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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힐링을 사수하라” - ‘광신도 현상’에 대한 공공신학적 문제제기

SBS그것이알고싶다 제작진이 방영 1000회를 기념하여 엮은 책 [그것이 알고 싶다](엘릭시르, 2015)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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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을 사수하라

광신도 현상에 대한 공공신학적 문제제기

 

 

 

 

광신도들

 

아직 젊었을 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비문이 거의 없는 깔끔한 문투를 보면 필시 그는 글과 익숙한 일을 했던 사람임을 추정할 수 있다. 1940년대 태생의 남자가 글과 익숙한 일을 했다면 아마도 그는 당시로선 꽤나 엘리트층에 속했던 사람일 것 같다.

그의 아들은 목사고, 딸은 미국에서 박사를 받았다. 그리고 사위도 목사로 서울에서 제법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두 자녀와 사위의 신앙심을 의심하고 있고, 점점 갈등이 심해졌다. 그가 아직 젊은 아빠였을 때 두 자녀와 어떤 사이였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최근에는 서로 내왕도 없다는 점이다.

아내마저 집을 나갔다. 40년을 넘게 살아온 부부인데, 아내는 딸네 집에 가버렸다. 그가 아직 젊은 남편이던 시절 아내와 어떤 사이였는지 나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자녀와 남편 사이의 갈등을 그녀는 남편의 잘못 탓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아침이 되면 마치 출근하는 사람처럼 넥타이 차림의 정장에 낡은 검은색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그가 매일 아침마다 하는 일은 지하철 안에서 천국 복음을 설파하는 것이다. 이 칸 저 칸을 옮겨 다니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악한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자신이 계시 받은 복음의 비밀을 적어 놓은 A4 용지 절반 크기의, 손글씨로 양면을 빽빽하게 적은 전도지를 나눠준다.

그는 잊을 만하면 나를 찾아와 대화를 청한다. 말이 대화지, 실상은 두세 시간 동안 내내 혼자 이야기한다. 내용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에 대한 얘기로 시작하지만 금새 자녀와 사위, 그리고 아내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가끔씩은 노여움에 겨워 손을 부르르 떨고 목소리가 경련을 일으키듯 심하게 흔들린다. 어떤 핑계로 이 이상한 대화를 끝낼까 궁리하다, 혹여 저러다 쓰러지면 어떡하나 싶어 맞장구치며 그의 화를 삭이고자 하면, 그이는 생기를 얻어 반복된 얘기를 다시 시작하곤 한다. 다행히 두세 시간쯤 되면 전화가 온다. 그 벨소리는 내겐 자유와 해방의 소리다.

그가 지하철에서 천국 복음을 외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미루어 짐작컨대, 사람들은 피곤한 표정과 경멸의 표정을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가족조차 아버지를, 남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욱이 천국 복음을 전하고 다니는 그를 교회도 환대하지 않는다. 그가 존중해마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에 속하는 나 역시도 그를 불편해 하기만 한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세상은 광신도라고 부른다.

광신도’, ‘시대의 부적절한 열광적 정념의 존재라는 낙인, 그런 이들은 우리사회에서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유독 개신교에 기반을 둔 신앙 양식에서 많이 나타난다. 1999년 여름, 방송에 보도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었던 어느 비정한 아비 이야기의 주인공도 개신교 배경의 광신도다. IMF 재앙이 아직 무자비한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던 때다. 중국의 소설가 위화(余華)허삼관 매혈기처럼 한국에서도 가족을 위해 혼신을 다해 일하는 아버지의 희생 담론이 널리 퍼졌고, 그와 함께 아빠 힘내세요라는 노래가 국민동요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 시절 하느님이 고쳐줄 것이라는 종교적 맹신으로 소아암 걸린 딸의 의학적 치료를 거부한 비정한 아비 이야기는 국민적 공분의 대상이 될 만했다.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 사건들이 적잖이 있어왔어도 관심을 끌지 못했던 친권 제한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빗발쳤고, ‘종교중독(Religious Addiction)이라는 낯선 심리학 용어가 대중 사이에서 폭넓게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한국에서 광신도의 가장 대표적 예는 시한부종말론자들이다. 특히 199210280시에 신자들의 휴거(携擧, rapture)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던 이장림의 시한부 종말론은, 대선 정국을 맞아 정치적으로 잔뜩 달아올라 있던 한국사회를 또 다른 방식으로 한껏 달아오르게 했다.

그 무렵 무수한 시한부종말론 공동체들이 등장했고 여러 버전의 휴거일이 고지되었다. 하지만 repture의 번역어로 사용된 휴거라는 용어의 작명자인 이장림이 선포한 10280시는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휴거일이다. 그는 그날 그때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과 신자들의 휴거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날 전국에서 160여개 교회에 거의 1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몰려들어 고함에 가까운 찬송과 방언기도와 절규하는 몸짓들로 갈망하는 그 순간을 맞이하고자 했다. 그 교회들 주변에는 시한부종말론으로 가족이 해체되다시피 했던 이들이 모여들어 또 다른 방식으로 열정을 다해 소리를 질러댔고, 그 기이한 풍경을 씁쓸하게 바라보는 인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혹여 사고라도 날까 하여 경찰과 119대원들이 비상대기하고 있었다.

휴거는 없었다. 이장림은 사기와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하지만 시한부종말론자들은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해 그날처럼 사회를 소란스럽게 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적잖은 이들이 닥쳐올 종말의 시간을 대비하는 열광적 신앙에 빠져 있었고, 그중에는 직장도 그만두고, 학교도 때려 치고, 가출하여 휴거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도 하며, 전 재산을 헌납하는 이들도 많다.

광신도 문제로 또 다른 주목을 받은 것은 이른바 ‘JMS 사건이었다. 1999년에 언론에 처음 보도되었고 교주 정명석이 10년의 실형을 받은 2009년에 일단락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사건이다.

기독교복음선교회의 창립자이자 교주인 정명석의 영문 이니셜이 JMS. 전국 200여개 교회에 15만 명의 신자를 둔 꽤 규모 있고 조직적인 단체가 기독교복음선교회이지만, 세간에 알려진 사건은 정명석 개인의 추문에 집중되어 있으니 이를 기독교복음선교회 사건이라고 하지 않고 ‘JMS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한 것일 수 있다. 실제로 기독교복음선교회가 주류 기독교와 공유할 수 없는 몇몇 교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 단체의 15만 신자들을 광신도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은 일반적인 개신교 신자들에 보다 좀더 지적이고 엄숙주의적 면모도 갖고 있으며, 성서에 대한 신실한 태도에서도 부족하지 않다.

한데 교주인 정명석에 주목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가 마치 북한의 기쁨조같은 미모의 젊은 여성 신자들을 대동하고 다니고, 그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성적 추행을 벌여왔다는 고발이 있었다. 그가 재림 예수이니 그와 몸을 섞어야만 진정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떠벌렸다는 제보들은 그에 대한 광신적 집착이 피해자 여성들과 그녀들을 둘러싼 모임의 중심 분위기가 되지 않았다면 설명하기 어렵다. 또 교단홍보물에서 60대의 정명석이 17경기 동안 130골을 넣었고, 한 경기에서만 무려 33, 그중 5골은 12명의 골키퍼를 두고 넣은 것이라고 버젓이 떠벌리고 있는 것도 이 모임을 둘러싼 비정상적인 열정이 넘쳐나고 있다는 걸 빼고는 이해할 길이 없다.

이 단체의 15만 신자 모두가 그것을 맹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라고 해도 이 모임의 다른 많은 종교행위들이 매우 이성적인 자기 통제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것도 흥미롭다. 요컨대 세간에 알려진 JMS 사건에서 광신도 현상은 교주인 정명석과 관련된 일련의 이상행동들에서 나타난다.

 

사회현상으로서의 광신도 현상

 

어떤 것을 사회현상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것에 연루된 사람들의 집단적 행태가 그 사회와 특정한 방식으로 얽혀 있음을 주목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즉 이 글에서 광신도 문제를 광신도 현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른바 광신도들의 고립된 이상행동이 그들 자신의 내적 요소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그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표출시킨 하나의 양상이고, 그 양상이 다시 사회의 문제를 새롭게 재구조화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며, 따라서 그것의 진단과 해석, 대안 모색도 사회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논점을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광신도 현상은 사회의 문제와 어떻게 연루되었을까? 시한부종말론을 다룬 정찬의 단편소설 종이날개(정찬 소설집 아늑한 길에 수록)는 세상에서 상처받고 절망하고 발 디딜 마지막 장소까지 빼앗긴 이들의 종이날개가 바로 광신도 신앙임을 이야기한다. 세상은 모두를 성공을 향해 달려가게 하지만 그 안에서 누구나 상처받을 수 있고 누구나 실패할 수 있다. 집단적 성공의 광기를 가진 사회라는 점에서 한국은 이런 문제를 첨예하게 드러낸다.

실패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상처와 절망을 딛고 일어서고자 안간힘을 쓴다. 한데 상처의 깊이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단박에 헤어 나올 기력을 무너뜨리거나 혹은 반복된 실패로 절망이 일상화되어 무기력해진 이들은 여간해선 스스로 일어서기가 쉽지 않다. 그런 이들에겐 주위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럴 때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고 종교에서 치유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인 힐링의 체계가 작동된다면 그 사회는 건강하다. 문제는 어느 사회든 힐링의 체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데 있다. 하여 어느 사회든 체념적 절망 상황에 놓인 위기의 존재들은 상존하기 마련이다. 한데 그 정도가 훨씬 더 심각한 사회들이 있다. 바로 한국이 그런 심각한 위기의 사회에 속한다.

상처와 절망에 빠진 이들이 회생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면 그이들은 어디로 가는가? 1950년대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마지막 발 디딜 곳까지 유실된 사회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1950년대 한국은, 이전과는 달리 더 이상 세계의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전쟁이 터지자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UN 평화유지군이 참전했을 뿐 아니라, 그것 못지않게 빠르게 국제구호단체와 기금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당시 전 세계에서 구호관련 최고의 전문가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 기금과 단체들, 전문가들의 거의 절반 이상이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었다.

요컨대 한국사회가 존재의 안전을 서포트하는 사회적 기능이 철저히 무너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기독교는 전대미문의 기회를 맞았다. 그런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사회적 실체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하여 구원의 종교임을 소리 높여 주장했던 기독교가 진짜로 사회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구원의 종교로 떠올랐던 것이다.

1950년대 시인 박인환은 교회에 관한 시 한 편을 남겼다. 그런데 그 시, 영원한 안식일에서 그는 교회가 날개 잃은 여신이 되어버린 현실을 절망적으로 바라본다. 사람들은 철형의 시간을 보내며 절룩거리며 교회를 찾지만, 정작 교회는 그 질박한 위기를 벗어날 다음 날의 비밀을 이야기 하지 못한다. 해서 그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은 복음도 없이 기도도 없이교회를 떠나간다.

이념투쟁에 한창이던 증오의 종교, 그 장소인 교회는 당시 압도적으로 유리한 치유의 장소였지만 여전히 반공투사로서, 증오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그 결과 절박한 고통에 빠진 이들에게 교회는 이렇다 할 복음(福音)을 나눠줄 수 없다. 바로 그런 상황, 박인한의 시에서 말하는 주검의 일요일이 일요일 교회 풍경이었다.

바로 그때에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된 기독교적 신앙 운동이 일어났다. 이른바 (기독교에 기반을 둔) 대중적 신비주의 운동이 활화산처럼 일어난 것이다. 나운몽, 박태선으로 대표되는 이들 대중신비주의 신앙의 지도자들에게로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딱히 신앙을 갖고 있지 않던 이들도 몰려왔다. 그곳에서는 병자들의 치유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하여 한국에 전래된 지 반세기가 넘은 개신교보다 1953년 등장한 이들 신흥종교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수는 불과 몇 달 사이에 개신교 교세를 압도했다.

그러나 그 숫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 대중신비주의 신앙에 참여한 이들은 하나같이 상처 입고 절망하여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절박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박태선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외쳐댔고, 나운몽은 근본주의적 기독교도들이 경기(驚氣)를 일으키는 종교다원주의자였다. 말할 것도 없이 개신교는 곧 이들을 향한 공격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1955년은 그런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였다. 이때 개신교가 수집한 이들 대중신비주의 신자들의 모습은 광신자 바로 그것이었다. 규모에선 소수종교였지만, 여러 개의 언론사, 출판사, 방송국, 학교 등을 소유하며 당시 시민사회에서 가장 막강한 의제 형성 능력을 갖고 있던 개신교의 담론 능력은 놀라웠다. 얼마 되지 않아서 이들 대중신비주의 현상은 광신도 신앙으로 해석되었고, 시민사회는 이 현상에서 경청해야 할 아무런 내용도 찾지 못했고 오직 위험하고 불경한 것만을 떠올렸다.

1950년대와 유사한 현상이 1990년대에도 있었다. 물론 1950년대처럼 대중이 발 디딜 곳 하나 없을 만큼 전체 사회가 몰락의 지경에 있지는 않았다. 아니 그 반대다. 근대 이후 한국사회가 가장 활력 있게 조직되고 가장 풍요로움을 향유하던 때였다. 한데 그 풍요와 활력이 최고조에 있을 무렵인 1992년 시한부종말론이 사회를 요동시켰다. 그때 그이들 대다수는 깊은 외상에 좌절한 자들이었다.

사회는 전례 없이 활력 있고 풍요로웠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절망에 빠진 채 종이날개라도 붙잡고자 했다. 최고의 성장을 구가하고 있던, 하여 성공의 단꿈에 빠져 있던 개신교는 절망에 빠진 이들을 구원하는 데 무관심했다. 바로 그런 이들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이장림 같은 이의 시한부종말론, 그 정해진 임박한 종말의 시간에 단박에 절대적인 구원의 선물이 제공된다는 휴거의 메시지가 너무나 유혹적인 목소리로 다가갔다.

한편 JMS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JMS가 가장 먼저 주목했던 이들은 대학생, 그것도 명문대생들이었다. 이 단체가 다가간 방식도 대개 스포츠동아리나 댄스동아리 같은 비종교적이고 사교(私交)적인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친밀성에 기초한 끈적한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JMS식 종말론에 빠져든다. 대중신비주의와는 달리, 다분히 밀의적이고 지적인 신비주의에 가까운 신앙에 지적인 청년들이 흡인되었다.

그 무렵 대학가를 휘몰아친 민주화를 향한 열정도 다분히 밀의적이고 지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청년들의 환호의 성격을 지녔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과학이라고 주장했는데, 기성사회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해서 그 과학은 자신들만이 전유한 밀의적 지식이었다. 한편 복음주의적 기독교 청년들의 열정을 불태우게 했던 것도 밀의적이며 지적인 신앙이었다. 가령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신앙동아리들(네비게이토, UBF 같은)이 대학생들의 열광적 동조를 불러일으켰는데, 이들의 제자훈련은 밀의적 지식으로 제자를 훈육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1960년 한국에서 퍼져나가기 시작한 이른바 구원파 운동의 한 방계 흐름이 바로 제자훈련을 주창한 신앙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JMS, 대중신비주의적 신앙양식의 광신도 신앙과는 다른 계보, 곧 밀의적이고 지적인 신비주의 신앙 계보에 자리잡고 있는, 또 다른 광신적 신앙이다.(JMS 앞에는 청년시절의 그를 매혹시켰던 문선명이 있고, 문선명 앞에는 스웨덴 출신의 엘리트 신비주의자 스웨덴 보리에 영향받은 1920,30년대 북한 지역의 지적 신비가들이 있다.) 청년들이 기성세대의 세계에 적응하기보다 변혁의 열정에 몰입하고 있을 때, 특히 그 변혁적 열정의 경사가 너무 깊어 세상과 급격한 단절을 갈망했던 이들에게 이런 밀의적이고 지적인 신비주의 신앙은 강렬한 호소력을 지녔다.

아무튼 대중적이든 밀의적이든 신비주의 신앙 현상은 사회가 품을 수 없는 외상으로 깊은 절망에 빠져든 이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신앙 양식이었다. 기독교는 영혼의 상처보다 사회적 상처에 밀접히 개입되어 있는 종교로서 한국사회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런 사회적 상처에 깊게 흠집이 파인 이들이 개신교회가 아닌, 개신교계 신비주의적 신흥종파에 휩쓸리게 되자 강한 공격성을 드러냈다. 1950년대에 그랬듯이 말이다.

, 이제 이들이 광신도로 낙인찍히는 시간이 되었다. 1950년대에 비해 1990년대 한국사회는 교육계, 언론계, 문화계 구석구석까지 기독교적 해석체계가 훨씬 더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심지어 일부 종교학자들이 수많은 종교들이 개신교화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로 개신교의 영향력은 막대했다. 개신교가 나서서 교리를 문제시하고 싸우기 이전에 사회는 광신도들의 발흥에 불편해했다.

문제는 그 현상을 읽고 분석하고 대안을 생각하기 이전에 광신도라는 낙인이 먼저 찍혔다는 데 있다. 이 낙인찍기는 광신도와 시민사회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한없이 벌려 놓는다. 하여 시민사회는 광신도를 바라볼 때 자신들은 이미 그들과는 무관한 자로서 대한다. 이때 시민사회는 처벌하는 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 사회의 구조화된 시스템 속에서 표출된 절박한 외상을 치료하고 치유할 보건의료체계의 부재를 떠올리기보다는 광신도들의 이상행동에 주목하고 그들을 처벌하는 것이다.

정찬의 소설 종이날개가 시사하고 있듯이, 절망에 빠진 이들이 종이날개라도 붙잡으려 하는데 교회와 시민사회는 그이들의 절망을 보기보다는 종이날개의 부적절함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하여 1990년대에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시한부종말론자들, 신앙을 이유로 하여 자녀의 질병 치료를 거부한 부모들, 성추행을 일삼은 교주의 패덕 등의 사건은 2천 년대에 들어와 사회적 상처의 희생자들을 치료하고 치유하는 사회적 제도나 담론을 만들어내는 데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 아니 사회는 1990년대보다 훨씬 더 깊고 넓게 사회적 상처를 도지게 하고 있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외상자들의 치료와 치유에 거의 아무런 관심이 없게 하였다. 광신도 문제를 사회현상으로 보는 데 실패한 또 한 번의 오류의 기록이 지금 여기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불행하고 가학적인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힐링을 사수하라

 

종교가 본원적인 힐링에 무관심한 사이에 그것은 자본에 전유되었다. 힐링은 산업의 항목이 되었고, 심지어 미래성장동력의 하나로까지 주목되었다. 힐링 산업은 상처 입고 절망하며 발 디딜 터를 찾는 이를 치유할 때 그이가 자산능력이 있는지를 먼저 살핀다. 그것은 수혜가 아니라 지불한 비용에 대한 서비스인 것이다. 힐링은 그렇게 서비스 상품으로 변모되었다.

21세기 한국사회는 이렇게 종교가 핵심적 요소인 힐링을 실천하고 해석하는 데 무능력한 사회가 되었다. 사회는 그만큼 비정해졌고, 상처 입은 이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해서 종교의 잃어버린 것의 회복이 어느 때보다 절박하게 요청되는 시기가 바로 오늘이다. 1950년대와 1990년대의 실패를 반추하며 힐링을 되찾아오려는, 아니 힐링의 본원적 의미를 회복하려는 데 힘을 쏟아야 할 시대를 오늘 우리는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공공적인 힐링의 제도화에 대한 사회적 요청이다. 상처 입고 절망하며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이들에게 대가 없는 은혜가 나누어지는 것, 그런 제도들의 구축을 향한 사회적 바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