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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인터컬처럴한 시각으로 개신교의 뿌리를 읽다

[웹진 제3시대] (2019.05)에 기고한 글.

글에 몇 군데 오류가 있다는 지적을 받아서, 그 지적이 적절하여서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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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컬처럴한 시각으로 개신교의 뿌리를 읽다

 

토착문화에 적대적인 근본주의적 담론을 실어나른 도교적 문화혼합주의적 양식,

그 사이에서 억압된 체험의 종교성으로 읽어낸 성서 읽기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요한계시록 신해(한국신학연구소)

 

1900년대 평안도의 개신교 성장사에서 가장 주목할 두 곳이 있다. 평양과 선천이다. 두 곳 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고, 특히 미국 중북부 지역의, 아시아 선교에 유난히 힘을 실었던 기독교계 대학들에 많이 기대면서 놀라울 만큼 포교에 성공했다. 기독교 포교가 본격화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기독교인의 수가 인구가 1%에 불과할 만큼 미미한 상황에서 이 지역들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역대급의 성장을 이룩한 것이다.

평안남도 평양의 장로교 성공사 이면에는 시카고의 매코믹신학대학(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일리노이주)이 있었고, 평악북도 선천에는 캔사스시티에 있는 파크대학(Park College. 미조리)이 있었다. 매코믹신학대학 출신 새무얼 모펫(Samuel Austin Moffet. 한국명 마포삼열) 선교사는 평양에서 교세가 급격하게 확장하자 매코믹 출신자들을 불러와 지교회들을 담당하게 했고, 선천의 휘트모어(N.C. Whittemore, 1870-1952, 한국명 위대모) 선교사는 파크대학 출신자들을 연이어 초대했다. 하여 평양의 개신교는 매코믹 네트워크가 활약했고, 선천의 개신교계는 파크 네트워크가 작동했다. 한데 주지해야 하는 것은 매코믹신학대학이 근본주의 성향이 매우 강한 곳이었다면, 파크대학은 근대적 계몽주의가 돋보였다는 점이다. 신학자이자 역사가로 교육계몽운동을 벌였던 백낙준과 독립운동과 여성해방운동에 투신한 김마리아 등이 파크대학 출신이라는 점은 이 대학의 학풍을 시사한다.

하지만 장로교의 두 도시에서의 성공은 한국말도 어눌하고 문화적 감수성도 매우 낮은 미국계 선교사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하여 그들과 함께 한 조선의 개신교 지도자들을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나의 연구가 많이 부족하지만, 이 두 미국인들의 핵심적인 한국인 파트너를 주목하는 것은 그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모펫의 곁에는 길선주가 있었고, 휘트모어에게는 양전백이 있었다.

이 두 사람은 20세기 초 평안도 장로교의 성공에 그야말로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들로, 평양신학교에서 배출한 첫 번째 목사 7인에 속했다. 한데 선천의 양전백은 교육계몽운동가로서 독립운동에 적극 나선 참여종교인의 상징한다. 반면 길선주는, 그 역시 참여종교인의 면모가 없지 않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영성적 지도자였다는 사실이다.

서론이 길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20세기 초 평안도에서 일어난 개신교, 특히 장로교의 엄청난 성공을 평양대부흥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 사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여러 자료들로 추정해보면 인구 대비 개신교 신자수가 가장 많은 도시는(평안도뿐 아니라 전국에서) 평양이 아니라 선천이었다. 그럼에도 선천대부흥운동이라거나 아니면 보다 포괄적으로 평안대부흥운동이 아니라 평양대부흥운동이라고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평양이 선천보다 더 인구가 많았다는 점이 중요했을 것이고, 선천이 꽤 중요한 무역도시였지만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평양이 더 중요한 도시라는 점도 평양을 이 지역 대부흥운동의 상징으로 말하는 것이 콰한 것은 아닐 수 있다. 또 신학대학이 이 도시에 세워졌다는 것도 이 도시의 성공의 기억이 모든 성공을 대표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였겠다.

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주목해야 하는 또 한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평안도의 성공이 전국화되는 데 있어 양전백보다 길선주의 활약이 더 돋보인 것과 관련된다. 그것은 길선주의 영성적 부흥사의 자질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전국적 부흥집회를 통해 새벽에 거행되는 기도와 사경회가 평양대부흥운동의 신앙운동적 수행양식으로 대유행하게 되었다. 하여 평양대부흥운동은 평양과 평안도를 넘어 빠르게 전국화되었다.

요컨대 모펫 선교사의 근본주의적 신앙내용이 사람들의 내면에 파고 들어가는 데 있어 길선주류의 영성적 수행법이 주효했다는 얘기다. 흥미로운 것은 모펫이 조선에서 소리 높여 강조한 근본주의적 가르침의 핵심에는 조선의 전통문화와의 단절이 있었다. 하여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조선의 신자 대중은 제사도 그만두고 조상의 신주도 부수었다. 한데 이런 근본주의적 담론을 전달하는 문화적 그릇 역할을 했던 중요한 수행양식은 길선주류의 새벽의 기도와 ()경읽기였다. 그런데 이것은 그가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 열렬한 도교수행자이던 시절 날마다 몸에 익혔던 수행법이었다. 요컨대 모펫의 토착화에 반대하는 근본주의 메시지는 길선주의 토착적인(indigenous) 수행법을 통해 조선의 대중에게 이질감 없이 수용된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이후 한국개신교의 독특성을 이해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즉 언술적 표상체계는 반혼합주의적 근본주의 양식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을 몸으로 표상할 때는 문화혼합주의적(intercultural) 특징을 갖는다는 것이다.

역사학에서 과거의 사실이 현재의 대중에게 회상되는 문화적 기억의 틀을 가리키는 용어로 역사문화(Geschichtskultur)라는 개념이 있다. 가령 제2성서(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영적 적대자로 35회나 등장하는 디아볼로스(διαβολος)를 컴퓨터게임인 디아블로 시리즈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이 게임 캐릭터와 연관시켜 회상해낼 가능성이 높다. 그런 문화적 양식을 역사문화라고 부른다. 그런 것처럼 많은 개신교 대중은 성서의 여러 이야기들을 회상할 때 한국의 토착적인 종교문화적 요소와 뒤섞어서 상상하게 된다는 얘기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한국개신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교리 중심적 해석의 한계를 보여준다. 가령 한국개신교의 대다수가 근본주의적이라는 생각에 빠져서 개신교 신앙에 대해 진술할 때 가장 흔한 어법의 하나는 신앙은 미신과는 다르다면서 문화혼합적 신앙을 비판하고 한다. 이때 미신이라는 표현의 기원은 일제 강점기 시절 총독부가 주도한 종교정책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종교정책은 당시 조선 대중의 절대다수가 공감하고 있던 토착의 종교들을 말살하는 문화정책의 일환이었다. 천도교나 대종교 같은 토착종교들이 일제식민당국에 가장 저항적인 종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본의 식민지 종교정책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개신교에게는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개신교가 조선 대중의 일상에 파고드는 데 있어 토착적 수행양식이 매우 주효했다. 길선주류의 새벽에 하는 신비주의적 열정이 넘치는 기도와 사경 집회는, 그 도교적인 수행양식은 일종의 기독교가 당시 조선대중에게 기억되는 역사문화적 장치였던 것이다.

하여 모순적인 표상체계와 수행양식이라는 한국개신교 특유의 이중성을 고려하지 않고, 표상체계를 대표하는 근본주의적 해석들만으로 한국의 근본주의 신앙을 이해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여기서 한국개신교 신앙의 형성에서 교리적 표상체계보다 그 수행양식이 더욱 중요성을 지니게 된 역사적 상황을 하나 더 언급해보자. 한국전쟁 이후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사회에서 사회를 재건한다는 것은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사회가 재구성된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사회를 구성했던 질서 혹은 체계가 와해되고 다른 양식의 질서 혹은 체계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즉 재료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때 사회재건 과정에서 주도권을 쥔 사회세력은 개신교였다. 특히 길선주류의 근본주의가 토대가 되는 서북계 장로교가 그 중심에 있었다. 물론 여기서 중지할 것은 교파 간 인구에서도 압도적이고 사회적 권력도 가장 많이 보유한 종파가 장로교였지만, 다른 개신교 교파들도 한국에서는, 서양과는 달리, 장로교화된 양상을 띠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개신교는 (서북계)장로교의 확장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확대된 장로교 현상이라는 전제 아래서, 전후 한국개신교 대부흥을 주도한 것은 이른바 순복음열풍이었다. 조용기로 대표되는 부흥사들이 전무후무한 한국개신교 대부흥을 주도한 것이다. 이때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적극적으로 현실을 개척하게 했던 종교적인 내적 동력을 조용기는 ‘3박자구원이라는 슬로건으로 표현했다. 영적 구원과 두 가지의 세속적 구원(‘부자됨건강’)을 원플러스원 패키지의 은사로 해석하는 슬로건이다. ‘세상 것과는 다른 하느님의 축복을 강조했던 전통적인 구원담론은 구현의 시간을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미래로 유보시켰는데, 3박자구원 담론은 그것을 현재화시킨 것, 체감 가능한 시간으로 바꾼 것이다. 한데 사람들은 어떻게 조용기 같은 부흥사의 구원론적 슬로건을 통해 체감 가능한 구원의 시간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부흥회라는 장소성과 결합되어서 설파된 슬로건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일상의 시간이 흐르는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일상을 밀쳐내고 신비한 열광이 작동하는 시간이다. 방언이라는 일상 저편의 소리가 넘쳐나고, (악령)치유라는 일상 저편의 사건이 펼쳐진다. 그 장소와 결합된 구원의 슬로건은 사람들에게 곧바로 체감되었다.

한데 이러한 조용기류의 구원담론은 1954년의 나운몽의 부흥회가 있었다. 전후, 몸과 정신이 바닦까지 거덜난 무수한 대중들이 치유되는 사건이 벌어지는 비일상의 공간인 산기도원에서 나운몽은 부흥회를 열었고, 그는 여기서 조용기식으로 말하면 두 박자 구원론을 폈다. 영혼의 구원과 몸의 구원은 하나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나운몽은 그러한 치유의 동력을 사람들 내부에서 끌어내기 위해 일종의 토착종교문화적 역사문화의 장치들을 활용했다. 그는 사람들의 질병을 치유하면서 그들 내면의 신들, 부처님이나 천지신명 같은, 심지어는 외래의 영웅적 표상들인 소크라테스 등등 온갖 종교적 요소들을 호출했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모아 악귀와 싸우게 하면서 그들을 예수와 동일시했다. 이른바 대중의 토착적 양식을 동원해서 그것을 성서와 결합하는 구마행위를 수행한 것이다.

조용기는 나운몽의 부흥회에 참여하면서 부흥사의 꿈을 키웠다. 비단 그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부흥사들은 직간접적으로 문화혼합적 양식을 통해 구원의 시간을 현재화하는 데 성공한 이들이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개신교에서는 부흥회가 사라지고 있다. 대신 경배와찬양 같은 디지털문화의 양식을 활용한 새로운 영성적 체험의 요소가 종교적 회상의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지난 시대까지 한국의 개신교신자들을 사로잡았던 수행양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디테일하게 보면 교묘하게 전통의 문화적 요소와 현재의 문화적 요소가 결합되면서 그것이 성서의 내용을 회상하는 종교적 기억의 장치로 체현되고 있다.

거칠게 요약한 것이지만 한국개신교를 해석하는 일은 교리적 주장들만을 살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얘기다. 어쩌면 교리적 주장들과 어울리지 않는, 때로는 모순적인 듯이 보이는 수행양상들에 대해 살필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성서를 현재화하는 회상의 역사문화적 장치들을 주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른바 토착화신학이라는 학문적 범주는, 그 연구사에 대해 나의 견문이 심히 부족하지만, 서양의 종교성이 한국에서 정착하는 내적 메커니즘에서 토착적 요소가 어떻게 역사문화적 장치로 작동했는지를 묻는 학문적 문제설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한데 그 연구들은 전통종교들의 경전들 같은 인지적 표상체계를 다루거나 혹은 설화 같은 구술적 담론양식을 다루는 경향이 대종을 이룬다.

반면 도교 같은 수행중심의 종교, 그것의 해석체계를 주목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던 듯하다. 이때 도교는 서양에서 수용되어 기계적 근대성을 해체하는 담론으로 재해석되어 다시 우리에게 소개된 도교가 아니라, 길선주가 그랬던 것처럼 금욕과 차력, 격정적 기도와 경읽기 같은 수행 중심적 종교의 해석에 관한 것이다. 앞에서 길선주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도교적 수행양식은 다른 어느 종교적 해석보다도 개신교 형성에 영향력이 지대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에 대한 연구는 매우 빈약하다는 생각이다.

며칠 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함께 일했던 이를 만났다. 그이는 아직도, 연구기능도 출판기능도 거의 사라지고 명목만 남아 있는 그곳을 지키고 있다. 아무튼 20대 말에서 30대 초, 힘과 열정이 넘쳐나던 시절 36개월 간 일했던 그곳에서 나는 미친 듯이 한국신학연구소의 텍스트들을 읽어댔었다. 한데 놀랍게도 전혀 제목조차 몰랐던 책을, 1980, 82, 86년에 각각 출판되었던 책을 다시 출간했다고 하면서, 각권이 거의 6백 쪽에 달하는 묵직한 책 네 권을 건네줬다. 글이 치여 사느라 시간이 절대부족한 상황에서 이렇게 방대한 책을 읽기는 너무 부담스러워 손도 대지 않으려 했는데, 마침 내 방의 인터넷에 이상이 생기면서 두 시간쯤 그 엄청난 부피의 책들을 잠깐 훑었다.

저자는 변찬린이라는 분이고, 책의 제목은 성경의 원리, 요한계시록 신해.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나의 느낌으로는, 이 책들은 불교나 선교적 요소가 결합된 도교적 성서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좀더 공부해야겠지만 어쩌면 이 책들은 한국개신교의 뿌리를, 그 근본주의적 표상체계로 인해 숨겨진, 하지만 신앙적 수행법에서는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 깊게 스며 있는 체험적 종교성을 해석한 책이다.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겐 책 읽기를 자극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워낙 방대해서 집중적으로 공부할 틈이 없지만, 조금씩 살펴볼 요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