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백교회 2002.11.24자 하늘뜻나누기(성도)를 수정, 보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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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聖徒)와 탈영자
두 개의 신앙적 자의식에 대하여
기독교도들을 일컫는 말로 ‘성도’라는 표현이 있다. 말인즉 ‘거룩한 도성’에 거류하는 백성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거룩한 도성이란 하느님나라를 의미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 하느님의 권위가 관철되는 나라의 백성이 곧 성도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것이 ‘로마 제국의 시민권’과 상응하는 개념이라는 데 있다. 시민권은 본래 도시국가의 남성 가부장으로 구성된 시민들의 권위와 의무에 관한 개념이었다. 그것은 지극히 폐쇄적이었다. 조상 대대로 그 지역에 거주한 사람만이 시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남자여야 한다. 또 자유민이어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조건들을 유지하는 데서 결격사유가 있어서도 안 된다. 가령, 도시국가의 규범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만이 시민권을 행사할 권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 제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통해서 지중해 세계를 병합하게 되면서 더 이상 도시의 폐쇄적인 주권 개념이 유지될 수는 없게 되었다. 사회는 매우 복잡해졌다. 제국 내에는 다양한 규범을 가진 수없이 많은 사회들이 있었다. 또한 그 사회들은 고체처럼 굳어 있는 것이 아니다. 기회를 위해 혹은 생존을 위해 이리저리 옮겨가고 오는 사람들의 무수한 행렬로 제국 전체는 들끓었다. 마치 유동하는 액체처럼.
이러한 제국 사회의 액체적 흐름은 국지적인 고체적 사회들을, 그 백성들의 민족주의적 충성심을 흐트러뜨리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최근 북한을 개방시켜 유동적이고 잡종적인 국제적 시장질서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그 사회 특유의 배타적인 충성심을 이완시키려는 전략을 펴는 대북 유화론의 인식론은 이런 점에서 로마 제국의 지혜를 이어받고 있다. 아무튼 제국적인 액체적 흐름에 이스라엘 민족주의는 녹아버렸고, 로마 제국의 질서에 순응하는 유대의 지배층만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새로운 풍조를 모방하는 사회적 양상이 팔레스틴 전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또한 액체적 흐름은 경직된 사회에만 위험스러운 것은 아니다. 로마 제국은 새로운 운동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수많은 이종적 노예 집단이 결집한 새로운 사회적 투쟁이었다. 국지적 경계를 넘어 광범위한 영역으로 스며든 수많은 종교적 운동은 더 이상 로마 시 중심의 질서에 의해 통합될 수 없는 새로운 개혁의 분위기에로 제국을 충동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고체적 질서체계로는 로마 제국을 지탱할 수는 없었다.
이에 제국은 시민권을 확대하였다. 무수한 이민족의 지배층들이 제국의 시민권을 얻었고, 케사르를 낳은 유력한 가문인 ‘율리우스’ 성씨를 부여받은 수없이 많은 가문들(혈통과는 무관한)이 제국 곳곳에서 탄생했다. 또 황제의 군대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은퇴한 제국 각 지역 출신의 병사들이 시민의 권리를 획득한다. 뿐만 아니라, 특히 전쟁을 통해 부를 획득한 새로운 계층 출신의 사람들에게도 시민권의 기회가 찾아들게 된다. 하여 제국 사회는 황제 중심의 잡종적 제국 시민들의 네트워크 사회로 이행하게 되었다. 이로써 시민적 권위를 획득하지 못한 제국 대중의 위험스런 다양성을 통제할만한 제국의 새로운 네트워크 권력이 구축된 것이다.
‘성도’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로마 제국 시민의 대응개념이다. 로마가 ‘세속도시’라면 하느님나라는 ‘거룩한 도시’다. 마찬가지로 로마 시민에 대해 성도가 대두하게 된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성도라는 개념의 발명은 예수 집단이 유대 민족주의를 넘어서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유대 민족주의적인 규범틀을 벗어나 새로운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된다.
초기 예수 집단의 모임 안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득실거렸다. 또 지도자들은 비유대인 가운데서도 나왔을 뿐 아니라, 배움이 일천한 사람들,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 노예나 여자들 중에서도 등장했다. 이렇게 해서 초기 교회의 들끓는 에너지는 수없이 다양한 예수 운동의 양상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차이는 당연히 교회 내적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성서학자들은 바울의 서신들을 통해 교회에서 벌어진 갈등에 대해 많은 것을 밝혀냈다. 그것은 종족적, 성적, 신분적 차이로 주름진 복합적 공동체가 겪는 일반적인 운명에 속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런 문제들에 대처하면서 ‘사랑’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랑으로 결속하는 공동체의 규범을 ‘코이노니아’라고 불렀다.
하지만 사랑으로 결속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라는 개념은 공동체 내의 갈등에 대한 것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외부와의 갈등에서 자신들 내부의 결속을 강조하는 성도와 같은 선민적 개념은 아직 발전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바울 사상의 기조는 공동체의 대외적인 자기 논리로 발전한다. 성도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대두하였다. 즉 내부의 다양한 차이를 결속시키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죄 아래 있는 외부(저들)’에 대해 ‘구원받은 내부(우리)’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주름진 내부는 매끄럽게 정비된다. 이는 내부의 복잡한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이 신앙적 기억에서 체계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동시에 선교의 논리에서도 사람들 간의 차이나 갈등 요소가 무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요컨대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로써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여 기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잡하다는 것은 종족간, 지역간, 나아가 개인간의 다양한 차이를 의미한다. 반면 단순하다는 것은 이런 요소들이 신앙에서 망각되고, 우리와 저들이라는 이분법이 유일한 신앙의 의미가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즉 성도 신앙은 세상을 향한 망각의 인식틀이며, ‘우리 중심주의’의 자폐적 교회 제도를 낳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서양 제국주의의 문화적 종교적 첨병으로 나설 운명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성도 신앙은 일방향적인 나아감으로만 신앙을 말할 뿐이다. 한국찬송가공회가 엮은 찬송가 401장은 다음과 같은 가사의 노래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앞길의 장애를 두려 말아라
성령이 너희를 인도하시리니 왜 지체를 하고 있느냐
앞으로 앞으로 천성을 향해 나가세 천성 문만 바라고 나가세
모든 천사 너희를 영접하러 문 앞에 기다려 서 있네.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신앙은 이렇게 단순하게 앞만 보고 가는 것으로만 묘사되고 있다. 가는 길에 생기는 일체의 질문은 다 유혹이고, 싸워 극복할 대상에 불과하다. 여기서 인용하지 않았지만 이 노래의 2절과 3절은 이보다 더욱 두드러지게 일방향적 행진, 전투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이러한 성도 신앙은 순종과 불신, 성공과 실패만이 있으며, 그 외의 다른 것은 신앙에서 존재할 자리가 없다. 이것은 패잔병을 허용하지 않는 신앙을 낳는다. 또한 신앙의 승리를 향한 행진에서 이탈하는 탈영자의 자리 또한 마련해두지 않는 신앙을 낳았다. 목표를 향한 달음질만이 신앙이고, 그것 이외에는 모두가 불신앙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논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질서와 잘 맞아떨어진다. 치열한 경쟁과 승자에 대한 과도한 보상의 사회다. 패자나 이탈자는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것을 모조리 빼앗기는 사회다. 나눔은 승자의 미덕일 뿐, 필수적 가치일 수 없는 사회다. 승자들만이 칭송되는 사회인 것이다.
한국 전쟁은 남과 북에 각기 승자들만이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를 구축해 놓았다. 즉 한국 전쟁은 일반적인 자본주의보다도 훨씬 냉혹한 승자들의 사회로 남과 북을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그 승리 지상주의에서 이탈한 탈영자의 설 곳이 없는 사회다. 그리고 그 남쪽에는 그러한 사회에 가장 잘 적응한 종교 하나가 세계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급속히 과대 성장한 집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성도 신앙의 논리와 한반도의 승자 자상주의 간의 불길한 만남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북에는 이와 유사한 주체사상이라는 종교적 운동이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남과 북에는 각기 서로 배타적이면서도 또 한편 그 내적 논리상으로는 쌍생아적인, 하여 적대적이면서도 서로를 강화시켜주는 인식론적 논리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넓은 의미의 성도 신앙이라고 이름붙이고자 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오늘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는, 남과 북의 성도 신앙으로 인해 발생한 탈영자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자발적으로 탈영자가 되어 순례하는 이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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