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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개념지도로 민중신학을 그리기, 재밌고 깊다 - 최형묵의 《민중신학 개념지도》(동연 2023)에 대한 단상

[종교와 평화](2023 12)에 실린 최형묵의 [민중신학의 개념지도]에 대한 서평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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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지도로 민중신학을 그리기, 재밌고 깊다

최형묵의 민중신학 개념지도(동연 2023)에 대한 단상

 

 

1996년 창립 이래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개설해왔던 강좌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 가장 많은 수강자가 참여했던 강좌가 어느 것인지는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직으로 재직했던 2018년까지 나는 연구소의 거의 모든 강좌의 기획자였고 그 이후 강좌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데, 지난해 최형묵 선생이 강의자로 진행했던 민중신학 개념지도가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강좌의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이 책은 그 강의원고를 다듬어서 펴낸 것이다. 강의원고가 책으로 나오기까지 불과 1년도 걸리지 않았다니 놀랍다. 더구나 지난해 그는 역대급으로 살인적 스캐즐에 시달렸다. 올해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다. 필시 강의원고의 완성도가 매우 높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실제로 강의 순서나 내용이 책에 대체로 그대로 반영되었다.

온라인 강좌였다. 우리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대면수업보다는 대화가 훨씬 어렵다. 게다가 뒤풀이가 없기에 강의자와 수강자의 격의 없는 친밀한 관계 형성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강좌는 상반기 4회를 마치고 무려 5개월이 지나서 하반기 4회가 진행되었다. 근데도 상반기 수강자의 이탈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수강자에게 만족도가 높은 강좌였다.

원고의 탄탄함이 중요한 이유였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강의 컨셉에 주목하려 한다. 그것이 높은 만족도의 또 다른 주요 요소라고 보기 때문이다. 컨셉이란, 강의 제목에도 명시되어 있는 바, ‘개념지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도라는 것은 공간적 인식의 장치로, 넓은 안목으로 주변의 다른 것들과의 연관성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마치 드론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육안으로 보았거나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것 이상의 광경을 볼 수 있듯이 말이다.

한데 지도가 보여주는 공간화가 물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인식의 공간도 지도로 나타낼 수 있다. 가령 요즘 유행하는 MBTI식 성향표식은, 단지 4개 영문 철자들의 나열이 아니다. 그 속에는 그 철자들 각각에서 연상되는 그 사람의 말과 행위의 특성이 얽혀 있다. 나아가 이 철자들은 그 말과 행위에 관한 사람들의 해석에도 영향을 미친다. 간혹 그 말과 행위가, 그것에 관한 사람들의 해석을 매개로,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때 MBTI4개의 철자 속에는 그가 어떤 것들에 영향을 받았고 어떻게 주변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관한 해석의 단서가 함축되어 있다. 즉 그 철자들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이는 굳이 지도를 그리지 않아도 상상 속에서 그 영향관계를 시각화하고 있다. 해서 이 4개 철자의 나열 속에는 이미 상상의 개념지도가 그려져 있다.

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강좌 기획자들은 민중신학을 개념지도로 이야기해보자는 야심찬 생각의 실험을 도모했다. 기획자들은 그렇게 하면 대중적인 강좌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던 것이겠다. 플라톤이래 시각성이 가장 중요한 감각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오늘에 이를수록 시각적인 것의 중요성이 점점 더 첨예해지고 있으니 개념을 시각화하는 개념지도 컨셉은 틀림없이 대중을 끌어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나는 개념지도가 대중적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그 강의를 했다면 상반기 수강자들 다수는 하반기 수강을 포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면 시각의 헤게모니가 교란되고 있는 시대라는 관점에서 오늘 여기를 바라보고자 하는 내가 그 강의를 맡았다면, 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난해한 개념지도 담론 속으로 사람들을 억지도 끌고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기획자들은 최형묵을 섭외했다. 그리고 그것은 주효했다. 그는 개념지도 컨셉으로 민중신학의 주요 개념들의 개략적인 그림을 심상 속에 그릴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은 것은, 그는 개념지도라는 새로운 컨셉의 강의를 맡았지만 전면적으로 새롭게 내용을 구성할 필요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개념지도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뿐 이미 민중신학은 처음부터 개념을 공간화시킨 담론을 구사해왔기 때문이다. 가령 민중신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서남동은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으로부터 하부구조 대 상부구조라는 건축학적 은유를 빌려와서 계시를 재해석한다. 이때 그가 제기한 용어가 계시의 하부구조. 평소 최형묵은 서남동 신학을 이 개념을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한데 이 책에서는 더 나아가서 민중신학적 방법의 핵심중 하나가 바로 계시의 하부구조라고 보고 있다.

암튼 이제까지 신학에서 계시는 신의 의지의 산물이었다. 신은 시간성과 장소성을 초월한 존재다. 한데 서남동의 계시는 사회적인 고통의 체계라는 하부구조를 읽어내야 비로소 해독되는 것이다.

최형묵은 이 강의원고 혹은 이 책에서 민중신학을 네 개의 범주로 나누었다.(‘서설’, ‘방법’, ‘내용’, ‘전망’) 첫째 범주에서는 증언개념을 다루고 있는데, 민중신학을 한마디로 정의내리자면 ‘(민중을) 증언하는 신학이라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둘째 범주는 민중신학을 한다는 것은 이런 방법의 신학하기라는 것이라는 논지를 담고 있다. ‘두 이야기의 합류계시의 하부구조개념이 방법으로서의 민중신학의 요체다. 셋째 내용 범주에서는 ’, ‘민중메시아’ ‘살림그리고 민중사건과 교회개념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전망범주에서는 민중신학의 계보학을 논하면서, 1,2,3세대 이후, 오늘의 민중신학이 담아낼 문제의식이 제기되어야 할 필요성을 논한다.

각각의 개념들은, ‘계시의 하부구조개념처럼, 통례적인 신학적인 개념들이 신 중심적 서술에 치중한 것과는 달리, 사회역사적 요소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고, 그것을 통해 민중의 고통을 구조화하는 사회적 체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신학적 문제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각각의 개념들은 사회적 장 속에서 공간화시켜 설명되고 있다.

한데 개념이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즉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맥락과 상호작용하면서 끊임없이 보완되고 수정되며 재구축되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용어가 개념이라는 명칭으로 불릴 자격을 얻는다. 만약 한때 그렇게 끝없이 재구축되었던 담론이 어느 순간부터 고착화된 어떤 함의를 고집하게 되면 그것은 죽은 담론이 된다. 그런 것을 가리키는 적절한 용어는 도그마. 더 이상 개념은 아닌 것이다. 개념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편의상 분류한 4개 범주는 개념지도의 서술방법으로 적합할까. 각 범주의 명칭을 두고 길게 깊이 있는 토론이 필요하다. 이 분류법이 개념의 재구축에 적합한 분류인지 아니면 도그마식 분류인지를 두고 말이다. 만약 후자의 요소가 강하다면, 그것이 한 손에 민중신학의 전모가 간명하게 조망할 수 있게 한다고 하더라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빠르게 책을 검토한 나로서는, 더구나 저자와 제3의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지 않은 채, 그것이 어떤지를 평가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마지막 한 가지를 더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민중신학의 계보학이라는 개념에 관한 것이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개념은 사회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의 설명이 필요하다. 단순화시키면 전자는 개념의 공간화적 서술이고 후자는 시간화적 서술이다. ‘개념사전이라는 용어는 개념의 공간화를 통해 조망하는 작업이다. 한편 시간화 문제는 개념사 연구가 필요하다. 한데 계보학이라는 주제는 아무리보아도 개념사적 접근이다.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계보를 최형묵 선생은 일찍이 신학연구자가 아니라 신학하는 경향의 분류법임을 명쾌하게 논한 바 있다. 한데 그 경향을 분류할 때 각기 그 경향이 자리잡았던 시간적 맥락을 준거로 삼았다. 구체적으로 1970년대,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적 상황이 각각 1세대, 2세대, 3세대적 신학 경향과 연관성이 있음을 이야기했던, 해서 각 세대 간에는 경향에 있어서 연속성과 차이가 노정되고 있음을 논하는 개념적 서술을 계보학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계보학은 개념사적 논의라고 하는 게 적합하다.

이 점에 대해서도 저자에게 물을 필요가 있다. 그는 왜 이제까지 개념사적 방식으로 다루어졌던 것을 개념지도의 틀 속에서 다루었는지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해석은 시간의 공간화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계보학적 논의를 처음 편 이가 바로 최형묵이었고, 그때 그가 폈던 논의 방식은 개념사적인 것이었다. 근데 그가 이 책에서는 그것을 다시 공간화의 서술로 전환시켰다. 어떤 의도일까. 또 그 의도는 성공적인 문제제기라고 평할 수 있을까. 굳이 내가 상상하자면, 과거에 시간의 흐름에 주목해서 게보학을 논할 때는 그 시대의 공간들이 평평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서 보니 공간은 굴절되어 있고 비틀어져 있으며 포개져 있다는 포스트유클리트적 기하학의 문제의식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공간 인식의 변화가 개념사적 설명을 크게 손대지 않으면서도 개념지도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인지 혹은 다른 깊은 뜻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이 책은, 책의 머리글에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한 손에 쥐고 보는 민중신학의 안내서로서 적합해보인다. 강의의 수강자들이 그렇게 느낀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 개념지도라는 컨셉은 유용하다. 한편 내가 편 억지 문제제기처럼, 개념지도는 육안으로 보거나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인식의 발견을 위해서도 필요한 장치다. 한데 그것이 이 책에 얼마나 드러나 있는지는 토론이 필요하다. 그런 공론의 장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요즘의 출판 환경에서 인문학 토론 자리가 마련되기는 쉽지 않겠다. 더구나 신학적 대화의 장은 거의 어려운 사정이다. 그러니 조만간에 저자와 차 한 잔 마시며 묻는 시간이라도 만들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