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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가 부활했다” -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부활 사건

[공동선] 2021.09+10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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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가 부활했다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의 부활 사건

 

 

 

부활의 첫 목격자가 일곱 악령 들린 여자였다!

 

마가복음마지막 단락인 16,9~20는 나중에 덧붙여진 일종의 마가복음의 확장판이다. ‘원마가복음’(1)과는 문체도 다르고 기조도 다르다. 확장판이 언제 덧붙여진 건지 알 수 없다. 다만 2세기 말 리옹의 주교인 이레네우스(Irenaeus)16,19를 인용하고 있으니, 아무리 늦어도 2세기 말 이후는 아니었을 것이다. 한데 주목할 것은 확장판첫 구절이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얘기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이레의 첫날 새벽에 살아나신 뒤에, 맨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자이다.

―〈마가복음16,9

 

그녀는 부활한 예수를 목격한 첫 사람인데 전에 예수가 일곱 귀신을 쫓아낸 준 여자라고 한다. 여기에는 예수와 얽힌 그녀의 두 가지 정보가 들어있다. ‘부활의 첫 목격자라는 것과 일곱 귀신 들렸던 여자라는 것.

16,1에 의하면 부활의 첫 목격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등이다. 공교롭게도 모두 여자다. 한데 그들 중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다. 여기뿐 아니라 예수의 여성 추종자들이 명기되는 부분에서 그녀는 예외 없이 제일 먼저 등장한다. 이는 그녀가 이들 여성들의 리더라는 얘기다. 해서 그녀는 예수를 추종한 여성들 전체를 대표한다. 이들 여성 추종자들을 막달라 마리아 그룹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즉 그녀는 예수를 추종한 한 여성인 동시에 막달라 마리아 그룹 전체이기도 하다. 요컨대 확장판의 바로 앞 단락, 원마가복음의 대미는 그녀가 부활의 첫 목격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확장판이 덧붙여질 당시 독자들은 첫 목격자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저자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두 번째 정보, 즉 예수가 일곱 귀신을 쫓아낸 여자라는 사실에 있다.

그런데 1세기 말의 문서인 루가복음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여자라고 말하고 있으니(8,2) 이것이 전혀 생소한 정보는 아니었겠다. 루가복음1세기 말 이후 초기 그리스도교 주류의 시각을 대표하고 있는 문서라는 점에서 일곱 귀신운운하는 얘기는 주류파 사이에서 돌던 얘기의 하나로 보인다. 그렇다면 아마도 확장판의 저자는 원마가복음을 주류파의 시각에서 보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적어도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는.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왜 그런 보완이 필요했을까.

 

첫 목격자’, 부활신앙에서 지울 수 없는 기억

 

마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라는 사실은 확장판뿐 아니라 원마가복음에서도 불편한 진실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녀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던 현장에 있었던 거의 유일한 예수의 제자다. 예수의 최고 제자로 알려진 베드로(2)조차 그 현장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 전날 밤 예수가 체포되어 대제사장 저택 뜰에서 온갖 모욕과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그이의 추종자 혐의를 받게 되자 나는 저자를 모릅니다라고 세 번이나 소리쳤다고 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시간을 조금 앞으로 거슬러 올라 게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는 눈물이 피가 되도록 절박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한데 베드로 등은 그 순간에도 졸고 있었다. 요컨대 마가복음은 베드로를 필두로 하는 예수의 (남자) 제자들이 예수에 의해 부름을 받아 내밀한 가르침을 받았고 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이를 살려내는 등 대중에게 그이가 베푼 놀라운 일들을 목격한 이들이었음에도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은 배반하고 부인하며 도주해버린 자들로 묘사된다. 즉 이 복음서는 초기 그리스도파 공동체 사이에서 주의 위대한 사도들로 추앙되고 있던 그분의 제자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한데 갈릴래아에서부터 이들 제자들과 함께 했던 몇몇 여성들도 있었는데, 이 복음서는 갈릴래아의 예수 이야기를 할 때 그들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예루살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와서야 오직 그녀들만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대목에서, (남자) 제자 중 아무도 목격자가 없었던 이야기를 하는 데서 마지 못해 이렇게 말한다.

 

여자들도 멀찍이서 지켜 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도 ...... 있었다. 이들은 예수가 갈릴리에 계실 때에, 예수를 따라다니며 섬기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

―〈마가복음15,40~41

 

이제야 겨우 말해야 했던 것은 십자가 현장의 목격자라는 것이 필시 너무나 명확하게 대중 사이에서 공인된 사실이었기 때문이겠다. 이렇게 예수 이야기를 회자하던 대중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에 대해 언급조차 않고 있는 것은 원마가복음을 채록한 이도 여성을 예수의 내밀한 추종자 집단의 하나로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겠다. 해서 그녀들에 관한 많은 기억들이 이 복음서 속에는 거의 포함되지 못했다.

한편 예수에 관한 사람들의 기억이 모이고 엮이어 하나의 큰 설화 덩어리로 만들어진 것은 언제일까. 그분의 십자가 처형 이야기에서 시작된 것일까. 혹은 회당과 호숫가에서 병자와 악령 들린 이를 치유하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하는 데서 시작한 것일까. 아니면 마태복음루가복음에 나오는 탄생 이야기에서 시작된 것일까. 모두 아니다. 예수 설화의 출발점은 부활 이야기다.

2020년 도쿄 하계올림픽에서 금메달 셋을 획득하여 한국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하계올림픽 3관왕이 된 안산 선수, 그녀는 한국의 가장 위대한 스포츠인의 하나가 되었다. 한데 그 전까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녀의 이름조차 몰랐다. 3관왕이 되자 그녀는 가장 유명한 한국인의 하나가 되었고, 수많은 이야기들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기억된 큰 이야기 덩어리로 엮인 안산 스토리3관왕이 된 이후에 비로소 형성되었다.

예수 이야기도 그렇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 그것이 대중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면서 그이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기억하는 이가 아니라, 당대에 가장 유명한 이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이에 관한 이야기들이 엮여서 큰 덩어리의 예수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한데 그 이야기의 출발점에 막달라 마리아를 필두로 하는 여성들이 있다. 그 맥락을 추정컨대, 제자들이 넋 놓고 아무 것도 못하고 있을 때 기민하게 움직이던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그 중심에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 이 요셉은 오직 예수의 부활 이야기에만 등장하며 그가 등장하는 대목에는 언제나 막달라 마리아가 나온다. 다음 장에서 더 이야기하겠지만, 그들은 서로 연루되어 활동한다.

그들이 연루된 일련의 사건이 있었다. 아리마태아 요셉과 막달라 마리아 그룹이 연루된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이야기하자. 아무튼 이 사건은 그분이 부활했다는 소문으로 이어졌다. 아니 그 사건 자체가 부활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빠르게 대중의 부활에 관한 신앙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그 이후 큰 덩어리의 예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또한 예수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그리스도 신앙이 체계화되는 일도 일어났다.(3) 물론 그것도 부활신앙에서 시작한다.

요컨대 예수의 부활은 그리스도파 신앙의 기원적 사건이고 그 담론 체계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런 부활 이야기에서 핵심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와 아리마태아 요셉이다. 그리고 이 두 인물의 연결망의 주도한 이는 막달라 마리아로 보인다. 대중 사이에서 그녀가 얽힌 예수 부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다음 장에서 좀더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것이지만,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 그룹이 퍼뜨린 부활 이야기가 대중에게 각인된 결과일 수 있고, 빌라도가 이끄는 총독부 당국의 발표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둘다 관점은 정반대지만 같은 내용을 퍼뜨렸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에는 부활에 대한 신학적 포장이 시도되기 이전의 날것 상태의 정보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랬다. 초기 그리스도파들이 이구동성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예수 부활 사건에 대한 기억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빠뜨릴 수 없는 존재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부활의 첫 목격자라는 사실이다.

 

일곱 귀신 들렸던 여자!

 

그 사실을 삭제할 수 없다면, 그 주인공을 격하할 수밖에. 그것이 일곱 귀신 들렸던 여자라는 첨가구의 역할이다.

말했듯이 이 표현은 루가복음8,1~3에도 등장한다. “그 뒤에 예수께서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그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열두제자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그리고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하였는데, 일곱 악령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

여기서 이 구절에 관한 트집 하나를 잡아보자. 막달라하고 하는 마리아(Μαρια καλουμενη Μαγδαληνη) 라는 표현은 6,15시몬과 같은 구조로 표기되어 있다. 직역하면 열광주의자라고 불리는 시몬(Σιμωνα τον καλουμενον Ζηλωτην)이다. 그렇다면 8,2은 마치 막달라가 마리아의 별칭이라는 얘기다. 한데 막달라, 막달레네(Μαγδαληνη)는 지명으로, 히브리 명칭은 미그달(Migdal)이고 아람어로는 막달라(Magdala). 갈릴리 호수 서북쪽에 있는 제법 큰 어촌마을다. 만약 저자가 막달라를 지명으로 생각했다면 나자렛 예수(Ἰησους Ναζωραιος, 루가복음18,34)처럼 막달라 마리아’((Μαρια Μαγδαληνη)라고 썼을 것이다. 요컨대 저자는 팔레스티나에 잘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녀가 일곱 귀신 들린 여자라는 말도 역사적으로는 별로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일곱 귀신 들렸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열왕기하8,1~6을 보면, ‘7년간의 기근으로 극도로 피폐해진 과부 얘기가 나온다. 묵시록에는 일곱 봉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등장한다. 여기서 숫자 ‘7’은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되는 재앙의 현실을 말하려는 데 초점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일곱 귀신이라는 표현 속에는 여섯과 여덟 사이의 개수가 되는 귀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녀 전체가 온통 귀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곧 구제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여성을 예수가 구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표현을 굳이 왜 첨부했을까? 베드로가 성전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하자 그가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는 감동적인 묘사를 할 때, 사도행전저자가 만일 그 베드로는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집에서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세 번이나 큰 소리로 예수를 부인했던 자라는 표현을 첨부했다면 어땠을까? 그건 위대한 사도 베드로를 디스하는 표현일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왜 확장판이 막달라 마리아의 가장 빛나는 행적을 언급하면서 굳이 이런 표현을 넣었던 것일까?

 

왜 그랬을까

 

2성서에서 마리아라는 이름은 81번 등장한다. 이 이름의 인물은 5명 혹은 7명이다. 암튼 여러 마리아 중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단연 많다. 모친 마리아는 32, 막달라 마리아는 24회 나온다. 근데 모친이 등장하는 문맥은 단 두 번을 제외하면 모두 예수 탄생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하는 텍스트는 한 번을 제외하면 모두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다. 이야기의 형식상 탄생 이야기는 예수 설화의 첫 부분이고 죽음과 부활 얘기는 마지막 부분이지만, 설화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죽음과 부활 얘기가 제일 먼저 만들어지고 탄생 이야기는 제일 마지막에 설화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대중이 제일 먼저 기억한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였던 반면, 모친 마리아는 제일 마지막에 기억 속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설화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특히 죽음과 부활에 관한 기억에서 그녀는 너무나 명확하게 사람들에게 각인된 이였다. 그녀는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의 동반자였지만, 그때까지는 어느 기억록에서도 마치 없었던 사람처럼 기억이 삭제되어 있었는데, 십자가와 부활 이야기에선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사람들 사이에서 중요한 존재로 기억되어 있었다.

해서 여성임에도 그리스도파 집단 사이에서 그녀를 추종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마리아복음〉 〈도마복음〉 〈빌립복음〉 〈피스티스 소피아같은 문헌들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제자보다도 중요한 인물로 그려졌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문헌들이 시기상 1세기 말에서 2세기 전반의 문서들이라는 점이다. 반면 일곱 귀신운운했던 확장판루가복음도 바로 그 무렵의 문헌들이라는 점이다. 하나 더 주목할 것은, 이 문헌들 모두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대립하는 주요 인물은 베드로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시기 베드로를 추종한 이들과 막달라 마리아를 추종하는 이들이 그리스도파 내에서 치열한 갈등이 벌어졌는데, 베드로를 추종한 이들의 문헌은 얼마 후 정전에 포함된 반면 막달라 마리아를 추종한 이들의 문헌은 모두 정전에서 밀려났다는 것이다.

근데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예수가 돌아가신 직후인 30~40년대에 예루살렘의 예수파 사이에서 지도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였다가 50년대에는 베드로가 그 중심에서 밀려났다. 50년대의 바울은 베드로보다도 주의 형제인 야고보를 더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특이하게도 야고보나 요한은 모두 이스라엘식 이름인데, 2)에서 말한 것처럼 베드로는 그의 이스라엘 이름인 시몬으로 불리는 게 아니라 그리스식 이름인 베드로로 불리고 있다. 이스라엘에서의 기억은 희미해진 반면, 헬라권에서의 기억이 그에 관한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다는 얘기겠다.

하지만 50년대에 헬라의 그리스도파 사이에서 베드로의 존재감은 그리 압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한데 90년대 이후 베드로는 역주행하는 초특급 인물이 된다. 무명의 활동가인 바울도 그랬다. 해서 주요 사도들의 행적을 기리는 문헌인 사도행전은 바울과 베드로, 하나 더 하자면 빌립까지, 이 세 명을 주로 다루고 있다. 문제는 이 세 인물이 사도 중의 사도로 평가되던 시기가 그들이 사망한 지 오래된 이후라는 데 있다. 즉 그리스도파 중심세력의 문헌인 이 행전은 세 사도들의 추종자들의 입장이 절충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루가복음사도행전이 공히 격하시키는 한 명의 인물이 있다. 막달라 마리아다. 이는 당시 그녀를 추종하는 이들이 제법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예수 설화 형성 초기부터 가장 중요한 지도자였던 이가 이 시기에 강하게 배척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추앙하는 이들은 굴하지 않고 강력히 저항했다. 해서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기억을 통해 재해석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 그를 추종하는 이들 사이에 성별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했을까. 완벽한 평등이 자리잡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로 활동했다는 것은 당대의 성역할에 대한 평균적 감수성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가 그들 사이에서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여자 마리아와 그 집회를 주관하는 여자 마르다를 대비시키는 설화가 생겨났을 수 있다. 이때 예수는 집회를 이끄는 여성보다 경청하는 여성에게 더 애틋한 모습을 보인다. 성역할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는 흔적이다.

그럼에도 막달라 마리아 등의 인물이 베드로를 압도할 만큼 중요했다는 점은 예수운동이 대단히 평등한 공동체였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예수 사후 그리스도파는 예수 당대의 유력한 여성 지도자들을 격하하는 이들에 의해 경도되는 경향을 보인다. 바울 주위에도 여러 명이 있었던 활동하는 여성 엘리트는 점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대안적 여성으로 등장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실제로 어땠는지와는 무관하게, 늘 남자들의 로망으로 자리잡은 인자하고 자비롭고 다정한 어머니라는 존재가 격하된 막달라 마리아의 자리에 들어온다.

이렇게 1세기 말 그리스도파의 기억은 활동하는 여성 엘리트 대신 자애로운 엄마를 호출한다. 그렇게 성역할을 고정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그리스도파는 성별 불평등의 해석들에 휘둘리게 된 것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평균적인 사회적 성평등 인식보다 낮은 것은 이런 해석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운동에서 사라진 그녀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우리 시대 그리스도교의 편견과 차별의 종교성을 교정하는 하나의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후주]

(1) 이하에서는 후대에 첨부된 텍스트인 마가복음에서 16,9~20을 제외한 부분을 편의상 원마가복음이라고 하고, 첨부된 부분을 ‘(마가복음의) 확장판이라고 부르겠다.

(2) 2성서에서 이 인물은 대부분 베드로(Petros)라는 헬라식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의 원래 히브리식 이름은 쉬몬’(Shimon)이었다. 2성서에서는 시몬’(Σιμων) 혹은 시므온(수메온, Συμεων. 사도행전15,14베드로전서1,1)으로 헬라어식으로 음역되어 표기되어 있다. 예수를 추종하던 당시, 30년대 초에 그는 반석이라는 뜻인 게바’(Kepha)라는 아람어식 별명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서기 40년대 후반 이후 그가 헬라 도시들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게 되면서 반석이라는 뜻의 헬라어인 베드로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즉 예수와 함께 하던 30년대 초까지 그는 게바라는 별명의 시몬이었고, 40년대 후반 즈음 헬라문화권의 선교사가 된 이후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제2성서 모두가 헬라문화권과 얽혀서 쓰였다는 점에서 그를 부르는 가장 일반적인 표기는 베드로다. 그러므로 이 문맥에서 그를 시몬 혹은 게바라고 불러야 마땅하지만, 여기서는 베드로라고 부르겠다.

(3) 예수 이야기는 복음서들 속에 들어 있다. 그리고 예수 이야기 없는 그리스도 신앙은 바울의 서신들 속에 들어 있다. 이 두 예수 담론 형식은 서로 별개로 발전했지만 아마도 1세기 말 이후에는 이 둘은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