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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성화된 양심'은 없다 - 우리 시대 '양심의 도구화'에 대한 하나의 문제제기


이 글은 [황해문화] 51(2006 여름)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성화된 양심은 없다-우리 시대 양심의 도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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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된 양심은 없다

우리 시대 양심의 도구화에 대한 하나의 문제제기

 

 


발저 논쟁기억과 양심의 도구화를 비판하는 하나의 전거

 

수년 전 마르틴 발저(Martin Walser)가 쓴 소설 󰡔유년시절의 정체성󰡕을 탐독한 이후 몇 달간 나는 그의 소설들에 푹 빠져 있었다. 이 소설의 번역자 권선형 선생이 쓴 한 편의 논문이 계기가 되어, 이름도 생소했던 작가에 대한 탐구는 시작되었다. 그래봤자 독일어의 문맹자가 읽을 수 있는 그의 작품은 두 권뿐. 해서 얼마 되지 않아 발저에 관한 연구논문들로 관심이 옮겨갔다. ‘발저 논쟁이라는 생소한, 기억과 양심에 관한 논쟁을 알게 된 것은 이런 계기로 인해서였다.

독일 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행한 강연 <일요연설문을 쓰면서 떠오르는 단상들>(1998)에서 그는 역사적 야만의 가해자라는 자국의 수치스러운 기억이 끊임없이 매체들을 통해 재현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면서 시선을 돌리게 되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제국주의적 야만성이 낳은 폭력의 집합적 기억을 갖고 있는 민족의 일원인 나로서는 좀처럼 납득하기 쉽지 않은 주장이었다. 죄의식에서 결코 자유로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본인의 양심에 대한 나의 생각이었고, 또 독재의 잔당들이 가져야할 마땅한 자의식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아마도 그가 나를 매료시켰던 작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납득되지 않는 주장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선배들의 죄과로 인해 자기의 정체성이 끊임없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은,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인해 죄성이 우리 몸에 침입해 들어왔다는 바울의 해석에 대한 나의 신경질적 반응과 유사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울의 죄 해석이 갖는 문제제기의 통렬함은 선배들의 죄과와 자기 자신이 결코 분리할 수 없이 얽혀 있다는 존재 이해에 있다. 그것은 청산의 대상이 과거의 아무개로 한정되는 게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는 것을 뜻한다. 자신은 의로운데 선배(선조)의 죄과 때문에 평가절하되는 게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던져버릴 수 없는 죄의 품성, 죄로 얼룩진 선배(선조)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죄성이 자신의 내면에 강고하게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기 초월의 불가능성에 대한 한계의식에 사로잡힘으로써 시작한다. 물론 신앙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한계상황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데로 이어진다. 망각의 메커니즘을 연구한 하랄트 바인리히(Harald Weinrich)의 말처럼,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망각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서 대개의 그리스도인의 경우 신의 망각은 체험되기보다는 교리적으로 다가올 뿐이다. 하여 여전히 종교적 수행에 열정적일수록 더욱 강한 한계의식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버린다. 이때 내가 택한 무의식적 선택은 종교심을 통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다. 즉 죄성에 대해 나를 더욱 민감해지도록 자극했던 󰡔성서󰡕를 문자주의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것이 더 이상 내면의 법정으로서의 양심을 자극하지 않고, 단지 외면의 법정으로만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성서󰡕를 기념비화(‘정전화’, canonization)함으로서 그것을 체험 외부, 즉 나의 실존의 장벽 밖에 자리잡게 한 것이다. 이리하여 죄성으로 인한 한계의식은 체험되기보다는 신조처럼 고백되게 된 것이다.

너무 신학적 해석이니, 좀 더 세속적 예를 들어 이야기해 보자. 페미니스트인 아내나 여자 친구와 티비(TV)를 시청할 때 그녀들이 여성의 성이 상품화되어 노골적으로 전시되는 것에 화를 내면서 남성 파트너인 자신에게 비난을 퍼붓는다면, 필경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이 비난에 대해 못들은 척 시선을 돌릴것이다. 물론 나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상품화된 성을 탐닉하는 자가 아니어서가 아니다. 그러한 욕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그 자신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여 그러한 욕구와 종종 힘겨운 내적 전쟁을 치루고 있는데, 번번이 타인이 새롭지도 않은 말로 내면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에 감성적 반작용이 일어 순간적으로 짜증이 난 것이리라.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나를 포함해서, 이런 경우에 익숙한 많은 남자들은 공적 장소에서 그다지 헌신적 활동가가 아니면서도 비교적 높은 수위로 여성에 대해 우호적인 발언을 한다. 이것은 항상 실패자로 귀결되는 남자라는 한계의식을 내면에서 정죄하기보다는 성해방에 관한 사회의 포괄적 도덕성을 자신의 외적 담화의 준거로 수용함으로써, 성적 한계의식을 체험 내부에서 외부로 옮겨가 내적 한계의식을 망각해보려는 무의식적인 자기 속임의 전략이 아닐까.

아마 발저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경험했을지 모른다. 독일인으로서의 역사적 죄과를 스스로에게 지워버릴 수 없었기에, 내면을 울리는 수치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양심의 소유자였기에, 때만 되면 그러한 기억을 전혀 새롭지도 않게 반복하는 매체들에 대해 불편한 심사가 치밀어 올랐을지도 모른다.

그의 불만은 지배적인 기억의 매체들이 과거를 단지 하나의 기억의 망속으로 포획하려 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마들린느 과자처럼 기억은 우발적이고 사사롭게 등장한다. 역사적 죄과에 대한 양심이 작동하는 상황도 그러하다. 그것은 타인에 의해 의식적이고 집단적으로 강제되는 게 아니라 철저히 내적이고 우발적인 생각의 흐름 속에 자리잡아야 한다. 한데 그것을 외부에서 도덕의 이름으로 표준화하려는 것은 오히려 고개를 돌리게하고 무관심을 조장할 뿐이다. 결국 그러한 기억의 장치들은 진지한 양심의 성찰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억을 경직되게 하고 체험으로부터 분리시킨 채 공식 언어 속에서 입에 발린 소리가 전부인 도덕으로 자기 위안을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기억의 매체들이 반복적으로 단지 하나의 기억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에 대해 그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날선 가설 하나를 제기한다. 그것은 저들이 특정의 당면 목적을 위해 사람들의 수치심(羞恥心)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내적, 개별적 기억을 외적, 집단적 기억과 이분법적으로 양분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양심이 내면의 고독한 사투라고 하더라도, 고독한 내면조차도 기억을 둘러싼 문화에 깊은 영향권 아래 있다는 현대의 기억 연구들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발저의 문제제기는 오늘 우리가 깊이 새겨야할 무언가가 들어있다고 본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기본적 문제의식이다.

 

양심의 세 유형저항하는 양심, 양심에 위배되는 복종, 길들여진 양심

 

이제 위의 논의를 염두에 두면서 한국사회에서 양심을 둘러싼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그 전에 먼저 개념적 설명으로 시작해보자. 마르틴 발저의 관점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양심이 개인의 내적 문제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임마누엘 칸트 식으로 말하면 양심이 있기에 개인은 어떤 것에 대해 자발적으로판단하게 되는 내적 힘을 갖게 된다. 한데 칸트도 인정했듯이 개인의 이 자발적 판단이 사회의 도덕법칙에 준하고 있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해서 양심은 개인과 사회의 접점에서 발생하는 도덕적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도덕법칙이나 도덕적 판단력이란 특정한 공동체와 관련된다. 이를 도덕공동체라고 하는데, 도덕적 공통감각을 갖는 사회적 결속체를 말한다. 근대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도덕공동체는 물론 국가. 그러므로 양심은 국가 내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사회적 행위들에 대해 한 개인이 갖는 도덕적 판단력인 셈이다. 가령 정부가 하고 있는 어떤 행위를 한 개인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문제적이라고 느낄 때, ()는 그것에 저항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양심은 국가에 대항하는 양심이 된다(저항하는 양심). 또한 양심에 거슬리는데도 자신의 저항 행위의 결과에 대한 어떠한 반작용, 가령 정부의 탄압이나 시민사회의 압박이 두려워 스스로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을 경우도 있다(양심에 위배되는 복종). 그러나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국가 내의 지배적 행위자들에 대해 양심적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길들여진 양심). 그것은, 양심이 개인의 내적 판단력이라고 하더라도, 그 판단력이 이미 사회적으로 공유된 가치들에 의해 훈육된 결과다. 사회의 개인 길들이기는 그()의 내적 판단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국가체제의 성격은 위에서 언급한 이 세 유형의 양심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데, 가령 전체주의적 국가에서는 저항하는 양심은 위축되고 양심에 위배되는 복종이 가장 일반적으로 선택된다. 그리고 양심을 길들이는 섬세한 기제는 발달이 지체되어 있다. 한편 민주화는 양심에 위배되는 복종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요소들의 작동 억제를 제도화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또한 양심을 길들이는 장치들이 현저히 발전한다. 그런데 민주화는 시민사회의 발전 및 시장의 발전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양심 길들이기의 사회적 기제는 시민사회와 시장의 메커니즘과 관련이 있다.

정부든, 시민사회든, 시장이든 사회제도적 행위자가 개인의 내면적인 도덕 판단인 양심과 맺는 관계를 살피기 위해서는 문화연구가 주효한데, 특히 기억과 망각의 메커니즘에 관한 접근은 사회제도와 개인 간의 관계를 읽는 데 매우 유용하다. 그것은 도덕적 공통감각이 집단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또 어떤 것에 대해 공통적으로 망각함으로써 형성되는 도덕적 자의식과 관련되기 때문이며, 집단적 기억과 망각이 그 사회의 기억과 망각의 사회문화적 메커니즘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집단적 기억과 망각이 우리 사회의 양심 행위에 어떻게 연관되고 있는지를 논하는 데 초점을 두고자 한다. 특히 전체주의적 독재체제에서 민주화로의 이행과 지구적 시장체제의 발전이 개인의 양심에 어떻게 연관되고 있는지를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이야기한 마르틴 발저의 문제제기를 유념하면서 개인의 양심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통념적 인식에 대한 나의 비판적 의견을 제기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도덕 공동체 붕괴의 징후착한 사람 신드롬

 

최근에 있었던 두 사건, 황우석 사태와 고아출신 남녀의 지하철 깜짝 결혼식 파동은 이 글의 관심인 양심 행위의 당대적 특징을 살피는 데 있어서 매우 유용한 사례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착한 사람에 대한 사회의 열망이 매우 강렬하다는 점이다. 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연구 성과를 이룩했음에도 그것이 장애인이나 난치병 환자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착한 과학자는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타적인 사고와 행동을 조직해냈다. 시민사회는 그간 무관심했던 장애인이나 난치병환자에 대한, 마치 오랫동안 그래왔던 양, 호혜적 관심을 공공연히 말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위해 혹은 그런 연구를 진행하는 착한 과학자를 위해 기금을 모우기로 했고, 또 많은 여자들은 착한 과학자의 연구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어 주겠다는 심정으로 자신의 난자를 기증하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고아로 자라면서 정에 주리고 가난에 주리며 배움에 주렸지만, 소박하나마 의미심장한 사랑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하겠노라고 호소하는 의례를 연출한 착한 고아 커플또한 시민사회에 착한 심성의 영을 불어넣어주었다. 이 사건을 접한 무수한 사람들은 누군가에 대한 험담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 사적 대화의 마당에서 저 가난한 커플에 대한 호의를 아낌없이 표현했다. 그중의 적지 않은 이들은 인터넷 등 접근 가능한 매체를 통해서 그러한 생각을 공론화했고, 일부에선 후원을 운동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두 사건 모두에서 매우 신속하게 내면의 양심은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일부에선 문제제기가 없지 않았고, 그중엔 퍽 설득력 있는 의견도 없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했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했다. 결국 착한 과학자고아이지만 착한 커플에 관한 이야기에서 정작 대중이 보고 들은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요컨대 대중은 착한 사람을 내면에 품기를, 곧 자기 자신이 그런 존재이기를 열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덕공동체로서의 우리 사회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사람들이 날마다 접하는 일상은, 그 치열한 생존경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삶의 구체적인 현상은 착한 품성이 해체되고 있다는 집합적 기억을 낳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집단적 죄의식 또한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내면을 울리는 양심의 소리는 사회에 대한 불화인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불화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그 내적 질책은 행동화될 수 없다. 사람들은 치열한 현실에서 살아남으려면 양심에 위배되는 복종을 행위로 선택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집합적 기억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 비굴한 복종의 질곡을 벗어날 길은 논리적으로 예측되지 않았다. 하여 착한 존재에 바람은 거의 종말론적인 메시아 갈망과도 같았다. 그런데 그런 이가 포착된 것이다. 그렇게 신속하게, 그렇게 열광적으로 사회가 이들을 우호적으로 소비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러나 유능한 연구자도 1년에 1억 원 정도 안팎을 연구비로 받아낼 수 있는 여건에서 수백억 원의 연구기금을 모우는 데 착한 사람이라는 품성이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상식이 착한 과학자의 사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또 고아로 태어난 사람이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착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재확인하는 데 하루의 시간이면 족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희곡 󰡔사천의 선인󰡕은 가난하고 비천하지만 담배가게를 운영하면서 선을 베푸는 착한 여자 쉔테냉혈한 수탈자인 수이타를 대조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실은 그네들이 둘이 아니라 동일 인물, 한 사람의 두 모습이었음을 드러내면서 극을 마무리한다. 이 희곡은 냉혹한 현실을 가로지르는 착한 행위에는 비용이 필요하며, 그것은 그 냉혹한 현실에 순응하는 행위를 통해 조달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신랄하게 드러내는 한 편의 비유극이다. 황우석 사태는 바로 이 비유극이 지적하는 자본주의적 메커니즘, 사람들이 일상에서 무수히 발견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례의 한 전형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황우석 신드롬, 앞서 말했듯이, 도덕공동체의 위기에 직면하여 내면을 강렬하게 울리는 양심의 절박한 문제제기에 대한 대중의 메시아적 갈망이 허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절감케 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도덕공동체 붕괴의 맥락 1민주화

 

그렇다면 이제 도덕공동체의 위기의 배후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도덕공동체로서 한국의 도덕적 공통감각이 정초된 것은, 멀리가면 일제 식민지 시대로까지 소급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전체주의적인 군부독재체제 시대의 소산이라는 가정을 전제하고자 한다. 이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근대국가가 가장 확고하고 효과적으로 제도화된 시대였고, 또 그러한 제도화를 청산하고자하는 지금에도 사회 구석구석까지, 나아가 개개인의 일상적 아비투스에까지 그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다. 최근 회자되는 1987 체제담론은, ‘민주화 이후의 제도화가 독재체제의 청산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기반으로 하여 추진되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은연중 청산의 대상이 모방되는 이중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요컨대 여기에는 의식적 차별화와 무의식적 동일화라는 문제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즉 전체주의적 독재체제는 한국 국가의 정초기억(foundational memory)이 형성된 시기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에서 민주화는 제도화의 차원만이 아니라, 견고하게 우리 일상에까지 뻗쳐있는 아비의 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차원을 담고 있다. 흥미롭게도 많은 영화 평론가들이 1990년대 후반 이후 관객 동원의 관점에서 한국영화의 중흥을 이끌고 있는 영화들의 주된 특징을 고아의식에서 찾았다. 양심에 위배되는 복종을 구조화한 아비세대와 단절하고픈 강한 열망이 영화과 관객 사이의 광범위한 소통을 낳았다는 주장이겠다.

지난 2004년에 개봉되어 관객과 평론가들로부터 공히 높은 평가를 받은 <효자동 이발사>양심저항의 관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우선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영화 제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통치자의 목에 칼을 대는 직업이 매력적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양심에 위배되는 복종을 강요하는 이에게 칼을 대는 자, 비굴한 복종에서 저항하는 양심의 존재로 전화되는 아비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런 관점에서 영화 안으로 들어가보자. 주인공인 효자동 이발사 성한모는 역사의 권력 앞에 자신의 양심에 위배되는 비굴한 복종을 되풀이한다. 이유는 오직 가족 특히 아들 낙안이를 위해서다. 입법자이자 법의 집행자인 통치자가 국가라는 거대가족의 아버지(큰아비)라면, 단위가족의 아버지(작은아비)는 국가에, 통치자에 비굴하게 복종함으로써 가족에 대한, 아들에 대한 사랑을 실행에 옮긴다. 양심에 위배되는 복종은 나름의 알리바이를 갖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큰아비의 법에 대해 (양심에 위배되는) 복종을 실행에 옮기는 작은아비의 행위가 가족에 대한 아비의 사랑이고 그로 인해 가족의 안보가 지켜지는 것이라는 가국(家國) 체계적 질서를 비웃는다. 오히려 아들은 불구가 된다. 아들의 병이 낫기 위해선 용의 눈을 도려내어 삼켜버려야 한다. 즉 작은아비는 큰아비의 목을 잘라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들의 불구가 된 다리는 단지 신체의 질병이 아니라, 아비의 양심에 위배되는 복종이 낳은 정신적 외상이다. 동시에 그것은 저항하는 양심을 소환하는 아들의 몸의 언어다.

영화는 성한모의 아들 낙안이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된다. 즉 낙안이의 시선에서 시대의 흐름을 보고 있다. 연대기적 세대로 치자면 19604.19에 태어난 아이의 시선이다. 요컨대 그는 1980년대 민주화의 주역이던 세대다(편이상 이들을 386이라 하자). 한데 여기서 영화의 네러티브와 현실의 네러티브 사이에 균열이 있음이 발견된다. 역사 속의 386은 결코 작은아비의 저항을 기다리지 않았고, ‘작은아비는 아직까지도 절재권력자인 큰아비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철회하지 않았다. 하여 386은 역사 속에서 가국 체계를 해체하려는 주역이었고, 아비와 아들의 연대를 붕괴시키는 가족의 해체를 단행하던 주체였다.

그런데 영화가 제작개봉된 이천년대엔 386이 아비가 됐다. 이 시대의 낙안이들은 다시 가족으로 복귀해야 한다. 결국 영화는 그런 낙안이의 욕망에 의해 기억을 편집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386의 딜레마를 반영하고 있다. 가족으로부터의 철수를 단행했던 과거를 회수하고, 자신의 아비의 저항을 묵묵히 기다리며 몸의 상처에서 오는 아픔을 감내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으로 재생한다. 그런 점에서 <효자동 이발사>는 큰아비가 목 베인 시대에 또 다른 작은, 나약한 아비로 남겨진 낙안이들의 가족로망스인 셈이다.

이러한 구성은 이 영화를 찾은 많은 386 관객에게 감정이입되었을 법하다. 그것은 아비에 대한 존경을 철회하였던 이가 도리어 자신의 아들에 의해 청산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위기의식일지도 모른다. 그것만인가. 이름도 기억 못할 만큼 단지 성한모의 조력자일 뿐이었던 아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낙안이 세대의 아내는 아들보다 더 강력한 쿠데타의 주역이다. 더욱이 그녀에겐 딸이라는 강력한 동맹세력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낙안이들이 보기에는 자신의 아들들도 어미와 더 친화적인 듯이 느껴졌다. 그런 점에서 낙안이의 시선에서 가족로망스를 갈망하는 <효자동 이발사>, 영화평론가 허문영이 말하는 소년성’, 즉 아비를 증오하면서도 끊임없이 아비가 되기를 갈망하는 남성들의 영화다. 결국 민주화는 아비의 법에서 벗어나려는 아들들의 욕망인 동시에, 다시 아비의 법을 그리워하는 욕망을 낳았다.

이렇게 민주화는 아비의 법으로 상징되는 도덕공동체에 위기를 야기한 주된 요인이었다. 한데 이는 다시 질서를 그리워하는 향수를 낳는다. 그렇다고 큰아비가 복귀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대신 그 존재는 내면으로 들어온다. 욕망이 된 것이다. 하지만 민주화라는 기표는 이미 제도적인 차원뿐 아니라 내적, 정신적 차원에서도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진리의 정전(canon)이 되었다. 그것은 아비의 법을 폐지한 힘이었고, 큰아비에 대한 욕망의 준동을 억제하는 내적 동력이다. 하여 이제 상황은 반전됐다. 큰아비의 잔인한 지엄함 속에서 타는 목마름으로민주주의를 욕망으로 품었던 것이, 이제는 거꾸로 저 큰아비를 향한 갈망이 민주주의라는 초자아에 억제되면서도 끊임없이 현실로 표출하고 싶은 욕망으로 자리잡고 있다.

억제된 것은 무언가로 드러나기 마련인데, 그것이 어떤 형태일지는 미리 정해지지 않았다. 결국 민주화는 그것을 순화된 형태로 배설케 하는 장치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의 문제는 뒤에서 논하게 주요 테마다. 아무튼 여기서 양심은 이러한 배설이 내포한 희생양에 대한 폭력성을 종종 내적으로 정당화하는 기재가 되기도 한다. 즉 양심은 희생양을 향한 폭력성의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도덕공동체 붕괴의 맥락 2지구적 소비자본주의와 아이엠에프의 기억

 

한편 민주화와 거의 같은 시기에 급속도로 규정력이 강화되기 시작한 지구적 소비자본주의메커니즘은 또 다른 차원에서 아비의 법, 그 정초기억을 무력화시켰다. 강상중이 일본사회를 분석하면서 언급한 이른바 국민적 미디어의 동요는 많은 부분에서 우리 사회에서도 시차를 두고 겹치는 경험이다. 가령, 티비, 전화, 전축 같은 가족별로 하나씩 있던 미디어는 국가 단위의 공간과 시간 감각을 일상화시킴으로써 가족과 국가를 잇는 공통의 감각을 재생산하는 장치였다면, 컴퓨터, 휴대폰, 디엠비(DMB), 엠피쓰리(MP3), 인터넷 등이 상용화되면서 가족-국가적 차원에서 표준화된 시공간 감각은 개개인에게로 미분화되었고, 개인이 국경 너머 세계와 접선하는 새로운 시공간 감각을 낳았다.

강상중의 표현대로 디지털테크널리지로 구현된 미디어는 어떤 완충지대 없이 신체와 직결되었다.” 의복이 몸의 일부가 된 것처럼, 이들 미디어도 바로 몸 자체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 미디어를 가지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심지어 국경을 넘는다. 나아가 웹과 연결된 컴퓨터 시스템은 몸 없이 세계 여행을 가능케 하기까지 했다. 소비자본주의의 첨예화인 지구화는, 그런 점에서 도덕공동체로서의 국민적 공통감각을 심하게 흔들어놓았다.

마지막으로 아이엠에프(IMF)로 상징되는 지구화의 또 다른 체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회에서 산업화가 본격화된 1960년대 이후 전례없던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위험이 가공할만한 폭력성을 동반하며 사람들을 덮쳐온 것이다. 독제체제 하에서 국가 중심의 압축적 근대화가 추진되던 시절이든, 전체주의적 총동원체제 말기부터 민주화 이행기까지 경제적 성장전략의 축이 빠르게 국가에서 기업으로 옮겨간 이후이든, 변함없이 관철되던 하나의 질서관은 국가의 발전과 가족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하나다라는 명제였다. 국가에 의해 숱하게 사회적 희생이 조장되어 왔음에도 이 믿음은 비교적 굳건하게 사회통합의 중심 원리로서 작동해 왔다. 한데, 이른바 아이엠에프의 체험은 바로 이 원리를 붕괴시켰다. 이제 가족들이나 개인들은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었다. 실제로 국가는 수많은 가족들과 개인을 신용불량이라는 살인적 정글 속으로 유기시키는 적극적 행위자였다. 이에 가족들과 개인들은 국가에 대한 신용을 철회하게 되었다. 이렇게 지구자본주의적 신용사회로의 이행은 국가 대 가족/개인간의 상하로 가는 전통적 신뢰, 즉 도덕공동체적 믿음의 붕괴와 더불어 진행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가족은 사회적 안전의 최후 거점으로서 그 위상이 격상됐다. 치열한 생존게임은 국가가 아니라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 되었다. 그리고 가족 또는 개인의 발전은 국가의 발전과는 무관했고, 심지어 갈등적이라는 믿음이 확산됐다.

이러한 믿음은 수많은 저항하는 양심을 낳았다. 국가 정책에 대한 사람들의 과도한 피해의식은 지역적이거나 계층적이거나 혹은 기타 요소(학연 등)를 매개로 하는 결속체를 구성하여 국가정책에 저항했다. 그것은 대개 양심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 한데 여기서 이들 사적 결속체와 양심의 결합은 종종 저항하는 양심의 숭고성을 훼손시키곤 하였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양심은 한 결속체가 자신의 저항이 이기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는 자기 확신 혹은 자기 속임을 위한 도구가 되었고, 다른 결속체는 그 양심을 결코 신뢰하지 않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전체주의적 도덕공동체의 귀환 그리고 다시 길들여지는 양심

 

이상에서 도덕공동체 붕괴의 세 가지 계기를 논하였는데, 복잡한 논의를 간단히 정리하면, 국가-가족-개인을 엮는 전체주의적 가치, 그 전통적인 도덕공동체적 결속의 체계가 와해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국가, 가족, 개인은 서로 분리해 나갔고, 각각의 범주에서 서로 갈등하며 공존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도식화시키면, 타범주의 양심은 불신하되, 자기 범주의 양심은 자기 속임의 논리로 도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 차원의 도덕공동체가 붕괴된 터에서 양심의 도구화는 거의 필연적인 듯이 보인다.

한데 이것만은 아니다. 새로운 얘기가 추가되어야 한다. 실은 최근 우리 사회는 대단히 분열적이지만, 또한 종종 폭력적이라 느껴질 만큼 대단히 통합적이다. 지구화의 위협은 한편으로는 국가로부터 가족과 개인을 감각적으로 분할시켰지만, 동시에 감각적 통합을 자극하고 있으며, 또 그것을 산업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국제스포츠 산업이다. 여기에 독도를 둘러싼 국경분쟁, 그리고 동아시아 삼국간의 역사분쟁 또한 한몫 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맹렬한 국가주의적 통합이 가능한 것은, 강상중에 따르면, 지구적 위기가 국가와 같은 매개자 없이 개개인을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것에 대해 상상적 결속체를 통해 위안받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물론 이 상상적 결속체는 국가다.

사람들이 이렇게 국가를 다시 상상하는 것은 마치 고아가 부재한 부성(父性)을 갈망하는 것과 같다. 과학철학자 최종덕은 앤서니 그린왈드(Anthony G. Greenwald)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현실을 부성 부재의 상황으로 이해하는 인지적 고아들이 상상의 부성을 소환하는 것은 회귀적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요컨대 한국사회에서 다시 소환되는 국가에 대한 상상은 전체주의적 아비의 법에 의해 질서가 구성되는 도덕공동체에 대한 갈망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아비의 법으로 회귀하려는 갈망이 최근 국가주의(네셔널리즘)의 발흥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이들 인지적 고아들은 민주화와 지구화를 경유한 존재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과거 전체주의 시대의 국민’, ‘효자동 이발사 성한모일 수는 없다. 고아의식에 사로잡힌 낙안이와 그 후예들인 우리들 자신은 국가의 위협 속에 자신의 양심에 위배되는 복종을 선택할 의사가 조금도 없다. 그럼에도 전체주의적 국가주의의 도덕공동체를 갈망한다. 그것은 실은, 그 상상된 것이 오늘의 시점에서 위생처리된 것이기에 가능하다. 기억은 과거를 그대로 회귀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생처리하여 달콤하게 소환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체주의적 상상 아래 길들여지고 있는 양심은 오늘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방해한다는 것이 마틴 발저의 예를 통한 나의 문제의식이다. 발저는 수치심을 자극하는 매체들에 대해 고개를 돌린다고 했는데, 오늘 우리는 자부심을 자극하는 매체들의 난무 속에 자기 속임을 체험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긍심과 결합한 양심 작용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입에 발린 소리만을 반복하고 있는데, 이러한 우리의 도구화된 양심은 우리의 배타적 폭력성을 우리 자신에게서 더욱 깊이 은폐시키고 있다.

하여 이제 양심은 더 이상 성화된 것이 아니라, 성찰적 반성의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