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운동과 

1세기 팔레스티나의 다른 민중운동들

사회운동론의 관점에서

 

 

 

 


1

 

최근 북미를 중심으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예수의 역사성연구에서는 예수와 예수운동을 별개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즉 역사의 예수와 복음서들 사이의 40년 어간의 괄호 쳐진 기간에 예수사건을 전승한 담지자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예수운동들의 존재가 문제시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이 예수운동들이 실재 예수에 가장 근접 가능한 역사적 실체임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 역사학에 유의미한 학문적 위치를 갖는다. 이때 전승의 과정을 나타내는 데 운동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은 승계 행위의 집합성(collectivity)을 고려한 결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최근 북미의 역사의 예수 논의는 전승주체들의 개체성(individuality)에 몰두했던 고전적 가정들을 넘어서는 예수 역사학의 성과를 내포하고 있다. 바로 이런 새로운 인식론적 전제 위에서 사회학적 연구가 성서 비평학과 결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요컨대 최근의 연구 경향에 있어서, ‘예수운동은 사회운동으로서 포착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방법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전제 사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역사의 예수의 활동을 운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스런 일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동의하는 바, 분명 예수는 일단의 추종자 집단과 더불어 활동을 펼쳤으며, 그 활동은 지배체제에 대한 명백한 대항적 지향의 추구와 연결된다. 또 그러한 지향 아래 대중을 설득하여 지지자층으로 동원하려는 일련의 목적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그 활동의 내용과 지향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든 않든, 위와 같은 가정에 이견을 제시할 이는 없으리라.

이 점에서 마르틴 헹엘(Martin Hengel)이 예수의 실천을 평화적-비폭력적 사회운동으로 보면서, 젤롯당의 전복적-폭력적 사회운동과 대비시킨 것은 최근 북미의 많은 논자들보다, 비록 훨씬 오래된 논의임에도 불구하고, 일면 통찰력 있는 인식 수준을 내포하고 있다.[각주:1] 비교의 방법에 있어서 그는 이 두 비교의 대상이 시공간적으로 겹쳐 있다는(시공간적 근접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이 말은 두 사회운동이 시공간적으로 동일한 혹은 유사한 사회적 맥락에서 기원했으며, 전개발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상호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가령, 예수의 청중 뿐 아니라 제자들 중에도 젤롯 당원 출신이 포함되어 있었고, 예수는 폭력이라는 대항 수단의 유혹에 끊임없이 직면했으며, 그럼에도 예수는 젤롯적인 폭력론의 불가피성에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제자나 대중에게 비폭력을 선포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헹엘의 비교 논법에서 핵심적인 것은, 이 두 사회운동들이 실천지향에서는 서로 분명하게 대비된다는 데 있다. 이렇게 동일한 혹은 유사한 발생 맥락에서 상이한 성격의 사회운동이 펼쳐지게 되었다는 주장은, 그 상이성 논의에 관심을 집중하게 한다. 즉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신념체계의 상이성이 차이의 결정적인 독립변수였다는 것이다.[각주:2] 결국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라는 선택의 유의미성이 다른 변인들보다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비교 연구는여전히 많은 예수 연구자들이 그를 선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다음 세 가지 이유에서 적실성을 상실하고 있다. 우선 예수운동젤롯운동이라는 비교대상의 선정부터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요세푸스 저작들에 대한 최근의 텍스트 비평학적 연구에 따르면, 젤롯운동과 예수운동은, 헹엘이 가정했던 것보다 시공간적 근접성이 약하다는 것이다. 예수운동이 30년 어간의 시기와 관련된 반면 젤롯은, 헹엘의 주장과는 달리, 주후 60년대 후반의 시기에 등장했고, 이 두 시기의 성격은 동등비교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큰 차이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헹엘의 젤롯 가설[각주:3]이 나온 이듬해인 1962년 이미 유다교 학자인 솔로몬 자이틀린(Solomon Zeitlin)에 의해 그의 요세푸스 저작에 대한 독해가 비평적이라기보다는 자의적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었고,[각주:4] 모튼 스미스(Morton Smith)의 꼼꼼한 비평은 젤롯 가설을 새로 쓰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각주:5] 스미스에 의하면 젤롯운동은 주후 6년부터 비롯된 잘 조직된 하나의 정파가 아니라 유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특히 로마군의 팔레스티나 재진군과 관련하여 67년 말에서 68년 초 즈음에 역사의 무대에 갑자기 등장한 무장한 대중 연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기에 폭력을 선택한 운동과, 체제의 사회적 통제 능력이 매우 견고하던 주후 30년 어간의 시기에 비폭력을 선택한 운동이 시공간적 근접성을 갖는 비교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부적절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둘째로, 비교방법에 있어서도 문제가 노정된다. 헹엘은 두 사회운동이 헬레니즘과 유다주의 간의 관계에 의해 특성화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압제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며, 이러한 대중적 고난과 관련하여 특성화된 사회적 맥락은, 유다의 헬레니즘 시대 전체에 걸친 장기지속적차원에서 노정되는데,[각주:6] 반면 그가 취한 비교방법은 협역-공시적 방법이었다는 점에서 자기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편 사회의 전반적인 헬레니즘화는 예루살렘의 부유한 귀족들(또는 그런 류의 사람들)에게서 지배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는 사실을 헹엘은 부인하지 않는다.[각주:7] 반면 대다수 대중의 고난의 현장은 시골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그의 비교방법은 공간적으로 적실성을 잃고 있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두 가지로 지적한 바, 비교대상 선정이나 비교방법 적용의 오류를 다 무시한다 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즉 대중의 사회정치적 동원이 두 방향으로 상이하게 추동된 결정적 변수를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라는 가치지향으로 단순화한 것은 사회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대단히 미흡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가치와 행위간의 연결이 직접적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단순 도식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는 단순히 어떤 가치지향에 따라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혁명적 사건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의도되지 않은) 결과에 의한 보상이나 손해가 극한적으로 갈리는 행위는 가치지향으로 환원할 수 없는 여러 변수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가치의 사회적 형성과정이나 행위의 집합화, 즉 동원의 과정에 대한 보완적 논의가 매개되어야 한다.

이러한 비평 뒤에 감추어진 나의 논지는, 예수운동과 동시대 다른 민중운동들이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서로 통시적인 연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헹엘 류의 연구는아직까지도 많은 연구자들에게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바예수시대 사회운동들이 시공간적 근접성을 갖는다는 전제 아래 이 운동들을 평면적으로 나열하면서 예수운동이 다른 운동들에 비해 얼마나 특이성을 갖는가를 말하려는, 다분히 호교론적 지향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예수운동과 다른 사회운동들은 동시대적 현상이지만, 서로 간에는 연계성이 없다는 전제를 갖는다. 따라서 나의 논지는 위의, 헹엘의 주장에 대한 세 가지 비판을 논의의 축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30년 어간에 역사의 예수가 주도했던 사회운동적 전망이 초기 그리스도라는 분파적 조직을 통해 어떻게 승계되었느냐라는 주체화 과정에 주목하는 헹엘 류의 호교론적 길과는 인식론으로 다른 전제를 갖는다. 후자는 예수분파의 헤게모니 형성 과정에서 구성된 차별적 담론화에 몰두하고 있는 최근의 예수연구의 엘리트주의적 시각[각주:8]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반면 나는 30년대 민중운동으로서의 예수운동에 동원된 대중과 60년대 말에 절정에 이르는 대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중운동에 동원된 대중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고 본다. 예수운동의 참여자가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신앙적이고 사상적인 전향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담론을 대중전승의 관점에서 볼 것을 제안하고 있는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다소의 이론적 보완을 거쳐받아들인다면,[각주:9] 마가복음의 예수담론은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해 주는 성서 내적인 증거를 제공해 준다. 마가복음에 반영된 예수전승은 혁명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회운동들과의 담론적 결속의 흔적을 보여준다. 만약 성서의 내증이 수반된다면, 논리적으로 이러한 관점은 자명한데, 그것은 안정기에서 혁명기로 이행하는 사회적 동원 과정은, 미시동원적 민중운동간의 결속이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지는 통시적 과정을 수반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관점은 이러한 상식적역사 과정에 예수운동을 위치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논지의 대극에 있는 헹엘 류의 견해에 대한 비평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여기서는 호슬리(Richard A. Horsley)에 대한 평가로 이러한 과제를 대체하고자 하는데,[각주:10] 그것은 그의 연구가 위에서 기술한 헹엘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점을 극복한 탁월한 성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번째 논점에서 호슬리 또한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그의 견해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필요하다. 그런데 호슬리의 글들이 이미 여러 편 번역되었고[각주:11] 그의 연구사적 전제라 할 수 있는 젤롯에 관한 최근의 연구들에 대한 사전적인 소개[각주:12]가 이미 수행된 바에, 그의 주장을 여기서 다시 소개하는 것은 지면의 낭비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위의 비판점들과 관련한 그의 주장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코자 한다.

 

2

 

호슬리의 연구는 앞서 언급한 스미스의 요세푸스 저작들에 관한 문헌비평적 성과에 커다란 빚을 지고 있다.[각주:13] 스미스는 헹엘이 젤롯(ζηλωται)과 시카리(σικαριοι) 및 비적(λησται)을 모두 동일한 것으로 보는 혼란에 빠져 있다고 비평하면서, 이들 운동들을 다음과 같이 재규정한다: 주후 6년 라삐인 갈릴래아의 유다로 말미암아 시작된요세푸스가 명명한 바4의 철학은 젤롯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이 운동의 창시자인 유다가 주후 66년 시카리의 지도자로 나타난 므나헴의 조부/부친이라는 점에서, 시카리와의 연계성을 추정할 수 있으며, 시카리는 주후 66년 전쟁이 발발한 직후 예루살렘의 지도적 사제들에 의해 므나헴이 암살당하자 마사다로 물러나게 되며, 이후 전쟁 기간 내내 예루살렘에서 사라져버린 반면, 젤롯은 전쟁의 중반에야 비로소 등장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헹엘은 요세푸스가 다양한 용법으로 사용한 비적이라는 경멸조의 말을 모두 하나의 잘 조직된 정파로서의 젤롯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각주:14]

호슬리는 젤롯, 시카리, 비적 외에 대중적 예언자 운동과 대중적 메시아 운동 등을 포함해서 1세기 팔레스티나 사회운동 유형의 지형도를 그린다. 그런데 그의 연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런 유형론의 사회사에 전자본주의적 농경사회의 대중운동적 함의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엘리트주의적 해석은 농경사회의 거의 모든 대중이 비문자 계층이라는 점을 텍스트 해석에 별로 감안하지 않았다. 요세푸스는 로마에 투항한 유다인으로서 황실 역사가였을 뿐 아니라, 동시대 최고의 지식 엘리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유다의 대중적 사회운동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요세푸스의 해석을 통한 헹엘의 가설이나, 스미스의 헹엘 비판, 그리고 그 이후의 논의들이 모두 범하는 공통된 한계는 비문자 계층의 시좌에서 요세푸스를 읽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각주:15] 호슬리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새로운 해석학적 원칙을 제시한다. 수미일관된 구성을 갖는 현존하는 텍스트의 거대전승(great tradition)에서 미소전승(little tradition)을 추론해 내는 것이나,[각주:16] 외삽법(extrapolation)을 사용하는 것[각주:17]이 그것이다. 전자가 텍스트 내부에서 대중의 담론을 추론해내는 것이라면, 후자는 텍스트가 주는 정보의 희소성을 극복하기 위해 비교방법을 통해 외부로부터 정보를 보충하여 대중적 담론을 유추해 내는 방법이다. 그런데 전자의 방법은, 요세푸스의 저작의 경우엔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의 저작 자체가 대중 담론에 기초한 글쓰기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호슬리는 이 방법을 구술적 대중 담론으로부터 유래한 성서 해석에 주로 활용한다. 반면 요세푸스의 저작을 해석하는 데 유용한 외삽적 정보로서 그는 홉스봄(Eric J. Hobsbawm)의 전자본주의 사회의 민중운동 유형에 관한 연구[각주:18]를 유용하게 활용한다. 특히 사회적 비적 현상(social banditary)에 관한 논의는 홉스봄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데, 여기서 사회적 비적 현상이란 농촌사회에서 위기적 변동이 진행된 결과 공동체적 연결망이 훼손되어 비자발적 이탈자 집단이 속출하고, 이들의 기득권층에 대한 즉자적 저항이 그들에 대한 (충분히 정치화되지 않은 pre-political)[각주:19] 약탈로 이어지는 사회운동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회적 비적이 촌락민과 갈등 관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촌락민과 비적 간의 상호 이동 가능성을 수반한다. 대중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종종 그들에게 앙갚음을 부탁하곤 했고, 때론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기도 했다. 특히 혁명기에 접어들면 농민으로부터 대대적인 충원이 이루어지게 되며, 여기에서 단순한 사회적 비적이 보다 정치화되어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으로 전화되는 맥락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는 유다 혁명기에 등장한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 등을 설명하는 데 기반을 이룬다.

호슬리가 그리고 있는 주전 4년에서 주후 74년까지 팔레스티나의 민중운동 지형도는 다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있다. 우선 통시적 범주로 보면, 1세기 팔레스티나의 역사는, 주전 4년 잠깐 동안 폭발적으로 분출한 에피소드적 혁명기, 그 이후 주후 40년대 말까지의 정치적 안정기, 그때부터 66년까지의 원초적 반란기, 그리고 66년 이후 몇 년간의 혁명기로 시기 구분할 수 있다. 비적 현상은 전 시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존재했던, 농경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원초적인 형태의 사회운동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첫 번째 시기는 대중적 메시아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이고, 둘째 시기는 대중적 예언자 운동이 상대적으로 활기를 띤 반면, 다른 운동들은 지극히 억제된 시대다. 셋째 시기는 시카리의 테러리즘이 등장했고, 비적 현상이 급속히 확산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마지막 시기는 비적들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운동들간의 연결망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거대 규모의 민중 연대체들이 형성되는데, 그 중 예루살렘과 연관지어 보면, 진보적 사제귀족인 엘르아잘이 이끄는 시민연합’, 유다 지방 북서부 지역 출신 비적들이 주축을 이룬 급진적 대중연합인 젤롯, 가장 급진파에 속하는 기살라의 요한이 이끈 민중연합, 그리고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받던 시몬 바르 기오라가 이끈 메시아 운동적 민중연합 등을 들 수 있다.

사회의 시대적 추이와 민중운동을 대응시킴으로써 호슬리는, 헹엘이 가치지향과 행위를 직결시킴으로써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단순화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성공한 듯이 보인다. 그는 사회구조와 집합행위가 상호성을 갖는다는 점을 유념하면서, 이에 관한 사회학적 이론을 자신의 연구에 적용시킨다. , 안정기에서 혁명기로 이행하는 시대적 전개와 사회운동을 관련시키기기 위해, 찰머스 존슨(Chalmers A. Johnson)의 사회체계론적 혁명이론을 활용한다.[각주:20] 요컨대 호슬리는 혁명의 구조적 요인을 헤롯 치하에서 심화된 정치경제적 착취구조와, 기존의 가치지향 안팎에서 면면히 전승된 저항의 전통 등으로 요약한다. 이것은 존슨이 주장한 환경과 가치의 변동과정의 비동시성이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에서도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특히 혁명의 보다 근거리적 계기로 그는 40년대 말의 대기근과 비적 현상의 만연을 이야기하는 데, 이 논의는 환경과 가치간의 불일치로 인한 체제의 구조적 위기가 절정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존슨은 지배 엘리트들이 비타협적인 강제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통치 상황이 혁명으로 치닫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호슬리는 이를 쿠마누스 이후 총독들의 대응방식에서 찾는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혁명적 대중 동원이 이루어지려면, 존슨에 의하면, 촉진제적 사건이 수반되어야 한다. 호슬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시카리 가설을 제안한다. 그에 의하면, 시카리는, 비적과는 달리, 농촌이 아니라 도시의 현상이다. 또한 하나의 잘 조직된이데올로기적 사회운동 집단으로, 테러리즘을 투쟁 전략으로 선택한 급진주의자들이다. 그는 테러리즘에 대한 최근의 실증적 연구들에 기초해서, 시카리가 유다 민중봉기의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혁명 상황에서 대대적인 대중적 저항 연합들이 도시와 시골에서 형성되는데, 이 맥락에서 홉스봄이 이론화한 비적과는 비견할 수 없는, 규모에서도 훨씬 거대하며 활동에서도 매우 공격적인, 그리고 매우 정치화된 사회운동체들이 형성된다.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의 존재는 바로 이러한 설명틀 속에 위치한다.

이상과 같이 1세기 팔레스티나의 통시적 동학 속에서 동시대 민중운동의 전개를 상응시켜 보는 것은, 헹엘이 역사적 추이를 무시하면서 사회운동들간을 비교한 것에서는 도무지 볼 수 없었던 중요한 사실을 보게 해 준다. 특히 역사의 예수가 주도한 운동의 비폭력적 지향을 폭력적 전략의 젤롯운동과 비교하면서 해석하기보다는, 주후 30년 어간의 시대적 특성을 고려하여 해석하는 편이 훨씬 유용하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요컨대 이러한 통시적 지형도는 비교대상을 선정하거나 비교방법을 적용하는 데서 생길 수 있는 오류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유용한 도구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호슬리의 민중운동 지형도를 대중적 민중운동 대 지식인적 민중운동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비적, 젤롯, 대중적 예언자 운동과 대중적 메시아 운동 등이 전자에 속한다면, 바리사이나 에쎄네, 4의 철학, 그리고 시카리 운동은 후자에 속하며, 그밖에 (비록 호슬리 자신은 여기에 포함시키는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66년 봉기의 초기 국면을 주도하였으며, 므나쎄를 암살하고 시카리를 도성에서 몰아낸, 성전 수비대장 출신의 고위 사제 엘르아잘이 이끄는 사제 중심적 시민당파(유대전쟁사2,422~24; 2,443~45)도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호슬리에 의하면, 이러한 범주의 사회운동들은 동시대에 대중 동원에 거의 무관심하거나 혹은 실패하였다고 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므나쎄 휘하의 당파는 시카리 집단에서 예외적으로 대중적 메시아니즘의 요소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된다. 호슬리에 의하면, 동시대의 무수한 민중운동 가운데 이 두 영역을 매개하고 있는 유일한 예가 바로 므나쎄의 경우라는 것이다.[각주:21] 그러나, 내가 보기엔, 엘르아잘의 예루살렘 시민연합도 대중동원에 성공한 엘리트주의적 사회운동의 또 다른 경우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므나쎄가 대중적 메시아니즘에 호소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했다고 한다면, 엘르아잘은 주로 시각(제의적 건조물 등)청각(찬양 등 제의에서 발성되는 소리)후각(, 또는 동물의 피나 기름에서 나오는 냄새 등) 등 감각적 매체를 통해 의미 전달의 대중적 효과를 극대화했던 제의를 활용하였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논의에서 우리는 예수운동과 동질적인 계급적 기반을 가진 대상과 이질적인 대상을 명료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비교대상을 선정하고 방법을 적용하는 데 있어 보다 분명한 준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호슬리는 지식인적 민중운동이 대중동원에 실패함으로써, 1세기 팔레스티나의 사회운동들은 운동 구성원의 계급적 위치에 있어서 간명하게 구획되어진다고 본다. 요컨대 운동의 구성원으로 볼 때, 비적, 대중적 예언자 운동, 대중적 메시아 운동, 젤롯 등은 가족적 유사성(family resemblance)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운동의 주변적 참여자들 간에는 상호이동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훨씬 용이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해 준다. 심지어 중심부 집단의 공식적 조직들 간에는 서로 명백한 구분이 지어져 있었겠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매우 다양한 연결망을 형성하였으리라고 보는 것도 그리 무리한 추정은 아니리라. 가령, 68년 예루살렘에서 젤롯 연합이 형성되어 일시적인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 이 당파와 기살라의 요한이 이끄는 민중연합, 그리고 시몬 바르 기오라가 이끄는 메시아 운동적 민중연합이 예루살렘을 분할 점거하고 있는 혁명의 마지막 기간 동안 갈등 관계가 계속되는 중에서도 구성원들의 수평적인 상호이동이 계속되고 있었고, 중심부 집단 간에도 선택적으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유대전쟁사4,224~365). 아마도 귀족이나 왕족들을 숙청하는 등의 활동에서 중간지도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자신이 속한 당파의 명령계통에 준하기보다는 그들 간의 지연 혈연 및 기타 친분관계 등 다양한 비공식적 연결망에 의해서 처신하곤 했던 것 같다.[각주:22] 이와 같이 어느 정도 자발적인 다양한 상호이동 및 비공식적 연결망은 운동 집단간의 공시적일 뿐 아니라, 통시적 현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호슬리처럼 당파들 간의 유형적 차이를 밝혀내는 작업은 이들 운동집단들 간의 시공간적인 연계 및 상호이동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예수의 추종자들의 통시적 승계 행위가 공식적 승계집단을 통해서만 수행되었다고 가정하는 그리스도교 신학계의 신화는, 예수로부터 배운 야훼신앙 정신을 승계하기 위해 조직된 공식적인 분파적 경계를 넘나드는 대중적 상호이동의 정당성을 간과한 결과며, 엘리트주의적이고 종파주의적 폐쇄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몰역사적 역사의식의 흔적이다. 그런 점에서, 비록 호슬리 자신은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주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제기한 비교연구의 논제는 그리스도교 운동사를 새롭게 보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런데 왜 지식인 중심의 운동은 대중적 사회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었을까? 이에 대한 호슬리의 대답은 불명료하지만, 대체로 그들의 계급위치에 따른 인식론적이고 담론적인 한계탓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므나쎄에게서 예외가 가능했던 것은, 그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이 이례적으로 대중 담론의 형식인 대중적 메시아니즘의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각주:23] 이 주장 이면에는 고대농경사회에서 대중과 지식인간에는 적어도 일상담론 속에서는 상호소통 가능성이 극히 제약되어 있다는 전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을 너무 강한 준거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대중매체가 급속도로 발전한 오늘날에 비할 수는 없지만, 계급간 소통의 가능성은 비록 제한적이나마 존재했고, 또 사회마다 혹은 시대마다 그 정도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노정되리라는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호슬리는 고대사회에서 지식 엘리트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을 문자언어에 한정하여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구술사회에서 문자 생산물은 낭독을 통해서 대중 담론 형성에 개입할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 그런데, 호슬리가 인용하는 바, 고대사회에서 문자언어의 해독률이 전체 구성원의 10% 미만일 거라는 일반론적 추정[각주:24]을 대입해보면, 지식인과 대중간의 계급적 차이는 상호소통의 가능성을 극도로 제약하였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런 맥락에서 호슬리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경우에 (지식인 운동과 대중운동으로 대별되는) (사회운동) 형태들의 복합이나 결합체는 없었다(괄호 안은 인용자)고 단언하는 것이다.[각주:25] 그러나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 감각적 기호를 매개로 한 상징체계가 문자계층과 비문자계층 간에 더욱 유용한 교신수단일 수 있음을 그는 간과하고 있다.[각주:26] 결국 그는, 의도한 것은 아님에도, 고대의 사회적 투쟁을 계급위치에 귀속시키는 환원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엘리트층과 대중을 망라하는 일상적인 소통적 기재인 문화적 상징적 매체의 존재를 보다 신중히 고려했어야 했다. 또한 지식 엘리트 계층이 대중동원에 성공한 사회운동의 주역으로 자리잡지 못하게 된 역사적 과정 그리고 대중 자신이 지식 엘리트를 매개하지 않은 채 변혁에 대한 주체적 의식을 갖추게 된 역사적 과정을 유념했어야 했다. 실재로, 페르시아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 그리고 로마 시대로 이어지면서 대중 동원에 성공한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전략집단의 계급적 위상은 왕족/귀족소자산가 계열의 지식인대중으로 전반적으로 이동해 가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각주:27]

셋째로, 도시와 시골이라는 사회생태학적 맥락에서 민중운동들을 범주화할 수 있는데, 젤롯과 시카리가 도시에서 발생전개된 사회운동이었고, 대중적 메시아 운동이 도시에서 더욱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면, 비적은 주로 농촌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대중적 예언자 운동은 도시와 농촌에서 모두 발견된다. 비적이 대중의 충분히 정치화되지 못한저항 유형인 반면,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이 보다 정치화된 저항유형이라는 사실을 유념한다면, 그리고 시카리가 여타 대중운동에 비해 매우 이데올로기화한 정체성을 가진 운동 유형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도시에서 전개된 운동은 보다 정치적인 반면, 농촌의 운동은 덜 정치적일 수 있다는 호슬리의 추론은 자명한 논리적 귀결처럼 보인다.

요컨대 호슬리는 농경사회의 계급투쟁을 두 가지 양상으로 논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착취구조로 인한 계급투쟁의 양상인데, 농경사회에서 착취가 도시 대 농촌의 문제라는 점에서 혁명적 동력은 기본적으로 농촌에서 발원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비동원 상태의 농민이 정치적으로 동원되는 혁명적 상황으로 전화되는 과도기로 충분히 정치화되지 않은 (하향의) 동원상태를 설정하는 데, 그것이 바로 비적이다. 아무튼 호슬리는 도시 대 농촌으로 나뉘는 착취구조 때문에, 기본적으로 농촌은 혁명적이고 도시는 반혁명적이라고 본다. 이러한 주장이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부분은 젤롯을 공격했던 사제귀족 출신의 아나누스와 예수가 이끄는 예루살렘 시민연합의 반혁명 시도에 관한 논의다.[각주:28] 그것은 예루살렘의 시민들(도시 거주 대중들, city-people)이 성전과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각주:29]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시카리 같은 도시적 혁명집단이나, 농촌에서 유래했지만 도시에서 그 폭발성을 발현했던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에 관한 문제다.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하여 그는 농경사회의 계급투쟁의 두 번째 양상에 주목한다. 즉 계급의식의 문제다. 호슬리는 도시의 현상이었던 시카리를 이례적으로 매우 이데올로기화된 사회운동의 전형으로 설명한다. 또한 비적 같은 농촌의 사회운동은 덜 정치화되었던 반면, 비적에서 유래한 젤롯이나 대중적 메시아 운동은 현저히 정치화되었다는 주장을 편다. 그것은 도시의 사회운동이 더욱 현저한 계급의식을 갖추었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중의 계급투쟁 관점의 지적 소유권자인 홉스봄에게서 그런 것처럼[각주:30] 착취관계는 통시적으로 비교적 지속성을 지니지만, 계급의식은 통시적 과정에서 (급격한 혹은 완만한) 전화과정을 거친다. 요컨대 호슬리는 착취관계에 의한 즉자적 계급투쟁이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게 되는 통시적 진화(進化) 과정에서 혁명기 사회운동들의 보다 정치화된 지형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생태학 차원에서 전개되는 이중의 계급투쟁 논의는 도시와 농촌의 갈등과 예수의 성전 저주 예언의 사회학을 직결시키려 했던 타이쎈의 주장[각주:31]보다 한결 발전된 양상을 보여준다. 타이쎈에게서 사회적 착취 구조(구조의 행위자에 대한 규정성의 차원/도시와 농촌간의 착취구조)와 담론적 갈등(행위자의 자발적 대응의 차원/성전에 대한 저주 예언)일 대 일대응관계에 있다. 그러나 호슬리에게선 그러한 일차원적 사회학을 넘어서 행위자의 혁명적 저항이 통시적으로 점점 정치화되는 과정을 사회생태학적 공간을 따라 추적하고 있다. 즉 농촌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운동들이 도시를 점거하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과 사회운동의 역할이 점차 혁명적으로 전화되는 과정이 맞물리는 통시적 지형도를 그림으로써, 구조와 행위자의 관계를 단순 대응시키기보다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보다 정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생태학적 지형도는 농촌의 예수운동이 혁명기 도시의 사회운동들과 비교할 때 비폭력적인 지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반면 정치적 전망에 있어서는 매우 절제되어 있는 이유를 암시해 준다.

그런데 호슬리가 이와 같이 도시 주민들을 반혁명적 지향과 관련시키고 있는 어법은, 젤롯이나 기살라 요한의 집단, 시몬 바르 기오라의 집단 같은, 농경민이 주축을 이룬 도시의 혁명적 대중운동 집단에 대해 독설적 어투로 비난하고 있는 요세푸스의 어법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마치 요세푸스를 반박하려는 집착에 몰두한 나머지 균형을 잃은 듯한 모습이다. 반면 그의 이론적 후견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홉스봄은 도시빈민의 폭동을 농촌의 비적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정치화되지 않은 원초적 반란의 한 유형으로 묘사하고 있다.[각주:32] 그러나 호슬리에게서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에서의 도시민은 권력의 이해관계에 포섭된 존재이거나 변덕스럽게 지지세력을 바꾸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균형을 잃은 듯한 모습은 그의 저술들 전체에 걸쳐 대체로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는 요세푸스로부터, 주후 66년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티나 전 지역에서 반로마적 혁명 집단들이 로마군을 축출한 직후, 갈릴래아의 수도격인 티베리아에서 도시의 빈민들과 (아마도 이 도시에 편입된 인근 지역의) 어부들이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철저한 사회적 혁명을 추구하였다는, 역사적 개연성이 높은 정보에 접하게 된다(자서전65~67).[각주:33] 이러한 대중적 민중세력은 티베리아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다른 민중운동과 제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자서전33~38 참조). 그리고 이들은 당시 이 지역에서 강력한 전투 능력을 갖춘 민중운동 지도자로, 훗날 예루살렘으로 옮겨간 뒤 가장 걸출한 혁명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된 기살라의 요한과 연합한다(자서전88 참조).

호슬리의 이러한 편견은 아마도 예수시대 팔레스티나의 사회생태학 속에 드리워진 권력 메커니즘을 편협하게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권력은 자원에 대한 불균등한 착취 관계를 통해 규정될 수 있다. 호슬리는 착취관계의 핵심으로 부채의 동학(dynamics of indeptedness)을 상정하며, 이 부채관계는 주로 도시와 농촌간의 갈등이라고 본다.[각주:34] 이때 그는 자원을, 실물 가치를 우선시하여 이해한다. 결국 그가 말하는 도농의 관계에는 상징적 자원에 대한 권력관계가 사실상 괄호쳐 있다.

그런데 권력은 정당성 주장과 강제력을 통해 착취 관계를 재생산한다. 후자가 불균등한 착취관계를 더욱 적나라하게 노출시킨다면, 전자는 은폐함으로써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양자는, 그 상대적 강도의 크기가 시기별로 변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나 공존함으로써 착취적 체제의 안정적 재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이때 정당성 주장과 강제력은 각기 실물적 차원뿐 아니라 상징적 차원을 함께 갖는다. 권력적 체제의 통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두 차원은 때로 서로 조응하지만, 또 때로는 부조응하기도 한다. 전자는 이 두 차원의 갈등적 공존이 체제의 통합을 위해 순기능하는 경우고, 후자는 역기능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순기능하는 경우를 권력의 구심성’, 역기능하는 경우는 원심성이라고 규정한다면, 권력의 이 두 속성의 공존 및 상호관계의 구체적 양상에서 예수시대 팔레스티나 사회를 특성화할 수 있을 것이다.

구심성이든 원심성이든 권력은 엘리트 집단과 더불어 생각해야 한다. 전자에는 왕족과 예루살렘 성전 귀족, 평신도 귀족 등, 도시에 거주하는 대자산가 권력층이 있고, 후자에는 촌락적 엘리트 층으로, 영향력 있는 지방 사제나 바리사이와 서기관, 그밖의 씨족장, 촌장 같은 부류가 속한다. 이 두 범주의 엘리트간에는 분명 수직적인 계서체계(hierarchic system)가 있다. 가령, /귀족과 씨족장/촌장 간에는 공납이나 부역, 군역 등 조세군사적 행정제도를 통해 위계적으로 계서화된 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고위사제와 지방의 평사제 혹은 바리사이/서기관 간에는 성전을 매개로 하는 종교적상징적 계서체계가 구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각주:35] 하지만 지방의 엘리트들은 행정상으로나 종교전통으로나 일정하게 독자적인 위상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도시와 지방의 권력 엘리트가 잘 짜인 수직적인 계서체계를 형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수평적인 공조를 견고하게 이루고 있어야 체제의 안정된 재생산이 가능해지게 된다. 이때 수직적인 계서체계와 수평적인 공조체계는 실물 차원에서 뿐 아니라 상징의 차원에서 서로 얽히면서 하나의 체제적 통합 메커니즘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체계적 통합 메커니즘의 작동 과정에서 사회의 모든 대상물들을그것이 실물적이든 상징적이든가로지르는 경계(boundary)가 만들어진다. 즉 포섭과 배제의 경계가 형성되는 것이다.[각주:36]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도농간의 갈등을 단순하게 이해했던 호슬리의 견해와는 다소 다른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우선 사회의 포섭과 배제의 경계짓기는 피지배층 일반을 크게 두 부류로 구획짓고 있다는 사실이다. 호슬리가 많이 의존하고 있는 사회학자인 게하르트 렌스키(Gerhard Lenski)에 의하면,[각주:37] 정상적인 농경사회에서 75% 가량의 농민계급과 3~7% 가량의 도시의 장인상인 계급이 피지배층이면서도 권력의 주된 포섭의 대상인 반면, 5% 가량의 부정하고 천한 계급(unclean and degraded classes), 그리고 역시 5% 가량의 소모집단(expendables)은 권력의 주된 배제의 대상이다. 요컨대 농민이나 도시 주민이 포섭의 대상이라면, 농촌의 유랑민 계층이나 도시의 빈민층은 배제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배제의 대상이라는 것은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체계의 준거로 볼 때 일탈자로 취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배제된 도시의 주변계층은 종종 귀족에게 고용된 탈가치화된 폭력집단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가령,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게쎄마네로 몰려온 대사제의 종들이나, 빌라도의 법정 밖에서 고위사제들에게 매수되어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친 사람들을 마가복음저자가 오클로스(οχλος)[각주:38]로 명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이상은 안정적인 농경사회의 경우인데, 원초적 반란기는 이러한 사회를 지탱해 주던 포섭과 배제의 가치체계가 급격히 교란 상태에 빠져들게 되는 상황을 내포한다. 이 경우 권력연합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으면서도 권력에 포섭되어 있던 계급들의 광범위한 이탈이 일어난다충분히 정치화된 형태로든 아니든.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다 혁명기에 착취관계에 의한 계급투쟁의 문제는 도시와 농촌에 두루 퍼져있는 피지배 대중의 광범위한 일탈 및 그들의 정치적 동원의 문제와 연관된다. 이러한 일탈과 동원의 문제는 도농 간의 관계에서 첨예하게 부각되는 부채의 동학만으로는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다. 기성의 지배적 가치체계가 더 이상 대중을 효과적으로 포섭하지 못하게 된 가치의 아노미적 상황과, 대안적 비전이 일탈된 대중을 혁명적인 사회운동에 동원되게끔 하는 상황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상징적이고 문화적인 이해 또한 필요한 것이다. 결국 호슬리는 부채의 동학으로 표상되는 정치경제적 해석에만 몰두하여 도시와 시골의 갈등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혁명기의 대중적 저항의 탈지역성을 간과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그는 권력 엘리트 계층의 결속을 너무 과장되게 이해한 나머지, 그들의 분화 가능성을 간과하였다. 앞서 보았듯이, 도시의 권력 엘리트와 농촌의 엘리트는 단선적으로 위계화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공식 비공식적으로 엮인 수평적인 공조관계와 교차하여 얽히면서 권력연합을 구성하였다. 이것은 중심부 엘리트의 체제적 통합 능력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다 혁명기에 이두메 종족 집단의 역할에서 볼 수 있듯이(유대전쟁사4,224~388 참조), 지방적 엘리트 세력은 종종 혁명적이었다. 나아가 중앙의 엘리트 계급조차도 혁명적 민중연합의 우파적 세력에 가담하곤 했다. 앞서 보았듯이, 갈릴래아의 수도인 티베리아의 유스투스 바르 피스투스(자서전3640 참조), 시몬 바르 기오라의 예루살렘 입성에 협조한 고위사제 마띠아스(유대전쟁사5,527)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지배 엘리트의 이러한 분열은 정치경제적 착취구조에만 주목할 경우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돌출적 상황이다. 그래서 호슬리는 이들의, 역할을 애써 폄하하고 있다. 여기에는 혁명기에 대두한 묵시적이고 대중적인 대안적 비전이 이들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는 가정을 전제한다. 그런데 앞서 본 권력의 구심성 문제는 도시와 시골간의 의사소통 기재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문자 매체는 부분적으로 팔레스티나 내의, 나아가서는 디아스포라를 포괄하는 유다 사회 전체를 묶어주는 종교공동체적 형성 기재였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이 고향 회당에서 대중 앞에서 이사야서를 읽어주었다는 루가복음서의 기사(누가복음4,16~19), 문서가 구술용으로 활용됨으로써 구술사회의 공론 형성의 기재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다. 신약성서에 무수히 등장하는 구약성서에 대한 기억들은 바로 이러한 구술용 문서들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밖에 성전이나 회당 같은 건조물, 제의 의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축제 등은 유다 사회를 종교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런 점에서 제도화된 야훼신앙의 기구들과 담론들은 (도시와 시골을 포괄하는) 종교공동체로서의 유다사회의 핵심적인 의사소통 기재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하느님나라 신앙이, 그 세부적인 해석에 있어서는 서로 달랐더라도, 유다사회의 다층적 구성체들을 연계시켜 주는 체제적 통합의 상징적 의미틀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지배적 비전이 교란되어 신념의 공허 상태가 급속도로 확산되어갈 무렵, 대중사회에서 유래한 대안적인 혁명적 비전이 하느님나라 신앙과 결속되었다면, 지배 엘리트층이 이러한 대안적 비전에 동화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령, 아리마태아 요셉은, 비혁명기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메시지에 동화된 엘리트의 실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도시와 시골의 정치경제학으로 포착되는 권력연합에 대한 이해는 실제의 역사를 분석하는 데는 지극히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정치경제적 현실 못지않게, 상징적 의미틀의 결속과 관련된 문화적 현실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설정을 문화정치학으로 명명한 바 있는데,[각주:39] 이상에서 본 것처럼 정치경제학과 문화연구를 연결시키려는 이러한 시각은 호슬리의 한계지점을 돌파하는 대안적 설명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시대 민중운동에 대한 호슬리의 논의에 대해,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비평적 논평을 시도해 보았다. 예수운동을 동시대 팔레스티나의 다른 사회운동들과의 비교를 통해 조명할 때, 그의 연구는 특히 빛을 발한다. 무엇을 비교해야 하고 무엇을 비교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또 비교 가능한 대상을 성공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면,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은 어떠해야 할지 등등. 그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공해 준다.

호슬리에 의하면, 1세기 팔레스티나의 민중운동 전개는 적어도 세 단계의 변별적 과정을 통해 조명되며, 예수운동은 민중운동이 매우 억제되어 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복음서의 예수 전승들 속에 나타나는 정치적 투쟁의 흔적이 요세푸스 저작에 나오는 젤롯 등에 비해 희소하게 나타나고 있는 점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역사적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이 전승은 일체의 폭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라는 추상적 가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폭력적 저항이 억제된 시대의 담론적 산물임을 반영한다. 예수 이후 민중운동이 극적으로 고양하는 질적 계기들이 있었다. 예수운동과 대비하여 종종 잘못된 비교의 대상이 되었던 젤롯 운동은 민중운동 고양기의 한 특징을 보여준다.

한편 그는 민중운동을 정치주의적인 발전론적 관점에서 보는 딜레마를 빗겨가고 있다. 그가 다른 대다수 연구자들에 비해, 이념보다는 실행을 강조하다보니, 그 정치적 효과에 의해 운동의 발전 정도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 결과 예수운동을 사회운동으로 보려했던 것이 예수운동을 평가절하하는 셈이 될 수도 있었다. 그의 선임자들은 예수가 위대하냐 스팔타카스가 위대하냐는 식의 단순 이분법에 빠져 늪지를 헤매야 했다. 반면, 그는 사회운동을 평가하는 준거로 정치적 혁명(political revolution)과 사회적 혁명(social revolution)의 이중개념을 제시함으로써 효과와 가치를 동시에 비교하는 안목을 보여준다. 그에 의하면, 예수운동은 정치적 운동으로서는 소극적 측면을 갖지만 사회적 운동의 관점에서는 다른 운동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급진주의적 측면을 갖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정치적 변혁에의 전망이 극도로 억제된 시대의 산물이면서도, 예수운동은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보다 근본적인 변혁적 전망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젤롯 같은 혁명기의 민중운동들이 권력에 대한 저항의 실천을 정치제도의 혁신에 치우쳐 실행한 것과는 달리, 삶을, 존재 자체를 억압하는 보다 근본적인 권력을 문제시하는 해방적 전망이 예수 담론과 실행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각주:40] 이러한 변혁 전망은, 일상 자체가 혁명적 비일상에 압도되어 정치제도에 온통 시선이 집중된 시기보다는, 삶의 일상성이 보다 현저하게 드러나는 시기에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예수운동은 활동 여건이 매우 열악한 상황에서 발전하였기에 도리어 이러한 비혁명기가 제공하는 기회를 얻기에 용이했고,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극도로 고양시킴으로써 사회적 혁명으로서의 새로운 신앙 전통을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관점을 개진하는 데 있어 그의 논거는 설명적이라기보다는 단언적 어투로 일관한다. 즉 정치제도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차원을 강조하면서도, 여기서 가장 부각되어야 할 일상성과 관련된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거의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특히 대중의 저항을 논의할 때 문화적 요소는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다. 문화라는 개념에는 대중이 국지적 영역 내에서 체험하는 일상성이 포함되지만, 동시에 그러한 국지성이 다른 국지성들과 추상화된 시공간 속에서 접속되어 상징적 동질성을 형성하는 문화공동체적 통합 과정도 함축되어 있다. 이러한 시각은 갈릴래아의 어부들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예수운동이 동시대의 다른 민중운동들과수많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서로 연계되었을 가능성, 특히 안정기에서 혁명기로 이행하는 통시적 과정에서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3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사회적 혁명의 실천으로서의 예수운동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예수전승의 적지 않은 담지자들이 예수 당시나 그 이후 시대의 많은 민중운동의 주역이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자 한다.

예수운동은 지역적으로 두 단계의 전개를 보여준다. 하나는 갈릴래아 활동기이며,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 활동기다. 전자에선 예수운동을 권력 해체적 미시동원(micro-mobilization)의 맥락에서 볼 때 유용하다. 하나의 잘 조직된 운동집단이 형성되었으며, 여기에는 주로 떠돌이 예언자 형태의 실천을 펼쳤던 제자단이 있었고, 각 지역에서 은밀히 이들의 운동에 협조했던 이들이 있었다(‘지역협조자유형). 또 제자단 내에서도 특화된 내적 집단(inner circle)이 존재했다.[각주:41] 한편 하느님나라의 임박한 도래가 예수집단의 주요 선포내용이었는데,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선포이기도 했다. 사실 동시대 많은 묵시적 문헌들이나, 구약 성서의 후기 문서들에서 그 나라의 임박한 도래는 현존하는 권력의 불의를 고발하고 대안적 체제를 염원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신앙적 비평의 어법이었다. 요컨대 하느님나라의 임박한 도래 사상은 반체제적인 상징적 의미틀(frame)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예수운동의 제자단 가운데는 세례자 요한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다수 포함되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세례자 요한 운동에 참여했던 개인/집단과 지속적인 공식적 비공식적 연계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5장의 게라사의 광인 이야기를 데카폴리스의 하나인 헬레니즘화된 도시의 시골 지역에 실존했던 한 비적 집단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이 텍스트는 그가 예수운동의 지역협조자로 가담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미시동원조직들간의 협동적 연계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위동원자(meso-mobilization actor)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예수집단은 분명 혁명적 대동원(macro-)을 성공적으로 실현하는데 기여하지는 못했다. 우선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은 늘 국지적이고 소규모적인 활동에 그쳤다. 예수 자신이 세례자 요한이 주도한 운동에 참여했다가 그가 체포되는 과정에서 갈릴래아로 도주했고, 이 곳에서 그의 활동이 요한과 연속성을 지닌 것으로 (대중과 헤롯데 안티파스 당국에 의해) 파악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운동이 처음부터 공개적 환경에서 전개될 수 없었음을 시사한다. 게다가 촌락의 회당 안에서 활동하다가 바리사이와 충돌한 이후, 촌락사회의 외부에서만 가능한 활동공간을 구축할 수 있을 뿐이었다.[각주:42] 그러므로 갈릴래아에서의 예수 주변의 무리복음서들의 과장된 표현에도 불구하고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그의 예루살렘행은 메시아 도래 사건에 대한 민족적 기대와 관련되어 있다. 로마 당국은 명절 때는 팔레스티나 주둔 주력부대를 예루살렘으로 이동시킨다. 그만큼 치안 유지에 비상 상황이 우려되는 시기인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의도적인 상징행위를 벌인다. 그리고 예수일행의 모종의 만찬직후, 대사제가 산헤드린의 의결도 거치지 않은 채 자신의 사병을 긴급 출동시켜 예수를 체포한다(대중을 자극할 우려가 있으니 체포하지 말자는 전날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통해서 나는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혁명적 대동원을 기도했다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은 그가 체포되고 처형당한 직후에 일어난 일련의 상황을 시사하고 있다. 그의 부활에 관한 오래된 전승은, 그의 되살아난 몸이 어땠다는 측근들의 목격담/체험담이 아니라, 그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보고뿐이다. 그나마 이 최초의 목격자들도 몇몇 측근 여인들로 묘사될 뿐이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여인의 증언은 증거 능력을 갖지 못한다. 요컨대 부활에 관한 오래된 전승 속에는, 그분의 몸의 부활을 해명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거의 보이질 않는다. 반면 부활설의 유포는 갈릴래아 현현설, 예루살렘 현현설 등과 결합되어 예수운동의 재건 명분으로 활용된다. 사도행전 텍스트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재건되고 점차 결집되어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된 예수운동체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예수전승에선 전혀 볼 수 없었던 지도적 인물들에 관하여 듣게 된다. 이것은 처형-부활 사건을 거치면서 예수운동이 다른 사회운동들과 결속되어 확대 재편되는 과정을 암시한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 시사되는 것처럼, 부활 이후 예루살렘과는 전혀 별개의 예수운동이 갈릴래아 촌락에서 형성되었다. 아마도 이들은 주로 촌락사회의 대중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촌락 사회의 외부로 밀려난 기층대중(오클로스)이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본 것처럼, 예수운동은 원제자단에 의해 승계된 것만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운동들과 다양한 모습으로 접속되면서 승계되었다. 또한 교회 형태로 발전한 예루살렘의 예수집단이 예수운동 승계의 유일한 예가 아니다. 실제로는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예수운동이 승계되었을 것이며, 그 과정은 현존하는 텍스트를 남긴 교회 유형 운동의 신조로 다 포괄될 수 없다. 실제로 마가복음은 예루살렘 교회 운동에 대한 비판적 입지를 함축하고 있고,[각주:43] 이러한 지양 논법에는 기층대중의 반엘리트주의적인 사회적 비전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각주:44]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더 나아가 마가복음에는 반교회, 반교리적인 민중운동으로서의 예수운동 전개의 계보가 함축되어 있다고 본다.[각주:45] 그러므로 신조로만 예수운동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승리자의 전통을 간직하여 온 교회사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예수운동이 동시대의 다른 사회운동들과 어떻게 연계되었으며 특히 혁명기에 예수운동이 어떤 형태로 관여하였는지를 알려주는 구체적인 정보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상에서 나는 그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나는 호슬리의 결론적 주장처럼 예수 자신의 실천에서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계성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 자신이 혁명적 대동원에 실패하였고, 이 운동과 통시적으로 연계된 혁명기 사회운동들이 혁명에 실패하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예수운동이 대중 사이에서 희망의 원리로서 간직되었으며, 이 전통이 사상된 담론적 구성물들만을 전수받은 우리에게까지 그 의의가 재현될 폭발적 잠재력을 가지고 다가오게 된 것이다. 즉 오늘날 예수가 우리에게 유의미한 것은 교회로 현존하는 명시적 그리스도교의 정치적 승리 때문이 아니라, 실패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된 예수 실천의 의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해석을 위해서, 호슬리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관점인 해방의 거시정치와 미시정치의 결합으로서의 문화정치학적 관점을 요청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예수 행태를 특징짓는 요소로 기적 행위와 비유의 언술을 드는 데 합의에 이르고 있다. 나는 이 두 요소에서 예수운동의 사회적 혁명의 진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먼저 예수의 기적 행위는 병리학적 질병(desease)의 원인 제거 행위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질병(illness)의 관리 메커니즘인 건강관리체계[각주:46]를 전복시킴으로써 질병 걸린 자를 해방시키는(healing/liberating) 행위이며, 그리하여 배제주의적인 사회문화적 코드를 교란시키는 실천적 함의를 지닌다. 한편 예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종말론적 선포를 일상언어의 형태로 구상화한 독특한 언술 방식이다. 즉 초월적 대상을 지혜적 언술로 은유하는 것이다. 예컨대 (초월적 대상언어) A(지혜적 대상언어) B이다는 형식을 갖는다. 여기서 종말론적 언술이란 삶의 일상적 가치를 전복하는, 초월 세계를 향해 청중을 부르는 언술 효과를 갖는다. 요컨대 그것은 경험 속에서 부재하는 공간으로의 초대인 것이다. 그런데 청중의 세계는 지혜의 세계다. 지혜는 기성 사회의 문화적 규범/관습체계의 가치를 내재화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언술에 직면한 청중은 결단을 위해선 현실 공간에서 이탈해야 하고, 지혜적 언술에 접한 청중은 현실의 연장선 위에서 현실의 극복하도록 요청받는다. 그런데 예수의 비유는 이 둘을 결합한다. 그리하여 이 두 언술구조의 상호 끌어담김의 긴장 속으로 청중을 몰입시킨다. 그러면서도 예수의 비유의 언어는 결코 이 긴장을 해소시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유 속의 그 초월적 나라는 청중에 의해 끊임없이 내재화되어야 하지만, 끊임없이 이 세계의 언어, 이 세계의 이데올로기, 이 세계의 대안적 체제로 구상화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비유의 청중은 이 세상의 무엇으로, 어떤 언어로, 어떤 이념으로, 어떤 체제로 고착화시킬 수 없는, 모든 것의 귀착점인 단순 진리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그 나라에 대한 이미지를 체감하게 된다. 즉 비유에 접한 청중은 예수가 완결시키지 아니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실천의 공동주체로 참여하게 되지만, 그들의 실천 지향은 목적론적이라기보다는 유목민적이다.

마가복음에는 이러한 예수의 사회문화적 혁명의 요소가 생생하게 보전되어 있으며, 그것은 엘리트주의적인 교리의 생산자이자 승계자의 자취가 아닌, 민중의 염원을 자양분으로 하여 간직된 또 다른 승계의 흔적을 보여준다. 물론 우리 모두는 대중의 이 집단적 언행이 자신들의 삶과 분리된 자기기만의 한 양식이라는 가정보다는, 예수를 따르는 삶의 추구의 한 양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제도화된 교회와 신학의 대변자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1. M. Hengel, Eng. tr. by David E. Green, Victory over Violence. Jesus and the Revolutionist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3; Deut. orig. 1971) 참조. [본문으로]
  2.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이 제안한 비교의 고전적 방법의 하나인 '일치의 방법'(the method of agreement)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John Stuart Mill, 〈비교의 두 방법〉, 한국비교사회연구회 엮음, 《비교사회학: 방법과 실제 I》 (서울: 열음사, 1990), 217~221 참조. [본문으로]
  3. M. Hengel, Die Zeloten (1961). [본문으로]
  4. S. Zeitlin, "Zealots and Sicarii", JBL 81 (1962). [본문으로]
  5. M. Smith, "Zealots and Sicarii, their Origins and Relations", HTR 64 (1971), 1~19. [본문으로]
  6. Hengel, Judaism and Hellenism, Studies in their Encounter in Palestine during the Early Hellenistic Period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4; Deut. orig. 1973) 참조. [본문으로]
  7. 같은 책, 56. [본문으로]
  8. 어록 텍스트와 〈마가복음〉에 대한 문학사회학적인 전승사 연구를 통해 최근 가장 주목받는 예수운동 연구자의 하나로 부상한 버튼 맥은 예수담론의 각 유형을 전승한 다양한 예수운동을 명료하게 구분해 냈는데, 그가 가정한 전승 유형에는―대부분의 선행 연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대중담론적 전승 형식이 포함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가설에서 전승의 계기는 대중적 욕망이나 바람보다는 예수운동 엘리트의 담론적 필요와 거의 전적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Burton L. Mack, A Myth of Innocence. Markand Christian Origin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91) 참조. [본문으로]
  9. 김진호,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 중심으로〉, 《예수 민중 민족. 안병무 박사 고희 기념 논문집》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참조. [본문으로]
  10. 여기서는 한국신학연구소 엮음, 《예수시대 민중운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에 수록된 그의 논문들과, 이러한 동시대 민중운동들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 예수운동에 관한 연구서인 Horsley,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Popular Jewish Resistence in Roman Palestine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을 주로 참고할 것이다. [본문으로]
  11. 《예수시대의 민중운동》에 실린 6편의 논문들(이정희・최형묵 옮김); 이준모 옮김, 《예수운동―사회학적 접근》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3); 그리고 김진호 엮음, 《예수 르네상스. 역사의 예수 연구의 새로운 지평》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6)에 수록된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의 제6장 〈정치적 예수에 대한 역사적인 물음〉(이준모 옮김) 등. [본문으로]
  12. David Rhoads, 김진호 옮김, 〈젤롯운동의 기원과 역사〉, 《신학사상》 81 (1993 여름). 이것은 원래 Anchor Bible Dictionary (Doubleday, 1992)에 수록되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13. Horsley, 〈시카리: 고대 유다의 ‘테러리스트들’〉, 《예수시대의 민중운동》, 132의 주1). [본문으로]
  14. Smith, “Zealots and Sicarii” 참조. [본문으로]
  15. Horsley, R.A., & J.S. Hanson, Bandits, Prophets, and Messiahs. Popular Movements in the Time of Jesus (Minneapolis․Chicago․New York: Winston Press, 1985), xviii 이하. [본문으로]
  16. 같은 책, 3~4. [본문으로]
  17. 같은 책, 98. [본문으로]
  18. E.J. Hobsbawm, 진철승 옮김, 《원초적 반란》 (서울: 온누리, 1984); 같은 저자, 황의방 옮김, 《의적의 사회사》 (서울: 한길사, 1978) 참조. [본문으로]
  19. ‘충분히 정치화되지 않았다’는 말은, 농민들의 저항 목표가 계급의 재구조화를 지향하거나 그런 효과를 내는 데 부적절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홉스봄이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민중운동을 근대 산업사회의 민중운동과 구별짓기 위해 사용한 사회학적 어법이다. 그에 의하면, 계급은 두 가지로 정의될 수 있는데, 하나는 착취 관계에 의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계급의식에 의해서다. 그런데 전자는 어느 시대나 착취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항상 존재한다. 따라서 계급은 착취적 체제인 한 항상 실재하며, 따라서 계급투쟁은 언제나 실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계급투쟁이 계급 해방적 비전에 기초한 계급의식의 산물은 아니다. 계급의식은 근대 산업화의 소산이다. 요컨대 농민들의 비적화 등에서 볼 수 있는 계급투쟁은 저급한, 곧 충분히 정치화되지 못한 계급투쟁인 것이다. E.J. Hobsbawn, “Class Consciousness in History”, I. Meszaros, ed., Aspests of History and Class Consciouness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71), 5~21; 같은 저자, 《원초적 반란》, 13~26 참조. 반면 호슬리는 전자본주의 시대의 농민항쟁의 두 시기를 구분하면서, 이 용어를 적용한다. 즉, 혁명기와 혁명 전기(홉스봄의 용어로는, 원초적 반란기, primitive rebel)의 민중운동들에 각각 ‘정치적’, ‘전정치적’인 저항을 대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0. 찰머스 존슨의 혁명이론에 관하여는, Anthony D. Smith, 〈기능주의적 혁명이론 비판〉, 김진균 정근식 엮음, 《혁명의 사회이론》 (서울: 한길, 1984), 특히 148~67; 박종성, 《혁명의 이론사》 (서울: 인간사랑, 1991), 156~65 참조. [본문으로]
  21. Horsley, 〈예루살렘의 므나헴―‘젤롯 메시아니즘’이 아닌, 시카리 안에서 있었던 간단한 메시아적 일화〉, 《예수시대의 민중운동》, 247~64 참조. [본문으로]
  22. 《유대전쟁사》 4,145~46에는 젤롯에 의해 구금된 왕족과 귀족들이 일단의 무리에 의해 피살되는 일화를 보도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이 일이 젤롯의 기획된 행동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세습제 대사제직을 해산시키고, 신정제적 평등주의 전통의 소산인 제비뽑기를 통해 대사제를 선출한 것이나(《유대전쟁사》 4,155), 숙청 대상자 선정의 용의주도함(《유대전쟁사》 4,138~42) 및 영향력 있는 고위인사들에 대한 회유와 선무 활동(《유대전쟁사》 4,150)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젤롯은 매우 신중하고 용의주도하게 예루살렘의 대체정부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젤롯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고(《유대전쟁사》 4,151) 결국 사제귀족 중심의 시민군에 의해 이러한 기획이 무산되게끔 한(《유대전쟁사》 4,196~207) 구금자들에 대한 살해는 공식적 명령계통과는 별개로 움직인 사람들의 개별적 행동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비록 요세푸스가 지나치게 단순도식으로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묘사 속에서 우리는 젤롯을 포함한 여러 정파들의 형성이 가족이나 친분 있는 사람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유대전쟁사》 4,132). 그렇다면 조직의 명령계통을 무시한 일단의 살해자들의 행동에는 이런 비공식적인 연결망에 의한 담합이 개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개연성이 있다. [본문으로]
  23. Horsley, 〈예루살렘의 므나헴〉, 특히 258~260 참조. [본문으로]
  24. Horsley, Bandits, Prophets, and Messiahs, xii. [본문으로]
  25. 〈예루살렘의 므나헴〉, 258. [본문으로]
  26. 여기에는 과거라는 시간성이 중요한 기능을 한다. 즉, 과거의 인물이나 사건을 재해석하는 상징적 체계를 해석자/수용자와 동시대적 맥락 속에 재현함을 통해서 계급간의 차이를 꿰뚫는 집합적 기억이 구성되는 것이다. B. Schwartz, “The Social Context of Commemoration: A Study in Collective Memory”, Social Forces 61/2 (1982). [본문으로]
  27. 김진호, 〈예수운동의 배경사를 보는 한 시각―민중 메시아론의 관점에서 본 민중 형성론적 접근〉, 《민중신학》 창간호 (1995), 79~116 참조. [본문으로]
  28. 〈젤롯당: 그 기원과 유다 항쟁과의 관련성 및 그 중요성〉, 202~208. [본문으로]
  29. 같은 논문, 204. [본문으로]
  30. 홉스봄에 의하면, 착취관계는 근대 이전과 근대 양 시기를 관류하지만 계급의식은 근대 산업사회의 발전과 관련되어 계기적 진전이 있었다고 본다. [본문으로]
  31. Theißen, 〈예수의 성전 예언―도시와 시골간의 긴장의 장 가운데서의 예언〉, 김명수 옮김, 《원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172~94. [본문으로]
  32. Hobsbawm, 《원초적 반란》, 132~49. [본문으로]
  33. 이것은 요세푸스가 사제귀족 중심의 임시 혁명정부로부터 갈릴래아 지방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부임하자마자 겪은 이야기로, 그 자신이 이 일화의 주요 등장인물로서, 그 진술 내용이 그의 통치 능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낼 뿐이라는 점에서 신뢰할만한 역사적 정보를 담고 있다고 보인다. [본문으로]
  34. Horsley, 《예수운동》, 135~138.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를 보려면 Douglas E. Oakmann, Jesus and the Economic Questions of His Day (Lewiston/Queenston: The Edwin Mellen Press, 1987), 37~91 참조. [본문으로]
  35. 호슬리는 바리사이를 ‘가신계급’(retainers class)으로 보는데(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17), 이는 게하르트 렌스키의 가신계급에 대한 논의를 바리사이 연구에 적용한 살다리니의 연구를 수용한 것이다. Anthony J. Saldarni, Pharisees, Scribes and Sadducees in Palestine Society (Edinburgh: T&T Clark, 1985), 277~97; G. Lenski, Power and Privilege. A Theory of Social Stratification (New York: McGraw-Hill, 1966), 243~48 참조. 그러나 이 견해는 권력의 수직적 계서체계 상에서의 바리사이의 역할에만 주목함으로써, 그들의 촌락에서의 독자적인 위상을 간과하고 있다. [본문으로]
  36. 상징의 차원에서 포섭과 경계는 정-부정의 체계를 통해 구체화된다. 말리나는 매리 더글라스(Mary Douglas)의 ‘집단-결속 모델’을 성서시대 사회 해석에 적용하여, 그 사회의 상징적 문화적 경계화를 읽어내려 한다. Bruce J. Malina, The New Testament World. Insights from Cultural Anthropology (Atlanta: John Knox Press, 1981) 참조. 이러한 논의는 특히 질병이나 성(性)과 연관된 배제의 메커니즘과, 그러한 가치의 전복으로서의 기적이라는 관점의 연구와 결합되는데, 이에 관하여는 Jerome Neyrey, “The Idea of Purity on Mark's Gospel”, Semeia 35 (1986), 91~128; J.J. Pilch, “Death with Honor: The Mediterranean Style Death of Jesus in Mark”, BTB 25/2 (1995), 65~70 참조. [본문으로]
  37. Lenski, 같은 책, 266~85 참조. [본문으로]
  38. 〈마가복음〉의 용법에서 오클로스는 ‘사회의 일체 자원으로부터 비자발적 배제’로 특징지어지는 집단을 과대대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김진호,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안병무의 오클로스론을 중심으로〉 참조. [본문으로]
  39. 김진호,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이해. 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을 전망하며〉, 《시대와 민중신학》 4 (1997) 참조. [본문으로]
  40. Horsley, Jesus and the Spiral of Violence, 318~26. 이 점에서 마커스 보그는―비록 방법론적으로 역사사회학적 시각을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일상적 진리체계에 대한 도전자로서의 예수 이미지를 호슬리보다 한층 명료하게 펼친다. Marcus Borg, 김기석 옮김, 《예수 새로보기―영 문화 제자됨》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7) 참조. [본문으로]
  41. 〈마가복음〉은 예수의 제자단에는 특화된 내부집단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에 관련된 비밀을 더욱 많이 점유하고 있는 존재로서 기억되고 있다. 한편 마가는 제자단을 ‘열둘’(δωδεκα)이라는 고 부른다. 비록 마가는 이것을 ‘숫자’의 개념으로 혼돈하고 있지만, 전승 자체에서 이들이 숫자의 개념으로서 이해되는 것은 ‘후대’적 층위로 보인다. 사실 유다 전통에서 ‘열둘’은 숫자의 의미를 넘어서 전 민족/민중의 구원/해방을 상징하곤 한다. 또한 아마도 제자들의 숫자는 열 두 명이 넘었던 것 같고, 거기에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이 적지 아니 포함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열둘’은 제자단 전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제자 중의 제자’인 내부집단을 뜻하는 암호였을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42. 〈마가복음〉 3,6은 예수운동의 대중적/공개적 활동의 공간에 있어서 중대한 변화의 계기를 시사하고 있다. 대중활동 공간은 크게 셋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중 3,6 이전에는 촌락의 회당이 주요한 무대였다면, 그 이후는 단 한 차례(나사렛 회당)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회당이 나오지 않는 대신 갈릴래아의 호숫가가 주된 공간으로 나온다. 그 외에 ‘집’도 공개적 활동의 장소였지만, 이곳은 이 구절 전후로 나뉘는 활동방식의 변화와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활용된 공간으로 나온다. 한편, 3,6 이후의 대중을 묘사하는 주요 어휘가 오클로스인데, 이들은 〈마가복음〉에서 회당 안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반면, 호숫가에서 집중적으로 나오며, 이들이 등장하는 곳에는 유난히 창녀, 세리, 거렁뱅이 등이 많이 등장하고, 종/노예/사병 등을 지칭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정보들에 입각해서 나는 오클로스를 ‘비자발적 이탈’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적 집단을 과대대표하는 것으로 보았다. 김진호, 〈민중신학 민중론의 성서적 기초〉 참조. [본문으로]
  43. Werner H. Kelber, 서중석 옮김, 《마가의 예수 이야기》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참조. [본문으로]
  44. Richard L. Rohrbaugh, 〈마가복음서 청중의 사회계층적 위치〉, 《세계의 신학》 96․97 (1996 겨울+1997 봄) 참조. [본문으로]
  45. 안병무, 〈예수사건의 전승모체〉, 《1980년대 한국민중신학의 전개》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본문으로]
  46. 건강관리체계는 신체에 관한 억눌림의 재현체계의 하나로서, 사회적 요인과 분리할 수 없는 억눌림을 개체화하여 재현하며, 사회 구성원 개개인을 억눌림의 과잉분출이나 과잉억제로 나타나는 ‘부정(不淨)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들과 정상적 분출/억제를 실현하는 ‘정결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들로 나눈다. [본문으로]

이 글은 1997년 6월9일 열린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창립기념 심포지엄의 발제원고로(명동 향린교회 향우회실에서), 논평은 김명수 교수(부산신학대학)가 맡았다. 그리고 [시대와 민중신학] 4(1997.12)에 게재되었다. 

이 글은 민중신학의 제3세대의 출범을 선언하는 출사표적 성격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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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이해[각주:1]

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을 전망하며

 

 

 

 

 

 

 

민중신학의 전개를 논하는 데 있어 가장 흔히 활용되는 방법은 세대별 구분법이다. ‘세대라는 말은 분류되는 세대들 간에 연속성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연속성과 차이를 근거 짓는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이것을 하나의 이론적 분류체계로서 명시적으로 제안한 것은 최형묵의 경우가 유일하다.[각주:2] 그에 의하면 시대 상황의 차이에 따른 문제인식의 차이가 그 분류 기준이다. 요컨대 세대별 구분법은 동시대성(contemporaneousness)의 차이에 따른 상이한 문제인식에서 민중신학 담론들 간의 차이가 노정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특정 담론은 (고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와의 분절적 접합(articulation; 이하 절합’)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는 관계론적 사유를 밑바탕에 두고 있는 분류법이다.[각주:3] 이때 외부는 그 특정 담론 외부의 다른 담론들(담론절합)[각주:4] 및 담론 외부의 것, 사건의 집합적 표상인 상황[각주:5]을 포함한다.


이 도표는  주6)에 포함된 것임.


이러한 세대론은 민중신학 연구자의 단지 일부만을 포괄하는 한계가 있으나, 민중신학 전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매우 유용하다. 그 두드러진 특징이란 위에서 말한바 차이와 연속성의 문제다.[각주:6] 여기서는 민중신학이 표방하는 한국적 신학논의에서 (형식 논리상 세대 간에 인식론적 차이가 깊이 깔려 있는 듯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세대를 초월하여 지속되는 계보학적인 연속성(‘한국적 신학주장하는 민중신학 안팎의 다른 연구자군과는 변별적인)에 주목하고자 한다. 박성준은 그러한 한국적이라는 것의 규준(規準)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의 우리의 현실의 삶이라고 말한다.[각주:7] 이것은 오늘이라는 시간성과 한국이라는 공간성, 그리고 우리라는 주체의 문제를 함축하는 개념어다. 여기서 앞의 두 요소는 을 구성하는 시공간적인 사회구성적 요소를 가리키고, 마지막 세 번째 요소는 의 변혁을 추구하는 행위자의 요소를 가리킨다. 이러한 한국적의 규준은 민중신학을 실천이론으로 전개할 이론 내적 가능성을 부여한다.

첫째로, ‘오늘이라는 시간성의 차원을 보자. 흔히 한국적이라는 문제설정은 전통적이라는 것과 친화적 관계로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해는 시간적 과거성=한국적 특성이라는 도식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이런 도식의 신봉자들에게서 시간적 과거의 시점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도대체 어느 시점까지가 한국적특성을 경계 짓는 구분선인가? 여기서 한국적=전통적이라는 이해는 근본적으로 이론 적용의 한계 부분임이 드러난다. 또한 이러한 이해는 전통(과거성)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의 존재론적 본향이라는 검증 불가능한 가정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과거는 영향사적 차원에서 우리와 관련될 뿐(H.G. Gadamer), 그것 자체가 현재 우리의 존재의 특성은 아니다. ‘오늘이라는 우리의 이해 시점은 과거와 미래의 끊임없는 개입(하이데거에 의하면 기획투사’)에 의해 간섭받으면서, 동시에 미래와 과거를 창조적으로 재현하는 시간성인 것이다. 여기서 후자의 차원이 함축된 시간성의 규준은 시간성의 재현을 둘러싼 투쟁의 문제를 이론 내부로 포섭한다. 요컨대 한국적을 논하는 규준을, 과거와 미래의 끊임없는 영향사적 개입(시간의 재현), 그것의 창조적 재현(재현의 시간)이 이루어지는(이 재현을 놓고 경합하는) 오늘이라는 시간성으로 규정하는 것은, 전통의 차원을 이론 내부에서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실천의 문제를 이론의 대상으로 끌어올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다.

둘째, ‘한국이라는 공간성의 차원을 보자. 한국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한국적이라는 공간성은 (고정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무수한 영토적 경계(boundary)의 변동을 거치며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까지의 영토적 경계가 한국적 공간성을 규정하는 분계점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분단이라는 역사의 질곡은 지금 여기에서의 공간성 논의에 결정적인 교란적 요소로 작용한다. 또한 그 경계 내부의 무수한 공간들(지방적 공간)한국이라는 공간성의 단순한 미분적 구성요소가 아니다. 미시적 지방적 공간은 끊임없이 국가적 혹은 민족적 공간으로서의 한국적 공간구성에 개입한다(: 지방색; 지방자치체의 활동 등). 한국이라는 공간성은 영토적 공간 내부를 통합하고, 외부(지역 국가 도시 등)를 내부로부터 분리하는 주도적 역할자인 동시에, 지방의 개입에 의해 그리고 외부의 개입(많은 경우 제국주의적으로 드러나는)에 의해 부단한 공간 재현의 과정을 거친다. 요컨대 한국은 미시공간과 거시공간의 상호관계를 통해 역동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공간이며, 때로는 전체주의적으로 때로는 지방분권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국수주의적으로 때로는 세계주의적으로 등등, 다양한 공간 재현 담론들의 과잉결정적 절합에 의해 구성된 공간이다.[각주:8] 바로 이러한 공간 이해는 한국적이라는 공간성을 고착적이고 고립적이라기보다는 유동적이고 관계적인 실체로서 보게 하며, 나아가 공간 재현을 둘러싼 실천이론의 대상으로서 한국이라는 공간성을 바라보게 해 준다.

셋째, 주체의 문제로 박성준은 우리라는 용어를 쓴다. 물론 그가 말하는 우리란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가 한국적 시공간이라는 사회구성적 요소에 우리라는 실체를 환원시켜버리지 않고 있음을 주목하자. 즉 실천 주체로서의 우리한국적시공간에 의해 반영/투사된 실체가 아니다. 물론 우리라는 주체는 시공간적 구성에 의해 존재 가능성이 제약된 실체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나는 이런 차원의 우리민중 모집단이라고 부른 바 있다.[각주:9] 하지만 동시에 우리한국적이라는 시공간성을 재현하기 위한 투쟁의 장에 서 있는 우리이며, 이 투쟁 전선에서 형성되어 가는 우리. 요컨대 한국적 시공간성을 위한 투쟁의 유동적 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형성적 실체가 바로 우리’, 즉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인 것이다.[각주:10] 그러므로 민중의 문제는 (구조의 반영의 관점에서 포착되는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주체가 형성되느냐의 문제와 관련된 실천이론적 문제설정인 것이다.[각주:11]

이상에서 살펴본 바, ‘한국적이라는 규준에 대한 민중신학의 논의는 그 실천이론의 위상을 시공간의 재현을 둘러싼 투쟁의 장에서 민중이라는 실천 주체의 형성 문제에 어떻게 신학적으로 개입할 것인가라는 과제로 이어지게 된다.[각주:12]

 

 

주지한 대로 계보학적 시각에서 세대론적으로 포착된 민중신학은 각기 동시대의 비판담론들과의 적극적인 연대를 통해 그 담론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 비판담론들은 체제의 배제/박탈 메커니즘으로 특징지워지는 위기구조에 대한 동시대적 위기의식을 담론 형성의 내적 구성원리로 하여 펼쳐졌다. 즉 민중신학의 신학적 특성은, ‘오늘 한국이라는 시공간에 착종되지 않은 채 서구의 신학 사상사적 언어 논리의 회로(언어의 감옥) 안에서만 떠도는, 그 안에서만 한국을 논하고 정치적 실천을 논하며 토착화를 논하는 신학적 오리엔탈리즘, 신학적 식민주의[각주:13]와는 근본적으로 위상을 달리한다. 민중신학이 신학인 것은, 이른바 서구신학[각주:14]이라는 폐쇄적 제의공동체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 한국적 위기구조에 대한 신학적 반성/비판이라는 점에서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이 신학이기 위한 조건은 서구 중심적신학과의 공모 지점을 확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것을 비판하는 탈중심적인(=권력 해체적인) 신학적 논거를 제시하는 데 있다. 그리고 민중신학은 바로 이 논거를 배제/박탈의 메카니즘에 대한 신학의 비평 상실에서 발견했다.[각주:15]

체제는 인간의 권력 욕망의 제도적 구현체다. 여기서 권력 욕망타자(the other)를 지배하고 착취할 수 있는 능력의 추구다. 즉 자아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선을 만들고, 그 외부의 것을 자신의 내면과 외면 세계에서 찾아내어 그것의 존재 가치를 박탈하고 배제함으로써, 즉 타자화하고, 타자화된 대상을 응징함으로써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지향을 말한다. 그러므로 체제는, 체제가 추구하는 제도는 체제에 포섭된 사람들/대상들의 생활양식(Lebensweise: 마르크스; Lebensform: 비트겐슈타인)을 체제의 욕망대로 규제하고자 하고 그것을 위해 훈육하고자 한다.

한편 주류적 신학은 신의 절대타자성을 전제한다. 이것은 인간적 가치 지향의 긍극의 지점에 신이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원죄적 존재인 인간은 이 궁극의 지점에 접근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역으로 인간을 신으로부터 타자화한다. 양자 사이에는 어떤 중립지대도 없다. 그러므로 타자적 존재인 인간은 예외없이 심판의 대상이며, 신의 응징을 받아 마땅한 존재다. 여기서 신의 (절대) 은총이라는, 인간의 요구(소망)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교류의 통로가 일방적으로 제시된다(이 은총은 신의 절대적인 자유의지라는 것이다).[각주:16] 이 은총에 대한 무조건적 승복(믿음?)으로 말미암아 신으로부터 타자화된 존재에서 신의 의사가족(quasi-family)이 된 (신의) 동일자적 존재의 가능성이 제시된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신학적 언술은 위에서 본 체제의 권력 욕망의 변증과 얼마나 유사한가? 바로 그런 선택적 친화성 때문에 정통신학의 언술은 그리스도교 사회인 서구의 가부장적-제국주의적 팽창주의와 맞물리게 된다. 즉 서구사회의 자민족(백인-남성) 중심주의적인 문명 대 야만도식은 그리스도교의 신자 대 비신자라는 배타주의적 도식과 상보적 관계로서 공존의 지배논리를 구성해 왔던 것이다.

체제는 자신의 권력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전형적으로 두 가지 유형의 전략을 펼친다.[각주:17] 하나는 외면적으로 질서의 한계/가능 공간을 구획 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적으로 질서의 한계/가능 공간을 구획 짓는 것이다. ‘외면적 구획억압의 전략이며, ‘내면적 구획양생(養生)의 전략이다.[각주:18]

전자의 경우에 체제는 안보의 총체를 건조(: 바벨탑; 반공주의 등)함으로써 인위적으로 설정한 경계를 가시화하고 계량화하며, 그것으로 다른 경계들을 압도하는 과잉결정의 요소로 제시한다. 이런 안보의 상징물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응징의 체계가 있다. ‘감금과 억압의 장치들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감옥과 학교, 병영, 직장, 심지어는 가정과 교회에서 이런 총체적인 상징을 통해 각 구성원들의 특권을 위계화하고, 거기에 맞는 행위 가능 수칙들이 제시되며, 권위주의적 관계 구조(그것이 계급적 지배의 형태든 가부장적 지배의 형태든 간에)가 형성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경계 외부의 대상을 만들어내고 응징한다(파문종교재판마녀사냥이단시비 등은 이런 전형적 예에 속한다). 이때 응징은 경계 내부에 포섭된 이들에게 공공연히 드러나도록 가해지며,[각주:19] 그럼으로써 외부로 배제된 이들을 내부의 사람들의 적개심(희생양)과 측은지심(보호)의 대상[각주:20]으로 규정짓게 한다.

한편 체제는 양생을 전략을 취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억압의 내면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이 수행되는 공간은 습관 같은 일상의 영역이다. 그것은 인간을 (정신에 비해 가시적 대상인) 신체로 환원하고, 나아가 신체를 계량 가능한 해부학적 대상으로 환원함으로써 수행된다.[각주:21] 그리하여 인간의 규범적 가치는 가시적인 계량적 척도로 환원되어 해석된다. 여기서 시각화된 인간의 규범적 가치의 실행자는 자아이지만, 그 가치의 주체는 타자의 시선이 된다.[각주:22] 즉 권력은 근대 의학적 해부학적 지식으로 말미암아 신체를 통해 인간을 규정할 수 있게 되었고, 이렇게 규정된 인간은 그 규정에 따라 스스로를 권력의 요구에 맞춰 통제하게 되는 것이다.[각주:23] 그럼으로써 인간은, 스스로의 내면에도 외부를 설정하고, 자신을 이원적 세력의 갈등의 장으로 인식한다. 여기서 선-악이라는 사회적 이분법은 내면적 이분법이 되며, 체제의 배제/박탈의 메커니즘은 선-악 이분법 체계에 용해되어 인간 내면으로부터 정당화되며, 체제의 공모자로 인간 개개인을 만든다. 그리스도교에서 죄책고백을 계량화된 신체의 행위로, 즉 제의 양식으로 발전시킨 것은 바로 이런 양생 전략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상의 두 전략은 체제의 두 얼굴이다. 분리할 수 없는 양면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체제의 전략의 주요 작용 지점이 양면에 동등하게 가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근대화를 부르짖으며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전통의 가치를 격하하는 과정에서 전통의 권력 체제가 담지하고 있는 양생의 전략또한 약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각주:24] 여기서 박정권은 억압의 전략에 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제1세대 민중신학의 비판 담론이 주로 외면적 억압에 치중하고 있는 이유가 설명될 수 있다. 즉 정치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각주:25]의 과제가 주로 (인간 외부의) 체제 문제에 집중하게 된 것은 바로 민중신학이 권력의 이러한 성격과의 갈등적 상호관계 속에서 비판담론으로 형성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박정권을 승계한 ‘56정권은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억압의 전략에 의존하면서도, ‘반공과 같은 총체적 안보의 상징물이 상대적으로 위축된 상황에 대한 대안을 필요로 했다. 그 새로운 안보의 상징물이 소비문화의 활성화를 통해 모색되었고, 이로써 소비자본주의가 본격 추동된다.[각주:26] 2세대 민중신학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새로운 비판 유형에 속한다. 공격적 반공주의의 후퇴라는 틈새를 타고,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대항 이데올로기가 물밀듯이 형성되었고, 여기에는 세계 반공주의의 보루인 미국이라는 이미지가 한갓 제국주의의 포악한 얼굴 위에 덧씌워진 가면에 불과했다는 (광주 민중항쟁 이후의) 인식이 한몫 하고 있다. 게다가 소비자본주의의 맹렬한 돌진으로 자본주의적 체험이 보다 전면화되면서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이 고조되었다. 나아가 1987년의 대항쟁, 노동자 대투쟁 등의 거대한 민중저항의 사건 및 ‘6.29’로 표상되는 권력의 후퇴는 비판담론 속에 낙관주의적 사유를 충힐시켰다. 이 시기 민중신학의 대담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모색(특히 물의 신학’)은 바로 이런 상황과 관련된다.[각주:27] 이것은, 이데올로기라는 문제설정을 통해 개개인의 삶을, 가치를 양생하는 체제의 전략에 골몰하던 서구의 마르크스주의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등의 비판담론보다는, 억압적 체제를 대체하고 대안적 체제를 재구성하는 과정의 문제의식이 깊이 반영된 동구 마르크스주의나 북한의 주체사상 등이 주요하게 참조되는 당시의 비판담론의 일반적 경향에 어느 정도 동참하는 모습을 띤다.

이상에서 보듯 제1, 2 세대 민중신학은 체제의 억압의 전략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신학하기를 수행한다. 전통적 신학의 신의 타자성보다는 역사성이 중요시됐고, 이것은 신학이나 종교의 특권적 영역인 가치의 긍극적 성찰구조를 역사학적 사회학적 성찰구조로 환원/양도하는 셈이 되고 만다는, 그리하여 결국은 신학/종교의 위상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나아가 신학/종교가 보장해 주는 성찰의 철저화를 상실하고 사실상 무성찰 상태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해명하기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각주:28] 이것은 지배담론의 진리관을 해체하는 데 주력했던 제1세대 민중신학에 비해,[각주:29] 대안적 진리체계의 구성에 적극적이었던 제2세대 민중신학에 더욱 예각화된 한계 지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를 감수하면서도 과격한 신학적 전환을 모색해야 했던 것은, 체제의 가혹하고 노골적인 배제/박탈의 메커니즘에 정면으로 맞부딪쳐야 했던 정세의 효과에 상응하는 것이었고, 또 그럴 만큼 지배와 도전의 뚜렷한 바리케이드가 형성되는 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이르면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체제의 권력 욕망 실현을 위한 기제 활용의 차원에서 지난 20년의 경험과는 다른, 질적인 전환이 이 시기에 계기지워진 것이다. 바로, (앞서 언급한 대로) 56공에 의해 도입된 소비자본주의화의 물결이 현실적 활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자본운동과는 일정하게 독자적으로 운용되는 이념적 지형의 급속한 변환도 이 시대의 새로움의 또 다른 계기였다. 즉 자본주의적 세계의 견제 세력이라 믿었던 사회주의권의 몰락,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다소 과장스레 평가된 사회주의적 실험의 무모함 내지는 부정성이 지난 시대와의 단절적 계기를 이 시기로 낙점케 하였던 것이다. 이제 지난 시대의 비판담론은 무용지물이 되어 갔고, 새로운 대안적 패러다임에의 요구가 빗발쳤다.

 

 

1980년대 말 한국에서 소비자본주의[각주:30]가 급속하게 전개된 것은 다음 몇 가지 현상과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멀티미디어의 급속한 확산;[각주:31] 둘째, 통신기술과 설비의 급속한 발전과 보급;[각주:32] 그리고 자동차의 급속한 보급과 항공교통의 활성화[각주:33]. 이러한 현상은 시공간의 압착(time-space compression; D. 하비장소귀속탈피성; A. 기든스)을 가속화시켰고, 이에 따라 한국의 일상 지리를 현저하게 변화시켰다.[각주:34] 국가적 민족적 차원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독점적 지위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방적, 지구적 과제와 더불어 분산되었고, 이러한 분산은 자본이 인간 개개인의 욕망의 영역에 직접 개입할 수 있게 된 기술적 발전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이제 자본은 인간의 다양한 기호에 따라 유연하게 생산 체계를 조직할 수 있고 다양한 시장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나아가 인간의 기호를, 그 원천인 욕망을, 그 욕망의 분출구 자체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소비의 공간공간의 소비; A. 르페브르).

이러한 상황은 권력이 취할 수 있는 억압의 효과를 축소시켰다. 무엇보다도 국가적 민족적 차원의 안보의 총체가 발휘할 수 있는 효력이 종전에 비해 심각하게 제약되는 현상이 초래된 것이다. 반면 권력은 양생의 전략을 취하기가 훨씬 용이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멀티미디어는 일체의 정보를 안방에까지 신속하게 배달해 주었고, 이로 인해 인간이 정보를 접하게 되는 것은 미분된 개체로서며, 이 개체로서의 인간이 접하는 정보는 (비대면적인, nonfacible) 화상적 이미지에 의해 과잉결정된 세계였다. 즉 멀티미디어를 통해 개인은 시각적 준거에 의해 규정된 세계와 직접 조우하게 된다. 그리하여 멀티미디어를 통해 전파된 세계의 선과 악의 이분법적 가치는, 그것이 사회에 강제될 때 초래할 수 있는 무수한 위험들로부터 위생처리된 채 개인에게 배달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멀티미디어를 통해 이 정보의 세계와 소통하게 된 개인은, 개인적 성찰의 개입을 거치기는 하지만, 사회적 성찰을 거쳐야 할 필연성으로부터 격리된 시공간적 위상을 지니게 된 것이다.[각주:35] 이와 같이 자본의 침투력은 이제 사람들의 일상에 개입하게 되었고, 권력의 양생술은 상품화된 욕망 속에서 본격 가동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담론 과잉의 시대인 1970, 80년대를 지나, 급작스레 소비자본주의적 담론의 태풍을 맞이한 1990년대의 한국은 마치 정치주의에 대한 문화주의의 보복[각주:36]이기라도 한 양, 탈정치적이고 탈가치적인 문화주의의 격랑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에 탈이데올로기 시대 운운하는 서구 사상의 조류나, 동양적 선() 사상에 대한 서구 중심적인 왜곡의 소산인 오리엔탈리즘의 유입 등이 결합되면서(물론 신학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속류 문화주의는 그 이론적 정당성을 확보하기라도 한듯 소란스럽게 유포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권력이 미치는 영향력은 이제 고전적 의미의 정치 영역(단일국가적 민족적 영토성에 결부된 정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사람들의 일상의 영역을 무대로 하여 작동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운동은 범지구적인 자본 운동과 절합관계를 이루며 전개된다. 이것을 추동하는 기본적 동력이 자본의 욕망의 정치라면, 그리하여 욕망을 상품화한 결과인 문화라는 소비의 범주는 (단순한 비정치적 공간 아니라) 바로 권력의 양생 전략의 무대, 다시 말하면 권력 지배의 무대인 것이다. 여기서 문화와 정치, 경제 등의 분과학문적인 고전적 범주들은 그 해석적 실효성을 상실하고 만다.[각주:37] 한편 자본의 욕망의 정치, 그 양생술은, ‘편집증적인억압의 정치와는 달리, ‘분열증적특성을 지닌다. 그리하여 욕망의 정치는 다면적인 욕망의 분출 가능성을 극단으로 확장함으로써 억압의 정치로부터 봉쇄된 욕망의 해방구의 성격을 갖기도 한다.[각주:38] 결국 욕망의 정치를 통한 권력의 양생 전략은 (그 분열증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동시에 해방적 저항담론의 무대가 된 것이다.[각주:39]


이 도표는 주39)에 포함된 것임.


요컨대 욕망의 정치의 결과인 문화의 영역은 정치적 실천의 무대가 된 것이다. 여기서 문화정치학은 1990년대적 비판담론의 위상학이 된다.

1990년대 민중신학은 바로 이런 시공간적 맥락과 이에 대한 문화정치학적 비평담론과의 관계를 신학하기의 기반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이 신학운동이 지난 제1, 2세대와의 계보학적 관련성을 확보하려 한다면, 그것은 억압의 전략보다는 양생의 전략으로 권력 지배의 중심축이 전이된 상황에서 신학적 비평의 연속성과 차이를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권력의 배제/박탈 메커니즘에 대한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유보한 채, 서구의 신학 담론과의 절합 모색의 길에 뛰어든다면, 그것과의 공조에 최우선의 과제를 둔다면, 그것은 앞서 말한 민중신학의 계보학적 세대구분론과 별개의 분류방식을 필요로 할 것이다.[각주:40]

아무튼 1990년대 민중신학은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하여 욕망을 상품화하고 있는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는 담론을 형성하고, 대항담론의 주체 곧 (역사 주체로서로의) 민중을 형성하기 위해 문화정치학적 비평의 영역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선 비평담론의 시공간을 다면화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스도교 전통이나 교회의 담론에 스스로를 가두어서도 안 될 것이고, 영토적 공간성 차원의 담론 구성에만 매달려도 안 될 것이다. 가능한 삶의 전 공간에 걸쳐 형성된 분절적 시공간의 맥락에서 추구될 수 있는 해방적 가치의 최적화를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수한 이질적인 피박탈대중인 타자들과의 해방적 연대를 요청한다. 정체성 재강화를 목표로 하는 공동체론은 탈이데올로기화되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파시즘화될 가능성이 농후한, 위험천만한 대안일 수 있다.[각주:41]

문화정치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이 실천이론으로서의 적실성을 가지려면, 무엇보다도 타자와의 담론 절합이 가능한 신학적 언술 구조를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신학에서 자아 중심적이고 권력주의적 언술을 성찰적으로 비판하는 것과 결부된다. 가령 신의 (절대)타자성은 기각되어야 한다.[각주:42] 이것은 실체론적 사유에 기초한 문제설정으로, 진리의 문제를 진리담론 외부의 사건적 맥락과 분리시킨 채 로고스 중심주의적이고 자아 중심적인 환원주의에 빠져 버리게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식민주의적 담론 바로 그 자체다.[각주:43] 반면 민중신학의 진리관은 화용론적이고 관계론적인 가능성을 민중신학 전통 내에 담지하고 있다. 비록 제1, 2세대 민중신학이 이 문제를 통찰력 있게 전개하는 데 실패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신 이해를 사건 속의 하느님이라는 논제로 제시한 바 있다.[각주:44] 나는 이러한 시각에서 하느님나라라는 민중신학의 지향을 영원회귀적이면서(과거적 시공간의 지평) 미래전망적 차원(미래적 시공간의 지평)가지고 그때마다의 (현재성의) 시공간에 권력해체를 지향하는 기대의 최대치로서 구체화되는 과정론적 진리체계라고 규정함으로써 관계론적 사유체계로 사건론을 해석한 바 있다.[각주:45] 이러한 규정은 종래 민중신학이 비판받았던 사회학적 환원주의라는 문제제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러한 사건론적 문제제기는 제1, 2세대 민중신학이나 이들의 비판자들이 모두 벗어날 수 없었던 실체론적/개체론적 사유관계론적 사유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재확인할 것은 문화정치학적 민중신학은 신학담론의 일상담론화가 아니다. 이론의 탈이론화가 아니다. 오히려 (비판)이론은, 순수한 의미의 과학일 수는 없으나,[각주:46] 권력의 양생의 전략을 파헤치는, 그 교묘한 은폐를 드러내는 통찰력을 수반해야 한다. 시간과 공간의 현전(presence)과 부재(absence)의 겹침과 꼬임관계를 읽을 줄 알아야 하며, 실천주체 들간의 담론 절합을 위한 담론적 구성의 소통 가능성을 분석할 줄 알아야 한다. 민중신학은 권력해체를 위한 시대 읽기를 부단히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1. 나는 ‘계보학’(genealogy)이라는 용어를 M. Foucault적 함의로 이해한다. 그에게서 계보학이란, 특정 담론을 하나의 중심적 진실에 기초한 일관된 언술체계가 아니라 불연속적이고 전술적인 실천적 구성물로서 보게 하며(‘고고학’적 함의), 나아가 전술적 구성물로서의 담론을 그 (담론) 외부, 특히 제도적 권력 장치들의 효과로서 파악하게 하는 문제설정을 함축한다. 이에 대하여는 계보학적 전개에 대한 Foucault 자신의 요약적 진술인 《권력과 지식》 (서울: 나남, 1991), 특히 제5장 〈권력, 왕의 머리베기와 훈육〉과 푸코애 대한 탁월한 해설서인 Gilles Deleuze, 권영숙 조형근 옮김, 《들뢰즈의 푸코》 (서울: 새길, 1996) 참조. 나는 이러한 시각이 민중신학 전개의 연속성과 차이를 실천적 시각에서 조명하는 유용한 준거틀를 제공해 준다고 본다. 이것은 문헌비교에 의해서만 민중신학의 전개를 조명하려는 통념적 해석들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다. 민중신학을 ‘권력의 그때마다의 표출 양식인 정치적 테크놀러지에 대한 전술적인 담론 구성물’로서 볼 때 비로소 실천이론적 관점에서 민중신학의 전개가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최형묵, 〈그리스도교 민중운동에서 본 민중신학〉, 《신학사상》 69 (1990 여름), 주9) 참조. [본문으로]
  3. 보편적인 불변의 진리관을 강조하는 이른바 ‘실체론적 사유’는 대상과 인식 간의 일치검증 불능(그리고 환원 불가능)이라는 근대적 사유의 한계 지점에서 무너져 버리고, 20세기 이후 관계론적 패러다임이 각 분야에서 대안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한편 민중신학의 ‘사건론’은 행위와 언술의 통합을 사고하는 문제인식을 신학적 사유에 도입한 탁월한 성과물로, 관계론적 사유의 맥락 위에 있다. 특히 이것은 예수담론 분석에서 담론 외부와의 필연적인 연계성을 조명함으로써 예수의 역사성을 재건하려 했던 시도에서 그 방법론적 꽃을 피우게 된다.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김진호, 〈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김진호 엮음, 《예수 르네상스》 (한국신학연구소, 1996) 참조. [본문으로]
  4.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논객들인 Laclau와 Mouffe는 ‘외부’의 문제를 ‘특정 담론 외부’의 담론이라는 차원에서만 배타적으로 보면서 담론들간의 절합에 주목한다. Ernesto Laclau & Chantal Mouffe, 김성기 외 옮김, 《사회변혁과 헤게모니》 (터, 1990), 특히 제3장. [본문으로]
  5. Foucault나 Deleuze는 ‘담론 외부’의 문제를 ‘사건’의 차원에서 묻는다. Michel Foucault, 이정우 옮김,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 1992); Gilles Deleuze, 《들뢰즈의 푸코》 제1장 참조. [본문으로]
  6. 제1세대와 제2세대 민중신학은 담론 자체로 보면 상당한 차이를 노정하고 있다. 제1세대 민중신학 담론에는 반독제를 향한 ‘강한 해체적 지향’이 드러나고 있다면, 제2세대 민중신학 담론은 계급적 제국주의적 지배에 대한 해체적 지향을 계급적 민족적 해방사회를 향한 전망과 결합시킨다. 언술 구성만으로 보면, 그리고 양자의 언술이 각기 불변의 진리관에 기초한 상이한 진리체계라고만 보면 양자간에는 화해할 수 없는 분절이 존재한다. 하지만 사실 양자간에는 이 계보 밖의 다른 민중신학자군과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실천적 유사성이 있다. 즉 다른 민중신학자들이 서구의 주류신학들과의 대화에 더 많이 치중하고 있었던 반면, 이들간에는 (주류신학과의 대화에 천착하기보다는) 각기 동시대의 비판문법과의 대화 과정에 참여하면서 비판적 신학이론 형성에 매진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민중신학의 전개에 관한 이러한 계보학적 주장에 대하여는 나의 논문, 〈‘신학’이라는 배제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이정규 선생의 “민중신학에 대한 초보적 비판”에 대한 ‘초보적’ 비평〉, 《시대와 민중신학》 (1996), 4-8쪽 참조. 아래 도표는 민중신학의 제1세대(‘1970년대적’ 민중신학)와 제2세대(‘1980년대적’ 민중신학), 및 우리 자신의 과제로 주장하는 제3세대 민중신학(‘1990년대적’ 민중신학) 간의 차이와 연속성을 나타낸 것이다. [본문으로]
  7. 박성준, 〈민중신학에 있어서 한국적이란?―민중신학의 한국신학으로의 정립을 위하여〉, 《민중신학》 창간호 (1995), 171. 이 글은 한국민중신학회 제2회 정기총회의 발제 원고를 보완한 것인데, 이 발제 원고에 대한 나의 논평인 〈박성준의 “민중신학에 있어서 ‘한국적’이란?―민중신학의 한국신학으로의 정립을 위하여”를 읽고〉, 《숨》 11 (1994.12‧1995.1 합본호) 참조. [본문으로]
  8. David Harvey가 자본주의의 전개와 맥을 갖이 하면서 세계 각 국가/민족의 공간이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에 의해 탈영토화되고(deterritorialized), 나아가 제국주의적 공간편성 과정에서 재영토화되었다(reterrialized)고 주장한 것은 거시공간이 단위국가적/영토적 공간 구성에 개입하는 차원을 가리킨다. Harvey, 구동회 박영민 옮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한울, 1994), 322쪽. [본문으로]
  9. 김진호,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민중신학 민중론의 재검토〉, 《신학사상》 80 (1993 봄), 28쪽. [본문으로]
  10. 이것은 ‘역사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차원을 ‘민중’으로 재개념화한 것이다. 반면 ‘민중모집단’ 개념은 ‘고난의 담지자로서의 민중’이라는 차원을 가리킨다. 이제까지 민중신학을 포함한 비판적 이론 진영의 대다수는 이 두 차원, 즉 고난의 담지자라는 차원과 역사 주체라는 차원의 이질성/차이를 개념화하지 못했고, 종종 구조환원론적으로 단순 처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비판담론들은 실천이론의 부재를 감수해야 했고, 종종 민중 낙관주의에 빠져서 이론 내부에서 자기 성찰구조를 담보할 수 없게 되었다. 나의 민중 재개념화는 바로 이런 문제점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한편 최근 알튀세리안의 대표적 이론가의 한 사람인 E. Balibar가 ‘노동의 정치’라는 국한적 계급 개념을 지양하면서 복합적 모순관계의 절합과 토픽적 전선을 따라 형성되는 우발적인 저항연합이라는 문제설정을 함축하는 ‘인권의 정치’를 제시하면서, ‘시민’ 개념의 재정의를 시도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문제설정과 친화적이다. 이것은 ‘시민’을 ‘민중’과 대립적인 범주로 생각하는 서경석 류의 정체모를 시민사회론과는 격을 달리한다. E. Balibar,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 평등과 자유의 근대적 변증법〉, 윤소영 엮음, 《맑스주의의 역사》 (민맥, 1991; orig. 1989); 윤소영, 《마르크스주의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문화과학사, 1995)의 제3장 〈‘인권의 정치’를 위한 마르크스주의 전화의 쟁점들〉; 서관모, 〈시민성 개념의 새로운 구축을 위하여―에티엔 발리바르의 ‘인권의 정치’의 문제설정〉, 《경제와 사회》 31 (1996 가을) 참조. [본문으로]
  11. 이상과 같은 시공간적 관점과 행위자의 관점은, 구조와 행위의 이원론적 전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A. Giddens의 ‘구조화 이론’의 문제설정과 맞물리며, 따라서 그의 이론으로부터 사회역사학적으로 보충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행위자의 차원은 구조 외부의 요소가 아니라 구조의 또 다른 측면이라는 것이다(구조의 이중성). 이런 개념화는 한편으로 고착적이고 고립적인 사회 실재관을 극복하고 유동적이고 관계적인 사회/구조 이론을 가능케 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왔고 형성되어 가는 사회에 대한 통시적 조명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사회적 통합(social integration)의 범주인 ‘시공간 일상화’(time-space routinization)와, 체계 통합(system integration)의 범주인 ‘시공간 거리화’(time-space distinction)의 분절과 결합(겹침)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조명된다. 그에 의하면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시공간적 체제와 제도들의 ‘뻗침’이 보다 광역의 시공간에 대한 체제적 통합을 이룩하였음에도 개개인들간의 대면적 상호작용에 기초한 사회적 통합은 협역의 시공간에 한정된 이른바 ‘장소귀속성’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근대의 교통과 통신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맥을 갖이 하여 체제통합의 범주인 ‘시공간 거리화’는 사회통합의 범주인 ‘시공간 일상화’와 겹침 현상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시공간 일상화의 영역은 대면적 시공간(현전, presence)을 초월하여, 무한한 부재의 시공간 속으로의 유영(游泳) 생활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장소 귀속성 탈피’(disembedding) 현상이라고 부른다. 이런 관점에서 기든스는 최근의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사회적 역사적 현상은 모더니티(근대성)의 분절적/이질적 현상이 아니라, 바로 모더니티의 급진화로 본다. Giddens, 이윤희 이현희 옮김, 《포스트모더니티》 (민영사, 1990); 같은 저자, 최병두 옮김,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비판》 (나남, 1991); 같은 저자, “Time, space and regionalization”, in D. Gregory & J. Urry, eds., Social Relations and Spatial Structure (Macmillan, 1985); D. Gregory, “Presences and absences: Time-space relations and structuration theory”, in D. Held & J.B. Thompson, eds, Social Theory of Modern Societies: Anthony Giddens and his Critics (Cambridge Univ. Press, 1989); J. Hauer, 〈구조화이론 등장 이후의 지역지리〉, 손명철 엮음, 《지역지리와 현대사회이론: 새로운 지역지리 논의를 위하여》 (명보, 1990) 참조. 그렇다면 민중신학의 ‘한국적’ 논의가 단지 한국의 특정 시대에 국한되는 신학을 넘어 비판적 신학 담론의 보편적인 대안 패러다임으로서의 위상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것도 그리 무리한 주장은 아니리라. 민중신학의 대안 신학적 패러다임에 관한 나의 견해와 유사한 입장을 박성준의 박사학위논문인 《민중신학의 형성과 전개》(假題; 시대와 민중사, 1997)에서도 볼 수 있다. [본문으로]
  12. 이러한 신학적 과제를, 지난해 열린 한국기독교학회 제25차 학술대회는 ‘탈식민주의 신학’(postcolonial theology)으로 설정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한국기독교학회 엮음,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 시대의 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6) 참조. 하지만 Linda Hutcheon의 고민처럼(〈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상황: 산적한 난제들〉, 《외국문학》 43, 1995년 여름호) ‘탈식민주의’라는 문제설정은 모든 배제주의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피식민 민족의 토착성이라는 시각으로 과잉통합하는 (환원주의적) 경향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제국주의 대 탈식민주의’라는 담론적 경계가 탈식민주의 진영의 권력 관계를 왜소화하는 ‘이론 내적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학회 학술대회의 발표 논문인 E.S. Fiorenza의 〈해석의 에토스: 탈근대적‧탈식민적 상황〉, 《신학사상》 95 (1996 겨울)은 ‘권력’을 문제시하는 ‘포스트모던’과 ‘식민성’을 문제시하는 ‘포스트콜로니얼’ 간의 적절한 접맥에 실패하고 있다. 반면 ‘민중신학’에 가능성으로 내장된 ‘권력해체적 문제설정’은―비록 그 가능성이 발전적으로 이론화되지 못한 채 모호한 ‘선문답’만을 되풀이하여 왔거나 혹은 너무 쉽게 탈권력을 경제결정론적 계급 착취와 동일화하려는 경향이 있어 왔음에도―박성준의 문제제기에 따라 시공간적 거리를 극복하는 간주간적 주체 형성 문제를 전면화한다면, 비판의 자아 중심주의(ego-centrism)를 극복하는 성찰적 비판(reflexible critic)으로서의 ‘신학 하기’를 향해 열린 이론 내적 구성을 갖는다. [본문으로]
  13. 이런 점에서 Edward W. Said에 의지해서 탈식민주의적 신학을 역설하는 강남순의 논문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탈식민주의 시대의 신학〉,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 시대의 신학》은 주목할 만한 문제제기다. Said, 박홍규 옮김,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1996) 참조. [본문으로]
  14. 서구의 신학 일반이 아니라,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신봉자들의 뇌리에 각인된 ‘서구신학’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15. 사변으로 끝나는 신학이 아니라, 실천이론으로서의 ‘신학하기’를 추구하는 신학이라면, 사회-역사적 문제인식에 개입할 줄 아는 이론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것을 신학적 사고로 재기술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연구자가 사회역사학적 이론에 무지하다는 것은 민중신학자다운 변명이 못된다. 오히려 그것은 민중신학자이기를 포기하고, 신학 ‘내적’(?) 담론 안에서만 세계를 이해하는, 단순한 사변적 신학자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본문으로]
  16. 한국의 토착화신학 제2세대의 탁월한 논객의 한 사람인 박종천은 민중신학에 대한 하나의 문제제기로 민중신학의 ‘신학적 보편성의 결여’를 제기한 바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신과 인간/세계 간의 상호성’ 문제를 (토착화신학의 고전적 모델이 전자, 즉 신에로 과잉 귀속시키는 한계가 있었다면) 민중신학은 양자를 평면화(합류)시키는 ‘오류’를 범함으로써 “종교개혁적 전통과의 무리한 단절”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보면서, 이것을 그는 ‘기초주의’의 소산이라고 비판한다. 이렇게 양자를 비판하면서 그가 제안하는 대안은 ‘해석학적 대화 모델’(즉 관계론적 사유)을 도입하여 한국적인 신학적 비판이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보편성’이라는 것은 “‘선행하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확인이다. 여기서 그의 주장은 결정적인 한계에 봉착한다. 즉 그의 관계론적 대화 모델은 이 지점에서 작동을 멈춰 버리고 마는 것이다. ‘기초주의’라는 말은 본래 환원주의, 즉 대상들간의 관계에서 우선성을 선험적으로 전제하는 논리틀을 비판하는 말인데, 그는 ‘전통’을 빙자해서 스스로 기초주의로 회귀하고 있음에도, 도리어 ‘합류’라는 민중신학의 대화모델적 개념을 기초주의라고 비판한다. 박종천, 〈신학하는 일에서의 보편성과 당파성 문제〉, 《신학사상》 65 (1989 여름) 참조. 신학의 전통이라는, 고립된 사상사적 궤도를 비판할 줄 모르는 논객들의 이와 같은 논리는, 설사 대화모델이라는 ‘간학문적 패러다임’을 수용한다 하더라도, 이처럼 뒤죽박죽의 혼란스런 논변들을 난사할 뿐이다. [본문으로]
  17. 이하의 논의는 M. Foucault의 견해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본문으로]
  18. 여기서 A. Giddens의 권력의 작동 방식에 관한 견해를 간략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의 견해가 Foucault의 관점을 사회학적인 차원에서 상당부분 보완하는 효과를 가지며, 동시에 민중신학의 이론적 발전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의 주 11>과 연이어서 참조하면 Giddens의 견해를 보다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에 의하면, 행위자들의 상호행위가 일어나는 시공간적 맥락(setting)을 상호행위의 시각에서 보면 ‘사건’으로 규정할 수 있고, 물리적 장소의 시각에서 보면 ‘현장’(locale)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상호행위 속에서 권력 관계를 포착하기 위해 현장의 내적인 분할(지역화, regionalization)에 주목한다. 전방지역(front region)과 후방지역(back region)으로의 분화가 그것인데, 전자는 사회적 규범과 권력관계에 따라 개인의 일상이 규제되는 지역을 말하며, 후자는 개인이 자율적으로 의미화할 수 있는 지역을 말한다. 가령 노동하는 시공간이 전형적인 전방지역이라면, 여가를 누리는 시공간은 전형적인 후방지역이다. 하지만 전방지역 속에서도 후방지역이 존재할 수 있으며, 반대로 후방지역에까지도 통제를 가능하게 하는 통치의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것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권력의 이러한 통치의 기술은 ‘감시’(surveilance)의 장치를 통해서 수행되는데, 감시 장치는 행위자를 권력 앞에 노출(disclosure)시키려 하고, 반대로 행위자는 감시 장치에 은폐/차단(enclosure)되고자 한다. 요컨대 권력은 감지의 장치를 통해 후방지역을 노출시키려 하고, 행위자는 감시장치에서 은페된 후방지역을 창조하려 한다. 바로 이러한 권력과 권력에 예속된 대중이 갈등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즉 투쟁하는 시공간적 장이 바로 현장인 것이다. Giddens, “Time, space and regionalization”; 같은 저자,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비판》 특히 제7장 참조. 이것은 권력의 작동에만 초점을 두는 Foucault의 견해를 시공간 패러다임을 통해 권력과 탈권력의 상호투쟁이라는 차원으로 보완하고 있으며, 민중신학이 말하는 반권력적 투쟁의 공간으로서의 현장이라는 관점을 사회이론적으로 보충하고 있다. [본문으로]
  19. 고대에 이런 공공연함이 십자가형 같은 잔혹극으로 실행되었다면(Michel Foucault, 박홍규 옮김, 《감시와 처벌―감옥의 탄생》 <강원대출판부 1993> 특히 제2부 참조), 오늘날에는 전자파 같은 대중 매체를 통해 공개된다. 전자는 일상에서 분리된 축체의 형식을 빌리게 되지만, 전자파 시대에는 축제 자체가 일상화된다. 한편 교회의 예배는 자신에 대한 ‘자발적인 처형’과 ‘외부로부터 선사되는 부활’에 대한 상징행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잔혹극을 극복하는 축제의 일상화에 성공한 탁월한 통합의 테크닉이다. 교회의 장기지속적 생존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본문으로]
  20. 보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주체적 의사 표현을 억제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가령 공민권을 제한받는 범죄자들, 미성년자들이 그런 경우며, 여성에게 비명시적인 제약이 가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본문으로]
  21. ‘정신-신체’라는 이원도식적 사유의 전제하에서, 정신이 상대적으로 비가시적 차원을 함축한다면 신체는 가시적 차원, 즉 계량 가능한 차원을 나타낸다. 여기서 신체의 계량 가능성은 신체의 해부학적 미분 과정을 통해 보장된다. 이러한 신체로 환원된 인간에 대한 이해는, 특히 근대에 이르면, ‘과학’에 의해 근대적 사유 가능 영역으로 표상되며, 나아가 과학만이 배타적으로 인간을 진정하게 규정할 수 있다는 과학 만능주의적 사고 경향과 맞물린다. [본문으로]
  22. 1791년 공리주의자 J. Bentham이 설계했다는 ‘판옵티콘’(panopticon, 전체투시감옥)에 대한 Foucault의 해설은 타자의 시선에 의해 자아를 스스로 규제하게 하는 권력의 양생 메카니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책,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 제3부 제3장 참조. [본문으로]
  23. Foucault는 이것을 ‘생체권력’(bio-power)이라고 부른다. 이 개념은 그의 책, 이규현 옮김, 《성의 역사. 앎의 의지》 (서울: 나남, 1992), 150쪽에서 처음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본문으로]
  24. 특히 도시화 과정은 가치의 아노미를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본문으로]
  25. 권력을 문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중신학은 정치신학이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26. 정부에 의해 내수시장의 활성화가 공공연히 조장되었고, 이런 소비의 활성화는 올림픽이나 스포츠의 프로화, 부동산 투기 등을 매개로 과소비 급증현상을 야기하여 거품경제를 낳는다. 한국의 소비자본주의화에 관한 주목할만한 연구로 최홍준, 〈1980년대 후반 이후 문화과정의 정치경제적 조건과 도시적 경험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계획학과 석사학위 논문(1993.8), 제5장 1절 참조. [본문으로]
  27. 민중신학의 마르크스주의적 모색은 당시의 청년학생운동권을 비롯한 사회운동세력 일반의 마르크스주의적 경향과 맥을 같이 한다. 여기서 빼 놓을 수 없는 점은 1970년대 중후반 이후, 특히 1980년 이후 보다 활발하게 전개된 비공개 운동조직 내에서의 문제의식의 성장을 들 수 있다. 또한 1983년 정두환 정권의 ‘학원자율화 조치’ 등으로 특징되는 이른바 유화국면과 발맞추어 대중적이고 공개적인 운동적 문제인식의 비약적 발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조희연, 〈80년대 사회운동과 사회구성체논쟁〉, 《한국사회구성체 논쟁(1)》 (서울: 죽산, 1989) 참조. 이러한 운동권 내부의 성숙은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변혁론적’ 이론 및 논쟁을 야기하는데, 제2세대 민중신학은 EYC, KSCF 등 그리스도교 청년운동단체의 이러한 변혁론적 문제제기에 대한 민중신학 연구자들의 응답으로 시작된다. 그 결과 제2세대 민중신학의 첫 포문을 연 글인 박성준의 유명한 논문 〈한국기독교변혁과 기독교운동의 과제〉, 《전환―6월 투쟁과 민주화의 진로》는 1987년 출간되고(이 글은 1986년 KSCF 강좌에서 초고가 발표된다), 제2세대의 가장 탁월한 논객인 강원돈이 ‘물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문헌적으로 처음 사용한 것도 비슷한 시기인 1988년이었다. 그의 글 〈물의 신학. 물질적 세계관과 신학의 한 종합(1)〉, 《신학사상》 62 (가을호) 참조. [본문으로]
  28. 지금까지의 민중신학에 대한 비판의 대다수는 바로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본문으로]
  29. 바로 이러한 해체성의 징후는 동시대 서유럽에서 전개된 포스티즘적 사유들과 일면 유사성을 띤다. 이러한 점에서 민중신학의 ‘해체성’을 언급한 Sundermeier의 평가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T. Sundermeier, 〈삶과 증언으로서의 민중신학〉, 《신학사상》 83 (1993 겨울) 참조. 단 양자는 발생-전개 맥락에 있어서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이 더욱 두드러진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한국의 (1970년대보다는) 1990년대의 사회 역사학적 맥락이 서구의 1960년대말-70년대의 맥락과 상대적으로 높은 유사성을 갖는다. [본문으로]
  30. 나는 소비자본주의라는 애매한 용어를 차용하고 있는데, 이 용어에서 함축하고 있는 바는 Lefebvre가 ‘공간의 소비’(consumption of space)라고 부르는 근대적 소비공간의 극단화된 형태가 본격적으로 발현되는 자본운동의 사회다. 이러한 소비공간의 지배원리는 ‘욕망’이며, 이때 자본은 바로 이 욕망 자체를 상품화하려 한다. A. Lefebvre, 박정자 옮김, 《현대세계의 일상성》 (세계일보사, 1990); 이상헌, 〈자본주의 소비공간의 근대성과 탈근대성〉, 《세계화시대 일상공간과 생활정치》 (대윤, 1995) 참조. 한편 최홍준에 의하면, 산업구조조정이 시작된 한국의 1980년대 이후 내구소비재 중심의 중화학 공업의 국내적 생산 기반이 현저히 확대되었고, 특히 1985년 말부터 1988년 중반까지 약 3년간의 이른바 ‘3저호황’을 타고 내구소비재 생산능력이 급속도로 발전한다. 또한 1987년부터 전개된 대대적인 노동자 대투쟁은 일부 노동계층의 생활능력을 상당히 향상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이 3저호황 이후 급속히 찾아온 수출둔화 위기를 전기‧전자제품과 자동차 등 내구소비재의 확대를 통해 극복해보려는 정부와 자본측의 전략과 연결되면서 국내의 소비시장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최홍준, 〈1980년대 후반 이후 ⋯〉 참조.. 이렇게 하여 전개된 공간 지형의 축소는 한국의 자본주의가 욕망의 상품화로 특징지워지는 ‘공간의 소비’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31. 이것은 문자기호의 주도권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화상기호의 영향력을 극대화시켰다. 이제 정보는 저장/축적되기보다는 소비/유통되는데 초점이 맞추어졌고, 사람들의 경험도 분석과 해석을 통하기보다는 순간성, 이미지성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컴퓨터 통신은 정보 유통의 중요성이 정보 축적의 중요성을 앞도하는 가장 두드러진 예라 할 수 있다. 또 광고산업의 급속한 확산이나 王家衛류 영화의 흥행 대성공, IQ보다 EQ의 중요성 강조 현상 등은 순간성. 즉흥성, 이미지성이 부각되는 징후를 보여준다. [본문으로]
  32. 전화는 이제 가족단위의 소유물이 아니라 개인 휴대품이 되었고, 전화를 통한 소통의 영역은 광통신이나 위성통신을 통해 지방적(local)이거나 지구적(global) 차원에서 훨씬 용이해졌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를 통한 정보의 유통은 국가적, 민족적 차원의 전통적 소통 단위를 크게 약화시켰다. 국가 차원의 안보라는 차단막을 월장할 수 있는 수단은 전에 비해 대폭 확대된 것이다. [본문으로]
  33.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예상 밖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나, TV 프로에서 지방 사투리의 사용이 활발해진 것 등은 지방성이 한국적 시공간 형성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TV에서 앞다투어 해외여행 프로를 기획 방영하는 것이나, CNN, BBC, NHK의 외국방송을 안방에서 동시통역가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게 된 것 등은 지구성이 한국적 시공간 형성에 더욱 중요한 위상을 획득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러한 지방적(local), 지구적(global) 개입의 통로가 국가를 매개로 해서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으로 바로 개입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이제 한국적 시공간 구성은 국가적, 민족적 시공간의 위상 격하와 더불어 훨씬 복합적이고 다원적으로 사람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지구지방화(glocalization)에 대한 민중신학계의 반응에 대하여는 최형묵, 〈지구화 시대의 경제정의〉,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22 (1995 가을); 김진호, 〈지구화 시대의 정의: ‘말’이 통하는 세계를 향하여〉,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21 (1995 여름) 참조. [본문으로]
  34. 강내희, 〈대중문화, 주체형성, 대중정치〉, 《문화과학》 6 (1994 여름), 특히 114쪽 참조. [본문으로]
  35. 이때 개인은 사회로부터 분리된/분리될 수 있는 실체로서 인식된다. [본문으로]
  36. 심광현, 〈지정학적 실험과 문화정치적 실천의 전망〉, 《문화과학》 6 (1994 여름), 75쪽. [본문으로]
  37. 그러므로 Wallerstein은 분과학문을 넘어서는 일종의 통합과학으로서의 ‘역사적 사회과학’을 주장한다. I. Wallerstein, 성백용 옮김,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19세기 패러다임의 한계》 (창작과비평사, 1994), 341-42쪽. [본문으로]
  38. 소비자본주의의 문화 상품화의 주된 타겥이 기성의 지배담론에서 소외계층인 여성이나 미성년자라는 사실은 자본으로 하여금 지배코드로부터의 ‘일탈’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전통적 욕망 분출 방법인 계급적 민족적 저항의 코드를 분산시키는 효과를 갖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전에는 억제되었던 욕망 분출을 조장하여 지배적 코드 또한 교란시키는 효과를 조래했던 것이다. 소비자본주의화가 갖는 적극적인 가능성에 대하여는 강내희, 〈대중문화, 주체형성, 대중정치〉 참조. [본문으로]
  39. Gilles Deleuze & Félix Gattari, 최명관 옮김, 《앙띠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대우학술총서‧번역 66 (민음사, 1994), 특히 제9장 참조.; 또한 신현준, 〈들뢰즈/가타리: 존재의 균열과 생성의 탈주〉, 《철학의 탈주》 (새길, 1995) 참조. 다음은 Deleuse와 Gattari의 권력의 진화에 대한 견해를 도표화한 것이다. [본문으로]
  40. 여기서 나는 정상준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첨부할 필요를 느낀다: “다원주의는 다양성을 전제로 삼지만 이 전제가 권력과 현실적인 사회관계를 소흘히 하는 다원주의 경향과 결합될 때 이 다원주의는 매우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게 된다.” 정상준, 〈문화적 다양성과 다문화주의〉, 《외국문학》 43 (1995 여름), 91쪽. [본문으로]
  41. Iris Marion Young, “The Ideal of Community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 in Linda J. Nicholson, Feminism/Postmodernism (Routledge, 1990); David Harvey, 〈공간에서 장소로, 다시 반대로―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 대한 성찰〉, 《공간과 사회》 5 (1995 봄); 김진호, 〈‘공동체론’적 경향의 대안에 대한 대안. 민중신학 사랑방의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 모색: ‘예수살기 모임’을 중심으로”을 참관한 뒤의 하나의 단상〉, 《숨》 27 (한국민중신학회; 1995.6) 참조. [본문으로]
  42. 성서에서 야훼는 절대타자적 존재로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신상을 끊임없이 해체한다. 신은 지속적으로 인간과의 관계망 속으로 개입해 들어오려 하며, 언제나 말건냄의 ‘관계적 실체’로 등장한다. 신이 독백하는 장면 조차도 말건냄의 한 양식으로 나타나며, 외형상 신의 타자성이 부각되는 장면도 소통의 단절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재건을 추구하는 맥락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한 신학의 절정이 예수 메시아론이다. 예수 메시아론은―외형상 가장 타자성을 강조하는 듯이 보이는 요한복음서의 예수로고스론의 경우도 마찬가지로―인간(및 세계)와의 소통의 맥락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런 소통의 형식은 창조주나 전능자의 맥락이 아니고 그것의 부정, 즉 해체를 통해서 수행된다. 따라서 신 존재 문제에 대한 성서의 묘사는 개체론적 분석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오히려 신은 관계론적 사유를 통해, 즉 인간과의 관계의 맥락을 통해서 규명되고 고백될 수 있을 뿐이다. [본문으로]
  43.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진리란 특정한 생활형태와의 끝없는 상호관련 속에서 형성되는 언어게임 내부의 진리효과인 것이다. Wittgenstein, 이영철 옮김, 《확실성에 관하여》 (서울: 서광사, 1991) 참조. [본문으로]
  44. 안병무,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한국신학연구소, 1989) 참조. [본문으로]
  45. 김진호, 〈역사의 예수 연구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예수 르네상스. 역사의 예수 연구의 새로운 지평》 (한국신학연구소, 1996), 263쪽. [본문으로]
  46. 그런 과학이나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데올로기적 이론, 이데올로기적 과학만이 있을 뿐이다. [본문으로]

이 글은 2018년 2월22일에 열린 제2회 외국어대학교 법학연구소 종교와 법 센터 학술대회 '기독교와 법'에서 발표된 글을 수정보완해서 [외법논집] 특별호(2018 5)에 기고된 것입니다.


새로 보탤 내용이 있네요. 조금 전 외대 법대 종교와 법 센터 소장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2018.04.23), (1) [외법논집] 편집위원회에서 논의한 결과 법학논문이 아니니 게재를 못하게 되었다는 것, (2)대신 센터가 펴낼 단행본에 싣는 걸 허락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글이 학술지에 실리는 것에 탐탁지 않아서 애초에 게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을 전한 바 있기에, 조심스레 말씀하신 소장님께 아쉬움도 유감도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되었고요. 학술지는 그 분야의 연구업적이 필요한 분이 기고하고, 그 분야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이 그것을 읽고 참고하는 매체일 듯합니다. 그런 관련성이 전혀 없는 제 글이 여기에 실리면 필경 아무도 읽지 않는 천덕꾸러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름 소중하게 쓴 글인데, 태어나자마자 사망신고하는 것이 아쉬워서 게재를 꺼려했던 것이지요. 아무튼 다행입니다. 센터가 만드는 단행본에 실어도 되느냐는 소장님의 말씀에 기꺼이 동의했습니다. 그러니 위에서 이 글을 [외법논집]에 게재한다는 앞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게 되었음을 밝힙니다. 다른 출처는 추후 공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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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력세습과 후발대형교회

신귀족주의적 권력의 종교적 장치에 관하여

 

 

 


 

 

현황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교회세습의 문제적 전형을 보여준 원형적 사례로 충현교회의 담임목사 세습이 꼽힌다.[각주:1] 세습이 단행되던 1997년 김창인은 은퇴한 원로목사임에도 전권을 휘둘러 교인총회인 공동의회를 주도하여, 담임목사 선출 방식을 일반적 관행이던 무기명 투표로 하지 않고 찬반기립의 방식으로 진행함으로써 아들의 담임목사 청빙을 단행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해서 막강한 파워엘리트가 즐비했고 세습 당시 재적 신도수가 35천 명이 넘었으며 2012년 현재 총자산이 2조 원 정도나 될 것으로 추정되는 초대형교회에서 그 모든 것을 법적으로 총괄하는 담임목사가 된다는 것은 거대한 종교권력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후 이 교회에서 벌어진 사태들은 목사의 혈통적 교회세습의 부정적 양상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편법선거로 담임목사가 된 아들과 원로목사임에도 교회 운영에 손을 떼지 못하는 아버지 간의 반목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사태들이 잇따랐다. 취임한 지 3년도 못된 20001월에 담임목사에 대한 테러사건이 발발했고, 그 혐의로 장로 9명이 불구속 입건되어 경찰의 수사를 받았다. 아들목사는 아버지와 그를 따르던 장로들이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단정하면서 원로목사에 대한 교회의 지원을 끊었고 장로 8명과 안수집사 5명을 출교시켰다. 그러나 그것으로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다. 내부고발자 없이는 좀처럼 드러날 수 없는 교회재정의 횡령, 유용 사건들이 폭로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교회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그 결과 교인은 1/3로 줄었다.

물론 목사의 혈통적 세습을 단행한 것에 대하여 그 교회의 교인들이나 외부로부터 긍정적 평가가 더 많은 경우도 없지 않다. 또 정상적 권력교체가 이루어진 경우라고 해서 교회가 잘 운영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혈통적 세습은 교회 안팎으로부터 정당성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충현교회가 혈통적 교회세습의 문제점을 선행적으로 보여준 이후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많은 교회들에서 혈통적 교회세습이 잇따랐다. 특히 주목할 것은 2천 년대부터 많은 중대형교회[각주:2]들에서 혈통적 목사세습이 연이어 단행되었다는 점이다.[각주:3] 물론 혈통적 목사세습은 중대형교회나 초대형교회[각주:4] 현상만은 아니다. 많은 중소형교회들에서도 특히 2천 년대 이후 교회세습이 속출했다.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이하 세반연’)에 따르면 20171110일 현재 143개 교회가 혈통적 세습을 단행했다.[각주:5] 이는 제보된 것을 조사하여 확인된 것에 한정된 숫자인데, 계속 신고를 받고 있어 그 수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감리교세습반대운동연대(이하 감세반연’)20171022일에 발표된 보고서[각주:6]에 따르면 감리교회에서만 세습을 실행에 옮긴 교회가 무려 194개나 된다. 또 이 두 단체들의 자료에다 독자적으로 신고를 받아 만든 뉴스앤조이의 세습지도에는 201813일 현재 350개가 포함되었다.[각주:7]

이렇게 세 기관의 리스트에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고에 의해 접수된 것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 감리교 단체인 감세반연의 경우 세반연보다 세습의 기준을 좀더 폭넓게 적용한 것도 오차를 설명하는 데 있어 참조할 만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세반연“‘교회세습이란 지역교회와 교회 유관기관에서 혈연에 의해 발생하는 대물림을 지칭한다고 규정하면서, 부자세습과 사위세습, 그리고 변칙세습양태인 교차세습[각주:8], 지교회세습[각주:9], 징검다리세습[각주:10] 등을 다루고 있다.[각주:11] 그런데 감세반연한 교역자가 담임자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혈연 및 이해관계에 있는 또 다른 교역자를 담임자로 세우는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동서에게, 조카에게, 형제간에, 그리고 변칙세습으로 사위교차 세습형태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각주:12]세반연조사에 누락된 경우들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그런 교회들은 아직 업데이트되는 중이어서 좀더 많이 포착될 것이 분명하다.

숫자 통계가 아직 완성도가 낮은 탓에 엄밀한 추정은 불가능하지만, 교단별로는 감리교단 소속교회가 가장 많다는 점은 개연성이 높다. ‘세반연감세반연의 자료에다 독자적인 정보를 취합한 뉴스앤조이의 결과에 의하면 전체의 50% 이상이 감리교단에 속한다.[각주:13] 지역별로는 거의 70%에 육박하는 세습교회들이 서울인천경기도 등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각주:14] 규모별 추정은 좀더 어렵지만 교인수 100~500명 사이가 43%, 500~1,000명이 26.1%로 제일 많은 것으로 추산되었다. [각주:15]그러나 이 추정치만으로 100~500명 규모의 교회가 세습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는 단순한 가정은 문제가 있다. 이 자료가 유의미하려면 무엇보다도 전체 교회 가운데 이 규모의 교회들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비교해서 살펴야 한다. 뉴스앤조이의 조사결과로만 추정해보면 혈통적 세습이 가장 심각한 곳은, 100~500명 규모의 교회가 아니라, 대형교회로 보인다. 이 조사에서는 재적인원의 범주를 6개로 나누었는데(100명 미만 / 100~500/ 500~1000/ 1000~5000/ 5000~10000/ 10000명 이상), 이중 대형교회들인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에 속하는 교회들 중에도 대형교회들이 일부 포함되었을 것이다.[각주:16]





해서 대형교회 중 혈통적 세습 교회 숫자 추정치를 [+]+[×1/2]로 계산하면 21 혹은 22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세습교회 전체 숫자인 350으로 나누면, 세습교회 중 6% 정도가 대형교회인 셈이다. 2004년에 추산한 전체 교회 중 대형교회의 비율은 1.7%, 880개 정도다.[각주:17] 한데 2004년 전체 교회수는 51,775개소인데, 2011년에는 무려 77,966개소다. 2005년과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의 개신교 신자수가 약 15% 증가한 반면 문화체육관광부의 2004년과 2011년 조사의 개신교 교회수가 무려 50% 이상 증가했다는 것은 전체 교회 대비 대형교회의 비율이 1.7%보다 훨씬 낮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혈통적 세습 현상이 대형교회에서 압도적으로 많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2천 년대 이후 혈통적 교회세습 현상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2) 교회세습이 가장 극심한 곳은 수도권이다. (3) 대형교회가 중소형교회보다 더 세습 현상이 심각하다. (4) 교파별로는 감리교단에서 더 혈통 세습의 문제가 심각하다.

 


해석

 


말했듯이 2천년 어간 이전까지 교회세습은 별로 주목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1997년 충현교회를 시발점으로 하여 2천 년대 이후 특히 여러 대형교회들에서 세습이 단행되자 개신교계 안팎에서 이 문제는 핫한 이슈가 되었다. 그런데 왜 2천 년대인가? 이것이 첫 번째 논점이다.

우선 혈통적 교회세습을 단행한 교회는 전체 교회 중 0.5% 이하로 추산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밝힌 개신교 교회는 2011년에 77,966개소다. 여기에는 군소교단들을 제외한 118개 교단의 교회만 포함된다. 그러니 실제 교회수는 좀더 많을 것이다. 또 최근 개신교 교인 수는 증감을 반복하고 있지만, 교회수는 모든 통계에서 거의 예외 없이 증가 추세에 있다. 그러므로 20181월 현재 교회수는 2011년 문광부 집계보다 훨씬 클 것이 분명하다. 한편 혈통적 교회세습을 단행한 교회는 현재까지 최대 350개소다. 교회 세습을 다루는 세 기관이 계속 신고를 받고 있으니 이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성교회 세습 사태 직후 신고건수가 갑자기 크게 늘은 것을 감안하면[각주:18] 이후에는 증가폭이 줄어들 것이 예측된다. 그런 점에서 35077,966으로 나누어 계산한 0.45% 어간에서 큰 차이는 없을 것 같고, 그것보다 훨씬 높게 잡은 가정치인 0.5%는 아마도 거의 최고 추정치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것은 교회세습이 결코 개신교에서 일반적 현상이 아님을 뜻한다. 그럼에도 세습을 한 교회들이 존재한다. 도대체 어떤 교회들이 세습을 하는가? 김동호 목사는 목사가 힘이 센 교회는 목사가 절대군주처럼 교회에 군림하고 하나님을 빙자하여 제 마음대로 교회를 주무르고 있다. 심지어는 그것을 자식에게 세습까지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각주:19] 즉 목사가 교회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한 경우 그가 의도하면 혈통적 세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근데 그 비율은 0.5%, 2백 명의 1명꼴이 못 된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목사가 교회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경우도 있으며, 세습을 하지 않은 99.5% 이상의 교회들 가운데는 세습을 할 수 있을 만큼의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음을 시사한다.

김동호는 이 발제글에서 그런 교회를 묘사하기를 장로가 더 힘 센 교회라고 말한다. 이것은, 교회를 교회정치의 차원에서만 보면, 목사와 장로 사이의 주도권 경쟁의 장이며 그 싸움에 끼어든 다른 주체는 별로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하나 더 얘기하자면, 힘이 한 편으로 명확하게 기울어지기보다는 양자가 담합한 경우가 있겠다.

여기서 목사 대 장로의 상호견제를 강조하는 교회제도는 장로교 계열[각주:20]의 교회정치제도다. 이것은 당회를 둘러싼 주도권 경쟁으로 나타나는데, 당회는 담임목사와 장로로 구성되어 있는 장로교 계열 교회의 사실상의 최고 정치기구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의 상징적 중심인 목사와 사실상의 교회의 고용주인 장로가 당회 안에서 헤게모니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로교 목사인 김동호의 장로교식 교회정치에 관한 해석은 한국개신교 일반의 현상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장로교 계열 교회의 교인수가 한국개신교 교인의 69%나 되기 때문이다.[각주:21] 그뿐 아니라, 한국의 다른 교단들도 장로교식 장로제도를 부분적으로 혹은 거의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감독제 교회들인 감리교와 성결교, 회중교회 전통의 교회인 침례교, 그리고 카리스마적 리더의 독점적 지배를 강조하는 오순절계열(순복음계열)의 교회도 장로교식 장로제도를 수용하는 등, 많은 교단들이 장로제 제도를 부분적 혹은 전면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는 거의 모든 교단들이 특권적 신자의 영향력을 제도적으로 반영한 결과겠다.

목사의 권력이 더 강한 교회들을 보여주는 두 번째 요소는 담임목사의 교회 재직 기간이 매우 긴 경우다. 파송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감독제 계열의 교회들이든 청빙제도를 강조하는 장로제 계열의 교회들이든 1970년 어간 이전까지는 그 교회의 재직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 이후에는 20년 이상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재직하는 이들이 많았다.[각주:22] 이런 교회들은 대개 담임목사의 자원 독점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 성공한 덕이다. 또 거꾸로 목사가 가용자원을 독점하고 그것을 성장에 집중 투여한 결과가 교회성장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도 있다.[각주:23] 그 시대가 자원 독점을 통해 성공을 이룩했던 권위주의 시대였다는 점은 권력의 집중과 성장이 서로 맞물리게 되는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각주:24]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장기간 재직-자원의 독점-교회 성장의 연결고리가 뚜렷한 교회들에서 더 많이 혈통적 세습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세습의 두 가지 조건에서 우리는 2천 년대인가에 대한 하나의 개연성 있는 답을 얻을 수 있다. 1960~1990년 사이의 시간성, 그러니까 장기간 재직-자원의 독점-교회 성장의 연쇄고리가 일종의 시대정신이자 시대의 문법이던 시기에 그 핵심에 있던 담임목사들이 속속 은퇴하게 된 시기가 바로 2천 년대 전후, 특히 직후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절에서 다루는 두 번째 논점은 교회세습이 수도권에 집중된 이유에 관한 것이다. 위에서 한 교회에서 양적 성공을 이룩한 이들이 그 교회의 권력을 장기간 독점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여기에는 1960~1990, ‘대성장 시대에 관한 꼭 필요한 논의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장소성에 관한 것이다. 우선 1953년 이후 서울은 수용능력을 초과하는 인구의 집중화 현상, 즉 과잉도시화(over-urbanization)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이 현상은 2000년 어간까지 계속되었다.[각주:25] 이에 대한 국가의 대책은 두 번에 걸친 서울의 공간 확장으로 나타났는데(sub-urbanization), 하나는 이른바 영동지역(영등포 동쪽 지역)의 개발로 서울을 확장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울 외곽의 신도시들을 건설함으로써 광역의 수도권을 만드는 것이었다. ‘영동지역은 훗날 강남 3개구 지역과 강동지역으로 개발되었고, 신도시들 가운데는 강남강동과 인접한 분당신도시와 그 인접지역이 특히 빠르게 발전했다.[각주:26]

이 과정은 대부흥기의 교세 확장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선 과잉도시화 상황에서 개신교는 급성장을 이룩한다. 즉 조용기는 이농민의 대대적인 신자화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대의 대형교회가 되었고, 그의 선교방식을 모방한 많은 교회들도 커다란 성장을 이룩했다.[각주:27] 1970년대~1980년대 중반 경에 탄생한 대형교회들은 대개 이러한 이농민의 신자화와 관련이 있다.[각주:28]

그런데 서브어버나이제이션(sub-urbanization)은 일부 교회의 또 다른 성공의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 경부터 대형교회의 대열에 진입한 교회들은 강남, 강동, 분당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것은 두 번의 걸친 서울의 서브어버나이제이션 과정을 따라 이루어진다. 이중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중반 경 대형교회의 대열에 들어선 교회들에는 강남권에서 지대의 급속한 상승으로 자산이 크게 확대된 이들이 매우 많았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젊었고 대학 이상의 학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좀 더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새신자들, 곧 타종교인이었거나 비종교인이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각주:29] 한편 1990년대 후반 경 이후부터는 강남, 강동, 분당 지역에서 대형교회들이 속속 탄생하였는데, 이때 특기할 것은 새신자의 유입보다는 수평이동신자들의 유입이 이들 교회들의 양적 팽창의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중년층이 더 많았고 학력, 사회적 지위, 자산능력 등에서 대단히 위치에 있는 이들이 많았다.[각주:30]

이제 위에서 언급한, 교회세습이 수도권에 위치한 교회들에서 훨씬 더 많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것은 1960년 이후 규모의 성공을 거둔 교회들이 수도권의 인구 집중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단계에는 이농자들의 신자화, 둘째 단계에는 강남권으로 이주한 젊은 중산층의 신자화, 그리고 셋째는 강남강동분당의 수평이동 신자들을 정착시킴으로 대형교회들이 탄생했다. 그렇게 성공한 교회의 목사들이 2천 년대 즈음 속속 은퇴할 시기가 되었을 때, 그중 일부 교회들은 혈통적 세습을 단행한 것이다.



1970~1980년대 중반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중반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농민의 신자화

강남으로 이주한 젊은 엘리트

강남강동분당으로 이주한 중년 엘리트

새신자

수평이동신자

선발대형교회 유형

 

 

 

후발대형교회 유형




셋째 논점은 대형교회가 중소형교회보다 더 많이 혈통적 교회세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영기는 한국의 초대형교회 13개의 담임목사들의 리더십을 연구하였는데,[각주:31]카리스마 리더십과 초대형교회로의 양적 성장이 깊은 관계가 있음을 분석하였다. 그의 카리스마 리더십은 베버의 용어를 빌려온 것인데, 그것에 관한 종교적, 영적 설명들을 제외하고 사회학적 속성만으로 재설명하면 교회의 가용자원을 독점한 존재다. 그런 존재가 성장을 위해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한 결과 초대형교회로의 성장이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종현은 홍영기의 분석을 수용하면서 대형교회로 성장한 교회들의 1970년 이전과 이후의 담임목사들의 재임기간을 분석한 결과, 흥미롭게도 1970년대 이후 담임목사들의 임기의 장기화 현상이 뚜렷이 확인되었음을 보여준다.[각주:32] 그는 임기에 대해 하나 더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는데, ‘원로목사제도의 발명이다.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원로목사는 명예직이 아니라 실권자가 지배력을 연장시키는 장치로 작동되었다는 것이다.[각주:33] 이때 혈통적 교회세습은 원로목사로서 교회권력을 유지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대형교회는 목사의 혈통적 세습과 더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논점, 감리교회가 더 많이 교회세습을 한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김동호의 목사가 힘이 더 센 교회라는 말과 홍영기의 카리스마 리더십에 관한 분석, 그리고 박종현의 임기의 장기화’, 이러한 요소가 가장 적합한 교회는 말할 것도 없이 오순절계열의 교회들이다. 그러나 오순절계열의 교회들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20여개의 지교회를, 은혜와진리의교회가 40여개를, 인천순복음교회가 4개를 갖고 있는 등, 권력집중화가 너무 심해서 세습할 만한 교회의 숫자가 별로 없다.[각주:34]

오순절계열의 교단 다음으로, 담임목사에게 강력한 권력을 부여하고 있는 제도를 갖고 있는 교파는 감리교단이다. 앞서 말했듯이 감독제 교회의 대표격인 감리교단은 목사파송 시스템과 교회운영 시스템에서 개별교회의 자율권을 제도적으로 제한하고, 구역회-지방회-연회로 이어지는 피라미드형 교회간 네트워크를 통한 통제력을 제도화함으로써 평신도엘리트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감독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정치제도를 발전시켰다. 하여 교회정치의 핵은 개별교회의 당회가 아니라 연회(감독)와 지방회(감리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는 한국의 감리교회들에도 장로가 존재하며, 그들은 목사파송이나 교회운영에 사실상 깊이 개입한다. 하여 감리교회들은 제도상으로는 파송제도에 따르지만 실제 운영은 청빙제도와 결합된 채 목사가 교회로 파송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종결정권이 목사들의 제도에 있다는 것은 일단 분쟁이 일어나면 목사에게 훨씬 유리한 제도임을 뜻한다.

한데 감리교단의 대형교회들은 구역회지방회연회로 이어지는 교회정치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것은 이들 교회간 수직적 네트워크가 강한 만큼 개별교회가 내는 교부금이 더 많이 필요한데, 그 비용을 조달할 능력이 보다 많은 힘 센 목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대형교회의 비중은 훨씬 더 중요하다. 요컨대 대형교회는 교회 내적으로는 목사의 주도권이 더 잘 작동할 수 있고, 외적으로는 교회정치의 통제력에서 보다 자유롭다. 해서 감리교단의 교회들에게서 혈통적 세습이 더 많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대안 개념

 


개신교 외부의 시민단체들이나 매스미디어들은 흔히 혈통적 교회세습이 한국개신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처럼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이 현상은 전체 교회 가운데 0.5%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예외적 현상이다. 게다가 앞으로 그런 교회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 예상된다. 박종현이 분석했듯이[각주:35] 한 교회에서 장기간 재임한 목사들이 한꺼번에 은퇴한 시기가 2천 년 어간에서 그 얼마 후까지였다. 말했듯이 그들은 교회의 가용자원을 독점했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양적 성공을 이룩한 이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은퇴하고 있고, 그 후임자들은 선임자보다 학력도 높고 다양한 스펙을 갖추었지만 대개 카리스마 리더십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게다가 양적 성장이라는 성과를 이룩할 가능성은 현저히 줄었다. 또한 교인들의 학력은 점점 상승했고, 사회적 지위도 매우 높은 이들이 많다. 과거 목사가 지역 유지였던 시대와는 달리 지금은 그리 존경받는 위상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그러므로 목사가 더 힘 센 교회의 비율은 점점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혈통적 세습을 원한다 하더라도 그것에 성공할 이들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대형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위의 [3]에서 정리한 것처럼, 앞에서 시공간적 변화에 따라 다르게 특성화된 대형교회의 세 범주를 언급했는데, 이중 세 번째 범주는 수평이동한 떠돌이 신자들이 대거 정착함으로써 대형교회에 진입한 교회들을 가리킨다.[각주:36] 이때 수평이동신자는 중년층이 보다 많고 교회에서 주요직분을 경험했던 신자들이 많다. 또 학력이나 사회적 신분, 자산능력도 비교적 높은 층이 많다.[각주:37] 요컨대 이들은 주권의식이 보다 강한 신자들이다. 그들은 교회를 찾아 떠돌아다니면서 여러 목사들의 설교와 교회 프로그램들도 비교검토하고 교회신학적 서적들도 많이 탐독하며 교회 밖의 고급 강좌들을 수강했던 이들이 많다. 그들은 일종의 소비자의 자의식으로 교회를 선택한다.

그러므로 이런 자존성 강한 떠돌이신자들을 유치하고 정착하게 하는 데 성공한 교회들은 그들의 기호에 맞추는 선교전략상의 성공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교회들의 담임목사의 리더십은 어떠할까? 소비자 같은 자의식을 가진 신자들의 기호가 다양한 만큼 목사의 리더십 유형도 단순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과거처럼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이제 시대착오적임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들 떠돌이 신자들은 자수성가형 성장지상주의와는 달리 문화적인 고품격을 추구하는 귀족형의 소비자적 주체로서 교회를 선택, 소비하고자 한다. 나는 이러한 문화적인 귀족적 종교성을 웰빙신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각주:38] 주지할 것은 이런 신앙은 자산, 신분, 학력 등에서 안정계층에 보다 친화적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혈통적 교회세습에 대한 시민사회의 우려와 비판은, 내가 보기에는, 그 센세이셔널한 현상에 집착하다 숲의 문제를 읽지 못한 채 썩은 나무만을 찍어내려고 하는 관중규표(管中窺豹)의 오류가 될 수 있다. 그 대나무구멍()의 바깥에는 99.5%가 넘는 교회들에서 담임목사가 혈통적 세습이 아닌 방식으로 임용되고 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정당한가? 그것은 부당하지 않고 부조리하지 않은가? 그것은 사회적 특권화를 조장하고 공공성을 훼손할 우려가 없는가?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혈통적 교회세습이 아니더라도 권력세습이 횡행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제기인 것이다.

정치학자인 새무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 최소한 세 번의 정권교체가 있어야 민주주의의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가 일어난다고 말한 것처럼,[각주:39] 교회도 기존의 권력을 전도시키는 담임목사 임용이 적어도 세 번 이상 일어나야 권력세습을 지양하는, 사회적 공공성의 장소로서의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나는 권력세습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있다. ‘세반연에 의하면 지역교회와 교회 유관기관에서 혈연에 의해 발생하는 대물림교회세습이라고 표기했다. 그런 점에서 교회세습은 혈통적 세습에 방점이 찍힌 개념이다. 그런데 나는 권력의 대물림에 방점이 찍힌 용어로서 권력세습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창세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이브의 죄의 문제를 공적인 것의 사유화로 봄으로써 ()의 문제를 권력의 반독점이라는 의미로 해석한 바 있다.[각주:40] 즉 권력의 대물림을 해체하려는 신앙적 기조를 안병무는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공의 장소인가 권력의 장소인가? 혈통적 세습을 단행한 교회든 그렇지 않은 99.5%의 교회든 간에 교회가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가, 아니면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바꾸고 사적인 것을 전유하는 자들의 대열에 끼어드는 것을 강조하는 신앙운동 참여하고 있는가?

공의 사유화 운동의 장(field), 그런 권위주의적 소통의 공간이 오늘의 교회라면, 성서에 등장하는 유다국의 개혁군주 요시야 왕의 핵심 슬로건인 산당을 폐하라는 말은 바로 오늘의 교회를 향한 비판신학적 어젠다이기도 하다.[각주:41]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1995년 이후의 대형교회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수평이동을 거듭하던 비평적 신자들과 그들을 유치정착시키려는 교회가 함께 만들어낸 새로운 신앙유형인 웰빙신앙, 권위주의 시대 특유의 카리스마적 리더가 아닌, 탈권위주의적 리더를 선호함에 따라 혈통적 세습이 점점 더 가능하지 않는 교회 유형을 소환해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후발대형교회라는 이념형적 용어로 규정한 바 있다.[각주:42] 즉 후발대형교회에서는 혈통적 교회세습을 불온시하는 프레임이 통용되는 소통의 장이다. 대신 대형교회 유형 가운데 특권적 신자들의 이해가 더 적극적으로 반영된 교회 양식이 바로 후발대형교회라는 것이다. 한데 이 유형의 교회들에선 공을 사유화하려는 권력의 작용은 없는가, 바로 이 점이 나의 관심거리다.

안타깝게도 후발대형교회에서도 목사 임용에 관한 정보는 신자대중에게 거의 소개되지 않았고 목사 임용 과정에도 참여할 통로가 매우 형식적이다. 반면 특권적 엘리트 신자는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교회의 인사에 관한 것이든 운영에 관한 것이든 충분한 정보를 전유(appropriation)하고 있고 그 과정을 주도하고 있다. 이렇게 특권적 엘리트 신자와 신자대중 간의 정보의 비대칭성과 참여의 비대칭성은, 그들의 사회적 역할에서도 대체로 비슷하게 나타난다. 즉 대형교회의 특권적 엘리트 신자들은 사회에서도 특권적 시민의 위치를 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회에서처럼 사회에서도 정보와 참여에서 특권적 지위와 역할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들의 웰빙적 취향과 행위에 대한 우월감이 특권의 정당화 기재로 작용할 수 있다. 그것은 웰빙적 취향이 특권적 지위의 결과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은폐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에서 교회세습이 아닌 권력세습의 관점에서 교회와 권력에 관하여 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문제제기하고자 했다. 그런데 권력세습이 일으키는 사회적 파급력은 행사되는 권력의 크기와 비례한다. 물론 일상의 권력, 미시적 권력, 내면의 권력도 주목할 필요가 있지만, 권력세습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미치는 사회적 파급력의 문제와 보다 긴밀히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사회의 특권적 엘리트이자 교회의 특권적 엘리트가 즐비한 대형교회는 이 논의의 가장 중요한 현장이다. 특히 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보다는 탈권위적 권위의 리더십으로 특성화될 수 있는 후발대형교회는 특권적 목사만이 아니라 특권적 신자를 이야기하는 데 더 적합하다. 이러한 분석틀 위에서 시민의 직접적 참여의 공간을 찾아내고자 하는 직접민주주의적 상상력과 대응하는 신자대중의 직접적 참여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권력세습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성서 해석을 논하고 교회 제도를 논하며 신자의 사회적 역할을 논하는 탈권위적 공론장을 형성하고자 하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Abstract

 

Succession of Power in Korean Churches’ and ‘Late-stage Mega-churches’:

On Religious Apparatus of the Neo-Aristocratic Group in Megachurches emerged after the mid-1990s

 

 

The recent news articles have suggested that ‘the hereditary succession in Korean churches’ manifests the empowerment of the church in Korean society. This perspective results from the understanding of the phenomenon in terms of the minister-centered power structure of the church. In the case of the megachurches, a senior pastor with charismatic leadership has been in charge for a long period and invested all the available resources of the church into growth; and this charismatic leader often hands the power down to a blood tie. Therefore, the percentage of the hereditary succession in megachurches is relatively higher than that of non-megachurches.

However, the percentage of the churches which succeed power hereditarily is less than 0.5 percent of the entire Korean churches; and its number is likely to diminish gradually in the foreseeable future. In other words, it is obvious that the hereditary succession in Korean churches is an example which indicates the centralized power of Korean churches; but it is not typical but exceptional. Particularly, this atypical manifestation is prominent among the newly emerged megachurches after the mid 1990s.

Therefore, a different approach with a new conceptualization is required to grasp the recent centralized power of Korean churches. It is necessary to recognize the two power groups; not only the power of a senior minister, but also the power of privileged lay elites. These two groups are conflicting and cooperating with each other. The phenomena of the monopoly and oligopoly of power, and the succession came from the relationship between them. By the institutional and discursive mechanism, these two groups prevent the other members from accessing critical information and exclude them from participating in decision making process. This article defines this phenomenon of succession of the monopolized power of the churches as ‘the succession of power in Korean churches.’ One last consideration is that this succession in the churches hinders the social democracy which emphasizes the fair distribution and public function of power.

 

 

 


 

Keyward

 

The Hereditary Succession in Church(교회세습), The Succession of Power in Church(교회의 권력세습), Late-stage Mega-churches(후발대형교회), sub-urbanization of Seoul(서울의 서브어버나이제이션), the privileged ordinary believers(주권신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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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배덕만, 〈교회세습에 대한 역사신학적 고찰〉(심포지엄 ‘교회세습, 신학으로 조명하다’, 2013)(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 문서자료실, http://www.seban.kr/home/index.php?mid=sb_library_document&document_srl=4336&listStyle=viewer&page=2) [본문으로]
  2. ‘대형교회’로 번역된 메가처치(mega-church)는 통상 일요일 대예배에 참석한 성인 교인수가 2천 명 이상의 교회를 지칭한다. 한데 이 글에서 대형교회라고 하지 않고 중・대형교회라고 표기한 것은 조사기관들의 세습교회 규모에 따른 분류항목에 ‘1,000~5,000명’, ‘5,000~10,000명’, 10,000명 이상‘ 등으로 된 탓에 딱히 대형교회라고 단정할 수 없는 교회들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본문으로]
  3. 2001년 감리교단의 초대형교회인 광림교회가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세습했고, 2008년에는 광림교회 김선도의 동생인 김홍도가 담임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금란교회가 아들에게 세습했다. 또 그들의 동생인 김국도가 담임하는 임마누엘교회도 2013년에 아들에게 목사직을 세습했다. 그밖에 강남제일교회(기침・2003), 경향교회(예장고려・2004), 원천교회(예장대신・200), 분당만나교회(감리교・2004), 경신교회(감리교・2005), 대성교회(예장합동・2006), 동현교회(예장합동・2006), 《국민일보》(기하성, 2006), 종암중앙교회(예장개혁・2007), 인천숭의교회(감리교・2008), 계산중앙교회(김리교・2008), 경서교회(예장합동・2010), 대한교회(예장합동・2011), 부천혜린교회(예장합동・2011), 제일성도교회(예장합동・2012), 광명동산교회(예장합동・2012), 왕성교회(예장합동・2012), 성남성결교회(기성・2012), 시은소교회(예장합동・2014), 인천순복음교회(기하성・2015), 안양새중앙교회(예장대신・2017), 명성교회(예장통합・2017) 등등, 수많은 중・대형교회와 초대형교회들에서 혈통적 목사세습이 일어나고 있다. [본문으로]
  4. ‘초대형교회’로 번역된 기가처치(giga-church)는 통상 일요일 대예배에 참석한 성인 교인수가 1만 명 이상의 교회를 지칭한다. 하지만 이하에서는 인용부분을 제외하고는 초대형교회를 따로 분류하지 않고 ‘대형교회’에 포함해서 언급하겠다. [본문으로]
  5. http://www.seban.kr/home/sb_what_map [본문으로]
  6. https://newkmc.modoo.at/?link=3tmk3lo8 [본문으로]
  7. 〈‘세습 지도’ 성복교회・부천성문교회 등 28가 추가〉, 《뉴스앤조이》 (2018.01.03.)[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4202] [본문으로]
  8. 2~3명의 목사가 서로서로 교차하여 아들을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것을 말한다. 해서 쌍방교차세습, 삼각교차세습 등으로 세분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9. 본 교회가 지교회(일종의 분점교회)로 세운 교회로 혈통적 세습을 단행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으로]
  10. 아버지에서 아들을 건너 뛰어 손자에게로 가는 세습을 말하거나, 혹은 중간에 명목만 있는 목사를 하나 끼워 넣어 물려주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혹은 후자를 ‘쿠션세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문으로]
  11. http://www.seban.kr/home/sb_what_sesub [본문으로]
  12. 주3)의 자료 참조. [본문으로]
  13. 주6) 참조. 그러나 두 기관이 엄밀하게 기준에 맞게 통계 낸 것이 아닌 데다, 그것을 취합한 《뉴스앤조이》의 결과도, 두 기관의 것을 기준상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취합한 것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본문으로]
  14. 같은 자료 참조. [본문으로]
  15. 같은 자료 참조. [본문으로]
  16. 한국갤럽이 한국인의 종교실태에 대한 5차에 걸린 조사결과 보고서인 《한국인의 종교 1984~2014》에 따르면 주1회 이상 일요일 예배 참석률은 2014년의 경우 80%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한국인 종교·신앙의식 조사’에서는 2017년 일요일 대예배 출석률을 76.7%로 집계했다. 이 조사대로라면 5천 명이 재적인 교회는 대략 3,800~4000명이 주일 예배에 참석한다. 또 1천 명이 재적인 교회는 대략 770~800명이 주일 예배에 참석한다. [본문으로]
  17. 김진호, 〈‘웰빙 우파’와 대형교회―문화적 선진화 현상으로서의 후발대형교회 읽기(소망교회, 온누리교회, 사랑의교회를 중심으로)〉, 제3시대그리스도교 엮음, 《당신들의 신국》(돌베개, 2017), 각주2). [본문으로]
  18. 명성교회가 2017년 11월12일 담임목사의 부자세습을 강행하자 JTBC는 11월14일, 27일, 12월7일 세 차례에 걸쳐 비판적 보도를 하고 무수한 오・오프라인 언론들이 앞다투어 집중보도한다. 이후 이 문제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교회세습에 대한 비판적 담론 프레임이 조성되었다. 이에 《뉴스앤조이》는 12월 말에 교회세습 제보를 받기 시작했고, 1주일 만에 70여건의 제보가 들어왔다고 한다. 최승현, 〈‘세습 지도’ 성복교회·부천성문교회 등 28개 추가〉, 《뉴스앤조이》(2018.01.03.) 참조. [본문으로]
  19. 2017년 11월13일 ‘2017년 미래교회포럼’에서 발제한 글 〈한국 장로제도의 반성과 개혁〉(http://reformedjr.com/board05_04/7039) 참조. [본문으로]
  20.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의 한국종교현황 자료에 의하면 전체 개신교 교파는 232개이고, 이중 장로교 계열의 교파는 180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문화와종교연구소, 〈한국의 교세 현황(2011)〉(문화체육관광부 2012), 38~47쪽. [본문으로]
  21.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각 2005년도 교단 총회보고서들을 취합하여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개신교 교인 중 장로교 교인수는 전체의 69%, 성결교는 11%, 감리교는 10%, 기독교침례회는 5%, 순복음계열의 교회는 4%, 기타 1%라고 한다.(http://missionmagazine.com/main/php/search_view.php?idx=365) [본문으로]
  22. 박종현, 〈한국 오순절 운동의 영성―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성과 성장에 대한 시대사적 회고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 82(2008.4), 11~12쪽 참조. [본문으로]
  23. 김진호,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주권교인’의 탄생.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3)〉, 《주간경향》 1265호(2018 02 27) 참조. [본문으로]
  24. 위의 박종현의 글, 12쪽. [본문으로]
  25. http://study.zum.com/book/12468 참조. [본문으로]
  26. 이에 대하여는 한종수・계용준・강희웅, 《강남의 탄생―대한민국의 심장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미지북스, 2016), 1・4・7장 참조. [본문으로]
  27. 이에 대하여는 나의 책 《시민 K 교회를 나가다―한국개신교의 성공과 실패 그 욕망의 사회학》(현암사 2012), 제1부 5장 참조. [본문으로]
  28. 물론 빌리 그레이엄 부흥회를 포함한 아메리카식 부흥회가 이 시기에 또 다른 신자들의 대대적인 증가를 낳았는데, 이것은 많은 중산층 대중과 젊은층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데 기여했다. 같은 책 제1부 6장 참조. [본문으로]
  29. 이광순・이향순, 〈도시의 발달과 도시 선교〉, 《선교와 신학》 10(2002.12); 장형철, 〈도시발전과 초대형 교회건축―서울을 중심으로〉, 《종교와 문화》 26(2014) 참조. [본문으로]
  30. 이에 대하여는 미출간된 나의 책 《월빙우파와 대형교회》(메디치미디어, 근간)을 참조. [본문으로]
  31. 홍영기, 《한국의 초대형교회와 카리스마리더십》 (교회성장연구소, 2001) 참조. [본문으로]
  32. 주18) 참조. [본문으로]
  33. 같은 글, 13쪽. [본문으로]
  34. 실제로 조용기는 《국민일보》를 아들에게 세습했고, 인천순복음교회의 최성규는 아들에게 세습했다. 그리고 은혜와진리의교회의 조용묵은 나이가 70대 중반으로 은퇴시기가 지났음에도 아직 담임목사로 재직하고 있다. [본문으로]
  35. 주28) 참조. [본문으로]
  36. 한국개신교에서 수평이동 신자들의 비율은 대략 45~75% 정도가 된다. 낮은 수치는 한국목회자협의회의 2012년 조사인데, 45.2%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반면 높은 수치는 교회성장연구소의 2003년 조사인데, 76.5%라는 충격적인 결과치를 발표했다. 한국목회자협의회. 《한국기독교 분석 리포트》(도서출판 URD, 2013), 72쪽; 교회성장연구소, 《한국교회 교인들이 말하는 교회 선택의 조건》(교회성장연구소, 2004), 35쪽. 한편 최현종의 조사에 의하면 대형교회의 수평이동 신자의 정착율이 다른 규모의 교회들에 비해 가장 높았다. 최현종, 〈한국개신교의 새신자 구성과 수평이동에 관한 연구〉, 《한국기독교신학논총》 91/1(2014.1), 222쪽. [본문으로]
  37. 최현종의 논문 223~224쪽 참조. [본문으로]
  38. 나의 글 〈‘웰빙우파’와 대형교회―문화적 선진화 현상으로서 후발대형교회 읽기〉 참조. [본문으로]
  39. 새뮤얼 헌팅턴, 《제3의 물결―20세기 후반의 민주화》(인간사랑, 2011), 369쪽. [본문으로]
  40. 안병무, 〈하늘도 땅도 공이다〉, 《신학사상》 53(1986 여름) 참조. [본문으로]
  41. 나의 책 《산당을 폐하라―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들에 대한 정치비평적 성서 읽기》(동연, 2016), 머리글 참조. [본문으로]
  42. 주34)에 인용된 글 참조. [본문으로]

교회의 권력세습과 후발대형교회

논문 2018.02.23 14:18 posted by 망원올빼미

이 글은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종교와 법' 센터의 제2회 학술대회 '기독교와 법'에서 발제한 글입니다. 내 글의 논평글로 발표된 한목덕 목사의 글도 첨부했습니다.


이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발표 주제교회분쟁사례에 대한 법적 검토 판례의 태도를 중심으로

󰋼 발 제 – 우재욱 변호사(우재욱 법률사무소)

  󰋼 토 론 – 김진우 교수(한국외대)

【제2발표 주제세법상 종교인소득세의 도입배경과 향후과제

󰋼 발 제 – 박 훈 교수(서울 시립대), 허 원(고려사이버대학교)

  󰋼 토 론 – 구재이 박사(세무법인 굿택스)

【제3발표 주제권력세습과 후발대형교회

󰋼 발 제 – 김진호 목사(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 토 론 – 한문덕 목사(생명사랑교회)

심포지엄의 사진들이 게재된 종교와 법 센터 블로그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s://blog.naver.com/religionandlaw

일시_ 2018. 02. 22(목), 오후 1:00~6:00

장소_ 한국외대 법학관 7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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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권력세습과 후발대형교회

 

 

 


 

현황

 


1973년 도림교회의 담임목사 부자세습은 통상 혈통적 교회세습의 첫 번째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교회는 권력형 세습이 이루어진 경우가 아니기에 교회세습의 병리성을 다루는 오늘 우리의 문제제기 밖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교회세습의 문제적 전형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로 충현교회의 담임목사 세습이 꼽힌다.[각주:1] 세습이 단행되던 1997년 김창인은 은퇴한 원로목사임에도 전권을 휘둘러 교인총회인 공동의회를 주도하여, 담임목사 선출 방식을 일반적 관행이던 무기명 투표로 하지 않고 찬반기립의 방식으로 진행함으로써 아들의 담임목사 청빙을 단행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해서 막강한 파워엘리트가 즐비했고 세습 당시 재적 신수가 35천 명이 넘었으며 2012년 현재 총자산이 2조 원 정도나 될 것으로 추정되는 초대형교회에서 그 모든 것을 법적으로 총괄하는 담임목사가 된다는 것은 거대한 종교권력의 중심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후 이 교회에서 벌어진 사태들은 목사의 혈통적 교회세습의 전형적인 부정적 양상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편법선거로 담임목사가 된 아들과 원로목사임에도 교회 운영에 손을 떼지 못하는 아버지 간의 반목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사태들이 잇따랐다. 취임한 지 3년도 못된 20001월에 담임목사에 대한 테러사건이 발발했고. 장로 9명이 불구속 입건되어 경찰의 수사를 받았다. 아들목사는 아버지와 그를 따르던 장로들이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단정하면서 원로목사에 대한 교회의 지원을 끊었고 장로 8명과 안수집사 5명을 출교시켰다. 그러나 그것으로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다. 내부고발자 없이는 좀처럼 드러날 수 없는 교회재정의 횡령, 유용 사건들이 폭로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교회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다. 그 결과 교인은 1/3로 줄었다.

물론 목사의 혈통적 세습이 그 교회의 교인들이나 외부로부터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또 정상적 권력교체가 이루어진 경우라고 해서 교회가 잘 운영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아무튼 혈통적 세습은 교회 안팎으로부터 정당성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충현교회가 혈통적 교회세습의 문제점을 선행적으로 보여준 이후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많은 교회들에서 혈통적 교회세습이 잇따랐다. 특히 주목할 것은 2천 년대부터 많은 대형교회[각주:2]들에서 혈통적 목사세습이 연이어 단행되었다는 점이다.

2001년 감리교단의 초대형교회[각주:3]인 광림교회가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세습했고, 2008년에는 광림교회 김선도의 동생인 김홍도가 담임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금란교회가 아들에게 세습했다. 또 그들의 동생인 김국도가 담임하는 임마누엘교회도 2013년에 아들에게 목사직을 세습했다. 그밖에 강남제일교회(기침2003), 경향교회(예장고려2004), 원천교회(예장대신200), 분당만나교회(감리교2004), 경신교회(감리교2005), 대성교회(예장합동2006), 동현교회(예장합동2006), 국민일보(기하성, 2006), 종암중앙교회(예장개혁2007), 인천숭의교회(감리교2008), 계산중앙교회(김리교2008), 경서교회(예장합동2010), 대한교회(예장합동2011), 부천혜린교회(예장합동2011), 제일성도교회(예장합동2012), 광명동산교회(예장합동2012), 왕성교회(예장합동2012), 성남성결교회(기성2012), 시은소교회(예장합동2014), 인천순복음교회(기하성2015), 안양새중앙교회(예장대신2017), 명성교회(예장통합2017) 등등, 많은 대형교회와 초대형교회들에서 혈통적 목사세습이 일어나고 있다. 물론 혈통적 목사세습은 대형교회 현상만은 아니다. 많은 중소형교회들에서도 특히 2천 년대 이후 교회세습이 속출했다.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이하 세반연’)에 따르면 20171110일 현재 143개 교회가 혈통적 세습을 단행했다.[각주:4] 이는 제보된 것을 조사하여 확인된 것에 한정된 숫자인데, 계속 신고를 받고 있어 그 수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감리교세습반대운동연대(이하 감세반연’)20171022일에 발표된 보고서[각주:5]에 따르면 감리교회에서만 세습을 실행에 옮긴 교회가 무려 194개나 된다. 또 이 두 단체들의 자료에다 독자적으로 신고를 받아 만든 뉴스앤조이의 세습지도에는 201813일 현재 350개가 포함되었다.[각주:6]

이렇게 세 기관의 리스트에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신고에 의해 접수된 것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 감리교 단체인 감세반연의 경우 세반연보다 세습의 기준을 좀더 폭넓게 적용한 것도 참조할 만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세반연“‘교회세습이란 지역교회와 교회 유관기관에서 혈연에 의해 발생하는 대물림을 지칭한다고 규정하면서, 부자세습과 사위세습, 그리고 변칙세습양태인 교차세습, 지교회세습, 징검다리세습 등을 다루고 있다.[각주:7] 그런데 감세반연한 교역자가 담임자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혈연 및 이해관계에 있는 또 다른 교역자를 담임자로 세우는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동서에게, 조카에게, 형제간에, 그리고 변칙세습으로 사위교차 세습형태까지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각주:8]세반연조사에 누락된 경우들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그런 교회들은 아직 업데이트되는 중이어서 좀더 많이 포착될 것이 분명하다.

숫자 통계가 아직 완성도가 낮은 탓에 엄밀한 추정은 불가능하지만, 교단별로는 감리교단 소속교회가 가장 많다는 점은 개연성이 높다. ‘세반연감세반연의 자료에다 독자적인 정보를 취합한 뉴스앤조이의 결과에 의하면 전체의 50% 이상이 감리교단에 속한다.[각주:9] 지역별로는 거의 70%에 육박하는 세습교회들이 서울인천경기도 등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각주:10] 규모별 추정은 좀더 어렵지만 교인수 100~500명 사이가 43%, 500~1,000명이 26.1%로 제일 많은 것으로 추산되었다.[각주:11] 그러나 이 추정치만으로 100~500명 규모의 교회가 세습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는 단순한 가정은 문제가 있다. 이 자료가 유의미하려면 무엇보다도 전체 교회 가운데 이 규모의 교회들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비교해서 살펴야 한다. 뉴스앤조이의 조사결과로만 추정해보면 혈통적 세습이 가장 심각한 곳은 대형교회로 보인다. 이 조사에서는 재적인원의 범주를 6개로 나누었는데(100명 미만 / 100~500/ 500~1000/ 1000~5000/ 5000~10000/ 10000명 이상), 이중 대형교회의 기준과 거의 비슷하다고 가정한다면,[각주:12] 한국의 대형교회 비율은 1.7%[각주:13]인데, 이 조사에서 혈통적 세습을 단행한 대형교회는 6.9%를 상회한다.[각주:14] 반면 중소형교회의 경우는 ‘98.3 93.1’의 비율이다. 즉 전체 교회에 대한 대형교회의 비율보다 세습한 전체 교회들에 대한 세습 대형교회의 비율이 4배 이상 높다는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2천 년대 이후 혈통적 교회세습 현상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2) 교회세습이 가장 극심한 곳은 수도권이다. (3) 대형교회가 중소형교회보다 더 세습 현상이 심각하다. (4) 교파별로는 감리교단에서 더 혈통 세습의 문제가 심각하다.

 


해석

 


말했듯이 2천년 어간 이전까지 교회세습은 별로 주목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1997년 충현교회를 시발점으로 하여 2천 년대 이후 특히 여러 대형교회들에서 세습이 단행되자 개신교계 안팎에서 이 문제는 핫한 이슈가 되었다. 그런데 왜 2천 년대인가? 이것이 첫 번째 논점이다.

우선 혈통적 교회세습을 단행한 교회는 전체 교회 중 0.5% 이하로 추산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밝힌 개신교 교회수는 2011년에 77,966개다. 여기에는 군소교단들을 제외한 118개 교단의 교회만 포함된다. 그러니 실제 교회수는 좀더 많을 것이다. 또 최근 개신교 교인 수는 증감을 반복하고 있지만, 교회수는 모든 통계에서 거의 예외 없이 증가 추세에 있다. 그러므로 20181월 현재 교회수는 2011년 문광부 집계보다 훨씬 클 것이 분명하다. 한편 혈통적 교회세습을 단행한 교회수는 현재까지 최대 350개다. 교회 세습을 다루는 세 기관이 계속 신고를 받고 있으니 이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성교회 세습 사태 직후 신고건수가 갑자기 크게 늘은 것을 감안하면[각주:15] 이후에는 증가폭이 줄어들 것이 예측된다. 그런 점에서 35077,966으로 나누어 계산한 0.45% 어간에서 큰 차이는 없을 것 같고, 그것보다 훨씬 높게 잡은 가정치인 0.5%는 아마도 거의 최고 추정치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것은 교회세습이 결코 개신교에서 일반적 현상이 아님을 뜻한다. 그럼에도 세습을 한 교회들이 존재한다. 도대체 어떤 교회들이 세습을 하는가? 김동호 목사는 목사가 힘이 센 교회는 목사가 절대군주처럼 교회에 군림하고 하나님을 빙자하여 제 마음대로 교회를 주무르고 있다. 심지어는 그것을 자식에게 세습까지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각주:16] 즉 목사가 교회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한 경우 그가 의도하면 혈통적 세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근데 그 비율은 0.5%, 2백 명의 1명꼴이 못 된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목사가 교회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경우도 있으며, 세습을 하지 않은 95% 이상의 교회들 가운데는 세습을 할 수 있을 만큼의 권력을 장악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음을 시사한다.

김동호는 이 발제글에서 그런 교회를 묘사하기를 장로가 더 힘 센 교회라고 한다. 이것은, 교회를 교회정치의 차원에서만 보면, 목사와 장로 사이의 주도권 경쟁의 장이며 그 싸움에 끼어든 다른 주체는 별로 고려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하나 더 얘기하자면, 힘이 한 편으로 명확하게 기울어지기보다는 양자가 담합한 경우다.

여기서 목사 대 장로의 상호견제를 강조하는 교회제도는 장로교 계열의 교회정치제도다. 이것은 당회를 둘러싼 주도권 경쟁으로 나타나는데, 당회는 담임목사와 장로로 구성되어 있는 교회의 사실상의 최고 정치기구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의 상징적 중심인 목사와 사실상의 교회의 고용주인 장로가 당회 안에서 헤게모니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로교 목사인 김동호의 장로교식 교회정치에 관한 해석은 한국개신교 일반의 현상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다. 무엇보다도 장로교 계열 교회의 교인수가 한국개신교 교인의 69%나 되기 때문이다.[각주:17] 그뿐 아니라, 한국의 다른 교단들도 장로교식 장로제도를 부분적으로 혹은 거의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감독제 교회들인 감리교와 성결교, 회중교회 전통의 교회인 침례교, 그리고 카리스마적 리더의 독점적 지배를 강조하는 오순절계열(순복음계열)의 교회도 장로교식 장로제도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의 권력이 더 강한 교회들을 보여주는 두 번째 요소는 담임목사의 교회 재직 기간이 매우 긴 경우다. 파송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감독제 계열의 교회들이든 청빙제도를 강조하는 장로제 계열의 교회들이든 1970년 이전까지는 그 교회의 재직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 이후에는 20년 이상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재직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런 교회들은 대개 담임목사의 자원 독점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 성공한 덕이다.[각주:18] 또 거꾸로 목사가 가용자원을 독점하고 그것을 성장에 집중 투여한 결과가 교회성장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도 있다.[각주:19] 그 시대가 자원 독점을 통해 성공을 이룩했던 권위주의 시대였다는 점은 권력의 집중과 성장이 서로 맞물리게 되는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각주:20] 이렇게 장기간 재직-자원의 독점-교회 성장의 연결고리가 뚜렷한 교회들에서 더 많이 혈통적 세습이 일어났다.

바로 이 두 교회세습의 조건에서 우리는 왜 2천 년대인가에 대한 하나의 개연성 있는 답을 얻을 수 있다. 1960~1990년 사이의 시간성, 그러니까 장기간 재직-자원의 독점-교회 성장의 연쇄고리가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시기에 그 핵심에 있었던 담임목사들이 속속 은퇴하게 된 시기가 바로 2천 년대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절에서 다루는 두 번째 논점은 교회세습이 수도권에 집중된 이유에 관한 것이다. 위에서 한 교회에서 양적 성공을 이룩한 이들이 그 교회의 권력을 장기간 독점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여기에는 1960~1990, ‘대성장 시대에 관한 꼭 필요한 논의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장소성에 관한 것이다. 우선 1953년 이후 서울은 수용능력을 초과하는 인구의 집중화 현상, 즉 과잉도시화(over-urbanization) 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이 현상은 2000년 어간까지 계속되었다.[각주:21] 이에 대한 국가의 대책은 두 번에 걸친 서울의 공간 확장으로 나타났는데(sub-urbanization), 하나는 그 이전까지는 서울의 바깥 지역이던 이른바 영동지역(영등포 동쪽 지역)의 개발로 서울을 확장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울 외곽의 신도시들을 건설함으로써 광역의 수도권을 만드는 것이었다. ‘영동지역은 훗날 강남 3개구 지역과 강동지역으로 개발되었고, 신도시들 가운데는 강남강동과 인접한 분당신도시와 그 인접지역이 특히 빠르게 발전했다.[각주:22]



이 과정은 대부흥기의 교세 확장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선 과잉도시화 상황에서 개신교는 급성장을 이룩한다. 즉 조용기는 이농민의 대대적인 신자화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최대의 대형교회가 되었고, 그의 선교방식을 모방한 많은 교회들도 커다란 성장을 이룩했다.[각주:23] 1970~1980년대에 탄생한 대형교회들은 대개 이러한 이농민의 신자화와 관련이 있다.[각주:24]

그런데 서브어버나이제이션은 일부 교회의 또 다른 성공의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시기상으로는 1980년대 중반경부터 대형교회의 대열에 진입한 교회들은 강남, 강동, 분당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것은 두 번의 걸친 서울의 서브어버나이제이션 과정을 따라 이루어진다. 이중 1980~1990년대 대형교회의 대열에 들어선 교회들에는 강남권에서 지대의 급속한 상승으로 자산이 크게 확대된 이들이 매우 많았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젊었고 대학 이상의 학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좀더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새신자들, 곧 타종교인이었거나 비종교인이었던 이들이 많았다.[각주:25] 한편 1990년대 후반경 이후부터는 강남, 강동, 분당 지역에서 대형교회들이 속속 탄생하였는데, 이때는 새신자의 유입보다는 수평이동신자들의 유입이 이들 교회들의 양적 팽창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들은 중년층이 더 많았고 학력, 사회적 지위, 자산능력 등에서 대단히 위치에 있는 이들이 많았다.[각주:26]

이제 위에서 언급한, 교회세습이 수도권에 위치한 교회들에서 훨씬 더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것은 1960년 이후 규모의 성공을 거둔 교회들이 수도권의 인구 집중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단계에는 이농자들의 신자화, 둘째 단계에는 강남권으로 이주한 젊은 중산층의 신자화, 그리고 셋째는 강남강동분당의 수평이동 신자들을 정착시킴으로 대형교회들이 탄생했다. 그렇게 성공한 교회의 목사들이 2천 년대 즈음 속속 은퇴할 시기가 되었을 때, 그중 일부 교회들은 혈통적 세습을 단행한 것이다.

셋째 논점은 대형교회가 중소형교회보다 더 많이 혈통적 교회세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홍영기는 한국의 초대형교회 13개의 담임목사들의 리더십을 연구하였는데,[각주:27]카리스마 리더십과 초대형교회로의 양적 성장이 깊은 관계가 있음을 분석하였다. 그의 카리스마 리더십은 베버의 용어를 빌려온 것인데, 그것에 관한 종교적, 영적 설명들을 제외하고 사회학적 속성만으로 재설명하면 교회의 가용자원을 독점한 존재다. 그런 존재가 자원을 성장을 위해 효율적으로 사용한 결과 초대형교회로의 성장이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종현은 홍영기의 분석을 수용하면서 대형교회로 성장한 교회들의 1970년 이전과 이후의 담임목사들의 재임기간을 분석한 결과, 흥미롭게도 1970년대 이후 담임목사들의 임기의 장기화 현상이 뚜렷이 확인되었음을 보여준다.[각주:28] 그는 임기에 대해 하나 더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는데, ‘원로목사제도의 발명이다.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원로목사는 명예직이 아니라 실권자가 지배력을 연장시키는 장치로 작동되었다는 것이다.[각주:29] 이때 혈통적 교회세습은 원로목사로서 교회권력을 유지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대형교회는 목사의 혈통적 세습과 더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논점, 감리교회가 더 많이 교회세습을 한다는 점에 대한 것이다. 김동호의 목사가 힘이 더 센 교회라는 말과 홍영기의 카리스마 리더십에 관한 분석, 그리고 박종현의 임기의 장기화’, 이러한 요소가 가장 적합한 교회는 말할 것도 없이 오순절계열의 교회들이다. 그러나 오순절계열의 교회들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20여개의 지교회를, 은혜와진리의교회가 40여개를, 인천순복음교회가 4개를 갖고 있는 등, 권력집중화가 너무 심해서 세습할 만한 교회의 숫자가 별로 없다.[각주:30]

오순절계열의 교단 다음으로, 담임목사에게 강력한 권력을 부여하고 있는 제도를 갖고 있는 교파는 감리교단이다. 앞서 말했듯이 감독제 교회의 대표격인 감리교단은 목사파송 시스템과 교회운영 시스템에서 개별교회의 자율권을 제도적으로 제한하고, 구역회-지방회-연회로 이어지는 피라미드형 교회간 네트워크를 통한 통제력을 제도화함으로써 평신도엘리트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감독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정치제도를 발전시켰다. 하여 교회정치의 핵은 개별교회의 당회가 아니라 연회(감독)와 지방회(감리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는 한국의 감리교회들에도 장로가 존재하며, 그들은 목사파송이나 교회운영에 사실상 깊이 개입한다. 하지만 최종결정권이 목사들의 제도에 있다는 것은 일단 분쟁이 일어나면 목사에게 훨씬 유리한 제도인 것이다.

한데 감리교단의 대형교회들은 구역회-지방회-연회로 이어지는 교회정치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것은 이들 교회간 수직적 네트워크가 강한 만큼 개별교회가 내는 교부금이 더 많이 필요한데, 그 비용을 조달할 능력이 보다 많은 힘 센 목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대형교회의 비중은 훨씬 더 중요하다. 요컨대 대형교회는 교회 내적으로는 목사의 주도권이 더 잘 작동할 수 있고, 외적으로는 교회정치의 통제력에서 보다 자유롭다. 해서 감리교단의 교회들에게서 혈통적 세습이 더 많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문제점과 대안개념

 


개신교 외부의 시민단체들이나 매스미디어들은 흔히 혈통적 교회세습이 한국개신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처럼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이 현상은 전체 교회 가운데 0.5%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예외적 현상이다. 게다가 앞으로 그런 교회들은 점점 줄어들 것이 예상된다. 박종현이 분석했듯이[각주:31] 한 교회에서 장기간 재임한 목사들이 한꺼번에 은퇴한 시기가 2천 년 어간에서 그 얼마 후까지였다. 말했듯이 그들은 교회의 가용자원을 독점했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양적 성공을 이룩한 이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은퇴하고 있고, 그 후임자들은 선임자보다 학력도 높고 다양한 스펙을 갖추었지만 대개 카리스마 리더십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게다가 양적 성장이라는 성과를 이룩할 가능성은 현저히 줄었다. 또한 교인들의 학력은 점점 상승했고, 사회적 지위도 매우 높은 이들이 많다. 과거 목사가 지역 유지였던 시대와는 달리 지금은 그리 존경받는 위상을 갖고 있지도 못하다. 그러므로 목사가 더 힘 센 교회의 비율은 점점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혈통적 세습을 원한다 하더라도 그것에 성공할 이들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대형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위의 []에서 정리한 것처럼, 앞에서 시공간적 변화에 따라 다르게 특성화된 대형교회의 세 범주를 언급했는데, 이중 세 번째 범주는 수평이동한 떠돌이 신자들이 대거 정착함으로써 대형교회에 진입한 교회들을 가리킨다.[각주:32] 이때 수평이동신자는 중년층이 보다 많고 교회에서 주요직분을 경험했던 신자들이 많다. 또 학력이나 사회적 신분, 자산능력도 비교적 높은 층이 많다.[각주:33] 요컨대 이들은 주권의식이 보다 강한 신자들이다. 그들은 교회를 찾아 떠돌아다니면서 여러 목사들의 설교와 교회 프로그램들도 비교검토하고 교회신학적 서적들도 많이 탐독하며 교회 밖의 고급 강좌들을 수강했던 이들이 많다. 그들은 일종의 소비자의 자의식으로 교회를 선택한다.



그러므로 이런 자존성 강한 떠돌이신자들을 유치하고 정착하게 하는 데 성공한 교회들은 그들의 기호에 맞추는 선교전략상의 성공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교회들의 담임목사의 리더십은 어떠할까? 소비자 같은 자의식을 가진 신자들의 기호가 다양한 만큼 목사의 리더십 유형도 단순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과거처럼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이제 시대착오적임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들 떠돌이 신자들은 자수성가형 성장지상주의와는 달리 문화적인 고품격을 추구하는 귀족형의 소비자적 주체로서 교회를 선택, 소비하고자 한다. 나는 이러한 문화적인 귀족적 종교성을 웰빙신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각주:34] 주지할 것은 이런 신앙은 자산, 신분, 학력 등에서 안정계층에 보다 친화적이다.

요컨대 혈통적 교회세습에 대한 시민사회의 우려와 비판은, 내가 보기에는, 그 센세이셔널한 현상에 집착하다 숲의 문제를 읽지 못한 채 썩은 나무만을 찍어내려고 하는 관중규표(管中窺豹)의 오류가 될 수 있다. 그 대나무구멍()의 바깥에는 95% 이상이나 되는 교회들에서 담임목사가 혈통적 세습이 아닌 방식으로 임용되고 있다. 그런데 그 방식은 정당한가? 그것은 부당하지 않고 부조리하지 않은가? 그것은 사회적 특권화를 조장하고 공공성을 훼손할 우려가 없는가?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혈통적 교회세습이 아니더라도 권력세습이 횡행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문제제기인 것이다.

정치학자인 새무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 최소한 세 번의 정권교체가 있어야 민주주의의 공고화(democratic consolidation)가 일어난다고 말한 것처럼,[각주:35] 교회도 기존의 권력을 전도시키는 담임목사 임용이 적어도 세 번 이상 일어나야 권력세습을 지양하는, 사회적 공공성의 장소로서의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여기서 나는 권력세습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있다. ‘세반연에 의하면 지역교회와 교회 유관기관에서 혈연에 의해 발생하는 대물림교회세습이라고 표기했다. 그런 점에서 교회세습은 혈통적 세습에 방점이 찍힌 개념이다. 그런데 나는 권력의 대물림에 방점이 찍힌 용어로서 권력세습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창세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이브의 죄의 문제를 공적인 것의 사유화로 봄으로써 ()의 문제를 권력의 반독점이라는 의미로 해석한 바 있다.[각주:36] 즉 권력의 대물림을 해체하려는 신앙적 기조를 안병무는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공의 장소인가 권력의 장소인가? 혈통적 세습을 단행한 교회든 그렇지 않은 95% 이상의 교회든 간에 교회가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가, 아니면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으로 바꾸고 사적인 것을 전유하는 자들의 대열에 끼어드는 것을 강조하는 신앙운동 참여하고 있는가?

공의 사유화 운동의 장(field), 그런 권위주의적 소통의 공간이 오늘의 교회라면, 성서에 등장하는 유다국의 개혁군주 요시야 왕의 핵심 슬로건인 산당을 폐하라는 말은 바로 오늘의 교회를 향한 비판신학적 어젠다이기도 하다.[각주:37]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1995년 이후의 대형교회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수평이동을 거듭하던 비평적 신자들과 그들을 유치정착시키려는 교회가 함께 만들어낸 새로운 신앙유형인 웰빙신앙은 카리스마적 리더보다는 탈권위주의적인 리더를 선호함에 따라 혈통적 세습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 교회 유형을 소환해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후발대형교회라는 이념형적 용어로 규정한 바 있다.[각주:38] 즉 후발대형교회에서는 혈통적 교회세습을 억제하는 프레임이 통용되는 소통의 장이다. 즉 대형교회 유형 가운데 특권적 신자들의 존재가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된 교회 양식이 바로 후발대형교회라는 것이다. 한데 이 유형의 교회들에선 공을 사유화하려는 권력의 작용은 없는가, 바로 이 점이 나의 관심거리다.

안타깝게도 후발대형교회에서도 목사 임용에 관한 정보는 신자대중에게 거의 소개되지 않았고 목사 임용 과정에도 참여할 통로가 매우 제약되어 있다. 반면 특권적 엘리트 신자는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교회의 인사에 관한 것이든 운영에 관한 것이든 충분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고 그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갖고 있다. 이렇게 특권적 엘리트 신자와 신자대중 간의 정보의 비대칭성과 참여의 비대칭성은, 그들의 사회적 역할에서도 대체로 비슷하게 나타나곤 한다. 즉 대형교회의 특권적 엘리트 신자들은 사회에서도 특권적 시민의 위치를 점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들은 교회에서처럼 사회에서도 정보와 참여에서 특권적 지위와 역할을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들의 웰빙적 취향과 행위에 대한 우월감이 특권의 정당화 기재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웰빙적 취향이 특권적 지위의 결과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은폐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에서 교회세습이 아닌 권력세습의 관점에서 교회와 권력에 관하여 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문제제기하고자 했다. 그런데 권력세습이 일으키는 사회적 파급력은 행사되는 권력의 크기와 비례한다. 물론 일상의 권력, 미시적 권력, 내면의 권력도 주목할 필요가 있지만, 권력세습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미치는 사회적 파급력의 문제와 보다 긴밀히 얽혀 있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사회의 특권적 엘리트이자 교회의 특권적 엘리트가 즐비한 대형교회는 이 논의의 가장 중요한 현장이다. 특히 목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보다는 탈권위적 권위의 리더십으로 특징지울 수 있는 후발대형교회는 특권적 목사만이 아니라 특권적 신자를 이야기하는 데 더 적합하다. 이러한 분석틀 위에서 시민의 직접적 참여의 공간을 찾아내고자 하는 직접민주주의적 상상력과 대응하는 신자대중의 직접적 참여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교회적 공론의 장을 만들어 내는 것은 권력세습에 대한 비판적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성서 해석을 논하고 교회 제도를 논하며 신자의 사회적 역할을 논하는 탈권위적 공론장을 형성하고자 하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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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한문덕 목사의 논평글입니다.

 


<교회의 권력세습과 후발대형교회> 논평

 


한문덕 (생명사랑교회 목사)

 

 

교회의 권력세습과 후발대형교회”(김진호)는 한국개신교 교회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교회세습(또는 혈통적 목사세습)의 특징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시민 사회의 우려를 비판적 시각에서 고찰하여, 궁극적으로 교회의 권력세습이 더 본질적인 문제임을 밝혀 후발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보이고 있는 새로운 권력의 형태를 한국의 개신교회가 어떻게 지양하고 하느님 나라의 공공성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살피는 글이다.

 

김진호 연구실장은 1997년 충현교회의 담임목사 세습 이후 2천 년대부터 많은 대형교회들에서 혈통적인 목사세습이 연이어 단행된 사실에 주목하여 몇 가지 특징을 추려내고 있다. 첫째 2천 년대 이후에 혈통적 교회세습 현상이 만연하기 시작했고, 둘째 수도권에서 극심하였으며, 셋째 중소형교회보다 대형 교회가 더 심각하고, 넷째 교파별로는 감리교단에서 더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각각의 특징에 대해 김진호 연구실장은 아래와 같이 해석한다. 한국 개신교 교회의 특징은 교파를 막론하고 장로교식 교회정치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장로교식 교회정치는 목사와 장로 사이의 주도권 경쟁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이런 상황에서 20년 이상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재직하며 교회성장에 성공한 교회에서는 장로보다 목사에게 권력이 더 집중되는데 이들이 은퇴하는 시기가 바로 2천 년대에 집중되었기에 첫째 특징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둘째 수도권에서 목사세습이 더 극심한 이유는 교회의 대형화가 서울의 인구 집중화 현상, 즉 과잉도시화에 따른 국가의 공간 확장 대책으로 인해 새로 탄생하게 된 수도권들의 인구 집중화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대체로 이촌향도를 통하여 수도권에 몰린 사람들의 신자화, 강남권으로 이주한 젊은 중산층의 신자화, 수평이동 신자들의 정착의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이렇게 교회 성장을 이룬 목사들의 은퇴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성장한 대형교회는 혈통적 목사세습을 단행하게 된 것이다. 셋째 중소형교회보다 대형교회가 더 많이 혈통적 목사세습을 하고 있는 이유는 초대형 교회의 교회운영이 카리스마 리더십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담임목사 재임기간의 장기화와 카리스마 리더십을 통한 교회성장과 교회운영, ‘원로목사제도의 발명 등을 통해 대형교회는 중소형 교회보다 훨씬 더 목사의 혈통적 세습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감리교단에서 목사세습이 더 많이 이루어지는 것은 감리교단이 목사파송과 교회운영 시스템에서 개별교회의 자율권을 제도적으로 제한하고, 구역회-지방회-연회로 이어지는 피라미드형 교회간 네트워크를 통한 통제력을 제도화하여 평신도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감독을 중심으로 한 교회정치 제도를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피라미드 구조의 네트워크로 운영되는 구조 속에서는 자본이 매우 중요해지는데 결국 이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대형교회가 권력을 지니게 되고, 그런 상황에서 감리교단의 대형교회 목사세습은 더 쉽게 이뤄지는 것이다.

이런 분석과 더불어 김진호 연구실장은 시민사회가 혈통적 목사세습에만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 즉 실제로 0.5% 밖에 되지 않는 혈통적 목사세습과는 상관없는 95%의 교회가 진행하는 목회자의 임용에서 발생하는 권력 작용에 대해서는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의 목사청빙 과정에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혈통보다도 권력의 세습임을 지적한다.

 

따라서 혈통적 목회세습 또한 결국은 권력세습의 한 형태일 뿐이며, 교회가 기존의 권력을 전도(顚倒)시키는 담임목사 임용이 적어도 세 번 이상 일어나야 권력세습을 지양하는, 사회적 공공성의 장소로서의 교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발제자가 새롭게 정의내린 후발대형교회의 권력 작용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관심을 보인다. “후발대형교회는 상대적으로 탈권위주의적인 리더를 선호함에 따라 혈통적 세습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교회 유형을 소환해 냈으나, 목사 임용이나 교회의 운영 과정에서 특권적 엘리트 신자들과 목회자가 권력 공유를 통해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소수의 특권적 신자들은 교회뿐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특권적 시민의 위치를 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따라서 혈통적 목사세습의 관점이 아니라 권력세습의 관점에서는 사회적 파급력의 문제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혈통적 목사세습을 포함하여 권력세습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시작점은 시민의 직접적 참여의 공간을 찾아내고자 하는 직접 민주주의적 상상력과 대응하는 신자 대중의 직접적 참여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교회적 공론의 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발제자는 주장한다.

 

김진호 연구실장은 우리 주변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교회의 목사세습의 문제를 다루면서 혈통적 목사세습의 특징들을 잘 분석하였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혈통적 목사세습에 대해 우려를 가진 시민사회의 비판적 시각이 실제로 한국 개신교 교회의 권력 세습 전체를 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직시하며, 더 이상 혈통적 목사세습 유형이 아닌 탈권위적 리더십을 보이는 후발대형교회들의 권력 세습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함을 주장한다. 이 발표문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서 더욱 빛난다. 논평자도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발제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혈통적 목사세습만을 바라보는 것이 관중규표(管中窺豹)의 오류가 될 수 있음을 직시하면서 담임목사 임용을 포함하여 모든 교회의 운영과 활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권력의 구조와 집중화에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실제로 목사세습의 방식이 아닌 95%의 교회의 목사임용 과정에는 다양한 종류의 권력이 작동한다. 발제자가 밝힌 대로 한국의 개신교회가 대체로 장로교적 교회정치를 따르고 있기에 목회자 임용도 당회(목사+장로)의 권한이 매우 크고, 각 교단의 헌법 또한 대체로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목회자를 공개적으로 모집하고 선발하고 청빙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매우 일천하고, 투명하고 올바른 민주적 절차 없이 노회의 개입이나 전임 목회자의 간섭, 교회의 소수 권력의 입맛에 맞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혈통적 목사세습은 바람직하지 못한 목회자 청빙 사례의 일부분일 뿐인 것이다.

 

김진호는 1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의존했던 선발대형교회와는 달리 목회자와 특권적 소수의 평신도의 연합으로 권력의 양상이 재편되는 후발대형교회에 주목하고, 후발대형교회 안에서 정보와 참여기회를 갖지 못하는 대다수 신자대중의 참여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시한다. 제한된 지면으로 인해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 대안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성서 해석을 논하고, 교회 제도를 논하며, 신자의 사회적 역할을 논하는 탈권위적 공론장을 형성하고자 하는 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은 목회자 1인에게 집중되든,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게 집중되든 권력을 사유화하지 않고 공적인 것으로 돌려야 한다는 신앙 운동의 근원에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논평자는 발제자의 분석과 지향에 공감하면서 몇 가지를 첨언하여, 발제자의 더 깊은 논의가 계속되기를 기대해 본다. 결국 중요한 것은 교회내의 탈권위적 공론의 장을 만들고, 교인들의 직접 참여의 공간을 늘리는 민주적 교회운영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 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런 지점에 대해서 발제자의 의견을 더 듣고 싶다.

 

성서 해석에 대한 개방성, 교회 제도의 갱신, 신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공론이 가능하려면 기존의 목회자들이나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지니고 있는 권위 의식을 내려놓아야 하고, 민주 시민의 의식이 민주사회의 질을 보장하듯이, 다수의 일반 교인들의 성숙한 신앙의식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다수신자가 참여하는 탈권위적 공론의 장이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의 현장, 발제자가 말하는 후발대형교회의 현장은 세련된(?) 목회적 감각을 지닌 목회자와 특권을 지닌 소수의 엘리트 신자들의 결합을 통한 운영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들이 제공하는 교회의 다양한 활동에 그저 만족하고 그것을 누리려는 대다수의 평범한 신자들의 공모의 장소이며, 목회자, 소수 엘리트 신자, 신자대중의 이런 암묵적인 합의 속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목회가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모든 종교는 태생적으로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을 지향하면서 힘에 대한 숭배를 그 근원에 지니고 있으며, 유한성을 지닌 인간의 불안과 허무를 일시적으로나 잠재워주는 안정성을 미끼로 신자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이 지닌 욕망을 채워주고, 안정성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유지해 왔다. 발제자도 지목하는 바, 대형교회의 중산층 신자들의 웰빙적 취향은 특권적 지위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중하위계층의 선망하는 대상이 되었고, 중하위계층이 후발대형교회를 통해서 지위 상승의 가능성을 엿보는 것과 특권층이 자신의 권력을 누리는 것이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면서 새로운 권력은 계속 생성되고 유지된다. 이러한 힘 숭배와 안정 지향적 성향, 욕망의 구조를 어떻게 깨뜨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되는 것이다.

 

교계의 진보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이 함께 힘을 모아 새롭게 싹을 틔우는 작은 교회 운동이 이런 권력세습의 장을 비판하고 새로운 교회의 모델을 제공하는 가능성의 장소로 제시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대다수의 작은 교회는 생존 자체의 위협, 목회자와 리더 그룹의 비전문성, 민주적 소통의 미성숙, 신앙의 유아적 특성을 보이는 등 규모만 작을 뿐 한국 개신교가 지니고 있는 문제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금기시 되었던 목사의 이중직 논의가 충분히 무르익기도 전에 이미 현실화 되고 있으며,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가나안 교인의 증가와 인구 감소에 따른 교회 공동체의 노화현상 및 교인의 감소가 진행되고 있다. 신학대학/대학원들의 신입생 미달 상황이 보여 주는바 목회자 수급의 불균형 및 목회자가 지녀야 할 전문성과 인격의 함양 또한 담보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작은 교회 운동은 여전히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민사회가 성숙할수록 비민주적 방식의 교회 운영 및 권력의 세습은 차츰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특권적 시민들의 친교와 상호이익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후발대형교회들은 자신들이 지닌 경제적 사회적 자본의 자체적 동력과 경건함으로 포장된 욕망이 작동하는 한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논평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자연과학의 발달과 시민사회의 변화에 따라 종교 그 자체의 존재 의미가 점차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이때에 개신교 교회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예수 운동이 보여 주었던 진정한 복음을 회복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즉 교회가 자기보존을 위해 신경 쓰지 말고, 지금보다 훨씬 더 시민사회와 소통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바꾸고, 성서 또한 거룩한 문서가 아닌 인류의 지혜를 담은 고전으로 일상에서 의미를 제공하는 책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사회 복지시스템의 사각지대에 있는 부분들을 함께 감당하면서, 지역 사회를 위한 봉사, 마을공동체 살리기 운동 등을 통해 이 사회의 소외층과 함께 하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목회 생태계가 선순환 될 수 있는 안정망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즉 뜻 있는 활동이 지속될 수 있는 장을 여는 교단 차원의 노력이 요구된다. 작은 교회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연합활동이 될 것이다. 대형교회/초대형교회의 권력 중심의 목회시스템이 아닌 네트워크 방식의 교류협력[각주:39]을 통한 작은 교회들의 생존과 운동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교회가 필요 없듯이 교회는 자기 포기의 길을 걸어야 한다.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신학자 알프레드 루아지가 말했듯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뒤에 온 것은 교회였다.” 교회는 지상 권력의 사적 소유를 무력화 시키고 누구나에게 열린 하느님 나라 운동을 통해서만 그 존재이유를 발견한다. 그런데 교회가 공적인 것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대물림하려고 한다면 그런 교회는 사라지는 것이 오히려 좋을 것이다.

  1. 배덕만, 〈교회세습에 대한 역사신학적 고찰〉(심포지엄 ‘교회세습, 신학으로 조명하다’, 2013)(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 문서자료실, http://www.seban.kr/home/index.php?mid=sb_library_document&document_srl=4336&listStyle=viewer&page=2) [본문으로]
  2. ‘대형교회’로 번역된 메가처치(mega-church)는 통상 일요일 대예배에 참석한 성인 교인수가 2천 명 이상의 교회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3. ‘초대형교회’로 번역된 기가처치(giga-church)는 통상 일요일 대예배에 참석한 성인 교인수가 1만 명 이상의 교회를 지칭한다. [본문으로]
  4. http://www.seban.kr/home/sb_what_map [본문으로]
  5. https://newkmc.modoo.at/?link=3tmk3lo8 [본문으로]
  6. 〈‘세습 지도’ 성복교회・부천성문교회 등 28가 추가〉, 《뉴스앤조이》 (2018.01.03.)[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14202] [본문으로]
  7. http://www.seban.kr/home/sb_what_sesub [본문으로]
  8. 주3)의 자료 참조. [본문으로]
  9. 주6) 참조. 그러나 두 기관이 엄밀하게 기준에 맞게 통계 낸 것이 아닌 데다, 그것을 취합한 《뉴스앤조이》의 결과도, 두 기관의 것을 기준상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취합한 것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본문으로]
  10. 같은 자료 참조. [본문으로]
  11. 같은 자료 참조. [본문으로]
  12. 한국갤럽이 한국인의 종교실태에 대한 5차에 걸린 조사결과 보고서인 《한국인의 종교 1984~2014》에 따르면 주1회 이상 일요일 예배 참석률은 2014년의 경우 80%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한국인 종교·신앙의식 조사’에서는 2017년 일요일 대예배 출석률을 76.7%로 집계했다. 이 조사대로라면 5천 명이 재적인 교회는 대략 3,800~4000명이 주일 예배에 참석한다. 하지만 실제 숫자는 이보다 더 낮을 가능성이 있다. 가령 가톨릭의 경우 한국갤럽의 조사결과는 같은 해 가톨릭 주교회의 ‘2014년 한국 천주교회 통계’ 분석 결과인 20.7%보다 3배나 높은 59%였다.(http://www.c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565924&path=201504) 그렇다면 개신교회에서 5천 명 이상인 교회의 실제 예배 참석한 2,000~3,000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그리 무리해 보이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13. 교회경쟁력연구센터 엮음, 《한국교회 경쟁력 보고서》 (교회성장연구소, 2006), 37쪽. [본문으로]
  14. 《뉴스앤조이》가 현재까지 추산한 세습교회 수가 350개이고 이중 재적 5000명 이상의 교회는 24개 이상이다. [본문으로]
  15. 명성교회가 2017년 11월12일 담임목사의 부자세습을 강행하자 JTBC는 11월14일, 27일, 12월7일 세 차례에 걸쳐 비판적 보도를 하고 무수한 오・오프라인 언론들이 앞다투어 집중보도한다. 이후 이 문제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교회세습에 대한 비판적 담론 프레임이 조성되었다. 이에 《뉴스앤조이》는 12월 말에 교회세습 제보를 받기 시작했고, 1주일 만에 70여건의 제보가 들어왔다고 한다. 최승현, 〈‘세습 지도’ 성복교회·부천성문교회 등 28개 추가〉, 《뉴스앤조이》(2018.01.03.) 참조. [본문으로]
  16. 2017년 11월13일 ‘2017년 미래교회포럼’에서 발제한 글 〈한국 장로제도의 반성과 개혁〉(http://reformedjr.com/board05_04/7039) 참조. [본문으로]
  17.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각 2005년도 교단 총회보고서들을 취합하여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한국개신교 교인 중 장로교 교인수는 전체의 69%, 성결교는 11%, 감리교는 10%, 기독교침례회는 5%, 순복음계열의 교회는 4%, 기타 1%라고 한다.(http://missionmagazine.com/main/php/search_view.php?idx=365) [본문으로]
  18. 박종현, 〈한국 오순절 운동의 영성―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성과 성장에 대한 시대사적 회고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 82(2008.4), 11~12쪽 참조. [본문으로]
  19. 김진호,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주권교인’의 탄생. 김진호의 ‘웰빙-우파와 대형교회’(3)〉, 《주간경향》 1265호(2018 02 27) 참조. [본문으로]
  20. 위의 박종현의 글, 12쪽. [본문으로]
  21. http://study.zum.com/book/12468 참조. [본문으로]
  22. 이에 대하여는 한종수・계용준・강희웅, 《강남의 탄생―대한민국의 심장도시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미지북스, 2016), 1・4・7장 참조. [본문으로]
  23. 이에 대하여는 나의 책 《시민 K 교회를 나가다―한국개신교의 성공과 실패 그 욕망의 사회학》(현암사 2012), 제1부 5장 참조. [본문으로]
  24. 물론 빌리 그레이엄 부흥회를 포함한 아메리카식 부흥회가 이 시기에 또 다른 신자들의 대대적인 증가를 낳았는데, 이것은 많은 중산층 대중과 젊은층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데 기여했다. 같은 책 제1부 6장 참조. [본문으로]
  25. 이광순・이향순, 〈도시의 발달과 도시 선교〉, 《선교와 신학》 10(2002.12); 장형철, 《도시발전과 초대형 교회건축―서울을 중심으로〉, 《종교와 문화》 26(2014) 참조. [본문으로]
  26. 이에 대하여는 미출간된 나의 책 《월빙우파와 대형교회》(메디치미디어, 근간)》을 참조. [본문으로]
  27. 홍영기, 《한국의 초대형교회와 카리스마리더십》 (교회성장연구소, 2001) 참조. [본문으로]
  28. 주18) 참조. [본문으로]
  29. 같은 글, 13쪽. [본문으로]
  30. 실제로 조용기는 《국민일보》를 아들에게 세습했고, 인천순복음교회의 최성규는 아들에게 세습했다. 그리고 은혜와진리의교회의 조용묵은 나이가 70대 중반으로 은퇴시기가 지났음에도 아직 담임목사로 재직하고 있다. [본문으로]
  31. 주28) 참조. [본문으로]
  32. 한국개신교에서 수평이동 신자들의 비율은 대략 45~75% 정도가 된다. 낮은 수치는 한국목회자협의회의 2012년 조사인데, 45.2%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반면 높은 수치는 교회성장연구소의 2003년 조사인데, 76.5%라는 충격적인 결과치를 발표했다. 한국목회자협의회. 《한국기독교 분석 리포트》(도서출판 URD, 2013), 72쪽; 교회성장연구소, 《한국교회 교인들이 말하는 교회 선택의 조건》(교회성장연구소, 2004), 35쪽. 한편 최현종의 조사에 의하면 대형교회의 수평이동 신자의 정착율이 다른 규모의 교회들에 비해 가장 높았다. 최현종, 〈한국개신교의 새신자 구성과 수평이동에 관한 연구〉, 《한국기독교신학논총》 91/1(2014.1), 222쪽. [본문으로]
  33. 최현종의 논문 223~224쪽 참조. [본문으로]
  34. 나의 글 〈‘웰빙우파’와 대형교회―문화적 선진화 현상으로서 후발대형교회 읽기〉, 《당신들의 신국―한국사회의 보수주의와 그리스도교》(돌베개 2017) 참조. [본문으로]
  35. 새뮤얼 헌팅턴, 《제3의 물결―20세기 후반의 민주화》(인간사랑, 2011), 369쪽. [본문으로]
  36. 안병무, 〈하늘도 땅도 공이다〉, 《신학사상》 53(1986 여름) 참조. [본문으로]
  37. 나의 책 《산당을 폐하라―극우적 대중정치의 장소들에 대한 정치비평적 성서 읽기》(동연, 2016), 머리글 참조. [본문으로]
  38. 주34)에 인용된 글 참조. [본문으로]
  39. 마커스 보그가 제안 하는 바 문자-사실주의/교리적 성서 읽기가 아닌 역사-은유적 방법의 성서 읽기를 통한 개방적 성서 읽기, 교회 운영의 민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마련 및 공유, 교육 프로그램의 공유와 연합활동 등 [본문으로]

이 글은 종교문화비평26(2014)에 수록된 특집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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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과거현재미래

공공성에 대해 묻다

규범적 공론장의 형성과 변화를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