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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예배의 본질이 대면성에 있다고?

[경향신문] 2020.09.12자 '사유와 성찰' 코너에 실린 칼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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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예배의 본질이 대면성에 있다고?

예배 본질은 대면·비대면 아닌고통받는 사람에게 말을 전하는신의 형식이 어떠해야 하는가그에 관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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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본질이 대면성에 있다고?

 

예배의 본질은 대면, 비대면 논란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의 곁에서 말을 건낼 수 있는 신의 형식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의 산물이다

 

요한복음 공동체가 직면한 심각한 신앙의 문제는 신의 부재였다. 삶이 평탄했다면 신의 부재를 그토록 절절하게 체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꽤나 절박했다. 한데 아무리 부르짖어도 신은 메아리로도 돌아오지 않는다.

원래 예루살렘에서 유래한 종교의 특성은 신의 부재에서 시작한다. 두터운 벽이 사람들이 신에게 다가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 벽들을 지나 성전 깊은 곳, 신이 계신다는 곳에 들어갈 수 있다. 대규모 제사가 진행될 때만. 하지만 사방이 꽉 막힌 그곳엔 공간을 밝혀줄 불빛 하나 없다. 아무리 눈을 휘둘러도 칠흑뿐이다. 해서 그곳에서도 신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고대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은 신의 흔적만 있을 뿐이라는 신학을 탄생시켰다. 곧 철저한 비대면성이 이들의 신학을 지배했다. 그런데 그 종교는 그 안에 들어갔다는 대제사장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셋팅된 종교가 되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떠받들었던 그리스도파들은 그이가 신이 보낸 대리인의 하나인 메시아가 아니라 절대 일인인 메시아라고 주장했다. 그들이 이 히브리어를 그리스어인 그리스도(Christos)로 번역했을 때 그리스도는 절대단수의 존재였다. 나아가 그이는 신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비대면의 존재인 신을 해체하고 대면적 존재로서 재해석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철벽이 쳐진 밀실 안에 있는, 아니 그곳에도 없는 신을 숭배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신앙은 밀실에서 광장으로 옮겨왔다. 밀실의 권위는 해체되고, 모두가 신을 보고 하소연 하도록 허락하는 종교가 탄생했다.

하지만 곧 그리스도파들 내에서 신의 부재를 논하는 이들이 도처에서 생겨났다. 사람인 된 신은 이제 사라진 지 오래고, 그가 했다는 말만 남은 종교에서 그 말을 장악한 자, 그 말의 해석권을 점유한 자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때에 요한복음이 탄생했다. 이 문서는 사람이 된 신은 떠났고 대신 영이 도래했다고 말한다. 신은 다시 보이지 않는 존재로 나타났다. 그 신은 바람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존재다. 그래서 그가 영인 것이다. 하여 말의 해석권을 점유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 영은 사람들 각각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그에게 말을 한다. 고통에 겨워 꺾일 듯 흔들리는 자에게, 그 안에서 그이에게 직접 말을 한다. 이 문서는 그 존재를 파라클레토스라고 불렀다. 뜻인즉슨 옆에서 말하는 이. 위기에 처한 자가 무너질 듯 흔들릴 때 내면에서 말해줌으로써 견디게 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것을 한글판 성서는 보혜사라고 옮겼다. 영어성서는 advocate라고 썼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도 비대면의 문제가 신학화되었다. 그이는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이에게, ‘곁에서 말해주는 존재.

신학대학 총장을 역임한 한 신학자는 예배의 본질은 대면예배라고 단언했다. 왜냐면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헌신으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슨 말인지 납득이 안 된다. 온전한 헌신으로 드리는 것이 왜 대면성과 맞물리는가. 예배가 신과의 만남을 상징하는 종교적 의례라고 할 때, 그는 대면예배에서 온전한 헌신으로 드리면 신을 대면하는가? 그 신은 어떻게 생겼는가? 잘은 모르지만 그의 대답을 추측하자면, 그 신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이성애주의적 성의 질서에서 벗어난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필경 그 신은 이성애적 질서에서 권력을 가진 남성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는 자신의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않는 신만을 대면할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정부가 비대면 예배를 하라고 행정명령을 내린 것은 사실상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요구라고 해석한다. 하여 그것은 종교탄압이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그에게 온전한 헌신은 대면예배를 고수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이웃이 감염증의 고통에 시달릴지 모른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해서 그는 고통받는 이의 곁에서 위로해주고 희망을 주는 신을 절대로 대면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