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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추천의 글_ 성서에 던지는 물음표 - 문화비평적 성서 해석과 오늘

이제 당신이 해석하고 쓸 차례입니다




이 책을 추천하며

 


문화비평적 성서해석이라는 용어가 한국에서 사용된 선구적 사례는 김덕기 교수의 저서 복음서의 문화비평적 해석(2007)에서다. 북미에서 이 용어는 탈식민주의적 성서 연구에서 매우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김 교수는 이 책에서 바로 이 탈식민주의적 성서해석을 문화비평적 연구로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교차문화적 읽기(cross-cultural reading). 가령 요한복음 서론(1,1~17)을 윤동주, 김춘수 등의 시를 통해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사실 이런 방식의 성서 읽기는 우리 주위에서 종종 시도된 바 있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 그리고 실제 사건들 등이 성서 텍스트를 재해석하기 위해 교차읽기의 자료로 적극 활용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 대다수는 그 이론적 관점을 유념하지 않은 채 결과적으로 교차읽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니 문화비평적 성서해석은, 그 명칭과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실상은 그리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매력적인 성서 읽기는 많은 이들에게서 해석자의 자의적인 읽기의 산물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것은 결국 올바르지 못한 해석, 학문적 권위를 부여받을 수 없는 해석이라는 오명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비평적 성서해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그것이 현대 성서학계의 가장 최신 조류의 하나임을 소개한 김덕기 교수의 시도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책이 출간된 지 7년이 지나도록 그의 선례를 따르는 연구자도 거의 없고, 독자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 주된 이유는 한국 신학계의 폐쇄성과 보수성 탓이겠다. 또한 난해하기로 유명한 김 교수의 글이 해독되지 못한 것도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김영석 교수의 저서는 부제에 문화비평적 성서 해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하여 이 책은 김덕기 교수의 미완의 시도를 다시 재고(再考)하는 셈이다. 특히 김덕기의 그것보다 덜 이론적이고 덜 복잡하며 각 글들 하나하나의 길이도 현저히 짧아, 독자가 좀더 수월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저술된 책이라는 점에서 그의 시도는 선행저작의 반대중적 한계를 보완하고 있다. 하여 전문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독자가 이 책을 읽은 후 자기 나름의 문화비평적 읽기를 시도할 수 있을 만큼 대중에게 열린 책이다.


사실 문화비평적 성서 읽기라는 새로운 성서 해석 방법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해석자로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된 해석이라는 데 있다. 즉 여러 개의 고전어(히브리어, 아람어, 고대그리스어, 라틴어, 곱틱어 등등)를 습득하고 난해한 비평방법들에 대한 고도의 훈련 과정을 거친 연구자가 골방에 파묻혀서 오랜 시간 동안 연구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나오게 되는 전통적 성서 연구는 그야말로 극소수의 특권적 엘리트의 영역이다.


더욱이 이런 연구물을 독해하고 활용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목사는 대학원 이상의 신학교육을 받아야 하지만, 그이들 가운데 이런 전문적 성서 해석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이는 드물다. 심지어는 성서학 이외의 다른 분야의 신학자들조차도 해독하지 못하는 연구들도 비일비재하다. 그만큼 성서학은 매우 밀의적(密儀的, secret)인 학문이다.


한편 전통적 성서학은 다른 측면에서도 폐쇄성을 지닌다. 즉 그것은 전형적인 서양 백인 남성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전통적 성서학의 해석 방법인 역사비평학이 바로 그런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전통적인 역사비평학의 출발점은 성서 시대의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중해, 메소포타미아 등의 지역에서 발견된 방대한 텍스트들을 수집하고, 성서에 사용된 단어들을 이 문헌들에서의 용례를 따라 정리한 어휘사전들을 참조하는 데서 시작된다. 18세기 이후 유럽, 특히 독일에서 맹렬하게 일어난 문서고 운동(archive movement)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성서학에서 잘 나타나는데, 이들 성서 어휘 사전들은 현재까지 어느 분야의 학문도 이처럼 철저히 문서고 운동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그 이상이란 가장 객관적으로 문헌들을 분류 정리함으로써 하나뿐인 세계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지식의 체계를 갖추겠다는 데 있다.


하여 성서 해석자는 해독하려는 텍스트에서 사용된 단어 하나하나를 이 용례 사전들을 참조하면서 해독해내는 작업을 한다. 이것을 성서학계는 성서주석(聖書註釋)이라고 부른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역사비평학의 대표적인 서술 형식은 성서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해석자는 오직 하나뿐인 의미를 해독해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이미 일백년 전에 파산하였다. 그것은 문서고 운동이 추구했던 객관성이 결코 실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문서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문서들 간을 위치를 재배열함으로써 어휘들의 의미망이 만들어지는데, 그 하나하나에 해석자의 자의성과 편견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배열된 사료들 사이를 채워 넣는 것 또한 해석자의 자의적 혹은 편견적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객관성이란 불가능한 이상이라는 판결이 이미 일백년 이전에 확증된 것이다.


더욱이 최근에 오면 그 객관성을 주장한 해석의 체계에는 서양의 백인, 남성의 편견이 불가분 얽혀 있다는 문제가 지적되었다. 그런 편견들이 마치 객관적 진리인양 가정된 상태에서 성서 단어들의 용례 사전이 거의 2백년 이상 축적된 지식의 산물로 만들어졌다면, 도대체 누가 그러한 서양 백인 남성의 시선을 반전시킬 지식을 발견하고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인가. 결국 서양 백인 남성 중심의 기존의 학문 체계가 설정한 해석 가능한 범주를 뛰어넘는 새로운 해석의 성과물을 내놓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


한데 문화비평적 연구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룩한 이들은 여성신학자들과 성소수자 신학자들, 그리고 유색인 신학자들이다. 왜냐면 문화비평적 성서해석에서 고전어 해독 능력이나 기존의 비평학적 전문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해석자 자신이 속한 사회와 문화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며, 이들이 자신의 위치에 대해 가장 철저히 유념하면서 성서를 읽으려 했던 주역들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문화비평적 성서 해석은 해석자 자신이 서 있는 삶의 자리를 깊이 생각하고 그 문화적 사유의 기반 위에서 성서를 읽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문화비평적 성서 읽기를 가장 잘 할 수 있는이는 성서학자가 아닐 수 있다. 그보다는 자기의 사회문화적 세계를 깊이 생각하면서 성서를 읽는 이들이 더 훌륭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나아가 그런 이가 굳이 학자여야 할 이유도 없다. 아니 어쩌면 학자들이 더 나은해석자가 되기란 여간해선 쉽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왜냐면 학자들은 세상을 경험으로 보기보다는 책을 통해서 알고자 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문화비평적 성서 읽기의 결과물은 난해하고 복잡한 고전어 해독 능력과 비평이론의 습득 능력이 도처에서 드러나는 난해하고 긴 글이 아니라 투박하더라도 진지한 경험에 대한 숙고와 성찰을 담은 간명한 글인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문화비평적 성서 읽기는 특권적 엘리트로부터 대중에게로, 전문 연구자의 골방에서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성서를 돌려주는 해석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의 간명함은 문화비평적 성서 읽기의 가장 중요한 효과, 곧 성서를 대중에게 돌려주는 데 있어 더 없이 유용하다.

다소 반복되지만 좀 다른 뉘앙스의 이야기를 더 하자면, 이러한 해석 방법은 성서에 대한 이해의 전환을 기저에 깔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성서는 유일무이한 의미의 책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유일무의한 의미의 책이라는 전제를 한마디로 줄이면 성서는 정전(Canon)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정전은 해석에 반대한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곧 성서는 해석되는 책이 아니라 이미 의미가 완료된 책이며, 독서자가 그 완료된 의미에 얼마나 다가가느냐의 문제가 바로 성서의 해석 과정이라는 얘기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흔히 성서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은 그런 생각은 불가능하다. 왜냐면 우리가 성서를 접하기 위해서는 한글로 번역되어야 했고, 또 번역될 때마다 기존의 것이 거듭 수정되어 왔다. 번역과 재번역은 그 자체가 이미 해석 과정이다. 게다가 매주 수행되는 예배의 설교 또한 해석이 수반된 행위다. QT(Quiet Time)라는 이름으로 매일 매일 시도되는 성서의 묵독 행위도 당연히 자기만의 해석이다. 간증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전도하는 사람들도 각자 자기가 이해한 성서 구절을 언급하는데 그것 역시 해석이다. 이렇게 성서는 무수히 해석됨으로써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고 대화에 관여한다. 결과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텍스트는 죽은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교회 권력은 성서에 대한 해석을 금지해 왔다. 하여 기독교 신자들은 끊임없이 성서에 대한 해석과 재해석을 통해 성서를 자신의 삶과 연관시켜 왔음에도 성서는 해석될 수 없다는 불가능한 생각을 되뇌며 살고 있다.


실은 학자들도 해석 불가능성의 늪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근대 학문으로 성서학이 등장한 18세기 이래 거의 한 세기가 될 때까지 성서학계는 성서의 유일무이한 의미에 도달하고자 안간힘을 다해 왔다. 성서가 과거의 문서이니만큼 이러한 유일무이한 의미에 도달하기 위한 해석 방법은 역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앞서 말한 역사비평학이 바로 그런 해석의 학문적 방법론적 틀이다. 곧 역사비평학은 본래 유일무이한 원래의 의미를 찾아내려는 성서 해석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면 이러한 역사비평학은 몰락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유일무의한 해석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널리 확인된 결과다. 그로부터 다시 한 세기가 흐르는 동안 무수한 비평학적 시도들이 있었다. 크게 보면 두 가지 경로로 전개되어 왔는데, 역사비평학의 고전적 전제였던 유일무이한 의미의 해독이라는 것을 폐기하고 다양한 해석들과 재해석의 과정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개정된역사비평학을 발전시켜 왔던 경로가 하나라면, 역사를 회피한 채 텍스트 자체를 주목했던 이른바 문학적 비평학으로의 경로가 다른 하나다. 한데 이 두 경로로 전개되어 온 성서 해석학은 점차 해석의 다양성에 열리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특권적 권위를 갖는 역사가로부터 다양한 주체에게로 성서를 개방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최근에 시도되고 있는 문화비평적 성서 읽기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 다양성과 해석 주체의 다양성으로의 경향을 대표하는 하나의 이름이 왜 문화비평이 되었을까? 그것은 학문의 전개 과정에서 문화연구라는 명칭이 이러한 문제제기를 강하게 주장하면서 대두하였기 때문이다. 문화비평의 중요한 의제는 대문자 문화(Culture)를 해체하는 데 있었다. 곧 고급문화로 대변되는 사회를 넘어서 사회를 사람들의 일상적 경험세계의 맥락에서 보자는 것이 바로 문화연구의 대전제였던 것이다. 가령 고대사회에서 문자로 된 세계는 극소수의 사람들의 세계, 그것도 그이들의 삶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것으로 그 시대의 세계를 재현해왔던 역사학에 대해서 문화비평적 역사학은 문자 밖의 세계를 읽어내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문자적, 비문자적 비교자료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렇게 수집된 사료들을 배열하고 그 사료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이야기로 채워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영웅담을 만들거나 비극적 이야기를 만들거나 낭만적 이야기를 만들거나 하는 기조가 덧입혀지는 것, 이러한 과정을 바로 문화비평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화비평적 역사 해석자는 역사적 상상력의 소유자라는 데 있다. 그의 상상력을 통해서 사료들이 배열되고 의미망이 만들어지고 기조가 덧씌워지는 것이다. 이때 역사적 상상력은 해석자 자신이 속한 문화적 기억의 망 안에서 수행된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하여 이러한 해석은 유일무이한 것일 수 없고, 끊임없이 역사 해석자의 문화적 세계 속에서 재해석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문화비평적 해석은 텍스트의 유일무이성의 해체와 해석의 독점체제의 해체를 주장하면서 발전한 비평학적 문제틀이며, 거기에는 과거와 현재라는 마치 이분화된 시간적 분류체계까지도 해체되어 현재 속의 과거, 과거 속의 현재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수행되는 재해석의 비평학적 장치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틀로 성서를 해석한 것, 그것이 바로 문화비평적 성서 읽기다.


이제 독자들은 성서 해석을 수용하기만 하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다. 독자는 동시에 해석자이고, 나아가 성서를 새롭게 쓰는 성서 집필자이기도 하다. 그런 문제의식을 담은 것이 바로 문화비평적 성서해석이다. 그런 점에서 김영석 교수의 책은 이 성서 읽기 방법 속에 독자가 해석자-저자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안내서로 안성맞춤이다. 하여 나는 이 책을 혼자 읽기보다는 함께 읽는 소모임 속에서 읽기를 권한다. 모임 속에서 책을 읽고 내용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들의 새로운 문화비평적 읽기를 시도하고, 나아가 새로운 성서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일을 함께 수행하는 계기를 이 책에서 발견했으면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