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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강좌

교회의 해체, 해체의 신앙

2001년 11월 대구 목협의 종교개혁제에서 발표했던 것을, 약간 보완해서 2002년 4월 22일 '생명선교연대'에서 발표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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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해체, 해체의 신앙

 

 

 

 

1

 

한국찬송가공회 편 찬송집의 405나 같은 죄인 살리신은 우리나라 개신교도들이 가장 애창하는 노래의 하나다. 또한 미국의 그리스도교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또한 바로 이 어메이징 그레이스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주옥같은 가사 한 절 한 절이 소중하게 느껴졌던 것이리라. 사실 신실한 신앙 경력을 가진 이 가운데 자신의 죄스런 심성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지 않았던 이가 있을까? 그러나 어느 누가 이 싸움에서 승전가를 부를 수 있으랴. 번번이 실패한 채, 깊은 번뇌에 시달리던 때를 생생히 기억하는 이라면, 바로 그때 부르던 이 찬송에서 뿜어져 나오는 감동을 잊을 수는 없으리라.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쩔 도리 없이 죄인으로밖엔 드러날 수 없다는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그 죄 사함의 시혜를 베풀어줄 이를 갈망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니 그 은혜는 놀랍고 감사하기 그지없다. 바로 이것이 이 찬송이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공감대일 것이다. 그런데 이 찬송가의 해설에 의하면, 그 노래말의 기원은 이러하단다.

 

이것은 존 뉴튼의 자전적 찬송시이다. 존 뉴튼은 11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소유한 노예선에서 선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1748310, 그는 배를 타고 아프리카에서 영국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성난 폭풍우가 배를 강타하였다. 심각한 위험에 처한 뉴튼은 이때의 자신을 요나와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영적인 깊은 자각을 체험하였다. 그는 이날을 영적 출생의 날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1754년 그는 자신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고백하며 점차로 자신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께 헌신해 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가 가장 애창했던 찬송가 탄생의 배후라는 것이다. 과연 작사자 존 뉴튼에게 자신이 겪은 고통을 신앙의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 외에, 타인을 보는, 타인의 시선에서 세계를 보는 눈이 있었을까? 그에 관한 다른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한 나에게 더 이상의 질문은 봉쇄되어 있다. 어쩌면 그는 내가 품고 있는 악의에 찬 혐의에서 벗어날 자기 이력을 가진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다. 한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별로 관심 기울이고 싶지 않은 그 인물이 아니다.

이 노래말을 해설하는 글귀 속에는 존 뉴튼에 관한 해설자의 깊은 존경심이 담겨져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노예선이란 게 타인의 죽음을, 죽음 같은 삶을 대가로 해서 자신의 생명을 연명해 왔던 제도의 한 가운데 있는 장치라는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오늘날, 더구나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신앙심 깊은그리스도교 지식인이 이렇게 해설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한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노랫말이 실린 찬송가가 수많은 그리스도교도들, 특히 종교적 실행(practices)의 전문가라는 이른바 성직자들의 시야에서 결코 차단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그들 대다수는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가 황석영이 황해도 신천에서 있었다는 양민학살이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라는 사실을 소설 손님을 통해 발굴해낸 것은 우리 역사에서 결코 이례적인 사실이 아니다. 일제 시대 그리스도교의 항일 경력으로 자랑해마지 않은 신사참배 거부 운동의 배후에 종교적 동기 이외의 다른 것을 찾아내는 게 과연 가능한가? 이 운동에 참여했던 우리의 자랑스런신앙의 선조들 가운데 제국주의의 반인간성을 읽어내려 했던 이들이 얼마나 될까? 일제로부터의 독립 이후, 그리스도교도들에 의해 남한 곳곳에서 자행된 그 잔인한 분노의 정치가 그리스도교 신앙과 반공주의의 결합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 벌어지던 1930년대에 이미 그리스도교 신앙 속에 뿌리내린 것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한국 국가 형성 초기, 기득권 집단으로서 권력 게임에 몰두했던 그리스도교 엘리트 집단의 정치 행태가 오랜 기간 반성 없이 지속되면서 신앙의 정치화=권력화라는 등식이 내재화되어 신앙의 무의식으로 견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한편, 군부 독재정권에 의해 추진된 그 파행적 근대화가 국가주의적 발전 전략(statist developmental strategy)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라면, 그것의 배후에는 일제에 의해 구축된 과대 성장한 국가적 권력기구(over-developmental statist apparatus)가 미군정을 매개로 하여 남한의 국가 체제 및 근대화의 토양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현실이 있다. 거기에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맹목적으로 공조하는, 전국적으로 조직된 국가기구의 협력자들(collaborators)(상하위 관료뿐 아니라, 동장/이장교사각종 종교기관장 등)의 혁혁한 공로가 밑바탕이 되고 있다. 그런데 군정기간 중에, 일제하에서 과대 성장한 국가기구의 협력자들과 군정당국을 중계한 주요 세력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교 지도자였다는 사실은그리스도교 역사가들이 애써 감추려함에도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요컨대 한국 근대의 파행성이 과도한 국가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그것은 식민주의가 한국 국가와 민족주의의 저류를 형성하고 있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그것은 군정기간의 그리스도교의 부정적 개입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여기서 또 언급할 것은 독립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국가로부터 가장 큰 특혜를 받은 종교집단이 개신교와 천주교의 교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한국이 선택받은 땅이요 복음의 세계화의 새 거점이어서가 아니라, 한국 근대 국가의 야만성을 방조하고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협력해온 그리스도교의 처세술의 소산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한국의 현상만은 아닌 듯이 보인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테러 사태에 즈음해서 미 대통령 부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의의 전쟁을 선포했다. 가해자의 역할만을 해오다 오랜만에 비로소 피해자의 자리에 서자, 분을 참지 못해 복수의 칼부림을 다짐하는 미국 대통령이나 그것에 열렬히 환호하는 그 나라 백성의 잔임함에 하느님은 무척이나 협조적이다. 미국의 현 정부가 이전 정권이 규정한 깡패국가라는 가상의 적에 대한 정치적 수사어를 악의 축이라는 종교적 어투로 재기술한 것은 이러한 패권주의적 제국의 광폭성이 신앙심과 얼마나 밀접히 연루되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 유럽인에 의해 일어난 수많은 종교적 전쟁 및 학살을 일일이 열거할 것도 없이, 몇 년 전에 벌어진 보스니아 사태에서도 그리스도교는 그 호전성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폭력의 역사에서 그리스도교의 부정적 개입의 흔적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아니 많은 경우에 교회는 그런 야만성의 역사에 가장 적극적인 행위자였다. 이것은 그 참을 수 없는 자기중심주의를 신앙심이라고 옹호해왔던 그리스도교 역사의 필연적 부산물이라고 하면 너무 지나친 평가일까?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도 어메이징 그레이스 ......”를 불러대며, 우리 자신만을 위로하는 종교 행위에 몰두하고 있다.

이 글에서 나는 교회적 주체로서의 신앙을 문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역사상 범해온 죄악상에 대한 단순한 열거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함축한다. 타자에 대한 배타적 적대성은 이미 신앙의 아비투스(abitus)가 되었다. 더 이상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수술해서 종양 부위만 제거하면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내면화된(무의식화된) 신앙적 습성으로부터의 탈주가 요청되는 것이다.

예수 시대 유대교가 성전-회당이라는 장소(place)와 신앙을 결합시킨 종교 운동(회당적 주체화로서의 신앙)이었다면, 예수 운동은 그러한 장소-신앙을 탈영토화(de-territorization)함으로써 유대교 신앙으로부터의 탈주를 추구했다. 초기 떠돌이 예언자들의 이 운동은 특정한 장소가 담보하는 질서를 삶 자체로 오인하게 하는 담론적 장치의 부정이며, 그 장소성을 통해 형성된 질서(=영토화)에 의해 대변되는 삶의 사회적 배치 메커니즘에 대한 가로지르기인 것이다. 러나 예수운동이 교회운동으로 전화되면서, 초기 예수 운동의 유랑적 성격이 다시 정주(settlement)의 신앙에 의해 대체되며, 유대교 회당의 그것처럼 교회운동으로서의 그리스도교는 특권화된 장소를 통해 삶의 경험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다. 이러한 장소의 정치, 즉 영토화(territorization)는 직제화 및 정전화라는 제도적 모색을 통해 구현되었다. 영토화는 경계를 중심으로 내부와 외부를 가르고 내부를 포섭하고 외부를 배제하는 담론적 장치를 통해 실행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예수 시대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신앙 담론의 지배적 장소인 교회의 외부를 인식하는 사유 능력의 결핍을 초래했고, 삶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게 됐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장소-신앙자체를 원천적으로 문제시할 수는 없다. 예수운동의 탈영토화가 교회 중심으로 재영토화(re-territorization)되는 초기 그리스도교 형성 과정의 맥락에서 본다면, 그 자체는 불가피한 선택의 하나이자 공동체 재생산의 위기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선택일 수 있었다. 다만 우리는 예수운동을 다시 성전-회당 체제의 그것과 같은 권력화된 신앙체제로 회귀시켜버린 교회주의로의 발전을 문제시하는 것이며, 오늘의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러한 라삐적 유다주의의 변형에 다름 아닌 교회주의에 불과하다는 혐의를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와 교회 사이에는 유대교 회당체제에 대한 상이한 탈주선(a line of escape)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는 유대주의의 권력을 향한 욕망 메커니즘을 해체하려 했다면, 교회는 유대 종족주의로부터 탈주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반면 교회는 유대주의적 질서 체계를 하나의 모델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예수에 대한 역사적 읽기는 오늘날 교회주의에 대해 신랄한 비판이 될 수 있었다. 아무튼 예수가 선포했던 하느님 나라 지평이 사라져버린 교회, 무신성의 메커니즘을 넘어서기 위해, 나는 교회의 해체라는 문제설정을 제기하고자 하며, 이러한 반신학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해체의 신앙을 대안적으로 제안하려는 것이다.

 

2

 

제도로서 그리스도 교회는 예전, 직제, 정전과 교리를 통해서 규정된다. 그것은 긴 세월을 반복적으로 지속하면서 정형화된 것이며, 이것들이 특권화된 지위를 구축함으로써 사람들의 삶과 가치에 영향을 미치는 메커니즘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원사건으로, 신앙의 자기 검열장치라 할 수 있는 예수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특권성에 이의를 제기하기 한다.

예수 사건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기억은 신의 육화라는 고백 속에 포괄된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신이 스스로를 퇴행시켰다는 주장이다. 구원받아야 할 존재의 치욕스러움의 현장 에서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 군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자신을 해체하고 그 안으로 개입해 들어왔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타자적 존재로서의 신/신상의 자기 부정을 선언한다. 거꾸로 말하면, 이 신조를 고백하는 사람, 즉 그리스도인임을 자임하는 사람은 궁극자 초월자 전능자 등, 인간에 대한 타자성을 통해 신상을 표상하려는 욕망까지도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의 주류적 사유 속에서 구원/해방을 향한 메시아주의가 악을 정복하는 승리의 서사를 통해 간직되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스도교의 원류적 사유는 역설적 메시아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탈권력적 실천을 통해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한 신[각주:1]인 야훼의 신상이, 후속의 역사 속에서 유대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에서도 권력의 얼굴로 표상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전화(canonization)나 교리화(dogmatization)는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파생된 성서의 권력화된 얼굴에 다름 아니다(보론 참조). 또한 직제화도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한, 권력화된 존경의 메커니즘이었다. 요컨대 우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역설의 진리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낮아짐의 역사 개입의 전통은 그리스도교에게 있어서는 매우 낯선 기억이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교가 오늘날 가로지르는 실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한데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 정통 사상의 범주 내부로 포함될만한 신상들까지도 부정한다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의 이분법은 더 이상 불필요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 필연성은 무엇인가? 나아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자체가 존재할 이유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라는 기원의 망상을 전제한다. 마치 상상의 공동체(근대적 상상력의 결과로 형성된)에 다름 아니었던 민족이 국민의 존재 이유와 뿌리에 대한 인식을 선험적으로 규정했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예수 자신은 그리스도인도 비그리스도인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예수와 교회를 잇는 의미의 코드화에 대한 가로지르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그러한 코드화를 선험적으로 전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문제제기 자체를 폐기하라는 강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문제는 오랜 동안 의심받지 않은 채 우리의 존재를 규정해왔던 그리스도인(être, 존재)이라는 선험적 가정에서 탈주하여 예수 제자(devenir, 생성)이 무엇인지를 묻는, 예수를 따르는 우리 자신의 신앙의 정당성에 대한 근원적인 되물음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어떤 담론 공동체가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과정은 통상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경계를 명료화해 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다. 유대교와 자신을 구분하고, 무수한 이교들과 구분하고, 이단들과 구분함으로써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출현하게 된다.[각주:2] 하나의 종교 제도로서 탄생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타자와의 구별짓기 욕망의 소산이다. 이제까지 구별짓기의 대상이 아니었던 자들과의 차이가 특별히 부각되고, 그 차이에 절대적 의미를 부가하면서 그들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단절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이렇게 그리스도교는 타자들, 즉 구원담론 외부의 존재들을 탄생시키게 된다. 주후 1세기 팔레스틴에서의 예수의 실천이 동시대 유대교의 배제주의적 체제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음에도, 주후 4세기에 이르면 이미 강력한 반민중적인 배제주의적 담론으로서 그리스도교는 그 위상을 확고하게 정착시키게 되었던 것이다.[각주:3]

그리스도교 공동체라는 배타주의적 자의식은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절대화된 경계 내부라는 개념 속에 안주하고 있지만, 이렇게 역사적 점검을 받는 순간 그 경계가 상대화된다. 그러므로 나의 반신학적 해체론의 배경에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적 정체성의 형성 및 발전 과정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스스로를 사회의 다른 범주들로부터 근본적으로 타자화하려는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즉 종교는 사회의 다른 범주들과 필연적인 연계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그리스도교적 인식론, 바로 이것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를 철거하려는 기획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한데 이때 이들이 말하는 그리스도교는 도대체 무엇인가? 두 말 할 것도 없이 역사적으로 현존하는 종교적 체제를 가리킨다. 요컨대, 이 체제를 위협하는 것은 곧 예수로부터 시작된 신앙에 가하는 위협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며,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이 체제가 무너진다면 신앙도 끝장나고 만다는 생각이다. 이 체제를 개혁하는 것은 허용될 수 있으나, ‘그것을 넘어서는 것운운하는 것은 안될 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개혁그것을 넘어서는 것간을 구분하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준거는 그리스도교 당국이 허용할 만한 비판인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원칙적으로 자기 갱신을 원치 않는 이들에게 개혁의 내용과 실행의 규칙을 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종교 체제는 역사 속에서 하나의 권력 블록으로 실재해 왔고, 그 성쇠는 권력을 행사할 능력, 즉 세계의 다양한 자원을 전유할 능력의 정도에 따른 결과였다. 그렇다면 내가 다시 그들에게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방식, 즉 힘의 논리, 맘몬의 논리에 의존하여야만 교회와 그리스도교가 존속하며 성공을 구가할 수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당신은 왜 굳이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선택해야 하느냐?”, 라고.

주류적 그리스도교의 언술은, 크게 세 가지 점에서 존재론적 타자론을 담고 있다. 첫째는 신이 인간의 타자적 존재라는 이분법이다. 물론 이 타자론이 신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는 신과 인간 사이의 어떠한 접점도 없다는 것이 강조된다. 그리고 예수를 통하여 신의 육화가 실현되었다는 신학적 수사는 전적으로 신의 은총에 따른 것임을 부각시킨다. 다시 말하면 예수로 말미암아 신과 인간 사이에 비로소 접점이 놓이게 되었는데, 그것은 신의 은총의 귀결이지 인간의 행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언술은 행업주의[각주:4]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함축하고 있는 신학적 레토릭이다. 그래서 이것은 1930~40년대 일단의 독일 신학자들에겐 진보에 대한 과도한 낙관론에 몰입되어 있던 나치즘을 비판하는 유용한 신학적 논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언술은 인간을 성숙한 사유의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유형의 파시즘적 지배를 가능하게 한다.[각주:5] 왜냐하면 이러한 담론은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자신의 운명을 위탁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권력, 성직자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담론적 기초였다. 그러므로 신학은 인간의 타당한 행태에 관한 윤리를 다룰 필요가 없게 된다.

둘째, 인간에 대한 인간의 타자성 주장이 있다. 그리스도교적 언술에서 이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지점은 교회.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존재론적 실재라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교회는 존재론적/선험적으로 세속적 세계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함의를 갖는다. 교회가 윤리적으로 어떠한 처신을 해 왔든 간에 말이다. 이러한 논변은 교회 외부의 인간 세계에 대한 논의를 동반해야 할 필연성으로부터 신학을 격리시킨다. 즉 신학은 세계와 인간을 향한 윤리를 구성해야 하는 의무감을 떨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혹 세계와 인간에 대한 윤리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를 경유한, 즉 교회의 통제/관리 아래 있는 세계와 인간에 한정된다. 이른바 교회 중심주의인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두 가지 상반된 사회윤리적 태도로서 구체화된다. 교회가 세계의 관리자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을 경우엔 역사에 대한 개입주의를 강하게 표방해 왔던 반면, 교회가 세속권력을 통제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엔 탈역사주의를 지향했던 것이다. 실제로 교회는 이 양자 사이를 편리하게 오간다.

마지막으로, 주류적 그리스도교의 언술 속에는 인간의 비인간적 실체에 대한 타자성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가령, 우주의 모든 것 속에 깃든 생명력을 강조하는 정령신앙(animism)에 적대하는 언술로서 유일신 신앙이 도용되는 경우가 바로 이런 예에 속한다.[각주:6] 이것은 비인간적 혹은 준인간적 존재라고 여겼던 신분(노예), 인종적, 성적 타자들에 대한 배타주의를 정당화했고, 동식물을 포함한 생태환경 자체에 대한 정복주의 담론과 접맥되기도 했다. 교회가, 교회의 담론이 인류 문명사의 생태환경에 대한 착취와는 무관한 듯 빈 허공을 바라보는 하고 있을 때조차도 말이다.

주류적 신학 속에 함축된 이와 같은 존재론적 타자론은, 정교분리가 확립된 근대 이후에는 세속적 역사에 대한 신앙적신학적 언술의 반개입주의적 경향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조를 내면화하고 있는 사람들, 이른바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역사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마치 신앙의 본분과는 분리된, 부가적인 문제인 양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교 식의 기억의 재현술이 관여되어 있다. 제의신상(종교) 건조물 등이 그러한 역할에서 혁혁한 성과를 이룩한 노하우들이다. 그리고 소위 신학이라는 전문가적 담론들이 이러한 노하우들의 경험을 이론적으로 변증하고 일반화보편화하는 소임을 다해 왔다. 그리하여 이러한 기억의 재현술들은 그리스도교적 사유의 규칙성을 부여했으며, 이런 사유를 다양한 사회적 이해관계와 연계시킴으로써 이해집단 간의 사회적 연결망을 형성한다. 결국 그리스도교 체제는 종교 문화, 교회, 신학 등이 복합적으로 엮어진 제도적 실재(institutionalized reality)로서 존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제도화에 대한 비판으로서 신학을 한다는 것(doing theology)은 종교 문화, 교회, 신학 일체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어야 한다.

그러니 결국 나의 반신학적 해체론은 그리스도교 자체를 문제시하는 셈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길게 이야기한 데서 드러나듯이, 그 비판은 종교의 해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른 범주들과의 필연적인 연계성을 회복하는 신앙적/신학적 체계로서의 종교의 재정립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해야만 그리스도적 신앙/신학은 비로소 인간의 문명 안으로 들어올 수 있으며, 그 안에서 문명에 대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치 신이 인간 문명에 대해 비평하고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다른 방식이 아닌 바로 육화의 길을 택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그리스도교적 제도화의 경로 자체를 문제시해야 하며, 그 귀결로서 형성된 제도적 실재인 종교 문화, 교회, 신학 자체를 돌파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반신학으로서의 신학하기의 급진적 실천이 요청된다.[각주:7]

 

3

 

글을 마감하는 대목에서 나는 초기 그리스도교 형성 시기 요한복음공동체의 문제제기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1세기 말경에 이르면 그리스도교는 급속히 제도화되기 시작한다. 직제화 정경화 교리화 예전화의 경향이 뚜렷해지며, 종교생활과 일상생활은 외생적 관계로서 이해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대교 회당은 그리스도교의 비명시적 전거가 된다. 비명시적이라 함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서로 경쟁관계에 있기에 그 영향 관계가 명시적으로 표상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분명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회당을 많이 참조했음이 분명하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유대교 성전-회당 체제가 붕괴하면서, 재건 유대교의 기수는 회당이었다. 얌니아를 중심으로 하는 재건 유대교는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유대주의간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통합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교 운동의 주류를 이루는 흐름은 바로 이렇게 회당 체제의 제도화 방향을 모방하면서 전개되었다. 학계에서 초기 카톨릭주의라고 부르는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재건 유대교가 지역의 사도(αποστολοι)를 활동의 기축으로 사회종교적 통합운동을 벌인 것처럼, 예수 운동 승계자들의 사도권은 교회 통합 운동의 상징적 주축이었다. 그런 점에서 사도권이라는 상징은사도들 자신의 개인적 이력과는 무관하게교회의 권력화를 표상하는 아이콘이었다.

주후 1세기 말 소아시아 서부 지역의 일단의 그리스도 운동을 반영하는 요한복음은 이러한 유대교 및 그리스도교의 제도화에 대해 저항하는 공동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점에서 요한복음2,20~21(그들이 예수께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요?” 하고 또 대들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이었다)은 하나의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포함한다. 성전 파괴 예언으로 알려진 이 텍스트는 공관복음서에선 예수 활동의 종결부에 등장한다.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타당한 배치이지만, 요한복음은 그것을 서두에 위치시킴으로써, 성전이 상징하는 유대주의의 종말에서부터 예수전을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는 ‘46년간이나 짓고 있다는 예루살렘 성전예수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새 성전이 대립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단지 하나의 건축물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유대인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뜻한다. 그것은 그들이 염원하는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며, 동시에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인들의 삶의 질서를 표상한다. 곧 성전은 유대인에게는 삶의 제도화. 나아가 그것은 회당 체제가 갈구하는 새로운 성전에 대한 비전을 함축하고 있기에, 회당 중심의 재건 유대주의를 포함한다.

그런데 예수는 그 성전이 무너질 것을 선언한다. 그리고는 사흘 만에 지어질 새 성전을 예언한다. 특히 21절은 그 새 성전이 예수 자신의 몸임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하라. 그것은 또 하나의 건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죽임당한 후에 사흘 만에 되살아난 이의 몸이라는 것이다. 건조물은 보이고 만져지는 실체다. 한데 예수의 몸은 그렇지 않다. 부활한 그의 몸을 보고 만진 이는 있으되, 그것은 단지 말로만 전해질 뿐이다. 요한복음을 독서하는 1세기 말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복음서는 그가 떠난 이후의 공동체의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몸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참조할 것은 이 보이지 않는 새 성전으로서의 예수의 몸을, 요한복음저자보다 최소한 한 세대는 앞선 시기에, 바울은 교회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로마서12,5; 고린도전서12,12~27)는 것이다. 보이는 대상, 만져지는 대상으로 말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 했던 것이다. 즉 기성 제도인 유대교 성전(-회당) 체제에 대해 새로운 질서 원리, 새로운 제도로서 교회가 제기되고 있다. 이때 그는 분명 제도로서의 교회를 함의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렇지 않다. 예수의 몸은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다. 요한복음에서 영, 하느님의 기운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무엇이다. 기원도 알 수 없고, 작동 원리도 알 수 없다. 인간의 질서관으로 보면 그것은 온통 무질서요 신비일 뿐이다. 그래서 유대인 가운데 학식 높고 신실한 지식인 니고데모, 즉 유대교의 공식적 지식 체계의 정통한 그는 그것을 도무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요컨대 공식적 지식의 관점에서 은 은폐된 것, 즉 비의秘意인 것이다.

‘46년 대 3이라는 대비는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46년간 짓고 있었고, 향후에도 한참을 더 공사해서 유대교의 성전은 완공된다. 거기에는 벽돌이 필요하고, 기술자가 필요하고, 설계자가 필요하고, 그 모든 것을 위한 기금이 필요하다. 어느 하나도 계산이 어긋나면 완성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한데 ‘3짜리 성전은 그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모든 계산, 합리적인 판단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질서를 깨야만, 균형 있는 계산법을 무너뜨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 성전에 관한 위의 본문의 묘사는 기성 제도에 대해 도전하는 요한복음공동체의 문제의식이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질서가 무질서를, 균형이 불균형을, 제도가 영을 질식시킨 세계를 직면하면서 제기하는 일단의 초기 그리스도인의 도전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세기 말의 요한복음의 도전은 주류 교회의 전통을 물려받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왜냐면,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제도화는 교회를 통해서 구현되었는데, 그 제도의 역사는 영을 신앙에서 소거시킨 역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질서라는 그릇 속에 담겨 있는 영, 제도에 순화된 영만을 이라고 규정하고, 다른 것을 이단으로 배제한 역사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는 영이 제거되었다. 오직 거짓 영, 순화된 영만 살아 넘쳐나는 종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자기 해체의 담론인 영을 상실한 교회는 교회 중심주의와 성직자 중심주의라는,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그리스도교 안팎을 향한 패권적 승리주의에 집착하면서 스스로를 형성해왔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교의 자폐성이 자리한다.

영은 항상 제도를 통해서 역사 속에 구현된다. 그러나 제도는 그것의 규칙성을 단숨에 넘나드는, 어떠한 장치로도 규격화할 수 없는 영에 의해 도전받고 영향을 받지 않는 한, 그것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에 구원의 담론을 유포할 자격을 상실하였다. 몸의 정치와 아울러 성찰을 향한 급진적인 해체의 담론인 영의 정치가 살아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보론] 교회에서 예수로, 그리스도교의 민중적 개입의 전통을 복원하기 위하여

 

 

예수 운동은 1세기 팔레스틴의 시골 지역에서 대중적 종교사회운동으로 발원하였다. 이 운동의 반도시적이고 반체제적인 기조는 대중적 종말론이라는 사상적 그릇을 통해서 시간적으로 과거 민중운동의 전통을 흡수할 수 있었고, 공간적으로 팔레스틴과 그 너머에까지 이르는 확대된 유대주의 영역과 대화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직 예수 운동은 독자적인 제도적 장치들을 구축하지 못했으며, 단지 유대교 내의 하나의 일탈적 운동의 계보에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 운동이 질적 변화의 계기를 맞이한 것은 예루살렘으로의 진군(즉 도시로의 진군)과 깊이 연관된다.[각주:8] 이곳에서 지도자인 예수가 죽임당하고, 살아남은 제자들과 더불어 새로운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새로이 등장한 지도자들은 대략 다음 두 가지 사회생태학적 요소와 연결됨으로써 리더십의 새로운 유형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두 요소란, 하나는 시골에 대해서 도시 친화적이라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팔레스틴의 전통적 유대주의에 대해서 지중해 지역의 헬레니즘화된 유대주의에 보다 깊이 연루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예수 운동이 박해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는 것을 계기로 더욱 현저해진다.

이 새로운 리더십은 흔히 지역공동체 조직가라고 불리우는 지도자 유형이다. 이들은 떠돌이 선교사들과 긴장 관계 속에서 점차 지도력을 확장해간다. 이러한 정주와 유랑이라는 행위 유형의 갈등은 바람직한 리더십이 어떤 것인가에 관한 논쟁을 야기시켰고, 나아가 그리스도인다운윤리의 형성을 둘러싼 갈등도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유랑이라는 행위 유형은 일상적 윤리로부터의 과격한 단절을 감행하는 데 용이한 삶의 양식이다. 이것은 예수 운동에서 혁명적 급진주의로 나타나는데, 그 사상적 기초에는 민중주의적인 급진적 종말론 전통이 있었다. 종말론은 시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험 양식으로, ‘종말의 때의 임박성을 공유하는 집단에게서 가장 강렬하게 수용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때의 지연은 신앙의 위기를 초래하며, 이러한 위기는 신앙 유형의 전환을 통해서 극복되었다. 바로 여기서 정주유형의 신앙이 발전할 계기가 마련된다.

정주의 신앙 양식은 불가불 기성 체제, 기성의 종교 등을 포함한 지역의 제도적 규범 메커니즘과의 긴밀한 관계를 동반하면서 형성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것은 로마의 지방 행정 당국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사회적 제도, 토착민들의 가족 제도, 도시 디아스포라 유대교 회당의 종교사회적 제도, 그리고 전쟁 등으로 인해 강제 이주된 다종족 집단의 대중적 종교운동 등이다.

지중해 지역 도시로 진출한 예수 운동의 떠돌이 선교사들은 처음엔 회당에서 활동공간을 찾았다. 이들은 회당 내에서 비판의 논리를 생산하는 데 주력하였고, 기성의 회당 체제에 대한 도전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이들의 비판은 일정한 효력을 발휘했다. 결국 그들은 회당 당국으로부터 축출되기에 이른다. 이제 예수 운동은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비판담론의 생산자보다는 공동체의 결속을 위한 담론의 생산자의 활동이 중요해지게 되며, 후자를 중심으로 회당 종교의 예전을 모방한 종교의례가 발전하게 된다. 예전은 반복적 수행을 통한 의미의 재현 양식이다. 원사건의 의미는 삶과 직결되어 있었던 데 반해, 예전이 재현하는 의미는 그것을 아이콘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의미화 실천[각주:9]에 변수로 작용할 상황을 제거하고 반복적으로 패턴화된 제의 행위 수행 속에 의미를 가두어 둠으로써, 종교적 실천을 점차 삶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삶과 이반된 종교성의 발달이 탈이데올로기적 신앙으로 직결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전 속에 고정화된 의미가 행위자들의 주체형성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지중해 지역 대도시 회당의 예전이 로마의 지배체제와 타협적인 가치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초기 그리스도교의 예전에서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고려할 때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의 하나가 바로 장소의 문제다. 회당에서 축출된 도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구성원 중 한 사람의 집에서 모였다. 이런 이유로 모임을 가질 만한 집의 소유자의 영향력이 공동체의 규범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데, 여기서 안정된 가족 규범이 신앙 윤리에 관여하게 된다.[각주:10] 요컨대 가부장제가 그리스도교의 윤리적 기반을 구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압도적으로 기층대중이 많았다. 처음에 유대인 저변층에서 확산되다가, 회당에서 축출된 후에는 비유대인 출신자들이 대거 몰려들게 된다. 로마 제국 시대 대도시 지역의 사회적 환경을 고려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에서 보듯이 매우 중요하다.

로마제국의 대도시는 법적 질서의 효력이 그리 크지 않았다. 도시 자체가 식민도시인데다, 빠른 속도로 여러 종족 출신의 사람들이 이주한 탓에, 기존의 가치 체계는 토착민의 안정된 가족 규범으로만 한정된 효력을 발휘할 뿐이었고, 대안적 가치 체계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 당국은 반란의 혐의가 없는 한 형법의 적용을 최소한으로 사용했다.[각주:11] 그러므로 주민들의 일상생활은 그야말로 정글의 법칙에 의해 운용되었다. 이런 이유로 대도시 지역에는 각종의 결사체들이 형성되었는데, 대부분의 결사조직은 동족 출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종교와 결부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비유대인들이 들어옴으로써 종교 혼합주의는 필연적인 현상이었고, 특히 대중종교와의 접촉은 불가피했다. 이러한 갑작스런 종교간 혼합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재질서화의 필요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직제화가 가속화된다. 직제화란 공동체의 권위구조가 관례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엘리트의 충원과정이 관례화되고, 서열화된 직제를 위계화하는 윤리 담론이 정착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그런데 이러한 직제화의 모델은 주로 로마의 지방행정 당국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며, 부분적으로는 안정된 가문의 가부장제적 권위 모델이 여기에 접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직제화로 인해 일단의 지도력이 공동체 주변부 혹은 외부로 밀려나게 되며, 특히 여성 지도력은 거의 전적으로 배제된다. 이들은 이단적 운동으로 규정되는데, 그 과정에서 정전이 형성된다.

정전화는 대중의 의미 해석 자격을 사실상 박탈하고, 공동체의 엘리트들에게 의미 독점권을 위임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제 엘리트들은 정통적 텍스트들인 정전을 전유할 뿐 아니라, 상징을 통한 의미 재현 과정인 예전을 장악하는 종교귀족으로 탄생하게 된다. 그리스도 교회는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탄생에 비판적 요소는 제거되거나 외부로 추방되었으며, 결국 교회 형성 과정에서 유랑하는 카리스마적 지도력은 배제되고, 기성 문화에 대해 일탈적/해체적인 에토스는 신앙과 무관한 요소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하여 교회는 배타적인 정착 문화를 구현하는 장이 되었고, 성직자 중심주의적인 종교제도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교회가 강력한 사회적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어 사회적 관계의 영역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대되면서 다른 권력, 즉 교회 외부의 권력과의 관계에 대한 규정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른바 교권과 속권이라는 두 권력 유형은 배타적이고, 따라서 상대방을 하위에 두어야만 하는 속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교권이 속권과 수위권을 놓고 경쟁하는 중세기에 이르면 최후의 격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복주의적 담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며, 그것은 교회 중심주의적으로 정향된 교리의 형성 과정과 맞물린다. 이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교회의 실천 원칙을 구성하게 되는데, 하나는 교회가 힘의 우위를 점하게 될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가 열세일 경우이다. 전자의 경우엔 교회는 강력한 개입주의를 통해 수위권을 한껏 발휘하는 반면, 후자의 경우엔 상호불간섭주의를 취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교회의 실천은 어느 한 편으로 한정되기보다는, 세속 권력과 갈등하는 동시에 다양한 경로로 제휴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즉 교회는 기본적으로 속권과 갈등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를 배제하지만, 동시에 공동의 적이 등장하면 서로 공조하는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민중적 개입의 전통을 복원하려면, 다시 예수에게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교회로의 발전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물론 정주의 신학 자체를 문제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랑이 배제된 정주, 이 배제된 의 실천은 신앙의 제도화 과정에서 패권주의, 승리주의 이데올로기와 연계되었음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학/신앙은 차이, 낯설음을 포용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바, 몸과 지체의 레토릭은 차이를 전제로 하는 연대의 에토스를 말하고 있다. 바울의 과제가 외부로부터 분리된 독자적인 예수 공동체의 형성에 초점이 있었다면, 지구화 시대를 맞은 오늘 우리는 자본과 주류 교회의 무신성을 극복하고 하느님나라 건설을 위해 서로 격리된 예수 공동체와 세계를 다시 연계시켜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몸-지체 레토릭은 민족공동체 나아가 지구촌공동체에서 차이와 연대의 신학적 레토릭으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1. 갓월드의 기념비적 역사 《야훼의 지파들》은 이스라엘의 형성에 관한 탁월한 해석을 내놓았다. 야훼 신의 이미지가 최초로 형상화한 것은, 주전 13세기경 가나안 지역에서 형성된 부족동맹의 역사적 경험과 맞물려 있다. 즉 성읍국가의 경계 외부로 이탈하여 동부산악지대로 이주한 기층대중이 점차 씨족적・부족적인 연결망을 형성하게 되고, 나아가 이스라엘이라는 부족동맹체로 결집하게 되는데, 이러한 연맹의 형성은 권력의 집중화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제도화하는 형태로 실현된다. 그런데 이러한 탈권력적 연결망의 질을 압축적으로 실현하는 데 야훼신앙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많은 연구자들은, 이스라엘의 사회적 정체성의 형성이 ‘어떤 혁명적 이행에 의한 의도된 과정의 소산’이라고 보았던 갓월드의 주장에 대해 비판적임에도, 이 종족적 공동체의 형성이 어떤 지향성을 갖는다면, 그것은 권력 집중화에 대한 거부감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한편 이들의 갓월드 비판은 대체로 신멜더스주의적인 편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비록 아직은 이러한 관점에서의 반비판이 거의 없음에도, 또 다시 비판적인 평가를 거쳐야 한다고 본다. 요컨대 이들은 행위자의 선택을 과도하게 인구결정론적 시각에서 조명하려 한다. 내가 보기엔, 바로 이 점에서 행위자의 합리적 의도성을 강조한 갓월드의 견해와 그에 대한 비판자들의 신멜더스주의적 견해는 상호보완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2. 하지만 실제로는 그 순서가 거꾸로다. 즉 그러한 구분을 통해 이른바 정통과 분리된 이단과 이교가 출현한다. [본문으로]
  3. 프렌드는 근대 이전기 그리스도교는 촌락 대중의 개종과 관련하여 크게 세 차례에 걸친 변화를 경험하였다고 한다. 주후 3세기경에는 촌락의 대중이 대대적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고, 4~5세기경에는 그리스도교 내의 이교적 집단으로 전화되었으며, 7~10세기에는 점차 이슬람교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촌락 대중의 종교적 선호의 변화 과정의 배후에는 그리스도교가 반민중적 종교로 전화되는 역사가 있다. [본문으로]
  4. ‘행업주의’란 ‘은총주의’의 대극에 있는 것으로, 인간의 자기 내적 태도와 행위를 통해 신앙적 의를 획득할 수 있다는 데서부터, 역사 내적 지양(종말론적 비약을 필요로 하지 않은 채)을 통해서 하느님나라를 실현할 수 있다는 신앙적/신학적 신념 체계를 일반적으로 지칭한다. 이러한 신앙적/신학적 태도는 대체로 신과 인간 사이의 친화성을 강조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본문으로]
  5. ‘파시즘’은 지배체제의 폭압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흔히 사용된다. 하지만 이 개념의 특징은 ‘합의독재’라는 데 있다. 즉 지배체제가 상징 조작을 통해 대중을 체제의 자발적 주체로서 동원함으로써 체제의 재생산을 성공적으로 구축하는 지배 양식을 함축한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파시즘을 야기한 1930년대 독일 자본주의의 위기를 맞아 ‘대중의 강간’이라는 분노섞인 표현을 썼다. 이것은 그의 불후의 논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후기에 등장하는 어구인데, 파시즘의 ‘정치의 미학화’를 비판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는 자신이 ‘기술복제시대’라고 명명한 근대 과학 문명의 불가피한 변화를 ‘대중 문화의 등장’에서 본다. 비로소 대중(귀족이나 부르주아지가 아니라)이 문화의 주체가 된 것이다. 그는 이런 대중 문화의 근대적 매체를 영화에서 발견한다. 그에 의하면 기술복제시대의 총아인 영화라는 문화 매체는, 예술가의 ‘아우라’가 표현되는 장이 아니라, ‘대중 정치’를 야기시키는 공간이 되었다. 이른바 민중이 주인되는 사회가 대중의 정치에 의해 도래하리라는 믿음에 그는 고무된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이러한 희망의 가능성은 실제의 역사 속에선 철저하게 배신당하고 만다. 그가 본 것은, 역사의 주역이 된 대중의 대두가 아니라, 파시즘의 매체 조작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대중을 왜곡된 욕망의 분출자로 만들고, 결국 역사의 위선적인 진보, ‘진보라는 이름의 질곡’의 공범자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벤야민은 바로 이것을 ‘대중의 강간’이라는 노기 어린 표현으로 적고 있다. 동일한 문제의식을 아도르노는 1944년에 출간된 에세이집 《한줌의 도덕―상처입은 삶에서 나온 성찰》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지배세력이 생산해낸 고통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는 일은 지배세력의 메커니즘에 속”한다. 또 빌헬름 라이히도 1933년의 자신의 대표적 저작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을 이와 같이 표현한다. “설명되어야 할 것은 배고픈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든가 착취당한 어느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의 대부분은 왜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 라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동시대의 대표적인 비판적 사상가들은 나치즘이라는 파시스트 정권의 등장에 공범자로 대두한 대중의 문제에 당황하고 있으며 그 가슴 아픈 현상을 설명하려 한다. [본문으로]
  6. 구약성서에서 유일신 신앙은 식민지시대 초기인 ‘제2이사야’에 이르러서 비로소 처음 나타난다(〈이사야서〉 40,18~20; 41,6~7; 44,9~20; 45,20~21; 46,1~7). 이것은 바벨로니아 제국 말기 메소포타미아 중원 지역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배경으로 한 반체제적인 급진파 예언자의 창조신학에서 그 최초의 형태를 갖게 된다. 제2이사야는 이 창조신학을, 이스라엘 신앙의 토대이자 구원신학의 요체인 출애굽신학과 결합함으로써 완결시킨다(51,10). 즉 그의 유일신론적 창조신학은 처음부터 해방적 에토스를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제2이사야의 유일신론적인 창조-구원신학은 정체성의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이스라엘 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바빌로니아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맞서는 제2이사야의 대항 이데올로기로 등장한다. 따라서 유일신 신학의 출발점은 반권력 지향의 체제비판 담론이었지, 종교적 패권주의의 수단이 결코 아니었다. [본문으로]
  7. 도로테 죌레는 현대신학의 패러다임을 정통주의 자유주의 급진주의, 이 셋으로 대별하면서, 급진주의 패러다임의 정당성을 서구-남성 중심주의적 종교 제도를 근본적으로 폐절하지 못한 다른 유형의 신학의 어정쩡한 비평 자세와 관련시킨다. [본문으로]
  8. 흔히 ‘예수 수난사’라고 얘기하는 이 설화의 출발 기조는 종말론에 고취된 일단의 집단이 “때가 찼다”는 확신 아래 예루살렘을 향한 메시아적 승리의 개선행진의 분위기를 띠고 있다. [본문으로]
  9. 의미화 실천은 의미를 재생산하는 과정으로서 규정되는 실천을 뜻한다. [본문으로]
  10. 신약성서에 여려 차례 언급되는 ‘가훈적 담론’들이 그러한 실례라 할 수 있다. [본문으로]
  11. 물론 이것은 로마 당국자들이 합리적으로 행위 했을 경우에 한정해서만 옳다. 실제로 로마의 관료나 군인들은 개인적 욕심을 위해 적지 않은 비리를 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직간접적인 폭력의 행사를 통해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공식적 법 테두리 밖에서 이루어졌고, 로마 당국의 공식적 개입은 대체로 반란과 관여된 행위에 한정되어 있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