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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급진적 자유주이자들 - 요한복음]에 관한 서평들

이 책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기획한 <네 복음서와의 낯선 여행 시리즈>의 제1권으로 동연출판사에서 2009년 12월 15일에 출간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책에 관해서 글을 써 주셨습니다. 제 책보다 더 훌륭한 글들입니다. 써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한겨레신문] 이세영 기자가 글(2010.1.7) <요한복음, 전복성 담은 불온문서였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97592.html

- [뉴스앤조이] 유연석 기자의 글(2010.1.24)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의 책 요한복음 - 요한복음 속에 담긴 신랄한 비판 정신으로 예수 되읽기>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547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우리신학연구소 박영대 소장의 글(2010.2.24) <스승을 모시는 보람>
http://www.nahnews.net/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3135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게재된 김신식의 글(2010.7.19) <고통을 거래하는 자들에게 던지는 일갈>
http://www.nah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824

- [기독교사상] 2010년 8월호의 손석춘 원장(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글 <'주류'에 맞선 사람들의 계명>
이 글은 웹사이트로 읽을 수 없기에 아래에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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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주류에 맞선 사람들의 계명

 

_손석춘(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주류 콤플렉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류에 편입되거나 주류처럼 보여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이른다.

 

주류의 사전적 풀이를 짚어보면 뜻이 더 또렷해진다. 흔히 주류는 강물의 큰 흐름을 뜻한다. 하지만 사상이나 학술의 주된 경향이나 갈래를 뜻하기도 하고 조직이나 단체의 내부에서 다수파를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주류보다 메인스트림’(mainstream)이라는 영어를 즐겨 쓰는 이도 있다. 세계화 시대에 주류가 영어인 현실에서 본다면 주류보다 메인스트림으로 쓰는 게 더 주류 콤플렉스에 어울릴까.

 

비단 정치 영역만이 아니다. 학술이나 종교에서 주류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찾기란 더 어렵다. 그래서다. 주류이길 당당하게 거부해온 신학자이자 목사 김진호의 책은 언제나 눈길을 모은다. 그가 최근 펴낸 <급진적 자유주의자들>도 우리 종교 현실과 정치현실을 바라보는 데 신선한 통찰을 준다.

 

목사답지 못한 목사김진호는 주류가 형성해온 대형교회 중심의 질서에 맞서 예수의 참모습을 지며리 형상화해왔다. 그에게 책을 쓰는 일은 스스로 밝혔듯이 목사 짓이다. 김진호는 비단 역사적 예수의 탐색에 그치지 않았다. 역사적 예수와 지금 여기의 현실을 늘 함께 고심해왔다.

 

두루 알다시피 김 목사는 민중신학의 길을 연 고 안병무의 제자다.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은 안병무의 강의실에서 수강하던 20대의 김진호가 언젠가 쓰고 싶었던 주제였다. 스승의 강의를 꼼꼼하게 필기해놓은 공책을 뒤적이며 사색에 잠겼을 지은이의 순수하고 진지한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이 책의 출발점도 김 목사가 신학을 공부한 한신대 신학대학원의 장공도서관 들머리에 새겨진 <요한복음>의 한 구절이다.

 

호 로고스 싸륵스 에게네토”(그 로고스가 싸륵스가 되었다).

 

지은이는 스승 안병무의 가르침에 따라 육화의 진실을 탐구한다. <요한복음> 114절의 말씀이 육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구절에서 ’()의 그리스어 원문이 싸륵스임을 주목한다.

 

본디 그리스어에서 육은 소마싸륵스가 있다. “소마는 미화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 육체/존재를 가리킨다. 예컨대 영웅의 몸, 예언자 등의 몸과 같은 것이다.” 반면에 싸륵스는 /승화된 혹은 성/승화 가능성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철저히 세속화된 몸이다. “어떤 아름다운 말로 치장해도 결국은 드러나고 마는 적나라함 그 자체다.” 그래서다. 지은이는 소마는 몸으로, 싸륵스는 살덩이로 옮긴다.

 

결국 말씀이 육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고갱이는 로고스가 살덩이가 되었다는 데 있다. 지은이는 그 뜻을 찬찬히 짚는다. “어떤 영웅인들, 어떤 위대한 예언자인들 그 속이 곪아터지지 않은 육체를 갖고 있으랴. 다만 그 시대의 언어가 그렇지 않은 듯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살덩이현실에 대한 냉혹한 평가를 전제한 존재의 실체적 모습일 수 있다. 그래서 이상화된 궁극인 로고스와 결코 이상화될 수 없는 현실의 존재인 살덩이(싸륵스)’ 사이에는 공유점이 전혀 없다. 그런데 그 로고스가 싸륵스가 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이제 로고스는 싸륵스를 통하지 않으면 실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교회가 다른 길을 선택한 데 있다. 싸륵스가 아닌 소마의 길을 걸었다.

 

장로와 예언자와 감독과 교사 등, 지도자들은 승화된 육체였다. 그렇게 믿었다. 궁극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에서 파생된 무엇이라는 일종의 잠재적/예비적 궁극이었다. 그렇기에 분쟁이 있을 때 교회는 분쟁의 조정자가 될 수 있었고, 지도자들은 갈등의 해결사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재판관이었다. 옳고 그름을 판별한 예비적인 거룩한 몸이었다. 신이 덧입혀짐으로써 그 육체가 예비적인 거룩의 몸이 된 것이다.”

 

육화는 소마가 아니라 싸륵스, 몸이 아니라 살덩이임을 강조하는 이 책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다. 그들은 목사나 장로일 수도, 예언자일 수도 또는 선민의식으로 가득한 엘리트주의자일 수도 있다. 기독교 내부에서 그런 사고에 익숙한 성직자나 신자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기독교 정치인 가운데도 많다. 미국의 전 대통령 조지 부시가, 대한민국의 현 대통령 이명박 장로가 대표적 보기 아닌가.

 

기실 많은 이들에게 기독교는 배타주의 종교로 다가왔다. 하지만 지은이에게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요한복음>이 그 증거다. 지은이는 자신이 <요한복음>을 주목해 책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최근의 유대교 연구자들에 따르면 1세기말(90년 어간), 그러니까 제가 요한복음을 주목하는 바로 그 시기의 유대교 내에는 심상치 않은 변화의 조짐이 있었습니다. 제 책에서 강조한 성전 이후의 유대교의 강도 높은 정체성 형성 과정이 이 시기에 팔레스티나의 얌니아에서 시도되었고, 그것이 각처의 유대교 회당에서 정체성에 관한 논쟁의 화두가 되었던 것이지요. 이때 예수도당이 회당에서 쫓겨나게 되고, 새로운 종교적 실체로서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역사 속에 이름을 새기게 된 것입니다. 이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라는 두 개의 종교적 실체가 출범합니다. 이 둘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그런 점에서 다분히 서로 적대적이지만 같은 방식의 발전 프로그램을 가졌지요. 특히 교회는 회당을 벤치마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 공동체가 보기에 그것은 또 다른 유대교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지은이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바울을 평가하는 맥락도 같다.

 

바울의 몸의 신학은 에베소서나 골로새서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몸의 정치, 곧 교회의 정치신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 제 용어에 의하면, ‘바울식의 몸의 정치는 보편주의적이면서도 공동체주의적인 요소가 동시에 함축된 신학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것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보편주의와 배타주의가 결합된 형식이었지요. 저는 요한의 영의 정치를 이것과 대립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영의 정치는 보편주의에 대항합니다. 그것은 위장된 보편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배제된 이들의 입을 봉쇄함으로써만 보편이 가능한 담론적 틀이라는 것이지요. 요한은 바울의 몸, 곧 소마, 성화 가능성에 열린, 존재들의 보편주의, 그 공동체적 보편주의를 비판하면서, 사륵스라는 다른 몸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지은이는 왜 요한복음 공동체를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명명했을까.

 

사륵스는 배제된 몸이고, 그리 하여 성화 가능성에서 차단된 몸입니다. 사륵스는 현실의 담론에서는 결코 보편적 가치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런 몸을 예수의 몸과 동일시하면서 요한은 모든 계산 가능성에서 분리된, 다른 사고의 개입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영이지요. 도덕적 삶, 지식, 품격, 어느 면으로 보아도 숭고할 수 없는 그이들이 숭고한 것은 영의 영역, 계산 불가능한 시간의 도래를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급진적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한 것은 그런 맥락입니다. 규범적 질서의 외부에서 구원 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공동체적인 배타주의가 보편주의와 결합된 세계에서, 그 외부를 상상하는 태도, 그 급진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은이는 교회가 바울의 해석을 발전시켜 교회의 신학으로 일궈내면서, 요한의 영의 정치를 제거했다고 비판한다. 영은 체제내로 포섭되었고, 그럴 경우에만 영은 영이 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령이 되는 해석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요한식 영의 정치를 희생시킴으로써 교회는 제국의 질서 내로 진입할 수 있었고, 나아가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의 영의 정치, 그 급진적 자유주의는 결코 모든 것은 아니지만, 복원되어야 할 것, 교회에 순응하는 영이 아닌 영으로서 교회를 비판하고 사회를 비판하는 것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제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다. 지은이는 자신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믿거나 다른 이들의 중계자임을 자부하는 이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바로 그 논리가 타자를 배척하고 예수를 죽이게 했다고 고발한다. 기독교에서 도도하게 세를 형성해온 주류에 맞서 지은이가 주저 없이 날을 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실 기독교 주류가 근대 이후 세계를 복음화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대지를 얼마나 피로 물들여 왔는가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아니, 비단 과거만이 아니다. 미국의 독실한 기독교인 조지 부시는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옹근 8년 동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략해 들어갔다. 수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전쟁은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라크에서도 지금 이 순간 진행형이다.

 

조지 부시는 비단 전쟁만 숭앙한 게 아니다. 신자유주의를 배타적으로 신봉했다. 하지만 어떤가. 그 결과는 참담했다. 미국 사회 내부의 부익부빈익빈에 그치지 않았다. 조지 부시의 임기 말인 20089월에 터져 나온 월스트리트의 금융 위기는 세계 경제를 뒤흔들며 지구 곳곳의 민중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조지 부시는 아침마다 성경을 읽었다. 물론, 부시는 미국 유권자로부터 서릿발 심판을 받았다. 공화당은 정권을 잃고 미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흑인인 버락 오바마가 집권했다. 하지만 미국의 주류마저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미국 밖에서 주류는 여전히 강력하다.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조지 부시 못지않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명박 장로는 청와대와 내각 구성에서도 기독교를 중시했다. ‘소망교회는 이명박 정부 아래서 주류를 상징하는 코드가 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조지 부시를 고스란히 답습하는 모습은 개탄스럽다.

 

그런데 지은이는 <요한복음>에 근거해서 예수는 선한 왕이 되어 악한 왕을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사랑의 정치를 신뢰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오히려 예수는 제자의 발을 씻겨주는 존재. “권력으로 행하는 사랑이 아니라 낮아져서 사랑을 행하는존재다. 예수가 제시한 새 계명의 고갱이도 위로부터의 사랑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사랑이다.

 

문제는 예수 이후다. 예수의 제자들을 상징적 중심으로 받들며 그들의 법통을 잇고 있다고 무람없이 자처한 교회들은 제의를 제도화하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위계적 직위를 만들었다. 그래서다. “목사답지 않은 목사김진호는 이 대목에서 통렬하게 쓴다. “유다만이 길을 잘못 간 것이 아니다.” 김진호 다운 절창이다.

 

지은이는 길을 잘못 간수많은 유다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들려준다. “차라리 너희들이 소경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을하지만 너희들이 우리는 확실히 본다고 주장하니, 바로 그 사실이 너희들에게 저주의 흔적이로다.”

 

이어 예수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던 한 거렁뱅이에게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 대목을 중시한다. 결국 이 책의 궁극적 제안은 지은이가 요한복음 여행을 마치며 쓴 마지막 장에 간결하게 압축되어 있다. “누구든 예수를 직접 보라가 그것이다.

 

강렬한 호소다. 다만 이 책에서 굳이 아쉬움을 찾는다면, 바로 그 호소에서 비롯된다. 지은이가 스승 안병무와 함께 읽어낸 예수와 요한공동체 사람들을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이라는 틀로 묶는 게 과연 정당할까.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최근의 이념이지만, 2000년 전 예수와 그의 참 제자들이 걸었던 길에 견주어 아무래도 낡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과연 나만의 생각일까. 가령 주류에 맞서, ‘장로 대통령에 맞서, 직접민주주의의 촛불을 들었던 저 아름다운 불꽃들 속에서 예수를 직접 만날 수는 없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급진적 자유주의자보다는 다른 호명이 더 적실하지 않을까.

 

그래서다. 요한공동체의 사람들처럼 주류에 맞서 길을 걸어온 목사답지 않은 목사김진호의 다음 책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