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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사회

[신들의 사회14]세계를 향하여! -- '선교입국'의 사회심리학

한겨레21 868호 (2011.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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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향하여!

선교입국의 사회심리학

 

 

 

 

외환위기 이후 한국교회의 가장 큰 화두의 하나는, 어울리지 않게도, 해외선교였다. 시민사회에는 단군 이래 최대 재앙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는데 교회에는 세계 2위의 선교대국이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었고, 교회마다 해외선교사를 파송, 지원하는 붐이 일었으며, 심지어 너도나도 해외단기선교를 통해 일시적 선교사가 되어보는 현상이 마른가지에 불 일듯 일어났다.

이 글은 이러한 선교입국의 광염을 선교론적 관점이 아니라 위기의 사회심리적 관점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것은 지난 글에 이어 시민이 교회로부터 철수를 시작하게 되는 1990년대 이후 교회와 신앙의 위기에 대한 교회의 대응을 살피는 두 번째 논의다.

 

2007723,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이동하던 한국인 선교팀 23명이 탈레반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외신이 전 세계로 타전되었다. 이 당혹스런 사건이 일어나고서야 비로소 한국의 시민사회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비상한 선교 현상에 주목하게 되었다.

사건의 진상과 배후를 캐묻는 가운데 사람들은 단기선교라는 생소한 말이 문제의 진원지에 있음을 발견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선교사라는 말은 매우 비상한 신앙적 선택에 속한 것이었다. 더구나 오지를 향하는 해외선교사라는 것은 거의 순교에 해당하는 신앙 행위로 여겨질 정도다.

한데 단기선교라니. 인생을 다 걸기는커녕 단지 휴가기간 정도를 바치는 가벼운 종교심을 발휘한 사람들이 그 대단한 선교사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파송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방문할 선교지(宣敎地)는 그렇게 가벼운 곳이 아니다. 그곳들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에 속한다. 준비 안 된 이들이 가장 준비를 필요로 하는 지역에 들여보내진 것이다. 왜 이러한 부자연스러운 조합이 필요했을까? 단교선교를 둘러싼 이 물음은 한국의 선교 현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결정적이다.

해외단기선교라는 것이 언제 처음 등장하였는지를 알아내기는 어렵다. 다만 그것이 해외선교 현상과 맞물려 있음은 의심의 여지없다. 각 교회들이 해외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시스템이 정착하게 되면서, 교회는 선교사가 보내온 소식들을 회람하며 자긍심에 빠져들 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역에 간접적으로나마 동참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실은 이들 선교사들이 파송된 지역들은 포교활동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그리스도교 선교가 불가능한 이슬람지역이 많았고, 전운이 감돌거나 전쟁 중인 곳도 적지 않았다. 대개 중앙정부의 치안 능력은 매우 빈약했고, 각 종족별 군벌세력들이 폭력과 인권침해를 일삼았으며, 이곳에 진출한 서구 자본들에 의한 노동력 착취와 안전사고들이 일상화된 곳이었다. 많은 선교사들은 현지인들을 설득할만한 언어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고, 관습과 제도의 장벽을 넘을 만한 인식도 수완도 정치력도 부족했으며, 빈곤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나눠줄 물질적 자산도 부족했다. 해서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을 파송하고 지원하는 교회에 정례적으로 보고할만한 성공사례들을 갖지 못하였다. 하여 보고서들은 종종 과대포장되곤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원금을 지속적으로 받아야만 생활이 가능했고 또 최소한의 선교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교회 담임목사의 입장에서도 선교사들의 정례 보고는 중요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성장이 멈추었고, 많은 교인들은 교회에 대한 충성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성장은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도는 이들을 유치하여 정착시키는 데 보다 깊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이의 사역에 교인들을 동참시키는 것은 교인들의 자긍심을 향상시켜 교회에 대한 충성도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려면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매우 자주 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 보고서는 많은 경우 과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떠돌이 교인들을 유치하기 위해서도 선교사들의 과대포장된 활약상은 매우 중요했다.

교인들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시민사회에서 교회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추문들을 언론은 경쟁하듯 폭로해댔다. 교회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 보수세력의 부정함과 부패함이 응축된 곳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문제들은 많은 교인들에게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보내온 보고서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이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소식을 접한다. 저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저들이 얼마나 복음의 축복이 필요한지...

교인들은 저 가난한 이들과 몸을 섞을 필요가 없다. 그들의 상처 입은 경험과 그로 인한 이상성격들을 마주할 필요가 없다. 가까운 이웃의 가난한 이들에게 수혜를 베푸는 것은 단지 물질적 후원으로는 부족했다. 하지만 저들은 충분히 먼 곳에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들은 큰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작은 후원으로도 그들에겐 큰 도움이 된다는 선교사의 보고서는 교인들로 하여금 가벼운 물질적 지출만으로 매우 큰 위안과 자긍심을 갖게 해주었다.

요약하자면 해외선교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회적 혐오감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교회의 성장의 위기가 심화되고 교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긍심이 깊은 상처를 받게 되었을 때, 우연히 발견된, 효용성이 매우 큰 대안적 선택이었다.

여기서 주지할 것은 해외선교사의 수가 급증한 시기가 1989년부터였다는 사실이다. 이 해는, 알다시피, 해외여행자유화조치가 내려진 때다. 이러한 법제도상의 변화는 인식의 변화를 추동했다. 가령, 해외여행은 그 이전까지는 사치스러운 행위로 여겨졌지만, 이후에는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와 맞물려 교회가 해외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 이전까지는 해외선교사가 되려는 이는 주로 선교 중심의 파라처치 출신자들이었고, 교회는 그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때는 선교 파라처치와 로컬처치인 교회 사이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여 선교사 지원자들은 우선 국제선교단체의 후원을 기대했고, 다음으로는 자기가 속한 파라처치의 후원을 기대했다. 이도저도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은 직장의 해외파견직을 이용해서 자비량선교(스스로 자금을 조달하는 선교)를 선택하곤 했다.

그런데 해외여행자유화조치와 더불어, 해외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교회에 선교후원을 신청하는 이들과 선교사를 독자적으로 파송하려는 교회의 이해가 만나게 된다. 그 결과 해외선교사 수가 급증한 것이다.

한데, 앞서 말했듯이, 해외선교의 빠른 확산 과정에서 교회와 교인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는 것이 선교 목적 뿐 아니라, 자신들의 위기의식에서도 벗어날 실마리가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여 해외선교는 교회를 중심으로 붐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 더 주목할 것은, 한국선교연구원(KRIM)과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의 자료를 추산해보면 198998년 선교사 수가 매년 400~700명씩 늘어났는데, 1998년부터는 매년 1~2천 명씩 증가하는 등 1998년을 기점으로 더욱 가파른 증가 추이를 보여줬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가 일어난 직후 잠시 주춤했지만, 이 증가 속도는 2010년 현재까지 변함없다. 그것은 해외 선교 현상이 한국 교회의 위기 대응이라는 의미에서 구조화됐음을 뜻한다.

앞에서 우리는 아프간 피랍사태의 진원지에서 단기선교의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해외단기선교의 추이에 대한 통계를 찾아볼 수 없기에, 이제까지는 본원적인 해외선교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그런데 교회가 해외선교사를 파견하게 되면서 해외선교와 선교사에 대한 교인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자연스레 교인들의 선교지 방문도 잦아졌고, 교회가 그것을 프로그램화하는 일도 생겨났다. 그러면서 발전한 것이 단기선교다.

교인들은 단순한 후원자와 방문자에서 선교사가 되었다. 한데 방문자에서 선교사로 주체가 전화되는 과정은 약간의 도약이 필요하다. 대개의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은 단기선교팀의 활동을 프로그램화할 능력이 없었다. 그럴만한 이벤트적 기획이나 활동거리도 부족했다. 그것은 보다 긴 시간동안 조직적인 경험을 누적시킨 기관을 필요로 했다. 대형교회들은 파라처치들에 의해 조직된 기관들과 결합하여 보다 큰 선교기구를 만들기도 했고 독자적인 기구를 만들기도 했다. 하여 이런 기관들의 주도로 단기선교 프로그램이 기획 운영되었다. 이들 프로그램은 사전 훈련 과정과 본 선교 과정으로 구성되는데, 흥미로운 것은 사후 과정은 거의 기획, 시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기선교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단기선교는 선교지의 필요보다는 선교사로 참여한 이들의 필요와 그들을 파송한 교회의 필요에 의해 수행된 것임을 의미한다. 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한국의 해외선교는 대체로 그런 의미를 가졌지만, 단기선교는 더욱 그런 점이 부각된다. 기간이 짧으니 만큼 현지에서 그들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다. 게다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에 참가자가 선교기구에 강한 귀속성을 갖게 되어 교회에 소홀해져서는 안 된다. 하여 선교기관은 참가자의 후속프로그램을 기획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교지에서 얻은 경험과 고양된 영성을 오직 자신의 교회에서 풀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기선교는 선교라기보다는 교육에 가깝다. 그러므로 단기선교의 프로그램은 일종의 극기훈련과 같은 성격을 지닌다. 더욱 그 여정이 험난하고 위험하면 할수록 효과는 상승한다. 그것은 일종의 어드벤처 게임이다. 그렇기에 단기선교를 위해 가장 선호된 지역은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는 바로 이러한 구조화된 한국교회의 선교 메커니즘에서 발생한, 충분히 있을 법한 사고였던 것이다.

 

1970년대 한국교회에는 기도원 현상이 붐을 이루었다. 반면 1990년대, 특히 외환위기 이후 한국교회에는 단기선교 현상이 붐을 이룬다. 과거 교회는 자체 기도원을 두기도 했고 혹은 유명한 기도원과 제휴관계를 맺기도 했다. 해서 교회는 교인들에게 기도원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권하기도 했고 때로는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한데 기도원은 현실의 바깥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난폭한 자본주의적 성장주의로 돌진하고 있던 시대에, 자본주의적 합리성의 바깥, 비합리의 논리가 판을 치는 공간, 전통의 노스텔지어가 맹렬하게 불꽃을 피우던 공간이다. 이곳에는 사회의 자본주의적 변모 과정에서 실패한 이들이 몰려들었고, 비교적 잘 적응하고 있던 이들도 일상에서 후퇴하여 이런 비합리의 공간에서 영성을 보충받았다.

한데 1990년대 말의 단기선교의 붐은 자본주의적 변화의 성공지대에 선 이들이 그 성공을 만끽하면서 영성의 충만함을 체감한다. 그들의 선교지는 자본주의적 실패의 지대, 그 합리성의 바깥이다. 선교사로 파송된 이들은 그 지역에 자신이 누리는 합리성을 이식시키는 것을 복음화로 상상한다. 바로 그러한 상상 위에서 그들은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더욱 충실한 이가 됨으로서 자신의 신앙의 위기를 넘어선다.

그렇기에 단기선교 현상은, 외환위기가 한국사회를 바닥까지 내동댕이치던 바로 그 시기에 급증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성공한 자들의 신앙적 승리의 서사다. 바야흐로 오늘 우리의 시대 교회의 제도화는 중상위계층의 사회적 이해가 신앙적 인식으로 표현됨으로써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위기에 직면한 교회는 중상위 계층적 승리주의를 신앙화함으로써 그 위기를 돌파하고 있다. 그것의 하나가 해외선교, 해외단기선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