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교수신문] 246(2002년 10월 21일)에 실린 칼럼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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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왜 대중의 사유를 통제하려 드는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예수는 신화다》를 간행한 동아일보사의 반기독교적 행위를 규탄하고, 출판 철회 및 책의 회수를 촉구할 때까지도 나는 한 편의 어처구니없는 코미디를 보듯 했다. 때맞춰 《국민일보》는 연일 이 책에 대한 비판의 글을 기획하여 실었다. 그러나 그 글들 대부분은 이 책의 선정주의만큼이나 감정적 반격에 몰입한 듯했다. 어떤 기자는 내게, 저렇게 흥분하니 그들의 느낌에 더욱 멀어지게 되더라는 관전평을 전해주었다. 실제로 대다수 매체는 이 문제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표명하지 않았다. 또 내 주변의 사람들 다수는 이러한 보수주의 기독교계의 과잉 대응에 대해 오히려 거부감을 표현했다.
물론 이 책에 대한 좀더 침착한 문제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가 신화다’라는 센세이셔널리즘에 대한 ‘예수는 역사다’라는 단순 논리적 반격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논거가 충실하다고 좋은 논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기기 위한 게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기려는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승부는 잘 결정되지 않는 법이다. 논쟁이란 당사자 간의 쉽게 소통될 수 없는 상충적인 언어 지평의 장애 때문에 상대방의 논거에 대해 쉽게 수긍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보기엔 상대방의 언어에 접근하려는 특별한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모든 논쟁은 실패할 운명에 있다.
아무튼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내가 아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냉소’ 이상의 느낌을 갖지 않았다. 한데, 자신들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설득시키지 못하는 기독교 측의 서투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사는 책을 절판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거의 대부분의 매체가 침묵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었으며, 그러는 가운데 책의 판매량이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면, 이 문제제기는 사회적 의제화에 실패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이것은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뉴스엔죠이》에 절판 결정 기사가 오른 후 독자의 반응은 한결같이 ‘경악’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들의 분석은, 내가 보기엔, ‘놀랍게도’ 정곡을 집고 있었다. 요컨대 동아일보사는 보수주의적 기독교계와의 ‘묵시적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석은 놀라운 일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상식에 속하는 것일 게다.
한데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보수주의적 세력 간의 묵시적 동맹이라는 사회적 상식이 어쨌다느니 하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이러한 은밀한 거래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재화의 이상적인 생산과 유통에 중대한 굴절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 이 사태에서 여실히 드러나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문화적 재화란 담론이 문화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어떤 말이 사회 속에서 유통되는 과정에서 특정한 사회문화적인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성 표현을 둘러싼 금기와 자유의 논쟁의 핵이었던 마광수나 장정일의 책은 보수적 시민사회와의 묵시적 동맹을 유지하려는 국가에 의해 생산과 유통이 억제되었다. 그것은 대중이 이 책들과의 대화를 통해 성에 관한 전통적인 사회문화적 의미를 넘어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보수주의적 시민사회의 의지를 국가가 대변한 결과인 것이다. 많은 여성주의자들은 이 책들이 성을 성기 중심의 남성적 시선으로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를 모르지 않았음에도 국가의 성 담론의 통제에 대해서 강력히 문제를 제기했었다. 왜냐하면 문화적 재화를 통제하는 권력보다 더 심각하게 대중의 인식을 황폐하게 만드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바로 같은 맥락에서 《예수는 신화다》가 우리 시대의 사회문화적 담론화의 촉매제가 될 여지를 원천봉쇄하려는 권력의 카르텔은 이 책에 의해 수행된 특정 이미지 과잉의 문제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나는 본다. 근대 학문으로서 예수 연구가 시작된 이래 ‘역사 대 신화’라는 이항대립적 예수 이미지 논쟁은 예수를 역사적 이미지로서 혹은 신화적 이미지로서 묘사했던 예수 공동체가 예수와 나눈 시공간적인 대화를 은폐해왔다. 그리고 그 대화의 전제인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캐묻지 않았다. 고작 영지주의적 신화론자 대 교회주의적 역사론자라는 천박한 도식이 양자의 공유지점이자 삶의 현장 이해인 것은 이러한 근대 예수 논의의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당을 넘어서 삶의 절절함이 깃든 일상의 현장에서 예수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 다시 붐을 일으키고 있는 예수 연구의 새로운 깨달음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신화다》라는 대수롭지 않은 책은 실제로 엄청나게 팔렸다. 그러나 그 책의 대단한 판매실적은 권력의 카르텔에 의해 통념화된 예수 이미지에 대한 대중의 문제의식을 반영한다. 그 문제의식은 건강한 논쟁의 장 위에서 토론할 권리를 가질 때, 성찰적으로 다듬어질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막으려는 자들은 오늘도 자신의 통제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안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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