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4에 열린 <석학 초청 신학의 향연 - 세계신학, 한국신학을 향한 기대와 전망>에서 발표된 논평글.

떠 다른 논평은 최순양 박사가 맡았고, 수기 교수의 통역은 제자인 양권석 교수(성공회대학), 제닝스 교수의 통역은 제자인 한수현 박사가 맡음.

이 포럼은 크리스찬아카데미가 주관하고,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한국민중신학회, 심원기념사업회, NCCK신학위원회가 후원한 행사.

초청된 석학은 탈식민주의신학의 개척자인 수기따라자 교수(버밍햄대학)과 퀴어신학의 개척자인 테드 제닝스 교수(시카고신학대학)이며, 두 분의 발제의 초고는 파일로 첨부함.

Sugirtharajah, R.S._Introduction. of Story of Minjung Theologr(Ahn Myung-moo).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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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제닝스 발제글(2019 10 1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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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이야기 신학의 가능성

안병무의 민중신학 이야기의 영문판 출판을 기념하며*

 

 

민중신학은 1975년부터 시작된 한국의 비판적 신학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출범을 선언하는 두 편의 글(안병무서남동)이 그해 4월에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들의 핵심 키워드는 민중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민중이라는 단어는, 역사의 주체 같은 능동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체로 계몽되어야 할 대상이나 통치의 대상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60년대 말 이후 소수의 지식인들에 의해 이 용어에 비상한 색깔이 부여되고 있었다. 그중, 그 몇 년 후 등장한 민중신학과 연관해서 주목할 이는 김지하다. 근대적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민족이나 국민의 일원으로 포용되지 못한,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잉여적 존재를 그는 민중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민중을 민족(국민)과 대립적으로 사용한 이는 김지하 이외의 경우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김지하 같은 예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그 무렵 민중은 매우 진보적인 지식인과 청년대학생들 사이에서 정치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마치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당시 맑스주의자들이 해방의 주체를 가리킬 때 썼던 대중혹은 인민과 비슷한 의미로 말이다. 그리고 1970년 전태일 사건은 민중이라는 용어의 정치성이 더욱 급진화되는 계기였다. 하지만 아직 이 용어는 진보적인 사람들 일각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었다. 국민 대다수는 종래의 표현처럼 소극적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했고, 특히 자기가 힘없이 당하기만 하는 서민이라고 생각할 때 민중이라고 스스로를 지칭하곤 했다.

그런데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그리스도교 계열의 대학교수들이 민중이라는 말을 공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해가 1975년이었다. 그것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제 민중이라는 말은 당국에 의해 금지어가 되었다.

1979, 그러니까 박정희 정권이 미친 말처럼 날뛰던 시절, 한국에서 열린 아시아교회협의회(CCA)에서 민중신학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다. 그것도 이 대회에 참여한 외국인들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스도교는 국제적 네트워크가 매우 발달한 사회적 집단이어서, 국제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지 못하던 국가로서는 매우 신경 쓰이는 사회세력이었다. 해서 정부는 민중신학과 결합되어 활용되는 것에 대단히 민감했다. 박정희가 측근에 의해 암살당한 뒤 혼란한 정국을 쿠데타로 장악하여 집권한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2, 안병무 선생이 주도해서 민중신학 관련 글들을 묶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서 책으로 발간하였다. 그 제목은 민중과 한국신학이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도 민중신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의치 않았기에 민중과 ○○라는 식의 우회적 표현을 쓴 것이다. 하지만 당국이 그렇게 강력하게 탄압해도 민중신학운동은 끊임없이 꿈틀대며 전개되어 갔다.

나는 여기서 1979년에 주목한다. 왜냐면 민중신학은, 적어도 그때까지는 군부정권의 강권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지식인들의 신학운동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데, 1979년부터 민중신학의 고유한 틀을 갖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특별히 주목할 현상은 그 무렵 민중신학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마치 인류학자들처럼 민중의 말의 채집에 나섰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한 해가 바로 1979년이다. 서남동의 ()의 사제(1979), 소리의 내력(1979), 민담에 관한 탈신학적 고찰(1982), 현영학의 한국 가면극 해석의 한 시도(1980), 한국 탈춤의 신학적 이해(1982), 병신춤(1986), 김용복의 민중의 사회전기(Minjung's Social Biography)와 신학(1984), 서광선의 해방의 탈춤(1986), 그리고 가톨릭 학자인 서인석의 민담의 구조분석과 믿음의 이해(1983) 등이 그런 글들에 속한다. 그리고 오클로스론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안병무의 글들인 전달자와 해석자(1979), 그리스도교와 민중언어(1980), 예수와 오클로스(1979), 마가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1982), 그리고 이 가설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예수사건의 전승모체(1984) 등도 그 맥락에 있다.**

그런데 1985, 선생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글을 읽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쓰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이후 타계하는 1996년까지 선생의 글들은 거의 대부분 대필자의 손을 거쳤다. 선생이 구술로 말한 것을 대필자가 옮겨적고 그것을 선생이 최종검토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선생이 공적으로 첫 번째 글을 쓴 해는 막 30대에 접어든 1952년이었다. 그때부터 선생은 돌아가실 때까지 천 편 안팎의 글을 썼다. 34년 동안 매년 20여 편의 글을 썼다는 얘기다. 엄청난 다작의 작가다. 또 그의 글이 주는 영향력은 당시 한국 지식인 가운데 가장 돋보였다.*** 그 글로 한국사회의 수많은 이들이 감동받았고, 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민중운동에 투신하기까지 했다. 해서 당국은 두 차례에 걸쳐 무려 9년 동안 교수직에서 해직시켰다. 그 기간을 빼면 선생이 은퇴할 때까지 교수직을 수행한 햇수는 8년에 불과하다. 요컨대 선생에게서 글은 가장 중요한 삶이 양식이었다. 한데 건강이 글을 쓰는 것을 막아버린 것이다.

제자들은 선생이 글을 계속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대화집이다. 민중신학 이야기2부에 실린 7편의 좌담이 바로 그것이다. 시기는, 그 좌담에 참여한 최형묵의 기억을 추적한 결과, 1985~1986년 사이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총론격인 제1부는 이 프로젝트와는 관계없이 다른 잡지에 실린 박성준과의 대담이지만, 그 시기가 1986년이니 대화집의 일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제3부는 그 몇 년 전에 일본에서 강연한 것을 책에 포함시킨 것으로, 대화집 형식의 글이 아니어서 나는 임의로 대화집으로서의 이 책의 평가에서 제외했다.

이 책의 영어판 서문을 쓴 수기따라자 교수(R. S. Sugirtharajah. 영국 버밍햄대학)이야기집이라는 걸 주목했다. 내용도 주목해야 하지만 이 책의 장르적 특성에 의의를 부여한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을 평가하는 데 있어 그 담화의 형식을 강조한 것은 이미 민중신학 내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아무튼 이 지적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책의 제목에도 이야기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 좌담자의 한 사람으로, 2017년 일본어판 서문을 쓴 최형묵이 서문에서 강조한 것은,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형식 중 대화집이라는 담화 형식이었다. 나 역시 이 책의 의의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을 그 담화 형식을 중심으로 논한 바 있다. 이 논평글에서도 바로 이 점을 주목하여 논할 것이다.

앞에서 악화된 건강 탓에 글을 쓰지 못하게 된 선생으로 하여금 글 대신 말을 하게 하는 기획으로 이 대화집이 기획되었고 그것이 2에 들어가 있다고 했는데, 거기에 포함된 대화의 주제들은 성서’, ‘예수’, ‘하느님’, ‘교회’, ‘’, ‘성령’, ‘하느님나라등 일곱 가지다. 테드 제닝스 교수(Theodore W. Jennings, Jr., 시카고신학대학 교수)는 그것이 일견 조직신학(systemic theology) 책처럼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정해진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 문화 등과 접속하면서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어 간다는 점에서 내용상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으로 분류할 수 있는 저작이라고 평했다.

현대 수정주의 신학은 조직신학이라는 전통적 신학 방법을 수정하기 위해 구성신학이라는 용어를 발명했다. 그것은 조직신학이 신, 그리스도, 구원, 교회 등등의 주요 신학 개념을, 그것들이 마치 시공을 초월한 절대불변의 진리인 양 서술해온 학문적 서사 양식이라는 점을 문제제기한 것이다. 하여 조직신학은 변화하는 세계를 다루는 데 한계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또 그것이 본래적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실은 서양백인 중심의 맥락에서 구성된 것에 다름 아니라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그런 비판들을 반영하는 신학의 대안적 서술방식으로 제안된 것이 바로 구성신학이었다. 한편 제닝스 교수는 수정주의 신학자들처럼 사회역사문화적 맥락과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만들어지는 신학의 구성적 성격에 동의하지만, 동시에 그 맥락들이 여전히 타자에 대한 배타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요소들을 발본적으로 비판하는 신학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성향을 해체적(de-constructive)이라고 주장했다. 한데 그의 제자인 이상철 박사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신학적 작업(doing theology)구성신학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닝스에게서 구성신학은 해체적 신학으로까지 의미가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그가 안병무의 민중신학 이야기를 긍정적인 의미에서 구성신학적 저작이라고 말했다면, 이 책에 대한 그의 읽기에는 안병무에게서 해체적 문제의식의 단초들을 발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실 안병무의 신학에서 해체적 요소를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개체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론을 해체하고 메시아사건 속의 그리스도를 이야기한 것이나, 죄를 선악 이분법으로 보는 통념을 해체하면서 사회적 권력화의 장치로 재해석하는 것, 그리고 종교제도로서의 교회를 해체하고 민중사건으로서의 교회를 주장한 것 등 무수히 많다. 그런 맥락에서 그리스도, , 교회 등등을 마치 신앙의 근원적 원리처럼 다루는 조직신학의 서술 방식을 그는 수많은 자리에서 도그마적이라고 비판했다. 하여 선생은 신론, 그리스도론, 죄론, 구원론 같은 틀로 민중신학을 논하기를 꺼렸다. 물론 그런 요청은 너무나 많았다. 특히 민중교회론을 논해달라는 빗발치는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교회와 신학이 타락한 이유가 (정전화[정통경전]와 교권화, 그리고) 교리화(도그마화) 의 부정적 결과라고 보았기에 그런 교회론을 논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제자들이 대화집을 만든 틀은 조직신학적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필시 많은 목회자들과 활동가들의 요구에 답하려는 것이었겠다.

선생은 그 무렵 질문이 대답을 만든다는 말을 자주했다. 신학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서생을 사로잡았던 것은 실존주의 신학이었다. 특히 독일의 성서학자 루돌프 불트만은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알다시피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은 시간 속에 던져진 자(존재자. das Seiende)와 시간 너머의 존재(das Sein) 간의 상호대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함석헌과 만나면서 사회역사적 문제의식의 중요성을 체감한 이후에는 불트만적 실존(實存, Existenz)대신에 현존(現存)을 강조했다. 추측컨대 불트만의 대화사건인 실존의 초점이 시간 밖을 지향하고 있다면, 안병무의 대화사건인 현존은 사회역사에 초점이 있다. 그리고 대화의 파트너도 시간 너머의 존재에서 사회역사로 바뀌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가 민중신학자가 된 이후에는 사회역사적 대화를 보다 특정화하여 민중의 눈으로 사회역사와 나누는 대화에 주목했다. 그런 대화사건을, 불트만의 실존사건이라는 개념에 착안한,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할 만큼 그 내용은 완전히 달라진 민중사건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한데 이 책의 작업에 참여하면서, 선생은 평생의 지론이 대화임에도 그때까지 체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성찰에 이르게 된다. 사실 그는 실존주의자임을 자처했음에도, 실존주의 자체가 그랬듯, 끊임없는 내적 이율배반에 빠져있었다. 그것은 주체(subject)의 문제다. 실존주의자답게 그는, 주체가 단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주체적(intersubjective)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주체성(subjectivity)이 어떤 연속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즉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주체는 변화할 뿐 아니라, 그동안 자신을 구축했다고 믿었던 것까지도 전복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선생 자신은 대화를 강조해 왔음에도 그 대화의 이펙트가 자신이 예상 가능한 범주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라는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한데 질문이 대답을 만들더라는 고백처럼 선생은 대화과정 곳곳에서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심지어는 자신의 생각을 전도시키는 경험에 이르기도 했다. 즉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가 탈주체적 성찰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령 그의 책 중 가장 많은 이들에게 읽혔던 것은 역사와 해석이다. 1982년에 초판이 발간된 이 책은 그 10년 전에 저술된 역사와 증언의 개정증보판이다. 그리고 역사와 해석의 재개정판이 1993년에 출간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민중신학이 출범한 때는 1975년이고 그 특색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해는 1979,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잘 짜인 내용을 갖추게 된 때는 1984년경이다. 그렇다면 역사와 증언은 민중신학 이전에 저술되었고, 역사와 해석은 민중신학이 본격화한된 시기에 쓰였으며, 역사와 해석, 재개정판은 선생이 타계하기 몇 년 전에 출판된 것이다. 한데 이 세 판본의 서문에서 선생은 공히 성서를 고전의 하나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요컨대 고전의 하나로서의 성서라는 이해는 선생의 민중신학 이전과 이후를 관통하는 평생의 지론인 셈이다. 한데 1985~86년의 좌담 결과물인 민중신학 이야기에서는 성서가 민중의 책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고전이란 시공을 초월한 권위를 가진 책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실은 시민사회가 합의하는 공공적 가치가 고전의 초월적 권위의 근거임이 숨겨져 있다. 한데 민중은 그런 시민사회적 공공성에서 배제된 이들을 포함한다. 그런 배제의 지점에서 민중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중의 책 성서라는 말 속에는 보편적이고 초월적 가치, 그리고 그런 가치의 실질적 전제인 시민사회적 공공성의 범주 바깥에 성서가 있다는 뜻을 함축한다. 요컨대 이 대화집에서 선생은 자신의 지론을 해체하고 전혀 다른 생각을 표명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대화의 이펙트였다. 선생은 조직신학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제자들은 그런 선생의 생각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요구에 답하기 위해 조직신학적 틀을 구상해냈는데, 선생과 제자들은 이 대화집 작업을 통해 조직신학 같지만 조직신학이 아닌 신학의 가능성에 다가간다. 요컨대 선생과 제자들은 구성신학이라는 용어를 몰랐지만, 의도하지 않게 대화를 통해서, 조직신학을 넘어서는, 신학적 담화 양식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제닝스 교수가 말한 바, 해체적 구성주의신학(de-constructive construction theology)을 말이다.

한데 수기 교수(수기따라자 교수의 약칭)가 주목한 이야기책이라는 것의 의의를 염두에 둔다면, 이 책이 제닝스 교수가 말한 구성신학적이라는 평가를 초과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구성신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의 영역이다. 즉 논리가 중요하다. 해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철학적이다. 한데 철학은 글을 아는, 아니 글의 세계의 달인들의 영역이다. 특히 서양의 지적 전통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지식의 영역이다. 그런 지식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자 혹은 그런 세계에 대해 열패감에 갖고 있는 자들은, 그 지식이 의도하든 않든, 신학의 주체가 아니라 계몽의 대상이 되고 만다. 해서 그이들의 신학은 종종 모방하는 역할에 그친다. 비록 그 지식이 계몽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주장을 담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문화)번역(cultural translation)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문제제기에 주목하게 된다. 탈식민주의적 번역 이론들은, 문예학자 발터 벤야민(Wakter Benjamin)번역론을 정치사회문화적 예속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제기된 탈식민주의적 슬로건이 바로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그 논의를 세세히 이야기하는 것은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글의 범위를 너무 확장하는 것이니 여기서는 간략히 번역론에 관해서만 언급해보겠다.

일단의 아시아 사상가들은 번역의 식민지성에 주목했다. 그들은 서양 사상의 세례를 받은 이들로, 자신도 모르게 서양을 정전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아시아는 그런 정전의 시각에 의해 대상화된 것, 나아가 정전의 관점으로 교정/계몽되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번역이 원천언어를 대상언어로 옮기는 행위라고 할 때, 원천언어인 서양은 논리이고 철학인데, 아시아는 아예 언어조차 유실되었다. 그것은 말이고 소리일 뿐이다. 하여 번역에서 남는 것은 원천언어를 모사(copy)하는 것밖에 없었다. 하여 번역은 식민지화의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식민지화로서의 번역에 대한 문제제기를 아시아의 탈식민지론자들은 방법으로서의 아시아(Asia as a Method)라는 슬로건으로 표현했다. 아시아는 원본의 단순한 이식대상이 아니라는 것, 아시아의 언어가 번역의 방법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즉 번역은 아시아의 언어와 서양의 언어가 서로 소통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모사 과정이 아니라 대화라는 것이다.

민중신학자 중 안병무와 서남동은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명료히 표명한 이들이다. 그것은 특히 1979년 이후 본격화된 민중언어에 대한 관심과 밀접히 연결된다. 무엇보다도 민중의 언어가 보다는 과 더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더욱이 서남동은 김지하와 대화를 나누면서 김지하 식의 ()을 신학화했고, 이는 안병무의 생각과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구체화된 것이다. ‘은 김지하 이외의 한국학계에서는 한국인의 고유한 절망적 체념상황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런데 김지하는 의 자리는 민족이 아니라 감옥이라고 보았다. 여기에는 물리적 감옥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감옥도 포함된다. 그리고 서남동은 김지하의 생각을 신학화하면서, ‘한의 자리는 죄라고 보면서 죄의 해체론을 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김지하나 서남동, 안병무에게서 은 글이 되지 못한 소리, 즉 글로 옮겨질 수 없는 소리를 뜻한다. 글로 옮겨지지 못한다는 것은 이 글의 세계에서 배제된 경험과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이다. 제닝스 교수가 민중신학의 향후 과제로 제안한 성소수자의 문제도 바로 그렇다. 성소수자들 중에는 지식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성소수자라는 자신의 특별한 존재 양식이 그를 침묵하게 했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을 품은 자게 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성주의 신학이 글의 세계 속에 있는 한, 의도하든 않든, 글의 세계에서 배제된 이들의 소리를 담은 책을 만들어내기는 여의치 않다. 반면 민중신학은 지배질서에 의해 언어를 도난당한 이들의 강요된 침묵, 즉 한을 다시 대화의 장으로 소환한다. 그리고 지배언어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로서의 한사이에서 대화를 도모하는 자를 민중신학자 자신의 역할로 규정한다. 이것이 민중신학이 주장하는 말의 신학의 함의다. 민중신학 이야기가 바로 그런 책이다. 안병무 자신이 기획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대화집은 그가 하고 싶었던 것의 가능성을 구현한 하나의 실험작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논점을 첨언하고자 한다. 민중신학 이야기는 안병무에게서는 민중신학적 구성신학의 실험이었다. 여기서 그는 민중의 소리, 언어가 되지 못한 그이들의 소리가 글의 영역이자 논리의 영역인 신학으로 번역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이것이 그가 펴는 민중신학의 이야기.

그렇다면 방법으로서의 한국적인 것을 다르게 모색하는 신학자들은 안병무의 생각을 어떻게 참조할 것인가. 가령, 민중신학도 반드시 다뤄야 할 과제지만, 특별히 퀴어를 강조하는 신학, 혹은 젠더를 강조하는 신학 등은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배타성으로 인해 언어를 잃어버린 이들의 소리, 그 파편화된 한의 소리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신학과 대화하게 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적인 것과 대화하는 신학은 이와 같이 지금 여기에서특히 오늘 한국에서지배적 담론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한 소리들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언어가 되지 못한 소리들을 언어로 번역하여 지배적 담론과 대면하게 하는 일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한국에서 배제된 이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그것을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도 구원을 선포하는 신학의 발견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신학 이야기는 한국적 이야기의 신학으로서의 한 전범(a model)이다.

 

[각주]

* 안병무 선생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신학 이야기(1987)2017년에 일본어판으로 번역출판되었고, 올해 10월에 세계적인 신학학회인 미국성서문학회(SBL)에서 영어판이 출판되었다. 이 글은 이 책의 영문판 출판을 기념하며 그 의의에 대해 논한 것이다.

** 서남동과 안병무는 긴밀히 교류하며 민중신학적 사유의 발전을 공유해왔는데, 안병무가 민중언어탐색의 최종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사건의 전승모체를 발표한 그 해에 서남동은 유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그의 계시의 하부구조로서의 물질세계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의 지평의 필요성을 제안하며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빈곤의 사회학과 빈곤의 신학(1983)은 미완의 성과물이다.

*** 전두환 정부 시절, 선생은 두 번째로 교수직에서 해직되었는데(1980~1984), 해직이 풀린 뒤 언론사 기자들이 기고를 받고 싶어 하는 1순위 필자가 바로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