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교회 2012년 9월 9일에 했던 설교를 수정보완하여 [맘울림] 33호(2013년 1월)에 게재하였고,
이를 재수정하여 나의 책 [산당들을 폐하라 - 극우적 대중정치 장소들에 대한 정치비평]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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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성찰하라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권력과 일상에 관하여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마가복음〉 2,27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HfG Karlsruhe) 교수인 한병철 선생이 쓴 《피로사회》(Müdigkeits-gesellschaft)는 2010년 독일에서 출판된 이후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오늘 우리가 사는 후기자본주의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불렀다. 이는 일종의 문명사적 진단으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말한 ‘규율사회’에서 이행한 사회의 지배 양식이라는 것이다.
체벌사회 | ⇒ | 규율사회 | ⇒ | 피로사회 |
전근대사회 | 근대자본주의사회 | 후기자본주의사회 |
‘규율사회’란, 신체를 가혹하게 다룸으로써 대중을 교화하던 전근대적 체벌사회를 대체하여, 정신적 규율을 통해 사람들을 사회에 순응하게 하는 근대 자본주의적 지배의 형태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감시의 체계’를 통해 실현된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았다”(〈로마서〉 5,13)는 바울의 말은 율법이 내면적 감시의 장치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율법은 이스라엘 신앙사에서 문자 해독층이 급증했던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제국 시대에 중요한 신학적 요소로 등장하였다. 그 전에는 제사가 가장 핵심적인 종교적 통합의 장치였다. 제사는 시각, 청각, 후각적 지각을 통해 신의 지엄함을 과시한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은 제사종교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제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통제하지는 못한다. 왜냐면 제사가 사회를 효과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점점 더 큰 이벤트적 행사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즉 이벤트는 일상이 될 수 없다. 일상이 된 이벤트는 더 이상 이벤트가 아닌 것이다. 하여 점점 이벤트에 의존하는 제사, 특히 국가 차원의 제사는 일상에서 사람들에게 신에 관하여 속삭이는 종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율법은 문자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말의 종교가 작동하기 시작되는 것이다. 하여 율법은 사람들의 일상에서 작동하는 종교적 장치다. 율법은 회당에서, 사랑방에서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반복적으로 되새김함으로써 생각 속에 자리 잡는다. 그리하여 그렇게 자란 사람들은 율법이 내면의 소리로서 생각과 삶을 감시함으로써 사회에 통합되었던 것이다.
바울이 2천 년 전 간파해냈던 사회적 지배의 양식을 현대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 양식으로 재발견한다. 물론 그는 훨씬 정교하고 훨씬 다양하게 작동하는 사회적 통합의 메커니즘을 발견했다.
한데 한병철 선생은 그러한 감시의 체제를 통한 규율사회가 아닌 피로사회가 지금의 우리네 삶을 통제하는 체계임을 말한다. 그에 의하면 규율사회는 감시에 의해 ‘해서는 안 된다, 할 수 없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통해 자기를 규율하는 ‘부정성의 사회’였다면, 피로사회는 ‘할 수 있다’는 ‘자기 긍정적 믿음’을 갖고 성과를 향해 질주하는 사람들의 사회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한 긍정의 자의식으로 무장한 질주하는 사회의 인간은 무수한 낙오자를 낳기 마련이다. 할 수 있다, 원하면 이루어진다 같은 자기 긍정적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결과가 그렇게 긍정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실은 그런 믿음은 모든 사람을 잠재적 낙오자로 만든다. 왜냐면 누구나 자기가 이룰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것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심한 심리적 압박감을 감내하게 되며, 그중 일부는 병증을 드러내게 된다고 한다. 소진성 우울증 같은 질환 말이다. 만약 그렇게 우울증이 단순한 기분 상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는 잘 조절하기 어려운 상태, 즉 질환으로 나타나면, 몸과 정신이 반응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몸이 스트레스 조절에 실패하여 무력감에 빠지고 우울 증상을 드러내며, 종종 자기조절체계와 면역체계가 약화되어 당뇨나 심장질환 등 각종의 신체적 질병으로 이어지곤 하는 것이다.
한병철 선생이 활동하는 독일사회는 1990년대 이후 세 사람에 한 명 꼴로 이런 심리적 장애를 나타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1세기의 가장 심각한 질병 중 하나를 직업적 스트레스 질환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런 점에서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선진국형 사회의 지배 메커니즘이며 소진성 우울증상을 선진국형 질환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한데 나는 한병철 식의 피로사회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려 한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긍정을 통한 성과주의에 몰두하다가 자기가 소진되어 버리는 사람들이 과거보다 현저히 많아졌음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자기를 소진시킬 노동의 기회조차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후기자본주의적 질서 속에 질주하는 사람들의 세계는 대개 이렇게 노동배제의 체험이 일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나는 그의 견해에 다 동의 할 수 없다. 기계화는 노동의 기회를 더욱 줄였고 신자유주의적 경영은 비정규직화를 양산했으며 지구화는 이민자를 급증시켜 노동배제의 상황이 심화되지 않았던가.
독일의 국립전염병연구소인 로베르트코흐연구소(Robert Koch Institute, RKI)는 이러한 노동배제의 상황에 내던져진 이들이 병에 더 잘 걸리고 더 많이 죽는다는 연구보고서를 냈다. 그것은 자기긍정에 기초한 성과주의에 몰두하다 자기 자신이 소진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궁핍과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무력해지고 우울증상을 드러내며 자기조절체계와 면역체계가 악화되어 각종 질병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기초생활수급자제도 같은 사회복지의 수혜자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어느 사회든 사회복지제도가 보호할 수 있는 대상보다 보호받으려는 대상이 훨씬 많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수혜자가 되는 이들을 선별하는 일은 사회부조형 복지제도를 운영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해서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고정수입이 얼마 이하여야 한다든가, 자기 소유의 부동산이 없어야 한다든가, 부양할 가족이 없어야 한다든가 등등. 한데 이 조건들은 모두 부정성의 지표들이다. 덜 가졌고, 더 무능력하고, 도움을 받을 다른 통로가 더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지표들이다. 수혜자가 되려는 이들은 이런 지표들에 따라 자신의 ‘결핍’을 증명해 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능력을 입증해야 기회를 누리는 것과는 정반대로 결핍을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이 반복되면 그이들은 생각 자체도 결핍의 존재가 된다.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이런 이들을 무능력자라고 한다. 곧 사회복지제도는 자칫 무능력화의 장치가 될 수 있다. 딜레마다. 자존 능력이 없는 이에 대한 사회부조는 절실히 필요한데, 그 제도는 종종 수혜자인 사람들의 거덜난 자존성을 더욱 약화시킨다.
이것은 국가의 사회복지 체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사회복지가 잘 발달된 사회일수록 다양한 공적 사적 복지기구가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열악한 환경의 사람들은 무수한 자기부정을 통해 생존의 기회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사회복지제도는 자기긍정이 아니라 자기부정을 통해 주체화되는 이들을 양산한다.
무수한 자기부정을 통해 주체화된 이들은 자신의 현실에 주눅 들어 있고 막막한 미래에 절망하고 있다. 그럼에도 소비사회의 부풀려진 욕망들은 그들의 영혼 속으로도 예외 없이 파고들어간다.
이러한 존재의 불일치 속에서 사람들은 욕망을 억제하는 자기관리보다는 욕망의 대체물에 더 탐닉하게 마련이다. 술과 담배에 찌들고, 탐욕스런 식습관에 매이고, 심지어는 마약을 상습복용하기까지 하며, 친구, 이웃,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때때로 범죄자가 된다. 하여 이들은 건강도 악화되지만 범죄에 노출될 확률 또한 더 높아지는 것이다.
최근 우리사회에 이른바 ‘묻지마 범죄’가 도처에서 일어나고 충격적인 (아동)성범죄가 연이어 터지면서 이들에 대한 법률적 응징을 강화하려는 여론이 빗발치고 있다. 약자에 대한 돌봄을 얘기하면서도 눈앞의 약자가 저지른/를 위험성을 과장하고 그를 적대시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그 한 예가 ‘아동 성폭력 범죄’에 대해 악마 담론이 부상하고, 그런 이들을 영원히 격리시키는 것으로 사회 청정화가 실현될 수 있다는, 이른바 형사국가적 여론이 크게 확산되고 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형사국가란 위험한 자를 거의 종신에 가깝게 격리 수감하는 방식으로 치안을 유지하려는 제도를 뜻한다. 이것은 비단 범죄자에 한정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 2002)에서 미래사회의 모습으로 그려냈던 것처럼, ‘예방적 치안 시스템’을 작동시켜 이른바 범죄 없는 사회를 만들어내고자 하려는 욕구가 넘실거린다. 한데 이런 식의 욕구는 종종 특정 집단을 가상범죄자로 간주하는 대중적 허상을 만든다. 흔히 이런 가상범죄자로 간주되는 이들은 이민자, 빈민, 성소수자, 부랑자 같은 이들이다. 하여 이들을 그 실체적 범죄 행위와 상관없이 ‘잠재적 범재자화’ 하는 제도들로 나타나게 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존속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은 생각까지도 형사적 문제로 다루는 법제라는 점에서 과잉형사화의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또 최근의 테러금지법도 마찬가지 우려를 남긴다. 복면금지법의 경우도 말할 것도 없이 과잉형사화라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밖에 사회적 편견에 기대어 형사적 대상을 확대하려는 시도들이 특히 MB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 더 많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그런 것들에 대한 정부차원의 자정장치인 국가인권위원회를 무력화시킨 것과 병행한다.
권력은 일상을 통제하는 능력, 심지어는 자기 내면을 통제하는 능력을 통해 더 완성도 있는 수준의 통제의 장치가 된다. 그런 논지를 명쾌하게 보여준 것이 푸코의 규율사회론이었다. 한데 형사국가화는 그런 규율사회의 가해자가 더 이상 지배자들에 국한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민 자신이 그런 가해적 사회의 지배자들이다. 자신이 일상 권력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사회, 아니 많은 경우에 지배-피지배의 피라미드 속에 얽혀 들어가 가학성과 피학성을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데 시민이 비시민에 대한 가학성을 욕망하는 것은, 긍정적 믿음이든 부정적 결핍감이든, 자신이 겪고 있는 저 피로감, 결핍감, 공포감을 회피하려는 무의식적 충동일 수 있다. 해서 규율사회든 피로사회든, 사람들은 가학성의 존재로 타자를 (무)의식적으로 공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병철 선생은 피로사회의 대안으로, 소질성 질환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기 내적 가능성으로, 그리고 어쩌면 타자에 대한 가학성의 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내적 가능성으로, 성과의 예외지대를 자기의 일상에 설치하는 행위를 얘기한다. 예컨대 안식일이 그렇다. 1951년 유대교 사상가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 1907~1972)이 했던 안식일 해석은 한병철의 예외지대를 한병철보다 더 적절하게 설명한다. 6일간의 창조는 신이 공간을 점령하여 생산적 세계를 만들어간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6일간의 노동은 공간을 점령하는 생산적 창조의 과정이다. 한데 신이 그 행위를 멈추고 쉼을 선택한 시간이 안식일이다. 하여 그날 사람들은 노동을 멈추고 자기를 성찰하라고 그는 권한다. 성과사회에서 자기를 성찰하는 인문학적 사색은 쓸모없는 시간 활용에 속한다. 한데 헤셸처럼 한병철도 그 시간을 성과의 예외시간으로 두는 행위를 피로사회를 견디는 방법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절반만 옳다. 안식일에도 쉼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는 그날에라도 일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이가 있고, 누구는 그날에도 영락없이 일해야 하는 비정규직의 서러움을 감내해야 하는 이가 있다. 또 누구는 그날 시험을 치러야 하거나 수시로 있는, 바늘귀 같은 시험을 통과해야만 미래를 간당간당하게라도 꿈꿀 수 있는 이가 있다. 혹 누구는 안식일에 쉼의 소중함을 누릴 만큼 안식일이 아닌 날 노동할 기회 자체가 없는 이가 있다. 하여 까딱하면 그이들은 안식일뿐 아니라 모든 날을 그렇게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을 형사국가는 잠재적 범죄자로 규정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이들에게 안식일은 성찰의 시간일 수 없다. 이에 대해 예수는 안식일을 성찰하며 보내라고 하는 대신 안식일 자체가 성찰하라고 일갈한다.(〈마가복음〉 2,27) 성과사회에서 소진되어 잠재적 범죄자의 대열로 추락하지 않으려 하기보다 그런 사회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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