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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신학’이라는 ‘배제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 이정규(李正奎) 선생의 「민중신학에 대한 초보적 비판」에 대한 ‘초보적’ 비평

이 글은 1996년 4월 26일 젊은 민중신학자들의 모임 주관으로 열린 이정규 교수와의 토론회에서 이정규에 대한 논평글로 쓰였다. 이를 다듬어서 [시대와 민중신학] 3 (1996)에 게재하였다.
이정규 교수(중국 연변대학 철학과)의 발제글 <민중신학에 대한 초보적 비판>은 [신학과 현장] 4집 (1994)에 게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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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라는 배제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이정규(李正奎) 선생의 민중신학에 대한 초보적 비판[각주:1]에 대한 초보적비평

 

 

 

 

 

1

 

민중신학은 한국사회를 진화론적/발전론적 시각에서 보기보다는[각주:2] 구조화된 위기의 시각으로 보았다. 이러한 위기의식[각주:3]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 민중신학의 출발점이자, 전개/발전의 기축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이 포함되어 있는데, 하나는 주류적 신학()이 이러한 위기구조의 배제/박탈 메커니즘 및 그 폭력성을 적절히 문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신학적 반성/비판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이 위기구조로 말미암아 고난당하는 대중의 역사적 현실을 지양하려는 이론적 실천적 개입으로서의 대안적인 비판적 신학이론 형성의 차원이 그것이다.

위기구조에 대한 그때마다의 위기의식에서 비판이론은 그 시대의 비판문법을 형성한다. 1970년대 민중신학은 주류적 신학을 몰역사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신학과 역사적 상황간의 관계의 문제가 이 시기 민중신학의 비판문법의 핵심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당시는 신학에서 뿐만 아니라 여타 이론 영역에서도 이 양자를 매개하는 대안적 비판 패러다임의 단초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1970년대 민중신학의 비판적 담론의 형성은 [대안적인 비판적 신학이론의 형성보다는] 비판적 수사어를 양산하는 형태를 띠게 된다.[각주:4] 이것은 대체로 [주류적 신학에 대한] 부정의 논법으로 전개되는데, 이론에 깊이 천착하지 않은 채 단호한 부정어법의 수사적인 언술이 돌발적으로 활용됨으로써 민중신학의 비판문법은 [비판이론적 성격보다는] 저널리즘적 비판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각주:5]

한편 한국사회의 1980년대는 마르크스주의, 특히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대안적인 비판 패러다임으로써 확고한 신뢰를 받으면서 맹렬한 기세로 확산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 비판문법은 신학과 마르크스주의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각주:6] 여기서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현실인식은 실체적 현실과 동일시되었고, 이에 따라 위기구조가 지양되는 역사적 전망이 폐쇄적인 인과적 법칙성을 띄며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 민중신학의 언술은 수사적이라기보다는 법칙적 인과성을 신학화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논법으로 펼쳐지고, 이런 인식 태도에서 민중신학은 과학적 비판 이론으로서의 신학으로 표상된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이어지는 이러한 민중신학의 전개는 통상 인식론적인 단절(epistemological berak)의 관점을 중심으로 평가됨으로써, 평자들에 의해 양자간의 연속성보다는 단속성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시각에서 신학적 성찰의 계기를 가장 뚜렷하게 찾고자 했던 연구자 진영이 그밖의 다른 연구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초기 민중신학의 개념이나 전통에 대해 가장 친화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양자는 공히 주류신학에 대해 비타협적인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며, 각기 그 시대의 여타 비판이론 진영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려는 신학함의 자세에 있어서도 공유점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양자 간의 인식론적 단절에 주목하는 것으로 민중신학의 전개를 평가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민중신학의 전개/발전의 가장 뚜렸하고 돋보이는 두 궤적을 분화시키고 양자 사이의 차이를 과잉 해석함으로써 민중신학의 기축적 논지를 이러한 전개과정과는 상이한, 그럼으로써 양자가 공유하려 했던 요소와는 다른 관점에서 발견하려는 어떤 해석이 민중신학을 논평하는 여러 연구자들에게서 나타난다. 이들은 양자의 담론을 단순비교함으로써 이와 같은 단절관을 도출해 낸다. 이것은 실천의 위기가 이론의 위기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주장과 연결된다. 1970년대 민중신학의 탈신학적 요소가 1980년대에 [일탈적으로] 급진화됨으로써 실천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중신학의 전망을 구상하는 데 있어 보완/재해석의 초점을 신학적 차원에 두게 하며, 그 보완의 단초를 [민중진영의 담론 절합(=분절절 접합)에서 찾으려 하기보다는] 서구의 전통적 신학과의 대화를 통해 발견하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의도했든 아니든, 담론은 외부없이 자족적으로 실재한다는 담론 중심주의(logo-centrism)적인 관념론적 입지점에서 신학하기 실천을 하고 있는 셈이다.[각주:7] 그러나 담론은 결코 독립적이거나 자존적이지 않으며, 담론 외적인 것과의 끊임없는 겹침과 교류에 의해 작동되는 담론적 실천의 형태로서만 기능한다.”[각주:8]

여기서 논평하고자 하는 이정규 선생의 논문도, 그의 논평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앞의 어떤 해석과 형식 논리상 친화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래서 결과적으로 [연약한 논거와 비곤한 이론[각주:9]으로 점철된] 어떤 해석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중국의 학자이고, 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였기에 민중신학의 미묘한 담론 외부를 감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보여준 민중신학에 대한 애정어린 태도는 우리로서는 아무리 고마워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그가 취한 접근 방식이 [불가피했을지도 모르지만] 담론간의 형식적 비교에 그쳤고, 그 결과 우려했던 대로 어떤 해석과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글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런 문제제기를 바탕으로 함으로써 실천과 이론의 양 차원에서 연대를 지향하는 우리의 공론의 장이 더욱 활짝 열리게 되리라고 본다.

 

2

 

내가 이해하는 한, 이정규 선생의 논지의 핵심은, 민중신학은 신학적 비판의 언어로서는 그 유용성이 충분하지만, 위기구조를 변형시키려는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개입으로서의 대안적인 신학적 비판이론으로서는 불충하다는 것이다. 그의 용어에 의하면 전자는 신학의 영역이고 후자는 정치이론의 영역이며(그의 글, 112; 이하 쪽수만 표시), 전자의 과제는 증언에 있는 반면, 후자의 과제는 과학으로서의 정치적 대안에 있다(123). 그리고 후자로서의 전개가 불충분한 이유는 신학적 언질과 이론의 국한성(제약/한계?; 112)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민중신학의 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제휴 경향을 /탈신학화라고 하여 우려섞인 경고성 충고를 한다(123~24). [그가 사회주의권의 학자라는 점에서 이런 조언은 다른 이의 논평 이상의 무게를 지니면서 민중신학 연구자들을 압박한다.] 이러한 논지와 충고에 이르는 그의 접근 방법은 다음의 세 가지 차원에서 전개된다: 민중신학의 사회역사관(역사철학적 관점에서), 민중관, 민중운동관. 아래에서는 이 세 차원을 따라가며 그의 논평을 살펴보고, 위에서 언급한 어떤 해석의 관련성에서 이에 대한 나의 비평을 첨언하고자 한다.

첫째로, 이정규 선생은 민중신학의 사회역사관이 아무리 역사성을 담보하려 해도 궁극적으로는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하는 신학 일반의 관념론적 인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114). 그에 의하면 모든 사회역사관은 유물론(唯物論)과 유심론(唯心論), 이 양자에로 환원된다. 그것은 존재의식간의 우선성 문제로 모든 사회역사관이 양분된다는 가정과 연결된다(113). 그리고 후자에 우선성을 부여하는 신학, 나아가 민중신학은 자연과 사회역사 안에서 작용하는 객관법칙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114).

여기서 그는 참과 거짓으로 명확하게 분화되는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세계의 법칙적 운동들이 확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대로라면 유물론의 영역은 신앙이나 확신의 영역이 아니라 객관적인 과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합법칙적인 세계의 과학에 기초한 사회역사관은 여하간에 언어로서 표상(representation)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언어의 세계는 임의적이고 불확정적이어서, 설사 확정적이고 법칙적인 세계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언어는 그것을 언제나 변형된 형태로 재현한다.[각주:10] 요컨대 기의(signifié)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의 과잉결정요소에 의해 기표(signifiant)를 초월하면서 기호 외부의 세계와 연결된다.[각주:11] 결국 설령 합법칙적인 세계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확하게 표상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다만 역사적 징후로서만 이데올로기적으로 표상될 뿐이다. 이것은 현실계와 상징계가 결코 분화될 수 없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신학과 정치이론은 종교적 범주와 과학적 범주로 분화되는 것이 아니라 각기 현실계와 일정한 관계 속에 있는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상이한 공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물론 대 유심론 따위의 이원론적이고 환원론적인 범주의 양극분화 도식은 인간의 세계 인식을 나타내는 범주로서 그 타당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것은 인간이 본질주의라는 그물에 사로잡힌 탓이다. 그러므로 그 반대의 측면, 즉 환원주의/본질주의를 지양하는 사회역사관을 통해 우리는 현실계와 상징계가 한데 얽힌 세계에서의 사회역사적 진리 문제를 논할 수 있다. 그것은 주체의 가능성의 제약조건으로서의 구조, 구조의 제약 아래 있는 각 주체간의 상호주관적 맥락에서 전개되는 관계성속에서 진리의 문제를 묻는 것이다.[각주:12] 여기서 진리는 결정론적이고 선험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과정론적이고 화용론적(pragmatic)이며, 따라서 진리는 무엇인가라고 묻기보다는 어떻게 형성되는가라고 질문하는 과정에서 해명되어야 하는 것이다.[각주:13]

민중신학이 성서를 독해하면서 야훼 종교와 바알 종교와의 대립을 상정한 것(113~114), 두 신관을 둘러싼 상이한 진리형성 과정을 시사한다. 여기에는 상이한 맥락의 과잉결정에 의한 상이한 당파성이 진리 형성 과정, 즉 사회역사관의 정당화 투쟁에 개입하였음을 시사한다. 이정규 선생은 여기에서 철학적(=과학적) 당파성과 구별되는 종교적 당파성이라는 환원론적 단언을 내리고 있지만(113~114), 투명한 법칙성에 기초한 투명한 당파성은 근대의 과학주의적 신화일 뿐이다. 여기서 민중신학은 신과 인간 사이에 특화된 존재, 즉 왕을 중개자로 설정하는 바알 종교와는 다른, 모든 이와 야훼 사이의 상호성을 전제로 하는 야훼 종교를 강조하고 있다.

둘째, 이정규 선생은 민중신학의 민중관의 함의를 고난의 담지자로서의 민중이라는 차원과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차원이 있음을 간파해낸다(115). 그는 민중신학에서 전자의 함의를 탈권력적[각주:14]이라고 하면서(117), 이런 함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와 자본주의적 독제체제 간의 차별성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117). 하지만 나는 바로 이 점이 민중론이 계급론을 넘어서는 하나의 주요한 요소라고 본다. 왜냐하면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중심 개념으로 여타의 사회적 제 관계를 환원적으로 포섭하려는 계급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분석으로도 한계가 있지만, 사회주의 사회의 위기구조를 해명하는 데도 문제가 있으며, 또 제3세계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박탈 양상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제약점들이 많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도 다양한 계급론의 재해석이 시도되고 있는 실정이다.[각주:15]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계급적 모순과 타 모순들 간의 관계의 문제다. 초기와 중기의 알튀세르는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라는 세 층위간의 과잉결정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환원주의를 극복하고 있지만,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적 층위의 우위라는 선험적 명제를 끌어들임으로써 궁극적으로 계급적 모순의 우위 명제를 제시한다.[각주:16] 반면 민중신학의 민중론에 함축된 권력박탈의 문제는 권력론에 관한 보완적 이론화를 통해서 이러한 계급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각주:17]

후자에 대해서 그는 주체의 의미를 묻는다. 즉 그는 생산의 주체소유의 주체(사회적 관계의 주체; 지배계급), 이 두 측면으로 분화되는 역사의 주체라는 요소를 개념상 혼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중신학 민중론의 질적 규정성의 한계를 지적한다(117). 그리하여 그는 민중신학의 민중론은 문제를 “‘본질적차원에서 해결하지 못하게한다고 단언한다(117). 아마도 그는 민중보다 질적 규정성이 명료한, 그래서 문제를 본질적 차원에서 해명할 수 있게 하는 개념틀로 계급론을 상정하고 있을 것이다.[각주:18] 그런데 이른바 소장파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을 계급연합으로 보고 있다.[각주:19]

한편 이정규 선생은 계급을 생산수단의 소유형태로 파악함으로써 고난/모순의 담지자로서의 성격과 역사주체로서의 성격 사이의 역사적 불일치를 개념 안에서만 통일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에는 고난/모순의 담지자=역사의 주체라는 도식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가정은 노동자계급/농노계급이 보수주의를 선택한 무수한 사례에서 얼마든지 반증된다. 물론 이런 혼돈은 민중신학자들의 민중관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것은 결정론적이고 환원주의적인, 이미 진리가 결정되어 있다는 인식론에 근거한 계급론/민중론의 구성주의적 오류인데,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로버트 브레너(Robert Brenner)는 소유관계 외에, 결코 소유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계급투쟁의 차원이 이행과 재생산을 담보한다고 본다. 그는 여기서 계급투쟁의 양상과 관련되는 변수로 집단 결속력, 조직화 정도 등의 정치적 요소를 든다.[각주:20] 하지만 그의 융통성 있는 계급 이론화에도 불구하고, 성이나 세대, 지역주의/민족주의 등의 문제가 체계의 이행과 재생산에 미치는 영향력이 충분히 해명되지 못한다. 반면 민중신학의 민중론은 보다 포괄적인 과잉결정의 매개변수를 배제하지 않는 이론적 전개의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계급론적 함의를 포괄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이론화를 향해 열려 있다.

민중신학의 민중론은 [비록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그 가능성이 거의 고찰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계급과 기타 제 모순들 간의 관계를 선험적으로 위계화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회의 제 모순적 요소간의 과잉결정적 절합이 특정한 형태의 권력체계를 형성하고, 이 체계 속에서 규범화된 지배담론은 무수한 작은 담론들간의 우연적인/의식외적인 코드화를 통해 구성되는 동시에 거시적으로는 권력체계와 정교한 연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현대 [물질주의적] 담론이론에 접맥될 수 있는 이론적 유연성을 갖는다. 실제의 경험세계에서 현실계와 상징계를 분리할 수 없듯이, 투명한 모순관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모순구조는 고정된 생산양식에 따라 단순화될 수 없다. 모순구조 자체는 권력체계 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실천들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국면적(conjunctural)으로 구성된다. 나는 이러한 역동적인 모순구조 속에서 사회 구성적으로 포착되는 고난의 담지자를 민중 모집단(母集團)이라고 규정코자 한다.[각주:21] 그때그때의 정세는 민중 모집단에 포괄될 수 있는 여러 집단의 사회적 동원(mobilization) 가능성을 차별화하는 구조로서 형성된다. 여기에는 구조가 경계지우는(boundarized) 가능성 제약의 차원, 구조를 창조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제약의 가능성의 차원이 복합되어 있다.

이러한 고난의 담지자에 관한 이론화는 바로 역사의 주체문제로 이어진다. 즉 이러한 문제설정은 누가 주체인가?’라는 물음에서 [민중 모집단으로부터] 어떻게 주체가 형성되느냐?’라는 물음으로의 전위를 시사한다. 그 누구도, 어떤 계급도, 어떤 인종도, 어떤 성(), 어떤 민족도 인식론적 특권을 존재론적으로 가질 수 없다. 다만 정세가 제공하는 집단 범주적 가능성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주체의 형성 문제는 우선 지식-권력연합체로서의 거대한 지배담론을 해체하는 작은 담론들의 형성이 필요하다.[각주:22] 나는 이렇게 가능성의 집단인 민중 모집단에서 권력해체적인 실천에 동원된, 즉 역사의 주체로 전화된 대중을 민중(minjung)이라고 규정할 것을 제안한다. 그런데 권력해체적 담론집단인 민중이 거대한 지배담론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분산적인 작은 실천들로는 불충분하다. 실천적으로 유의미한 민중의 형성[각주:23]은 저항담론간의 절합을 통해 연합을 형성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의 문제는 곧 민중연합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변수로 작용하는 요소로는 강령의 최대성(maximalism)과 최소성(minimalism) 사이의 무수한 변이, 조직의 응집력, () 등이 고려될 수 있으며, 이 요소들이 강제하는 민중연합의 가능적 특성들이 고려되어야 한다.[각주:24]

셋째, 이정규 선생은 민중신학의 민중운동관을 논평하면서, 이 두 요소는 서로 엇갈리는 측면이라고 주장한다. 즉 민중신학은 민중을 정치적으로 추동해내는 운동의 지도이론일 수 없고(121), 민중의 시각에서 성서를 재해석하는 증언으로서의 신학에 불과하다고 본다(120). 여기서 그는 민중운동을 협소하게 규정하고 있으며, 운동이론을 대면성과 즉물성에 기초한 정치조직 중심의 조직운동론쯤으로 환원하여 이해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에 의하면 민중운동은 지도적 이론이 실천을 추동해내고 실천이 이론을 검증해내는 운동의 차원과 체계적인 이론지도가 결여된 자발적인 운동의 차원이 있다고 본다(120). 물론 그에게서 종교운동이나 신학운동은 후자에 속한다. 그러나 가령 이런 운동관에는 한편의 영화나 그림 같은 예술 작품이 대중사회의 대대적인 열광과 조응하면서 해방지향적인 법개정을 추동해낸다거나 혹은 하나의 상징을 해방적 전통이 어린 가치로서 재생산되게 하는 차원의 정치성을 간과하고 있다. 특히 현대사회처럼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극대화된 세계에서는 상징을 둘러싼 권력화 대 권력해체화 투쟁은 더욱 중요한 민중운동적 효과를 갖는다.[각주:25] 이런 점에서 신학의 상징공간에서의 담론을, 직접적인 정치적 구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 또한 조직화된 운동지도부의 기획에 따라 직접적으로 추동되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적실성을 상실한 판단인 동시에 이론적 개연성조차 갖고 있지 못하다.[각주:26]

바로 이 점에서 이정규 선생이 운동을 실용성의 차원으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혐의를 배제할 수 없게 한다. 하나의 사회적 갈등의 주제는 시간적으로 당기(當期)적인 협소 공간에 국한된 것일 수 없다. 그것은 법칙적이고 환원주의적인 구조화된 총체성의 단순한 반영은 아니라 하더라도, 시공간적으로 보다 폭넓게 구조화된 복합적 거대 구조가 사회적으로 돌출한 하나의 발현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은 즉자적이고 즉물적인 실천적 반응과 그것의 이론적 조응만으로 해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현실계와 상징계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세계에서 위기구조의 고리들을 풀어내는 절합 가능한 이론적 실천적 개입들을 추구하는 무수한 우회로들또한 민중운동의 영역에서 배제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해방적 실천들을 포섭해내면서도(최소강령주의) 지향하는 바 가치의 현실적 극대치를 함축하는(최대강령주의) 민중형성론적인 운동이론이 정치뿐 아니라 종교, , 문화 등 제반 영역에서 소통적으로 모색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3

 

이상에서 나는 이정규 선생의 비판이 민중신학에 대한 적절한 비판일 수 없음을 주장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바, 그의 비판이 민중신학의 마르크스주의적 담론과의 절합 모색을 비판하고 사회이론화되지 않는 혹은 사회이론과의 분업화가 고집스럽게 수행된 고립적인 신학적 비판담론를 권장하는 데로 귀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소위 제1세대와 제2세대라고 불리는 민중신학자군()의 차이를 과장하고 양자 간의 연속성을 간과하고 있으며, 과장되게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2세대와 구별되는 1세대적 논리의 발전 가능성을 권면하고 있다. 아마도 신학의 비판이론적 가능성을 저널리즘적 언술의 정치적 효과 정도로 보고 있는 것같다. 그러나 제1세대 민중신학의 탈사회이론적 담론은 비판적 사회이론이 부재하던 시대의 이론 해체주의적 비판담론의 일반적 경향과 조응하고 있음을 그는 간과하고 있으며, 또한 제2세대 민중신학의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과잉이론화는 비판이론의 복원이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편향으로 [구호적 성격을 띄며 급작스럽게] 재구성되던 시대의 비판담론의 일반적 경향과 조응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민중신학의 세대별 이해를 담론비교에 국한해서 그 외부를 간과한 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외부 없는 담론관은 전혀 유물론자답지 않은 이해방식이다.

나는 이 글에서 민중신학의 제1,2 세대별 차이보다는 그 연속성에 주목했는데, 그것은 양자 간의 연속성이, 민중신학의 전개를 그 담론 외부와 결부시켜 이해할 때 명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양자 간의 연속성이란, 1세대와 제2세대의 민중신학자들이 그때마다의 비판담론들과의 대화의 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담론절합을 시도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요컨대 제1세대와 제2세대 민중신학은 공히, 그때마다의 위기의식에 따른 비판문법에 기초해서 민중연합 형성을 위한 이론적 실천적 개입을 모색하는 신학적 비판담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계보학적 접근[각주:27]을 통해서 우리는 민중신학의 세대 간의 담론적 차이를 단순히 차이로 보는 관점을 넘어서서 양자 간의 연속성을, 그리고 그 연속성의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민중신학의 핵심은, 전통적인 주류 신학들의 환원주의/본질주의적 방식에서 이탈하려는 원심력과, 다양한 비판 이론들과 제휴점을 찾아보려는 구심력을 만나게 하려는 반환원주의적이고 관계론적인 비판이론적 지향점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990년대 이후 급작스럽게 찾아온 민중신학의 위기에 대해서 어떤 해석들의 진단처럼 비판담론들과의 절합구조를 해체하고, 에 비판 대상이던 신학들과의 담론절합을 모색하는 것은, 비판성을 해체하고 주류신학의 현체계에서의 이익분배의 과점권의 일부를 할애받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절대타자성을 근간으로 하는 주류신학은, 물질의 운동법칙의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우선성을 강조하는 DIAMAT식의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숭상하는 자본주의의 지배담론과 동일한/친화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만큼 체계비판의 이론적 가능성을 스스로 제약하고 있다.

사회를 분절적인 몇 가지 범주로 나누고 그것들의 고유한 자체논리 모색에 매진해 온 분과학문 중심적인 19세기적 학문 패러다임은 오늘날 비판이론으로서의 적실성을 의심받고 있다. 또한 그 분절적인 패러다임에 기초해서 세계의 분절적인 요소를 억지 통합하는 학문적 제국주의 역시 그 타당성을 상실했다. 사회는 “‘혼돈 속의 질서, 다양한 적대와 모순, 차이들의 불균둥하고 비대칭적, 비선형적 발전을 자신의 존재방식으로하고 있다. 그래서 월러스타인(I. Wallerstein)이 기존의 사회과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이러한 차이들의 분절적 접합을 포착할 수 있는 통합과학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학 또한, 진정 실천이론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고 싶다면, 타학문과의 절합을 위한 여백이 필요하다. 즉 오늘날 요청되고 있는 신학의 패러다임 교체는 인간들간, 체계간, 종교간, 인간과 그밖의 존재들 간의 관계성’, ‘소통성의 회복에 있다.[각주:28] 그런데 이미 20년이 넘게 힘겹게 지켜온 민중신학의 이러한 소중하고 선구적인 전통이 도리어 위기의 원흉처럼 비판받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비스듬히 열어놓은 판도라 상자 틈새로 비집고 나온 [정통적] 신학이라는 배제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재삼 활개치고 있는 것이다.

  1. 이 글은 지난 4월 26일 ‘젊은 민중신학자들의 모임’ 주관으로 열렸던 민중신학 간담회에서 행한 중국 연변대학의 이정규 교수(철학)의 발제(이 글은 《신학과 현장》 제4집. 1994, 111~125쪽에 게재되었음)에 대한 논찬원고를 보완 발전시킨 것이다. 여기서 이정규 선생이 사회과학자로서 신학 논쟁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논문 표제에 ‘초보적’이라는 수사어를 사용하고 있다면, 나는 신학연구자로서 사회과학적 언술 형식을 빌려 그의 논문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보적’이라는 표제어를 삽입했다. [본문으로]
  2. 민중신학 발생의 역사적 맥락에는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를 칭송일변도로 평가하던 관변 지식인들의 ‘단계론적 발전주의’, 즉 진화론적 낙관주의가 지식생산물의 압도적 주류를 형성하던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본문으로]
  3. ‘위기의식’은 ‘위기구조’에 대한 인식론상의 단순한 반영체가 아니다. 그것은 위기구조를 이해하는 특정 시공간의 비판적 담론형성 과정이며, 동시에 비판 세력의 주체형성 과정이기도 한데, 위기구조에 개입하고 있는 다양한 구성요소들 가운데 어떤 특정 요소(들)이 과잉결정의 요소로 개입함으로써 형성된다. 그러므로 위기의식의 내용인 비판적 담론은 항상 국면적인 정세의 효과로 나타난다. [본문으로]
  4. ‘민중’ 등의 핵심 용어들의 개념문제를 둘러싼 질문에 대한 민중신학자들의 묵비권은 바로 이 시기 민중신학의 비판적 담론 형성의 특성과 연관이 있다. [본문으로]
  5. 민중신학 안팎의 일부 논자들이 민중신학의 대중적 지명도 상실의 요인으로 ‘교회적 담론’, 즉 교회(특히 설교의 공간)에서 유통될 수 있는 언술체계의 결여를 지적하고 있는 것은 대중성 문제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나타낸다. 대중성의 문제, 특히 비판담론에서 대중성의 문제는 기존하는 일체의 체계(현존하는 교회로 표상되는 그리스도교 체계를 포함하여)로부터의 일탈성과 결부된다. 즉 비판담론이 기존 체계의 약점들을 도발적으로 들추어냄으로써 체계로부터 일탈하고픈 대중의 욕망을 부추기는 현상이 바로 대중성의 요체인 것이다. 비판적 저널리즘은 이러한 일탈효과를 ‘매체’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언표적 특성을 갖는데, 그리스도교 저널리즘의 주요 매체가 교회, 특히 설교라는 생각은 탈속적인 그리스도교 중심주의적 사고와 결부된 편협한 사고의 소산이다. 그리스도교 대중은 교회의 일원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가정이나 직장, 국가 및 기타 여러 사회 집단의 일원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개개인의 주체 형성이 복합성을 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개개인에 있어 주체 형성과정을 개략적으로 보면, 어떤 사회 집단의 ‘문지방’을 들어설 때만 그 집단의 주체로서 귀속감이 형성되고 여기에서 나와서 다른 사회집단의 내부로 들어갈 때는 이전의 것이 해체되고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집단 귀속감의 불균등한 절합(분절적인 동시에 접합적인; articulation)의 과정적 실체로서 주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대중의 일탈욕망이 그리스도교 영역과 비그리스도교적 영역들로 분화되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절합(=분절적 접합)의 성격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대중은 이 절합 과정에 그리스도교적 요소가 여타 영역을 과잉결정함으로써 주체가 형성된 존재를 말한다. 요컨대 비판적 그리스도교 저널리즘은 [교회, 설교라는 공간에 국한된 것으로 규정할 수 없고] 기존의 담론체계의 해체 전략을, 그리스도교적 언표를 과잉결정적 요소로 하여 재코드화하려는 언술전략이라 규정할 수 있다. 주체형성의 복합성 문제를, 구조화된 체계 속에서 절합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분화된 영역들 간의 과잉결정적 재코드화 과정으로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M. Pêcheux, Language, Samantics and Ideology (St. Martin's Press, 1975)를 보라. [본문으로]
  6. 박성준 강원돈 최형묵 등, 이러한 논의를 주도했던 논객들은 ‘전체와 부분’이라는 변증법적 총체성 논리로 사회변혁운동과 신학적 실천을 자리매김한다. 이것은 이들이, 한국전쟁 이후 괴멸된 마르크스주의적 ‘정통의 복원’이라는 과제에 몰입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진영과 대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재활을 주도했던 논객의 하나인 윤소영이 최근, 역사적 구체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과잉 형상화하려 했던 자신들의 시도를 [중/후기 알튀세르를 독해하면서] 자기비판하고 있다는 점은 민중신학의 전망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윤소영, 〈알튀세르를 다시 읽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생각한다〉, 《이론》 1 (1992 여름), 48쪽 참조. [본문으로]
  7. 언표된 것만을 본다면 1980년대의 비판적 담론 유형,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정향의 비판담론은 로고센트리즘적 특성을 지닌다. 즉 이들은 ‘과학’으로 표상된 자신들의 담론으로 사회적 변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규격화하려 했다. 이것은 일정 정도 이런 입장의 논객들의 자기 암시적 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끊임없는 이론적 동요와 자기비판적 성찰은 이들의 비판담론 형성 과정이 지배담론에 대한 저항담론의 적절한 자리매김을 향한 여정이라고 볼 수 있게 한다. [본문으로]
  8. 윤평중, 〈담론이론의 사회철학〉,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 (서울: 문예출판사, 1996), 229쪽. 알튀세리안(Alutusserians)의 대표격 인물의 한 사람인 미셸 페쇠(Michel Pêcheux)는 이러한 담론 외부와 상호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는 담론적 실천의 양상을 ‘동일시’(identification), ‘반동일시’(counter-identification), ‘역동일시’(dis-identification)로 나누어 설명한다. Michel Pêcheux, Language, Samantics and Ideology, 특히 110~129쪽; 강내희, 〈언어와 변혁―변혁의 언어모델 비판과 주체의 역동일시〉, 《문화과학》 2 (1992 겨울), 11~46쪽 참조. 또 미셸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연계 양상으로서의 지배담론의 형성사를 에피스테메(épistémè)라는 담론적 실천의 인식론적 구조를 가리키는 용어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Michel Foucault, 《말과 사물》 (서울: 민음사, 1986) 참조. [본문으로]
  9. 김진호, 〈최근의 ‘민중신학 위기론’은 실천이론의 빈곤을 반영한다〉, 《이론》 8 (1994 봄), 123~147쪽 참조. [본문으로]
  10. 근대 이전 시대의 ‘존재론적 이해구조’의 근대의 ‘인식론적 이해구조’로의 전환은 단절의 차원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에선 ‘참-거짓 이원론적인 명제관’이 단지 형식을 달리해서 표상되고 있다는 점에서 연속성의 차원을 지닌다. 알튀세르는 과학을 ‘표절’해 온 이러한 연속성의 뿌리를 플라톤 이래의 로고스 중심주의적 관념론 철학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데모크리투스와 에피쿠로스에서 비롯되는 불확정성의 유물론의 계보학을 그리고 있다. 윤소영, 〈알튀세르의 철학적 유산〉, 《이론》 10 (1994, 가을+겨울), 31~60쪽 참조. 이와 같은 ‘불확정성’의 문제는 ‘언어’를 중심으로 하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본문으로]
  11. 심광현, 〈언어비판과 철학의 새로운 실천―비트겐슈타인과 알튀세르〉, 《문화과학》 2 (1992 겨울), 71쪽 참조. [본문으로]
  12. 이 규정은 사회구조와 인간행위간의 상호규정성을 주장한 기든스(A. Giddens)의 ‘구조의 이중성’(duality of structure) 개념을, ‘주체의 이성적 잠재력을 극대화’하려는 하버마스(J. Habermas)의 의사소통행위에 의한 상호주관성 개념으로 보완하여 실천적 함의를 강조한 것이고, 또한 담론의 이성적 차원을 강조한 나머지 역사적 사회구조의 불확정적인 영향망을 깊이 통찰하지 못한 하버마스의 합리적 주체관을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을 통해 보완한 것이다. Giddens, 최병두 옮김, 《사적 유물론의 현대적 비판》 (서울: 나남, 1991), 특히 49~74쪽; Harbermas, 이진우 옮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서울: 문예출판사, 1995) 참조; 하버마스 이론의 한계에 관하여는 윤평중,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합리성과 사회비판》 (서울: 교보문고, 1990), 특히 제3부 참조. [본문으로]
  13.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을 주장하는 논자들은 거의 한결같이 결정론적인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실천’을 재구성의 중요한 단초로 제시한다. 이것은 행위의 비결정성과 구조의 제약성을 종합해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Jorge Larrain, 《사적유뮬론과 사회이론》 (서울: 나남, 1990); E. Balibar, 이해민 옮김, 《역사유물론 연구》 (서울: 푸른산, 1989); Jon Elster, Making Sense of Marx (Cambrigde: Cambrigde University Press, 1985); A. Giddens, 《사적유물론의 현대적 비판》 (서울: 나남, 1991) 참조. 이 모든 논의에서 토대-상부구조, 물질의 반영으로서의 의식 등의 DIAMAT식의 결정론적 도식의 해체가 재구성의 전제가 되고 있다. [본문으로]
  14. 이때의 ‘탈권력’은 dis-power가 아니라 powerlessness의 의미, 즉 ‘권력박탈’의 상황을 가리킨다. 한편 나는 전자의 의미로 ‘권력해체성’이라는 용어를 쓴다. [본문으로]
  15. 발리바르(E. Balibar)는 계급 ‘외부’에 ‘차이’로서 각인되어 있는 수많은 모순과 적대를 인정하며 이들간의 과잉결정에 의한 토픽적인 세력대치전선을 통해서 계급문제의 실제성을 찾고자 한다. 즉 그는 계급의 실존은 실체론적/구성론적 개념으로서의 계급이 아니라 제 모순들의 이데올로기적 절합을 통한 계급투쟁이라는 ‘유명론’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글, 〈잉여가치와 사회계급〉, 이해민 옮김, 《역사유물론 연구》 (서울: 푸른산, 1989) 참조. 한편 유물론의 유명론적 재해석에 관하여는 L. Althusser,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서울: 돌베개, 1993) 참조. 또한 분석 마르크스 학파의 주요 논객인 존 뢰머는 계급계념을, 노동가치설로 설명될 수 없는 착취(exploitation)의 개념과 접맥함으로써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서의 불균등함을 포괄하는 계급이론을 제시한다. John E. Roemer, 〈착취‧계급 그리고 재산관계〉, Terence Ball & James Farr, eds., 《마르크스 이후》 (서울: 신서원, 1991), 209~238쪽; 같은 저자, “New directions in the Marxian theory of exploitation and class”, John Roemer, ed., Analytical Marxism (Cambrigde: Press of University of Cambrigde, 1986) 참조. [본문으로]
  16. 그러나 후기 알튀세르의 자기반성에서 드러나듯이 계급우위의 모순관은 ‘반경험주의’라는 이론주의로 귀착할 뿐이다. [본문으로]
  17. 나는 민중론의 권력론적 기초이론으로 M. Foucault 외, 정일준 엮고 옮김,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증보판; 서울: 새물결, 1995); Steven Lukes, 《3차원적 권력론》 (서울: 나남, 1992); A. Giddens, 《사적유물론의 현대적 비판》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민중신학의 민중론을 전개한 것으로는 나의 연작논문인 〈역사주체로서의 민중―민중신학 민중론의 재검토〉, 《신학사상》 80 (1993 봄); 〈예수운동의 배경사를 보는 한 시각. 민중메시아론의 관점에서 본 민중형성론적 접근(방법론을 중심으로)〉, 《민중신학》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5) 참조. [본문으로]
  18. 민중론을 [형성적 실재가 아니라] 구성적 실재로서 보려는 인식틀은 바로 이 점에서 위기를 맞게 된다. 즉 ‘누가 민중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데 있어 민중론은 계급론이나 계층론에 비해 훨씬 그 개념화가 미진할 뿐 아니라 발견적(heurestic) 이론화의 개연성마저도 열려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민중론을 ‘형성적’ 관점, 즉 ‘민중(연합)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입론에서 시작되는 관점은 많은 발전 가능성을 갖고 있다. 반면 계층론에서는 아예 괄호쳐 있는 부분이고, 계급론에서는 구성주의적 환원론적으로 다루어오거나 아니면 경제우위 명제에 의해 다루어져 왔던 한계적 부분이다. [본문으로]
  19. 그의 비판의 초점은 민중신학의 탈신학화 경향이고, 그러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그는 민중론의 이론의 결여 및 민중론에 대한 계급론적 관점의 우위성을 지적한다. 그런데 민중신학의 탈신학화 경향의 1980년대적 이론화는 계급론적 민중론으로 나아간다. 즉 그와 그의 주비판대상인 마르크스주의적 민중신학은 민중론에 있어 공동의 배를 타고 있다. [본문으로]
  20. Robert Brenner, “The Social Basis of Economic Devolopment”, Analytical Marxism 참조. [본문으로]
  21. 이것은 한상진의 용어와 그 함의를 빌어온 것이다. 그는 한국 국가의 성격을, 라틴아메리카의 국가성격에 대한 설명적 패러다임인 ‘관료적 권위주의’(Bureaucratic Authoritarianism)의 변형태로 보면서, 한국의 국가는 일부 상류층에 의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이 독점되어 왔고, 또 근본적으로 박탈대중에 대한 억압과 배제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성 노동자 청년학생 농민 자영업자 화이트칼라 중소기업가 등 다야야한 성격의 집단이 민중의 모집단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한상진, 〈민중, 중산층, 中民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제조업 생산직과 화이트칼라를 중심으로〉, 《사회운동과 사회개혁론》 (서울: 전예원, 1992); 같은 저자, 〈관료적 권위주의와 한국사회〉. 《한국사회의 전통과 변화》 (서울: 법문사, 1983) 참조. [본문으로]
  22. 하버마스가 ‘체계’의 식민지배로부터 ‘생활세계’의 해방을 강조하는 것이나, 리오타르(J.F. Lyotard)가 ‘말놀이’의 해방적 가치를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런 차원을 가리킨다. 한편 하버마스처럼 분산된 작은 담론들의 영역을 체계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대안적 진리로 너무 쉽게 대체개념화하는 위험성과, 리오타르처럼 작은 말놀이간의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을 주장하여 결국 ‘인식론적 무정부주의’로 빠져드는 위험성을 모두 지양하고 있는 후기 푸코의 파르헤지아(parrhesia)적 진리관과 ‘계보학’이라는 문제설정도 마찬가지로 분산적인 작은 담론들의 권력해체성을 강조한다. 김재현, 〈하버마스에서 공론영역의 양면성〉,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 .J.F. Lyotard, 이현복 옮김, 《포스트모던적 조건》 (서울: 서광사, 1992); Lois McNay, 〈푸코와 포스트모던―페미니즘 논쟁〉, 황정미 엮고 옮김, 《미셸 푸코, 섹슈얼리티의 정치와 페미니즘》 (서울: 새물결, 1995) 참조. [본문으로]
  23. ‘작은 담론’화 운동인 이른바 ‘공동체운동’의 한계에 대하여는 나의 글, 〈‘공동체론’적 경향의 대안에 대한 대안: 민중신학 사랑방의 <새로운 대안적 공동체 모색: ‘예수살기 모임’을 중심으로>을 참관한 뒤의 하나의 단상〉, 《숨》 27 (서울: 한국민중신학회; 1994.6). [본문으로]
  24. 이에 대한 보다 제세한 논의에 대하여는 나의 논문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민중신학 민중론의 재검토〉 참조. [본문으로]
  25.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자인 앙리 르페브르나 영국의 마르크스 계열의 이론가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주의의 공간재생산 운동이 상징공간의 확대재생산 과정과 얼마나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지에 관해 실증적이고 이론적으로 정교한 논술을 펴고 있다. 여기에는 ‘욕망’이라는 비실물적 상품의 재생산 메카니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Henri Lefebvre, 박정자 옮김, 《현대세계의 일상성》 (서울: 主流‧一念, 1995); David Harvey, 구동회 박영민 옮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서울: 한울, 1995) 참조. [본문으로]
  26. 후기 알튀세르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운동의 가능성에 주목하였다는 사실은 마르크스주의의 향후 전망에 대해 많은 시사를 준다. 윤소영, 〈알튀세르의 철학적 유산〉, 특히 주23) 참조. [본문으로]
  27. 계보학적 접근의 모범적인 저술로는 M. Foucault, 이정우 옮김, 《담론의 질서》 (서울: 새길, 1993) 참조. [본문으로]
  28. Hans Küng & David Tracy 엮음, 박재순 옮김, 《현대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9) 참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