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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폭력의 구조를 보는 기독교적 시각에 대하여

한백교회 2002.08.25자 하늘뜻나누기 원고였던 '폭력의 자식들이 만드는 세상에서 살기'를 수정 보완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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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구조를 보는 기독교적 시각에 대하여

 

 

그들을 가로막지 마시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이들의 것입니다.”

― 〈마가복음10,14 하반부

 

 

아이들은 그 특유의 궁금증이 발동했는지 모른다. 어른들은 이것을 장난기라고 한다. 이들은 집회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말썽꾸러기에 불과하다. 적어도 어른들의 시선에는 그랬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눈에 가시거리였다. 집회의 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제자들은 아이들에게 저리 가라고 야단친다. 한데 예수는 이들을 가로막지 말라고 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이들의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흔히 사람들은 위에서 인용된 구절이 포함된 마가복음 10,13~16을 겸손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한다. 마치 제자들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겸손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한데 여기서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있다. 아이들과 어른(제자들) 사이의 관계는 지배자와 대중 사이의 관계처럼 기본적으로 권력 관계라는 점이다. 물론 그것은 힘에 의한 착취 관계만이 아니라 보살핌의 관계이기도 하다. 요컨대 본문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아이 같은 이, 즉 너희보다 약한 자를 대하는 모습이 바로 너희를 지배하는 권력이 너희를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꾸짖고 있는 것이다. 즉 제자들에게, 너희가 (단지 하나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결정적으로 부족한 게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난 200281일 문화방송 저녁 9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뉴스 중에 이런 보도 둘이 연이어 방송된 적이 있다. ‘보도1’: 자식들과 함께 보호소에 있던 여자가 아동상담소의 중계로 남편과 면담을 하던 도중 남편에 의해 살해된 것. ‘보도2’: 아내가 남편에게 쥐약을 먹여 살해하려다 기소됐다는 것.

아내 살해 장면은 무인카메라에 그대로 녹화되었다. 그리고 보도1’은 그 장면의 핵심 부분을 모자이크 처리한 채 방송으로 내보냈다. 방송의 센세이셔널리즘이 얼마나 소름끼치도록 우리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어지는 보도2’는 특이하게도 삽화로 범행 장면을 재현해주었다. 바로 앞의 기사의 자극성 때문인지 수갑 찬 채 고개 숙이고 있는 피의자의 전형적 장면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최근 십여 년 만에 진상이 밝혀진, 이등병인 병사가 하사관과 다른 장교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장면을 삽화로 기사화한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전자는 단지 그 장면을 재현해주는 정도지만, 쥐약 살인미수 사건의 여자는 괴기스럽고 흉물스러운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여자의 인터뷰는 변조되지도 않은 육성을 그대로 내보냈다.

그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배경으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남편에게 2년 반 동안 무려 16차례에 걸쳐 용의주도하게 술과 음료수에 쥐약을 타서 먹였고, 아무 것도 모르는 남편은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았고 기어이는 소장까지 절제하고 말았다고.

스릴러 영화의 악녀에 대한 섬뜩한 공포심 같은 게 느껴졌다. 심지어는 아내 살해의 현장까지 방송된 남자보다, 살인 미수에 그친 여자가 더욱 악마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기자가 의도했든 아니든 이 보도 속에는 분명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 두 사건이 모두 그 배후에 남편에 의한 상습적 가정 폭력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하마터면 이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 채 사건을 기억할 뻔했다.

흔히 남자의 가정 폭력은 대()타인(사회/ 국가, 상위의 권력자 등)에 대한 열등감 혹은 좌절감의 표현이 아내에 대한 적개심으로 전이된 결과라고 한다. 이것은 사회에서 가정으로 이어지는 폭력의 연쇄를 의미한다. 그것은 강자에서 약자로 이어지는 폭력의 먹이사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성격의 폭력에 대해 보도1’의 아내는 어느 순간 도피를 선택한다. 어떤 경우는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있다. 역시 매 맞는 아내의 적개심이 자식을 향한 분노로 전이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두 사례의 경우, 강자에서 약자로 이어지는 폭력의 연쇄 구조가 그대로 관철되고 있다. 한데 보도2’의 여자는 상황이 다르다. 그녀는 남편에게 폭력을 되돌려 준다. 여기서 폭력의 정상적인 흐름이 교란돼 버린다.

흥미롭게도 보도1’을 접한 시청자들은 죽은 여자에게 동정심을 품는다. 매 맞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사회가 그네들을 보호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데 보도2’의 경우엔 사회의 모든 증오가 그 여인에게 쏟아진다. 가정 폭력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하등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모든 것은 그녀가 악녀였기 때문이라는, 존재론적 해석이 가해진다. 따라서 이 악녀에 대한 처벌은 동정의 여지가 없다. 가혹함만이 그녀에게 되돌려져야 할 유일한 대가다.

여기서 우리는 폭력에 관한 하나의 법칙을 발견하게 된다. 폭력의 연쇄가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궤도에 있으면 희생자는 동정의 대상이 되는 반면, 그것에 대항하여 쌍방이 희생자가 될 경우엔 온갖 증오가 정상 궤도를 이탈한 이에게 쏟아진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폭력의 사회적 구조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폭력 남편과 매 맞는 아내 사이의 폭력, 혹은 매 맞는 아내와 그녀의 폭력의 대상이 된 자식 사이의 폭력은 사회의 최말단에서 벌어지는 폭력이다. 가장 기초적인 폭력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후에 자식에게 하나의 트라우마(외상)로 남아 그()의 인생의 씻을 수 없는 상처로, 그러나 여간해선 드러나지 않고 변형되어 나타나서 그()와 그 주변의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 그런데 그런 가정 폭력의 원인인 남편/아버지는 그로선 대항할 도리가 없는 세상의 폭력의 희생자다. 그런데도 이 가정 외부의 폭력은 은폐되어 있다. 도리어 폭력을 싫어하는 점잖은 얼굴의 심판자로 가정 폭력을 내려다보는 존재다.

인류가 만들어낸 세상은 폭력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폭력의 가해자며 피해자인 것이다. 그런데 폭력에 관한 중요한 연구에 따르면, 세상은 바로 이 최말단 가정의 폭력 같은 것을 보면서, 그것을 심판함으로써 자기 자신은 폭력적이지 않은 자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착시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폭력의 공모자인데도 말이다. 우리 자신이 그 가정의 파괴에 무책임하지 않은 데 말이다.

지난 1992LA에서 벌어진 인종 폭력 사건을 기억하는지? 이 사건에 대해 한국계 미국인 3세인 여성 학자 한 분이 뉴스위크지에 기고한 글에서, 유럽계 백인 헤게모니가 지배적인 미국 사회는 자신들의 폭력성을 은폐하기 위해 두 주변적 인종간의 갈등을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녀는 백인 시선에서 폭력의 정상적 궤도를 비판했던 것이다. 또한 강대국들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유례없는 치열한 폭력성을 보면서 자신들의 치졸한 폭력성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폭력의 구조는 어쩌면 인류의 본성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극복하는 게 불가능할지도... 하지만 예수는 그것에 저항하는 무모한 투쟁을 시작했다. 앞서 이야기한 성서 본문이 시사하는 것은, 사회적 폭력의 문제는 우리가 희생자일 경우에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해자일 때도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외란 없다. 중요한 것은 희생자의 관점이 중요하다는 데 핵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폭력의 구조에서 우리 편이 누구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희생자냐의 문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