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민중신학, 21세기적 전환에 관한 내설 - 안병무의 ‘살림’과 포스트휴먼적 아고니즘의 정치신학

한신대신학대학원 목요강좌(2022 11 10)의 강연 원고

----------------------------------------------------------------------

 

민중신학, 21세기적 전환에 관한 내설

안병무의 살림과 포스트휴먼적 아고니즘의 정치신학

 

 

 

 

이중의 정체성, 대화주의자 vs. 계몽주의자

 

언제부터 증상이 고질(痼疾)이 되었는지 모른다. 증언에 의하면 중앙신학교 교장이던 1965~69년 사이 선생의 수업은 건강 문제로 휴강이 많았다고 한다. 1976년 일명 명동사건으로 알려진 3.1민주구국선언 사건 때에 저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는데, 악화된 심장질환 (?)에 선생은 고문을 피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1985년 말부터는 매우 심각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평생 촌철살인의 글쟁이로 살았지만, 이젠 손이 떨려서 글을 쓰기도 힘들었다. 대담집 민중신학 이야기저작의 뒷 이야기는 이런 사정에서 시작된다. 어떡해서든 선생이 글을 쓰게 하는 방법으로 제자들이 고심 끝에 내놓은 것이 대담이었다. 또 그 무렵부터 선생의 글은 구술로 저술되었다. 대략 이런 식이다. 채록자가 선생이 구술한 것을 기록하고 한국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제자가 다듬고 선생이 최종감수를 했다. 짧은 거리를 걸을 때도 어깨를 들썩이도록 숨을 헐떡이며 걸었고, 다 와선 중증의 빈혈증 환자처럼 창백한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1992년 한국민중신학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이 되었을 때 선생이 지은 소식지의 이름은 이었다. 오랜 심장질환으로 숨쉬기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겪었던 선생에게서 가느다랗게라도 힘겹게 내뱉는 이야말로 가장 민중스러운 생명의 은유였겠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무렵 선생은 거의 매일 집 안에 있었다. 새로운 구금생활이 시작되었다. 선생이 나가지 못하니 집으로 연일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글을 청탁하려는 사람들, 인터뷰하려는 사람들, 한 마디 가르침의 말을 구하려는 사람들 등.

선생은 이런 식의 만남에 질리고 있었다. 사실상 일방향적인 말뿐인 대화 없는 대화였다. 사실 선생은 평생 이런 대화에 익숙했다. 십대 후반부터 교회에서 설교를 했고, 평생 목사가 아니었지만 네 번이나 교회를 개척하여 교회의 지도자이자 설교자로 살았다. 수많은 강연을 했고, 수많은 글을 썼으며, 교수로서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선생은 늘 가르치는 이였고, 계몽의 시대에 한국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설법가였다. 하지만 선생의 사상은 가장 익숙한 자신의 역할과 갈등하고 있었다.

선생의 사상은 줄곧 실존주의(existentialism)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민중신학자가 된 1970년대 중반 이후에도 여전히 그는 실존주의적 문제의식을 민중신학적으로 재해석하였다. 실존주의는, 선험적으로 의미나 본질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본질주의(essentialism)와는 달리, 자신과는 다른 무엇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가는 불확정적인 존재에 관해 묻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과의 관계에 있다. 즉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서로 변화해 가는 것에 관한 물음이 실존주의적 사유방식이다. 한데 민중신학이 주목하는 타자는 법의 바깥, 규범의 바깥, 구원의 바깥으로 내팽개쳐진 이들, 곧 민중이다. 하여 민중신학은 신과 민중의 실존적 만남에서 신학의 내용과 과제가 무엇인지를 말하고자 한다.

이는 그의 예수연구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이제까지의 서양의 예수학계는 거의 언제나 예수를 읽어내기 위해 그이와 얽힌 이들의 관점을 벗겨내려 했다. 가령 복음서에서 예수의 이야기를 자신의 관점에서 기술했던 저자의 시선이 아닌 예수 자신의 말이 무엇인지를 밝혀내려는 것이 이제까지 예수역사학의 기본적 원칙이었다. 타자의 관점으로 해석된 예수가 아닌 예수 자신의 진정한 말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선생은 그것을 -객 이분법이라고 비판한다. 누구도 타자와 분리한 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태초에 (말이 아니라) 사건이 있었다.” 사건이란 실존주의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구현되는 존재의 양상이다. 존재의 본질이란 없고 이러한 관계적 양상을 실존이라고 불렀다. 해서 예수사건은 예수와 주변의 대중이 함께 벌인 것, 그것에 관한 대중의 기억 속에 예수의 실존이 있다는 것이다. 선생이 예수 연구에서 가장 주목했던 텍스트인 마가복음에서 예수 주변의 대중은 무리(clowd)로 번역된 오클로스(οχλος). 이제까지 예수학계는 그들을 단지 병풍처럼 보았다. 하여 그 병풍을 걷어내면 진정한 본질로서의 예수를 알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한데 선생은 예수와 오클로스가 함께 벌인 사건에 주목한다. 그 사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구술로 전승되면서 계속된다. 마치 전태일 사건이 19701113, 단 한 번 일어나고 만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시시때때로 사건으로 되살아났듯이 예수사건도 때가 찼을 때 곳곳에서 되살아났다. 그것을 그리스도파 사람들은 부활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그런 부활 이야기들의 원사건인 예수사건을 문서로 채록한 것이 마가복음이었다. 요컨대 주류 예수학계는 대체로 마가복음에서 예수를 발견하기 위해 그 차이를 주목하여 개체적 존재로서의 예수를 발견하려 했다면, 선생은 연속성을 주목하면서 예수사건을 해석하려 했다는 얘기다.

선생은 민중신학자가 된 이후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 대화 방식을 선호했다. 설교 중에 사람들은 묻고 의견을 말하며, 선생은 가끔 그 말에 동화되어 자신의 지론을 바꾸곤 했다. 대담집 민중신학 이야기, 말했듯이, 건강 탓에 글을 쓸 수 없었던 선생이 말하게 하려고 제자들이 질문하고 선생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일련의 대화모임 내용을 녹취하여 정리한 책이다. 한데 놀랍게도 그 대화나눔 과정에서 선생은 평소의 자신의 지론과는 다른 생각을 펼치곤 했다. 원래 갖고 있던 익숙한 생각과는 다른 생각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펼쳐진 것이다.

가령, 선생은 1972년의 역사와 증언이 발간된 지 10년 후인 1982년에 대폭 수정보완한 역사와 해석을 저술했고, 그로부터 대략 10년쯤 지난 1993년 전집발간의 일환으로 역사와 해석(개정판)을 펴냈다. 역사와 해석(개정판)은 전작을 대부분 그대로 담고 있지만 어느 정도는 수정보완한 내용도 포함되었다. 여기서 성서를 고전의 하나라고 보고 있다는 점은 두 책이 공유하는 관점이다. 한데 두 역사와 해석사이에 출간된 대담집 민중신학 이야기에선 성서를 민중의 책이라고 규정한다. 선생에 의하면 민중은 지배적 언어질서에서 소외된 자들이다. 이를테면 마가복음의 대표적인 민중의 항목 속에 세리, 죄인, 매춘여성 등이 등장하는데, 그 사회의 규범적 질서 속에서 그들은 포괄적 의미의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들이다. 심지어 그들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을 선생은 죄의 체제라고 말했다. 그런 지배적 담론 질서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서로 공증된 것이 이른바 고전이다. 반면 민중의 책이라는 말은 그런 고전의 규범체계를 관통하는 저항의 문서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거기에는 의 감성들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말이 되지 못한 소리, 말의 질서에서 벗어난 소리, 그것이 민중의 책에 깔려 있는 정서인 것이다.

대담은 이렇게 평소 지론과는 다른 생각의 지평으로 그를 이끌어갔다. 선생은 그런 새로운 생각들이 꽤 만족스러웠던 듯하다. 해서 그 무렵 선생은 질문이 대답을 만들더라는 말을 자주하곤 했다.

한데 대화주의자 안병무는 계몽주의자 안병무와 갈등적이다. 그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은 선각자이자 현자이며 예언자였다. 그가 만든 첫 번째 잡지의 제호였던 야성(野聲)처럼 그는 홀로 먼저 말하는 자였다. 대화를 중요하게 여겼지만 그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은 일방적 말하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런 충돌이 그동안은 내면적인 갈등을 초래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건강 탓에 감금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선생은 이 갈등에 직면했던 것으로 보인다.

 

살림

 

그 무렵 선생이 제기한 새로운 화두가 살림이다. 급기야는 잡지를 또 하나 창간하면서 그 제호를 살림으로 지었다. 야성, 현존, 신학사상에 이어 네 번째다. 학술지인 신학사상은 예외지만, 다른 잡지들의 제호는 그 시대 선생의 사상의 기조를 담고 있다. ‘살림이라는, 선생의 마지막 잡지 제목은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을까.

그때는 잡지의 시대였다. 오늘의 유튜브처럼 당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회적 공론장이 잡지였던 것이다. 그 당시 대표적인 비판적 잡지들로는 장준하 등이 만든 사상계, 함석헌의 씨ᄋᆞᆯ의 소리, 김재준의 3, 백낙청의 창작과 비평, 그리고 안병무의 현존등이 있었다. 수천에서 수만 명의 여론 주도층이 이 잡지들을 열렬히 구독하면서 시대를 읽어냈다.

살림1989년 말에 창간되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잡지 제호의 바로 위에 작은 글씨로 부제가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잡지의 부제라는 것은 흔치않은 일이다. 그러니 그 부제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매일 엄습해오는 죽음과의 만남이 당시 선생의 가장 실감 나는 실존 체험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선생은 자신의 실존 체험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사유한다. ‘살림도 그랬겠다. 문제는 그것에 관한 좀더 명료한 말을 남기지 못했다. 말과 글 도처에서 흔적들만 발견될 뿐이다. 필시 악화된 건강 때문에 그런 새로운 문제적 사유를 깊게 언어화할 여력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해서 그 의미를 해독하는 것은 제자들의 몫이 되었다.

여러 의견들이 제기되었다. 나도 나름대로 몇몇 실마리를 통해 그것의 의미를 상상해보았다. 그중 하나의 근거는 살림의 기획에 대한 선생의 코멘트다. 어느 날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매일 아침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에서 죽임의 문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림의 가능성은 무엇인지 얘기해보시오.” ‘매일 마시는 커피 한 잔이란 아주 소소한 일상이다. 그런 일상에서도 죽임의 문화가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는 자신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욕망의 프레임에 따라 그 맛을 탐욕할 뿐이다. 문득 그것이 문제임을 떠올리면서 선생은 커피 한 잔에서 죽임의 체제를 읽어내기 위해 노력해보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살림19928월호에 실린 선생의 글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향린교회와 한백교회에서 한 설교를 글로 발전시킨 것인데, 여기에도 비슷한 생각이 담겨 있다. 한데 아마도 이 글 이면에는 나를 포함한 진보적인 기독청년들과 젊은 민중신학 연구자들에 대한 선생의 걱정이 전제되어 있다. 사실 선생은 비슷한 내용의 말을 우리들에게 자주 했다. 마르크스주의에 깊게 경도되어 있던 우리는 그것이 민중신학과 어떻게 만날지에 대해 골똘해 있었다. 그때 선생은 우리에게 노동해방만이 아니라 살림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시오.”라고 말하곤 했다. 노동해방이라는 이데올로기도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일상에서 사람들이 겪고 있는 죽임의 문화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지고 있지 않은가를 묻는 것이다.

실은 자신에 대해서도 선생은 그렇게 생각했다. 매일 귀한 말씀 듣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무언가를 말해야 하는 선생 자신에 대해서, 전에는 그런 것이 스스로에게 익숙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진저리 난다고 선생은 말하곤 했다. 대화 없는 대화, 대화를 가장한 일방적 말, 그것에 익숙해져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여기서도 선생은 죽임의 체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을 느꼈던 듯하다. 죽임의 체제는 익숙함을 가장하고 우리의 일상 문화 속에 깊게 침투해 들어온다. 하여 일상에까지 은밀하게 침투해 들어온 죽임의 체제의 양상을 발굴하고 해석하며 문제제기하는 것, 그것이 선생이 살림의 기획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논지였다는 얘기다. 요컨대 살림이라는 화두는 죽임의 체제의 일상화,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살림의 가능성 탐구에 관한 것이다. 나의 주장에 의하면 말이다.

 

아고니즘의 정치

 

당시 나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제쳐두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1996) 몇 년이 지나서, 그러니까 2천년 어간이 되었을 때에야 그것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데 그런 고민을 한참 벌이던 때 나의 활동 장소는 신학운동의 바깥이었다. 그 무렵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논점으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질 때 나는 그 논의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 그 논쟁의 장이 신학 바깥인 탓에 살림-죽임이라는 안병무스러운 언표가 아니라 파시즘이라는 정치학적 언표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의 생각의 편린들은 살림의 문제의식과 겹친다.

아무튼 2천년대 이후, 안병무의 살림이라는 화두는 일단의 민중신학 연구자들로 하여금 일상에서 작동하는 죽임의 체제에 주목하게 했다. 특히 그 무렵 일부 민중신학자들이 깊게 사유하고 있었던 용어는 고통이었다. 모두가 겪고 있는 고통의 체험이 어떻게 사회에서 사람들의 실천으로 나타나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것을 정치신학적으로 혹은 종교사회학적으로 이야기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졌다.

대략 이런 얘기다. 어떤 이들의 고통은 그것이 공공적인 것으로 해석되어 민주주의 제도를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또 어떤 이들의 고통은 그들을 야수적인 경쟁의 화신으로 만들어,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며 모든 국가의 규제를 공산주의라고 간주하는 경쟁적 자본주의의 열렬한 맹신자가 되게 하기도 했다. 여기서 고통의 체험과 정치적 행위 사이에 작동하는 죽임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이 우리의 주요 관심의 하나였다. 한데 또 어떤 이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했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가면, 누구는 가정폭력의 가해자가 되게 했고 또 누구는 묻지마 범죄의 가해자가 되게 했으며, 또 누구는 자기 자신에게 돌이킬 수 없는 가해를 가하는 자가 되기도 했다.

이 마지막 범주의 고통의 양식을 안병무, 서남동 등은 ()이라는 단어로 논한 바 있다. 이것은 김지하에게서 시작된 사유였다. 해방 이후 민족주의적 민속학자들은 개념을 세계에 소개하면서, 김소월의 시에서 드러나는 절망적 체념 상태를 표현하는 한국적 감정양식이 이라고 말했다. 김지하는 이런 견해에 반기를 들면서, 한의 자리는 민족이 아니라 감옥이라고 주장했다. 서남동은 이것을 민중신학적으로 번안해서, 한의 자리는 라고 말했다. 그리고 안병무는 이것을 사회학적 민중신학의 함의를 담아 한의 자리는 죄의 체제라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서남동, 안병무에게서 한은 민중의 언어인데, 말이 되지 못한 소리 혹은 동작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고, 그것이 말이 되지 못한 것은 그들을 죄의 체제에 옭아매는 담론의 질서 때문이라는 얘기다.

앞에서 이야기한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에는 민중만이 죄의 체제에 옭아매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그렇게 죄의 굴레에 매어있다. 해서 그 글은 소외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내가 선생의 살림의 논점을 생각하면서 특별히 주목한 것은 민중에 관한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소외감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존재의 안전을 지켜낼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제도를 만들어내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데 민중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했다. 아니 그런 언어가 유실된 자가 바로 민중이다. 해서 심한 질곡에 억죄어 있지만 그것을 말하지 못해서 언어로 소통될 수 없는 소리 혹은 동작으로 표현한다. 선생이 예수 설화 해석에서 종종 이야기한 민중의 실어증은 이런 언어박탈 현상에 대한 민중신학적 은유다.

그렇게 일상에 스며든 죽임의 체제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살림의 가능성은 무엇일까. 여기서 나의 생각을 사로잡은 개념은 벨기에의 급진주의적 정치이론가인 상탈 무페(Chantal Mouffe)가 제기한 아고니즘의 정치. 하버마스 류의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에 반하는 경쟁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맥락에서 제기된 용어다. 숙의민주주의는 합리적 의사소통을 통한 민주주의적 제도화에 관한 개념이다. 여기에는 공론장에서 갈등 당사자들이 상대방의 주장을 투명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그런 기반 위에서 대화, 설득, 합의를 통해 민주주의적 제도화를 구현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아고니즘의 정치는 공론장이 서로의 말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대화의 장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해서 그 안에서 합의를 만들어내는 실천적 합의의 기술을 강조한다.

한데 민중신학자로서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공론장에는 지배적 담론의 주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소리들이 넘쳐난다는 점이다. 이럴 때 지배적 담론의 주체들은 종종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 혹은 소리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해서 결국 그런 소리들은 공론장에서 사실상 제되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실어증에 걸린 이들이 발화할 수 있는 것은, 안병무 서남동에 의하면, 한의 소리밖에 없다. 그렇게 작동하는 담론의 배제의 장치를 안병무는 죄의 체제라고 보는 것이다.

하여 민중신학자들은 그 언어질서 바깥으로 밀려난 소리들을 공론장 안으로 불러들이는 이들이다. 하여 공론장을 아고니즘의 정치의 장으로, 소통되지 않음에도 그 모든 공론장의 소리들을 담아내려는 제도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시도들을 모색하는 것이 민중신학이 추구하는 정치라는 것이다.

안병무는 한의 소리를 공론장의 안으로 불러들이는 아고니즘의 정치적 실천을 증언이라고 말했다. 자기 언어를 유실한 사람들의 한의 소리, 그것은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이니 사회적으로 소통될 수 없다. 그것을 시민사회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번안해서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증언이다. 안병무에 의하면 예수와 민중이 벌인 사건의 이야기인 마가복음과 그것에 기초해서 저작된 다른 복음서들, 그밖의 예수전승을 문서화한 성서 텍스트들을 통해 우리는 민중사건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을 신앙의 언어가 되게 하는 것, 즉 민중사건이 신앙의 표상으로 재현되는 것을 안병무는 구원이라고 표현했다. 즉 예수와 민중이 더불어 일으킨 민중사건이 바로 우리에게 그리스도인 것이다. 구원의 체험은 우리를 그 사건의 증언자로 만든다. 신앙적 실천은 그렇게 구성된다.

칼 슈미트 류의 나치주의적 정치신학을 비판하면서 아우슈비츠 이후의 정치신학을 주창한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민중신학에서 민중의 한의 소리를 정치화하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다. 나치의 정치신학과 겹쳐질 수 있다는 경고다. 하지만 민중신학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몰트만 류의 정치신학이 공론장에서 실어증에 걸린 민중의 소리를 배제하는 합리적 합의를 일반화하는 정치신학이 될 수 있다고 되묻는다. 공론장에서 다양한 소리들이 경합하는 가운데서 고투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모색, 그 불협화음의 아고니즘의 정치를 민중신학적인 정치신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무수한 언더클래스들이 양산되는 세계, 합리적 언어질서 바깥으로 내몰린 이들이 난무하는 세계, 그런 세계에서 아고니즘의 정치는 21세기적 정치학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안병무의 살림의 문제의식은 이렇게 나에게 21세기적 정치신학으로 재기술되었다.

 

포스트휴먼

 

여기서 합리적 언어질서의 외부에 있는 것은 사람뿐인가. 오늘날 많은 이들은 가족보다도 더 강한 친밀성을 반려동물과의 관계에서 경험한다. 조금 가까운 미래의 일이지만 AI도 새로운 가족의 일원으로 떠올리기도 한다. 전통적 친밀성은 비대칭적 젠더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혈연가족을 강조했지만, 오늘날 이런 가족은 많은 이들에게서 더 이상 친밀성의 장소가 아니다. 하여 대안가족에 대한 새로운 실험들이 모색되고 있고, 그중에는 인간이 아닌 존재를 새로운 가족구성권의 주체로 받아들이려는 이들이 많다.

이 논점을 조금 더 첨예화하면, 인간 중심주의적인 언어질서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진다. 땅과 공기와 나무와 풀 등은 우리와 깊게 연결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과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대개 그것들은 우리의 욕구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그것들은 언어적 공론장의 타자들이 되었고,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문화 혹은 문명의 폭력에 무감각했다. 한데 기후문제, 감염증 문제 등 최근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재앙들은 공론장에서 비언어적 대상들을 배제시킨 것의 귀결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과정신학자이자 여성신학자인 캐서린 캘러(Catherine Keller)는 이렇게 인간 중심주의적 공론장에서 배제된 비언어적 존재들을 언더커먼스(undercommons)라고 말하면서, 언더커먼스들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음에도 그것을 묵살하지 않는 공론장을 만들어내는는 아고니즘적 정치실천을 성서의 묵시적 실천으로 해석한 바 있다. 여기서 아고니즘의 정치는 포스트휴먼의 관점으로 재정의될 수 있다. 그럴 때 죽임의 체제를 넘어서 살림을 꿈꾸는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21세기적인 포스트휴먼적 아고니즘의 정치신학으로 펼쳐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