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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한국전쟁과 ‘한경직의 종교’, 그 적폐의 기원

[녹색평론] (2020 여름)에 게재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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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한경직의 종교’, 그 적폐의 기원

 

 

 

긴급전문

 

뉴욕시간으로 1950626,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와 국제문제교회위원회(The Commission of the Churches on International Affairs, CCIA) 사무실로 두 줄짜리 급전이 당도했다. 북한이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고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긴박한 내용이다.

발신자는 한국기독교연합회다. 당시 이 기구의 총무는 남궁혁 목사였으니 이 전보는 그의 책임 아래 작성되어 발신되었겠다. 하지만 고령(69)인 탓에 그는 피난길에 오르지 못했고 그해 8월 납북되어, 급전 이후 국면을 이끌 수 없었다. 이 전보 작성과 발신에 실제적인 역할을 수행한 이는, 돋보이는 국제감각의 소유자인 40대 후반의 한경직 목사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그는 전쟁기간 중에 연합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등 최고위층 인사의 통역관을 맡으면서 한국개신교를 사실상 이끌었다.

이 급전을 수령한 국제선교협의회와 국제문제교회위원회는 신속하게 이 문제를 두고 미국 정부와 협의했고 세계교회협의회(WCC) 등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국제네트워크를 통해 세계 여론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기독교 국제네트워크의 지원에 힘입어 미국 중심의 국제연합은 매우 이례적으로 신속한 참전을 결의했고, 전쟁이 발발한 이후 보름만인 77일 연합군을 파병했다.

이것은 한국개신교 역사상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존재인 한경직의 성공스토리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다. 동시에 전쟁으로 사회시스템의 완전 붕괴상황에 놓인 한국사회의 재구성 과정에서 가장 막강한 사회세력으로 발돋음하는 계기를 맞이한 한국개신교 성공스토리의 중대한 계기적 사건이기도 하다. 즉 한경직 개인의 성공과 한국개신교의 성공이 만나는 지점에서 한국전쟁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한국개신교는 가톨릭과는 달리 매우 복잡한 종단이다. 어떤 관점을 취하는지에 따라,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읽기를 시도하는지에 따라 다른 해석들이 도출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 한국의 시민사회가 개신교에 대해 확인하고자 하는 몇 가지 문제적 요소들, 가령 극우반공주의 성향이 강하고, 교세에 비해 너무 막대한 사회적 자원을 과점하고 있으며, 정치권력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점 등을 알고자 할 때, 한국전쟁이라는 시공간적 사건에서 한국개신교의 형성을 살피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경직과 개신교를 엮어서 볼 때 많은 물음들을 설명할 수 있다. 이 글은 바로 이에 관한 간략한 스케치다.

 

해방정국

 

해방정국 남한에서 개신교는 전체 인구의 1.5~2.5%(1)에 불과한 소수종파였지만 그 존재감은 막대했다. 무엇보다도 좌우 이념갈등의 최전선에서 우파의 구심점에 개신교가 있었다. 왜 이런 이상한 일이 가능했을까. 실마리는 미국이다.

1823년 발표된 먼로독트린에 의해 불간섭주의를 국제정치의 원칙으로 삼아온 미국은 아시아에 관한 정보를, 외교관이 아니라, 선교사나 무역활동 종사자들을 통해 얻었다. 한반도의 경우는 경제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주로 선교사들의 리포트가 한반도 정책에 주된 참고자료로 활용되었다. 하여 미국의 한반도 외교정책을 다루는 연구자들 중에는 선교사 리포트를 주목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한국의 친미성향의 개신교계 엘리트들의 역할이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추방된 미국계 선교사들이 해방 직후 한반도에 돌아와서 했던 최초 행보 중의 하나는 영어를 사용하는 친미적 인사들을 미군정에 소개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근대적 고등교육을 받은 개신교계 엘리트들이었다. 선교사들에 의해 추천된 이들이 미군과 연계되어 활동했던 가장 중요한 직책은 통역관이거나 공보관이었다.

서북지역 개신교계 거물인 윤하영 목사는 194510월 초 월남한 직후 바로 미군정청의 공보관이 되었다. 윤하영과 한경직은 둘다 미국 유학파인 서북지역의 엘리트 목사로, 윤하영이 신의주제1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고, 한경직은 제2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 그들 둘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창당하여 평안북도 지역의 기독교세력을 규합하여 공산당과 맞서고자 했다. 한데 지구당 건설과정에서 소련 군정당국과 유혈충돌이 벌어졌고, 시위는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이에 11월 말 소련 군정당국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윤하영과 한경직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으나, 그들 둘은 이미 한 달 전에 남한으로 도주한 뒤였다. 아무튼 이 사태와 관련해서 평북 지역에서 월남한 이들 사이에서 윤하영과 한경직은 강성반공주의를 상징하는 존재로 기억되었다. 훗날 반공의 상징적 인물들인 오제도, 장도영 등이 바로 신의주에서부터 한경직의 영향권 아래 있던 인물이었고, 김창룡은 장도영의 충성스런 수하였다.

월남하자마자 미군정 공보관이 된 윤하영은 한경직이 당국의 특혜를 받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 덕에 한경직은 월남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성베다니교회(이듬해 영락교회로 개칭)를 설립할 수 있었다. 미군정이 적산가옥을 그에게 특혜로 준 덕이다. 윤하영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쉽지 않을 일이었다.

신의주에서도 교회 성장에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던 한경직은 영락교회의 초고속 성장을 이끌었다. 창립 당시 27명이던 신자가 이듬해 말에는 1,500명에 육박하게 되었고, 1949년에는 6천 명에 이르는 대형교회가 되었다. 그렇게 커다란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교회가 북한지역에서 월남한 이들의 센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월남한 개신교 목사들도 즐비했는데, 왜 한경직의 교회가 월남한 난민들의 중심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경직이 강성반공주의로 유명했던 목사였다는 점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신의주반공투쟁에 참여했던 열혈청년들을 포함해서, 서북지역 곳곳에서 온 청년들이 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하여 창립1주년이 되기도 전에 이 교회 청년들을 축으로 하는 서북청년회가 출범했다. 미군정청, 군정청 산하 경무국, 그리고 이승만 등 강성우파 지도자들과 친일경력이 있던 자본가들이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서북청년회는 해방정국 남한에서 가장 강성의 행동주의적 우파청년집단이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하는 것이 정의라고 믿었고 그것이 낯선 남한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였다. 한데 그런 정의를 과격한 행동으로 옮기자 남한 땅에서 생존할 물적 보상이 뒤따랐다. 하여 그들은 점점 더 무자비한 폭력집단이 되어 갔다. 그리고 그런 증오의 화신들에게 한경직은 신의 축복을 선포했다. 그것은 폭력행위에 대한 물적 보상이 신의 선물처럼 해석되게 하는 심리적 장치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영락교회가 월남자들의 센터가 되자, 미국 북장로회가 보낸 거액의 월남자 정착기금 운용에 대해 한경직의 영향력이 막대해졌다. 하여 그는 사실상 교회 연관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고아원과 학교 등을 만들었고, 그밖에도 병원, 출판사, 언론사 등에 대한 지원금의 활용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하여 그는 사람들에게 취업의 기회도 만들어주는 마이더스의 손이 되어 갔다.

그럴수록 한경직에 대한 미군정의 신뢰는 깊어졌다. 1948년 신탁통치와 남한단독정부 문제를 두고 한국사회의 여론을 청취하기 위해 방한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과 만나기로 예정된 각 분야 지도자 가운데 한경직도 포함되었다. 개신교 지도자 중에는 유일하게 그가 선택된 것이다.

이렇게 한경직은 해방정국에서 가장 돋보이는 개신교 우파의 지도자였다. 개신교가 정국에 관여하는 데 있어 그는 가장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에 걸맞는 직위가 부여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원로급 지도자도 아니었고, 지분이 막강했던 서울이나 평양 출신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미국 유학파 엘리트 중 하나였지만, 서북청년회가 거의 폭력배처럼 활개치고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였다.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의 둘째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일등공신인 전광훈 목사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을 한경직과 비유했던 것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해방정국의 한경직도 압도적으로 좌편향의 사회였던 남한을 극우파사회로 바꾸었고 기어이는 극우적인 남한단독정부 설립에 누구보다도 큰 기여를 했지만, 그에겐 너무 과격한 목사의 이미지가 강했다.

한데 그런 이미지는 당시 남한의 개신교의 모습이기도 했다. 미군정 당국이나 이승만 정부는 개신교에게 온갖 특혜를 주었고, 특히 월남자 개신교 세력의 위상이 크게 상승했음에도, 교세는 여전히 소종파의 하나였다. 1)에서 보았듯이, 194524만이던 남한의 개신교 신자 수가 1950년에는 두 배 이상 늘어서 50만 명 정도가 되었지만, 여기에는 월남한 개신교 신자 10만 명 정도가 포함된 숫자다. 인구대비 1.5%에서 2.5%로 증가한 정도였다. 한데 당시 제헌의회 의원 198명 중 54(27%), 이승만정부 초대내각의 부처의 장 21명 중 9(43%)이 개신교 신자였던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정부는 거의 기독교국가 같은 구성을 하고 있지만, 국민 사이에서의 인지도는 매우 낮을 뿐 아니라 그나마 싸움이 신앙의 모든 것인 십자군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다.

 

전쟁

 

전쟁이 발발했다. 전 세계의 국지전 가운데 한국전쟁만큼 심각한 피해를 초래한 사례가 더는 없을 만큼 모든 것을 파괴한 전쟁이었다.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중대한 기회가 된 이들과 사회세력이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한경직과 한국개신교가 그랬다.

1950625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이 침공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는데,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대통령이 보고받은 시각은 그로부터 6시간 반이 지난 오전 1030분이었다. 그로부터 12시간이 지난 밤 10시 반에 대통령은 미국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긴박한 상황에서 그가 취한 가장 합리적이고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는 서둘러 27일 새벽 2시에 비밀리에 피난길에 올랐다. 국무회의는 열리지 않았고, 전쟁 상황에 대한 이렇다 할 정보를 접하지 못했던 국회의장 신익희는 27일 아침 7시에 비어있는 경무대를 찾아갔고 그도 서둘러 피난을 떠났다. 그날 밤 9~11시 사이 대통령 특별담화가 세 차례 방송되었는데, 국군이 서울 사수를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28일 새벽 230분에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

이렇게 혼자 줄행낭을 친 대통령을 제외한 남한의 요인들조차 거의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던 27(뉴욕 시간으로 26), 글 서두에 말했듯이, 한국기독교연합회 총무 남궁혁의 재가 아래 한경직이 국제선교협의회(IMC)와 국제문제교회위원회(CCIA)로 급전을 보낸 것이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기독교계 국제기구들에는 좌우 이념대립이 치열했다. 반면 뉴욕에 본부가 있는 기독교계 국제기구들은 친미성향이 강했으니 한국의 도움 요청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실제로 IMCCCIA가 기민하고 용의주도하게 국제기독교계의 대응을 이끌어냄으로써 미국 영향이 강한 장소인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WCC 중앙위원회가 열리게 되었다. 하여 이 회의는 한국전쟁의 성격을 북한의 남침으로 규정하고, 유엔의 경찰행동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추동했다. 이후 유럽의 여러 WCC 회원국가들 내에서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비난하는 성명이 잇달아 발표되었지만 이미 세계교회는 유엔의 파병을 지지하는 권위 있는 결정을 내린 뒤였다.

한경직의 기민한 정치력이 발휘된 또 하나의 사례는 대한기독교구제회의 설립이다. 급전을 보낸 날 종로의 예수교서회(대한기독교출판사의 전신) 사무실에서 한경직을 포함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성직자 8인이 모여 설립한 기관인데, 한경직이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요컨대 이 기구의 설립을 주도한 이는 한경직인 것이다. 설립 취지는 국군을 돕고 피난민을 구제하는 데 있었다. 물론 설립하자마자 이 기구 자체도 피난길에 올라 대전, 대구, 그리고 부산으로 본부를 옮겨야 했다. 하지만 이 단체는 전쟁 당시 개신교가 주도하여 설립한 최초이자 대표적인 구국단체였다.

계속된 피난길에 몸도 지치고 마음도 절망의 나락으로 내던져졌을 법함에도 한경직은 대한기독교구제회의 활동을 끊임없이 기획해냈는데, 특히 대구에서 구국지원청년지원병 모집운동을 벌였고, 무려 3천 명의 자원을 받아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캠페인에 3천 명이나 자원자를 모집할 수 있는 이는 한경직 외에는 없을 것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군부로부터 깊은 신망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 그를 특별히 신임했던 미군정사령부는 자신들의 지휘관이자 한국전쟁 파병을 위해 신설된 유엔군사령부의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맥아더에게 한경직을 소개하여 그의 통역관이 되게 했다. 하여 인천상륙작전 당시 그는 맥아더를 보좌하여 유엔군과 국군의 북진에 동행했다. 이것은 국군의 고위급 장교들에게 한경직이라는 존재가 대통령보다도 더 중요한 인물처럼 받아들여지게 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피난처 곳곳에 교회를 세웠다. 부산영락교회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대구와 제주에도 영락교회가 세워졌는데 역시 많은 이들이 몰려왔다. 우선 서울에서 피난하여 내려온 영락교회 교인들과 전국 요처로 파견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이 교회로 모여들었다. 또 전쟁 기간에 월남해 내려온 사람들도 소문을 듣고 영락교회로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급부상한 한경직의 정치적 위상을 보고 찾아간 이들도 적잖았다. 그중에는 권력층 인사도 꽤 많았다.

그러나 어느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경제적 요인이었을 것이다. 전란 속에서 절체절명의 생존의 위기에 빠져있던 이들에게 영락교회는 생존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최적의 장(field)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 세계에서 어마무시한 구호금과 물품이 답지해 들어왔다. 그중 절반 정도는 개신교계 기관들로부터 온 것이다. 한데 나머지 절반의 구호금과 물품은 국내 수령주체가 부재하거나 부패한 탓에 효과적으로 배분될 수 없었다. 반면 교회는 달랐다. 피난 중에도 잘 조직되어 있었고 국제적 네트워크와의 연결장치가 잘 작동되고 있었으며 언어적 장애를 극복할 인적 자원이 풍부했다. 해서 전 세계 최고의 구호전문가들이 들어와도 개신교만큼 인프라가 잘 갖춰진 조직을 활용할 수 있는 곳은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특히 한경직이 주도한 대한기독교구제회는 이런 상황에서 가장 빛났다. 여기서 한경직으로 표상되는 기독교 신앙이 주목된다. 대한기독교구제회에는 이념적 성향에 있어서 훨씬 온건한 화해론자들이 많았지만, 문제는 한경직이 이 단체의 성격을 과잉규정하는 존재였다는 데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강성반공주의와 배타주의다. 한경직을 추종하는 수많은 열혈청년들이 그가 벌이는 일에 목숨을 걸고 참여하고 있었기에 그의 존재감은 더욱 강력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세계 최고의 국제구호전문가들은, 기독교 기관에 속했든 아니든 간에, 구호의 우선순위를 긴급한 필요에 두고 있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기독교계 현장 활동가들 다수는 이념의 잣대를 예민하게 적용하고 있었다. 가령 아무리 긴급한 대상이라고 해도 빨갱이에게는 절대로 수혜를 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구호책임자들과 현장 활동가들 사이의 마찰이 적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막대한 구호기금과 물품이 기독교를 매개로 사용되었고, 이는 많은 대중에게 기독교 신앙이 매우 유혹적으로 다가가는 요소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신교 신자가 되려면 일종의 정신세탁을 요구받았다. 공산주의자는 절대로 함께 해서는 안 되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배타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요체로 하는 것이다. 한 집만 걸러도 가족과 친족, 친구들 중 공산주의자들이 있었고, 거의 모든 국민이 불교와 유교, 무속 등의 신앙을 갖고 있었기에 개신교로 개종하려면 가족과의 단절까지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컨대 개신교는, 특히 한경직 류의 개신교는 여전히 문턱이 높았다.

한경직 자신은 늘 타자에게 희생적이고 독설을 퍼부을 때조차 점잖은 품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추종자들 대부분은 너무나 공격적이었고, 그런 공격성의 화신들에게 한경직은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무튼 영락교회는 경제적 생존을 위한 기회의 장으로서 큰 매력을 갖고 있었고, 이것은 교단을 불문하고 무수한 개신교 성직자들과 교회들이 한경직과 영락교회를 선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여 전쟁과 전후 복구의 시간인 1950년대는 한경직과 영락교회의 시대였다.

이제 한경직은 한국개신교의 중심 중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특히 전국이 전쟁터였던 19513월까지의 국면이 지난 뒤, 전쟁터는 38선 부근으로 국한되고 그 이외의 지역은 후방지대가 되는 교착국면에 들어서자 이미 전후 복구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제 구호기금과 물품보다도 사회재건을 위한 기금이 더 많이 유통되었다. 여전히 개신교는 막대한 기금을 운용할 수 있었고 이 시기에 개신교는 시민사회에서 다른 경쟁자가 없을 만큼 엄청난 물적인적 자원을 차지한 종단으로 발돋음한다.

주목할 것은 바로 이 무렵부터 개신교 내에는 교단분열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19515월 장로교 부산총회에서 신사참배 문제로 고신파가 장로교 주류집단에서 배제되었고, 19534월 장로교 대구총회에서 성서비평학 문제로 김재준과 기장파가 주류집단에서 배제되었으며, 19599월 장로교 대전총회에서는 WCC 문제로 합동파가 장로교 주류에서 이탈하였다. 세 번의 대분열은 각기 이유도 다르고 양상도 달랐지만, 공통된 것은 한경직이 속한 다수파가 그 반대파를 배제한 사건이고, 배제된 소수파는 미국장로교회로부터 온 각종 기관의 재산권에 대한 접근권에서 멀어졌다는 점이다. 그것은 반대로 주류파가 그 재산에 대한 독점적 점유권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편 1955년에 한경직은 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 되는데, 그 무렵부터 장로교는 대중신비주의적 소종파들에 대한 제명작업이 본격화되었다.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소종파운동이라면 나운몽의 용문산기도원과 박태선의 전도관운동인데, 이 두 소종파 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인 나운몽과 박태선은 1954년 전쟁이 종식될 무렵 몸과 정신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이렇다 할 치료를 받을 수 없던 대중에게 질병의 치유를 곁들인 부흥집회를 이끌었다. 이 두 운동은 기독교도뿐 아니라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던 많은 대중에게 조건 없는 수혜의 복음을 베풀었다는 점에서 한경직 류의 자폐적 종교성과는 달리 매우 개방적인 종교로의 전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근본주의적 폐쇄성을 복음의 진리라고 믿었던 주류 장로교, 특히 한경직과 서북파 장로교 세력에게 이들 대중신비주의적 신앙운동은 혼합주의적 이단으로 보였다. 하여 1956년 장로교 총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낙인찍음으로써 함께 할 수 없는 종교성으로 배척되었다.

흥미롭게도 1970~1980년대 한국개신교의 대부흥을 이끌었던 조용기의 순복음교회 운동은 나운몽의 부흥운동 계보에서 나온 것이었고, 1980년대와 2천년대에 또 다른 대부흥을 주도한 조희성의 영생교와 이만희의 신천지 운동은 박태선의 부흥운동 계보에서 나왔다. 즉 한국개신교의 확장성은 날카로운 이념을 극대화시킨 정통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대중의 고통에 어떤 식으로든 다가간 종교성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물론 순복음운동이나 신천지 운동은, 대중의 고통을 퇴행적 신앙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지만, 한경직 류의 자폐적 신앙이 할 수 없었던 대중적 확산에 성공했다는 점은, 오늘의 한국기독교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장기지속성

 

1960년 한국개신교 신자 수는 약 623,000명이었다. 10년 전 신자가 50만 명이었으니 25% 정도 증가한 셈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 십년 동안의 인구 증가율과 거의 비슷하다. 1950년 약 2천만 명이던 남한 인구는 19602,500만 명이 되었다. 인구 대비 개신교 신자의 비율은 10년 전처럼 2.5%에 그쳤다. 아직 개신교는 대중에게 파고들지는 못한 것이다.

좌편향이 강했던 사회를 극우적 사회로 전환시키는 데 최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전사의 종교(warrior's religion) 이미지가 강했던 해방정국과 달리, 1950년대 개신교는 막대한 사회적 자원을 차지하게 되었고 인구 대비 신자 비율을 훨씬 압도하는 많은 파워엘리트를 보유한 종교가 되었다. 그런 인적, 물적 자원에 기초하여 정권을 창출하고 유지하게 하는 막강한 능력을 갖추게 된 시기가 바로 1950년대였다. 한데 그럼에도 이 시기 신자의 비약적인 증가는 없었다. 십년 전보다 12만여 명 늘었지만, 그중에는 전쟁기간에 월남한 개신교 신자들이 적잖이 포함되었다. 즉 새 신자의 증가는 이 종단의 영향력에 비해 너무나 미미했다.

한경직은 이 시기 개신교를 대표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개신교의 특성을 만들어낸 존재였다. 하여 그는 이 시기 한국개신교의 절대1인이 되었다. 그는 수많은 목사들의 롤모델이었고, 영락교회는 수많은 교회들의 선망과 모방의 대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 한국개신교는 한경직의 종교였다고 과언이 아니다. 한데 한경직의 종교는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는 종교가 되었음에도, 대중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종교가 되지는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과격한 반공주의 성향 때문이고, 또 반혼합주의 때문이겠다. 까탁하면 붉은 용이 되고(2) 사이비 혹은 이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경직의 독보적 위상은 그가 은퇴하는 1970년대까지 건재했다. 하지만 그의 독보적 영향력이 감소한 것은 은퇴가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다른 신앙 양식이 대유행함으로써 한경직의 종교’, 그것의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조용기현상이 대유행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이제 많은 이들은 조용기와 순복음교회를 롤모델 삼아 선망했고 모방했다.

앞에서 간략히 언급한 것처럼 조용기는 나운몽의 계보에 있는 부흥사다. 나운몽처럼 조용기도 병든 몸의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과 영의 구원이 별개가 아님을 주장했다. 여기에 하나 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갈망까지도 포함되어야 진정한 구원이라고 강변했다. 한경직은 이런 세속적인 갈망은 자칫 영적인 구원을 타락시킬 뿐 아니라, 그런 세속적 갈망이 무속적인 기복성의 발로라고 보았다. 그래서 한경직은 이런 신앙을 이단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속적 요소와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결합시킨 것이니 혼합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대중은 조용기의 종교를 향해 몰려갔고, 한경직의 비판에 공조했던 이들조차 슬금슬금 조용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따랐던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조용기의 종교한경직의 종교보다는 더 대중적이라는 점에서 양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렇게 기독교 신자가 된 이들이 성찰적이고 이웃에 대한 공공의식이 발전한 대중이 아니었다. 한경직의 종교에선 대중이 부재하지만, ‘조용기의 종교에서 대중은 퇴행적 존재가 되었다.

아무튼 한경직의 자폐성, 대중의 욕망과 선을 긋는 그런 종교성은 그 위상이 꺾였지만, 조용기조차 혹은 그 종교의 신봉자들조차 한경직의 프레임을 다 버리지는 않았음을 주지해야 한다. 아니 한경직의 종교’, 그것의 담론적 골격을 그대로 수용했다. 마치 한경직의 종교가 한국개신교의 DNA가 된 것처럼.

대표적인 것이 반공주의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반드시 반공주의와 불가분의 동일체는 아님에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반공주의는 신앙 그 자체로 이해되었다. 또 한경직의 기독교국가론, 그 용어를 사용하든 않든, 많은 그리스도교 엘리트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다. 한경직처럼 그들 자신은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고 끝끝내 교회 사역자로 남아 있지만,(3) 그럼에도 그들은 언제나 정부 형성에 깊게 개입하려 한다. ‘장로대통령운운하는 주장들은 한경직의 기독교국가론이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담론화의 방식이다.

그리고 하나 더 얘기하자면, 개신교는 파워엘리트를 통해서 사회에 개입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는 유난히 사회적 자원을 독과점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파워엘리트를 신자로 끌어들이는 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무지렁이 대중의 소박한 주장이 담론화되고 제도에 반영됨으로써 구현되는 사회적 공론에 대해서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고, 반대로 여러 파워엘리트 집단을 통한 사회적 개입을 선호해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경직과 영락교회가 더 이상 선망과 모방의 대상이 되지 않게 된 뒤에도, ‘한경직의 종교가 내포하는 요소들은 한국개신교 내에서 장기지속성을 지닌다. 문제는 이런 한국개신교의 뿌리 깊은 요소가 권위주의적이고 배타적이며 타자에 대해 공격적인 증오의 담론 양식이라는 데 있다.

오늘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세계를 대표하는 여러 유수의 대중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의 대응법이 가장 적절했다고 하면서, 민주주의의 발전이 코로나19를 막아내는 데도 유효했다는 해석을 덧붙였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세계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예외적으로 민주주의가 강화되는 방식으로 국가와 시민사회가 형성되었는데, 코로나19가 세계를 덮쳤을 때 더 권위주의적 정권보다 더 민주주의적 정권과 시민사회가 훨씬 훌륭한 대응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개신교는 한국사회가 성찰적 사회로 발전해 가는 데 장애물과 같은 존재가 되고 있다. 적폐의 전형을 교회가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기에 형성된 한경직의 종교그것을 청산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종교로서 한국개신교가 재정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후주]

(1) 1945년 당시 남한 인구가 1,600만 명, 개신교 신자는 24만 명 정도였다(1.5%). 또 북한 인구는 900만 명, 개신교 신자는 20만 명 정도였다(2.2%) 한데 북한 개신교 신자 중 절반 가까운 이들이 월남했고 또 개신교에 대한 미군정의 특혜로 새 신자의 증가도 있었다. 하여 1950년 당시 남한 인구는 2,000만 명 중 개신교 인구는 50만 명 정도가 되었다.(2.5%)

(2) 한경직은 설교에서 요한계시록붉은 용이라는 표현을 공산주의자에 대한 적대적 존재를 지칭하는 데 사용하곤 했다.

(3) 그는 자신의 이런 행보를 정교분리라는 말로 정당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