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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강좌

역사의 예수 다시보기_11 : 두 여자 이야기

이 글은 지난 9월10에 했던 9번째 한백성서교실의 대화 내용에서 다루었던 것을 기초로 쓴 글이다. 한백교회에서 매달 한 번씩 한백성서교실을 통해 마가복음에 기초한 예수에 관한 대화모임을 진행하고 있고 그때 내용을 기초로 해서 다음 달 대화모임 직전에 글로 완성해서 한백 단톡방에 올려왔다. 이 글이 한 달 밀려서 이제야 완성한 것은, 다른 원고를 써야 했던 탓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공개된 글들을 최종 점검해서 책으로 만들 예정이고, 그것을 한백교회 교인들 모두에게 선물할 계획이다. 왜냐면 감사하게도 한백에 내게 60살을 기념으로 마련해준 기금으로 이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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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 이야기

 

 

구성

 

급박한 위기로 서둘러 떠나갔던 거라사 무덤터에서 한 기괴한 남자를 만났던 이야기(마가복음5,1~20)는 두 여자 이야기로 바로 이어진다.(5,21~43) 그 두 여자는 출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와 회당 지도자 야이로의 딸이다. 이렇게 두 다른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는 구성은 마태복음루가복음에도 그대로 나온다. 그것은 마가복음의 구성을 다른 두 복음서 저자가 이견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한다. 마태복음이 지중해 동쪽 지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루가복음이 서쪽 지역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거라사 남자 이야기 + 두 여자 이야기를 하나로 묶은 마가복음의 구성을 다른 두 복음서의 시대인 1세기 말경 지중해 동쪽과 서쪽에서 두로 공유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디테일에서 세 복음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특히 거라사 남자 이야기의 장소에 대해서 마태복음은 다룬 두 복음서와는 달리 거라사(Γερασηνος. 게라세노스)가 아니라 가다라(Γαδαρηνος. 가다레노스)로 말하고 있다. 두 도시 모두 데카폴리스에 속하는 도시인데, 그 남자에게 들린 악령이 돼지떼에게로 전이되자 돼지떼가 갈릴래아 호수로 미친 듯이 달려가 떨어져 몰살되었다는 얘기와 부합하려면 호수에서 멀리 떨어진 거라사보다는 호스 근처인 가다라가 부합할 것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티나 지리에 무지했던 루가복음과는 달리 그 땅을 잘 아는 마태복음공동체에겐 이런 변조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두 복음서는 마가복음1,40~3,19(3,7~12을 제외하면)을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이야기 구성에 있어서는 다르게 수용했다. 아래 표에서 보듯, 루가복음마가복음의 구성을 그대로 받아들인 반면, 마태복음은 하나의 묶음을 세 묶음으로 나누어 재배치했다.

위의 도표에서 보듯 B*가다라의 남자 이야기두 여자 이야기사이에 배치되었다. 그렇게 배치함으로써 모호한 장소 문제가 명쾌히 해명되었다. 마가복음에선 거라사의 남자 이야기 이후 호수를 건너갔다(5,21)고 하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명확하지 않다. 건넌 곳은 물론 갈릴래아 지역이다. 하지만 어딘지는 불명확하다. 단지 배를 댄 곳은 마을이 아니었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중에는 마을 회당의 지도자도 포함되었다. 그의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다. 이야기는 예수가 그와 함께 마을로 가는 길에 출혈병 걸린 여자를 만났고 그녀를 고친 뒤에 그의 집으로 간다는 스토리라인을 따라 전개된다. 근데 마태복음9,1~17은 가버나움 마을 안의 이야기 묶음이다. 요컨대 이 복음서에서 예수는 가버나움 마을 안에 들어가서 이러저런 일을 하고 있는데 한 고위층 인사(αρχων ες. 헤이스 아르콘. a certain ruler. 9,18)(1)가 찾아와 딸을 고쳐달라고 하여 그의 집으로 가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마태복음마가복음이야기의 모호한 지명을 적절하게 해명한 것일까. 이 일이 일어난 곳이 어디일지를 궁금해하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지명을 명시적으로 알려주는 것은 독자에게 친절한 설명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예수운동의 역사적 전개에서 개연성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앞 장들에서 보듯 예수는 세례자 요한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도망자 신세가 되어 갈릴래아로 들어왔고, 처음엔 가버나움에 베이스캠프를 두고 여러 마을들의 회당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활동했다. 하지만 마을의 질서를 이끌고 있는 회당 지도자들의 미시권력에 문제를 제기한 이후 더 이상 마을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이후 예수는 마을 밖 공터, 특히 호숫가 공터에서 활동을 벌였고 가끔 위기상황에 봉착했을 때 배를 타고 국경 밖으로 갔다. 거라사 남자 이야기는 바로 그런, 국경 밖으로 도주하다 벌어진 일이다. 근데 그 일 이후 호수를 건너온 곳이 가버나움 마을 안이라면, 더구나 다른 시골과는 달리 세관이 설치되어 있고 군대까지 배치된 곳으로 들어간다면, 그런 이야기가 역사적 개연성을 갖고 있을까. 그보다는 마가복음처럼 갈릴래아의 어느 호숫가, 배를 늘상 정박하는 곳이 아닌 어떤 곳으로 들어왔다고 가정하면서 두 여자 이야기를 살피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회당 지도자의 한 사람

 

호숫가 모처로 온 예수 주위에 대중이 몰려들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안티파스의 군대가 덮칠 수 없는 곳으로 배가 정박했을 테니 사람들이 모여들어도 일단은 안전했을 것이다. 그때 인근마을의 회당에서 지도자 한 사람이 찾아왔다. 차림새나 행동거지가 한눈에 봐도 마을 유지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갈릴래아 마을들의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자를 경계하라는 손문이 자자했을 테니 필시 그도 예수를 무턱대고 반길 만한 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딸이 위급한 상황이다. 그 지경에 이르기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이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중병 든 이도 악령 든 이도 낫게 했다는 예수를 서둘러 찾아갔다.

예수를 보자 그는 꿇어 엎드렸다. ‘옆드리다는 뜻의 동사 핍토(πιπτω)는 패배를 의미하는 단어다. 즉 이 바리새파 지도자의 한 사람은 예수에게 복종을 표한 것이다. 그 이유는 제 딸이 다 죽어 갑니다(5,23)는 말속에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다 죽어가다로 번역된 헬라어 엑쎄이 엑싸토스(εχει εσχατως)는 죽음이 임박한, 바로 직전의 상황임을 시사하는 어구다. 응급상황이다. 서둘러 가야 할 일이다.

필시 그는 이 일로 바리새파 사람들 사이에서 심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면 바리새파 사람들의 일반적 가치관에 따르면 제 아이를 살려내겠다고 악령과 손잡은 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는 모든 것을 건 셈이다. 어쩌면 그 이후 그는 예수를 추앙하는 이들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은 야이로(Ιαιρος. 야이로스). 헬라식 표기로 되어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식 이름인 야일(Yair)을 헬라식으로 음역한 것이라고 본다.(2) 한데 이스라엘식 이름을 가진 야이로라는 이가, 마가복음(5,22)루가복음(8,41)에는 등장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계의 어느 문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 대해 잘 아는 문서인 마태복음는 그의 이름이 삭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는 이후 예수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그것은 이 일로 그가 바리새파 사람들로부터 결정적인 탄핵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게 한다. 혹은 탄핵을 받았음에도 예수파에 가담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또 어쩌면 예수운동의 비밀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했기에 후대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요컨대 그는 이 사건 이후 예수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지역협력자로 비밀스럽게 관여한 인물일 것이다.

 

옷에 손을 대다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 마음은 급한데 많은 무리가 사방에서 밀쳐댄다. 그중 한 여자가 있다. “12년간 출혈병에 시달려온이다. 헬라어 본문을 직역하면 “12년간 피를 흘리고 있는여자다. ‘우사 엔 흐뤼세이 하이마토스(οσα ν ύσει αματος), 이 어구는 피를 흘리고 있는이라는 분사구문이다. 이 질환이 어떤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고대적인 증상에 대한 묘사를 현대적 질병(월경과다증(menorrhagia) 혹은 치질(haemorrhoids) 혹은 하혈현상(hæmorrhoíssa) )으로 등치시키는 것은 논점을 흐트러뜨린다. 그보다는 여성이 피를 흘린다는 것을 블결한 것으로 간주하는 문화 속에서 그녀가 너무나 오랫동안 시달려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레위기15,19~33은 월경 중인 여자가 그녀 자신이나 그녀 몸이 닿았던 모든 것에 접촉한 이가 있으면 그를 부정타게 한다는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월경 기간이 아님에도 피를 흘리는 여성도 예외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성의 출혈 증상 대부분을 월경과 연계시키는 고대적인 통념적 이해가 전제되고 있다.

이 율법 규정은 출혈하는 여성이 미치는 부정적인 효과에만 주목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출혈 증상이 병증인 경우 그녀가 겪어야 하는 고통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다. 해서 치료의 기회를 놓치게 될 우려가 농후하다. 또한 이것은 의료비용을 터부니없이 증대시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부정타는 것을 감수하고 치료 혹은 치유를 하려면 위험수당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본문의 여성은 ‘12년간이 증상으로 고통을 겪어왔다. 여기서 ‘12’1113 사이의 자연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뒤에서 다룰 야이로의 딸이 12세의 소녀라는 것은 이 숫자가 상징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때 ‘12’모든 것혹은 전체를 가리킨다. 즉 그녀는 전 생애가 이 질환의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이것을 다시 양적 의미로 환원시켜서 태생적인 질환 혹은 유전질환 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녀의 인생 전체가 이 질환으로 산산조각나 버렸다는 뜻일 것이다.

우선 그녀가 만약 남편이 있었다면, 필시 그는 이렇게 오래도록 앓는 질병의 여자를 계속 아내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그녀는 치료를 위해 가산까지 탕진했다.(5,26) 모든 노력은 수포가 되었고, 어쩌면 그녀는 가족으로부터 내버려졌을 수도 있다.

예수가 왔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녀는 군중 틈에 끼어서 가까스로 예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이의 옷깃에 손을 댔다. 예수가 갑자기 돌아선다. ‘누가 내 옷을 건드렸소?’ 어떤 투로 한 말이든, 이 여자에겐 추상같은 호령으로 들렸다. 몸이 닿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가 닿았던 어느 것도 다른 이를 부정타게 한다는 통념의 사회에서, 그이의 옷에 손을 댔으니 이는 율법을 거스르는 엄중한 일이다. 더구나 그이는 메시아가 아닌가. 그녀는 겁에 질려(φοβηθεισα. 포베쎄이사) 부들부들 떨었다’.(τρεμουσα. 트라무사) 메시아가 몰랐다면 좋으련만, 그이도 모르게 자기 몸이 나았다면 좋으련만, 벌써 몸에 감도는 기운을 느끼고 있는데, 몰래 한 이 행동을 메시아가 알아차렸다. 사람을 부정 타게 하는 것도 중한 죄인데, 메시아를 부정 타게 했으니 이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예수는 그녀의 사정을 소상히 듣는다. 본문의 표현을 따르면 사실을 그대로 다(ειπεν την αληθειαν. 에이펜 텐 알레쎄이안) 들었다. 그리고 예수는 말한다. ‘헤 피스티스 수 세소켄 세(ἡ πιστις σου σεσωκεν σε), 이 유명한 말의 뜻은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했다.”. 예수로부터 이 말을 들은 이는 단 두 명뿐이다. ‘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던 어느 무명의 청년’, 그리고 바로 이 여성이다.

근데 여기서 야이로의 마음 소리, 성서가 침묵하고 있는 그 소리를 떠올려야 한다. 갈 길이 너무나 급하지 않은가. 평생 앓던 여인이 주님의 옷에 손을 댔고 낫게 되었다고 하자. 그 순간 왜 돌아선단 말인가. 왜 그녀의 사정을 시시콜콜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녀는 좋아졌고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지금 딸은 단 일각도 낭비할 수 없는 상황인데, 왜 이렇게 뜸을 들이고 있는가. 속이 새카맣게 타고 있었다.

한데, 우려했던 일이 기어이 벌어졌다. 집으로부터 사람들이 왔다. 딸이 사망했다는 전언을 가지고. 한데 예수는 태연히 말한다. ‘두려워 말고 믿으라. 이상한 표현이다. 뭘 두려워 말라는 것이고 뭘 믿으라는 것인가. 방금 전 출혈병 걸린 여자에게 말한 그 믿음과 같은 믿음인가. 아마도 이 대목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말은 슬퍼하지 마시오. 그리고 날 믿으시오.’일 것이다. 딸이 죽었으니 비탄에 젖어 있을 것인데, 그럼에도 예수가 자기를 믿으라고 했다면 이해하기 쉽다. 한데 출혈병 걸린 여자에게 말한 믿음은 예수 자신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믿음이다.

그녀의 믿음은 무엇일까. 율법을 거스르면서까지도 감행했던 그 행동에 대한 믿음 아닌가. 사람들이 통념으로 믿는 그 율법은 아픈 이를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프지 않은 이가 손해 보지 않도록 하는 법이다. 그로 인해 아픈 이가 고통 속에 죽게 되더라도 지켜야 하는 법이다. 일찍이 예수는 마을 회당에서 왜 당신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이오?’(마가복음 2,24)라고 따지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느 것이 안식일에 해도 되는 일이요? 선한 일을 하는 것이오, 악한 일을 하는 것이오? 목숨을 건져주는 것이오 죽이는 것이오?’(3,4) 이와 같이 예수에겐 율법 조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픈 이를 살리는 것, 그렇게 작동하는 것어어야 한다고 말했다. 해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했다.(2,27) 출혈병에 걸린 여성도 바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율법 조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픈 이를 고치고 살려내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믿음을 예수는 야이로에게 요구한 것이다.

그렇다면 야이로는 왜 두려워했을까. 복음서 저자는 이 대목에서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여기서 야이로, 율법의 대변자인 그에게 딸이 아프고 죽게 되는 것을 그는 어떻게 해석했을까에 관한 물음을 묻게 된다. 아마도 그는, 통상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해왔듯이, 재앙을 어떤 죄의 댓가로 환원시켜 이해하고자 했을 것이다. 딸이 죽을 만큼 아픈 상황에 직면해서 그가 이제까지 했던 모든 수단은 필시 바로 이런 이해에 맞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 죄를 사면받기 위해 이것저것을 다 해보았다. 한데 소용없었다. 딸의 증상은 갈수록 중해졌고 그만큼 그 아이는 고통에 신음했다. 예수는 바로 이것을 직시했다. 해서 그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아이가 지은 혹은 부모가 지은 어떤 죄 때문에 재앙이 닥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가짜 감정

 

예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세 명만을 데리고 간다. 중대한 말 혹은 사건이 있을 때마다 예수는 이렇게 세명 혹은 네명의 제자만을 데리고 간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마침내 그 집에 당도했다. 집은 어수선했다. 전형적인 장례식 풍경일 것이다. 그중에는 울고, 크게 소리내어 슬퍼하고 있는 장면도 있다. 여기서 울다고 번역한 헬라어는 클라이오(κλαιω)이고 소리내어 슬퍼하다알랄라조 폴라(αλαλαζω πολλα). 아마도 좀더 개연성 있는 의역은 어떤 이들은 대곡(代哭, weep on behalf of)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대성통곡하고 있었다일 것이다. 대성통곡하는 이들은 필시 가족일 것이다. ‘대곡은 한국, 중국, 고대이집트, 지중해지역, 메소포타미아 지역 등에서 두루 발견된다. 또 성서에도 나오는데, 가령 예레미야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는 잘 생각하여 보고, 곡하는 여인들을 불러들이고, 장송곡을 부를 여인들을 데리고 오너라.”(9,17) 그런 것처럼 야이로의 집에도 딸의 죽음을 장례 지내는 의식이 막 시작되었으며, 대곡하는 자와 대성통곡하는 자들도 거기에 있었다.

한데 예수가 말한다. ‘수선 떨지 마시오.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소.’(마가복음 5,39) 그때 사람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이 비웃음은 예수의 말이 터무니없어서겠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바리새파 지도자의 집안이 아닌가. 그중에는 율법이 제일 중요하고, 율법을 수시로 무시하는 행위를 하는 예수를 불신하는 이들도 있을 법하다. 아무튼 그곳은 장례식을 치루고 있는 곳이고 슬픔의 기조가 온통 감싸고 있는 곳이다. 그 대표 풍경을 복음서는 곡하는 것으로 표사하고 있다. 하지만 예수의 말에 사람들은 비웃었다.’

울음과 비웃음, 이 두 감정 표현은 대조적이다. 한데 그 두 감정이 한데 있다. 장레식에 예수가 있다는 것이 두 모순된 감정이 뒤엉키는 원인이다. 하지만 이 두 감정이 모순된 것이라고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예수에 대한 바리새파의 감정이 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슬픔이 순수하게만 존재하는가. 거기에는 적대적 감정이 뒤엉키기도 한다. 죄 때문에 누군가, 죽지 않았어야 할 이가 죽었다면, 그 죄의 장본인은 누구인가. 그런 감정이 뒤엉킨 곳이 바리새파 지도자의 장레식장이다. 그때 그곳에 예수가 왔고 어떤 이들은 그 적대감, 죄의 원흉을 예수와 연결시켰을 수 있다. 예수의 말에 너무 쉽게 비웃는 것은 그런 적대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이런 두 감정의 얽힘을 가짜 감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애도에 충실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 원인을 찾아 거기에 책임을 전가하려는 행동을 예수는 가짜 감정, 가짜 슬픔, 가짜 애곡으로 보았음직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예수는 질병, 고통, 죽음 등의 재앙적 현상을 무엇 때문이라고 처리하는 바리새파적 해석에 반대했다. 예수는 그 질병 자체에 주목했고, 그것을 고스란히 겪어내고 있는 이의 아픔에 주목했다. 그래야 죽은 소녀를 애곡하는 행위는 진정성이 있다는 것이다.

 

탈리다쿰

 

예수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부모와 제자 세 명만을 데리고 소녀의 몸이 안치된 곳으로 들어갔다. 그이는 소녀의 손을 붙잡는다. 마치 엄마 아빠처럼 애틋한 손길로 붙잡는다. 그리고 말한다. 탈리다쿰!’(Ταλιθα κουμ. 탈리싸 쿰) 아람어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인데, ‘소녀야, 일어나라’, 혹은 어린 양, 일어나라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어구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었으니 일어나라는 말이다.

한데 실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죽다(αποθνησκω. 아포쓰네스코)잠들다(καθευδω. 카쓔도)는 종종 교환 가능한 단어다. 하지만 죽다는 단어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는 함의가 강조되어 있는 말이고, ‘잠들다는 다시 깨어난다는 함의가 들어 있다. 즉 같은 상태를 가리키지만 두 말의 늬앙스는 대조적이다. 바리새파는 부활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예수 앞에서 그들은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되었다. 가짜 감정, 가짜 애도처럼 가짜 신념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다.

소녀는 일어났다. 열두 살된 아이였다. 열두 살이라는 나이는 아이와 성년의 경계다. 그것은 하나의 끝이고 다른 하나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그 숫자처럼 이 소녀는 극적인 끝과 시작을 동시에 체험했다.

 

두 여자

 

하나의 이야기 속에 얽힌 두 여자는 중첩되는 점을 갖고 있다. 둘 다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또 둘 다 죽음 같은 삶의 현실의 감옥 속에 있다. 그리고 그 죽음 같은 삶을 둘러싼 율법의 감옥이 그녀들을 포박해버렸다. 그리고 그들 둘은 모두 12년이라는 숫자로, 그 죽음 같은 삶의 시간이 삶 전체를 지배했음을 표상하고 있고, 예수로 인해 그 죽음 같은 삶에서 탈출하게 된,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

하지만 둘은 조금 다르다. 출혈병 걸렸던 여성은 예수에게 다가가서 인습의 장애를 꿰뚫고 그이의 옷을 만졌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말했다. 그녀는 행동하는 자고 말하는 자다. 한데 소녀는 그녀의 아버지가 대신 행동했다. 아마도 그녀의 아버지는 출혈병 걸린 여자만큼 전적으로 믿음을 보이지 않았다. 중첩된 마음이 그를 동요하게 했다. 그리고 소녀는 예수로 인해 일어섰지만 여전히 말하지 않는다. 소녀는 대신행동하는 이에게 여전히 둘러싸여 있고, 대신 말하는 이의 통제 아래 있다.

두 여자는 같지만 다르다. 한 여자는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했소라는 치하의 말을 들었고, 모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그녀의 믿음이 함께 전파되었다. 반면 다른 여자는 몇 명의 제자만 알고 있는 비밀스런 사건 속에 숨어 있다. 복음서는 소녀의 이야기를 그런 비밀의 방 안에 둔 채 침묵하듯 말하고 있다.

 

[후주]

(1) 마가복음에선 회당 지도자의 한 사람’(ες των αρχισυναγωγων. 헤이스 톤 아르키쉬나고곤. )으로 나온다.(5,22) 보통의 마을이라면 마을의 고위층 인사라면 회당 지도자일 테니, 이 둘은 당연히 같은 이일 것이다. 한데 가버나움은 세관이 설치되어 있고 그 세관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도 있는 곳이다. 해서 이곳에서 고위층 인사는 당연히 회당 지도자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보다는 군대를 이끄는 부대장일 가능성이 더 크다. 세관의 책임자는 통치자라기보다는 민간업자이기 때문에, 세관장이 통치자일 수는 없다.

(2) 1성서에서 므낫세의 아들로 야일이라는 이름이 나온다.(민수기3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