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출처는 확인할 수 없다. 1997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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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한 일상을 넘는, 삶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하여
마커스 보그의 《예수 새로 보기》(한국신학연구소, 1997)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탐구’라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논제에 대해 의아할 것이다. 실제로 교회나 수많은 책들은 대체로 예수님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이 호들갑스럽게 떠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질문의 학문사를 조금이라도 검토해 본 사람이라면,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여 전전긍긍하고 있는 학계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예수세미나’라는 저명한 예수연구 학회에서 125명의 북미의 대표적인 예수연구자들이 모여 5년간, 성서에 포함된 네 개의 복음서와 외경인 토마복음서에 나오는 1,500개 가량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실제로 예수님의 진정한 말씀이 어느 것인지를 토의하고 투표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를 네 가지 색으로 구분하여 표기한 책이 출간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다섯 복음서들》이라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 의하면, 단지 18%만이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었다.
이쯤 되면, 어떤 사람들은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지만 마커스 보그는 그런 우리를 안심시킨다. 그는 최근의 예수 연구의 분위기를 ‘예수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역사적 물음이 되살아났을 뿐더러,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연구물 가운데 가히 대작이라 할 만한 역저(力著)들도 속출하고 있는 학계의 동향을 표현한 말이다.
보그의 《예수 새로 보기》는 바로 이런 연구들의 성과를 충실히 반영하면서, 통념적으로 이해되던 그리스도교 교리적인 예수님의 이미지를 교정하고 있다. 예수님은 거룩의 영역(‘영’)과 사회역사적 영역(‘문화’)을 분리하려는 종교의 주창자가 아니라, 이 둘을 대화하게 하고 상호관련 되게 하는 신앙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네 가지 유형으로 묘사한다. 즉, 예수님은 전통적인 지혜를 뒤엎고 대안적 지혜를 가르치는 ‘현자’요, 자비를 실천하는 ‘카리스마적 치유자(성인)’며, 하느님나라의 자비의 정치를 선포하는 사회적 ‘예언자’이자, 그러한 대안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갱신운동(재활성화 운동)의 창시자’였다는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이 가운데 현자이자 갱신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예수상을 그리는 데 초점이 있다.
보그는 ‘영’과 ‘문화’, 즉 ‘거룩의 영역’과 ‘사회역사적 영역’을 상호관련시키는 실천을 ‘정치’라 부른다. 요컨대 예수님을 따르는(본받는) 신앙적 삶은 필연적으로 ‘신앙의 정치학’을 근간으로 하는 삶에서 추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의 신앙적 교훈은 바로 이 ‘신앙의 정치적 차원’을 망각해 왔다는 것이다. ‘신앙의 정치적 속성’을 망각했다는 것은 영과 문화, 이 두 영역의 이원성에 기초하여 영의 영역에만 과도하게 관심하는 ‘거룩의 정치’에 몰입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업적과 보상의 신앙 체계요, 그렇기에 그것은 배제의 정치요, 특권의 정치다. 그러나 역사상의 예수님은, 배제와 특권의 박탈과 업적/보상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전통적 지혜를 전복시킨다. 나아가 그 분은 온갖 배제된 자를 향한 자비의 정치의 토대를 세운다. 그리하여 안이한 일상을 넘는, 삶의 근본적인 변혁를 추구하는 신앙이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예수 새로 보기’는 바로 이런 예수의 이미지를 찾아내고, 그에 따른 자비의 삶 속에서 정치를 실천하는 것과 더불어 실현된다.
보그의 《예수 새로 보기》는 이러한 관점을 평이한 문체와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독자가 이 책을 읽는 데 특별한 전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들은 현대의 연구를 충분히 용해시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는 책임 있는 저자의 논변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저자는 이 책을 교회 신자뿐 아니라 자신의 삶의 가치를 형성하는 데 그리스도를 본받을 준비가 된 비교회인을 독자로 전제하며 저술하였다. 그렇기에 교리를 배우기보다는 건강한 신앙 자세를 질문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독자에게 친절한 평이한 문체를 번역이 결코 훼손시키지 않았다는 점은 이 책을 찾는 독자에겐 무엇보다도 큰 행운이다.
이 번역본을 읽으면서, 나는 목사로서 그리고 성서 연구자로서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할 기회가 있다면 그 중에 이 책을 후보의 물망에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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