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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전쟁의 예감, 그리고 순응의 정치학 - ‘두 지구제국 모델’과 미국의 전쟁 네트워크 체계를 중심으로

[감신대] 교지에 게재된 글. 2004년 2월에 완성된 글인데, 게재 일시는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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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예감, 그리고 순응의 정치학

두 지구제국 모델과 미국의 전쟁 네트워크 체계를 중심으로

 

 

1

 

20세기를 마감하기 몇 년 전 한국을 필두로 하여 아시아 동반부 지역의 몇몇 국가들에 갑자기 몰아닥친 외환위기는 그때까지는 말로만 듣던 이른바 지구자본이라는 것의 실체가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어느 사회학자의 표현대로, 초단기간의 무차별 공습이 일체의 저항력을 완전히 파괴해버린 뒤 진주한 정복군 사령부(IMF)가 자신의 방식대로 폐허로부터의 재건을 지휘하는 양상은 영락없는 전쟁바로 그것이었다. ‘지구자본은 자본주의가 창조해낸 가공할만한 최첨단 신형무기체계이며, 향후 전쟁의 양상을 예고하는 유력한 신호탄이기도 했다.

이른바 포스트 전쟁 시대는 이렇게 개시되었다. 전쟁 개시를 알리는 선전포고도 없으며, 그럴듯한 지구적 공공성을 가장한 명분도 없다. 각개의 지구자본적 행위자들은 일사불란한 지휘계통도 없이 서로 별개의 정보 분석을 통해 행동에 임한다. 이들을 결속시키는 유일한 명분은 이유창출이며, 행위를 합류시키는 직접적인 계기는 그들이 공히 신뢰하는 신용정보기구들의 분석에 있을 뿐이다. 일단 표적이 결정되면, 그들 각자는 이윤창출이라는 저의를 숨김없이 드러내며 표적을 향해 초단기간에 무차별 포격을 가한다. 이른바 외환위기는 이렇게 왔고, 가장 피해가 격심한 나라의 하나인 한국은 순식간에 일체의 저항력을 상실한 채, IMF의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그러나 지구자본이 반드시 이처럼 전쟁 같은 방식으로만 덮쳐오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 재화를 포함한 소비재 상품의 형태를 띠고 유유히 전 지구의 곳곳으로 스며든다. 이러한 지구자본의 이동을 방해하는, 국경으로 상징되는 여러 장애물들이 있지만, 지구자본은 갖은 압력을 통해 가설자인 각 국가들과 도시들 자신이 그것들을 철거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국가들과 도시들은 위협에 못 이겨 그것을 할 뿐 아니라, 많은 경우 기꺼이 지구자본의 자국 주둔을 허용한다. 지구자본만이 파멸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지구자본 메시아론이 널리 편만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전쟁의 예감, 자칫하면 엄청난 재앙에 직면할 수 있다는 그 불길한 예감이 수동적 순응을,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순응을 낳은 결과다. 한국의 신자유주의론자들도 바로 이러한 메시아론의 신봉자의 하나였다. 그들은 메시아가 곧 도래하리라는 신탁을 선포하고 골짜기를 메우고 산을 깎아 주름진 곳을 펴서 평평한 대로를 만들려 한다.

한편 1991년의 제1차 이라크 전쟁과 21세기 벽두에 벌어진 두 차례의 전쟁 또한 예사스럽지 않은 변화를 보여준다. 정교하고 가공할 위력을 가진 최첨단 무기들의 묘기 같은 장면은 통신과 미디어 기술의 복합을 통해서 전 지구적으로 거의 생방송처럼 방영되었다. 승패가 결정될 때까지 정규군간의 전투가 거의 사라졌으며, 엔지니어 병사들은 마치 오락 게임처럼 버튼으로 상대를 제압하였다.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처참한 전투장면과 달리, TV 모니터를 통해 전달되는 색깔의 향연은 마치 불꽃놀이라도 하는 양 아름다운 이미지로 재현되어 전 지구의 시청자에게 다가갔다. ‘깨끗한 전쟁이라는, 병사들과 민간인의 희생을 최소화한다는 현대 전쟁론자들의 이데올로기는 전쟁쇼가 되어버린 이미지 재현을 통해서 홍보되고 있다. 다행히도 이런 유의 전쟁은 지구자본의 그것에 비해 아직 충분히 미학화되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의 이미지에 가려진 추악함을 드러내는 시도들이 훨씬 더 강한 설득력을 갖추고 미국을 제외한 전 지구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다.

이 두 유형의 현대적 전쟁은 현행의 지구화를 대표하는 두 주체인 지구자본체제(golbal capital system)지구무기체제(global weapon system)가 얼마가 파괴적이고 독점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계기다. 이 두 체제는 때로는 서로 연동되기도 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특성으로 각기 지구적 통제 체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요컨대 지구화 시대의 제국은 두 가지 모델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두 제국 모델과 관련해서 주지해야 하는 것은 미국의 존재다. 이 글은 바로 이 두 제국 모델과 미국이 어떻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를 밝히려는 데 초점이 있다. 이 관계를 설명하지 않으면 오늘날 지구화의 두 가지 지배적인 추세인 지구자본체제와 지구무기체제에 의한 세계 통합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고, 그러한 메커니즘이 야기하는 절망의 구조는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여기서는 두 제국 모델의 전쟁의 정치학을 중심으로 절망의 구조를 조명해보려 한다.

 

2

 

지구자본체제는 네그리가 말한 제국처럼 경계도 없고 중심도 없으며 외부도 없는’, 탈중심적이고 탈영토적인 초국적인 자본 네트워크의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런데 이윤 추구만이 목적이자 본질인 자본의 운동은 그 자체로는 매우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이해를 조정하고 네트워크 질서를 정당화하는 장치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치가 필요하다. 미국은 바로 이 점에서 지구자본체제와 안성마춤의 콤비를 이루고 있다.

레이몽 아롱이 미국을 제국형 공화국(imperial republic)이라고 지칭한 데서 드러나듯이, 미국은 공화국인 동시에 제국이다. 일반적으로 제국과 공화국은 모순적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이 두 요소는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공화주의는 기본적으로 사익과 공익 사이의 긴장을 제도화하려는 노력의 결실이다. 이것은 더 높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부름받은 바 소명에 충실하게 살아간다는 자유주의적인 개인의 자유가 그 이상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문제인식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통해 개인의 자유가 초래할 수 있는 타락의 가능성을 제어해보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의 시각에서 개인주의를 함몰시킨 것이 아니라, 양자의 긴장을 제도화한 것이 바로 미국의 공화주의라는 얘기다.

여기서 주지해야 하는 점은 이때의 개인은 공동체적 유대와 결속의 틀에서 이탈한 개인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와 더불어 등장한 도시의 개인이고, 국가 형성 초기의 상업적 자본주의의 개인이며,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등장한 산업적 자본주의 개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지구촌 공동체의 공공성을 가로지르는 지구자본적 사익의 실체로 번역될 수 있다. 반대로 공동체는 특히 농촌공동체이며, 청교도적인 덕성과 신앙으로 무장한 결속체이다. 이것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자유로운 운동을 통제하는 국가적 공공성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의 국가 이상의 특징은 중앙집권적인 것이 아니라 연방제적이라는 것이다. 즉 앞서 말한 두 요소의 긴장, 하나가 다른 하나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공존과 상호규율의 원리가 바로 미국의 공화주의적 이상이라는 얘기다.

그리하여 미국의 연방헌법은 “‘1(군주)소수(귀족), 그리고 다수(대중)를 각각 대변한 세 권력 기관(대통령, 상원, 하원)을 상호견제와 균형의 구조 하에 공존시킨정치제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권용립) 이는 미국의 연방제도가 집중보다는 네트워크화된 권력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미국의 공화주의적 제도는 탈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강조할 것은, 이 긴장의 제도화로서의 미국 공화주의의 작동 방식은 합리적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특징이 함축되어 있다. ‘-악 이분법적 인식이 제도화의 인식론적 기조를 이루고 있고, 강한 계몽주의적 열망(선교적인 열정)이 제도화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선한 우리악한 저들을 규율하거나 제거하는 운동을 수반한다. 그리고 이는 국경 너머로까지 확대되어, 미국 외교노선의 특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공화국으로서의 미국은 동시에 제국으로서의 미국을 수반한다. 여기서 제국형 공화국이라는 표현은 미국의 존재방식에 대한 설명인 동시에, 자가발전적 추진력을 갖는 미국적 영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공화주의적 이상은 팽창주의적이며, 그런 점에서 국경 너머까지도 연방제적 네트워크 권력을 통해 규율하려는 욕망을 함축한다. 요컨대 미국적 이상은 탈영토적이다.

따라서 제국형 공화국으로서의 미국은 지구자본체제와 친화적이다. 양자는 공히 네트워크 권력을 지향하는 탈중심적 체제이며, 탐욕스런 팽창주의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탈영토적 체제인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지구자본은 지구적 통제를 위한 정치의 필요성에서 미국을 필요로 하고, 반대로 미국은 선교적(십자군적) 팽창주의 영성/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지구자본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양자의 이해관계가 꼭 부합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특히 최근 지구화를 선도하는 지구자본의 자율성이 약진한 데 비해, 미국의 통제 권력은 탈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유약해졌다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문제인식과 관련이 있다. 이른바 네오콘(신보수주의, neo-conservatism)의 등장과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의 세계 통제 전략의 맥락에서 지구무기체제라는 또 다른 유형의 제국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3

 

미국의 신보수주의(네오콘)는 레이건 행정부가 출현한 1980년대 이후 새로운 미국적 질서를 대표하는 가치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비록 네오콘의 정파적 실체는 공화당의 이념적 지형의 극우적 위상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민주당이 집권한 클링턴 행정부의 재정금융정책, 외교정책, 인종정책, 범죄대책 등 공화당과 별 차이가 없는 보수주의적 정책 기조에서 시사되듯 최근 미국의 외교 정책을 포함한 정치 일반의 전반적인 보수주의화 경향은 네오콘의 외연이 미국 정치 전체로 확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1980년대 이후 미국 사회 전체는 네오콘이 의제화한 정치적 기획에 규율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얘기다.

네오콘이 의제화한 정치란 한마디로 미국의 공화제적 전통을 근본주의적으로 계승하여 국제사회를 규율하는 능력을 최대화하려는 공화제형 제국의 이상을 말한다. 그것은 1960년대 이후의 서로 연관된 두 가지 경향에 대한 보수 우익 세력의 사상 재무장 재결집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하게 세계 경제가 활성화되고 기술의 산업화가 급진전함에 따라 소비재 산업이 빠르게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대중의 인식과 삶에 커다란 변화를 낳는다. 즉 후기 근대적 개인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베버적인 근대적 개인, 프로테스탄트적인(미국 칼빈주의적인) 소명 아래 근면 검소한 개인이 아니라, 욕망하고 소비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대중의 후기 근대적 개인화/주체화는 색의 혁명(흑인 민권운동)성의 혁명(여성운동)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규율사회의 규범을 가로지르는 각종 소수자 담론으로 이어진다.

둘째로, 이러한 소수자적 자의식은 전통에 대해 과민반응하는 반면, 자본의 후기근대적 변화에 대해서는 덜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것은 반전운동으로 대표되는 대중의 저항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미국의 공화제적 이상은 국내외적으로 부패한집단/나라를 도덕적으로 규율하기 위해 전쟁도 감수해야 한다는 십자군적 소명의식(선교사적 자의식)을 함축하고 있는데, 이러한 전통적인 자의식이 라이 학살로 대표되는 미군에 의한 베트남 양민 학살을 낳았고 미국을 폭력의 화신처럼 만들어버렸다는 성찰적 인식이 이 시기 대중의 자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후기자본주의적인 욕망의 부추김에 대해서는 거의 무방비적으로 자신을 개방하는 경향을 띤다는 것은 이와 대조된다.

바로 이러한 대중의 흐름을 타락으로 보고, 정치권의 탈냉전의 기조를 타락하고 있는 사회에 대해 무책임한 대중추수주의로 인식하는 보수주의의 반응에서 바로 신보수주의가 태동하였다. 여기에는 공화당의 극우파, 보수적 씽크탱크들, 군수산업과 항공산업, 석유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재계의 이른바 건벨트(Gunbelt) 세력 그리고 1970년대 이래 정치세력화를 기도하는 근본주이적인 복음주의적 기독교 우파 세력 등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타락한 미국을 바로잡을 수 있는 대안은 미국의 전통사상으로의 회기에 있다고 보고, 그것은 나아가 전 세계의 타락을 바로잡기 위해 미국이 지구의 보안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태도로의 회기를 포함한다. 그것은 앞서 말한 공화제형 제국의 기획을 본격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른 나라가 그 역할을 대리수행할 수는 없다. 왜냐면 미국만이 온전한 도덕적 덕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것을 자임하겠다는 선교사적 신앙으로 무장한 다른 체제는 이 세계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민적 우월의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 필요하다. 이렇게 해서 팍스-아메리카나라는 이상이 실체화되는 것이다.

전 세계의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사일방어계획(MD)이 추진되어야 하는 이유는 미국이 바로 이러한 확신으로 스스로를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방안보정책이라는 이유로 이른바 악의 축국가들을 규정하고 이들 나라들에 대한 대테러전쟁을 벌이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팍스아메리카나는 미국 공화제적 보수주의에 기반한 안보적 평화이며, 끝없이 전쟁을 일으키며 수호되는 성전적 평화다. 그런데 이것은 안보산업을 중심으로 막대한 잉여가 창출되는 평화다. 그리고 안보산업을 재생산하기 위한 전쟁이 계속적으로 요청되는 평화인 것이다.

미국의 안보산업에 의해 개발된 현재의 최첨단 무기체계에 의해 지구는 상당히 통합되어 있다. 미사일방어망 프로젝트가 현실화되면 지구사회에 대한 미국의 통제 능력은 훨씬 진일보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구무기체제는 형성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근년에 벌어진 몇 차례의 전쟁은 지구무기체제의 성립을 위한 이데올로기적이고 재정적인 배경이 되고 있다.

 

4

 

세계화의 덫을 쓴 한스 페터 마르틴과 하랄트 슈만은 지구자본의 운동이 얼마나 심각한 재앙인지를 신랄하게 고발하면서 저 유명한 ‘20 80의 사회라는 표현을 쓴다. 전반적인 지구적 궁핍화는 이렇게 급속도로 우리 앞으로 돌진해오고 있다. 그것은 동시에 각 나라별로 국가적 단위에서 처절한 투쟁을 통해 제도화된 민주주의적 장치들을 파괴하고 있다. 또 근대를 거치면서 어렵게 구현해온 삶의 질은 퇴락해가고 있다. 때로는 좀더 완만하게 때로는 좀더 급격하게. 때로는 좀더 평화적인 양, 때로는 좀더 전쟁처럼...

케빈 베일스는 지구화가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일회용 인간(disposable people)이라고 부른다. 지구적 궁핍화는 극빈층에게 더욱 극심한 존재의 파괴를 야기하고 있다는 얘기다. 삶의 질의 문제를 너머 어떤 이들에게는 존재의 해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지구무기체제는 이러한 궁핍화를 더 심하게 겪고 있는 사회에서 예방안보정책을 극단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는 안보산업의 자본축적에 유리한 지정학적 전략이 끼어들고 있음을 의문의 여지없다.

절망의 구조는 이렇게 지구자본체제와 지구무기체제의 형성과정에서 벌써 심각하게 실행되고 있다. 그런데 두 제국 모델의 형성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공히 전쟁이었다. 그것은 임의로 설정된 표본국가에 엄청난 파괴를 가져다줌으로써, 강력한 학습효과를 전 지구 사회에 주고 있다. 전쟁예감은 현행의 지구화의 덫에 모든 국가와 도시들이 자발적으로 걸려들게 하는 가장 유용한 장치임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모델의 중심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미국의 전통적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인 자신은 자국의 이러한 역할에 대대적인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는 데 있다. 여기에 미국적 애국주의의 심각성이 있다.

한데 더욱 문제는 미국적 애국주의는 미국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미 네트워크 권력화된 지구체제들은 중심-주변의 이분법으로 그 운동을 설명할 수 없는 측면이 많지만, 미국적 질서와 가치에 예속된 사회는 중심에 대한 주변부적 광기를 더욱 열정적으로 드러낸다. 예컨대 한국의 기독교 보수주의는 미국의 기독교 보수주의의 행보를 열심히 모방하는 데 열을 올린다. ‘정교분리의 원칙에 그토록 순응적이던 이들이 최근 정치세력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한데 문제는 신보수주의적 신앙관에 미국 교회들보다 더 열광적이라는 데 있다. 그들은 이들 지구체제가 얼마나 심각한 절망을 구조를 낳는지를 알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신앙 속에 내면화되는 지구화의 덫을, 그 절망의 구조를 얼마나 직시하는가? 순응의 정치학은 보수적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정당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