다. 우선 예수운동젤롯운동이라는 비교대상의 선정부터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요세푸스 저작들에 대한 최근의 텍스트 비평학적 연구에 따르면, 젤롯운동과 예수운동은, 헹엘이 가정했던 것보다 시공간적 근접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예수운동이 30년 어간의 시기와 관련된 반면 젤롯은, 헹엘의 주장과는 달리, 주후 60년대 후반의 시기에 등장했고, 이 두 시기의 성격은 동등비교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큰 차이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헹엘의 젤롯 가설[각주:3]이 나온 이듬해인 1962년 이미 유다교 학자인 솔로몬 자이틀린(Solomon Zeitlin)에 의해 그의 요세푸스 저작에 대한 독해가 비평적이라기보다는 자의적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었고,[각주:4] 모튼 스미스(Morton Smith)의 꼼꼼한 비평은 젤롯 가설을 새로 쓰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각주:5] 스미스에 의하면 젤롯운동은 주후 6년부터 비롯된 잘 조직된 하나의 정파가 아니라 유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특히 로마군의 팔레스티나 재진군과 관련하여 67년 말에서 68년 초 즈음에 역사의 무대에 갑자기 등장한 무장한 대중 연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기에 폭력을 선택한 운동과, 체제의 사회적 통제 능력이 매우 견고하던 주후 30년 어간의 시기에 비폭력을 선택한 운동이 시공간적 근접성을 갖는 비교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부적절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둘째로, 비교방법에 있어서도 문제가 노정된다. 헹엘은 두 사회운동이 헬레니즘과 유다주의 간의 관계에 의해 특성화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압제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며, 이러한 대중적 고난과 관련하여 특성화된 사회적 맥락은, 유다의 헬레니즘 시대 전체에 걸친 장기지속적차원에서 노정되는데,[각주:6] 반면 그가 취한 비교방법은 협역-공시적 방법이었다는 점에서 자기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편 사회의 전반적인 헬레니즘화는 예루살렘의 부유한 귀족들(또는 그런 류의 사람들)에게서 지배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는 사실을 헹엘은 부인하지 않는다.[각주:7] 반면 대다수 대중의 고난의 현장은 시골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그의 비교방법은 공간적으로 적실성을 잃고 있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두 가지로 지적한 바, 비교대상 선정이나 비교방법 적용의 오류를 다 무시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즉 대중의 사회정치적 동원이 두 방향으로 상이하게 추동된 결정적 변수를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라는 가치지향으로 단순화한 것은 사회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대단히 미흡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가치와 행위간의 연결이 직접적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단순 도식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는 단순히 어떤 가치지향에 따라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혁명적 사건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의도되지 않은) 결과에 의한 보상이나 손해가 극한적으로 갈리는 행위는 가치지향으로 환원할 수 없는 여러 변수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가치의 사회적 형성과정이나 행위의 집합화, 즉 동원의 과정에 대한 보완적 논의가 매개되어야 한다.

이러한 비평 뒤에 감추어진 나의 논지는, 예수운동과 동시대 다른 민중운동들이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서로 통시적인 연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헹엘 류의 연구는아직까지도 많은 연구자들에게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바예수시대 사회운동들이 시공간적 근접성을 갖는다는 전제 아래 이 운동들을 평면적으로 나열하면서 예수운동이 다른 운동들에 비해 얼마나 특이성을 갖는가를 말하려는, 다분히 호교론적 지향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예수운동과 다른 사회운동들은 동시대적 현상이지만, 서로 간에는 연계성이 없다는 전제를 갖는다. 따라서 나의 논지는 위의, 헹엘의 주장에 대한 세 가지 비판을 논의의 축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30년 어간에 역사의 예수가 주도했던 사회운동적 전망이 초기 그리스도라는 분파적 조직을 통해 어떻게 승계되었느냐라는 주체화 과정에 주목하는 헹엘 류의 호교론적 길과는 인식론으로 다른 전제를 갖는다. 후자는 예수분파의 헤게모니 형성 과정에서 구성된 차별적 담론화에 몰두하고 있는 최근의 예수연구의 엘리트주의적 시각[각주:8]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반면 나는 30년대 민중운동으로서의 예수운동에 동원된 대중과 60년대 말에 절정에 이르는 대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중운동에 동원된 대중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고 본다. 예수운동의 참여자가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신앙적이고 사상적인 전향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담론을 대중전승의 관점에서 볼 것을 제안하고 있는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다소의 이론적 보완을 거쳐받아들인다면,[각주:9] 마가복음의 예수담론은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해 주는 성서 내적인 증거를 제공해 준다. 마가복음에 반영된 예수전승은 혁명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회운동들과의 담론적 결속의 흔적을 보여준다. 만약 성서의 내증이 수반된다면, 논리적으로 이러한 관점은 자명한데, 그것은 안정기에서 혁명기로 이행하는 사회적 동원 과정은, 미시동원적 민중운동간의 결속이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지는 통시적 과정을 수반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관점은 이러한 상식적역사 과정에 예수운동을 위치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논지의 대극에 있는 헹엘 류의 견해에 대한 비평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여기서는 호슬리(Richard A. Horsley)에 대한 평가로 이러한 과제를 대체하고자 하는데,[각주:10] 그것은 그의 연구가 위에서 기술한 헹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점을 극복한 탁월한 성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번째 논점에서 호슬리 또한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그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호슬리의 글들이 이미 여러 편 번역되었고[각주:11] 그의 연구사적 전제라 할 수 있는 젤롯에 관한 최근의 연구들에 대한 사전적인 소개[각주:12]가 이미 수행된 바에, 그의 주장을 여기서 다시 소개하는 것은 지면의 낭비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위의 비판점들과 관련한 그의 주장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코자 한다.

 

2

 

호슬리의 연구는 앞서 언급한 스미스의 요세푸스 저작들에 관한 문헌비평적 성과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각주:13] 스미스는 헹엘이 젤롯(ζηλωται)과 시카리(σικαριοι) 및 비적(λησται)을 모두 동일한 것으로 보는 혼란에 빠져 있다고 비평하면서, 이들 운동들을 다음과 같이 재규정한다: 주후 6년 라삐인 갈릴래아의 유다로 말미암아 시작된요세푸스가 명명한 바4의 철학은 젤롯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이 운동의 창시자인 유다가 주후 66년 시카리의 지도자로 나타난 므나헴의 조부/부친이라는 점에서, 시카리와의 연계성을 추정할 수 있으며, 시카리는 주후 66년 전쟁이 발발한 직후 예루살렘의 지도적 사제들에 의해 므나헴이 암살당하자 마사다로 물러나게 되며, 이후 전쟁 기간 내내 예루살렘에서 사라져버린 반면, 젤롯은 전쟁의 중반에야 비로소 등장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헹엘은 요세푸스가 다양한 용법으로 사용한 비적이라는 경멸조의 말을 모두 하나의 잘 조직된 정파로서의 젤롯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각주:14]

호슬리는 젤롯, 시카리, 비적 외에 대중적 예언자 운동과 대중적 메시아 운동 등을 포함해서 1세기 팔레스티나 사회운동 유형의 지형도를 그린다. 그런데 그의 연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런 유형론의 사회사에 전자본주의적 농경사회의 대중운동적 함의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엘리트주의적 해석은 농경사회의 거의 모든 대중이 비문자 계층이라는 점을 텍스트 해석에 별로 감안하지 않았다. 요세푸스는 로마에 투항한 유다인으로서 황실 역사가였을 뿐 아니라, 동시대 최고의 지식 엘리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유다의 대중적 사회운동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요세푸스의 해석을 통한 헹엘의 가설이나, 스미스의 헹엘 비판, 그리고 그 이후의 논의들이 모두 범하는 공통된 한계는 비문자 계층의 시좌에서 요세푸스를 읽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각주:15] 호슬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새로운 해석학적 원칙을 제시한다. 수미일관된 구성을 갖는 현존하는 텍스트의 거대전승(great tradition)에서 미소전승(little tradition)을 추론해 내는 것이나,[각주:16] 외삽법(extrapolation)을 사용하는 것[각주:17]이 그것이다. 전자가 텍스트 내부에서 대중의 담론을 추론해내는 것이라면, 후자는 텍스트가 주는 정보의 희소성을 극복하기 위해 비교방법을 통해 외부로부터 정보를 보충하여 대중적 담론을 유추해 내는 방법이다. 그런데 전자의 방법은, 요세푸스의 저작의 경우엔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저작 자체가 대중 담론에 기초한 글쓰기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호슬리는 이 방법을 구술적 대중 담론으로부터 유래한 성서 해석에 주로 활용한다. 반면 요세푸스의 저작을 해석하는 데 유용한 외삽적 정보로서 그는 홉스봄(Eric J. Hobsbawm)의 전자본주의 사회의 민중운동 유형에 관한 연구[각주:18]를 유용하게 활용한다. 특히 사회적 비적 현상(social banditary)에 관한 논의는 홉스봄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데, 여기서 사회적 비적 현상이란 농촌사회에서 위기적 변동이 진행된 결과 공동체적 연결망이 훼손되어 비자발적 이탈자 집단이 속출하고, 이들의 기득권층에 대한 즉자적 저항이 그들에 대한 (충분히 정치화되지 않은 pre-political)[각주:19] 약탈로 이어지는 사회운동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회적 비적이 촌락민과 갈등 관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촌락민과 비적 간의 상호 이동 가능성을 수반한다. 대중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종종 그들에게 앙갚음을 부탁하곤 했고, 때론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기도 했다. 특히 혁명기에 접어들면 농민으로부터 대대적인 충원이 이루어지게 되며, 여기에서 단순한 사회적 비적이 보다 정치화되어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으로 전화되는 맥락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유다 혁명기에 등장한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 등을 설명하는 데 기반을 이룬다.

호슬리가 그리고 있는 주전 4년에서 주후 74년까지 팔레스티나의 민중운동 지형도는 다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다. 우선 통시적 범주로 보면, 1세기 팔레스티나의 역사는, 주전 4년 잠깐 동안 폭발적으로 분출한 에피소드적 혁명기, 그 이후 주후 40년대 말까지의 정치적 안정기, 그때부터 66년까지의 원초적 반란기, 그리고 66년 이후 몇 년간의 혁명기로 시기 구분할 수 있다. 비적 현상은 전 시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존재했던, 농경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원초적인 형태의 사회운동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첫 번째 시기는 대중적 메시아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이고, 둘째 시기는 대중적 예언자 운동이 상대적으로 활기를 띤 반면, 다른 운동들은 지극히 억제된 시대다. 셋째 시기는 시카리의 테러리즘이 등장했고, 비적 현상이 급속히 확산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마지막 시기는 비적들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운동들간의 연결망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거대 규모의 민중 연대체들이 형성되는데, 그 중 예루살렘과 연관지어 보면, 진보적 사제귀족인 엘르아잘이 이끄는 시민연합’, 유다 지방 북서부 지역 출신 비적들이 주축을 이룬 급진적 대중연합인 젤롯, 가장 급진파에 속하는 기살라의 요한이 이끈 민중연합, 그리고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받던 시몬 바르 기오라가 이끈 메시아 운동적 민중연합 등을 들 수 있다.

사회의 시대적 추이와 민중운동을 대응시킴으로써 호슬리는, 헹엘이 가치지향과 행위를 직결시킴으로써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단순화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성공한 듯이 보인다. 그는 사회구조와 집합행위가 상호성을 갖는다는 점을 유념하면서, 이에 관한 사회학적 이론을 자신의 연구에 적용시킨다. , 안정기에서 혁명기로 이행하는 시대적 전개와 사회운동을 관련시키기기 위해, 찰머스 존슨(Chalmers A. Johnson)의 사회체계론적 혁명이론을 활용한다.[각주:20] 요컨대 호슬리는 혁명의 구조적 요인을 헤롯 치하에서 심화된 정치경제적 착취구조와, 기존의 가치지향 안팎에서 면면히 전승된 저항의 전통 등으로 요약한다. 이것은 존슨이 주장한 환경과 가치의 변동과정의 비동시성이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에서도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특히 혁명의 보다 근거리적 계기로 그는 40년대 말의 대기근과 비적 현상의 만연을 이야기하는 데, 이 논의는 환경과 가치간의 불일치로 인한 체제의 구조적 위기가 절정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존슨은 지배 엘리트들이 비타협적인 강제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통치 상황이 혁명으로 치닫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호슬리는 이를 쿠마누스 이후 총독들의 대응방식에서 찾는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혁명적 대중 동원이 이루어지려면, 존슨에 의하면, 촉진제적 사건이 수반되어야 한다. 호슬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시카리 가설을 제안한다. 그에 의하면, 시카리는, 비적과는 달리, 농촌이 아니라 도시의 현상이다. 또한 하나의 잘 조직된이데올로기적 사회운동 집단으로, 테러리즘을 투쟁 전략으로 선택한 급진주의자들이다. 그는 테러리즘에 대한 최근의 실증적 연구들에 기초해서, 시카리가 유다 민중봉기의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혁명 상황에서 대대적인 대중적 저항 연합들이 도시와 시골에서 형성되는데, 이 맥락에서 홉스봄이 이론화한 비적과는 비견할 수 없는, 규모에서도 훨씬 거대하며 활동에서도 매우 공격적인, 그리고 매우 정치화된 사회운동체들이 형성된다.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의 존재는 바로 이러한 설명틀 속에 위치한다.

이상과 같이 1세기 팔레스티나의 통시적 동학 속에서 동시대 민중운동의 전개를 상응시켜 보는 것은, 헹엘이 역사적 추이를 무시하면서 사회운동들간을 비교한 것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중요한 사실을 보게 해 준다. 특히 역사의 예수가 주도한 운동의 비폭력적 지향을 폭력적 전략의 젤롯운동과 비교하면서 해석하기보다는, 주후 30년 어간의 시대적 특성을 고려하여 해석하는 편이 훨씬 유용하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요컨대 이러한 통시적 지형도는 비교대상을 선정하거나 비교방법을 적용하는 데서 생길 수 있는 오류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유용한 도구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호슬리의 민중운동 지형도를 대중적 민중운동 대 지식인적 민중운동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비적, 젤롯, 대중적 예언자 운동과 대중적 메시아 운동 등이 전자에 속한다면, 바리사이나 에쎄네, 4의 철학, 그리고 시카리 운동은 후자에 속하며, 그밖에 (비록 호슬리 자신은 여기에 포함시키는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66년 봉기의 초기 국면을 주도하였으며, 므나쎄를 암살하고 시카리를 도성에서 몰아낸, 성전 수비대장 출신의 고위 사제 엘르아잘이 이끄는 사제 중심적 시민당파(유대전쟁사2,422~24; 2,443~45)도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호슬리에 의하면, 이러한 범주의 사회운동들은 동시대에 대중 동원에 거의 무관심하거나 혹은 실패하였다고 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므나쎄 휘하의 당파는 시카리 집단에서 예외적으로 대중적 메시아니즘의 요소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된다. 호슬리에 의하면, 동시대의 무수한 민중운동 가운데 이 두 영역을 매개하고 있는 유일한 예가 바로 므나쎄의 경우라는 것이다.[각주:21] 그러나, 내가 보기엔, 엘르아잘의 예루살렘 시민연합도 대중동원에 성공한 엘리트주의적 사회운동의 또 다른 경우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므나쎄가 대중적 메시아니즘에 호소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했다고 한다면, 엘르아잘은 주로 시각(제의적 건조물 등)청각(찬양 등 제의에서 발성되는 소리)후각(, 또는 동물의 피나 기름에서 나오는 냄새 등) 등 감각적 매체를 통해 의미 전달의 대중적 효과를 극대화했던 제의를 활용하였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논의에서 우리는 예수운동과 동질적인 계급적 기반을 가진 대상과 이질적인 대상을 명료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비교대상을 선정하고 방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 보다 분명한 준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호슬리는 지식인적 민중운동이 대중동원에 실패함으로써, 1세기 팔레스티나의 사회운동들은 운동 구성원의 계급적 위치에 있어서 간명하게 구획되어진다고 본다. 요컨대 운동의 구성원으로 볼 때, 비적, 대중적 예언자 운동, 대중적 메시아 운동, 젤롯 등은 가족적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운동의 주변적 참여자들 간에는 상호이동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훨씬 용이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해 준다. 심지어 중심부 집단의 공식적 조직들 간에는 서로 명백한 구분이 지어져 있었겠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매우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하였으리라고 보는 것도 그리 무리한 추정은 아니리라. 가령, 68년 예루살렘에서 젤롯 연합이 형성되어 일시적인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 이 당파와 기살라의 요한이 이끄는 민중연합, 그리고 시몬 바르 기오라가 이끄는 메시아 운동적 민중연합이 예루살렘을 분할 점거하고 있는 혁명의 마지막 기간 동안 갈등 관계가 계속되는 중에서도 구성원들의 수평적인 상호이동이 계속되고 있었고, 중심부 집단 간에도 선택적으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유대전쟁사4,224~365). 아마도 귀족이나 왕족들을 숙청하는 등의 활동에서 중간지도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자신이 속한 당파의 명령계통에 준하기보다는 그들 간의 지연 혈연 및 기타 친분관계 등 다양한 비공식적 연결망에 의해서 처신하곤 했던 것 같다.[각주:22] 이와 같이 어느 정도 자발적인 다양한 상호이동 및 비공식적 연결망은 운동 집단간의 공시적일 뿐 아니라, 통시적 현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호슬리처럼 당파들 간의 유형적 차이를 밝혀내는 작업은 이들 운동집단들 간의 시공간적인 연계 및 상호이동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예수의 추종자들의 통시적 승계 행위가 공식적 승계집단을 통해서만 수행되었다고 가정하는 그리스도교 신학계의 신화는, 예수로부터 배운 야훼신앙 정신을 승계하기 위해 조직된 공식적인 분파적 경계를 넘나드는 대중적 상호이동의 정당성을 간과한 결과며, 엘리트주의적이고 종파주의적 폐쇄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몰역사적 역사의식의 흔적이다. 그런 점에서, 비록 호슬리 자신은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주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제기한 비교연구의 논제는 그리스도교 운동사를 새롭게 보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런데 왜 지식인 중심의 운동은 대중적 사회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었을까? 이에 대한 호슬리의 대답은 불명료하지만, 대체로 그들의 계급위치에 따른 인식론적이고 담론적인 한계탓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므나쎄에게서 예외가 가능했던 것은, 그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이 이례적으로 대중 담론의 형식인 대중적 메시아니즘의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각주:23] 이 주장 이면에는 고대농경사회에서 대중과 지식인간에는 적어도 일상담론 속에서는 상호소통 가능성이 극히 제약되어 있다는 전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을 너무 강한 준거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대중매체가 급속도로 발전한 오늘날에 비할 수는 없지만, 계급간 소통의 가능성은 비록 제한적이나마 존재했고, 또 사회마다 혹은 시대마다 그 정도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노정되리라는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호슬리는 고대사회에서 지식 엘리트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을 문자언어에 한정하여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구술사회에서 문자 생산물은 낭독을 통해서 대중 담론 형성에 개입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 그런데, 호슬리가 인용하는 바, 고대사회에서 문자언어의 해독률이 전체 구성원의 10% 미만일 거라는 일반론적 추정[각주:24]을 대입해보면, 지식인과 대중간의 계급적 차이는 상호소통의 가능성을 극도로 제약하였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런 맥락에서 호슬리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경우에 (지식인 운동과 대중운동으로 대별되는) (사회운동) 형태들의 복합이나 결합체는 없었다(괄호 안은 인용자)고 단언하는 것이다.[각주:25] 그러나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 감각적 기호를 매개로 한 상징체계가 문자계층과 비문자계층 간에 더욱 유용한 교신수단일 수 있음을 그는 간과하고 있다.[각주:26] 결국 그는, 의도한 것은 아님에도, 고대의 사회적 투쟁을 계급위치에 귀속시키는 환원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엘리트층과 대중을 망라하는 일상적인 소통적 기재인 문화적 상징적 매체의 존재를 보다 신중히 고려했어야 했다. 또한 지식 엘리트 계층이 대중동원에 성공한 사회운동의 주역으로 자리잡지 못하게 된 역사적 과정 그리고 대중 자신이 지식 엘리트를 매개하지 않은 채 변혁에 대한 주체적 의식을 갖추게 된 역사적 과정을 유념했어야 했다. 실재로, 페르시아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 그리고 로마 시대로 이어지면서 대중 동원에 성공한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전략집단의 계급적 위상은 왕족/귀족소자산가 계열의 지식인대중으로 전반적으로 이동해 가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각주:27]

셋째로, 도시와 시골이라는 사회생태학적 맥락에서 민중운동들을 범주화할 수 있는데, 젤롯과 시카리가 도시에서 발생전개된 사회운동이었고, 대중적 메시아 운동이 도시에서 더욱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면, 비적은 주로 농촌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대중적 예언자 운동은 도시와 농촌에서 모두 발견된다. 비적이 대중의 충분히 정치화되지 못한저항 유형인 반면,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이 보다 정치화된 저항유형이라는 사실을 유념한다면, 그리고 시카리가 여타 대중운동에 비해 매우 이데올로기화한 정체성을 가진 운동 유형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도시에서 전개된 운동은 보다 정치적인 반면, 농촌의 운동은 덜 정치적일 수 있다는 호슬리의 추론은 자명한 논리적 귀결처럼 보인다.

요컨대 호슬리는 농경사회의 계급투쟁을 두 가지 양상으로 논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착취구조로 인한 계급투쟁의 양상인데, 농경사회에서 착취가 도시 대 농촌의 문제라는 점에서 혁명적 동력은 기본적으로 농촌에서 발원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동원 상태의 농민이 정치적으로 동원되는 혁명적 상황으로 전화되는 과도기로 충분히 정치화되지 않은 (하향의) 동원상태를 설정하는 데, 그것이 바로 비적이다. 아무튼 호슬리는 도시 대 농촌으로 나뉘는 착취구조 때문에, 기본적으로 농촌은 혁명적이고 도시는 반혁명적이라고 본다. 이러한 주장이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부분은 젤롯을 공격했던 사제귀족 출신의 아나누스와 예수가 이끄는 예루살렘 시민연합의 반혁명 시도에 관한 논의다.[각주:28] 그것은 예루살렘의 시민들(도시 거주 대중들, city-people)이 성전과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각주:29]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시카리 같은 도시적 혁명집단이나, 농촌에서 유래했지만 도시에서 그 폭발성을 발현했던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에 관한 문제다.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는 농경사회의 계급투쟁의 두 번째 양상에 주목한다. 즉 계급의식의 문제다. 호슬리는 도시의 현상이었던 시카리를 이례적으로 매우 이데올로기화된 사회운동의 전형으로 설명한다. 또한 비적 같은 농촌의 사회운동은 덜 정치화되었던 반면, 비적에서 유래한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은 현저히 정치화되었다는 주장을 편다. 그것은 도시의 사회운동이 더욱 현저한 계급의식을 갖추었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중의 계급투쟁 관점의 지적 소유권자인 홉스봄에게서 그런 것처럼[각주:30] 착취관계는 통시적으로 비교적 지속성을 지니지만, 계급의식은 통시적 과정에서 (급격한 혹은 완만한) 전화과정을 거친다. 요컨대 호슬리는 착취관계에 의한 즉자적 계급투쟁이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게 되는 통시적 진화(進化) 과정에서 혁명기 사회운동들의 보다 정치화된 지형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생태학 차원에서 전개되는 이중의 계급투쟁 논의는 도시와 농촌의 갈등과 예수의 성전 저주 예언의 사회학을 직결시키려 했던 타이쎈의 주장[각주:31]보다 한결 발전된 양상을 보여준다. 타이쎈에게서 사회적 착취 구조(구조의 행위자에 대한 규정성의 차원/도시와 농촌간의 착취구조)와 담론적 갈등(행위자의 자발적 대응의 차원/성전에 대한 저주 예언)일 대 일대응관계에 있다. 그러나 호슬리에게선 그러한 일차원적 사회학을 넘어서 행위자의 혁명적 저항이 통시적으로 점점 정치화되는 과정을 사회생태학적 공간을 따라 추적하고 있다. 즉 농촌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운동들이 도시를 점거하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과 사회운동의 역할이 점차 혁명적으로 전화되는 과정이 맞물리는 통시적 지형도를 그림으로써, 구조와 행위자의 관계를 단순 대응시키기보다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보다 정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생태학적 지형도는 농촌의 예수운동이 혁명기 도시의 사회운동들과 비교할 때 비폭력적인 지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반면 정치적 전망에 있어서는 매우 절제되어 있는 이유를 암시해 준다.

그런데 호슬리가 이와 같이 도시 주민들을 반혁명적 지향과 관련시키고 있는 어법은, 젤롯이나 기살라 요한의 집단, 시몬 바르 기오라의 집단 같은, 농경민이 주축을 이룬 도시의 혁명적 대중운동 집단에 대해 독설적 어투로 비난하고 있는 요세푸스의 어법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마치 요세푸스를 반박하려는 집착에 몰두한 나머지 균형을 잃은 듯한 모습이다. 반면 그의 이론적 후견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홉스봄은 도시빈민의 폭동을 농촌의 비적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정치화되지 않은 원초적 반란의 한 유형으로 묘사하고 있다.[각주:32] 그러나 호슬리에게서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에서의 도시민은 권력의 이해관계에 포섭된 존재이거나 변덕스럽게 지지세력을 바꾸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균형을 잃은 듯한 모습은 그의 저술들 전체에 걸쳐 대체로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는 요세푸스로부터, 주후 66년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티나 전 지역에서 반로마적 혁명 집단들이 로마군을 축출한 직후, 갈릴래아의 수도격인 티베리아에서 도시의 빈민들과 (아마도 이 도시에 편입된 인근 지역의) 어부들이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철저한 사회적 혁명을 추구하였다는, 역사적 개연성이 높은 정보에 접하게 된다(자서전65~67).[각주:33] 이러한 대중적 민중세력은 티베리아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다른 민중운동과 제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자서전33~38 참조). 그리고 이들은 당시 이 지역에서 강력한 전투 능력을 갖춘 민중운동 지도자로, 훗날 예루살렘으로 옮겨간 뒤 가장 걸출한 혁명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된 기살라의 요한과 연합한다(자서전88 참조).

호슬리의 이러한 편견은 아마도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의 사회생태학 속에 드리워진 권력 메커니즘을 편협하게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권력은 자원에 대한 불균등한 착취 관계를 통해 규정될 수 있다. 호슬리는 착취관계의 핵심으로 부채의 동학(dynamics of indeptedness)을 상정하며, 이 부채관계는 주로 도시와 농촌간의 갈등이라고 본다.[각주:34] 이때 그는 자원을, 실물 가치를 우선시하여 이해한다. 결국 그가 말하는 도농의 관계에는 상징적 자원에 대한 권력관계가 사실상 괄호쳐 있다.

그런데 권력은 정당성 주장과 강제력을 통해 착취 관계를 재생산한다. 후자가 불균등한 착취관계를 더욱 적나라하게 노출시킨다면, 전자는 은폐함으로써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양자는, 그 상대적 강도의 크기가 시기별로 변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나 공존함으로써 착취적 체제의 안정적 재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이때 정당성 주장과 강제력은 각기 실물적 차원뿐 아니라 상징적 차원을 함께 갖는다. 권력적 체제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두 차원은 때로 서로 조응하지만, 또 때로는 부조응하기도 한다. 전자는 이 두 차원의 갈등적 공존이 체제의 통합을 위해 순기능하는 경우고, 후자는 역기능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순기능하는 경우를 권력의 구심성’, 역기능하는 경우는 원심성이라고 규정한다면, 권력의 이 두 속성의 공존 및 상호관계의 구체적 양상에서 예수시대 팔레스티나 사회를 특성화할 수 있을 것이다.

구심성이든 원심성이든 권력은 엘리트 집단과 더불어 생각해야 한다. 전자에는 왕족과 예루살렘 성전 귀족, 평신도 귀족 등, 도시에 거주하는 대자산가 권력층이 있고, 후자에는 촌락적 엘리트 층으로, 영향력 있는 지방 사제나 바리사이와 서기관, 그밖의 씨족장, 촌장 같은 부류가 속한다. 이 두 범주의 엘리트간에는 분명 수직적인 계서체계(hierarchic system)가 있다. 가령, /귀족과 씨족장/촌장 간에는 공납이나 부역, 군역 등 조세군사적 행정제도를 통해 위계적으로 계서화된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고위사제와 지방의 평사제 혹은 바리사이/서기관 간에는 성전을 매개로 하는 종교적상징적 계서체계가 구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각주:35] 하지만 지방의 엘리트들은 행정상으로나 종교전통으로나 일정하게 독자적인 위상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도시와 지방의 권력 엘리트가 잘 짜인 수직적인 계서체계를 형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수평적인 공조를 견고하게 이루고 있어야 체제의 안정된 재생산이 가능해지게 된다. 이때 수직적인 계서체계와 수평적인 공조체계는 실물 차원에서 뿐 아니라 상징의 차원에서 서로 얽히면서 하나의 체제적 통합 메커니즘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체계적 통합 메커니즘의 작동 과정에서 사회의 모든 대상물들을그것이 실물적이든 상징적이든가로지르는 경계(boundary)가 만들어진다. 즉 포섭과 배제의 경계가 형성되는 것이다.[각주:36]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도농간의 갈등을 단순하게 이해했던 호슬리의 견해와는 다소 다른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우선 사회의 포섭과 배제의 경계짓기는 피지배층 일반을 크게 두 부류로 구획짓고 있다는 사실이다. 호슬리가 많이 의존하고 있는 사회학자인 게하르트 렌스키(Gerhard Lenski)에 의하면,[각주:37] 정상적인 농경사회에서 75% 가량의 농민계급과 3~7% 가량의 도시의 장인상인 계급이 피지배층이면서도 권력의 주된 포섭의 대상인 반면, 5% 가량의 부정하고 천한 계급(unclean and degraded classes), 그리고 역시 5% 가량의 소모집단(expendables)은 권력의 주된 배제의 대상이다. 요컨대 농민이나 도시 주민이 포섭의 대상이라면, 농촌의 유랑민 계층이나 도시의 빈민층은 배제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배제의 대상이라는 것은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체계의 준거로 볼 때 일탈자로 취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배제된 도시의 주변계층은 종종 귀족에게 고용된 탈가치화된 폭력집단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가령,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게쎄마네로 몰려온 대사제의 종들이나, 빌라도의 법정 밖에서 고위사제들에게 매수되어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친 사람들을 마가복음저자가 오클로스(οχλος)[각주:38]로 명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이상은 안정적인 농경사회의 경우인데, 원초적 반란기는 이러한 사회를 지탱해 주던 포섭과 배제의 가치체계가 급격히 교란 상태에 빠져들게 되는 상황을 내포한다. 이 경우 권력연합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으면서도 권력에 포섭되어 있던 계급들의 광범위한 이탈이 일어난다충분히 정치화된 형태로든 아니든.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다 혁명기에 착취관계에 의한 계급투쟁의 문제는 도시와 농촌에 두루 퍼져있는 피지배 대중의 광범위한 일탈 및 그들의 정치적 동원의 문제와 연관된다. 이러한 일탈과 동원의 문제는 도농 간의 관계에서 첨예하게 부각되는 부채의 동학만으로는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다. 기성의 지배적 가치체계가 더 이상 대중을 효과적으로 포섭하지 못하게 된 가치의 아노미적 상황과, 대안적 비전이 일탈된 대중을 혁명적인 사회운동에 동원되게끔 하는 상황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상징적이고 문화적인 이해 또한 필요한 것이다. 결국 호슬리는 부채의 동학으로 표상되는 정치경제적 해석에만 몰두하여 도시와 시골의 갈등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혁명기의 대중적 저항의 탈지역성을 간과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그는 권력 엘리트 계층의 결속을 너무 과장되게 이해한 나머지, 그들의 분화 가능성을 간과하였다. 앞서 보았듯이, 도시의 권력 엘리트와 농촌의 엘리트는 단선적으로 위계화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공식 비공식적으로 엮인 수평적인 공조관계와 교차하여 얽히면서 권력연합을 구성하였다. 이것은 중심부 엘리트의 체제적 통합 능력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다 혁명기에 이두메 종족 집단의 역할에서 볼 수 있듯이(유대전쟁사4,224~388 참조), 지방적 엘리트 세력은 종종 혁명적이었다. 나아가 중앙의 엘리트 계급조차도 혁명적 민중연합의 우파적 세력에 가담하곤 했다. 앞서 보았듯이, 갈릴래아의 수도인 티베리아의 유스투스 바르 피스투스(자서전3640 참조), 시몬 바르 기오라의 예루살렘 입성에 협조한 고위사제 마띠아스(유대전쟁사5,527)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지배 엘리트의 이러한 분열은 정치경제적 착취구조에만 주목할 경우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돌출적 상황이다. 그래서 호슬리는 이들의, 역할을 애써 폄하하고 있다. 여기에는 혁명기에 대두한 묵시적이고 대중적인 대안적 비전이 이들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는 가정을 전제한다. 그런데 앞서 본 권력의 구심성 문제는 도시와 시골간의 의사소통 기재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문자 매체는 부분적으로 팔레스티나 내의, 나아가서는 디아스포라를 포괄하는 유다 사회 전체를 묶어주는 종교공동체적 형성 기재였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이 고향 회당에서 대중 앞에서 이사야서를 읽어주었다는 루가복음서의 기사(누가복음4,16~19), 문서가 구술용으로 활용됨으로써 구술사회의 공론 형성의 기재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다. 신약성서에 무수히 등장하는 구약성서에 대한 기억들은 바로 이러한 구술용 문서들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밖에 성전이나 회당 같은 건조물, 제의 의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축제 등은 유다 사회를 종교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런 점에서 제도화된 야훼신앙의 기구들과 담론들은 (도시와 시골을 포괄하는) 종교공동체로서의 유다사회의 핵심적인 의사소통 기재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하느님나라 신앙이, 그 세부적인 해석에 있어서는 서로 달랐더라도, 유다사회의 다층적 구성체들을 연계시켜 주는 체제적 통합의 상징적 의미틀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배적 비전이 교란되어 신념의 공허 상태가 급속도로 확산되어갈 무렵, 대중사회에서 유래한 대안적인 혁명적 비전이 하느님나라 신앙과 결속되었다면, 지배 엘리트층이 이러한 대안적 비전에 동화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령, 아리마태아 요셉은, 비혁명기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메시지에 동화된 엘리트의 실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도시와 시골의 정치경제학으로 포착되는 권력연합에 대한 이해는 실제의 역사를 분석하는 데는 지극히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정치경제적 현실 못지않게, 상징적 의미틀의 결속과 관련된 문화적 현실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설정을 문화정치학으로 명명한 바 있는데,[각주:39] 이상에서 본 것처럼 정치경제학과 문화연구를 연결시키려는 이러한 시각은 호슬리의 한계지점을 돌파하는 대안적 설명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시대 민중운동에 대한 호슬리의 논의에 대해,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비평적 논평을 시도해 보았다. 예수운동을 동시대 팔레스티나의 다른 사회운동들과의 비교를 통해 조명할 때, 그의 연구는 특히 빛을 발한다. 무엇을 비교해야 하고 무엇을 비교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또 비교 가능한 대상을 성공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면,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은 어떠해야 할지 등등. 그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공해 준다.

호슬리에 의하면, 1세기 팔레스티나의 민중운동 전개는 적어도 세 단계의 변별적 과정을 통해 조명되며, 예수운동은 민중운동이 매우 억제되어 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복음서의 예수 전승들 속에 나타나는 정치적 투쟁의 흔적이 요세푸스 저작에 나오는 젤롯 등에 비해 희소하게 나타나고 있는 점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역사적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이 전승은 일체의 폭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라는 추상적 가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폭력적 저항이 억제된 시대의 담론적 산물임을 반영한다. 예수 이후 민중운동이 극적으로 고양하는 질적 계기들이 있었다. 예수운동과 대비하여 종종 잘못된 비교의 대상이 되었던 젤롯 운동은 민중운동 고양기의 한 특징을 보여준다.

한편 그는 민중운동을 정치주의적인 발전론적 관점에서 보는 딜레마를 빗겨가고 있다. 그가 다른 대다수 연구자들에 비해, 이념보다는 실행을 강조하다보니, 그 정치적 효과에 의해 운동의 발전 정도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 결과 예수운동을 사회운동으로 보려했던 것이 예수운동을 평가절하하는 셈이 될 수도 있었다. 그의 선임자들은 예수가 위대하냐 스팔타카스가 위대하냐는 식의 단순 이분법에 빠져 늪지를 헤매야 했다. 반면, 그는 사회운동을 평가하는 준거로 정치적 혁명(political revolution)과 사회적 혁명(social revolution)의 이중개념을 제시함으로써 효과와 가치를 동시에 비교하는 안목을 보여준다. 그에 의하면, 예수운동은 정치적 운동으로서는 소극적 측면을 갖지만 사회적 운동의 관점에서는 다른 운동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급진주의적 측면을 갖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정치적 변혁에의 전망이 극도로 억제된 시대의 산물이면서도, 예수운동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보다 근본적인 변혁적 전망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젤롯 같은 혁명기의 민중운동들이 권력에 대한 저항의 실천을 정치제도의 혁신에 치우쳐 실행한 것과는 달리, 삶을, 존재 자체를 억압하는 보다 근본적인 권력을 문제시하는 해방적 전망이 예수 담론과 실행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각주:40] 이러한 변혁 전망은, 일상 자체가 혁명적 비일상에 압도되어 정치제도에 온통 시선이 집중된 시기보다는, 삶의 일상성이 보다 현저하게 드러나는 시기에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예수운동은 활동 여건이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발전하였기에 도리어 이러한 비혁명기가 제공하는 기회를 얻기에 용이했고,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극도로 고양시킴으로써 사회적 혁명으로서의 새로운 신앙 전통을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관점을 개진하는 데 있어 그의 논거는 설명적이라기보다는 단언적 어투로 일관한다. 즉 정치제도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차원을 강조하면서도, 여기서 가장 부각되어야 할 일상성과 관련된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거의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특히 대중의 저항을 논의할 때 문화적 요소는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 문화라는 개념에는 대중이 국지적 영역 내에서 체험하는 일상성이 포함되지만, 동시에 그러한 국지성이 다른 국지성들과 추상화된 시공간 속에서 접속되어 상징적 동질성을 형성하는 문화공동체적 통합 과정도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시각은 갈릴래아의 어부들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예수운동이 동시대의 다른 민중운동들과수많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서로 연계되었을 가능성, 특히 안정기에서 혁명기로 이행하는 통시적 과정에서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3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사회적 혁명의 실천으로서의 예수운동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예수전승의 적지 않은 담지자들이 예수 당시나 그 이후 시대의 많은 민중운동의 주역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자 한다.

예수운동은 지역적으로 두 단계의 전개를 보여준다. 하나는 갈릴래아 활동기이며,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활동기다. 전자에선 예수운동을 권력 해체적 미시동원(micro-mobilization)의 맥락에서 볼 때 유용하다. 하나의 잘 조직된 운동집단이 형성되었으며, 여기에는 주로 떠돌이 예언자 형태의 실천을 펼쳤던 제자단이 있었고, 각 지역에서 은밀히 이들의 운동에 협조했던 이들이 있었다(‘지역협조자유형). 또 제자단 내에서도 특화된 내적 집단(inner circle)이 존재했다.[각주:41] 한편 하느님나라의 임박한 도래가 예수집단의 주요 선포내용이었는데,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선포이기도 했다. 사실 동시대 많은 묵시적 문헌들이나, 구약 성서의 후기 문서들에서 그 나라의 임박한 도래는 현존하는 권력의 불의를 고발하고 대안적 체제를 염원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신앙적 비평의 어법이었다. 요컨대 하느님나라의 임박한 도래 사상은 반체제적인 상징적 의미틀(frame)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예수운동의 제자단 가운데는 세례자 요한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다수 포함되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세례자 요한 운동에 참여했던 개인/집단과 지속적인 공식적 비공식적 연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5장의 게라사의 광인 이야기를 데카폴리스의 하나인 헬레니즘화된 도시의 시골 지역에 실존했던 한 비적 집단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이 텍스트는 그가 예수운동의 지역협조자로 가담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미시동원조직들간의 협동적 연계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위동원자(meso-mobilization actor)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예수집단은 분명 혁명적 대동원(macro-)을 성공적으로 실현하는데 기여하지는 못했다. 우선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은 늘 국지적이고 소규모적인 활동에 그쳤다. 예수 자신이 세례자 요한이 주도한 운동에 참여했다가 그가 체포되는 과정에서 갈릴래아로 도주했고, 이 곳에서 그의 활동이 요한과 연속성을 지닌 것으로 (대중과 헤롯데 안티파스 당국에 의해) 파악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운동이 처음부터 공개적 환경에서 전개될 수 없었음을 시사한다. 게다가 촌락의 회당 안에서 활동하다가 바리사이와 충돌한 이후, 촌락사회의 외부에서만 가능한 활동공간을 구축할 수 있을 뿐이었다.[각주:42] 그러므로 갈릴래아에서의 예수 주변의 무리복음서들의 과장된 표현에도 불구하고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그의 예루살렘행은 메시아 도래 사건에 대한 민족적 기대와 관련되어 있다. 로마 당국은 명절 때는 팔레스티나 주둔 주력부대를 예루살렘으로 이동시킨다. 그만큼 치안 유지에 비상 상황이 우려되는 시기인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의도적인 상징행위를 벌인다. 그리고 예수일행의 모종의 만찬직후, 대사제가 산헤드린의 의결도 거치지 않은 채 자신의 사병을 긴급 출동시켜 예수를 체포한다(대중을 자극할 우려가 있으니 체포하지 말자는 전날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통해서 나는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혁명적 대동원을 기도했다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은 그가 체포되고 처형당한 직후에 일어난 일련의 상황을 시사하고 있다. 그의 부활에 관한 오래된 전승은, 그의 되살아난 몸이 어땠다는 측근들의 목격담/체험담이 아니라, 그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보고뿐이다. 그나마 이 최초의 목격자들도 몇몇 측근 여인들로 묘사될 뿐이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여인의 증언은 증거 능력을 갖지 못한다. 요컨대 부활에 관한 오래된 전승 속에는, 그분의 몸의 부활을 해명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거의 보이질 않는다. 반면 부활설의 유포는 갈릴래아 현현설, 예루살렘 현현설 등과 결합되어 예수운동의 재건 명분으로 활용된다. 사도행전 텍스트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재건되고 점차 결집되어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된 예수운동체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예수전승에선 전혀 볼 수 없었던 지도적 인물들에 관하여 듣게 된다. 이것은 처형-부활 사건을 거치면서 예수운동이 다른 사회운동들과 결속되어 확대 재편되는 과정을 암시한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 시사되는 것처럼, 부활 이후 예루살렘과는 전혀 별개의 예수운동이 갈릴래아 촌락에서 형성되었다. 아마도 이들은 주로 촌락사회의 대중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촌락 사회의 외부로 밀려난 기층대중(오클로스)이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예수운동은 원제자단에 의해 승계된 것만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운동들과 다양한 모습으로 접속되면서 승계되었다. 또한 교회 형태로 발전한 예루살렘의 예수집단이 예수운동 승계의 유일한 예가 아니다. 실제로는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예수운동이 승계되었을 것이며, 그 과정은 현존하는 텍스트를 남긴 교회 유형 운동의 신조로 다 포괄될 수 없다. 실제로 마가복음은 예루살렘 교회 운동에 대한 비판적 입지를 함축하고 있고,[각주:43] 이러한 지양 논법에는 기층대중의 반엘리트주의적인 사회적 비전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각주:44]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더 나아가 마가복음에는 반교회, 반교리적인 민중운동으로서의 예수운동 전개의 계보가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각주:45] 그러므로 신조로만 예수운동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승리자의 전통을 간직하여 온 교회사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예수운동이 동시대의 다른 사회운동들과 어떻게 연계되었으며 특히 혁명기에 예수운동이 어떤 형태로 관여하였는지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상에서 나는 그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나는 호슬리의 결론적 주장처럼 예수 자신의 실천에서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계성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 자신이 혁명적 대동원에 실패하였고, 이 운동과 통시적으로 연계된 혁명기 사회운동들이 혁명에 실패하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예수운동이 대중 사이에서 희망의 원리로서 간직되었으며, 이 전통이 사상된 담론적 구성물들만을 전수받은 우리에게까지 그 의의가 재현될 폭발적 잠재력을 가지고 다가오게 된 것이다. 즉 오늘날 예수가 우리에게 유의미한 것은 교회로 현존하는 명시적 그리스도교의 정치적 승리 때문이 아니라, 실패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된 예수 실천의 의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해석을 위해서, 호슬리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관점인 해방의 거시정치와 미시정치의 결합으로서의 문화정치학적 관점을 요청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예수 행태를 특징짓는 요소로 기적 행위와 비유의 언술을 드는 데 합의에 이르고 있다. 나는 이 두 요소에서 예수운동의 사회적 혁명의 진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예수의 기적 행위는 병리학적 질병(desease)의 원인 제거 행위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질병(illness)의 관리 메커니즘인 건강관리체계[각주:46]를 전복시킴으로써 질병 걸린 자를 해방시키는(healing/liberating) 행위이며, 그리하여 배제주의적인 사회문화적 코드를 교란시키는 실천적 함의를 지닌다. 한편 예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종말론적 선포를 일상언어의 형태로 구상화한 독특한 언술 방식이다. 즉 초월적 대상을 지혜적 언술로 은유하는 것이다. 예컨대 (초월적 대상언어) A(지혜적 대상언어) B이다는 형식을 갖는다. 여기서 종말론적 언술이란 삶의 일상적 가치를 전복하는, 초월 세계를 향해 청중을 부르는 언술 효과를 갖는다. 요컨대 그것은 경험 속에서 부재하는 공간으로의 초대인 것이다. 그런데 청중의 세계는 지혜의 세계다. 지혜는 기성 사회의 문화적 규범/관습체계의 가치를 내재화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언술에 직면한 청중은 결단을 위해선 현실 공간에서 이탈해야 하고, 지혜적 언술에 접한 청중은 현실의 연장선 위에서 현실의 극복하도록 요청받는다. 그런데 예수의 비유는 이 둘을 결합한다. 그리하여 이 두 언술구조의 상호 끌어담김의 긴장 속으로 청중을 몰입시킨다. 그러면서도 예수의 비유의 언어는 결코 이 긴장을 해소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유 속의 그 초월적 나라는 청중에 의해 끊임없이 내재화되어야 하지만, 끊임없이 이 세계의 언어, 이 세계의 이데올로기, 이 세계의 대안적 체제로 구상화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비유의 청중은 이 세상의 무엇으로, 어떤 언어로, 어떤 이념으로, 어떤 체제로 고착화시킬 수 없는, 모든 것의 귀착점인 단순 진리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그 나라에 대한 이미지를 체감하게 된다. 즉 비유에 접한 청중은 예수가 완결시키지 아니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실천의 공동주체로 참여하게 되지만, 그들의 실천 지향은 목적론적이라기보다는 유목민적이다.

마가복음에는 이러한 예수의 사회문화적 혁명의 요소가 생생하게 보전되어 있으며, 그것은 엘리트주의적인 교리의 생산자이자 승계자의 자취가 아닌, 민중의 염원을 자양분으로 하여 간직된 또 다른 승계의 흔적을 보여준다. 물론 우리 모두는 대중의 이 집단적 언행이 자신들의 삶과 분리된 자기기만의 한 양식이라는 가정보다는, 예수를 따르는 삶의 추구의 한 양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제도화된 교회와 신학의 대변자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1. M. Hengel, Eng. tr. by David E. Green, Victory over Violence. Jesus and the Revolutionist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3; Deut. orig. 1971) 참조. [본문으로]
  2.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이 제안한 비교의 고전적 방법의 하나인 '일치의 방법'(the method of agreement)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John Stuart Mill, 〈비교의 두 방법〉, 한국비교사회연구회 엮음, 《비교사회학: 방법과 실제 I》(서울: 열음사, 1990), 217~221 참조. [본문으로]
  3. M. Hengel, Die Zeloten(1961). [본문으로]
  4. S. Zeitlin, "Zealots and Sicarii", JBL 81(1962). [본문으로]
  5. M. Smith, "Zealots and Sicarii, their Origins and Relations", HTR 64(1971), 1~19. [본문으로]
  6. Hengel, Judaism and Hellenism, Studies in their Encounter in Palestine during the Early Hellenistic Period(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4; Deut. orig. 1973) 참조. [본문으로]
  7. 같은 책, 56. [본문으로]
  8. 어록 텍스트와 〈마가복음〉에 대한 문학사회학적인 전승사 연구를 통해 최근 가장 주목받는 예수운동 연구자의 하나로 부상한 버튼 맥은 예수담론의 각 유형을 전승한 다양한 예수운동을 명료하게 구분해 냈는데, 그가 가정한 전승 유형에는―대부분의 선행 연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대중담론적 전승 형식이 포함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가설에서 전승의 계기는 대중적 욕망이나 바람보다는 예수운동 엘리트의 담론적 필요와 거의 전적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Burton L. Mack, A Myth of Innocence. Markand Christian Origins(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91) 참조. [본문으로]
  9. 김진호,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 중심으로〉, 《예수 민중 민족. 안병무 박사 고희 기념 논문집》(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참조. [본문으로]
  10. 여기서는 한국신학연구소 엮음, 《예수시대 민중운동》(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에 수록된 그의 논문들과, 이러한 동시대 민중운동들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 예수운동에 관한 연구서인 Horsley,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Popular Jewish Resistence in Roman Palestine(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을 주로 참고할 것이다. [본문으로]
  11. 《예수시대의 민중운동》에 실린 6편의 논문들(이정희・최형묵 옮김); 이준모 옮김, 《예수운동―사회학적 접근》(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3); 그리고 김진호 엮음, 《예수 르네상스. 역사의 예수 연구의 새로운 지평》(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6)에 수록된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의 제6장 〈정치적 예수에 대한 역사적인 물음〉(이준모 옮김) 등. [본문으로]
  12. David Rhoads, 김진호 옮김, 〈젤롯운동의 기원과 역사〉, 《신학사상》 81(1993 여름). 이것은 원래 Anchor Bible Dictionary (Doubleday, 1992)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13. Horsley, 〈시카리: 고대 유다의 ‘테러리스트들’〉, 《예수시대의 민중운동》, 132의 주1). [본문으로]
  14. Smith, “Zealots and Sicarii” 참조. [본문으로]
  15. Horsley, R.A., & J.S. Hanson, Bandits, Prophets, and Messiahs. Popular Movements in the Time of Jesus (Minneapolis․Chicago․New York: Winston Press, 1985), xviii 이하. [본문으로]
  16. 같은 책, 3~4. [본문으로]
  17. 같은 책, 98. [본문으로]
  18. E.J. Hobsbawm, 진철승 옮김, 《원초적 반란》(서울: 온누리, 1984); 같은 저자, 황의방 옮김, 《의적의 사회사》(서울: 한길사, 1978) 참조. [본문으로]
  19. ‘충분히 정치화되지 않았다’는 말은, 농민들의 저항 목표가 계급의 재구조화를 지향하거나 그런 효과를 내는 데 부적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홉스봄이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민중운동을 근대 산업사회의 민중운동과 구별짓기 위해 사용한 사회학적 어법이다. 그에 의하면, 계급은 두 가지로 정의될 수 있는데, 하나는 착취 관계에 의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계급의식에 의해서다. 그런데 전자는 어느 시대나 착취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항상 존재한다. 따라서 계급은 착취적 체제인 한 항상 실재하며, 따라서 계급투쟁은 언제나 실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계급투쟁이 계급 해방적 비전에 기초한 계급의식의 산물은 아니다. 계급의식은 근대 산업화의 소산이다. 요컨대 농민들의 비적화 등에서 볼 수 있는 계급투쟁은 저급한, 곧 충분히 정치화되지 못한 계급투쟁인 것이다. E.J. Hobsbawn, “Class Consciousness in History”, I. Meszaros, ed., Aspests of History and Class Consciouness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71), 5~21; 같은 저자, 《원초적 반란》, 13~26 참조. 반면 호슬리는 전자본주의 시대의 농민항쟁의 두 시기를 구분하면서, 이 용어를 적용한다. 즉, 혁명기와 혁명 전기(홉스봄의 용어로는, 원초적 반란기, primitive rebel)의 민중운동들에 각각 ‘정치적’, ‘전정치적’인 저항을 대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0. 찰머스 존슨의 혁명이론에 관하여는, Anthony D. Smith, 〈기능주의적 혁명이론 비판〉, 김진균 정근식 엮음, 《혁명의 사회이론》(서울: 한길, 1984), 특히 148~67; 박종성, 《혁명의 이론사》(서울: 인간사랑, 1991), 156~65 참조. [본문으로]
  21. Horsley, 〈예루살렘의 므나헴―‘젤롯 메시아니즘’이 아닌, 시카리 안에서 있었던 간단한 메시아적 일화〉, 《예수시대의 민중운동》, 247~64 참조. [본문으로]
  22. 《유대전쟁사》 4,145~46에는 젤롯에 의해 구금된 왕족과 귀족들이 일단의 무리에 의해 피살되는 일화를 보도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이 일이 젤롯의 기획된 행동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세습제 대사제직을 해산시키고, 신정제적 평등주의 전통의 소산인 제비뽑기를 통해 대사제를 선출한 것이나(《유대전쟁사》 4,155), 숙청 대상자 선정의 용의주도함(《유대전쟁사》 4,138~42) 및 영향력 있는 고위인사들에 대한 회유와 선무 활동(《유대전쟁사》 4,150)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젤롯은 매우 신중하고 용의주도하게 예루살렘의 대체정부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젤롯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고(《유대전쟁사》 4,151) 결국 사제귀족 중심의 시민군에 의해 이러한 기획이 무산되게끔 한(《유대전쟁사》 4,196~207) 구금자들에 대한 살해는 공식적 명령계통과는 별개로 움직인 사람들의 개별적 행동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비록 요세푸스가 지나치게 단순도식으로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묘사 속에서 우리는 젤롯을 포함한 여러 정파들의 형성이 가족이나 친분 있는 사람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유대전쟁사》 4,132). 그렇다면 조직의 명령계통을 무시한 일단의 살해자들의 행동에는 이런 비공식적인 연결망에 의한 담합이 개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개연성이 있다. [본문으로]
  23. Horsley, 〈예루살렘의 므나헴〉, 특히 258~260 참조. [본문으로]
  24. Horsley, Bandits, Prophets, and Messiahs, xii. [본문으로]
  25. 〈예루살렘의 므나헴〉, 258. [본문으로]
  26. 여기에는 과거라는 시간성이 중요한 기능을 한다. 즉, 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을 재해석하는 상징적 체계를 해석자/수용자와 동시대적 맥락 속에 재현함을 통해서 계급간의 차이를 꿰뚫는 집합적 기억이 구성되는 것이다. B. Schwartz, “The Social Context of Commemoration: A Study in Collective Memory”, Social Forces 61/2(1982). [본문으로]
  27. 김진호, 〈예수운동의 배경사를 보는 한 시각―민중 메시아론의 관점에서 본 민중 형성론적 접근〉, 《민중신학》 창간호(1995), 79~116 참조. [본문으로]
  28. 〈젤롯당: 그 기원과 유다 항쟁과의 관련성 및 그 중요성〉, 202~208. [본문으로]
  29. 같은 논문, 204. [본문으로]
  30. 홉스봄에 의하면, 착취관계는 근대 이전과 근대 양 시기를 관류하지만 계급의식은 근대 산업사회의 발전과 관련되어 계기적 진전이 있었다고 본다. [본문으로]
  31. Theißen, 〈예수의 성전 예언―도시와 시골간의 긴장의 장 가운데서의 예언〉, 김명수 옮김, 《원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172~94. [본문으로]
  32. Hobsbawm, 《원초적 반란》, 132~49. [본문으로]
  33. 이것은 요세푸스가 사제귀족 중심의 임시 혁명정부로부터 갈릴래아 지방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부임하자마자 겪은 이야기로, 그 자신이 이 일화의 주요 등장인물로서, 그 진술 내용이 그의 통치 능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낼 뿐이라는 점에서 신뢰할만한 역사적 정보를 담고 있다고 보인다. [본문으로]
  34. Horsley, 《예수운동》, 135~138.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를 보려면 Douglas E. Oakmann, Jesus and the Economic Questions of His Day (Lewiston/Queenston: The Edwin Mellen Press, 1987), 37~91 참조. [본문으로]
  35. 호슬리는 바리사이를 ‘가신계급’(retainers class)으로 보는데(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17), 이는 게하르트 렌스키의 가신계급에 대한 논의를 바리사이 연구에 적용한 살다리니의 연구를 수용한 것이다. Anthony J. Saldarni, Pharisees, Scribes and Sadducees in Palestine Society (Edinburgh: T&T Clark, 1985), 277~97; G. Lenski, Power and Privilege. A Theory of Social Stratification (New York: McGraw-Hill, 1966), 243~48 참조. 그러나 이 견해는 권력의 수직적 계서체계 상에서의 바리사이의 역할에만 주목함으로써, 그들의 촌락에서의 독자적인 위상을 간과하고 있다. [본문으로]
  36. 상징의 차원에서 포섭과 경계는 정-부정의 체계를 통해 구체화된다. 말리나는 매리 더글라스(Mary Douglas)의 ‘집단-결속 모델’을 성서시대 사회 해석에 적용하여, 그 사회의 상징적 문화적 경계화를 읽어내려 한다. Bruce J. Malina, The New Testament World. Insights from Cultural Anthropology (Atlanta: John Knox Press, 1981) 참조. 이러한 논의는 특히 질병이나 성(性)과 연관된 배제의 메커니즘과, 그러한 가치의 전복으로서의 기적이라는 관점의 연구와 결합되는데, 이에 관하여는 Jerome Neyrey, “The Idea of Purity on Mark's Gospel”, Semeia 35(1986), 91~128; J.J. Pilch, “Death with Honor: The Mediterranean Style Death of Jesus in Mark”, BTB 25/2(1995), 65~70 참조. [본문으로]
  37. Lenski, 같은 책, 266~85 참조. [본문으로]
  38. 〈마가복음〉의 용법에서 오클로스는 ‘사회의 일체 자원으로부터 비자발적 배제’로 특징지어지는 집단을 과대대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김진호,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 중심으로〉 참조. [본문으로]
  39. 김진호,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이해. 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을 전망하며〉, 《시대와 민중신학》 4(1997) 참조. [본문으로]
  40. Horsley,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318~26. 이 점에서 마커스 보그는―비록 방법론적으로 역사사회학적 시각을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일상적 진리체계에 대한 도전자로서의 예수 이미지를 호슬리보다 한층 명료하게 펼친다. Marcus Borg, 김기석 옮김, 《예수 새로보기―영 문화 제자됨》(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7) 참조. [본문으로]
  41. 〈마가복음〉은 예수의 제자단에는 특화된 내부집단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에 관련된 비밀을 더욱 많이 점유하고 있는 존재로서 기억되고 있다. 한편 마가는 제자단을 ‘열둘’(δωδεκα)이라는 고 부른다. 비록 마가는 이것을 ‘숫자’의 개념으로 혼돈하고 있지만, 전승 자체에서 이들이 숫자의 개념으로서 이해되는 것은 ‘후대’적 층위로 보인다. 사실 유다 전통에서 ‘열둘’은 숫자의 의미를 넘어서 전 민족/민중의 구원/해방을 상징하곤 한다. 또한 아마도 제자들의 숫자는 열 두 명이 넘었던 것 같고, 거기에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이 적지 아니 포함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열둘’은 제자단 전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제자 중의 제자’인 내부집단을 뜻하는 암호였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42. 〈마가복음〉 3,6은 예수운동의 대중적/공개적 활동의 공간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의 계기를 시사하고 있다. 대중활동 공간은 크게 셋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중 3,6 이전에는 촌락의 회당이 주요한 무대였다면, 그 이후는 단 한 차례(나사렛 회당)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회당이 나오지 않는 대신 갈릴래아의 호숫가가 주된 공간으로 나온다. 그 외에 ‘집’도 공개적 활동의 장소였지만, 이곳은 이 구절 전후로 나뉘는 활동방식의 변화와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활용된 공간으로 나온다. 한편, 3,6 이후의 대중을 묘사하는 주요 어휘가 오클로스인데, 이들은 〈마가복음〉에서 회당 안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반면, 호숫가에서 집중적으로 나오며, 이들이 등장하는 곳에는 유난히 창녀, 세리, 거렁뱅이 등이 많이 등장하고, 종/노예/사병 등을 지칭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정보들에 입각해서 나는 오클로스를 ‘비자발적 이탈’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적 집단을 과대대표하는 것으로 보았다. 김진호,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참조. [본문으로]
  43. Werner H. Kelber, 서중석 옮김, 《마가의 예수 이야기》(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참조. [본문으로]
  44. Richard L. Rohrbaugh, 〈마가복음서 청중의 사회계층적 위치〉, 《세계의 신학》 96․97(1996 겨울+1997 봄) 참조. [본문으로]
  45. 안병무, 〈예수사건의 전승모체〉, 《1980년대 한국민중신학의 전개》(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본문으로]
  46. 건강관리체계는 신체에 관한 억눌림의 재현체계의 하나로서, 사회적 요인과 분리할 수 없는 억눌림을 개체화하여 재현하며, 사회 구성원 개개인을 억눌림의 과잉분출이나 과잉억제로 나타나는 ‘부정(不淨)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들과 정상적 분출/억제를 실현하는 ‘정결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들로 나눈다. [본문으로]

한국사회의 변화와 신학적 성찰

논문 2018.07.16 16:09 posted by 망원올빼미

'기독교문화연구원' 심포지엄(2006.11.25)에서 발표된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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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변화와 신학적 성찰

 

 

 

 


한국의 역사문화적 변화를 성찰하는 신학적 담론 찾기

 

한국의 역사문화적 변화에 대한 지적 성찰을 내재화한 신학은 존재하는가? 이것은 역사문화적 컨텍스트가 신학의 내생적 요소(endogenous factor)인가 외생적 요소(exogenous factor)인가라는 해묵은 논의를 다시 점검하게 한다.

여기서 컨텍스트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각주:1] 문맥적 컨텍스트(컨텍스트 I), 매체적 컨텍스트(컨텍스트 II),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컨텍스트 III). 이 중 컨텍스트 I’은 신학사적으로 텍스트 이해의 내생적 요소로서 중요하게 다루어져 온 반면,[각주:2]컨텍스트 III'은 거의 대체로 외생적 요소로 취급되어 왔다. 심지어 컨텍스트 II'는 컨텍스트의 한 범주로서 인식조차 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의 주제가 컨텍스트 III'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 세 번째 요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면, 텍스트-컨텍스트 논쟁에서, 신학의 지배적인 역사문화적 토양인 서양사회는 컨텍스트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이미 텍스트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착시 현상이지만, 시공간 귀속성에 의존하지 않은 탈국지적 신학인 양 생각함으로써 서양신학은 당연히 대문자 신학(Theology)이라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고, 그 반대급부로 이러한 보편성외부의 신학들(theologies)에 대해서는 부가어를 첨부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된다. 또한 그러한 특수 지평의 신학들에 대해 혼합주의니 토착화니 하는 논의가 가능한 것도 (순수성과 보편성으로 과대대표되는 서구신학에 대비하여) 비서구사회의 신학적 해석의 지평과 국한시켜 사고하게 된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텍스트-컨텍스트에 대한 신학의 이분법적 인식은 제국주의적 혐의를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컨텍스트 III에 대한 신학의 몰인식과는 반대로, 현대 텍스트 이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논점이 바로 이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는 해석의 주체가 텍스트와 만나는 지평으로서, ‘역사문화적 담론의 네트워크(networks of historical-cultural discourses) 형태로 존재한다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각주:3] 다시 말하면 텍스트는 이 역사문화적 담론의 네트워크 밖에서는 해석자에게 독해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담론의 네트워크와 얽히지 않은 텍스트는 해석자게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여 이탈리아문학 연구자로서 기호학자인 박상진의 말대로 컨텍스트는 해석이 열리는 자리인 셈이다.[각주:4]

문제는 역사문화적 담론의 네트워크가 결코 공정한 담론의 연계망을 형성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특정한 담론이 보다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면서 다른 것을 식민화하려는 경향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그러한 지배권을 둘러싼 담론간의 쟁투가 되풀이된다. 이때 지배적 담론의 자기 근거로 이해되는 텍스트를 흔히 정전(Canon)이라고 규정한다. 정전은 해석을 거부하는 텍스트다. 그것은 항상 절대원본이며,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의 간섭을 받아 그 의미가 변형될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한데 정전을 통한 담론의 식민화 과정은 그것이 탄생한 공간의 영역을 넘어서 타공간으로 확장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 이러한 정전의 문화횡단(transculturation)은 불가피하게 해석을 필요로 한다. 또한 이질적 문화간의 접촉이 단순히 문화적 변동을 야기시킨다는 가치중립적 표현인 문화접변(acculturation) 개념이 아니라 그러한 접촉 과정이 식민화를 동반하면서 전개되는 복잡한 문화현상을 함축하는 문화횡단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정전이 그 절대 원본성을 획득한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와는 다른 시공간적인 문화적 배경 아래서 벌어지는 해석의 상황은 다층적이고 갈등적이다.[각주:5] 이러한 식민주의적인 문화횡단적 해석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번역이라는 메타포(translation as a metaphor)가 즐겨 사용된다.

1920년대 초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통찰한 것처럼, 번역된다는 것은 원본의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번역을 수행하는 언어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와의 변증법적 상호과정을 통한 창조적 재의미화 과정이다.[각주:6] 그런 점에서 번역한다는 것은 원본의 훼손이자 원본의 재창조다. 한데 이때 원본의 정전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원본을 특권화 하겠다는 것이며, 번역되는 언어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와의 존재론적 얽힘 관계를 부정하겠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내생적 요소가 아니라 외생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요컨대 정전성을 지닌 원본의 번역은 이중의 존재론적 모순관계를 내포한다. 번역되는 순간 불가피하게 그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와 얽히게 되지만, 동시에 그러한 얽힘을 부정하지 않는 한 정전성은 유지될 수 없다. 그러므로 실제의 텍스트 이해는 컨텍스트 III의 지평에서 수행되고 그 간섭에 의해 다양한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영향을 미칠 수는 있어도 영향을 받을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전성의 신앙인 것이다.

이 점은 서구신학이 한국사회에 번역되어 재신학화하는 과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앞서 말했듯이 서양신학은 서양이라는 자신의 태생적 맥락과의 연관성을 부정함으로써 더 이상 서양신학(western theologies)이 아니라 대문자 신학(Theology)이라는 단일 보편성을 획득하였다.[각주:7] 즉 신학은 서양신학이 정전화된 것을 의미한다.[각주:8] 그런 점에서 본질로서의 (서양)신학이라는 생각은 지구화된 신학이라는 광역의 장(, champ)에서 갖는 일상적인 상념에 속하는 일종의 아비투스(habitus, 습속)라고 할 수 있다.[각주:9] 이러한 아비투스는 신학이라는 장의 게임룰의 형성에 깊이 관여되어 있다. 하여 신학이라는 장의 행위자, 즉 신학자는 서양신학을 본질로서의 신학, 단일 보편성의 신학적 실체로 이해하고 게임에 임할 때, 이 장이 제공하는 종교자본의 배분에 보다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학의 장에서 그 장의 감각체계를 내면화하는 신학자들은 당연히 한국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를 신학의 내생적 요소로서 보지 않는다. 그 컨텍스트가 신학이라는 텍스트를 보는/해석하는 토양이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신학이라는 정전적 텍스트가 한국사회를 규율하고 교화하는 일방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는 신학적 담론들이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를 다룰 때조차, 경험지평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보다는, 대문자 (서양)신학이 패러다임화한 모델들을 먼저 주목하려는 경향과 맞물린다. 이때 그 모델들은 단순히 사회문화적 연구의 도구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 속에는 우리의 경험 세계인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라는 야생의 실재[각주:10]를 길들이기 위해 대문자 신학이라는 서구적 텍스트가 필요하다는 무의식적 식민주의가 암암리에 깔려 있다.


I

복음(상황)’: 복음 지상주의

김이환 박아론 등의 장로교 신학

선교신학

II

복음상황’: 복음 우월주의

복음주의적 번역론(윤성범)

복음주의적 성취론(유동식)

복음주의적 변형론(박봉배)

III

복음=상황’: 세속화와 세속주의

 

비신학

IV

복음상황: 역사주의적 상대주의

V

(복음)상황: 탈식민주의

종교상황적 창조신학(변선환)

창조신학

역사상황적 창조신학(서남동)

[] 이경제의 복음-상황유형론과 한국신학들


이 점에서 이경재가 상황과 복음간의 관계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이중 세 유형 속에 한국신학들을 배치한 유형학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여기서 복음은 서구신학이 바탕에 깔린 신앙적 담론화를 의미한다. 한편 상황복음이 수용되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과 함께 한국신학을 구성하는 변증법적 요소인 것이다. 즉 그는 한국신학을 형성하는 데 있어 복음과 상황이라는 두 개의 해석학적 요소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황은, 나의 용어로 표현하면,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와 유사한 함의를 갖는다. 아래 그림은 그의 유형학을 도표화한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이경재는 한국신학을 선교신학창조신학으로 이분화하는데, 선교신학이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의 내재성을 부정하고, ‘대문자 신학인 텍스트에 의한 식민주의적 문화횡단을 지향하는 신학적 담론을 의미한다면, 창조신학은 식민주의적 문화횡단의 신학적 담론에 대항하는 대안적 신학화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전자가 정전의 번역으로서의 신학이라면, 후자는 신학이라는 텍스트의 정전성을 해체하고, 재창조로서의 번역, 새로운 해석으로서의 신학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교신학으로 분류된 두 유형에서, 그것이 복음 지상주의든 복음 우월주의든, 한국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에 대한 지적 성찰을 내재화한 신학적 모색은 발견될 수 없다.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를 다룰 때도 그것은 단지 복음화를 위한 도구적 지평이거나 규율의 대상으로서 고려될 뿐, 역사문화적 컨텍스트가 복음을 검열하는 요소일 수 없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복음 혹은 그것의 신학적 담론화인 대문자 신학의 담론 전략은 한 마디로 탈문화화(deculturation)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경재는 창조신학을 다시 둘로 나누어 이야기하는데, 변선환에 의해 모색된 종교상황적 모델과 서남동에 의해 모색된 역사상황적 모델이 그것이다. 여기서 그는 종교상황적 모델은 한국적 패러다임 형성을 위한 불충분한 담론임을 언급한다. 그것은 복음상황이라는 전제를 복음(종교)상황의 방식으로 단순 전도시킨 것에 지나지 않을 뿐, 새로운 패러다임을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위의 표에서 보듯, 이경재가 변선환의 신학을 [IV]로 분류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가 근대성 일반을 다룬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한국 종교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나의 억측은 이경재의 논의에 대한 나의 이해력을 무력화시킨다. 반면 나 또한 변선환의 담론 방식에 대해 좀 다른 관점에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이른바 타종교의 신학이 과연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를 적절하게 다루고 있는지 혹은 다룰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그에게서 타종교성, 이경재가 잘 간파하고 있듯이, 복음을 규제하는 한국적 컨텍스트에 속한다. 그러므로 타종교의 신학은 서구신학이라는 텍스트와 타종교성이라는 역사문화적 컨텍스트 사이의 변증법적인 대화 상황의 과정을 통해 재텍스트화된 것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변선환에게서 타종교성이 관찰되는 지점은 항상 신조의 차원에 머문다. 그런데 역사문화적 맥락에서 종교성이 과연 신조에 국한되는가? 오늘날 사회 연구는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담론의 차원, 실천의 차원, 그리고 제도의 차원이 그것이다. 이 세 범주는 서로 연계되지만, 각각 논의의 초점이 다른데, 담론은 을 초점으로 하고, 실천은 실연된 행위, 그리고 제도는 행위자와 구조의 네트워크에 초점을 둔다. 그리고 이 범주들 각각의 외연은 다른 범주들의 논의들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셋 중 어느 것을 주목하느냐의 문제는 방법적이고 인식론적인 것이지, 다른 것이 간과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변선환이 주목하는 신조는 말에 초점이 있지만, 제도와 실천 등의 연관성까지도 함축하는 담론 연구의 차원에서 볼 때 너무 협소한 시각에 갇혀 있다. 요컨대 변선환의 연구는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와 신학 간의 변증법적 대화 과정을 고려하고 있기는 하지만, 접근방식에서 보다 많은 보완을 필요로 한다.

이 점에서 서남동의 두 이야기의 합류라는 변증법적 메타포는 범례가 될만한 인식의 틀을 제공해준다.[각주:11] 성서의 민중 전통과 한국사회의 민중 전통 간의 대화구조에 관한 언급이다. 그는 이 두 전통을 텍스트와 컨텍스트라고 하는 대신에 전거(refreences)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한국신학은 정전으로서의 대문자 신학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적 담론이어야 함을 명시한 것이다. 즉 그에게서 정전은 없으며, 다만 해석을 위한 레퍼런스에 불과하다.

두 이야기 각각에서 민중 전통을 읽어내고 그것을 합류시키기 위한 방법을 그는 성령론적 공시적 해석이라고 이름 붙인다. ‘성령론적이라는 표현은 지배적인 담론의 전통이 해석 상황을 지배하는 가다머류의 해석학과는 구별되는, 일종의 의심의 해석학에 가까운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성서 속에서나 교회 역사 속에서 발전된 다른 어떤 개념보다 한층 더 위반의 기조를 강하게 담고 있는 기표로서 성령이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공시적이라는 말은, 텍스트라고 하든 전거라고 하든, 해석의 대상인 성서와 신학의 발생맥락보다는 해석자의 수용맥락을 중시한다는 주장을 함축한다.[각주:12] 이렇게 서남동의 성령론적 공시적 해석은 신학적 담론 전통의 서구 중심주의, 그 반해석학적 정전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의 기조를 담고 있다.

심지어 그는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전도시켜 신학이나 성서를 컨텍스트라고 하고, 한국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를 텍스트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일종의 말장난이겠지만, 그의 글쓰기에서 어느 정도 실행에 옮겨지고 있기도 하다. 가령 그의 글 ()의 형상화와 그 신학적 성찰이나 소리의 내력,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그리고 민담의 신학반신학[각주:13] 등에서 보듯 그가 이야기하는 많은 텍스트들은 한국의 설화들이거나 그와 동시대의 민중의 이야기이고, 성서의 설화는 극히 제한적이다. 서술방식도 모든 설화들을 병행적으로 언급하여, 성서나 신학이 전체를 정리하면서 다른 것들을 포섭하는 상투적인 방식이 지양되고 있다.

한편 그가 성령론적 해석을 주장한다고 해서, 논리적 인과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론적이라는 수사어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서구적 기독교의 자기 중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이지, 그 속에 함축된 합리주의적 방법론까지를 비판하고자 함은 아니었다. 하여 그는 당시 서구 신학의 비주류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쇼트로프 부부(Luise & Billy Schottroff), 슈테게만(Wolfgang Stegemann), 갓월드(Norman K. Gottwald) 등의 급진적 성서연구자들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연구방법을 시사하는 사회경제사적 방법과 문학사회학적 방법을 전거의 해석에 활용하자고 제안한다.[각주:14] 사실 그 자신이 인정하고 있듯이 그는 이러한 연구 방법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다. 또한 연구사적으로 이 해석의 도구들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감안할 때 이 주장이 얼마나 애매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그는 잘 알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위의 성령론적이라는 방법론에 관한 지시어와 이 두 방법이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서도 당연히 그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전거를 해석하기 위해 서양의 연구방법들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것은 이런 방법을 활용한 연구자들이 한결같이 성서에서 민중에 대한 체제의 억압과 이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을 그가 주목하였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그는 전거를 민중적으로해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적 지향의 배후에는, 동시대적 문제의식(공시성)이 깔려 있다.

이러한 동시대적 문제의식은 한국인 신학자로서는 드물게 한국의 사회 현장에 대한 사회학적 정보들을 신학적 서술에 활용하는 데로 이어진다. 그는 주로 르뽀기사, 신문기사, 일부 연구서들을 이용하여 민중 현실을 분석함으로써 한국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를 신학화하고 있는 것이다.[각주:15]

그런 점에서 서남동의 신학이야말로 한국의 상황과 복음 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의 해석학을 보여준 한국적 신학의 모범적인 선례로 평가한 이경재의 진단은 타당성이 있다. 비로소 한국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는 신학의 내재적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를 말하기 위해 먼저 서양신학이나 사회이론의 패러다임을 물은 것이 아니라, 먼저 신문기사, 르뽀르따쥬, 각종 통계 등을 보았다. 그는 연구 방법을 활용할 수는 없었지만, 먼저 현장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것에 감정이입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가 비록 사회경제사적 방법이나 문학사회학 등을 언급했으나, 그것은 서양 신학자들의 전거 해석 작업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준거였지, 자신의 방법은 아직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논의는 하나의 모범적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평가하기에는 미완성적이지만, 모범적 시도로서 평가하기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한편 나는 서남동에 비해 논의는 덜 체계적이지만, 그의 선언적 주장에 비해 좀더 구체적인 한국적 신학하기의 모범을 안병무의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안병무의 가장 대표적인 신학적 모색이 역사의 예수연구라고 하는 데 이의를 드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한데 그의 예수 연구의 방법론적 핵심이 오클로스론이라는 점을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다. 나는 그의 오클로스론이 그의 예수 연구 방법을 특징짓는 가장 주요한 틀이고, 또한 그것이 매우 독창적인 방식이며, 나아가 그러한 연구방법의 고안에 그 자신이 이해하는 한국적인 역사문화적 맥락이 긴밀히 개입되어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는 다른 글[각주:16]에서 상세히 말한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 논의를 이 글의 구성에 맞게 간략히 재요약하는 것으로 대체하겠다.


 

 

구술 전승의 전달자

전승양식

 

문서 전승

 

 

 

 

 

 

 

 

 

 

예수

카리스마적 떠돌이 예언자

단편적 말

예수 어록(Q)

:

타이쎈의 가설

 

 

 

 

 

 

 

오클로스(민중)

이야기

마르코복음

:

안병무의 가설

[2] 예수 전승의 두 계보



우선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은 역사의 예수를 묻는 주요 자료로 Q 자료가 아니라 마르코복음을 주목하였다. 아래 표는 그의 오클로스론의 연구 영역과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표에서 반드시 주지해야 하는 것은 예수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전승이 구술 형태였다는 점에 있다.[각주:17] 여기서 구술 전승의 주체를 안병무는 오클로스라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다가와 겐조(田川建三)의 연구에 의하면,[각주:18] 유대사회의 대중 일반이라기보다는 좀더 구체적인 대상으로 일종의 천민적 존재를 가리킨다. 안병무는 다가와의 견해를 보다 예각화된 의미로 재해석하여 귀속성을 박탈당한 존재로 규정한다. 그는 다가와의 해석에 간접적으로 접하면서,[각주:19] 그 자신의 동시대의 대중, 특히 급격한 산업화의 과정에서 비자발적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해 와서 도시빈민층을 형성한 이들을 상상했다. 준거집단에서 떠나야했던 그들에게 고향은 그리워해야할 대상일 뿐이며, 그들 자신들이 실제 밟고 있는 생활공간은 존재의 뿌리가 박탈된 곳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겪는 가난의 고통은 부모와 조상의 땅에서 겪은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뿌리 뽑힌 이, 준거집단을 상실한 이, 그들 자신의 영적인 동조집단(부모 혹은 조상)이 사라진 이, 그런 이들이 겪는 고통의 신랄함을 기억하며 안병무는 오클로스를 예수의 대중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예수 주위의 대중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예수의 말과 행위, 그의 사건을 전한 이는 다름 아닌 이들 오클로스였다. 여기서 안병무는 서양 성서학의 뿌리 깊은 인식론적 전제인 주객도식을 문제시한다. 그들은 예수만을 물을 뿐, 그의 대중은 단지 수동적인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취급한다. 반면에 안병무는 누군가가 전달자라는 것은 자신의 삶, 바람, 욕망 등과 분리할 수 없이 얽혀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타이쎈의 구술 연구의 논의를 수용한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텍스트와 전달자라는 컨텍스트는 의미형성 과정에서 상호작용하고 있으며, 여기서 오클로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르코복음의 예수 텍스트는 예수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예수와 오클로스에 관한 해석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언급할 것은 마르코복음이라는 책을 통해 예수 이야기를 듣는 청중은 누구인가의 문제다. 안병무는 다가와의 해석을 수용하여 오클로스가 바로 그들이라고 본다. 설교학은 청중의 예비검열이라는 커뮤니케이션학의 성과를 신학 내에서 가장 먼저 수용했다. 한데 안병무는 성서학에서 이러한 예비검열을 통해 지식인 저술가의 작업 속에 청중인 오클로스가 개입하여 예수-오클로스의 이야기가 구성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각주:20] 여기서 그는 다가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독창적인 역사학적 상상력을 펼치는데, 마르코복음의 예수-오클로스의 이야기가 예수 당대의 예수-오클로스의 이야기를 가장 잘 담아내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것은 마르코복음과 예수라는 두 텍스트의 역사문화적 상황이 오클로스의 고통이라는 관점에서 연계되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주장이다. , 고통의 동질성이 기억의 동질성을 낳았다는 것이다. 하여 마르코복음을 통해 예수를 읽는 역사학적 알리바이가 설명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그 자신의 동시대와 다시 연계시킨다. 전태일에 의해 폭로된 한국 민중의 고통을 오클로스의 고통으로 읽어내면서, 이제는 시공간을 달리하는 세 개의 텍스트(예수, 생성 당시의 마르코복음, 오늘날의 마르코복음)의 연계성을 주장하는 데로 이른다. 그것은 세 텍스트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의 동질성에 대한 그의 관점에서 도출된 것이다.

이와 같이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은 성서 및 신학 텍스트와 한국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텍스트의 재해석으로 이어지는 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한국적 신학의 범례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남동 안병무의 신학은 한국사회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와 깊이 연루되어 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는 담론의 네트워크 형태로 존재한다. 이 두 신학자처럼 비주류의 저항담론이 자리잡는 곳도 바로 여기다. 여기에는 그들이 경험하는 세계에 대한 나름의 관찰이 함축되어 있으며, 경험하고 관찰한 그것을 읽기 위해 그 세계를 다루는 여러 담론들과 선택적인 대화를 모색한다. 그리하여 저항담론으로서의 서남동과 안병무의 신학이라는 재해석된 텍스트가 생성되는 것이다.


 

 

예수 당대

 

구술 전승기

 

마르코복음 형성기

 

오늘

 

 

 

 

 

 

 

 

 

텍스트

:

예수

 

예수-오클로스 이야기(I)

 

예수-오클로스 이야기(II)=마르코복음

 

마르코복음

 

 

 

 

 

 

 

 

 

 

 

 

 

 

 

 

 

 

컨텍스트

:

오클로스

(청중)

 

오클로스

(전달자)

 

오클로스

(수용자)

 

오클로스

(한국의 민중)

[]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의 텍스트-컨텍스트

 

 

한데 여기서 주지할 것은, ‘선택적인 대화라는 점과 관련되어 있다. 서남동(~1984)1980년대적 비판담론이 활성화되기 이전에 삶을 마무리했지만, 안병무(~1996)1980년대적 비판담론의 활황과 몰락을 다 체험하였다. 그러므로 안병무의 신학 속에서 우리는 1980년대 이후의 경험과 담론이 접맥되는 측면들을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안병무의 신학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컨텍스트 이해는 1970년대적 비판담론들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신학을 시기구분하면서 세세하게 논할 때는 좀더 세밀한 측면을 읽어내는 것이 필요하지만, 통전적으로 그를 얘기할 때는 그의 신학을 1970년대적 비판담론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80년대적 신학을 논하는 데는 주로 민중신학의 제2세대에 의해 수행된 맑스주의적 연구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와 민중신학의 1980년대적 경향을 논하는 것은 민중신학 연구자들에 의해 이미 많이 수행된 바 있고, 또 이 글에서 보다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시대 맥락이라는 점에서 여기서는 논의를 생략한다.


오늘 한국의 역사문화적 변화 읽기

 

오늘 한국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논하려면 우리의 경험 세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시대를 이 글은 변화의 시각에서 보고자 한다. 어떤 사회든 그리고 어느 시기든 지속의 측면과 단절의 측면은 항상 존재한다. 그런데 어느 시기는 지속에 보다 주목하는 반면, 또 어느 시기는 단절에 관한 감각이 좀더 예각화된다. 여기서 단절에 대한 감각을 학문적으로 논의하는 과정에서 시기구분론이 발전하게 된다. 한국사회에서 시기구분을 통해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와 신학 담론간의 연계구조를 논한 것은 최종철과, 그리고 민중신학자인 최형묵과 김진호에게서 발견된다.

최종철[각주:21]은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온 시기부터 현재까지를 세 시기(기독교 전래 이후부터 식민지 시대까지1, 해방기부터 1960년대까지2, 그리고 1970년대 이후3)로 나누는 광역의 시기구분을 하고 있는데, 그의 관심은 한국기독교의 정치문화와 일상문화[각주:22]가 이 시기에 어떻게 변화 혹은 지속되었는지에 있다. 그는 한국 전래의 종교문화의 특징을 현세적 공리주의와 정교합일주의라고 보고, 그것이 기독교 전래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앙에 어떻게 관철되었는지를 조명한다. 특히 이러한 토착화의 양상이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로 분류된 두 신학적 성향체계와 어떻게 결합되면서 구현되었는지를 각각 정치문화와 일상문화로 나누어서 찾는다. 그런데 정치문화는 1기에서 2기로 이어지면서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다가 3기에 이르면서 다소간의 변화를 겪게 되는 반면, 일상문화는 시대구분과 관계없이 지속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그의 시기구분은 그의 논지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지 않다. 만약 그의 논지와 결합시키려면 두 시기로 나누거나 아예 시기구분을 하지 않는 게 타당하다. 아마도 한국 근대사의 상식을 따라 나누어 보면서 기독교 신앙문화의 전개를 보려고 한 것이 아닐까 한다.

한편 최형묵과 김진호는 민중신학의 시기구분론에 국한된 것으로, 시기를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만을 다루는데, 각각 1970년대, 80년대, 90년 이후로 삼분하여 신학과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와의 연계를 논하고 있다.[각주:23] 이 분류방식에 따르면, ‘오늘에 해당하는 시기는 1990년대 이후를 말한다. 이렇게 시기구분을 하는 근거는 다음의 시간적 요소들을 계기적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1987년 이후 한국사회는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화 시대로 이행했다. 이는 사회제도나 일상이 조직되는 방식 등에서 중대한 변화를 의미했다.[각주:24]

둘째, 1988년 올림픽은 한국사회의 산업화 양식의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왔다. 즉 소비자본주의가 바로 시기 이후 본격화된다는 것이다.[각주:25]

셋째, 1989년 이후 동독과 소련 등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한국사회의 1980년대를 풍미했던 이른바 동구 맑스주의적 변혁이론의 설득력이 상실되었다. 또한 이는 냉전적 국제정세 하에서 산업화의 기회를 맞았던 한국사회가 탈냉전 시대의 새로운 발전모델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오늘 우리의 사회를 위기의 일상화로 주장하는 배후에는 이러한 국제정치경제적 변화에 따른 산업화의 위기가 있다.[각주:26] 특히 국제정치경제적 변화의 중심에는 급속한 지구화의 엄습이 있다.

이러한 세 가지 계기적 사건들을 경유하면서,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제도적이든 담론적이든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다.[각주:27] 우선 민주화는 과거 단일 주체의 슈퍼개인에 의해 조직되었던 사회구조가 해체되고 다중적 주체들에 의한 사회로 재편되는 과정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한데 이러한 다중적 주체화 과정에서 누가 주체로 부상하느냐의 문제와 그렇게 부상한 주체들이 어떠한 권위적 자원을 획득하느냐의 문제가 재구조화의 중요한 현안이 되면서 복잡한 갈등과 경합이 벌어진다. 이러한 주체화를 국민의 시민화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때 국민이 전체주의적 국가에 위탁된 수동적인 신체들의 집합적 표상을 의미한다면, 시민은 국가에 귀속되어 있지만 일정한 자율권을 획득하여 국가와 교섭하는 사회적 존재로 부상한 이들을 가리킨다.

안병무는 일찍이 전두환 체제가 호헌을 선언하며 민주화에 대한 사회적 열망과 최후의 투쟁을 한창 벌이고 있던 무렵 창세기 2장의 선악과 이야기를 알레고리적으로 재해석하여 인간의 원형적 죄를 공()적인 것을 사유화하려는 욕망에서 찾았는데,[각주:28] 공을 사유화했던 슈퍼개인을 퇴출시킨 시민은 과연 민주화 시대에 공공성을 수호하는 새로운 주체가 되었을까?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한국 민주화의 치욕스런 체험은 시민이라는 공공성의 수호자로 성화(聖化)된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실은 지극히 상스러웠다는 데 있다. 모든 것의 초월적 감시자로 군림했던 슈퍼개인이 사라진 뒤, 새로운 감시의 체계가 대체하기 전에 엘리트계층의 무분별한 지대추구행위와 맞물리면서 시민 또한 탐욕스런 욕망을 게걸스럽게 소비하는 존재로 구성되어 갔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주화가 국민의 시민화와 동반하는 현상이라는 앞의 언급을 다시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공공성이 사유화되는 과정은 슈퍼개인만 퇴출시킨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퇴출자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비록 수동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국민이라는 사회적 집단 범주는 국가 내에서 단일하게 결속된 존재로서 이해되었고, 이는 국민은 공동체라는 사회적 공통감각과 맞물려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독재체제하의 국민은 계층적 분화가 억제되는 효과를 지녔다. 슈퍼개인이 독식하고 남겨놓은 적은 권력자원의 배분체계는 비교적 공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적인 것을 사유화하려는 무한경쟁의 사회, 그 퇴행적 민주화의 공간에서 공동체라는 국민적 공통감각은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른바 권력자원을 배분받지 못한 존재가 불가피하게 양산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실패한 시민을 나는 국민의 비시민화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물론 독재체제 하에서도 배제는 존재했다. 계층적 분화가 억제되긴 했어도 여전히 권력자원의 배분경쟁에서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는 존재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국민은 공동체라는 공통감각은 이웃이라는 사회적 유대를 어느 정도 유시시킬 수 있었다. 한편 체제는 그러한 공동체성을 체제 유지에 활용하기 위해 비국민을 끊임없이 생성시켰다. 가령 빨갱이는 대표적인 비국민이었다. 그밖에도 무수한 비국민들이 있었는데, 혼혈인이라든가 대마초흡연자, 부랑자 등등 이른바 비정상인들에 대한 사회적 배제는 노골적이었고, 그런 점에서 독재시대의 배제의 정치는 야만스러운 제거의 정치(politics of elimination)였다.

그런데 민주화 시대의 비시민은 시민 자신에 의해 퇴출된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퇴출은 독재자에 의한 야만적 행위의 소산이 아니라 시민의 무한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배제는 다분히 은폐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배제의 정치는 잊어버림의 정치(politics of forgetting)[각주:29]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이러한 민주화 시대의 배제의 정치를 논하는 데서 반드시 유념해야 하는 것이 바로 소비자본주의 문제다. 말했듯이 우리 사회는 1988년을 계기로 급속하게 소비재 산업의 비중이 높아졌다. 소비자본주의란 대중을 끊임없이 소비자로서 호명한다. 그것은 산업역군이라는 과거 독재 시대의 대중 호명방식과는 구별된다. ‘산업역군이라는 이미지는 근검절약하며 노동에 전력투구하는 인간상을 모범으로 하는 상징어라면, 소비자는 자기 욕구의 주체라는 자의식을 개발하는 존재를 시사한다. 주목할 것은 바로 여기에서 사적 공간은 비약적으로 확장되게 된다는 점이다.

위에서 한국의 민주화가 공적 공간을 사사화하려는 퇴행적 욕망을 북돋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했는데, 소비자본주의는 그러한 욕망에 불타는 사적 공간을 비약적으로 확대하는 요소인 것이다. 바로 이 사적 공간의 비약적 확대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폭발적으로 대두한 문화라는 시민의 새로운 활동범주에 관한 담론과 맞물린다. 이른바 문화사회라는 용어는 시민적 경험에서 문화적 요소의 규정성이 높아지면서 생긴 사회적 영향망의 변동을 추적하기 위한 이론적 개념화인데,[각주:30] 이 용어는 오늘날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이와 맞물려 문화목회용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다만 후자는, 글을 마무리 하는 대목에서 좀더 얘기하겠지만, 다분히 기능론적 시각에서 문화를 활용하는 목회 기술에 관한 문제의식이 지배적이어서, 목회의 핵심적 요소라 할 수 있는 문화사회의 새로운 감각체계로 인한 고통 감각의 변동이나 사회적 병리성의 재구축 등에 관한 논의가 생략되는 경향이 있다.

아무튼 이러한 소비자본주의화와 문화담론의 확대는 시민의 개인화를 강화시켰고, 이는 동시에 담론공간에서 일상의 발견을 촉진시켰다. 2002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권지예의 소설들은 그러한 일상의 담론화를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가령 단편 풋고추[각주:31]는 풋고추라는 요리의 재료에서 등장인물들간의 서로 동일하지 않은 기억들이 소통 불능의 대화 상황을 낳는다. 과거에 먹거리는 거의 언제나 굶주림을 상징했고,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는 국가주의적인 산업화의 동력이 추론됐다. 하지만 일상은 이러한 국가주의에 의해 규율된 일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수한 도발들로 구성되었으며, 그것은 거창한 저항의 몸짓과 그로 인한 고난을 경유한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기억 속의 쾌락을 통해 수행되었다. 그리고 소비자본주의는 이러한 사사로운 기억의 쾌락을 산업화하는 무수한 기술들로 채워졌다. 하여 이 시대 시민, 아니 심지어 민중은 억압적 규율 아래 놓인 게 아니라 유혹을 통해 규율되고 있는 것이다.[각주:32] 여기서 우리는 지구화를 생각해야 한다. 전 지구적인 사회적 통합(social integration)의 가능성이 전자매체의 발전을 중심으로 하는 기술적 도약을 통해 급속하게 향상됨으로써 다양하게 추진되는 전지구적인 다중적 연결망의 구축 과정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 과정은 관계의 공간적 폭이 비약적으로 넓어지는 측면만이 아니라, 미시적으로 확대되는 측면을 모두 포함한다. 즉 지구화는 거시미시적인 공간 확대 과정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한데 현행의 지구화는 크게 두 개의 차원에서 폭력적으로 진행되는데, 하나는 지구무기체계에 의해서이며, 다른 하나는 지구자본체계에 의해서다. 후자는 1997년 이른바 ‘IMF 체제를 통해 우리 사회에 폭압적으로 엄습해왔고, 전자는 최근의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거치면서 우리도 이러한 전쟁의 제3자가 아니라는 지구적 위기의식과 함께 우리의 일상에 위압적으로 다가왔다.[각주:33]

어쨌든, 어느 유형의 제국적 지구화 모델이 국면적 지배력을 행사하든 간에, 지구화의 체험이 삶을 일상 깊은 곳까지 전쟁터처럼 재조직화하는 효과가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없다. 이러한 전쟁의 일상화는 우리사회에선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냉전사회의 체험은 전쟁의 폭력성을 직접 체험하게 한 것이 아니라 예감하게 함으로써, 일상을 전시체제처럼 총동원하게 하는 방식으로 조직했던 것이다.[각주:34] 요컨대 전쟁의 일상화는 일상을 전장(戰場)으로 조직한다. 그런데 냉전체제는 단일한 국가적 의제에 맞추어 개개인의 삶이 총동원되었다면, 또 다른 전쟁의 일상화를 낳는 메커니즘인 지구화는 개체적 의제를 따라 삶을 다양한 의제 속으로 동원한다. 국가적 총력전의 사회는 개인적 총력전의 사회로 전이된 것이다.

한데 우리는 전쟁의 일상화 속에 담긴 또 다른 차원에서의 일상에 주목해야 한다. 홍콩 출신 작가 짱아이링(張愛玲)의 작품들에 대한 비평의 글[각주:35]에서 임우경은 전쟁이 일상의 파괴에 대한 공포인 동시에 일상의 종식으로서의 축제이기도 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공포와 축제, 이 두 개의 이율배반적 요소의 동시성이 바로 현대적 일상성의 특징임을 주장한다. 이것은 일상화된 전쟁의 또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즉 전쟁은 쾌락을 통해 일상의 무료한 반복을 견뎌내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구화가 시감각적 쾌락을 극대화하는 체계라는 점에 주목한다. 즉 지구화는 시각적 쾌락의 매개로 일상화된 전쟁의 위기를 은폐한다.

이와 관련하여 소비자본주의와 지구화의 내습은 소비의 실패자전쟁의 패잔병처럼 취급하고 처벌하는 배제의 사회적 문화를 낳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우리 사회의 무능력 담론이 법적 정치적 개념에서 시장적 개념으로 초점이 전이되면서 나타나는 소비의 실패자에 대한 처벌의 메커니즘을 연구하면서,[각주:36]역할기대행위능력이 모두 부정적인 유형의 무능력과 역할기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행위능력이 낮다고 여겨지는 무능력이라는 두 유형의 시장적 무능력을 분류한 바 있다. 여기서 전자가 시민의 공간에서 퇴출된, 즉 비시민화된 존재를 가리킨다면, 후자는 그러한 퇴출의 공포를 예감하면서 현실의 일상을 전쟁처럼 맞이하게 되는 시장화된 시민을 가리킨다. 그런데 위의 연구에서 내가 주목하려 했던 것은 이들 시장화된 시민이 어떻게 퇴출된 자의 배제의 정치에 자발적으로 연루되는가를, 그 메커니즘을 해석해보려는 것이었다. 무능력의 담론이 일상화됨으로써 소비의 욕망이 강화되는 한편 퇴출의 공포가 내면화되면서 사람들은 타인의 배제에 무감각해지거나 망각하게 되는 잊어버림의 정치의 행위자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상을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민주화는 국민의 시민화를 낳았고, 소비자본주의와 지구화는 이들을 시장화된 시민으로 재주체화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개개인의 고통이 사회적 체계와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회적 고통은 과거와 같이 거시정치의 공간에서 실행되는 것일 뿐 아니라, 보다 미시적적인 일상 공간에서도 벌어진다.[각주:37] 그리고 이러한 고통을 회피하기 위한 사람들의 의식무의식적 행위 전략은 퇴행화된 민주화와 소비자본주의화, 그리고 지구화의 체험을 통해 형성된 일련의 게임룰 속에 포섭되었다. 그것은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다. 한데 이러한 고통 전가 과정의 야만성이 적나라하게 자행될 수는 없다. 민주화를 경유한 사회의 공통감각은 그러한 적나라한 야만성을 죄악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적나라한 야만은 적지 아니 우리 사회에 관행화되고 있지만, 사회는 그것을 처벌함으로써 스스로가 민주화된 사회의 이상에 다가가고 있다는 착시에 빠진다.

한편 무능력 담론은 그러한 야만성이 사회적으로 은폐되는 또 하나의 특징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무능력은 사회적 배제와 처벌의 동기를 개체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무능력 담론은 능력의 판타지를 동반하기 마련인데, 상업화된 대중문화는 그러한 판타지와 상호연관되면서 무수한 스타들을 탄생시키고, 이는 사회적으로 스타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려는 대중의 욕망의 정치를 낳는다. 이러한 욕망의 정치는 일종의 쾌락이며, 이러한 쾌락은 그 이면의 고통을 그리고 그 고통의 전가를 망각하게 한다. 하여 고통은 사회적으로 거래된다. 그 거래 과정에서 시민의 쾌락과 비시민의 고통은 비대칭적으로 배분되며, 그 배분은 시장에서의 능력으로 환산된다. 요컨대 최근 우리 사회가 시장화된 시민의 사회로 급격하게 전화하고 있다면, 그러한 사회는 그 하부에 일상화된 고통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적나라한 야만은 제거되는 대신 은폐된, 부드러운 야만의 사회로 재조직되고 있다.

하여 우리 시대는 무수한 고통의 신음소리가 넘실거린다. 하지만 그 신음소리는 많은 경우 사회적인 것으로 기억되지 않고 개인화된 원인의 소산으로 이해된다. 심리학자 마리-프랑스 이리고앵(Marie-France Hirigoyen)이 최근 심리학이 사회적인 것을 심리화/개인화한다고 자기비판한 것처럼,[각주:38] 신학 또한 무수한 개인화하는 담론 틀을 통해 고통의 사회적 책임을 은폐하고 있다. 그리하여 고통의 소리는 있되, 그 원인은 망각되거나 은폐되는 현상, 그러는 가운데서 일상 속에서 무수한 폭력과 희생이 되풀이되는 상황이 오늘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주된 요소라는 점을 나는 이 글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글을 마무리하는 대목에서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대한 신학의 과제를 이야기해보자.

 

변화하는 시대, 신학의 길찾기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의 변화가 매우 급격하게 체감되는 상황에서 사회는 곳곳에서 변화에 적응하느라 분주하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때로 성공적으로 변화에 대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성공에 대한 비판적 해석들은 세속적 성공주의를 신앙제도로 잘 구현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각주:39]이것은 성공을 목적론적 가치의 최종에 두고 다른 일체의 것들을 대상화하는 태도의 연장선상에 있으며(성공주의 이데올로기), 그것을 구현하는 창조적 실행능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자원동원 능력을 통한 제도화의 성공 여부와 밀접히 관련된다.

여기서 대상화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대상화하는 주체가 필요에 의해 다루는 방식에 의해서만 그 대상적 존재가 의미화될 뿐이다. 청중의 적극적 반응을 강조하는 열린예배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단지 청중은 보다 잘 기획된 쇼프로그램의 기획에 따라 반응하도록 요청받을 뿐이다.[각주:40] 여전히 강력한 규정력을 갖고 있는 기독교의 정전주의나 성직자주의가 이러한 대상성의 토대가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는 성공주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성공을 위하여 복무해야 하며, 이렇게 하여 성취된 성공은 그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를 변혁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이러한 신앙의 기조를 형성한다. ‘복음화라는 기독교적 팽창주의 담론은 그러한 변혁의 시나리오를 거칠게나마 담고 있다. 이른바 문화목회라는 것이 의제화되는 대목은 바로 이러한 성공주의적 도구주의와 관련된다.

실은 이 경우 오늘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역사성은 문화의 동시대성의 배후에 놓인 시공간적 알리바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공주의적 복음은 시공간적 배후와 대화하기보다는 현재의 그것을 단지 도구화하려는 데만 주목할 뿐이다. 또한 일종의 담론의 메트릭스인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를 무시하고 이질적인 담론을 공격적으로 끼워 넣음으로써 복음화를 실현하려는 서구 제국주의적 기독교의 관성은 한국 기독교에서도 조금도 지양되지 않고 여전히 퇴행적으로 실행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라는 표현보다는 역사성이 제거된, 단순 대상으로서 해석될 여지가 많은 문화라는 다소 중립적이고 애매한 표현이 기독교가 오늘의 변화를 논하는 담론틀로 선호된다.

하여 기독교의 성공 중심적인 문화변혁론은 변화하는 오늘의 문화를 두 가지 이율배반적 함의로 이해한다. 하나는 위험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공의 수단이라는 것이다.[각주:41] 물론 이것은 서구 제구주의의 식민주의적 담론과 등가적이다. 마치 콜럼부스가 자신의 성공의 수단으로 위험한신대륙을 이용하고, 콜럼부스를 고용한 스페인 왕실이 왕정의 성공을 위해 이 위험한 인물을 이용한 것처럼 말이다. ‘복음화라는 팽창적 정복주의 담론은 이러한 세속적 성공주의를 정당화한다. 즉 말하지 못하는 문화적 대상에게 언어, 즉 하느님의 축복을 전수한다는 논리는 그 주체의 세속적 성공주의를 미화한다.

앞의 1에서 보았듯이 이러한 성공주의적 문화변혁론은 복음 지상주의 내지는 복음 우월주의에 지나지 않다. 그것은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내재화할 수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세속적 성공주의를 추구하는 교회들의 성공은 시장의 체계, 그 맘몬의 질서가 부여하는 우생학적 원리에 의존한다. 요컨대 이 세계의 질서를 위험시하고 단지 세계를 포섭하는 일방향적 소통담론으로서의 복음화를 추구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그것은 시장의 우생학적 원리를 활용하여 이룩된 성공인 것이다. 즉 복음 지상주의 혹은 복음 우월주의는 오늘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에서 복음을 재의미화하기 위해 시장을 대화의 파트너로 받아들인 것이라는 얘기다. 다만 명시적으로는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교화의 대상이라고 주장할 뿐, 실은 시장화된 교회와 신학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시각은 소비자본주의화와 지구화의 가치를 내재화한 신학을 추구한다. 미국의 기독교가 신자유주의의 선봉에 선 것처럼, 한국의 기독교 또한 예외가 아니다.

나는 제2장에서 오늘 우리 시대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를 정리 요약하면서, 지난 시대의 고통의 메커니즘이 오늘 우리의 시대에는 어떻게 재생산되고 있는지를 말하려는 데 초점을 두었다. 퇴행화된 민주화, 폭력적으로 엄습해오면서도 그 폭력을 교묘히 은폐하면서 우리에게 유혹으로 다가오는 소비자본주의화와 지구화라는 변화의 조건 아래서 고통의 메커니즘이 재조직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과 교회적 목회 혹은 선교의 초점이 세속적 성공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돌봄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최근 권수영은 서구의 목회신학이 하느님나라보다는 하느님 인식에 더 초점을 두어왔다고 비판하면서, 오늘 우리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가 담고 있는 고통의 구조에 해체적으로 다가가는 방식의 돌봄을 문화변혁적 목회신학의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각주:42]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고통을 사사화하는 체계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함축한다. 개개인이 일상 속에서 겪고 있는 고통은 사회적인 연관 속에서 이해되어야만 비로소 그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9장의 소경의 치유 이야기는 그러한 하느님나라적 돌봄 중심의 문화변혁적 복음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한 소경을 보며 예수에게 묻는다. ‘저이가 왜 보지 못하나요?’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의 대답을 제한한다. ‘그가 죄를 지어서인가요 아니면 부모 탓인가요?’ 필경 이는 복음서가 바라보는 유대주의의 통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 체제의 수호자인 유대인만의 생각이 아니라, 심지어 예수운동의 핵심인자인 제자들의 내면까지 지배하고 있다. 그러한 생각이 일상의 인식세계를 침투한 것이다. 여기에는 예수가 고통을 사사화하는 체제, 심지어 자신의 제자들의 생각까지 지배하고 있는 그 뿌리 깊은 인식틀에 저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대인은 다시 보게 된 이를 추궁한다. 하필 그 날이 안식일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볼 수 있게 된 이의 삶이 아니라 그 치유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옳음의 체계에 부합하는지를 묻느라 장애인이었던 그이를, 그의 고통과 그의 환희를 공감할 수 없다. 이들에 대한 예수의 분노, ‘너희들이 차라리 소경이었다면 좋았을 거다. 그러나 너희는 본다고 말하니 그 죄가 심히 중하다는 저주의 말은 유대체제가 고통을 거래하는 시장이었음을 폭로한다.

9장 전체에 걸쳐 13번이나 나오는 본다는 뜻의 동사 블레포(βλεπω) 볼 수 없는 자였으나 치유된 이의 본다고 자부하지만 보지 못하는이들을 대조하는 문맥에서 교차적으로 사용된다. 이들 본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찬 이들은 보지 못하는다른 이들의 생각을 지배함으로써, 자신들의 을 통해 상징권력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권력을 위해서는 소경이 필요하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소경은 진리 망각의 존재를 표상하게 되며, 사람들의 죄를 몸으로 표상하는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한데 여기에는 하나의 착시가 있다. 사람들은 그 희생양이 자신들의 죄를 대신 짊어진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만 진리 망각의 체계의 비밀이 지켜지기 때문이다. 하여 그가 소경인 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직계가족의 죄의 탓이라는 통념이 생겼다.

이상의 해석은 르네 지라르의 틀을 이용한 나의 상상의 소산이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이 인류학적 개연성을 지니고 있듯이, 그에 의존한 나의 해석도 역사적 개연성을 주장할 수 있다면, 예수의 치유는 돌봄의 사회적 성격을 은폐하는 체제에 대한 비판이고, 그러한 은폐의 체제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돌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회피하는 후방지역[각주:43]을 앗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보다 더욱 심각한 고통의 체제로서 구축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전 영역의 전방지역화는 오늘날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서 회피되고 있다. 타인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체계가 보다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맥락 없는 즐거움, 감각적 쾌락의 체계가 발달하게 되면서 고통을 전가하면서도 그것에서 무감각하게 되는 은폐의 메커니즘이 연관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돌봄의 목회는, 그러한 그통을 찾아 헤매며 겨우겨우 읽어내는 고고학적 감수성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려면 교회 대 세속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교회 안팎 도처에 목회의 현장이 있다. 하여, 신학이 오늘 우리 사회의 변화를 성찰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런 현장들, 고통이 있는 그 자리들에서 그 소리들의 내력을 읽어내고 드러내며(증언) 그것의 은폐의 장치들과 대결하는 데 있다고 본다. 󰡖

  1. J. 슐테-자쎄 & R. 베르너, 〈기호분석과 문예학의 대상규정〉, 허창운 편저, 《현대문예학의 이해》(창작과 비평사, 1989), 55~65쪽 참조. 여기서 저자들은 네 가지 컨텍스트를 말하였는데, 나는 이를 위의 세 가지로 재정리하였다. [본문으로]
  2. 신학은 끊임없이 성서 속의 한 텍스트보다는 정전(Canon) 전체의 종합적 의미를 묻는 데 주목했다. 설사 그 종합적 의미라는 것이 실상은 바울 해석사에 좌우되어 왔더라도, 그것은 항상 ‘종합적’이라는 강박증을 통해 표출되었다. [본문으로]
  3. 해석의 주체가 마주치는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는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언어화된 세계다. 그것은 다양한 의미들이 서로 긴밀히 혹은 느슨히 연계되기도 하고 또 서로 경합하기도 하면서 엮이어 있는 네트워크 형태다. 그런 점에서 컨텍스트는 담론의 망(network of discourses)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4. 박상진, 〈컨텍스트의 이론: 데리다와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중심으로〉, 《현대문학이론연구》 20(2003), 197쪽. [본문으로]
  5. 존 크라니어스커스, 〈번역과 문화횡단 작업〉, 《흔적》 1(문화과학사 2001) 참조. [본문으로]
  6. Walter Benjamin, “The Task of the Translator”(http://social.chass.ncsu.edu/wyrick/debclass/benja.htm). 이 글을 쓸 당시(1923년) 벤야민은 아직 그의 후기 사상에서 보이는 역사철학적 시각을 갖기보다는 낭만주의적인 형이상학적 순수언어에 더욱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터 오스본이 벤야민의 번역이론을 그의 후기사상을 통해 재해석함으로써 번역에 관한 일반이론을 제시한 것처럼, 나 또한 그의 후기 사상을 통해 초기의 번역이론을 재규정하여 원본과 다른 역사문화적 컨텍스트간의 변증법적 상호과정을 번역이라는 메타포로써 말하고 있다. 피터 오스본, 〈번역으로서의 모더니즘〉, 《흔적》 1 참조. [본문으로]
  7. 개념사가(槪念史家)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에 의하면, 서양 사상의 개념사에서 이러한 단일 보편적 개념화를 통해 주체가 형성된 것은 서양 근대 사유의 특징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비록 코젤렉은 신학이라는 단어에 얽힌 개념사에 대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역시 근대 서양의 일반적 자기 이해의 맥락에서 확정된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듯싶다. [본문으로]
  8.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정전’으로서의 성서가 근대적 현상임을 연구한 바 있다. 김진호, 〈탈정전적 성서 읽기의 모색〉, 《반신학의 미소》(삼인, 2001). [본문으로]
  9. 여기서 ‘장’과 ‘아비투스’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용어를 빌려온 것이다. 또한 나는 앞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를 논의할 때 부르디외의 장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이야기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이상길의 논문 〈장 이론: 구조, 문제틀, 그리고 난점들〉(《문화와 계급: 부르디외와 한국사회》〈동문선 2002〉)을 참조하라. 또한 그의 장과 아비투스 개념을 한국 기독교의 형성에 관한 문화적 접근 방법으로 활용한 것으로, 최종철, 〈한국 개신교 문화의 형성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1)~(2): 삐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사회학 이론의 한국적 적용〉, 《기독교사상》(1996.2&3)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10. ‘야생의 실재’라는 표현을 쓴 것은, 우리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에 대한 사회학적, 인문학적 연구가 충분치 않아 담론화의 결핍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러한 결핍에도 불구하고 그리 많지 않은 연구성과들에 대해 무관심한 채 마치 무정형의 영역처럼 바라보고 서구 신학의 사회구성 모델에 더욱 주목하는 신학자의 일상적 시선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11. 서남동, 〈두 이야기의 합류〉, 《민중신학의 탐구》(한길사, 1983) 참조. [본문으로]
  12. 최형묵, 〈민중해방의 정치와 ‘합류’의 해석학―서남동의 《민중신학의 탐구》 다시 읽기〉, 《진보평론》 14(2002 겨울) 참조. [본문으로]
  13. 이 글들은 모두 《민중신학의 탐구》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14. 〈두 이야기의 합류〉 48쪽. [본문으로]
  15. 그의 말기 저술인 〈빈곤의 사회학과 빈곤의 신학〉(《민중신학의 탐구》에 수록)에서 한국의 역사문화적 컨텍스트를 이야기하는 것이 곧 신학적 서술이 되는, 새로운 신학하기의 기술(記述) 방법의 가능성이 제시된다. 하지만 이러한 서술을 좀더 발전시키기 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이후 제2세대 민중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신학적 문제의식이자 주요 의제인 ‘과학적 현실분석’과 ‘이데올로기 선택’ 주장의 결정적인 전거로서 서남동의 이 글을 주목하며, 그러한 관점에서 서남동 읽기를 조직하고자 한다. 강원돈, 〈서남동의 신학〉(한국문화신학회 2005년 가을 학술대회 발표글〈2005.11.25〉) 참조. [본문으로]
  16. 나의 책 《예수 역사학―예수로 예수를 넘기 위하여》(다산글방, 2000)의 4장과 《죽은 민중의 시대, 안병무를 다시 본다》(삼인, 2006)에 실린 최근의 나의 글들인 〈이름을 불러주기까지 그들은 꽃이 아니었다―안병무의 ‘오클로스론’ 다시 읽기〉와 〈두 개의 복음, 민중이 은폐된 예수와 민중이 전한 예수〉 참조. [본문으로]
  17. 최근의 북미의 연구들은 예수 전승 연구에서 Q 자료를 주목하는데, 그들 대다수는 그것의 문헌성에서 연구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술에 주목하는 안병무나 타이쎈의 논의와는 차별화된다. [본문으로]
  18. 田川建三, 김명식 옮김, 《마가복음과 민중 해방―원시그리스도교 연구》(사계절, 1983) 참조. [본문으로]
  19. 안병무는 다가와의 책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의 오클로스론은 다가와의 선행연구와 매우 비슷하다. 아마도 그 무렵 주19)에서 인용한 다가와 저서를 서남동 등으로부터 듣고 알게 되었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물론 안병무는 일본어를 잘 읽을 줄 안다. 하지만 안병무의 ‘읽지 않았다’는 평소의 말을 익숙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것이 간접적인 접촉의 결과라고 판단한다. [본문으로]
  20. 안병무 자신은 청중의 예비검열이라는 용어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상상력을 통해 동일한 문제의식을 담은 관점을 드러낸 것이다. [본문으로]
  21. 최종철, 〈한국 개신교 문화의 형성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1)~(2): 삐에르 부르디외의 문화사회학 이론의 한국적 적용〉 참조. [본문으로]
  22. 그는 이를 상징체계와 관련된 ‘생활문화’와 미학적 체계와 관련된 ‘표출적 문화’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본문으로]
  23. 최형묵, 〈민중신학의 고유성과 그 전개〉,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손이 없기 때문이다》(다산글방, 1999); 김진호, 〈한국사회의 근대성과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전개를 위하여〉, 《시대와 민중신학7: 한국 기독교, 그 어두운 자화상》(다산글방, 2002) 참조. [본문으로]
  24. 이러한 견해는 일반화된 것이지만, 최장집에게도 가장 명쾌한 논의를 볼 수 있다.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한국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후마니타스, 2002) 참조. 한편 이러한 민주화라는 규정 요인을 중요시하면서 한국사회의 변화를 논의하려는 시도들이 있는데, 이런 관점에 따라 오늘의 시대를 ‘1987체제’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1987년 체제’라는 명칭은 박형준(동아대 사회학과 교수)이 제기한 관점으로, 《당대비평》이 24호(2004년 겨울)에서 특집 ‘겨울 길목, 1987체제라는 희망의 덫’이라는 주제로 먼저 다루었고, 《창작과 비평》이 130호(2005년 겨울) 특집 ‘1987년 체제의 극복을 위하여’라는 주제 아래서 다소 다른 관점에서 체계화를 시도한 바 있다. [본문으로]
  25. 소비자본주의로의 변화를 논하는 많은 연구자들이 있는데, 그 계기적 시기를 1988년으로 보는 것은 최홍준의 탁월한 논문에 의존한 것이다. 최홍준, 〈1980년대 후반 이후 문화과정의 정치경제적 조건과 도시적 경험에 관한 연구〉(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석사학위 논문. 1993.8) 참조. [본문으로]
  26. 이러한 견해 역시 매우 일반적인 것이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이러한 논지를 편 것은 아마도 이병천이 아닐까 한다. 이병천, 〈역사적 관점에서 본 한국경제의 위기 해석〉, 《경제학연구》 47/4(1999) 참조. [본문으로]
  27. 이하의 내용은 내가 《당대비평》 주간으로 재직한 2003~2004년 사이에 저술한 논문, 에세이, 잡지 머리글, 기획취지문, 청탁서 등으로 작성한 글들에 기초한 것이다. 이것은 지난 2006년 한국조직신학자대회에서 발표한 나의 글 〈고통과 폭력의 신학적 현상학: 민중신학의 당대성 모색〉에서 먼저 정리되었고, 이 글에서 다소 축약 보완하면서 재정리하였다. [본문으로]
  28. 안병무,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신학사상》 53(1986 여름) 참조. [본문으로]
  29. ‘잊어버림의 정치’라는 표현은, 박배균과 정건화가 이주노동자에 대한 지구화된 우리 시대의 배제의 정치가 갖는 특징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인데, 나는 이 용어를 좀더 확장해서 우리 시대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뒤에서 나는 지구화 과정의 해석에서 이 개념을 다시 사용할 것이다. 박배균・정건화, 〈세계화와 ‘잊어버림’의 정치―안산시 원곡동의 외국인 노동자 거주지역에 대한 연구〉, 《한국지역지리학회지》 10/4(2004) 참조. [본문으로]
  30. 문화사회로의 이행에 관한 한국학계의 논의를 보려면, 《문화과학》 17호(1999 봄)의 특집 ‘문화사회로의 전환’에 기고된 글들 참조. 그밖에도 《문화과학》은 문화사회에 관한 다양하 논의를 지속적으로 전개・발전시킨 글들을 무수히 수록하고 있다. [본문으로]
  31. 권지예의 소설집 《폭소》(문학동네, 2003)에 수록. [본문으로]
  32. 2006년 민중신학자대회에서 발표한 나의 글 〈그대가 아픔을 말하는 빼앗긴 목소리를 되찾기까지〉 참조. 이 글의 초고는 원래 ‘신학아카데미 탈/향’의 2005년도 상반기 강좌에서 발표되었는데, 그 글의 원제는 〈민중은 유혹받고 있다〉였다. [본문으로]
  33. 이러한 지구화 과정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는 나의 글 〈팍스로마나, 팍스아메리카나, 팍스크리스티아나: 역사의 예수 연구의 정치성에 대하여(재론)〉, 《세계의 신학》(2003 봄) 참조. [본문으로]
  34. 전쟁의 폭력에 대한 ‘예감’을 통해 전쟁을 일상화하는 것에 대하여는 도미야마 이치로, 임성모 옮김, 《전장의 기억》(이산 2002) 참조. [본문으로]
  35. 임우경, 〈전쟁과 일상: 전쟁 체험과 張愛玲의 문학 세계〉, 《중국현대문학》 17(1999 겨울) 참조. [본문으로]
  36. 김진호, 〈카인 콤플렉스와 무능력자 담론〉, 《당대비평》 23(2003 가을)와, 이 논문을 다소 수정 보완하여 신용불량자에 대한 연구로 재정리한 글인 〈무능력과 신용불량담론, 그 시민적 욕망과 ‘악의 진부화’에 대하여〉, 《민주사회를 위한 변론》 58(2004년 5~6월호) 참조. [본문으로]
  37. 미시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고통에 관한 연구사적 소개를 보려면 신진욱, 〈일상의 사회적 배제와 커뮤니케이션의 미시정치: 모빙, 불링, 사이코 테러의 집단 다이네믹, 권력기술, 권력관계〉, 《사회이론》 26(2004) 참조. 또한 이러한 미시적 폭력의 현장에 대한 연구는 특히 청소년학이나 아동학 연구지들에서 이른바 ‘집단따돌림’에 대한 연구로 무수히 제출되었다. [본문으로]
  38. 신진욱, 같은 글, 229쪽. [본문으로]
  39. 종교학자 이진구는 한국개신교의 주된 공통감각의 하나로 ‘성공주의 이데올로기’를 언급한 바 있고, 나는 이를 ‘승리주의’로 명명하였다. 이진구, 〈개신교와 성공주의 이데올로기〉, 《당대비평》 12(2000 가을); 김진호 이숙진, 〈‘한국의 근대’와 민중신학: 회고와 전망〉, 《반신학의 미소》(삼인, 2001). 한편 한종호는 전병호 목사의 신학을 분석하면서 세속적 성공주의가 어떻게 그의 설교 속에 잘 녹아 있는지를 분석해낸다. 한종호, 〈세속적 성공주의와 역사의 왜곡: 전병욱 목사〉, 《기독교사상》(2002.10) 참조. 최근의 ‘열린 예배’ 등은 이러한 세속적 성공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예배 제도적 포맷으로 그 유용성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용함을 모방하려는 많은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그 효력은 자원이 풍부한 대형 교회들의 전유물임이다. 신문철 김효성, 〈포스트모던 문화와 교회의 감성적 예배: 현대 교회의 열린예배에 대한 비판적 고찰〉, 《조직신학연구》 6(2005) 참조. [본문으로]
  40. 신문철 김효성, 같은 글, 66~67쪽. [본문으로]
  41. 김승호는 한국의 문화적 지평을 포스트모던 문화상황으로 규정하고, 포스트모던 일반이론을 끌어들여 상대주의, 종교 관용, 다원주의적 특성이 위험성의 요소라고 해석하며, 이러한 위험성에서 복음의 기회를 상항한다. 김승호, 〈포스트모던 상황에서 한국복음주의 교회의 선교〉, 《성경과 신학》 39(2006) 참조. [본문으로]
  42. 권수영, 〈‘문화분석’으로 본 하나님 나라: 해방신학의 목회신학적 전망〉, 《한국기독교신학논총》 41(2005) 참조. [본문으로]
  43. 이 표현은 기든스에게서 빌려온 개념으로, 가령 일터에 대해 쉼터, 노동/공부시간 대 쉬는 시간 등 근대적 시공간 개념에서 잘 발달된 것이다. 그런데 그는 급진화된 근대(radical modern, 그는 포스트근대를 이렇게 해석한다)는 감시와 욕망의 체계가 발달함으로써 후방지역의 전방지역화를 훨씬 정교하게 발전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