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교회 1998.12.20자 하늘뜻나누기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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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총구가 당신을 겨누고 있다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Oliver Stone)이 방황하던 청년시절 군에 자원해서 월남전에 참전하게 됐을 때, 얼떨결에 한 이 선택이 자신의 인생의 행로를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될 줄을 그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의 영화 인생은 제국주의적 정치와 결탁된 인간성의 추악함의 현장인 베트남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그 원인을 추적하는 데 몰두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래툰〉(1986), 〈7월 4일생〉(1989), 〈JFK〉(1991), 〈하늘과 땅〉(1993), 〈닉슨〉(1995) 등, 영웅신화적 이미지로 왜곡된 전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거나 그 배후를 파헤치는 식으로, 베트남전을 직접 다루는 영화만도 수편에 이른다. 이 중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영화는 〈JFK〉와 〈닉슨〉이다.
〈JFK〉는 케네디의 서거 후 그를 승계한 존슨이 월남전 참전을 결정한 것과 케네디의 암살이 서로 연관되었다는 가설을 암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닉슨〉에서는 억압된 욕망의 소유자인 닉슨의 일대기를 통해서, 자신의 욕망 때문에 제국주의적 공격성의 앞잡이가 되기를 자원한 인간이 인류에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얘기한다. 닉슨은 월남전을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포함하는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전시킨, 미국인의 과도한 공격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미국인 자신이 미국을 평가할 때, ‘선’의 얼굴을 케네디에게서 발견하고 ‘악’의 얼굴을 닉슨에게서 읽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올리버 스톤은 이 인물들의 이야기 배후에 얽힌 선과 악의 근원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자신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악의 상징으로 표상된 인간을 성장 과정에서 상처받은 존재로 그리고 있다. 그가 악마의 화신이 되기까지 세상은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갔다. 그래서 악의 화신이 되는 것은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경험 때문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평범한 경험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Hanna Arendt)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올리버 스톤의 이 영화 속에서 적나라하게 관철되고 있다. 물론 그러한 사태 배후에는 그를 그렇게 막다른 곳까지 몰아붙인 세상의 일상적 반응 방식이 있다. 누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으로 하는 타인에 대한 태도에서 상처 입은 악의 화신이 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폭력적 세상에서 운 나쁜 사람이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결국 감독은 그런 악의 화신은 우리와 비슷한 보통의 사람, 어쩌면 우리 자신의 악마적 일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운 나쁜 사람이 악마와 키스를 한다. 그리고 순간 자신의 짓눌려 억제된 욕망을 병적으로 폭발시킨다.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광기로 말이다. 여기서 악마란, 이 두 영화의 경우엔 군산복합체적 실체인 거대자본과 정치권력이다. 이들은 억눌린 욕망을 발산할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을 하며, 상처받은 인간을 유혹한다.
악마와 키스한 닉슨은 이로써 권력의 중심부에 서게 된다. 그는 존슨 정부의 유약한 전쟁론을 비난하며 무차별 대량학살전을 벌인다. 무장 게릴라의 본거지라고 여겨지는 모든 곳은 공격의 대상이 되며, 그리하여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이 화염에 휩싸이고, 민간인을 배려하지 않는 무차별 공격 전략이 취해진다. 그리하여 닉슨 정부는 지구상에서 가장 공격적이고 야만적인 전쟁을 주도하는 집단임을 만 천하에 드러내고 말았다.
〈닉슨〉에선 닉슨 자신이 악마의 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서야 깨달은 것으로 나온다. 그가 악마로부터 받은 총, 즉 폭력이라는 선물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도 겨누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 늦게’ 발견한 것이다. 그는 역사의 희생제물이 되었고, 악마는 다른 파괴의 대리인을 찾아 나선다.
지난 1998년 12월 17일, 잠에서 깨자마자 우리는 또 한 번의 파괴의 살육전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이라크 폭격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토마호크 크루즈 미사일로 왕궁과 군사전략 요충지 등을 포격했다. 미사일 공격만 가지고 본다면, 이번 작전은 지난 1991년 걸프전 당시보다 더욱 많은 양의 폭탄이 사용되었다. 걸프전에서 미국이 43일간 쏟아부었던 폭탄의 양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열도에 마지막 6주간, 이른바 융단폭격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퍼부었던 폭탄의 양보다 많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1998년의 폭격은 얼마나 더욱 파괴적인지를 알만 하다.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Bill Clinton)은 이 공격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단 이틀간의 폭격으로 민간인 사망자만 수십 명에 이르렀다.
여기서 존슨이나 클린턴이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다 군수산업과 긴밀한 공화당 출신 대통령인 닉슨이나 부시 부자(父子)보다 그 호전성이 그리 덜하지는 않다는 얘기다. 부시 정부의 막바지에 나는 의도적으로 민주당 정부의 전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클린턴 정부가 행한 이 대이라크 폭격 작전의 특징은 걸프전보다도 더욱 전자전의 성격이 현저하다는 데 있다. 즉 작전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탱크를 앞세운 보병이 아니라 컴퓨터 앞에 앉은 기술자 병사들이다. 미국의 군수산업체들과 정책 당국자들은 전자전이 포격 대상을 정확하게 가격한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민간인의 불필요한 희생을 억제하는 이른바 ‘인간적 전쟁’의 시대가 최첨단전자무기를 통해 도래하게 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실상은 그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전자전의 제1차적인 효과는 희생자에 대한 ‘배려어린 전쟁’(?)이라는 측면보다 전투 수행자의 살상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시킨다는 점에 있다.
근거리에서 희생자의 처절한 죽음 과정을 보고 느끼고 들어야 하는 소름끼치는 경험은 총기의 도입을 통해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하지만 컴퓨터 전쟁의 수행자들은 마치 전자오락 게임을 하듯 무감각하게 살상 버튼을 누를 수 있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미군 조종사가 폭발 장면을 불꽃놀이에 비유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희적 전쟁’의 경험은 전쟁 행위의 더욱 많은 영역으로까지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애니메이션에서나 종종 볼 수 있었던, 원격 조종 로봇 병사에 의한 살상은 그러한 유희성을 전쟁의 가장 밑바닥 경험에까지 침투시킨, 잔혹의 역사 최후의 모습을 상상케 한다. 아무튼 전자전에서 제국주의적 자본과 정치권력이 꿈꿔왔던 전쟁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아군의 인명 손상 없이, 다량의 재고무기들을 투여함으로써 무기 재생산의 명분과 물적 기반이 확보될 테니 말이다. 더구나 전쟁은 일단 발발하면, 그 지휘권이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치인이 아닌, 군부엘리트에게 위임된다. 이들은 승리를 얻어내는 힘의 활용법의 전문가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힘을 활용하는 근거는 국민의 의사가 아니라 컴퓨터의 정보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있다.
이러한 전자전은 9.11테러 사태 직후의 미국의 아프간 공격, 그리고 이라크 공격에서 다시 한 번, 그러나 더욱 본격적으로 수행되었다. 부시 정부는 갖가지 최첨단 무기를 마치 실험실습을 하듯 그 땅 곳곳에 난사해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전자전은 죄의식 없는 가운데 자행된 군인들에 의한 무차별 대량 살상을 낳았다.
클린턴과 부시는 자본과 정치의 권력으로부터 선사받은 총을, 그의 많은 선임자들처럼 아무렇게나 난사해 댔다. 대상이 누구든 관계없다. 클린턴의 스캔들이 시끄럽던 때, 대통령의 성추문 스캔들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어 화제가 됐던 영화 〈웩더독〉은 ‘가상 대통령’의 스캔들에 따른 불리한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알바니아에 대한 ‘가상의 폭격’을 가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현존했던 미 대통령은 가상이 아닌 ‘실제’의 전쟁을 일으켰고, 어마어마한 양의 재고 미사일을 대량으로 쏟아 부었다. 방송과 신문매체를 통해서 연일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음모에 관한 논쟁은 바로 당시의 현직 대통령의 성추문에 대한 시비와 연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클린턴이 겨누어댔던 총구가 그 자신에게 겨누어지든 다른 이에게 겨누어지든 간에, 자본과 정치권의 연계구조를 이루고 있는 군산복합체는 이 기회를 통해 의연히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켰던 것이다.
부시 정부에 와서 전쟁 자체는 자신들이 처한 어떤 난관을 돌파하기 위한 술책이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곧바로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적 신념에 기초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전쟁의 유혹은 훨씬 더 몸의 생리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시가 선사받은 총구는 과연 언제까지나 타인을 향해서만 조준되고 있을지 두고볼 일이다.
역사를 두고 이러한 권력의 파괴적 악마성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의 유혹에 넘어가 악역을 수행한 역사의 앞잡이들 또한 언제나 있어왔다. 다행히 우리의 성서는 그러한 역사적 현상을 알고 있고, 또 그것의 악마성을 고발하고 있다.
때는 남왕국 유다가 멸망으로 치닫고 있던 주전 6세기 말경이다. 당시의 조정은 반혁명주의자들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바벨로니아 제국에 대한 호전론을 펴고 있었다. 반혁명주의라 함은, 한 세기 전 요시아 왕이 주도했던 민중혁명에 반대하는 귀족주의적 정치노선을 말한다. 이것은 중앙의 사제귀족, 고위관료, 성전 예언자, 군부세력 등으로 구성된 기득권 세력 연합의 정치사회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기득권 세력은 사회적 법률적 종교적 전횡을 휘둘러댔고 폭력을 무수히 자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연이은 외세의 침공으로 국가는 위기에 처해 있었고 대중의 피폐함은 극으로 치달았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유다 왕국의 기득권 세력의 도덕적 해이는 대중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여기서 안보논리가 횡행하게 된다. 그것은 호전론으로 나타났고, 그 명분은 국권의 수호만이 위기를 돌파할 유일한 방도라는 것이다. 그러한 호전론은 인근 만만한 국가들을 적으로 만들어 침공함으로써 대중의 확고한 지지를 끌어들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반정부적 예언자 예레미야는 정부의 대신들, 성전 사제들, 예언자들, 군인들 등, 그 누구도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것은 그가 받은 야훼 하느님의 신탁이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아무리 귀를 씻고 들어 보아도
당연히 할 말을 하는 놈은 하나도 없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일을 했던가!’ 하며
잘못을 뉘우치는 자도 하나 없다.
말이 싸움터로 뛰어 나가듯이,
모두들 뛰어 나가고 말았다.
하늘을 나는 고니도 철을 알고
산비둘기나 제비나 두루미도 철따라 돌아오는데,
이 백성 가운데는 내가 세운 법을 아는 자가 하나도 없구나.
―〈예레미야서〉 8,6~7
인용 구절 상반부 네 어귀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마땅히 자신의 잘못을 생각해야 했다. 백성의 지도자들로 위임받은 자들이니 백성의 안위를 위해서 처신해야 하고 정책을 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백성을 돌보기는커녕, 권력자요 착취자로서 백성 위에 군림하고자 했고, 자신들의 권력의 유지・재생산을 위해 백성을 전쟁터로 내모는 데만 몰두했다. “말이 싸움터로 뛰어 나가듯이, 모두들 뛰어 나가고 말았다.” 그러는 와중에서 백성의 인권은 착취당했고, 생존권은 박탈당했다. “하늘을 나는 고니도 철을 알고 산비둘기나 제비나 두루미도 철따라 돌아오는데, 이 백성 1 가운데는 내가 세운 법을 아는 자가 하나도 없구나.” 결국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극단적인 신탁을 선포한다. ‘야훼가 이 땅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다’(8,8~12 참조).
총을 장난감처럼 아무데나 겨누고 난사했던 자와 그에게 총을 선사한 권력 구조는, 그리고 그런 체제에 박수치며 환호했던 광신적 파시스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그 총에 의해 모두들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바로 그 총이 자신들에게까지도 치명적인 탄환을 발사했던 것이다.
클린턴 정부의 폭격이 있던 날, 정부를 견제해야할 의무를 가진 미국 의회는 이 폭격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여론 조사에서 미국 국민의 다수는 대통령의 선택을 지지하였다. 물론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훗날 부시 정부 당시의 전쟁에서 교회는 보다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아무튼 그날 일본, 캐나다, 한국 등도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이튿날 북한의 5톤급 소형 반잠수정이 우리 해안에서 격침되자 남한의 보수언론들은 일제히 호전론을 폈다. 보수주의적 정치꾼들은 대북 유화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여기엔 언제나처럼 안보라는 전투적 반공 이데올로기가 준동한다.
또 부시 정부가 아프간을 폭격하기로 결정할 때, 미 의회와 국민,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교회의 절대적인 승인이 있었다. 우리가 우려하는 또 하나는 그러한 국민적 지지 아래 미국이 대 북한 공습을 감행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적어도 부시 정부의 취임 전후에서 지금까지 이르는 일련의 발언들은 그러한 우려로부터 우리를 안심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이 부시 이후라고 해서 얼마나 다를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세계의 유수 정치지도자들도 이러한 전쟁에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미국만의 이해를 넘어서 세계의 수많은 전쟁 세력의 이해와 연동된 행동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의 정부와 언론은 어떨까? 미국보다 더욱 미국적인 남한의 보수우익 논객들과 그리스도교회들은 어떨까?
전쟁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하리라는 것을 그들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아가 민주주의를 위한 모든 노력을 무가치한 것으로, 심지어 해로운 것으로 치부할 명분이 된다는 것을 그들이 모를 리는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위기를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보다는 위기가 국민의, 아니 인류의 안보에 더 유익하다고 주장한다. 하여 위기를 야기할 ‘총잡이들’의 도래를 염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국민은, 인류는, 그리고 교회는 왜 대부분의 경우에서, 이러한 폭력의 주역들에게 지지를 표명하는 것일까? 파괴자의 총구는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적을 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향해서도 겨누어지고 있는데 말이다.
- 여기서 백성은 유다 왕국의 지도자들을 지칭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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