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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베의 꿈

이 글은 1999년 5월 30일에 했던 한백교회 하늘뜻나누기 원고를 수정보완하여, 나의 책 [반신학의 미소]에 게재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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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베의 꿈

 

 

 

한동안 연일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했던 세 여인이 있다. 세간에 옷로비 사건으로 알려진 뉴스 담론 속에는 고위층 여인네들의 지나친 소비행각이 정치인들의 정적에 대한 공세전과 결합되어 있다. 정치인들에게 있어서 정적을 향한 흠집내기는 분명 상대방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공세 방식의 하나임에 틀림없고, 따라서 그것은 그에게 상당한 정치적 이익을 보장해주는 가치 있는 상품이다. 또 언론에게 있어서 정치인들간의 정쟁은 다른 어떤 정치보도보다 가치가 큰 기사거리임에 틀림없다. 격렬한 언사와 직설적이면서도 통렬한, 하지만 화려하기 그지없는 수사가 난무하는 정치꾼들의 말잔치는 우회적인 수사로 가득한 외교전과는 비견할 수 없는 꽤 괜찮은 상품이다. 게다가 고위층 여인네들이 그 말잔치에 흥미로운 스토리까지 제공해주니 이 사건이야말로 대중의 구미를 맞추기에 안성맞춤의 소재가 아닐 수 없었던 게다. 가정에 들어앉아 잠잠히 내조하는 정상적여성상에 비해 이네들의 일탈은 생활고로 분투하느라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신선한 분풀이 화제 거리를 제공해 주기엔 더 없이 적합한 상품이었다.

여기서 정치인과 언론은 상품의 생산자들로, 행위의 주체다. 반면 이 고위층 여인들은 정치계와 언론계 장사꾼들의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 이들이 고가의 옷을 소비하는 행위의 주체로 등장할 때도 사실상 마찬가지다. 이때 이 옷의 상품가치는 수천만 원대를 호가하는 엄청난 가격에 있다. 비싸기 때문에 소비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지위라는 상징적 자본을 소유한 탓에 그러한 소비가 가능했다. 요컨대 이들은 남편의 높은 직위를 상징하는 옷을 구입하는 것이다.

고위층 여인들이 행위 주체로 부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대는 아마도 그녀들이 소비자일 때뿐일 것이다. 그 외의 삶에서는 남편의 능력을 위해 봉사해야 하고, 같은 이유로 자녀들의 교육, 결혼, 직업선택 등에 관여해야 한다. 모두가 남편으로 상징되는 가문의 위격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반면 고액의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액수만큼의 품격을 그녀들 자신에게 선사해 준다. 그것은 짓눌린 가정사의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탈적 행동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일탈조차도 그녀들은 스스로의 능력으론 할 수 없다. 여전히 남편의 후광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렇게 가부장제 하의 규방 속 여인네들은 생산자인 남편의 부속물에 불과한 존재다. 결코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주체의 생산적 행위 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한 보조적 존재일 뿐이다. 만약 그네들이 상품으로 소비되는 경우엔, 거의 언제나 구설수의 대상이 되고 만다.

한편 요즈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대중의 눈길을 한 몸에 받는 여인들이 있다. 미인대회 출전자들이다. 얼른 보기에도 수려하기 그지없는 그녀들의 늘씬한 자태는 TV의 화상적 연출을 경유하면서 요염함으로 읽혀진다. 특히 수영복 심사 장면은 평범한 남자들에게 은폐된 행위였던 관음증을 떳떳하게 실행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 순간 남자들은 은폐하지 못함으로써 수치스러워야할 자의식으로부터 해방을 체험한다. 대중매체는 이 여인들의 몸을, 아니 몸둥이/육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여인들을 남자들에게 판매하며, 그것을 소비하는 남자들은 관음증적인 도착적 성 의식에서 해방을 만끽한다. 그들의 지켜보기몰래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경로로 이루어지는 정당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때 이 여인들은 생산의 자발적 주체다. 스스로를 상품으로 내놓음으로써 그녀 자신이 상품인 동시에, 생산자이자 판매자다. 하지만 그녀들의 교태스런 표정과 몸짓은 그녀들 자신이 아니라 남성의 시선으로 고정된 여체로서의 존재일 뿐이다.

공영방송이나 심지어 지방정부까지 나서서 앞 다투어 주관하는 미인대회의 숫자가 전국에서 무려 1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많은 대회의 심사기준은 천편일률적이라 하니, 성적 육체 가꾸기는 한결 명료한 기준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은 미인이 되기를 열망하는 여성에게 생존방식을 선택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변수가 될 것이다. 어쩌면 미인대회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기업 혹은 관공서의 취업 서류에 수영복 차림의 사진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고 신체 사이즈를 명기하는 난이 생길지도 모른다.

규방 안 여인들은 현숙함이라는 이름의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가도록 요청받는다. 그런데 규방 밖으로 잠시 뛰쳐나온 여인네들에겐 종종 부정한 일탈적 행위라는 따가운 시선의 꼬리표가 붙곤 한다. 그럼에도 규방 밖으로 뛰쳐나오는데 성공한 여인들이 존재한다. 그런 행위가 일탈이 되지 않으려면 어떠해야 할까? 오늘날 규방 탈출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는, (은밀한 공간이 아니라) 공개적 무대 위로 남성의 시선 앞에 육체를 상품으로 내놓는 것이다.

아무튼 고위층의 세 여인들과 미인대회 출전한 여인들의 꿈은, 공히 가정이라는 공간이 성을 관리하는 규칙 안에서 이루어진다바울 계보의 문헌인 디모테오 전서에는 여성의 임무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아이를 낳는 데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오직 착한 행실로서 단장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여자에게 어울립니다.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 그러나 여자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순결로서 단정한 생활을 계속하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디모테오전서210~15

 

이 구절이 실제 겨냥하고 있는 것은 교회 안에서 남자를 가르치는 여성 지도력이다.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12). 그래서 아예 감독직의 자격을 묘사하면서 흠 없는 자로서 한 여인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3,2). 이런 전통은 교회의 성직임명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족의 질서라는 개념으로 논증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은 사실 기나긴 가부장제적 가족사에서 여성을 관리하는 변함없는 담론이었다. 즉 모성이라는 헌신성을 상징하는 숭고한가치를 격려함으로써 여자를 가정 안에 머물게 하는 자발적 존재로 만들어왔던 것이다. 더 훌륭한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가족 안에서 희생하는 존재로서의 삶에 전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족과 모성 개념을 결합함으로써 가부장제 하의 여성은 스스로를 수동적 존재로 만들어, 사회적 역할에서 자신을 자발적으로 제외시켰던 것이다. 여성은 세계의 정의 문제와 씨름하기보다는 평온한 가정과 자녀 양육을 위해 전력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시대의 이단자 예수를 기리는 공동체였던 교회가 이제 시대의 인습적 질서 속에 편입하는 하나의 징후로, 사회의 성에 대한 이러한 관리법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한데 (그보다 대략 반세기 전에) 바울은 로마 교회에 페베라는 여인을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겐크레아에 있는 교회의 일꾼(디아코논, διακονον)이요 우리의 자매인 페베를 여러분에게 추천합니다. ... 그녀는 많은 사람의 보호자(프로스타티스, προστατις)가 되어주었고, 나도 그녀에게 신세를 졌습니다.

로마서 161~2

 

바울에게 있어 로마 교회는 퍽 중요했다. 그런데 이 교회가 그의 선교 활동 결과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에, 그래서 그의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기에, 이 서신에서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신의 지위와 능력을 강변해야 했다. 로마서가 그의 사상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와 관련이 있다. 16장에서, 끝인사를 하면서, 무려 28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거론하는 것도 이러한 그의 목적과 관련이 있다. 그런데 그 명단에서 가장 처음 나온 인물이 바로 페베. 더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안부를 전하는 얘기인데, 유일하게 페베 만은 바울이 로마 교회에 추천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경력에서나 능력에서, 그리고 로마 교회에서의 이미지에 있어서 바울이 가장 자신 있게 천거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그녀였다는 것이리라.

바울의 소개에 의하면 그녀는 겐크레아 교회의 지도자다. ‘디아코논이라는 말은 디모테오전서에선 감독 밑의 직분인 집사/부제를 가리킨다. 하지만 마르코복음서가 예수의 제자의 역할을 지칭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아직 직제화가 없던 바울 당시에는 이 어휘는 교회의 지도자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표현이었다. 프로스타티스라는 말은 사람들의 생계나 삶의 가치 등을 책임지는 가부장과 같은 위치를 시사하는 용어다. 요컨대 그녀는 바울이 가장 신뢰하는 교회 지도자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훗날의 디모테오전서처럼 아마도 바울 당시에도 교회가 여성의 역할을 가정에 가두어두어야 한다는 인습적 가치를 주장한 흔적이 여기저기서 엿보인다. 한편 바울 자신은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 동요하고 있다. 어느 대목에선 여자의 머리는 남자고(고전11,310), 여자는 침묵의 미덕을 따라야 한다(고전14,34)고 주장하면서, 또 어느 대목에선 남성과 똑 같이 여성도 하느님 나라의 동등한 역군임을 강조한다(고전11,11~12). 그가 이렇게 동요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나라 운동의 성해방주의적 가치와 기성사회의 인습적 가치가 그의 내면에서 갈등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아마도 그가 해방의 가치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된 것은 페베 같은 여자의 역할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당시 페베는 이러한 폐습을 거스르며 세계와 우주의 변혁을 소망하는 예수운동에 적극적인 참여자였던 것 같다. 그러나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교회 안팎에서 무수한 가부장제적인 가치의 편견과 맞싸워야 했으리라. 물론 남성만이 그녀의 장벽은 아니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는, 그 뒤틀린 모성의 미학은 여성의 가장 가혹한 적이 여자 자신이 되게 했던 것이다. 어머니와 딸, 여성과 다른 여성의 히스테리적 갈등과 증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에게 가족과의 단절의 칼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가부장적 체제의 규칙에 순종하면서, 일탈조차도 그 체제의 더욱 견고함을 위해 기여하는 고위층 여인네들의 꿈, 자신의 육체를 상품화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적극적인 생산자, 곧 주체로 등장한 미인대회 류의 여인네들, 그러나 결국은 가부장제적인 성 억압의 질서 속에 짓눌린 남자들의 관음증 해방을 위해 봉사할 뿐인 섹시한 여성 육체들의 꿈, 그리고 페베, 하느님나라를 추구하는 그녀의 꿈. 우리는 세 가지 꿈을 꾸는 세 부류의 사람을 본다. 물론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선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한 꿈을 위해 우리 여자들과 남자들은 스스로를 절제하고 처신할 수 있을까? 남은 것은 원칙의 선택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위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