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처음 한백교회 2012년 6월 3일에 했던 설교했던 원고였고,
이를 크게 수정 부완해서 종교인 네트워크가 주관한 <종교인 과세와 사회적 공공성의 실현 워크샵>(2012.6.12. 만해NGO교육관)의 발표글로 다시 쓰였다.
이것은 [공동선] 2012년 7-8월호와 웹진 <제3시대> (2012.6.29)에 게재되었다.
이 원고를 최종 점검하여 [산당들을 폐하라 - 극우적 대중정치 장소들에 대한 정치비평]에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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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밀월성과 시끄러운 민주주의
종교인 과세에 관한 공공성 신학
이튿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서,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렸다.
그런 다음에, 백성은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일어나서 흥청거리며 뛰놀았다.
―〈출애굽기〉 32,6
부족동맹체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사울은 최초의 원시국가 형태의 정치권력을 행사한 이로 등장한다. 성서의 스토리에 따르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이 전사한 뒤, 다윗이 새 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이 나라는 그의 아들 솔로몬을 이어 왕이 된 르호보암 때에 북쪽 부족들의 대대적인 이탈로 인해 두 개의 나라로 분열되었다고 한다. 이때 분열을 주도한 이가 여로보암이고, 그에 의해 이스라엘국이 창건되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다윗의 나라는 정체가 모호하다. 성서 스토리에 나오는,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소제국 유다가 존재했음을 뒷받침할만한 문헌자료나 고고학자료가 없다. 오히려 소제국으로 부상한 것은 유다가 아니라, 북쪽의 이스라엘국, 특히 오므리 왕조 때이다. 더구나 (성서의 다윗 스토리가 역사적이라고 가정할 때) 다윗보다는 한 세기 이상 후대다. 그가 건립한 나라가 있었다 하더라도, 너무 미미해서 성서가 말하듯 팔레스티나의 소제국이 아니라 예루살렘 인근 지역의 작은 도시국가 정도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사울 이후 팔레스티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추측컨대 이스라엘은 사울 이후 꽤 발전한 국가의 지배를 받았던 것 같다. 이 제국은 아마도 이집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외세의 지배 이후 얼마의 세월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여로보암 1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이스라엘국이 건국되었다.
여로보암은 여러모로 모세와 비슷한 스토리를 가진 인물이다. 압제자의 관리였다가(모세: 파라오의 아들, 여로보암: 부역책임자)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이가 되고, 그 일로 인해 이집트로 망명하였다가 되돌아와서 결국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이가 되었다.
아마도 건국의 시조인 여로보암의 영웅설화가 만들어지면서 전설상의 지도자인 모세 설화를 덧입은 결과겠다. 그럼에도 외세의 압제로 의해 고통당하던 이스라엘이 결속하여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자리잡는 과정에서 여로보암의 지도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
성서가 그에 대해 악평을 퍼붓는 것은, 그 역사적 스토리를 만들어낸 이들이 (여로보암이 건국한 이스라엘국 사관이 아니라) 유다국의 사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 내막은 이러하다. 기원전 722년 이스라엘국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시기 전후에 유민들이 대대적으로 남하하여 아하스 왕과 그의 아들 히스기야 왕 치하의 유다국에 편입되었다. 왕은 왕국 내에 널려 있는 황무지에 그들을 정착시키고 왕실 사유지로 편입시킴으로써, 그곳에서 산출되는 생산물로 왕실의 부를 크게 늘렸다. 이로 인해 처음으로 유다국은 중앙집권적 국가로서 부상할 수 있었고, 히스기야와 그의 손자 요시야는 왕권 강화에 목적을 둔 정치개혁에 착수하게 된다. 이때 유다국의 사관들이 왕실의 역사를 만들어냈는데, 여기에서 이스라엘국은 원래 동족으로 다윗-솔로몬의 유다국에 일원이던 북쪽의 부족들이 왕에 반기를 들어 떨어져 나간 나라로 서술된다. 이런 북쪽 부족들의 반란을 선동한 자가 여로보암이다. 그러니 여로보암은 모든 이스라엘국 왕들이 저지른 죄들의 기원이 되는 자이다.
이러한 유다국의 역사 날조는 성서 속에 고스란히 남겨졌다. 반면 초기부터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최강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였던 이스라엘국은 유다국보다 훨씬 전에 역사를 만들어냈던 것 같고, 왕조 이데올로기를 일찍부터 발전시킨 강대국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의 사관들이 만들어낸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열왕기〉와 〈역대기〉에 “이스라엘 왕의 역대지략”을 참조했다는 표현이 19회 정도 나오고, 고고학적으로 건축물 등의 유적들이 적지 아니 발굴되었으며, 이 지역을 침공했던 아시리아제국의 황제가 세운 비문 속에 반영된 역사적 정보들은 이스라엘국이 가히 이 지역 최강국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나라의 건국 시조인 여로보암은 얼마 후 구축된 강력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이자 시리아-팔레스티나의 정복국가로서 소제국이 된 나라의 면모와는 상당히 다른 나라를 꿈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그는 자신이 ‘제2의 모세’임을 자임했다. 앞서 말했듯이 이스라엘국의 사관들은 그의 영웅설화를 모세영웅설화와 엇비슷하게 만들어냈다. 그 설화의 뼈대가 성서 속에 반영되었는데, 유다국의 사관들이 이스라엘국의 시조설화를 변형시켜 수용한 결과다. 이 설화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모세처럼 압제당하는 이들을 규합해서 나라를 만들어냈는데, 그 나라는 왕이 함부로 농민을 압제하고 수탈하지 못하는 나라였다는 점이다. 제2의 모세라는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사실 모세설화는 이스라엘 부족동맹사회의 얼을 지탱하는 핵심설화다. 많은 제1성서(구약성서) 역사가들은 이 사회가 ‘왕 없는 사회’를 추구한 역사적 구성체였음을 주장한다. 물론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하는 운동들과 인물들이 등장했고, 또한 왕 없는 사회를 지켜내기에는 위험스러울 정도의 불평등화와 권력집중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쨌든, 그 이상만큼이나 잘 구축되지는 않았지만, 두 세기 정도 지속된 비(非)왕권제 사회가 이스라엘 부족동맹체다. 바로 이런 사회의 이상을 담고 있는 설화의 핵심에 모세설화가 있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것은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 압제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했으며, 기나긴 유랑을 통해 초과권력에 대한 욕망이 제거된 부족사회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설화에서 모세 자신도 그 새 사회의 시조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2 즉 일체의 낡은 관습과 기억이 제거된 새로운 사회, 그것이 이스라엘 부족동맹사회의 정신이었다.
모세는 이런 가치를 상징하는 존재다. 한데 여로보암이 그런 모세를 자임했다. 물론 그는 왕이다. 왕이 될 수 없었고, 왕 없는 사회의 위대한 통치자도 될 수 없는 모세와는 다르다. 하지만 그는 왕이 되었음에도 모세의 정신을 따라 강제부역을 부과하는 압제자가 아님을 자신의 지지세력인 농민들에게 천명하였다. 그것이 제2의 모세라는 주장의 골격이다. 그런 주장을 여기서는 그가 실시한 종교개혁에서 살펴보자.
첫째, 그는 왕궁과 국가성소를 분리하였다. 가령 유다국의 예루살렘처럼 왕궁 내에 국가성소를 설치하고, 이스라엘국의 오므리 왕조처럼 왕실요새 속에도 국가성소를 두는 것이 왕정사회의 상례인데 반해, 여로보암은 왕궁 밖에 성소들을 세웠다. 그것도 자기가 성소를 새로 세우고 사제들을 임명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주요 성소들을 존치시키고 그곳의 사제들과 예언자들이 그곳에서 사역을 하도록 허용했다. 특히 베델이나 단 같은 일부 오래된 성소를 특화시켰다.(〈열왕기상〉 12,29)
그런 전통 있는 성소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들은 걸핏하면 왕에 반대하고 그런 반대 주장 속으로 대중을 끌어들일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성소를 왕은 존치시키며 존중했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이, 그리고 사울과 사무엘이 서로 견제하며 공존하듯, 예언자와 사제의 독립을 존중했던 이스라엘 전통이 반영된 국가관이 여로보암에 의해 재천명되었음을 뜻한다.
둘째로 예루살렘에 야훼를 상징하는 법궤가 있다면, 그는 황소상으로 야훼를 상징하고자 했다.(〈열왕기상〉12,28) 법궤는 (베냐민 부족의 땅인) 실로 성소 전통의 야훼의 상징이었는데, 이것은 주로 전쟁 때에 이스라엘을 돌봐주는 야훼를 표상하고 있었다. 반면 황소 3는 무한한 힘을 시사하고, 또한 풍요를 나타내기도 하는 상징이다. 이것은 군인보다는 농민이 더 중요한 국가의 근간임을 표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예루살렘의 법궤가 성소의 깊은 곳에 감추어져 대중과 분리되어 있다면, 황소상은 대중에게 개방되었다. 〈호세아서〉 13,2에 묘사된 것처럼 대중은 성소에서 황소상에 입을 맞추곤 했다. 이것을 여로보암의 종교가 모든 대중이 볼 수 있고 다가가서 입맞춤 할 수 있을 만큼 개방된 참여의 종교였음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여로보암이 개축한 국가성소들에서는 시끄러운 축제가 열렸다. 이 글 서두에 인용된 〈출애굽기〉 32,6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모세가 십계명이 새겨진 판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이 송아지 상을 만들고 흥청대며 뛰놀았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유다국 사관이 이스라엘국에서 행해졌던 예배를 비아냥대는 말투가 담겨 있다. 십계명판은 법궤 속에 안치된 상징물이다. 즉 그것은 유다국의 야훼를 상징한다. 반면 앞서 말한 것처럼 송아지상은 이스라엘국의 야훼의 상징물인 황소를 유다국 사관들이 비하해서 묘사한 것이다. 즉 이 구절에는 유다국 사관들이 보는 이스라엘국 제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들어 있다. 이런 편견을 감안하고 바라보면, 팩트는 이스라엘국의 야훼제의가 황소상을 둘러싸고 대중들이 흥청대며 나누는 축제처럼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유다국에서 벱궤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안치되었고,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가 법궤 앞에서 의례를 행한다.
이렇게 여로보암의 야훼제의는 사람들이 흥청대며 즐기는 축제였다. 물론 그것은 즐거움만 깃들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때로 여기서는 왕에 반대하는 제사장이나 예언자들이 대중 앞에서 공공연히 왕을 비난하며 반체제의 구호를 외치는 의례가 행해지고 신탁이 설파되는 제의이기도 했다. 여로보암의 개혁이 허용한 것에는 이것도 포함된다. 대중과 제사장, 예언자는 왕에 반대할 권리도 있다고.
요약하면 여로보암의 종교개혁은 종교에 대한 두 가지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첫째는 왕실이 독점할 수 없는 종교, 둘째는 대중의 참여가 보장된 종교라는 것. 하여 여로보암의 종교는 왕실과 종교엘리트의 밀월성의 종교가 아니라, 대중적 공공성의 종교였다. 왕은 이를 존중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자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모세의 야훼주의를 계승하고자 했다.
물론 그러한 종교제도는 점차 사라지고, 이스라엘에도 왕실이 종교엘리트에게 종교자원의 독점을 허용해주고, 종교엘리트가 왕실을 향한 대중의 지지를 보장해주는 밀월성의 종교제도가 자리잡게 되었다. 오므리 왕조의 군주인 아합이 이세벨을 통해 페니키아의 바알주의를 도입하려 했던 것도 여로보암 식의 야훼주의가 아니라, 통치자에게 초과권력을 보장해주는 페니키아식 바알주의, 그런 바알의 내용을 한 야훼주의로의 개혁을 위함이었다. 해서 그는 지방 농민이었던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로보암의 꿈은 그 나라의 왕위를 계승했던 후계자들에게서 전도되어 버렸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실험은 밀월성의 종교를 비판하고 대중의 참여를 주장하는 대중예언자의 운동으로 역사 속에서 환생하곤 했다. 그리고 오늘날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논하는 현대신학에서도 그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최근 우리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에 관한 신학적 논의가 필요한 하나의 사건에 직면했다. 과거 군부독재 시대에는 정부에 의한 시민권과 인권의 유린이 국가와 종교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부추겼다면, 민주화 이후에는 종교기관과 종교인 과세 문제가 신학적 논의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주요한 사건적 배후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이 문제가 처음 붉어진 것은 1990년대 초, 토지공개념의 입법화,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 입법 등과 관련이 있다. 법률적 근거에 기초하지 않고 비과세 특혜를 누리고 있던 종교인과 종교기관에 대한 과세 문제가 제기되었고, 조세 정의 차원에서 종교계가 누리고 있는 특혜들의 철회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거세진 것이다. 이에 종교계, 특히 개신교와 불교계가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조세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정부의 개혁 입법들이 철회되면서 이 논쟁은 일단락되었고, 종교인과 종교기관에 대한 과세 문제는 흐지부지되었다.
한편 이 조세 분쟁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했던 개신교계 내에서 일부 시민단체들의 주도로 투명성운동이 일어났다. 주로 자발적 납세와 재정공개 형식으로 진행된 이 운동은 민주 개혁적 입법들이 철회되고 사회적 압박이 거의 사라진 1990년대 말의 담론지형에서도 계속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돋보인다.
그러나 목회자들의 무관심으로 그 영향력은 거의 없었고, 신학자들의 무관심으로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논의 또한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사회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다양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지만,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민주화 이전 시대에는 국가에 의한 인권과 시민권 유린이 너무나 폭압적이었기에 이에 대한 일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의 기록들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주된 신학적 소재로서 충분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시대에는 민주화운동 전력만으로 교회의 공공성이나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충분한 의의를 논하기에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불법, 비법적 조세 혜택은 조세 정의에 위배되는 현상, 곧 반민주적 현상임이 명백했기에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이 새로운 논점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의 의심받는 사회적 공공성을 회복하고, 국가와의 관계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의미를 재논의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제였다. 그럼에도 개신교 내의 투명성운동가들의 활동은 메아리 없는 고독한 외침 같았다.
2천 년대 들어서면서 개신교에 대한 사회적 혐오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민주화 시대의 개혁 기조를 몸에 체화하지 못하고, 과거의 불법, 비법적 특혜 관행을 수호하는 데 급급했던 개신교 엘리트 집단의 경제범죄, (변칙)세습을 통한 종교재산의 독점화, 일부 특권적 목사들의 사치생활 등이 세간에 회자되면서, 개신교권 외부의 시민사회단체들과 언론들, 그리고 비판적 담론을 개진하였던 각종 온・오프라인 매체들의 폭로와 비판이 점점 활기를 띠게 된 것이다. 이제 개신교는 그 사회적 공공성에 대한 평가는커녕 ‘공공의 적’으로 표상되고 있다.
최근 이러한 위기의식 속에서 개신교 목회자들의 자발적 과세 현상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또한 이 문제를 계속 펼쳐왔던 복음주의계열의 투명성 운동기구들 외에도, 그동안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개신교 단체들 또한 이 문제에 새롭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가령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도 교회의 사회적 공공성의 회복에 주목하면서 종교인 과세 문제의 공론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에 과세에 관한 공청회를 열고, 각 교단들의 협력을 요청하며, 특정 교단에 편중되지 않고 교단별로 폭넓게 확산되고 있는 종교인 과세에 호의적인 목회자들을 규합하여 목회자 과세 운동을 벌이고자 시도 중에 있다. 이와 같이 좀 뒤늦었지만 개신교권 내부의 개혁 움직임이 활기를 띠면서 성직자의 소득세 납부 논의가 재활성화되고 있다. 또한 이것은 교회와 국가에 대한 신학적 논점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그러던 중 4.11총선을 20여일 앞둔 2012년 3월19일, MB 정부의 박재환 기획재정부 장관이 성직자의 소득세 부과 방침을 밝혔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반발이 예상되는 가운데 문민정부나 참여정부에서 종교인 과세 문제를 제도화하려는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그런데 이제까지 이에 관한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아니 실은 대형교회를 주요 지지세력으로 하고 있는 MB 정부가 집권 말기에 갑자기 과세 의지를 표방한 것이다.
뜻밖의 상황이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이러한 태도변화의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MB 정부에 대한 국민적 비판기조가 널리 확산되고 있던 상황에서 치룬, 쉽지 않은 선거 국면에서 이제까지 정부의 든든한 후견세력이던 대형교회 지도자들이 정부를 비판하면서 독자정당을 추진하자, 정부는 교회를 압박하고 표의 이탈을 막으려 했던 것이겠다. 이러한 압박 카드가 이 선거에서 얼마나 실효성이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이것은 정부가 종교인 과세 문제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 안팎의 시민단체나 신학자들이 조세 정의의 관점이나 교회의 사회적 공공성을 진작시키기 위해 이 문제를 제기했다면, MB 정부는 전혀 다른 관심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간략히 정리하면 이것은 종교에 대한 국가의 관리 전략에 지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과세목적이 아니었다고 해도 일단 과세를 둘러싼 공론의 장에 제출된 이상, 과세를 둘러싼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2015년 12월2일, 박근혜 정부가 제출한 소득세법 개정안이 국회 본의회에서 통과되었는데, 여기에 종교인 과세에 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종교인 소득을 ‘기타소득 중 종교인 소득’으로 규정하여 과세하되, 종교인이 자신의 소득을 근로소득으로 신고할 경우 근로소득으로 본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하여 종교인 과세 문제가 드디어 명문화된 법률적 규정으로 제안된 것이다. 한데 이 법안이 고시되자마자 그동안 종교인 과세를 주장했던 이들에게조차 비판을 받는다. 그것은 종교인 소득을 기타소득으로 규정한 것 때문이다.
첫째로 제기된 비판은 조세형평성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기타소득은 소득액의 80%를 필요경비로 간주하여 나머지 20%에 대하여만 과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가령 월소득 300만원 이상의 중산층의 경우 근로소득자가 종교인보다 거의 6배나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지만, 월소득 100만원 이하의 저소득층은 근로소득자보다 종교인이 거의 2배의 조세의무를 져야 한다.
둘째로, 조세의 기대효과의 하나인 소득재분배의 효과가 없으며 도리어 그 반대라는 비판도 나왔다. 우선 기타소득은 소득에 따른 누진세율이 적용되지 않는 소득인데다, 저소득층에 대한 면세도 없고 복지혜택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소득 종교인은, 개신교의 경우, 극소수에 불과하고, 극빈층이라고 할 정도의 저소득자는 전체 성직자의 60~80%나 되는 형편이다. 거기에 성직자 이외의 종교기관(또는 교회) 종사자의 경우도 못지않게 심각하다.
세 번째로 제기된 문제는 종교기관의 재정이 전혀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부과된 종교인 과세는 사실상의 탈세를 정당화하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뜻하지 않게 교회재정이 공개된 어느 대형교회의 경우 실제소득과 임금소득으로 명문화된 소득간의 차이가 무려 6배 이상이나 되었다. 게다가 여기에는 촌지수입(심방비, 주례비, 장례비 등)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런데 대형교회의 경우 촌지수입이 예산상의 실소득보다 훨씬 더 크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국민개세주의(國民皆稅主義)를 명분으로 각종 과세를 실행에 옮겼던 박근혜 정부의 주장을 무색하게 만드는 현상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식의 과세는 종교기관의 재정투명성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는 비판이다. 중대형교회의 경우 연간 지출액의 40% 이상이 교회당 건축을 포함한 부동산 지출에 몰려 있다. 한데 많은 경우 종교기관의 부동산 거래는 거의 과세하지 않는다. 이를 이용해서 많은 교회들은 많은 부동산 거래로 인한 시세차익을 올렸고, 또 교회당 건축을 둘러싼 무수한 비리들이 난무한 실정이다. 게다가 몇몇 성직자들의 경우는 교회재정에 대한 비리와 배임의 정도가 엄청나다. 심지어 제계와 정계의 부정한 돈의 세탁 장소로 교회가 이용되기도 한다는 소문이, 배우 클라라의 소속사 사장이자 무기브로커였던 이규태 회장 사건에서 사실로 드러났다. 한데 이런 종교기관의 재정문제에 관한 숱한 의혹들이 그 종교인 과세로 인해 묻혀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앞서 말했듯이, 종교인 과세의 필요성에 원칙적인 동의를 표하는 이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일부 대형교회 목사를 포함한, 개신교의 많은 성직자들은 여전히 종교인 과세에 반대한다. 그들은 종교인, 특히 성직자의 수입은 신의 위탁을 받은 이들이 받는 ‘사례금’이기 때문에 노동에 대한 임금에 대해 부과하는 과세대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확신하는 이들이 많은데다 그들이 과점하고 있는 사회적 권력이 막강한 탓에, 또한 그런 관행이 건국 이래 계속되어 온 탓에, 국가는 함부로 과세하기가 쉽지 않다.
과세안을 마련한 이들은 그런 사정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기타소득이라는, 특혜성 강한 과세안을 마련한 것이겠다. 게다가 저소득 종교인에게 복지수혜를 주려면 과세안이 도리어 정부의 재정지출을 증가시킬 것을 우려한 결과일 것이다. 근로소득으로 신고한 이들에게는 근로소득으로 간주한다는 예외조항을 둔 것도 기타소득안이 제출되었을 때의 반발을 고려한 조치겠다. 어차피 과세에 대해 계몽되지 않은 대다수 종교인들은 과세안이 나와도 소득신고를 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시행을 2018년 이후로 미루었다. 그것은 박근혜 정부 당대에는 시행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개신교계의 반대를 무릎 쓰고 과세를 추진하는 부담을 지지는 않겠다는 것이겠다. 법안을 마련한 정부가 그렇게 한다면, 다음 정부는 과연 그것을 감수할 것인가? 어떤 다른 변수가 과세를 시행할 수 있도록 강제하지 않는 한, 이 과세안은 향후 오랫동안 시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마도 많은 대형교회들과 개신교계 지도자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해서 뜻밖에도 적극적인 저항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박근혜 정부의 비적대적 징세안이라는 신호를 교회는 알아차린 것이 아닐까. 여기서 추론되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나는 ‘조용한 밀월성’이라고 부르려 한다.
한데 시민사회와 종교계 내부의 개혁집단은 좀더 ‘시끄럽게’ 문제를 제기하려 한다. 대중의 참여를 자극하고, 정치권력과 종교권력 사이의 밀월성을 공개적으로 경계하고자 함이겠다. 또한 시끄럽게 논의하는 중에 문제는 복잡해지고, 생각은 급진적인 데까지 다양하게 펼쳐지게 마련이다. 이렇게 시끄럽게 논의하는 중에 대중은 종교인 과세를 둘러싼 국가와 종교 엘리트간의 밀월적 담합을 견제하는 참여적 주체가 될 수 있다. 또 종교인 과세가 아닌, 종교과세를 둘러싼 논의를 통해 생각을 더 발전시켜 종교의 공공성 문제를 성찰할 계가를 얻을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늘 시끄럽게 얻어지게 된다.
정리해보자. 종교인과 종교기관에 대한 과세 문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사회의 조세 정의에 관한 문제와 무관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조세가 그렇듯이 형평성 문제, 소득재분배 문제, 그리고 재정 투명성의 문제 등을 고려해야 한다. 나아가 모든 과세 주체들의 가져야 할 품격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 특히 사회적 공공성을 위한 교회의 역할에 대한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종교인과 종교기관 과세 논란은 개신교인들을 포함한 종교인들이 공공성을 고민할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끄러운 민주주의의 장점이자 가능성이다. □
- 이스라엘국의 창건자인 여로보암과 동명의 다른 이스라엘국의 왕이 있다. 그는 이 나라의 13번째 왕으로, 예후 왕조의 여로보암(기원전 785~745년 재위)이다. 일반적으로 학계는 이 둘을 구별하기 위해 편의상 전자는 1세, 후자는 2세로 표기한다. [본문으로]
- 〈신명기〉 34장, 모세의 죽음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이끌고 온갖 고생을 다하다 기어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집입하기 직전, 그 땅이 바라다 보이는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또한 성서 어디에도 모세의 혈통이 이스라엘 부족동맹사회에서 특별한 지도력을 행사했다는 정보가 들어 있지 않다. [본문으로]
- 훗날 유다국의 역사가들은 황소를 송아지로 묘사하여 이스라엘국의 상징을 폄하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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