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

다원성의 신학은 근대 세계에서의 ‘그리스도교의 속죄의 선언’이다

이 글은 [한겨레21] 380(2001.10.25)에 게재된 글로 추정되는데, 확실치 않네요.
-----------------------------------------------------------------------

다원성의 신학은 근대 세계에서의

그리스도교의 속죄의 선언이다

 

 


 

신학에서 다원성이라는 논제가 제기된 맥락은 크게 두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타세계(유럽과 미국 이외의 지역)의 선교가 제국주의적 배타성을 띠었다는 것에 대한 자기 반성이며, 다른 하나는 자세계의 근대성의 맥락에서 탈종교화되는 이른바 세속적 세계에 대한 신학/신앙의 사회적 무책임성을 자기 반성하면서 다원성이 신중하게 고려되었던 것이다. 전자가 강한 종교성의 사회에서 그리스도교의 배타주의를 문제시한 것이라면, 후자는 약한 종교성의 사회에서의 신앙적 배타성(폐쇄성)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경우 모두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근대 세계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배타주의가 낳은 의도하지 않은폭력성에 대한 자기 반성에서 다원성 논제가 제기된 것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다원성 논의는 근대 세계에 대한 서구 그리스도교의 변증의 어법이 아니라, ‘속죄의 어법이라는 것이다.

제국주의적이든 배타주의적이든,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개입은 교회라는 역사적 제도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졌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를 전제하지 않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원성 논의는 신앙 제도로서의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교회를 제도로서 본다고 함은 강령으로서의 교리 체계(배타적 진리로서의 정경성 문제를 포함), 직제, 예전 등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교회의 교리 체계, 직제, 예전 등에서 어떻게 제국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인 신앙적 정체성이 강화되는가를 근원적으로 문제시하는 데서 다원성 논제가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원성 논의가 한국에서는 어떻게 논의되고 있는가? 나는 다원성 논의를 펴는 논자들이 이것을 종교다원성의 맥락에서만 보려는 경향에 문제를 느낀다. 분명 한국은 다종교사회임에 분명하고, 종교간 갈등이 적어도 일상생활에선 적지 않은 문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오늘날 종교 간의 문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에선 그리 뜨거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은 제3세계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종교간 화합이 비교적 잘 이루어진 사회의 하나가 아닌가? 내가 보기엔 보스니아-세르비아 분쟁 사태에서 보듯이 제3세계의 신종족주의가 종교간 갈등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을 신학의 주제로 주목하고 있는 서양 신학자들의 문제의식이 여과되지 않은 채 한국에 들어온 결과가 아닌가 한다.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의 그리스도교의 부정적 개입은 종교간 문제보다 훨씬 심각하다. 오늘 한국 사회가 서구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의식의 식민성을 띠고 있으며, 동시에 근본주의적인 이념주의에 과도하게 경도되어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근대화의 파행성과 연동되어 천민성을 지닌 자본의 관행이 일상화된 사회이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 사회는 심각한 정치이념사회적 갈등이 야기되고 있고, 그것이 불평등하게 봉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제도로서의 교회는 이러한 한국사회의 모순구조를 온존, 증폭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권력의 폭력을 외면하고 심지어 은폐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과 다양하게 연합하면서 패권주의적 게임에 열증하기도 했다.

다원성 문제는 우리의 신앙에 사회적 차이를 인식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다. 우리 사회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전체주의를 추구하거나, 또는 차이를 차별화하여 등급화된 인간들을 만들어낼 때, 신앙은 그것을 비판하는 언어로서 사회에 개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교회는 실제로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불필요한 것에 불과하다. 더 이상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에 선사해 줄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 아니 오히려 개혁의 대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다원성 논제는 한국 교회의 폐해를 근원적으로 성찰하게 하고 스스로를 철저하게 개혁하게 하는 자기 비판의 소리로서 작용해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