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제3시대] 13호(2009.08.24)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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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대화를 원한다, 교회가 말을 닫은 시대에도
‘쌍룡차 사태 이후’, 교회에게 묻는다
쌍용차의 노동쟁의가 끝났다. 국내 완성차 회사 중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사업장인데다 오랫동안 쟁의가 없던 탓에 역전의 용사들이 포진하고 있지 않았음에도 완성차 회사의 쟁의는 그 파장이 엄청났다. 쟁의 기간도 길었고, 그로 인한 사회적 손실액도 천문학적이다. 상당히 과장된 계산이겠지만, 경총의 추산대로라면 직접적 손실 외에도, 인명피해, 기억 브랜드 가치, 국가 이미지 등 전체 손실액은 1조 원을 넘는다고 한다(<조선일보> 2009.7.22).
또한 쌍용차가 부도처리 될 경우 수많은 하청기업들의 연쇄부도가 줄줄이 이어질 것이고 이로 인한 일자리 감소는 수십만 개에 달할 것이다. 우리사회의 열악한 사회안전망이 실직한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얼마나 가혹한지는 더 말할 여지없다. 실직은 곧 빈곤층으로의 추락으로 이어지는 수순의 첫 번째 단계다. 1 특히 하청기업으로 내려갈수록 그러한 경로는 매우 높은 비율로 실현된다. 하여 이 파업농성은 전 사회적으로 초미의 관심거리였다.
아마도 대다수 사람들은 노사 간 대타협을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쟁의 노동자들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사측 법정대리인은 은행으로부터 기업회생을 위한 자금을 얻어오기 위한 조건으로 고용조정의 칼날을 빼들었고, 결과적으로 이 안은 거의 그대로 실현되었다. 정리해고자를 최대한 줄이고 일자리 나누기와 무급휴직을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한 노조의 타협안은 적어도 인건비 계산에 관한 한 정리해고와 큰 차이가 없는 현실성 있는 대안이었다. 2
그러나 IMF 경제위기 이후 대립적인 노사관계의 반복 속에서 서로를 퇴행적으로 학습시킨 결과, 상대방에 대한 ‘신뢰부재의 덫’ 3에 빠져버린 노사 양측은 스스로 대타협의 가능성을 잠식했고, 거의 자학이라고 할 만큼 극한 갈등 끝에 서로에게 극심한 피해를 입힌 채 쟁의를 마무리했다.
아마도 노조를 믿을 수 없었던 사측의 법정대리인은 애초부터 타협이란 불가능하다는 ‘선험적 자의식’에 지배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법정대리인들이 협상 불가의 고용조정안을 처음부터 제시한 이유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노조의 협상안이 금액상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법정대리인들은 계산상으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다만 완전히 해고되지 않은 노동자들이 존재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이 투자자를 압박할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만큼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법정대리인과 투자자 사이에 있을 법한 심리적 부담감에 관한 공감대 이면에는 노조에 대한 불신이 전제되어 있다. 쌍용차가 쟁의 경험이 일천한 노조였다는 점은, 일단 쟁의가 벌어지면 역전의 명수들이 즐비한 금속노조와 협의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현 정부가 이런 상황에서 강경한 비타협적 입장을 취할 것임도 예측 가능한 일이다. 만약 그리하여 노 대 사・정의 강경대치가 벌어지면, 사태는 사소한 추가비용 정도를 제시한 노측의 협상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손실을 초래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화되었다.
정부 관료, 사측 대리인, 그리고 보수 언론 등이 모두 이견 없는 합의를 보인 사실의 하나는 이 사태로 인한 손실이 단지 재산상의 문제를 넘어서 기업과 국가의 신뢰에 커다란 문제를 야기했다는 점이다. 한데 이러한 치명적 결과가 예측 못할 사안이 아니었음에도 도대체 왜 사측 법정대리인들은 불과 72억 원의 협상안을 거부하였는가?
강경 충돌로 인한 커다란 손실을 막을 수 있고, 기업과 국가의 신뢰 추락을 예방할 수 있으며, 또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노사 대타협의 선례로서 기업 이미지 상승효과도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투자자를 설득하는 것은 왜 고려의 대상일 수 없는가.
이 사실을 이해하게 하는 유일한 단서는 사측 대리인들은 노조 자체를 근원적으로 신뢰하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또한 그들이 보기에 투자자 또한 자신들의 설득보다는 노조에 대한 불신이 더 크다는 점, 그리고 현 정부는 그러한 상황에서 결코 중재자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이러한 불신의 이유였겠다.
완벽한 불신이다. 쌍용차가 오랫동안 별다른 쟁의 없이 노사 협력의 전통을 쌓아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려의 대상일 수 없다. 왜냐면 그들의 배후에는 강경 산별노조인 금속노조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사측 법정대리인들은 투자자나 한국 정부는 ‘노조 없는 사회’를 위해 일관되게 모든 상황을 해석하고 행동한다는 확고한 판단에 따라 쌍용차 회생안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두 명의 공동대리인의 한 사람의 이력을 단순화시켜 상상하면 그러한 확신이 설명될 수 있을까. 자신이 근무했던 현대차 노조로, 경험 많고 강성인 노조로 오버랩시키면서 사태에 임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회적 대타협의 기억은 부재하고, 극한 대립 속에 노조 측에 적지 아니 끌려 다녀야 했던 현대자동차에서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단호하게 고용조정만이 대안이라는 생각에 지배당하게 했는지도 .........
물론 무모한 상상이다. 그렇게 상상하려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무모한 상상이 담고 있는 의미의 개연성은, 사측과 투자자, 그리고 정부는 현재의 상황을, 충분한 자료를 검토하고 다양한 가능성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냉정하게 분석한 결과에 따라 대안을 세운다기보다는 자기들의 선험적 판단에 좌우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론을 열어 놓는다는 데 있다.
문제는 이러한 선입견이 혹은 범주적 판단이 수십만 명의 사람들에게 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할 심각한 위험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말했듯이, 빈곤에 관한 최근의 많은 연구들은, 빈곤으로 추락하는 경로의 가장 결정적인 출발선이 실직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빈곤 상황은 탈출이 거의 불가능한 현실로 사람들을 몰아간다. 이러한 탈출 불가의 절망적 현실은 빈곤으로 추락한 적지 않은 이들이 단지 경제적으로만 추락하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추락하여 비정상적인 의존성이 심화되고 자기 통제력을 상실하는 상황으로 몰아간다. 하여 오늘의 빈곤 현실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빈곤의 문화’를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사회가 심각한 병리적 문제를 안게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오늘의 기업 구조조정은 그것을 통한 직접적인 사회적 손실도 막대하지만, 나아가 빈곤의 문화가 낳은 무수한 사회적 병리성의 주된 원인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 통합의 위기를 야기하고, 수많은 범죄를 유발하게 한다.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더욱 천문학적으로 커질 것이다. 하지만 이 비용들이 갖는 치유 효과는 거의 없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것은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고통이 가중된 사회 속에 살게 된다는 데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정리해고를 최소화하면서 창조적인 기업회생 대책을 마련할 경험도 경륜도 없는 한국의 경영자들은 대개 이렇게 기업 구조조정에 임한다. 민주화 이후 본격화된 노동쟁의들은 아직까지 사회적 대타협의 선례를 거의 남기지 못했다.
지난 1998년 현대자동차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어난 대규모 쟁의는, 아마도 정부가 비교적 적극적이고 중립적인 중개자 역할을 담당한 거의 첫 번째 사례가 아닐까 한다. 그 이전까지 권위주의 정부는 기업이나 노동자 측의 행위 자율성을 극도로 억제했기에, 한국의 민주화는 비로소 자율성을 획득한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화와 타협을 위한 게임을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최초의 민주정부라고 할 수 있는 ‘국민의 정부’가 노사대타협을 위한 첫 번째 중개자가 될 수 있었다. 1998년 현대자동차 쟁의가 그 시금석이 되는 사건이었다.
1만여 명을 고용조정하고, 그중 8천여 명을 정리해고 하겠다는 사측의 애초의 계획은 타협에 타협을 거듭한 끝에 277명만을 정리해고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대신 8천여 명이 희망퇴직자 신청을 했고, 1천2백여 명이 무급휴직을 하게 됨으로써 사측이 계획한 1만여 명의 구조조정은 마무리될 수 있었다. 문제의 소지는 없지 않았지만, 정부가 자화자찬한대로 그런대로 노사간 대타협의 선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역사는 그것이 선례일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밥 아줌마’들, 중년의 여성노동자를 비정규직화함으로써 타협안이 마련된 이 ‘선례’는 노사 양측에 대단히 ‘부정적인 타협의 선례’로 작용한 것이다. 즉 비정규직을 확대하고, 정규직과의 차별을 심화하는 방식의 타협이 민주화 이후 일상화된 것이다. 기업 경영자들과 노조 간의 쟁의는 완력에 의존하는 게임으로 점철되었고, 거의 모든 사업장에서 공공적 가치는 타협의 조건으로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가운데 힘이 약한 이들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경우에 이러한 일부의 비정규직화는 노사간 협의의 결과였다.
결국 한국에서 민주화의 실험은,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성과도 많지만, 적어도 노동과 자본의 사회적 공공성을 현저히 후퇴하게 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자본이 천박성을 띤 것처럼 노동도 그러했다. 시민사회 전반이 시장의 가치에 과도하게 동화되었을 아니라, 타인을 동료로서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이해를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현저히 확대되었다. 곧 한국의 시민사회 형성 과정은 ‘타인의 몰락’이라는 특징을 갖는다는 것이다. 비정규직의 급속한 확대와 그로 인한 노동시장의 분절화는 기업과 정부의 공공적 성격을 상실한 이윤추구 행위에 크게 의존하고 있지만, 동시에 공공적 성격이 후퇴한 시민사회의 ‘타인의 몰락 현상’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한편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적 열망이 식어 버린 시점에서 등장한 MB정부는 지난 민주정부들이 나름 노력했던 노사간 타협의 중재자로서의 역할,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지만 나름 기업에 대해 일정한 견제의 역할을 했던 중립적 중개자로서의 이상마저도 포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정부는 기업만큼이나 완고하게 노조를 위험시하는 시각을 대변하는 듯이 보인다. <한겨레신문>과 인터뷰한 정부의 한 고위관료는 “무급휴직자는 노조원 신분을 유지하게 되는데, 강경파들이 계속 결정권을 가지면 새 주인을 찾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한겨레신문> 2009.7.30). 한상균 쌍용차 노조지부장은 “본관에 상주하는 정부 관계자들이 사쪽의 협상을 조종”했다며 “정부가 결국 칼날을 쥐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레프트21> 2009.8.19). 이것이 얼마나 사실을 반영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정부는 이 사태의 중계자 역할보다는 노조의 저항을 더욱 강경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아무튼 MB정부에게 노사간의 사회적 협상이란 경쟁능력의 효율성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방식으로만 구성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번 쌍용차 사태에서도 보았듯이, 노사간 극한 대립은 사회적 손실액을 천문학적으로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니 인적 고용조정이 효율성을 높인다는 기계적인 효율성 신화는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부가 보인 완고한 반노동적 태도는 ‘고용 유연화’라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권리 행사에 방해가 되는 일체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사회적 효율을 높인다는 믿음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사회 안전망은 대단히 빈약하다. 통계청이 지난 8월 12일에 발표한 7월 고용동향은 지난해 같은 시기보다 일자리가 무려 7만6천 개가 줄었다고 한다. 또한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대단히 불안정한 노동 상황이 심화되어, 이른바 ‘근로빈곤층’(working poor)이 점점 폭넓게 형성되는 추세다. 하여 분절화된 노동시장에서 하위로 추락한 제2차 노동시장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비정규노동자 가운데, 더 불안정하고 더 열악한 이른바 빈곤노동시장이 분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빈곤노동시장으로 떨어진 노동자들은 급속도로 노동의욕을 상실하고 있고, 나아가 정신까지도 무능력화되는 경향이 엿보인다. 중간층은 점점 엷어지고, 빈곤층, 특히 무능력화된 빈곤층의 비중이 점점 커지는 현상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MB정부의 사회적 효율에 대한 신념은 급속도로 악화되는 빈곤 현상을 더욱 왜곡시킬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효율성 담론은 빈곤층의 무능력화를 확대시킬 뿐 아니라, 사회적 무능력자들의 존재의 자리를 잠식할 우려가 있다. 무능력자들은 일터를 빼앗기고 삶터를 빼앗기며, 법적 행위자격과 능력을 빼앗긴다. 이른바 MB정부의 신자유주의적 효율성 주의는 무능력자들의 ‘사회적 죽음’을 야기하고 있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한국교회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사회적 죽음이 난무하고 있는 사회에서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절망에 휩싸인 온 피조물에게 구원을 선사하기 위해 예수가 왔다고 고백하는 바울의 후계자들인 교회는 이 죽임의 현장에서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한국의 과대성장한 교회들에 의해 추동되는 신앙이 계층 편향적 성공주의를 점점 강화시켜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권위주의 정부에서 민주정부로, 그리고 최근 MB 정부로 이어지는 한국의 국가주의가 자본적 효율성과 친화적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실패한 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지나치게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과 병행된다. 즉 한국의 신앙 담론과 한국의 국가주의는 서로 등가적이며, 나아가 서로 상보적인 경향이 있다. 특히 최근 신자유주의적 효율성주의가 확산되면서 사회적 무능력자에 대한 야만적 배타성이 교회와 사회에서 더욱 일상화된 가치로 실현되고 있다.
한국의 교회는 성장 과정에서 세속적 성공과 신앙적 성공 간을 일체화하는 신학을 발전시켜 왔다. 그것이 이른바 교회성장신학이다. 특히 최근 교회들의 이러한 성장신학 속에는 실패자를 위한 신앙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과거에는 기도원 같은, (세속적이든 신앙적이든) 실패한 자들이 후퇴할 공간이 신앙제도 속에 내재해 있었다. 그리하여 실패자의 자기 치유의 공간이 존재했다. 한데 최근의 교회에는 신앙적, 세속적 주체로의 재활성화 자리가 없다. 오히려 기도원 담론은 실패자의 회생 공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수용소처럼 존재한다. 요컨대 무능력자들, 일터를 빼앗기고 삶터를 빼앗기고 법적 능력을 빼앗긴 자들은 교회에서 영혼까지 유린된다. 교회는 오늘, 고통의 치유자로서 대상을 선별하며, 그 선별된 대상은 치유의 비용을 지불할 사회적 능력을 갖춘 이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신앙은 점점 더 고비용의 재화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런 교회에 그리스도는 존재하는가. 고통의 계층적 편차가 점점 더 심화되는 상황에서, 상향적 계층 편향성을 띠는 교회의 신앙은 그리스도적인가. 나는 우리시대에 그리스도인이란, 대화와 타협의 정신을, 기업과 노조는 물론이고 정부까지도 잃어버린 그 협상의 영을 간직한 존재로서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에 의하면, 신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일 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모든 피조물 사이의 중개자인 예수의 영을 자신의 몸에 부은 존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예수가 승천한 이후 영을 받은 이들은 타인의 말로, 곧 타인의 삶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로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신은 독백하는 이가 아니라, 대화하는 존재이다. 하여 대화를 일으키는 중개자, 자기주장을 하기에 앞서 타인의 생각을 듣고 헤아리는 존재, 바로 이것이 중계자로서의 신앙적 자의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실패한 노사간 대타협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하는 것, 그것 또한 진정한 교회의 과제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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